한울마음과 성품을 다시 찾는 것이 시천주 조동원 당호(隱誠堂, 은성당) 춘천교구
평안북도 구성군 이현면 진도동 출생 1925년 6월 16일 생 (음) 가리산 수도원원장
후학들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싶은 것은, 생각을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로 해야 마음이 바로 갑니다. 마음이 바로 가야 기운이 바로 갑니다. 기운이 바로 가야 혈이 바로 갑니다. 생각을 잘못해서 마음이 탈선이 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좋은 운수를 받지 못합니다. 마음을 잘 써야 해요. 혈이 바로 가야 한울 자리에 갈 수가 있습니다.
나는 포덕 66년(1925년) 평안북도 구성군 이현면 진도동 참새 골이라는 동네에서, 아버지 조만경, 어머니 김경채 사이에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고향은 첩첩이 깊은 산중이라, 오십 리 밖에 초등학교가 있었어요. 그래서 학교를 다니지를 못해 나는 이름자도 쓸 줄 모르고 길쌈하는 것, 바느질하는 것 등 일만 배우면서 어느덧 18세가 됐습니다.
일본이 망해갈 무렵에 처녀를 공출하라는 법령이 내려왔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내가 공출대상에 들었습니다. 결혼을 시키면 면제가 된다고 해서, 좋다 나쁘다 가릴 것 없이 저보다 16살이나 많고 천도교를 하는 김동화라는 노총각과 얼굴 한번 못 보고 결혼했습니다.
당시 우리 친정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천도교 신앙을 하는 사람하고 결혼을 했으니 이젠 시집 식구와 같이 행동을 안 할 수 없었죠. 시집에는 저녁 9시만 되면 물을 떠다 놓고 기도를 하더라고요. 그때마다 큰 동서는 “새 동서 이리와요” 하며 나를 불렀어요.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기도식에 참여했어요. 그러니 제 마음에 와 닿지 않아서 나는 속으로 제 남편을 예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식구들은 내가 열심히 주문을 외우는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런 식으로 21일을 했습니다.
21일째 되는 날 기도식을 끝내고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펴려고 하는데 남편이 신앙에 대해 토론을 좀 하자고 하시는 거예요. 남편이 말하기를 “여보, 신앙은 자기가 하고 싶은 신앙을 해야 합니다. 억지로 시집 식구 따라서 한다면 복을 받지 못한다오. 나는 천도교 진리와 이치는 알아도 예수에 대한 것은 잘 모르니 당신에게 묻겠소. 예수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해요. 내가 “천당 가는 것이 목적이지요 ” 하자, 남편이 다시 묻기를 “그러면 20년이나 믿었으니 그 동안 몇 사람이 천당을 가고 몇 사람이 지옥을 간 것을 아십니까?” 하는 거예요. 그 말에 내가 “죽어서 살아온 사람이 있어야 몇 사람이 천당 가고 몇 사람이 지옥 간 것을 알지요. 죽어서 살아온 사람이 없으니 알 수 없지요” 했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깜짝 놀라면서 “그러면 천당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 않소” 하는 겁니다. 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고 머리만 푹 숙이고 가만히 있었어요.
남편이 제 등을 툭툭 두드리면서 “믿는 목적이 확고해야지요. 목적이 확고하지 못하면 헛 믿는 게 아니요. 예수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아직 청춘인데 천당이 있는지 없는지 확고하지 못한 곳에, 또 언제 죽을지도 알지 못하면서나 죽으면 천당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이 너무 허무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 천도교는 현실입니다. 내가 내 맘과 성품을 바르게 하고, 내 도리를 잘 지키고, 부화부순 잘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타인에게 대인접물 잘해, 이 세상을 지상천국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천도교의 목적입니다. 현실에서 실천을 잘 하다보면 남편에게 극진한 사랑 받고, 부모님께 큰 사랑 받고, 또 타인에게 존경을 받게 되니, 내 맘이 항상 즐겁고 기쁘게 됩니다. 이렇게 내 맘이 기쁜 것이 천당이요, 내 맘이 괴롭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 지옥입니다. 현실의 생활 속에서 잘하고 바르게 살면서 남에게 덕을 많이 베풀면서 살다가 내 수명이 다 끝나게 되면 우리는 이곳은 떠나게 되지요.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고 성령은 한울님 세상으로 갑니다. 맘 바르게 하고 착하게 살면서 욕심을 버리고 남에게 덕 되는 일만 하게 되면, 가는 곳마다 칭찬받고 존경 받고 빛이 날 것입니다. 이것이 천당 생활입니다”라고 말씀을 하더라고요. 이 좋은 말씀을 듣고 그 다음날 아침 큰 동서보고 “저도 천도교 믿겠습니다” 말씀드렸죠. 바로 그날 떡도 하고 음식을 잘 해놓고, 동네 분들을 모시고 입교식을 했습니다.
남편 말씀대로 몸과 마음으로 정성 공경 다 바쳐 실천의 도를 해 마음의 천당을 찾았습니다. 나에게는 정말 화가 복이 됐습니다. 처음에는 일본 사람을 많이 욕했죠. 내가 공출대상에 들었기 때문에 급하게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서 천도교 집으로 시집갔으니까요.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예수 믿는 집으로 시집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결과적으로 일본 때문에 천도교를 할 수 있어서 화가 큰 복이 됐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한 즐거움 속에서 3, 4년이 흐르자, 북은 공산당 세력이 되면서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고통을 줘 월남하게 됐습니다. 남편은 몇 달 전에 먼저 월남했고 큰동서가 날더러 이웃 친지들 가는데 따라가라고 했어요. “우리는 이곳에서 살다가 다 죽더라도 동서 내외는 살아야 한다”고 하시며 안내자를 사서 내세워 보내니 할 수 없이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작별을 한 것입니다.
원산까지는 잘 왔습니다. 원산에서 오십 리 거리를 가서 큰 산을 넘어야 남한 땅입니다. 저녁 밤 11시에 삼팔선을 넘어야 하니 여인숙에서 밤 8시에 출발 한다고 안내자가 알려줬어요. 그렇게 알고 부지런히 가는 길에, 집이 세 채가 있더군요. 가만 가만 조심해서 가는데, 개가 짖는 바람에 길가에서 지키는 사람이 모여 있다가 뛰어나오는 거야요. 저의 일행들은 모조리 부리나케 도망치고 인민군이 뒤를 쫓아오기 시작하는데, 나는 당시 임신 5개월이었기 때문에 뛰지도 못 했어요. 그렇게 서 있다가 보니, 길옆에 크고 멋있게 생긴 통솔나무가 하나 있더라고요. 얼른 그 통솔나무 밑에 쏙 들어가 통솔나무를 끌어안고 엎드려서 주문만 외웠지요. 한 두 시간 정도 지나니까, 조용해서 가만히 머리를 들고 이리 저리 쳐다보니, 고요한 밤인데 인적이 없어요. 소리 안 나게 가만 가만 동네를 지나 왔습니다.
산 입구에 당도하니, 이젠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한울님께 심고 드리면서 정신없이 산 고개를 올라가는데, 산에서 ‘시’ 하는 소리가 나더군요. 그래서 ‘천’이라 대답했죠. 우리 일행 암호입니다. 한 분 두 분 만나서 같이 고개를 돌아 나서니까 깜깜한 밤인데 내려갈 곳이 보이더군요. 쳐다보니 정말 기가 막혀요. 사람들이 삼팔선을 얼마나 많이 내려갔는지, 풀 한포기도 없고 반질반질한 것이 얼음판이야요. 산 위에서 다리 쭉 뻗고 탁 앉으니까 그대로 미끄러져 개울 바닥에 떨어지는 겁니다. 어디서 “이젠 여기서부터 이남 땅 입니다” 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있다가 겨우 일어나 보리밥 한술 먹고 동두천 수용소로 출발했습니다.
수용소에 도착하니 큰 지옥입니다. 하나하나 문초를 하는데, 어물어물하다가는 죽싸게(죽도록) 두드려 맞고 왜 왔느냐고 하면서 호통 치는 거야요. 모두 줄을 서서 들어가는데 제 차례가 왔습니다. 들어가자 엎드려서 큰 절을 했습니다. “배도 부르고 힘드실 텐데 왜 넘어 왔소?”하고 묻는 거야요. “예, 남편이 3개월 전에 넘어 왔습니다” 하니까 “왜 왔지요” 하고 또 물어요. “너무 살기가 괴로워서지요” “잘 알았습니다. 21호 수용소로 들어가십시오” 피난민도 많지 않고 깨끗한 수용소로 보내주어서 3일간 잘 쉬고 밥은 보리밥에 통조림 반찬주고 대접을 잘 해주더라고요. ‘딴 피난민들은 고생을 너무 많이 하는데 어떤 이유로 저 사람들이 남보다 더 잘해줄까? 이것 역시 한울님 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더 열심히 주문을 외웠지요.
