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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5부 5
레베쟈트니코프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에게 볼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나는 반드시 당신이 여기 계실 줄 알았어요”하고 그는 갑자기 라스콜니코프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 무슨 다른 생각에서가 아니라...그저 그렇게....하여튼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실은 댁에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광증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라스콜니코프를 젖혀놓고 갑자기 소냐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냐는 앗 하고 비명을 올렸다.
“적어도 그런 것같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로선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있어야죠! 아까 그분이 돌아왔는데, 돌아왔다기보다는 어디서 쫓겨 온 듯했어요. 더구나 매까지 좀 맞은 모양이더군요....적어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분은 자하르이치의 상관한테 달려갔었는데 주인은 집에 없더랍니다. 상관은 어느 다른 장군 댁에서 식사 중이었었나 봐요...그런데 아시겠어요, 그분은 그 식사하고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는 거예요....그러니까 그 장군 댁으로 말입니다. 그러고는 떼를 쓰다시피 해서 상관을 불러냈답니다. 아직 식사 중인 사람을 말이에요. 그다음 어떻게 되었는가는 쉽사리 짐작이 갈 겁니다. 물론 그분은 쫓겨 나왔죠. 본인 말로는 그 상관에게 마구 욕설을 퍼붓고 무엇을 던지기까지 했다는군요. 글쎄, 그런 일을 있을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어떻게 돼서 그분이 붙잡히지 않았는지는 이상할 지경입니다! 지금 그분은 모든 사람한테, 아말리야 이바노브나한테까지고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곤란하더군요. 고함을 지르고 몸부림을 치고 해서, 아 참, 그분은 이런 소릴 하며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젠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았으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손풍금을 들고 거리로 나가서,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춤을 추게 하고 나도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돈을 벌어야겠다, 그리고 날마다 그 장군 댁 창문 밑에 가겠다......그리고 ‘관리 아버지를 둔 양갓집 아이들이 거지들처럼 거리를 방황하는 꼴을 그자에게 보여줄 테다!‘라고 말하면서 아이들을 마구 때리는 바람에 아이들은 울고 불고 야단입니다. 레냐에겐 ’고향 마을‘노래를 가르치고, 사내아이에겐 춤을 가르치고, 폴레치카에게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옷이란 옷은 닥치는 대로 갈기갈기 찢어서 그걸로 아이들에게 씌울 광대 모자를 만드는가 하면, 자기는 악기 대신 두드린다면서 대야를 들고 나오기도 하고....남의 말은 아예 들은 체도 하지 않는군요. 정말 어떻게 된 걸까요? 아무래도 제정신 같지가 않아요.”
레베쟈트니코프는 말을 더 계속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그때까지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냐는 갑자기 망토와 모자를 집어 분주히 몸에 걸치면서 방에서 뛰쳐나갔다. 레베쟈트니코프도 뒤따랐다.
“미쳐버린 게 분명해요!” 그는 함께 한길로 나가면서 라스콜니코프에게 말했다.
“나는 소피야 세묘노브나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지만, 이젠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폐병 환자는 그런 증상이 뇌에 나타나는 수가 있다더군요. 유감스럽게도 나는 의학에 전혀 문외한입니다만. 하긴 그분을 좀 달래보려고도 했지만, 도무지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질 않아요.”
“당신은 결핵이라는 걸 그분에게 말했습니까?”
“아니, 분명하게 말하진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런 건 본인이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까요!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겁니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울어야 할 까닭이 없다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면 우는 걸 그치는 법입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당신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람 살기가 너무 편하지 않을까요”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대꾸했다.
“죄송합니다만, 잠깐만,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겐 이해하기 꽤 어렵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모르십니까, 파리에선 이미 논리적인 설득만으로 정신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해서 진지한 실험이 행해지고 있다는걸? 최근 사망한 유명한 학자인 모 교수가 그러한 치료 방법을 생각해냈답니다. 그 사람의 근본적인 생각은, 광인에게 신체 기관의 특별한 장해가 있는 게 아니다, 정신착란은, 이를테면 논리적 오류, 판단상의 착오, 사물에 대한 부정확한 견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교수는 병자를 서서히 논리적으로 논박해서 마침내 좋은 결과를 얻었다더군요! 그러나 그때 그 교수는 샤워에 의한 냉수욕도 병행했으므로, 그 치료 결과에는 물론 아직도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됩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자기 집 앞까지 오자, 그는 레베쟈트니코프에게 머리를 끄덕해 보이고 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레베쟈트니코프는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앞으로 달려갔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 골방에 들어가서 한 가운데 멈춰 섰다.
