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다림이 있어 더 아름다운 사랑 ‘견우직녀도’, 고구려, 408년, 평안남도 남포시 덕흥리 벽화고분. 벽화에서 견우는 소를 몰고 왼쪽 방향으로 이동 중이고, 오른쪽에서 직녀가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견우와 직녀 사이를 S자 모양의 은하수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두 인물의 머리 왼편에는 각각 ‘牽牛之象(견우지상)’ ‘織女之象(직녀지상)’이라고 표기돼 있습니다. 연꽃 모양의 모자(책)를 쓴 견우는 왼손으로 소를 끌고, 오른손은 위를 향하고 있습니다. 청년이라기보다 중년에 가까운 후덕한 얼굴에 발등을 덮는 긴 포를 입고 있습니다. 당시 귀족들의 의상입니다. 견우의 손에 끌려가는 소는 다리와 근육이 비교적 자세히 표현돼 있으나, 마치 발끝으로 종종걸음을 하는 듯한 자세가 특이합니다. 높게 장식한 고계머리와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직녀는 땅에 끌릴 정도로 길고 유려한 색동 주름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이런 치마는 일본 다카마스 고분의 부인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 주름치마의 전통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직녀 뒤로는 장욱진 작품에서 본 듯한 검은 강아지가 표현돼 있습니다. ‘직녀도’, 고구려, 5세기 말, 평안남도 남포시 대안군 대안리 1호 무덤. 408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벽화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농사짓는 데 소를 활용한 ‘우경’은 대단한 발견입니다. 이는 농업 생산력에 큰 변화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이 모든 일을 남성이 주로 담당했습니다. 그 대신 여성은 고대의 뼈바늘, 방추자 등에서 벗어나 베틀이라는 대단히 혁명적인 발명품을 활용해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섬유를 생산하고 의복도 만들었습니다. 견우와 직녀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단순히 소를 끌고(牽牛), 베를 짜는(織女)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 휴대전화나 전기자동차를 만드는 사람처럼 당시에는 첨단산업을 이끄는 존재였고, 국가적으로 장려하고픈 바람직한 청년상이었습니다. 또 다른 고구려 무덤인 대안리 1호 무덤의 ‘직녀도’에서는 당시 사용하던 베틀 형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당시 남성은 농사를 짓고 여성은 베를 생산해 그 일부를 국가에 세금으로 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이 사랑에 빠져 각자 일을 소홀히 했고 일종의 근무태만으로 징계를 받아 헤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중국 설화에 따르면 견우와 직녀는 결혼한 뒤에도 열심히 일해 1남1녀의 자녀를 뒀다고 합니다. 다만 천상과 지상의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헤어지게 된 거죠. 그래서 중국 ‘견우직녀도’에는 2명의 어린이가 등장합니다. / 주간동아 ======================================
고구려벽화 > 덕흥리 고분벽화 덕흥리벽화고분(德興里壁畵古墳)의 앞 칸 남벽 천정에 그려진 견우(牽牛)와 직녀(織女)의 상세도이다. 견우와 직녀는 남벽을 대각선으로 길게 가로지르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왼손에 소의 고삐를 잡고 길을 재촉하는 견우와 달리 직녀는 은하수에 바짝 몸을 기대에 떠나가는 견우를 못내 그리워하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의 마음은 변하지 않고 한결같은 것 같아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다. 견우와 직녀의 설화는 사실상 중국 고대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부부가 은하수(銀河水)를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서 1년을 헤어져 살다가 칠석(七夕 : 음력 칠월 초이레날) 날에만 까치와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만난다는 내용이다. 관람자의 시점에서 보면 견우는 서쪽 방향을 가리키는 왼쪽에, 직녀는 동쪽 방향인 오른쪽에 각각 묘사되어 방위개념이 혼동된 것으로 오인될 수 있으나, 무덤 칸을 중심으로 이들의 방위를 다시 살펴보면 견우는 동쪽 편에 직녀는 서쪽 편에 올바르게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견우와 직녀는 별자리와도 관련이 있어 견우성, 직녀성으로도 불린다. 덕흥리 고분벽화에도 견우와 직녀 그림 바로 위에 견우성(Altair)과 직녀성(Vega)이 등장하고 있어 흥미롭다. 화면의 견우는 허리띠가 둘러진 황색의 긴 도포를 입고 백색의 식빵처럼 생긴 관을 쓰고서 소를 이끌고 길을 떠나는 모습이다. 커다란 눈망울과 날카로운 뿔을 지닌 소는 카키 톤의 옆은 녹색조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와 동일한 모습이 통로 동벽에 그려진 부인의 행렬 모습에도 등장한다. 견우 옆에는 ‘견우지상(牽牛之象)’이라는 묵서명이 또렷이 적혀 있다. 직녀는 긴 저고리에 흰색과 녹색이 번갈아 채색된 주름치마를 입었다. 머리는 안악3호분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두발과 유사한 고리를 튼 머리형태이다. 속심을 이용하여 머리의 형태를 잡고, 틀고 남은 머리는 옆으로 길게 늘어뜨렸다. 직녀 옆에는 앞의 두 글자가 떨어져 나간 ‘□□지상(□□之象)’이라는 묵서명이 보이는데, 틀림없이 ‘직녀지상(織女之象)’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의 견우와 직녀 도상은 중국의 견우, 직녀 도상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어 고대 한·중간의 밀접했던 문화교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牛?織女. 『牛?織女』(ぎゅうろうしょくじょ)は、中?の神話??であり、中?の民間?話の一つとされている。 纖纖擢素手,札札弄機?。 終日不成章,泣涕零如雨; 河漢?且淺,相去復幾許! 盈盈一水間,脈脈不得語。 在中國關於牽牛和織女的民間故事起源?早。 《經·小雅·大東》已經寫到了牽牛和織女,但還只是作?兩顆星來寫的。 《春秋元命苞》和《淮南子·??》開始說織女是神女。而在曹丕的《燕歌行》,曹植的《洛神賦》和《九詠》里,牽牛和織女已成?夫婦了。 曹植《九詠》曰 「牽牛?夫,織女?婦。織女牽牛之星各處河鼓之旁,七月七日乃得一會 」這是當時最明確的記載。 天の河の東に織女有り、 白居易《長恨歌》 백거이 장한가
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양심지) 우리 둘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석날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사어시) 인적 없는 깊은 밤에 속삭이던 그 맹세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 나무로 자라면 연리지가 되자고 맹세 했었지.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천지가 영원하다고 하여도 끝이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이 슬픈 사랑의 한은 끊어질 날 없으리라. |
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