3일 동안 수용소에서 묵고 4일 째 되는 날, 저녁 8시쯤에 큰 차를 대 놓고 다 타라고 해요. 제 생각에는 ‘어디 갖다놓고 다 죽이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피난민들이 쏟아져 나와 함께 차를 탔습니다. 전기불이 꽃밭같이 보이는 데로 차가 달렸습니다. 시골 산중에서 등잔불 켜고 살던 내가 전기불이 번쩍번쩍한 곳을 처음 보아 신기하기도 했지만, ‘부모형제 다 버리고 혼자서 동서남북도 알 수 없는 이곳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눈물이 터져 나오더군요.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슬픔을 소리 나지 않게 우는 이내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흐르는 눈물 속에서 염주만 손에 들고 그저 ‘한울님! 한울님!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며 정신없이 울고만 있는데 차가 정지하더군요. “다 왔습니다. 내리시오” 하니 그 많은 피난민들이 막 쏟아져 나왔습니다. 시골 산중에서 살던 나를 낯선 서울 바닥에다 쏟아버리고 차는 떠나갔습니다. 내가 어디에 왔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르는 채, 환한 전기불이 눈이 부셔 볼 수도 없고 가슴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삼팔선이 막히기 전에 서울에 계신 외숙부님이 오셨다 가시면서 “서울에 구경 오라” “서울에 와서 용산을 찾아라. 용산에 와서 한성병원 김정채를 찾으면 원장이 내 친구다. 데려다 줄 것이다” 하시면서 주소를 써 주신 것이 생각났습니다. 사방을 빙글빙글 돌아보아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요. 하여튼 서울 사람한테 물어 보자는 생각에 식당에 들어가 주인을 보고. “말씀 좀 묻겠습네다? 예, 여기가 어디 입네까? 나는 월남을 했는데, 수용소에서 여기다 부려주고 갔습네다. 용산 한성병원을 찾습네다” 하니까 “한성병원 저거 아닙니까. 길 건너 큰 병원 있지 않소” 그래서 보니까, 눈앞에 한성병원이 보이더군요.
바로 병원에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서 병원을 쳐다보면서 ‘아, 한울님께서 어찌 내가 찾는 곳, 그 앞에 내려 주실까? 매번 죽을 곳에서 살려주시고, 삼팔선을 무사히 넘겨주시고, 매번 이렇게 도와주시는데, 우암장님 말씀대로 한울님은 부모와 같고 스승님과 같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열심히 주문만 하면, 한울님 품안에서 살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자 입에서는 시천주 소리가 절로 나오고, 한울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굳히게 됐습니다. 마냥 흐르는 눈물을 닦고 한성병원에 들어갔습니다. 원장님께서 혼자 계시더군요. “말씀 좀 묻겠습네다” “예. 말하시오” “혹 김덩채 씨를 아십네까?” “김덩채? 나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요. 죄송합니다” 하고 나오니 내 신세가 한심하기 짝이 없는 거야. 한참 걸어 나오면서 ‘한울님! 한울님!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이젠 어찌 해야 합니까?’ 하는데 제 뒤에서 “아주머니” 하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까 웬 학생이 나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리 오세요!” 해 다시 병원에 들어갔습니다. “나를 부르셨습니까?” “예. 이리 오세요. 김덩채가 아니고 김 정채가 아닙니까?” “예 내가 지금 월남을 했습네다. 니북에서는 김덩채라고 합네다” 안으로 사람을 부르더니 “이 아주머니 김정채 아저씨 집에 모셔다 드려라” 하시니까 원장님 아들인 듯한 분이 나와서 “갑시다” 하기에 따라 갔습니다. 어느 집 벨을 누르니까, 저의 외숙모가 나오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한울님 감응으로 큰 고생을 하지 않고 월남을 잘 했죠. 첩첩 산골에서 내려온 나를 내가 쉽게 잘 찾을 수 있도록 목적지 그 앞에다 피난민을 쏟아 버리고 차는 떠나갔지요! 그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잘못하고 지나갔습니다만. 한울님을 굳건히 믿고 정성 공경을 다 하니까요. 스승님 말씀대로 ‘한울님은 친함이 없는데 극진히 공경하면 친하게 되는 것이니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인 것입니다.
외숙부집에서 5일을 쉬고 남편 계시는 춘천을 찾아갔어요. 춘천 경찰서 용도주임 김국태 씨가 시집 장조카가 되는데 우리 남편이 조카 집에 와 계셨어요. 춘천역에 내려서 경찰서를 찾아서 물으려고 하는데 제 장조카가 나오더니 “아이고, 작은 어머님 아니십니까?” 하며 꽉 붙잡고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이 또한 한울님 감응으로, 고생하지 않고 잘 만났고 장조카가 차로 집에 데려다줘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반가운 것 보다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남편 손을 붙잡고 “여보 부모형제 다 버리고 우리 둘이 살아서 무엇 하겠다는 거요” 하니까 “맞았어! 우리가 왜 왔을꼬. 우리 때문에 부모 형제들은 큰 고통을 받을 것인데…” 남편이 목을 놓고 큰 울음을 치다가, 그치면서 “이젠 할 수 없지요. 도로 가지도 못하고, 한울님께 정성이나 드려 봅시다. 한울님 조화로 당신을 무사히 데려다 주셨는데, 한울님 감응이 또 있을 것입니다. 눈물을 거두고 정성, 공경 다 바치면서 노력하며 살 생각을 합시다”라고 하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노력하자고 했어요. 하지만 원체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없었지요.
우리는 이북에서 부자라고 숙청을 당해 살길이 없어서 월남했습니다. 그때 그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하겠습니까. 우리 내외는 정말 시천주가 없었다면 지금 살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시천주로 살다보니까 나는 한울님과 친함이 됐습니다. 맘을 잡고 살아 보려는 바른 생각에 맘이 바로 가니, 기운이 바로 가고, 기운이 바로 가니, 혈이 바로 갔습니다. 겨우 힘을 얻었는데 또 우리 민족의 큰 불행인 6·25 사변이 났습니다. 그 고통을 어이 말로 다 하겠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춘천 시내에 포가 떨어지더군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시내에 모두 나와서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찰들이 이 구석 저 구석 왔다 갔다 하는 기색이 이상해서 경찰한테 물어보았습니다. 경찰 말이 “삼팔선 경계선에서 훈련을 하는데, 춘천 시내에 포가 떨어질 염려가 있습니다. 나오지 말고 방공호에 들어가 계십시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집 지하실 방공호에서 세 집 식구가 3일을 지냈습니다. 방공호 속에서 들으니 총소리가 밤새 귀가 먹을 정도로 울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집 우암장님은 엎드려서 주문만 외우시는 거야요.
나는 “여보, 우암장님 큰일 났습니다. 이 총소리가 춘천 시내에 인민군이 다 점령한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무슨 총소리가 난다고 하시오. 가만히 앉아서 주문만 외우시오” 하시는 겁니다. 밤이 새고 환하게 밝아 오자 누가 대문을 발로 차면서 문을 따라고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문을 따주었더니 중공군 장교가 총을 들이 대면서 손들고 다 나오라고 하는 거야요. 애 어른 할 것 없이 손을 들고 대문 밖으로 다 끌려 나갔지요. 춘천 시내 바닥에는 중공군과 인민군이 몇 만 명인지 알 수 없고,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고, 포가 여기저기 떨어졌습니다. 전쟁 마당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 식구는 우암장님과 그날 두 돌이 되는 첫 애기, 시집 조카가 경찰이라 삼팔선 접경에서 싸우다 후퇴하면서 어린애 셋을 다 맞기고 가서, 모두 6명이었습니다. 인민군은 끌고나온 동네사람 60여 명을 조그만 방공호 속에 빽빽이 몰아넣더니. 따발총으로 막 갈겨댔습니다. 아침 9시쯤 시작해서 오후 4시가 되어서 끝이 났는데, 내가 안 죽고 살아 난 거야요. 두 살 난 애기를 무릎에 안고 있었는데, 아기가 죽은 거야요. 이리 저리 쳐다보니 다 죽어있어요. 저 혼자 살았으니 어이 합니까. 원피스 끈이라도 풀어 목매고 죽으려고 끈을 찾으니 어디에서 풀어졌는지 없어서 죽을 수도 없어요. 들리는 말로는 인민군은 산 사람을 각을 떠서 죽인다고 하니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지요.