’뭣 하러 나는 여기 돌아왔을까?‘ 그는 누렇게 바래서 너덜거리는 벽지며, 먼지며, 소파 따위를 보았다. 안뜰 쪽에서는 무언가 날카로운 음향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디선지 못질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창가로 가서 발돋움을 하고 몹시 긴장된 표정으로 뜰 안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안뜰은 텅 비어 있고 못을 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왼편의 딴채 집엔 여기저기 열린 창문이 보이고, 창틀 위에는 초라한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었다. 창밖엔 빨래가 널려 있었다. 하나같이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것들 뿐이었다. 그는 빙그르르 몸을 돌려서 소파에 앉았다.
그는 지금껏 이런 무서운 고독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 소냐를 전보다 더욱 불행하게 만든 지금, 어쩌면 정말로 그녀를 증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한 번 이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 여자의 눈물을 구걸하러 갔을까! 무엇 때문에 나는 그 여자의 생활을 방해할 필요가 있었던가? 아아, 이 얼마나 비열한 짓이냐!“
”난 혼자 남는 거다!“ 그는 갑자기 단호하게 외쳤다.
”소냐도 감방에 면회하러 오진 않을 거야!“
5분쯤 지나자, 그는 고개를 쳐들고 이상하게 빙긋 웃었다. 그것은 괴상한 상념이었다.
‘어쩌면 형무소 쪽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막연한 상념들을 상대로 얼마 동안이나 자기 방에 그대로 앉아 있었는지 기억에 없었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두냐가 들어왔다. 처음에 그녀는 발길을 멈추고, 아까 그가 소냐를 바라볼 때처럼 문턱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방 안으로 들어와서 어제 자기가 앉았던 의자에 그와 마주하고 앉았다. 그는 말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이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빠, 화내지 말아요, 그저 잠깐 들렀을 뿐이니까“하고 두냐는 말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으나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 눈길은 맑고 차분햇다. 그는 누이동생 역시 애정을 가지고 자기를 찾아와주었다고 생각했다.
”오빠, 난 이제 무엇이나 다 알고 있어요. 드미트리 프로코피치가 죄다 설명하고 이야기해주었어요. 오빠는 어처구니없는 더러운 혐의 때문에 추적당해 고민하고 있다더군요. ...그러나 드미트리 프로코피치의 말로는,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는데 오빠가 공연히 공포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빠가 얼마나 분개하고 있으며, 또 그 원한이 영원토록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난 그게 두려워요. 오빠가 우릴 버리신 데 대해서도 난 조금도 원망하지 않아요. 어떻게 감히 오빠를 원망할 수 있겠어요. 전번에 오빠를 책망한 걸 제발 용서해주세요. 만일 나한테 그런 큰 슬픔이 있었다면, 나 역시 모든 사람에게서 몸을 피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머니한테 이 일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오빠 이야기는 자주 하겠어요. 오빠의 전갈이라는 형식으로, 곧 찾아올 거라고 말해두겠어요. 그러니까 어머니 걱정은 말아주세요. 내가 잘 안심시켜 드릴 테니까요. 하지만 오빠도 어머닐 너무 괴롭히진 마세요.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와주세요. 그분이 오빠의 어머니란 걸 잊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오늘 내가 여기 온 것은(두냐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만 이 말을 하고 싶었기 대문이에요. 혹시 무슨 일이든 내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거든, 아니....내 목숨이라도 좋으니 뭣이든 필요한 일이 있으면...그땐 곧 날 불러줘요. 언제든지 달려올 테니까요. 그럼 안녕!“
그녀는 홱 몸을 돌리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두냐!“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누이동생을 불러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그 라주미힌, 드미트리 프로코피치, 참 좋은 사람이란다.“
두냐는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요?“ 조금 기다린 뒤에 그녀는 물었다.
”그 친구는 민첩하고 근면하고 정직할뿐더러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사나이야....그럼 잘 가거라, 두냐.“
두냐는 낯을 확 붉혔으나 곧 다시 불안스런 표정으로 변했다.
”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린 정말 영원한 이별이라도 하는 것 같군요...그런 유언 같은 소릴 다 하면서?“
”어차피 마찬가지야....잘 가거라......“
그는 얼굴을 돌리고 그녀의 곁을 떠나 창가로 갔다.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걱정스러운 듯이 오빠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나, 이윽고 불안한 가슴을 안은 채 방을 나갔다.