방공호 속에서 문 쪽을 내다보니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죽어있는 사람이 있어요, 유심히 보니까 팔목에 염주가 걸려있어요. 천도교 믿는 사람은 우리 내외뿐이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아기 아빠가 아닌가 하고 가보려고 아이를 시체 위에 놓고, 죽은 시체를 밟고 기어나가 염주든 손을 만지니까, 나를 쳐다보면서 죽은 척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거요. 한숨을 쉬면서 ‘어린애는 또 낳으면 되고 남편이 살았으니 다행이다’는 생각에 ‘한울님 감사합니다’ 하며 주문이 막 솟아져 나오는 거라요. 피가 펑 고인자리에 앉아서 죽은 어린애를 무릎 위에 들어 올려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문을 외우는데, 제 무릎이 흔들흔들해서 눈을 뜨고 쳐다보니까 어린애가 눈을 뜨고 입술이 빨개지면서 젖을 먹으려고, 엄마 가슴을 쑤시고 더듬는 것입니다. 한울님의 감응으로 우리 식구는 세 식구가 다 살았는데 종손녀, 손자 셋은 어디 깔려 죽었는지 보이지 않아요. 오후 5시쯤 공산당이 완장을 차고 인민군 깃발을 들고 다시 방공호로 들어오면서 소리를 치는 거야요.
“인민군은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잘 살게 해주려고 왔다. 그러니 어서 일어나요” 했지만 일어나지 않고 죽은 척 하고 있었어요. 인민군이 가고 나자 그때야 사람들 몇이 왁 일어나면서 통곡을 하며 나오는 거야요. 엄마가 죽은 사람, 아들딸이 죽어서 통곡하는 사람. 나는 우리 세 식구는 살았는데, 종손자 손녀는 죽었으니 어찌합니까. 한울님! 한울님! 하고 통곡을 하니, 겹겹이 죽은 사람에게 깔린 틈에서 “할머니 나 안 죽었어요” 하는 거야요. 그러자 또 한 놈이 “할머니 나도 안 죽었어요!” 하는 거야요. 얼른 죽은 시체를 이리저리 들쳐 내고 두 아이를 꺼내었어요, 몸에는 피가 철철 흐르데요, 하지만 6살 난 손자는 어디 있는지 못 찾아서, 하필이면 머슴애가 죽었으니, 어찌하누 하면서 통곡을 하니까, 저쪽 구석 죽은 사람 밑에서 푸르럭 푸르럭 하는 소리가 나는 거야요. 그래서 죽은 시체를 밀어내고 보니까 시체 밑에 깔려서 피에 코를 박고 푸르럭 푸르럭 한 것입니다. 이것보세요. 또 한울님 감응이 계셨지요. 우리 식구 6명은 다 살아났습니다. 식구들을 전부 목욕을 시켜서 옷을 갈아입히고 마루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있고, 저의 남편은 양복장 뒤에 숨겨 놓고 있는데 중공군 장교가 대문을 열고 들어와서, 나를 보고 “남편 어디 있어. 데려와” 했어요. “죽고 없어요!” 하니까, “거짓말이야” 하며 제 가슴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데 총알이 안 나와요. 떼걱떼걱 두들겨 보면서, 고장 났다고 하는 것 같은데 인민군에게 무어라고 쑤알라 거리니, 인민군이 내 가슴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입니다. 나는 눈을 감고 ‘한울님! 한울님!’ 하며 시천주만 찾는데, 중공군과 인민군은 총을 쏘려고 해도 총알이 나가지 않자, 두 놈이 다 나가더니 안 들어오더라고요.
깜깜한 밤에 피난민들이 줄을 서서 길이 메이게 나가는데요. 우리도 더불어서 식구들을 데리고 피난을 나갔어요. 춘천 시내를 벗어나서 홍천 삼마치 고개로 피난민이 막 밀려오는데요. 삼마치 고개 거의 다 와서 우측으로 좁은 소래 길 쪽으로 오니까 남편이 “옛날 노인들이 난리가 나면 사람 많은 데로 따라 가지 말라고 했다오. 우리는 삼마치 고개로 가지 말고, 사람 없는 소래 길로 갑시다” 하는 거야요. 나는 “사람들이 없는데 무섭지 않아요? 그 쪽으로 안 가요” 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가는 데로 막 따라가는데, 우암장이 업고 있는 아이를 쑥 빼가지고 뛰는 거야요. “혼자 가시오” 하면서 아이를 안고 가시는 거야요. 혼자 가지도 못하고 울면서 남편을 따라가니 밭둑에 아이를 내려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저리가면 다 죽어요. 우리가 가는 길이 한울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이요. 안심하고 주문만 외우면서 갑시다” 하기에 “그래요” 하고 떠나는데, 그때 쌕쌕이 4대가 ‘왕’ 하고 소리를 하더니 삼마치 고개에 휘발유를 쏟아 붓고 불을 던졌어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어 그 많은 피난민이 다 타 죽어 버렸습니다. 또 한울님의 감응으로 남들은 다 죽어도 우리는 살았습니다.
주문을 외우며 걷다가 한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집 주인을 찾아 “저물어서 못 가니 방을 좀 주실 수 있습니까?” 하니, “예 들어오시오. 우리도 내일 아침에 피난을 떠나가야 합니다. 같이 갑시다” 하는 거예요. 짐을 내려놓고 앉으니까 주인이 저녁을 차려 주어서 잘 먹고 있는데 동네 청년들이 모여와서 “삼마치 고개에는 사람도 많이 죽고 소도 많이 죽었어요” 하면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요. 엄마는 아기를 업고 죽었는데, 어린애는 엄마 등에서 살아서 울고 있고 불더미 속에서 신음소리가 마치 개구리 우는 소리 하듯 해 볼 수가 없어요” 하면서 우리에게 “댁은 왜 삼마치 그 좋은 길로 같이 안 가고 이리 왔소?” 하는 것입니다.
그 집에서 잘 자고 아침을 해주어서 같이 먹고, 주인집과 같이 떠났어요. 홍천 양덕원이라는 동네에 와서 큰 부잣집에 들어가 주인을 찾았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가 나오더라고요. “할머니 우리들은 춘천에서 나오는 피난민입니다. 할머니 방 좀 주시겠습니까?” “예, 들어와요. 우리 집은 남자들은 산으로 다 도망가고 여자만 있으니 같이 집도 봐주고 계십시오” 하시면서 쌀도 큰 함지로 하나 내다 주시고, 김치도 한통 주시고, 큰 방을 하나 주시면서, “소죽 끓이는 방이라 따뜻합니다” 하시면서 너무 잘해 주셔요. 매일 중공군과 인민군이 하루 한 번씩 문을 열었고, 두리두리 살펴보고 가곤 했어요. 한 20일 동안 먹고 사는 것은 걱정을 하지 않고, 식사만 하곤 계속 주문만 외우고 있었어요. 20일 되는 그날도 새벽 5시에 일어나 주문을 외웠지요. 무형의 기운으로 신호가 왔어요. 우리 남편 우암장님께도 신호가 오는데 이곳에 있지 말고 빨리 떠나라고 한답니다.
21일 아침 새벽 5시 기도 식을 보고 짐을 싸가지고 출발을 하면서 주인 할머님께 인사드리고, “우리는 이젠 가야겠습니다”하니까. 펄쩍 뛰면서 “왜 가느냐? 쌀이 떨어지면 쌀 달라고 하지” 하며 애통해 하는 거야요. 인사하느라 꾸물대니 대신사님 모습이 나타나서 빨리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서둘러 “할머니 고마웠습니다. 다음 한번 들리겠습니다” 하고 내 손을 붙잡고서 우시는 할머니를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2백 미터 정도를 갔는데, 쌕쌕이 비행기 4대가 쌩하고 들이 닥치더니 우리가 있든 집을 폭격해서 순식간에 불길이 한울로 처 올라가는데, 그것을 본 우리 식구는 땅에 주저앉으며, 할머니! 하고 통곡을 했습니다. 할머니와 며느리 셋 모두 재가 되어 한울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우리 식구도 그대로 있었으면 타 죽었지요. 또 한울님 감응으로 살아났습니다.
양덕원에서 이 십리를 가면 용수리라는 데가 있습니다. 깊은 산중인데, 중공군과 인민군이 꽉 차 있었습니다. 밤이면 집에서 자고 날이 밝으면 높은 산 밑에 있는 물레방앗간에 피난민들이 비행기 포격을 피해 그곳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도 한 할머니가 방을 줘서 밤에 잠을 자고, 피난민들과 함께 물레방앗간에 자리 잡고 앉아있는데, 총을 멘 중공군 한 놈이 들어오더니 피난민 가방을 다 조사를 하더군요. 우리 우암장님이 의사이니까 가방에 약, 청진기, 침 기구를 보더니 붙잡아 가 버렸습니다. 하루 종일 기다려도 안 오는 것입니다. 해가 다가고 어두워지니까 딴 피난민은 다 돌아가는데 나는 어린 아들을 업고 붙잡아 간 곳을 찾아갔습니다. 인민군이 “동무 왜 이곳에 와요, 총을 쏠까?” 하는 거야요. 나는 “오늘 아침에 우리 남편을 이리로 데리고 갔는데, 오지를 않아서 찾아 왔습니다”라고 하니 인민군이 빨리 죽지 않으려면 가라고 해 주인집으로 갔습니다. 그런 식으로 밤이 되면 집에 가서 자고, 밝으면 비행기 포격을 피해 또 나갔어요. 3일이 지나니까, 오늘 남편 사형시키니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오늘 인민군 사무실로 오라는 통보가 왔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자는 생각에 정신없이 높은 고개를 두 번 넘어서 길을 물어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범살문이라 문종이도 다 떨어지고 환하게 보이는데, 우암장이 말은 못하고 문에서 손을 흔들면서 들어오지 말라고 흔드는 거야요. 중공군은 총을 들고 문을 등지고 앉아서 파수를 보는 거야요. 도로 나와서 그 옆집에 들어가니 피난민들이 꽉 차 있는 거야요. 주인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리니까. 주인아주머니가 하는 말씀이 “사람을 붙잡아 두고 삼일만 되면 솔밭으로 데려가 사형을 합니다. 오늘 또 내다가 사형합니다” 하는 거야요. “우리 집에 들어가 있어요. 사형시키려 데리고 나올 때 내가 대줄테니” 하기에 방에 앉아 어린아이 젖을 먹이려고 하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빨리 나오래요. 지금 4명 끌고 나와서 솔밭으로 올라간다고 하기에 애를 업고 나와 그 솔밭이라고 하는 데를 정신없이 가는데, 총소리가 쾅! 나는 거야요. 그 소리에 정신이 없어져 그만 쓰러졌어요.