아니, 그는 결코 누이동생에게 냉담했던 것이 아니다. 한순간(마지막 헤어지는 순간) 누이동생을 와락 끌어안고 이별을 고한 다음 모든 걸 말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났었으나, 그는 누이동생에게 손을 내주는 것조차 망설였다.
‘지금 그 애를 안아준다면, 나중에라도 그걸 상기하고 오싹 소름이 끼치리라. 그리고 내가 자기의 키스를 훔쳤다고 생각할 테지!’
‘그런데 그 여자는 참아낼 수 있을까, 어떨까?’ 몇 분 후에 그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아냐, 참아내지 못해, 그런 족속들은 참아내지 못할 거야! 그런 여잔 결코 참아내지 못하는 법이야......”
그는 소냐를 생각했던 것이다.
창에서는 상쾌한 바람이 흘러들었다. 밖은 이미 아까처럼 햇볕이 내리쬐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급히 모자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그는 물론 자기의 병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마음을 쓸 수 없었고, 또 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끊임없는 불안과 정신적인 공포는 아무 흔적도 없이 그대로 지나가버릴 리 없었다. 아직도 그가 진짜 열병에 걸려서 병상에 쓰러져버리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 내면의 끊임없는 불안이 그의 다리를 지탱하고 의식을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위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정처 없이 방황했다.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 그는 어떤 특수한 우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 속에 각별히 자극적인 것이나 가슴을 애태울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는 무언가 끊임없는 영원한 느낌이 풍겨 나와서 그 싸늘한 죽음과 같은 우수의 기나긴 세월이 예감되고, ’1아르신 공간‘에서의 무서운 영원성이 예감되었다. 대체로 해 질 무렵이면 이 감촉은 더욱 심하게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도대체 일몰 따위에 좌우될 정도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순 육체적인 쇠약에 빠져 있으니, 단단히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가는 무슨 바보짓을 할지 모르겠다. 소냐한테 간다는 것이 엉뚱하게 두냐를 찾아갈지도 모르니 말이야.”
이때 그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다보니 레베쟈트니코프가 달려오고 있었다.
“실은 댁에 갔었습니다. 당신을 찾으려고. 글쎄, 그 미망인은 자기 계획을 실행에 옮겨서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답니다. 나는 소피야 세묘노브나와 함께 간신히 그들을 찾아냈습니다. 그 여자 자신은 프라이팬을 두드리고 아이들에겐 춤을 추게 하고 있잖겠어요. 아이들은 훌쩍훌쩍 울고요. 네거리나 가게 앞에서 그 짓을 하고 있는데, 구경꾼들이 그 뒤를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자, 어서 가봅시다.”
“그럼 소냐는?” 레베쟈트니코프의 뒤를 급히 뒤따라거면서 라스콜니코프는 근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닙니다. 아니, 소피야 세묘노브나가 아니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말입니다. 하긴 소피야 세묘노브나도 정신이 없습니다. 아무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에요. 완전히 미쳐버렸어요. 저러다간 모두 경찰에 끌려가고 말 텐데, 그러면 어떻게 될지 당신도 상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그들은 지금 소피야 세묘노브나의 거처에서 아주 가까운 다리 옆 운하가에 있습니다. 이제 다 왔어요.”
다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냐가 살고 있는 집에서 두 집밖에 떨어지지 않은 운하가에 사람들이 떼 지어 모여 있었다. 특히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들이 많이 몰려와 있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쥐어짜는 듯한 목쉰 소리가 다리 쪽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정말 구경거리임에 틀림없었다. 평상시의 낡은 옷을 입고 드라데담직 숄을 걸치고, 보기 흉하게 한쪽으로 일그러진, 너슬너슬한 밀짚모자를 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야말로 진짜 광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피로에 지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폐병 환자다운 그 얼굴은 어느 때보다 더욱 괴로워 보였다(게다가 폐병 환자는 집 안에 있을 때보다 바깥 햇빛 속에서 더욱 병자 티가 나고 추하게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흥분 상태는 좀체 가라앉지 않았고, 시시각각으로 더욱 더 격화되어 갈 뿐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달려들어 꾸짖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군중 앞에서 노래와 춤을 가르치는가 하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해야 하는가를 애들에게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아이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버럭 화를 내며 그들을 때려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자기 말을 채 맺기도 전에 군중한테로 달려가서, 조금이라도 깨끗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눈에 띄면 곧 그 사람을 붙잡고 ‘지체 있는 귀족이라고 할 만한 양갓집’ 아이들이 이런 기막힌 꼴이 되었다고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간혹 군중 속에서 웃음소리나 놀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당장에 그 무례한 자에게 덤벼들어 욕을 퍼붓곤 했다. 어떤 사람은 실제로 웃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하여튼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는 아이들을 이끌고 거리에 나온 미친 여자를 구경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흥미 있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레베쟈트니코프가 말한 프라이팬은 없었다. 적어도 라스콜니코프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폴레치카에게 노래를 시키고 레냐와 콜랴에게 춤을 추게 할 때는 프라이팬 대신에 그 까칠하게 마른 손바닥을 치면서 박자를 맞춰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도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지만, 그때마다 괴로운 기침 때문에 둘째 구절에서 끊어지곤 했다. 그 때문에 또 짜증을 일으켜서 기침을 원망하며 울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화를 돋운 것은 콜랴와 레냐의 울음소리와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사실 아이들의 옷차림에는 그들을 거리의 광대처럼 분장시키려는 충분한 의도가 엿보였다. 사내아이는 터키인처럼 꾸미려고 흰 바탕에 빨간빛이 섞인 두건을 머리에 감고 있었으나, 레냐에겐 적당한 의상이 없었으므로 머리에 죽은 남편의 붉은 털실 모자(모자라기보다 나이트캡이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는)를 씌웠는데, 거기에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할머니의 유물로서 여태까지 가보처럼 상자에 간직해두었던 흰 타조 깃이 꽂혀 있었다. 폴레치카는 평상시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겁먹은 눈으로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그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억지로 눈물을 감추고 있었으나, 어머니의 발광을 눈치채고 불안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거리의 군중 때문에 완전히 겁을 집어먹고 만 것이다. 소냐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곁을 한 시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면서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쉴 새 없이 눈물로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만둬라, 소냐, 그만둬!”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콜록거리면서 빠른 소리로 외쳤다.
“너는 지금 네 자신이 뭘 부탁하는지도 모르는구나, 꼭 어린애처럼! 나는 아까도 너한테 말하지 않았니....그 주벙뱅이 독일 년 집에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나는 온 세상 사람에게, 온 페테르부르크 사람에게 보여주련다. 평생을 충실하고 정직하게 근무했고, 근무 중에 순직했다고 해도 좋을 부친을 둔 지체 있는 집안의 아이들이 이렇게 구걸하고 다니는 꼴을 보여주겠다(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어느새 이런 환상을 만들어내서는 무조건 믿고 있었다). 그 돼먹지 못한 장군 녀석한테 보여주겠다. 암, 보여주고 말고. 그런데 너도 참 바보구나, 소냐. 도대체 앞으로 뭘로 먹고살겠다는 거냐. 지금까지 신물이 나도록 너를 고생시켜왔으니 더는 네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아아,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이었군요!” 그녀는 라스콜니코프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가면서 외쳤다.
“제발 이 바보 아이한테 잘 일러주세요, 이 보다 더 현명한 방법은 없다는 걸! 거리의 손풍금수도 제법 벌이가 되거든요. 사람들이 우릴 곧 알아줄 거예요. 지금은 거지꼴이 됐을망정 근본은 좋은 가문의 불쌍한 가족이라는 걸 알아줄 거예요. 그 장군 놈은 머지않아 면직되고 말테니 두고 보세요! 우린 날마다 그놈의 집 창 밑에 갈 거예요. 그리고 황제께서 거동하시면,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이 애들을 모두 앞에 내세워 보여드리면서 ‘아버지시여, 우리를 보호해주십시오’하고 말하겠어요. 황제는 고아의 아버지시고 자비로운 분이니까 반드시 보호해주십니다. 두고 보세요. 그놈의 장군 따위는 ....레냐! Tenze-vous drote!('몸을 바로 세워라‘라는 뜻) 콜랴, 너는 어서 또 한 번 춤을 춰라. 뭣 때문에 훌쩍이니? 또 울기 시작하는 구나! 아니,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우냐. 바보 같으니, 아아, 정말 이 애들을 어떡하면 좋을까요, 로지온 로마느이치! 이 애들이 얼나나 내 속을 태우는지, 당신이 아신다면! 아아, 이것들을 어쩌면 좋을까!”
그녀 자신도 거의 울다시피 하면서(그렇다고 연방 빠른 소리로 지껄여대는 말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훌쩍거리고 있는 아이들을 가리켜 보였다. 라스콜니코프는 집에 돌아가도록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그녀의 자존심에 호소해보리라 생각하고, 손풍금수처럼 거리를 쏘다니는 것은 그녀의 체통에 맞지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양갓집 자녀를 위한 기숙학교장이 되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해보았다.