옆에 있던 애가 막 울어서 정신을 차리니까 또 총소리가 나는 거야. 또 세 번째 총소리가 나는 거야요. ‘아이고, 이젠 다 죽였구나’ 하는 생각에 내려와서 알려준 아주머니께 물었습니다. “여기서 춘천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하고 물으니, “여기서 바로 가려면 가깝기는 하나 큰 강이 있어서 배를 타거나 얼음이 얼면 얼음위로 걸어 다니는데. 지금은 얼음이 녹아서 물이 올라오는데도 있고 금이 가서 얼음위로 못가니, 처음에 여기로 오던 큰 고개를 두 번 넘어야 갈수 있지요” 하더군요. 그리고 “지금은 어두워서 산 고개를 갈수 없으니 들어와서 우리 집에 자고 가세요!” 하는 것입니다. “아니요, 가다 얼음구멍에 빠져 죽으면 잘 됐지요. 남편이 죽었는데 내가 살면 무엇 합니까. 안녕히 계세요” 하고 큰 강으로 내려 왔습니다. 건너갈 곳을 쳐다보니 너무 멀어요. 얼음이 금이 나고 물이 위로 펑펑 올라오는 곳도 있어요. ‘에라, 건너가다 죽자’ 생각하고 한울님께 심고 드렸습니다. ‘한울님 우리 남편 돌아갔습니다. 저도 한곳으로 가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한 것만 생각날 뿐 어떻게 건넌 것도 모르겠고, 춘천에 있던 집으로 온 거야요.
주인 할머니가 “이제야 오나. 어찌 됐어” 하시는 소리는 들리는데. 내가 쓰러져 기절을 했던가 봐요. 주인 할머니께서 찬물을 떠다 입에다 넣어주고 주물러주고 법석을 치고 흔들면서 “애기 엄마! 애기아빠가 죽고 없으면 엄마라도 정신 차리고 살아야 애기가 살 수 있지, 누가 아이를 키워 주겠나?” 하는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할머니 인민군이 애기 아빠를 총살했어요” 하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눈물을 거두고 본 대로 말을 하려는데요. 밖에서 아이 이름을 부르는 거야요, 문을 차고 맨발로 마당에 뛰어나가니까. 애기 아빠가 돌아왔습니다. 둘이서 귀신이냐 생시냐 하면서 막 끌어안고 한참을 하다가 나를 보고 “어디로 어드렇게 왔는가?” 하고 물어서 온 이야기를 했죠. 그리고 “당신은 어찌된 일이요?” 하니까 아, 우리야 시천주가 있지 않소. 시천주만 잘 외우면 한울님이 도와주십니다. 네 사람 가두어 놓고 질문을 다 하고 삼일만 되면 내다 죽이는데, 내가 제일 뒤 섰는데 한 사람 한 사람 물어보고 “필요 없어!” 하면 탕! 쏘는 거요. 세 사람을 묻고 다 죽이고 나에게 “무엇 하느냐”고 물어서 “나는 조상님들 말씀이 앞으로 난리가 나는데 일생을 나쁜 짓하지 않고 조상님 말씀을 잊지 않고 향나무로 깍은 염주가 구슬같이 다 달도록 21자 주문만 외우면 죽지 않는다고 가르쳐 주어서 오늘까지 이렇게 살아왔소!” 하니까 염주를 보자 해 꺼내주니까 인민군이 몇 바퀴 구르면서 “동무 피란하는 방법을 가르쳐줄까?” “예, 좀 가르쳐 주세요” 하니 “피난하는 방법은 김일성 장군한테 가담하든, 이승만이 한데 가담하든 적극적으로 싸워서 이기는 것이 피난이지. 제 혼자만 살겠다고 염주만 돌리고 앉아 있으면 그것이 무슨 피난인가. 어리석은 사람이지” 하면서 염주를 건네주며 “동무 염주 잘 두르소. 피난 잘하소!” 하고 죽이지 않고 그냥 내려갔답니다. 이것이 또 한울님이 감응해서 산 것이요, 주문만 외운 덕으로 이렇게 살아 돌아온 것야요.
「탄도유심급」에 대신사 말씀이 ‘임훈진료면 자연유조하리라.(臨勳盡料면 自然有助하리라, 큰일을 당해 헤아림을 다하면 자연이 도움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천도교만 잘하면 걱정할 것 없고, 의심할 것도 없고, 주문 열심히 염주 잘 돌리면 한울님이 알아주시는 희열을 느끼면서 피난 생활을 하루하루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인가 갑자기 인민군이 모두 후퇴한다고 쏟아져 나와 도망을 가는 거예요. 저녁에 기도식을 하는데 빨리 남자들은 피해야 된다는 신호가 왔어요. 빨리 빨리 기도식을 마치지도 못해서 애기 아빠를 골방에다 숨겨 놓고 이불을 씌워 놓고, 안방으로 들어가 주인 남자를 빨리 피신하라고 했더니 갑자기 피할 데가 없어 얼른 생각에 불 때는 아궁이에 숨으라 했어요. 막 숨겨 놓고 방에 들어 왔는데 인민군이 셋이 들어 닥치면서 “남편을 내 놓으라! 말 안하면 죽인다. 말하라! 남편은 어디 있느냐!” 급해서 날 뛰는 거야요.
나도 모르게 “군인들이 몇 사람 오더니 짐을 져 달라고 하면서, 주인아저씨하고 우리 남편하고 데리고 나간 지 한 30분 됐습니다”라는 말이 나오더라고. 그러니 “알았어!”하면서 나갔어요. 남자들을 또 살렸지요, 그 동네 남자들은 집에 있다가 다 잡혀갔지요. 이것이 또한 한울님 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인민군들은 다 쫓겨 가고 우리 국군이 점령을 했어요. 만세를 부르면서 민간인들이 이젠 살았다고 좋아했습니다. 우리도 강원도 홍천군 용수리라는 곳에서 피난을 잘하고 고향으로 가려고 하니, 그곳 주민들이 못 가게 하는 거야요. 큰집을 주면서 한문 선생으로 모시겠다고 하면서 부탁하는 거야요. 인민군은 물러갔지만 또 피난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의심스럽고 두려워서 고향에 가지 않고 그곳에서 한문 선생으로 6년을 살다가 춘천에 오니 살던 집과 병원은 다 타고 없었지요.
그래서 춘천시 교동에 집을 새로 짓고 병원을 개원했어요.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잘 살게 되고 주문의 힘으로 언제 어디서나 한울님이 내 곁에 계시어 부모님 모시고 사는 것과 같고 스승님을 모시는 것과 꼭 같은 맘이었고요. 든든한 맘으로 생활을 하다가 무엇을 잘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한울님 내가 이것 잘 모르겠습니다’ 하면서 심고하면 금방 한울님 감응이 있습니다. 전쟁 때를 제외하곤 한 세상을 참 즐겁게 살아 왔습니다.
내가 지금은 수도원장이라는 과분한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는 많은 수련 체험이 있었지요. 19살에 결혼하고 남편이 21자 주문을 가르쳐 주어서 일용행사가 다 도라는 말에 주문만 하다가 33살에 온몸에 병이 들었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선고를 받았을 때 남편이 주문 열심히 외우면 살 수 있다고 해서 그 말에 주문을 생활에 삼다가 보니까 어느 날엔가 한울님 말씀을(이) 들렸어요. 대신사님이 나를 만나면 살려준다는 귀 끝의 소리가 들려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고 나를 살려준다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니까 ‘한번 열심히 해보자’ 이런 생각으로 주문을 계속 더 열심히 외우다 보니 내 몸에 병도 다 나은 거예요.
즐거움과 천국 속에서 잘 해가던 도중에 내 나이 52살 때쯤 뜻밖에 내가 여러 가지 병이 들어 또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남편이 의사라 해볼 것 다 해보고 일본까지 약을 붙여다 써 보았으나 나는 백약이 무효라 서울대학병원에서 3개월 밖에 못 산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죽을 날을 받아 놓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수도원에서 수도를 해봐야 된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거예요. 이왕 죽는 것 죽는 날까지 주문이나 외우다 죽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마침 경주에서 하계수련회를 한다는 공문을 받았습니다. 춘천교구에서는 이필순 사모님이 선각자입니다. 춘천교인 몇 분과 함께 경주로 가려고 청평에 가서 기차를 타려고 하는데 어떤 사모님이 차멀미를 심하게 해서 쓰러졌어요. 그래서 경주를 못가고 가평에 있는 화악산 수도원으로 가기로 결정을 해서 화악산으로 갔습니다. 수도원에 발 디뎌본 건 그게 처음입니다.
화악산수도원에 저녁상이 들어 올 때 도착했습니다. 나는 그때 단식중이라 저녁을 먹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주문을 외었습니다. 그때 24시간 중 2시간만 잠을 자고 주문을 외우던 시절이었거든요. 모두 자리 깔고 주무시는데 나는 밖으로 또 나갔습니다. 돌배나무 밑에 큰 바위가 있는데 수련을 하다가 새벽 2시가 되어서 내 자리에 드러누워 잠이 들려고 하는데 밖에서 ‘조동원이 빨리 밖으로 나오라’ 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누가 날 찾는다” 하며 나가려고 하니 이필순 사모님이 옆에서 나를 잡으며 못 가게 하는 거예요. “나를 나오라는데 못나가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나는 뿌리치고 나갔어요. 밖에 나가니까 마당에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옷을 입고 “조동원이 잡으러 왔다”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나를 잡으러왔습니까?” 하니, “당신 잡아 가야겠다” 이러는 거예요. 그러더니 휘파람소리가 ‘휙’ 나더니 할아버지가 하얀 옷을 입고 휭하니 마당 복판에 나타나 “이놈들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하세요. 그러더니 검은 모자를 쓴 사람들이 어디로 감쪽같이 다 사라지고 할아버지도 휭하고 날아갔어요.
사흘 째 되던 날, 오후 수련에 완전히 홍몽 천지가 돼서 내가 땅속으로 얼마나 구비 구비 빠지는지 몰라요. 엎어져서 빠졌어요. 공중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너는 앞으로 많은 사람을 지도할 사람인데 빨리 일어나서 영부를 받아라!’ 나는 “아이구!” 하고 땅을 치고 통곡을 했습니다. 내 이름자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포덕을 하고 어떻게 천도사업을 하느냐고 땅을 치고 얼마나 울고 했는지 몰라요. 이필순 사모님이 원장님을 불렀어요. 상을 놓고 8절지 영부지를 내놓는데 그때에 홍의태 선생님이 49일을 들어와 계시고 서울에 계시는 목욕탕 하는 박선생도 49일을 들어왔는데 박선생은 빼내고 홍선생은 들이대고 해서 영부를 얼마나 많이 받아 놨는지 산더미처럼 받았어요.
그런데 글자 하나도 모르는데 경전을 갖다 놓으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경전을 딱 갖다놓으니까 ‘너 「포덕문」 찾아라! 읽어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이걸 아는 거예요. 쫙 읽어 가는 거야. 이거 뭐, 세상이 천국 같아. 내가 경전을 줄줄 읽고, 밖으로 나가라 해서 밖에 나가니까, 그 전날 비가 와서 코스모스 심은 게 다 넘어갔는데 그것을 다 추려서 다 매라는 거예요. ‘이 꽃은 사람을 믿고 사는 건데 넘어간 걸 네가 다 매라.’ 그래서 산에 가서 싸리 껍데기를 꺾어서 그걸 다 전부 맨 거예요. 수도생들이 “조동원이는 완전히 미쳤어. 그래서 바로 대하기 힘들어” 하는 그런 상태에요.
아, 그런데 8월에 단체 수련을 많이 와서 마당에다 천막을 치고 있었어요. 나까지 스물한 명이 있었어요. ‘천막 친 곳으로 들어가라’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들어갔는데 “너 노래를 해라” 그러는 거예요. “전 노래를 잘 못합니다” “이제는 한울님 능력 받았으니까 하면 된다 해라” “모릅니다” “너 가사 알지 않느냐” 그때까지 내가 이미자 노래에 미쳤던 사람인데, 이미자는 나한테 명함도 못 내밀어. 얼마나 노래 가사가 잘 나오는지 “그게 네가 한울님의 능력을 가지고서 하는 거다” 그런 후에 “춤을 춰라” “저 춤 못 춥니다” “아니다, 일어나 봐라” 근데, 일어나서 손을 펼치니까 춤을 추는 거야. 그걸 수도장 안에 수도원 생들이 나 하는 걸 다 본 거예요. 조동원이가 가수만큼 잘 한다는 소문이 났죠. 그 다음에 노래를 했는데 할 수 있어요? 하나도 못하죠. 그 담에 경전을 읽으려는데 하나도 못 읽죠. 그 다음엔 정신없는 행동을 막 하는데 한울님한테 천서를 받는다고 아닌 밤중에 뛰어나가서 솔밭으로 뛰어나가는 거예요.
문영수 원장님 고생 많이 시켰습니다. 그때가 바로 열시 정도 됐는데 미송나무가 꽉 찬 솔밭에 딱 가서 서라고 해서 서니까 하늘이 조금밖에 안 보여요. “너 이제 천서를 받아야한다. 천서를 받아야 하니까 똑바로 서서 손을 합장을 하고 백을 세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에서부터 세라고 해서 세는데 “하나” 하니 “빵” 하고 하늘에 구멍이 뚫리는 거예요. 하나 빵, 둘 빵, 셋 빵, 넷 빵······. 백 빵 하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손은 합장을 하고 ‘눈을 감아라’ 하는 거예요. 그때 눈으로 사물을 잘 못 보던 시절이에요. 그래서 눈을 감았는데 ‘너는 이제 네가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된다’고 그래요. “한울님 수도원에 내려가야 되는데 어찌 합니까?” 하니 그때 원장님이 후라쉬 불을 환하게 켜고 나오시는 거예요. ‘후라쉬 불을 끄라고 해라. 너는 눈이 새롭게 됐으니 불빛을 보면 안 된다’고 해요. 그래서 “원장님 불을 꺼주세요” 그래서 불을 끄고 내려갔어요. 원장님을 참 힘들게 했어요. ‘너는 전체가 새로 됐으니까 몸을 움직이면 안 되고 흔들려도 안 되고 그대로 내려가야 한다’는 거예요. 원장님께서 당신 양쪽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거꾸로 내려가고 나는 바로 내려갔죠. 40분을 내려간 거예요. 다시 수도원에 돌아와 아랫목에 드러누워서 밤새 한울님하고 대화를 했는데. 내가 그때 글이 돼서 다 필기를 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다 날이 새서 아침에 못 일어난 거예요.
그런데 한울님이 말씀하시기를 ‘너, 지금 대신사님이 저기 구름을 타고 내려오시는데 나가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문을 열고 나갔어요. 손을 합장을 하고 내가 영접을 해서 모시라는 거예요. 대신사님을 방에 모시고, 손을 합장을 해서 절을 했어요. 대신사님이 금주전자를 하나 가져왔어요. 대신사님이 ‘아랫목에 드러누워서 눈을 감어라’ 했는데, 눈을 감아도 대신사님이 다 보이는 거예요. 대신사님이 주전자를 들더니 내 머리서부터 물을 졸졸졸 발까지 부어 주시는 거예요. 그러고 하얀 홑이불을 하나 씌워주고 대신사님이 주전자를 들고서 휙 가버리시는 거예요. 난 홑이불을 덮고서 누워 있는데 같이 온 사모님들은 조 사모님은 못 간다고 하며 집으로 다 갔어요. 일어나서 정신을 바짝 차리니까 다들 갔다는 거예요. ‘아니 나를 데려가야지 안 데려가면 어떻게 하나’ 그러고 간다고 보따리를 싸니까 문영수 원장님이 그 사람들이 차를 가지고 데리러 온다고 나를 못 가게 하는 거예요. “아니야, 갈 수 있어요” 하면서 보따리를 싸가지고 막 냅다 뛰어 내려가니까. 거 누군지 모르지만 영등포 교구에서 청년을 하나 내려 보내서 나를 붙잡아서 못 가게 하는 거예요. 김동덕이라고 그랬어요. 앞으로 천도교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설명을 해주고서 “들어가라. 나는 걱정 없이 가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막 뛰어 내려가는데 원장님이 또 따라 내려왔어요.