“기숙학교라고요, 하! 하! 하! 꿈만은 아름답죠!” 하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외치며 웃었으나, 이내 심한 기침 발작을 일으키고 말았다.
“아녜요, 로지온 로마느이치, 꿈은 이미 사라져 버렸어요! 우린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았습니다. 더구나 그놈의 장군은...아시겠어요, 로지온 로마느이치, 나는 그놈에게 잉크병을 던졌답니다. 마침 사환 방 탁자 위에 잉크병이 있었거든요. 방문객이 서명하고 가는 서류, 나도 거기 서명했지만, 그 서류 옆에 있기에 그것을 장군 놈에게 내던지고 도망쳐 왔지요. 아아, 그렇게 치사스런 놈이 어디 있겠어요, 정말 치사스런 놈이에요. 그렇지만 상관없어요. 이제부터 나는 내 손으로 벌어 저것들을 먹일 테니까, 아무한테도 머리를 숙이지 않겠어요! 그리고 저 애한테도 신물이 나도록 고생을 시켰으니까요(하고 그녀는 소냐를 가리켜 보였다)! 폴레치카, 얼마나 모였는지 좀 보자! 아니, 겨우 2코페이카야? 정말 치사하구나! 혀만 내밀고 남의 뒤를 따라다닐 뿐 돈 내는 놈은 하나도 없구나! 저기 저 등신 같은 놈은 뭘 웃는 거야?(그녀는 군중 속의 한 사람을 가리켰다) 이렇게 된 건 모두 이 콜랴가 못나게 굴기 때문이에요. 저렇게 속상하게만 구니! 넌 어떻게 된 거냐, 폴레치카? 자, 나한테 프랑스어로 말해봐라. Parlez moi fancais('내게 프랑스어로 말해봐‘라는 뜻) 내가 가르쳐주었으니 몇 마디쯤은 알고 있을 게 아니냐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의젓한 집안에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고, 너절한 거리의 손풍금수와는 다르다는 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니! 우린 거리에서 ’페트루쉬카(인형극)‘를 해보이는 게 아니고 품위 있는 로맨스를 부르는 거다....암, 그렇고 말고! 하지만 무슨 노래를 부르면 좋을까? 너희들이 방해만 하기 때문에 우린....실은 로지온 로마느이치, 우리가 여기 잠깐 멈춰 선 건 좋은 노래를 고르기 위해서였어요, 콜랴도 맞춰서 춤을 출 수 있는 노래를.....아시다시피 우린 아무 준비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잘 상의해서 완전히 연습을 한 뒤에 네프스키 거리로 나갈 작정이에요. 거기 가면 상류 사회 인사들도 훨씬 많으니까 우리를 곧 이해해줄 겁니다. 레냐는 ’고향 마을‘을 알고 있어요....하지만 요즘은 어딜가나 ’고향 마을‘이 유행이어서 어중이떠중이 다 그 노래를 부르고 있거든요. 우린 그런 것보다 고상한 걸 불러야 해요....자, 넌 무슨 노랠 생각해냈니? 폴랴? 너만이라도 이 어미를 도와 주려므라! 난 이제 완전히 기억력이 없어져버렸다. 그렇지만 안다면 내가 생각해내는 건데! 그렇다고 ‘경비병이 장검에 기대고’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아, 그렇지, 프랑스어로 ‘Cinq sous'('5수라는 뜻)를 부르자! 내가 너희들한테도 가르쳐주었지, 가르쳐주었잖아. 무엇보다도 이 노래는 프랑스어니까 너희들이 상류 가정의 자녀라는 걸 이내 알 수 있을 거고, 또 딴 노래보다 훨씬 감동을 줄 거다. 그리고 'Malborugh s'en va-t-en guerre!'('말브뤼는 전쟁터로!‘라는 뜻)도 좋겠구나! 이건 진짜 애들 노래라서 상류 가정에선 어디서나 아기를 재울 때 부르는 거니까.“
Malborugh s'en va-t-en guerre(말부뤼는 전쟁터로),
Ne sait quand reviendra(돌아올 기약도 없이)....
하고 그녀는 부르기 시작하다가........
”아니다, 이것보다는 역시 ’Cinq sous'가 좋겠다. 콜랴!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어서, 레냐, 너도 저쪽으로 돌아라. 나하고 폴레치카가 노래를 부르며 박자를 쳐줄 테니!