그래서 강 씨네 선생님 집에 들어가서 내가 술 한 병하고 과자 한 봉지를 사서 드렸어요. “걱정 마세요. 나는 걱정 없이 가니까요” 화악산에서부터 내려오는데 뒷산 앞산 이 모두 꽃밭이에요. 꽃밭을 헤치고서 간신히 집까지 내려왔어요. 차를 타고 종점까지 나오는데 사람들이 나를 많이 쳐다봤죠. 지금도 훤하게 알겠거든요. “경치가 이렇게 좋은데 왜 안 왔냐?”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하고선 막 떠들고 다니니까 다 쳐다봤죠. 춘천 가는 버스를 타고 홍천 집으로 온 거예요. 집에 오니까 우리 선생님이 이필순 사모님한테 전화를 받아서 조동원 사모님 못 온다 해서 데리러 갈라고 하는 찰나였답니다. 가서 큰절을 했는데 큰절을 하고선 들어가서 새 이불자리를 깔고서 수련을 하고 일절 말을 안 했어요. 식구들이 이제 완전히 미쳤다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더니 집안 식구들이 집에서 그러지 말고 산으로 들어가라 해서 백담사로 출발했습니다. 염주 하나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으로 올라가면서 주문을 얼마나 크게 외우면서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몰라요. 그러다보니까 석 달이면 나는 죽는다고 그랬는데 석 달까지 해본다 하고 결심을 먹고 하는데 석 달이 되는 그날 아침이에요. 깜깜한 아침에 새벽이 되서 주문을 외우는데 저기는 미국이다, 일본이다, 소련이다, 전 세계를 다 보여주는 거예요. 미국도 모르겠고 일본도 모르겠고 다 모르는데 여기가 중국이야 하는데 중국은 내가 알았어요. 8살부터 15살까지 중국에 가 살았거든. 그래서 중국여자들하고 나물 뜯으러 다니던 그 산이 보이는 게 여기가 중국이다 해서 안 거예요. 거기서 춤을 추고 울고 웃다 미친 짓을 혼자서 하다가 날이 새서 집에 내려와 밥을 먹고 또 거기서 계속 주문 외우는 거예요. 그래서 6개월을 한울님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수심정기가 된 거예요.
그런데 남편은 태백산으로 수련을 가라면서 10만원을 주는 거예요. 나는 “한울님한테 가르침을 다 받았는데 현실이 도지 딴 게 도가 아니다”라고 하고 남편은 “남편이 한울이고 여자는 땅이다”라고 했어요. “한울님을 땅이 모셔야지 집을 떠나가면 되냐”고 “나 안 간다”고 하며 집에서 열심히 하니 사람들은 다 틀렸다고 생각 했죠.
우리가 살던 홍천 그 집에 집세를 열둘을 주고 있었어요. 뺑 돌려 세를 주고 그 앞에 병원을 차렸는데 통장을 며느리에게 다 주고 나는 양말이든지 신이든지 옷이든지 사다주면 입고 살림 관계를 안 했어요. 그리고 살림에는 신경 안 쓰고 계속 주문만 외우는 거예요. 천일기도 3년을 하고는 또 천일기도 3년을 정한 거예요. 그럼 6년이죠. 6년 되는 날, 새벽에 자리를 펴고 자려고 하니까 공중에서 ‘너 인제 경전공부 해야지’ 그때까지 경전하나 못 읽었거든요. ‘경전공부해라’ 또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 줄 알고 불을 켜니까. 우리 선생님이 아랫목에서 코를 골고 주무셔요. 경전을 갖다놓으니까 ‘너 <흥비가>를 찾아라’ 흥비가가 뭔지 내가 이응자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요. 겨우 흥비가는 찾았는데, ‘읽어라!’ 하세요. 은 빛깔의 물형부가 경전을 덮어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서물서물 하는데 그래도 잘 보이고 다 읽히는 거예요.
“시운 벌가벌가 하니 기측불원이라” 쫙 읽어나가는데 ‘너도 모르게 무릎을 칠 구절이 나온다.’ 그 소리가 귀에 들려요. 쫙 읽어 나가는데, ‘아홉 길 조산할 때 그 마음 오작할까 당초에 먹은 생각 생각고 생각하소’ 하는 곳에서 무릎을 팍치는 순간 경전이 다 내 꺼가 된 거예요. 경전을 들고 울고 웃고 춤을 추고 하니까. 영감님이 나와서 “저거 또 미쳤구나” 이 쪽방에선 며느리 아들이 또 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죠. 「포덕문」 들어가라 해요. “개자상고 이래로 춘추질대 사시성쇠 불천불역하니” 아래 하(下)도 못 읽었는데 한문을 내가 쫙 읽어요. 그때 정말 기뻤습니다.
그 자리에서 밥도 안 먹고 이틀 사흘을 경전을 읽어서 다섯 번을 뗐어요. 첫 번째 뗄 때는 기뻐서 좋았는데 두 번째 뗄 때는 스승님 말씀이 그렇게 정의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세 번째 들어가는데 세상에 이 글을 나를 위해 지어 주신 글로 느껴져요. 네 번째 들어가는데 이대로 시행을 해야겠구나. 다섯 번째 들어가면서는 내가 실행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다보니까 경전이 외워진 거예요. 그러한 생활 속에서야 만사 다 편안하고 나를 괴롭혀도 즐겁고 나를 미워해도 도와주고 싶고 다 퍼주는 거예요. 다 퍼주니 살림을 못한다. 미쳐서 살림을 못한다. 이런 소리가 나왔죠. 그때부터 영감님이 이제는 안 되겠다. 경전 한권 다 읽고 하는데 공부하는 사람을 가르치고 그래야지. 수도원 할 방을 찾는 거예요.
여기(가리산 수도원)를 어떻게 찾았냐 하면 그때 영감님이 병원을 했잖아요. 손님이 왔다고 날 보고 찾아요. 이 동네(두촌) 육십다섯 된 백씨네 할아버지가 위암이 생겼는데 병원에서 못 고친다고 나가라 해서 나왔대요. 이필순 사모님이 그 동네 사과를 팔러 갔을 때 그 영감님 부인이 사과를 사가면서 “우리 영감님 못 산다”고 하면서 병원에서 데리고 나왔다고 하니까. “아, 우리 홍천에 대전 한의원집 조동원 사모님이 수련해서 자기 병 고쳤다”는 소리를 한 거야. 그 소리를 듣고 병원을 온 거예요. 그래서 우리 영감님이 진찰을 해보니까 “이거 안 됩니다” 이랬는데 “내가 병원에 온 게 아닙니다. 여기 원장님 사모님이 주문 외워서 병을 고쳤다고 해서 우리도 천도교 교인이 되고 싶어서 왔다”고 그렇게 말 한 거야. 천도교 말소리만이라도 듣고 죽고 싶다고 해서 청수 모셔놓고 입교식을 했어. 드러눕혀 놓고서 거기서부터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겁니다. 주문을 계속 외워 주는데, 영감님이 하나도 못 잡쉈는데 죽을 한 그릇을 잡수는 거예요. 잡숫더니 일어나서 주문을 외고 강령이 모셔졌는데 그 딱딱하게 모여 있던 위암덩어리가 풀리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더니 그 할아버지도 울고, 나도 울고 초상난 집처럼 울면서 배를 주물러 가면서 막 한 거예요. 할아버지가 1주일 째 변을 보고 죽을 잡숫고, 2주 째 딱 마치고서 내 모습이 아주 기운이 없어 보이니까 “조 사모님이 먼저 쓰러질 것 같아서 안 되겠소. 나 집에 가서 할래요. 나 인제 다 배웠으니 집에서 하면 되잖아요. 조 사모님이 내 병을 고쳐줬으니까 우리 집 구경을 좀 합시다”하더니 택시를 불러서 날 태워 주는 거야. 두촌면이 이렇게 생긴 덴지 그때 처음 본 거예요.
할아버지가 미리 집에다가 전화를 해서 여기 조 사모님 데려가니까 닭 잡고 음식을 차려라, 해서 큰 잔칫집 가듯 차를 타고서 갔어요. 어느 할머니가 병을 고쳐줘서 들어온다고 소문이 나니까 양쪽으로 사람들이 나와서 줄을 서고 환자가 들어오는데 환자를 쳐다보지 않고 고추처럼 마른 나를 보는 거예요. 어떤 할머니기에 남의 병을 고쳐주나 쳐다보는 거예요. 지금 수련원 요 밑에 집, 길 밑에 초가집이야. 잔뜩 차려줘서 잘 먹었어요. 그러더니 그 할아버지 하는 말씀이 “조 사모님 내 병을 이렇게 고쳐줬는데 그 좋은 재주를 가지고 기도원하나 차리죠” 해요. “아이구, 전 돈도 없고 글도 모르고 능력도 없고 그런 사람입니다” “아니에요. 내가 봐드릴게요” 하면서 여기 빈집이 하나 있는데 자꾸 가보자는 거예요.
나는 자신이 없었지만 할아버지가 살아나서 그러는데 맘 상할까봐 “그럼 갑시다” 해서 가는데 그 양반은 앞에서 얼마나 기분이 좋아서 가는지. 그러더니 올라와서 딱 이 집을 가리키는 거예요. 이 집이 3년 째 빈집인데 마루가 흐늘흐늘하고 형편없어요. 여기서 하면 자기가 좀 도와주겠다는 거예요. “이건 안 됩니다. 이 집에서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아, 고치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더라고. 그리고 내려가니까 해가 다 졌어요. 집에 가니 9시 좀 안됐는데 우리 우암장님이 “아, 뭐한다고 늦게 왔냐?”고 물어요. 이러저러해서 기도원을 차리자고 해 환자 맘 안상하게 하려고 거기 갔다 오느라 늦었다고 하니 “당신이 보면 뭘 압니까? 내가 봐야 알지” 그러더니 “갑시다” 하는 거예요. 아니, 그 밤중에 가자는 겁니다. “아유 거기 찾아가지도 못하고요. 산골인데 집이 무너지고 형편이 없습니다” 하는데도 “그래도 갑시다” 해요. “아니 지금 밤이라 깜깜해서 가지도 못합니다. 그럼 아침에 갑시다” 했더니, 우리 선생님이 잠을 안자고 동경대전 한권을 다 읽는 거예요. 그러다 날이 훤하게 새니까 택시를 불러서 “갑시다” 그래요. 그 깜깜한 새벽에 택시를 타고 여기 와서 날이 밝았어요. 나는 글을 모르니까 집을 봤죠. 우리 우암장님은 글이 많으니까 이 법당에 글 쓴 것부터 보는 거예요. “어, 이럴 수가 있나?” 그러면서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더니 당신이 그렇게 주문생활을 하더니 한울님이 집을 줬다”고 춤을 추는 거야요. 그래 나는 글을 모르니까 “한울님이 집을 주면 좋은 새집을 주겠지. 이런 허름한 집을 주겠어요?” 했어요. 아니야, 이것 좀 보라면서 글을 읽어 주는 거예요.
‘百靈仰德 萬族歸仁 永世無窮之基 (백영앙덕 만족귀인 영세무궁지기) 수많은 영이 덕을 우러르고 온 세상 사람들이 어질어지게 되나니 영원토록 다함이 없을 터.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천도교 땅이니 어쩔 수 없이 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려가서 동네사람한테 집주인이 누구냐고 물어 주인을 찾아 갔어요. “집을 좀 물어보러 왔습니다” 하니까 젊은 사람이 나오더니 “우리 할아버지하고 우리 아버지하고 그 집을 지었습니다. 그 집이 오래되고 산속에 묻혔으니까 산사람들이 와서 불을 놓는다고 해서, 면에서 집을 헐라는 명령이 와서 내일 헐려고 사람을 몇 명을 얻어 놨습니다” 하는 거야요. “그거 우리 좀 줄 수 없겠느냐?” 하니 면에서 철거명령을 내렸는데 안 된다고 해요. “그럼 면에 가서 내가 얘기해서 얻으면 되겠냐?” 하니 “우리 아버지가 지은 집인데 좋죠” 하대요. 우리 우암장님이 면에 얘기를 잘 해서 그 집을 얻게 됐어요.
집수리를 하려는데 이소원 명동산수도원장님이 온 거예요. 원장님이 오셨는데 그 사람 수련 참 많이 하신 분이에요. 그분이 수련 중에 ‘도를 통한 사람을 한번 만나 보라’는 한울님 계시를 받고 ‘조동원이를 찾아가 봐라’ 해서 온 거래요. 내가 사모님한테 얘기를 했어요. “나 수도원을 하라고 해서 자리를 방문했는데 그 수도원 자리 좀 한번 봐주실래요?” 그래서 이소원 원장님하고 여기 왔어요. “우리가 오늘 하루저녁을 밝혀봅시다” 하고 밤새 수련을 하며 대강령을 모시고 뭐 어떤 짓을 했는지 모르죠. 울고불고 했죠. 아마 저 길가에서 어떤 사람이 들으면 빈집에서 귀신이 운다고 했을 거예요. 새벽녘이 딱 되니까, 산에서 안개가 옷이 젖을 정도로 막 뿌리는 거예요. 이소원 원장이 계시를 받았어요. “아, 여기다가 수도원을 차리게 되면 수도생이 밀물처럼 몰려오겠구나. 여기로 정합시다” 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집수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동네에서 하려면 동네사람들한테 맡겨야 한다고 해서 동네사람한테 부탁을 했는데 시멘트를 40포를 쌓는데 수련을 하다가 딱 보니까 ‘저 가운데 6포는 못 쓴다’라는 계시가 딱 떨어져요. 다른 것은 물렁한데 가운데 6포가 돌덩이 같아요. 들쳐보고 꺼내놨어. 아침이 밝자 그 사람이 올라 왔길래 “6포 못씁니다. 이 딱딱한 것을 왜 여기다 넣었소?” “안 쓸 거예요” 알면서도 속아준 거죠. 수리를 시작하는데 15일 째 되던 날 수련생 3명이 들어오는 겁니다. 거기서부터 수련이 시작된 거예요.
8월 달에 개원을 했죠. 수도원이라고는 화악산에 한 번 가본 것 밖에 없고 계속 집에서 독공수련만 해서 아는 게 없지만 강의하러 나가게 되면 나도 모르게 이 무형의 한울에서 글이 나와 다 가르쳐 줘요. 그렇게 지도를 하다 보니까 수도생들이 모이기 시작하는데 10명이 왔다가 가면(삽입) 10명이 오고 20명이 왔다 가면 20명이 오고 이것이 한울님 간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수도원에는 몸이 건강하지 못한 수련생도 많이 옵니다. 수련 열심히 해서 병도 나아서 가고, 또 참회반성을 하고, 자기 도리를 잘못했다고 하면서 “집에 가서 이젠 잘 하겠습니다”라며 하산 할 때 맘이 참 기뻤습니다. 이후에 그 집 식구들로부터 새사람 됐다는 소식이 올 때 가장 마음이 흐뭇하고 즐거웠습니다. 내가 수도원을 57세에 개원을 했습니다. 그 역사는 얘기로 다 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하다보니 세월이 흘러 안 가본 교구가 없이 다니면서 설교를 했어요. 한울님 힘으로 다닌 거죠. 많은 시험도 겪어 보고 음해하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나오는 구멍은 있어도 들어가는 구멍은 없다. 여기에 휩쓸리지 말자’면서 마음을 다독였죠. 어느새 세월이 흘러 이제 내 나이가 80이 됐군요. 월산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간곡히 일러 주신 말이 생각났습니다. ‘조 원장은 죽기 전에 수도원 다시 새로 만들어 놓고 죽어야 합니다. 조 원장이 쓰러져가는 수도원을 그대로 두고 죽으면 쑥대밭이 됩니다. 원장이 수도원을 다시 짓는다면 성금을 다 주지만 딴 사람은 안 됩니다“라고 돌아가시기 전에 세 번이나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동안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요. 어느 날 갑자기 ‘내가 80이 넘었구나’ 깜짝 놀라 생각하니 ‘후학들이 수도할 자리를 마련해 놓고 떠나야 내가 눈을 감고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수도원 재건축을 위해 발버둥쳤습니다. 어렵게 시작했죠.
한울님 스승님 감응으로 여기저기 성금을 보내주셔서 이제 집을 새로 다 짓고 나니 얼마나 기쁜지 말로 할 수도 없어요. 내가 할 일을 다 한 것 같아요. 아, 이 집이 이렇게 만들어질 줄 몰랐어요. 나 같은 인생, 정말 복도 많구나. 좀 더 내가 오래 살면서 많은 제자들을 낼 수 있는 공부를 해야겠다. 앞으로 많은 인재가 이곳에서 나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대출 받은 것이 걱정이 되지만 한울님 감응으로 이것 또한 잘 되리라 생각합니다.
천도교가 발전이 안 된다는 말을 듣는데 경전말씀을 주로 삼고 경전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면 우리 천도(天道) 다 발전 되요. 우리 천도교가 이렇게 시시하게 무시당하며 없어질 거라면 우리 스승님들 목 안 잘렸을 겁니다. 스승님들께서 목 잘려서 참혹하게 가셨는데 앞으로 우리가 잘 깨달아서 천도교 세상을 만들어야 되요. 지금 턱밑에 천도 운수가 들어 왔는데 그걸 몰라요. 아는 사람은 알지만요. 낡은 정치 물러가고 새 정치가 펴지 못할 즈음에 혼란이 온다고 했어요. 지금 우리는 혼란 중에 살고 있어요. 그래도 우리는 주문이 있어 즐겁지. 굉장한 일이 앞으로 어떻게 닥칠지 몰라요. 우리 천도교는 삼절운이에요. 삼절운이 세 번인데 두 번가고 한 번 남았어. 마지막 한번은 죽느냐 사느냐 문제에요. 길에 비단 까는 것 맞았잖아요. 산이 검어지는 것 맞았죠. 이제 맞을 건 손바닥에 시천주 주문 써달라고 할 때에요. 그래도 잘했던 못했던 우리 천도교인들은 그때 가면 달라요. 너도나도 천도교 하겠다고 아우성 칠 때가 올 거예요. 얼마나 위급하면 손바닥에 써달라고 하겠어요. 이제 다 돼가요. 빨리 주문공부 해야 되요. ‘주문이 내 육신을 바로 잡는 운전대다’ 외우면서 하루 외운 만큼 내 마음이 바로 서고 내 성품이 바로 서야 되어요. 자기 사심으로 주문 외우면 안 돼요. 사심이 커져요. 주문은 요소비료와 똑같아요. 비료를 밭에 뿌리면 곡식만 크는 것이 아니라 잡초도 크거든요. 내 마음 바르게 잡고 내 성품을 바르게 써 남에게 덕이 되게 하는 게 바로 주문이에요.
참선할 때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한울님께서 내게 주신 내 육신 내 성품 내 마음자리를 잘 지킨 것도 있고 잘 못 지킨 것도 있어요. 이것을 화두로 걸어 놓고 내가 살아온 날들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면 그게 바로 ‘이신환성’하는 방법이야요. 이신환성을 하게 되면 사람들의 모든 잘못도 다 받아 드리게 되고 이해를 하게 되지요. 이 세상에 살면서 이신환성을 하게 되면 저 세상에 가서도 이신환성이 되어 성령출세는 저절로 할 수가 있는 거야요. 그렇게 살려면 고비가 많아요. 미운 사람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힘들어요. 잘못한 것 하나씩 하나씩 반성을 하게 되고 내 마음이 풀리게 되면 자연 상대방 마음도 풀어져요. 이게 바로 이신환성인 거예요.
시천주 뜻도 모르고 ‘지기금지원위대강’ 외우면 목적지 모르고 가는 것과 같아요. 내가 한울님으로부터 왔는데 어떻게 한울님 같은 신령스러움이 없겠어요. 단지 살면서 잃어버린 거지. 처음 한울님으로부터 받는 한울마음, 한울성품, 한울기운을 다시 찾는 것이 시천주(侍天主)이고, 만사지(萬事知)야요.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있기까지 우리 영감님이 무척 애를 썼어요. 그래서 도통하신 분은 우리 남편이라고 생각해요. 6월 19일이 남편 생일이에요. 생신이 돌아오는데 막 화를 내는 거야. “그 까짓 것 생일 해먹으면 뭐하느냐. 하나라도 공부를 해야지” 날 우이동 종학대학원에 넣어버리는 거야. 국민학교 나왔다고 속이고. 종학대학원 1기야. 종학원에 딱 가니 경전 볼 줄 알어? 그렇지만 청수 잘 모시고 사람 대하는 건 잘했어. 김명진 선생님이 원장이셨어. 김명진 선생님하고 우리 영감님하고 친해요. 그랬으니 국민학교 못 다녀도 받아주셨지. 뺑뺑 돌아가면서 그때 30명인가 학생들을 공부시켜요. 딴 사람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졸업생이야. 박차귀, 전초련, 이순종 도수당(신금순) 전부가 공부 한 사람이야. 다 동창이야. 주문 외우는 것은 일등이지, 청수 모시는 것도 일등이지, 엎드려 절하는 것도 일등이지. 다 잘하니까 글이 있는 줄 알지. 떠듬떠듬 배워가지고 글을 보는데 날더러 시일 날 경전 읽으라고 해. 일주일 전에 일러 주더라고. 공부하라고 제일로 짧은 것을 대주더라고. “난 글이 좀 없어요” 하고 박차귀 에게 말하니 “아, 배우면 되잖아요” 하면서 배워서 조금 알게 됐어요. 진작 그 날짜가 되어 경전을 하는데 읽으면서 잘 모르니까 붙여 읽는 거야. 시일 다보고 나서 김명진원장님께서 “이 경전은요. 내가 지어서 붙이면 안 됩니다. 쓴 대로 해야 됩니다” 내가 붙여 읽으니까 김명진 선생님께서 그런 말을 한 거야. 그랬던 내가 얼마나 공부를 했는지 교수님 박사님 많이 있는데 가면 내가 경전 말이 더 잘 나와요. 그것이 한울님의 능력이지. 한울님이 능력줘야 된다 그거야요.
앞으로 천도 발전은 각자에게 책임이 주어져요. 어깨가 무거워야 합니다. 첫째 내가 바르게 해야 한다. 내가 바르지 못한데 바른말을 해주면 상대가 잘 듣지 않아요. 내가 남보다 먼저 궂은일을 해야 하고. 맛이 없는 음식이 있으면 내가 먼저 손이 가야 해. 이게 마음공부지 다른 게 마음공부가 아니에요. 등잔불 있잖아요. 기름을 부은 뒤에야 불이 환히 밝고 유리에다 수은을 칠한 뒤에 거울이 되잖아요. 또 그릇은 불에 넣어 단련이 되어야 하는 거고. 이 사기가 흙으로 만든 것이거든요, 처음 만들 적엔 흙으로 만들어서 불에다 구워서 나오니까 사기가 된 거야요. 이것이 스승님이 경전에서 말씀하신 거예요. 그릇은 불에 놓아야 단련이 되어 좋고. 사람은 마음에 한울님을 모신 다음에야 뜻과 생각이 신령해진다고 나왔잖아요. 성품이 나쁘면 절대 좋은 마음을 쓸 수가 없어. 그래서 성품공부를 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하려면 내 성품을 잘 볼 줄 알고 나쁜 성품을 고쳐야 해. 그러면 좋은 마음은 자동으로 쓸 수가 있는 거야.
시천주는 ‘바로 내 호흡이 시천주로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면 잘 때도 숨을 쉬니까 계속 주문을 외우는 거야. 21자를 다 하는 거고. 시천주, 시천주만 해도 시천주 모신 한울님을 계속 생각하는 거야. 숨이 들어갈 때 나올 때 시천주! 그러면 길 갈 적에 발걸음도 자동 주문에 맞춰지는 거야. 가는 것도 주문! 일하는 것도 시천주! 물물천·사사천, 물건마다 한울님, 일마다 한울님, 전체가 한울이야요. 저도 고령이다 보니, 후학들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싶은 것은, 생각을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로 해야 마음이 바로 갑니다. 마음이 바로 가야 기운이 바로 갑니다. 기운이 바로 가야 혈이 바로 갑니다. 생각을 잘못해서 마음이 탈선이 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좋은 운수를 받지 못합니다. 마음을 잘 써야 해요. 혈이 바로 가야 한울 자리에 갈 수가 있습니다.
후학들에게 꼭 남기고 싶은 말은, 원수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미운 애 떡 한 개 더 줄 마음이 생겨야 하고, 잘못이 없는데도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내 스승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배가 주려도 남이 배고파하면, 내 밥을 줄줄 알아야 앞으로 잘 살 수 있습니다. 큰 덕을 펴야 큰 덕이 옵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나를 미워하는 것이 되고, 남의 흉, 허물을 말하고 헐뜯는 것이 자기가 자기를 헐뜯는 것이 되고, 자기 허물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나부터 개선해야 합니다. 못난 사람 잘난 사람 가리지 말고, 눈이 하나 없든 코가 하나 없든 탓하지 말고, 백오 염주 꿰듯이 한 끈에 꿰어야 합니다. 분별하지 말고 다 품어 우선 숫자가 많아야 합니다. 이치를 비유하자면, 높고 깨끗한 백두산 물, 금강산 물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면서, 맑은 물, 오염된 물 가리지 않고 합쳐서 개울이 되고, 개울이 모두 합쳐서 낮은 곳으로 모여들어 강이 되고, 이 강 저 강이 제일 낮은 곳으로 모여 큰 바다가 됐습니다. 바닷물에 먹물을 몇 들통 갔다 부어 보세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바다보다 더 힘 센 것은 없고, 바다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바다보다 더 생산이 많이 나는 것이 없고, 바다가 없으면 모든 일이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이치를 헤아려 가면서 큰 대도를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크나큰 무극대도를 하는 사람들이 내 패, 네 패 가려가면서, 잘난 것, 못난 것 가려가면서 스승님의 무극대도를 한다면, 스승님들의 한을 언제 풀어 드리겠습니까? 한마음 한뜻으로 꽉 뭉칩시다. 이런 부탁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은 ‘내가 이 세상을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전 세계가 천도교 세상이 다 되는 것을 보고 갔으면 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꼭 천도세상이 되게 돼 있습니다. 후학들이여 두고 보십시오. 오직 마음과 성품 공부를 해야만 합니다. 두서없는 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술일: 포덕 1148(2007)년 10월 1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