Cinq sous, cinq sous (단돈 5수, 단돈 5수)
Pour monter notre menage(이걸로 살림을 꾸려가지니)
콜록, 콜록, 콜록! (그녀는 몸부림치면서 기침을 했다.) 옷을 고쳐라, 폴레치카, 어깨가 처졌구나.“
그녀는 숨을 헐떡이고 기침을 하며 주의를 주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더욱 몸가짐을 주의해서 점잖게 굴어야 한다. 보는 사람들이 모두, 양갓집 자녀로구나, 하고 알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그때 허리를 좀 더 길게 해서 두 폭으로 재단해야 한다고 말하잖았니. 그런 걸, 소냐 네가 그때 옆에서 자꾸 ‘좀 더 짧게, 좀 더 짧게’하는 바람에 저 애 꼴이 저 모양이 되버렸어....아니, 너희들은 왜 또 그렇게 우는 거냐! 울긴 왜 울어, 이 바보들 같으니! 자, 콜랴, 빨리 시작해라, 자 빨리, 빨리 하라니까....아, 정말 왜 이렇게 속을 썩일까!....
Cinq sous, cinq sous.
또 순경이 왔구나! 대체 당신은 무슨 일로 왔소?“
실제로 순경 한 사람이 군중을 헤치며 나섰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문관 제복에 외투를 걸치고 목에 훈장을 건(이것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몹시 기쁘게 했으며 순경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쉰 살 전후의 의젓한 신사가 다가와서 말없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3루블짜리 초록빛 지폐 한 장을 쥐어주었다. 그의 얼굴에는 진지한 동정의 빛이 어려 있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돈을 받아 들자 공손하기보다는 정중히 예절 바른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나리.“ 그녀는 갑자기 점잔을 빼며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거리를 쏘다니게 된 건....돈을 잘 간수해라, 폴레치카. 자, 봐라, 이처럼 불행에 빠진 가련한 귀부인을 이내 도와주시는 고결하고 관대하신 어른도 계시단다. 나리, 이 애들이 어엿한 귀족들과 관련이 있다고도 할 수 있는 훌륭한 집안의 고아들이라는 건 곧 알아보시겠죠? 그런데 그 장군 놈은 태연히 버티고 앉아 멧닭 요리를 먹으면서....내가 찾아와 귀찮게 군다고 발을 구르면서 야단치지 않겠어요.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죽은 세묜 자하르이치를 잘 아실 테니 제발 그가 남기고 간 고아들을 보호해주십시오. 돌아가신 주인의 친딸이 쓰레기만도 못한 비열한에게 터무니없는 중상을 받았습니다....더구나 주인이 돌아가신 그날에......’아아, 또 저 순경이! 제발 도와주세요!“하고 그녀는 관리를 향해 외쳤다. ”왜 저 순경은 우릴 못살게 굴까요? 메시찬스카야 거리에서도 못살게 굴어서 이리로 쫓겨 왔는데....아니, 도대체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거야, 바보 같으니!“
”거리에서 이런 짓은 금지되어 있소. 이런 점잖지 못한 행동은 안 됩니다!“
”너야말로 점잖지 못하구나! 나는 보통 손풍금수와 다를 게 없으니, 네놈이 참견할 일은 못돼.“
”손풍금수라면 허가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당신은 어가 없이 제멋대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런 짓을 하고 있으니, 댁은 어디십니까?“
”뭐, 허가라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는 오늘 남편 장례식을 치렀을 뿐인데, 허가라는 게 다 뭐야!“
”부인, 부인, 진정하시오“하고 관리가 참견했다.
”자, 가십시다. 내가 모셔다 드릴 테니....이렇게 사람이 모인 데선 보기도 안됐고....게다가 보인은 몸도 편치 않은 것 같으니.....“
”아니에요, 나리, 당신은 아무것도 모릅니다!“하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외쳤다.
”우린 이제부터 네프스키 거리로 가는 길이에요....소냐, 소냐, 아니, 이 앤 어딜 갔을까! 역시 울고 있구나. 너희들은 왜 모두 이 모양이냐!....콜랴, 레냐, 너희들은 어딜 가는 거냐?“ 그녀는 갑자기 놀란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아, 바보 자식들 같으니! 콜냐, 레냐, 너희들은 도대체 어딜 가는 거야!“
거리에 모여든 군중과 미친 어머니의 괴상한 행동에 겁을 집어먹은 콜랴와 레냐는 순경이 자기들을 잡아서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을 보자,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손을 맞잡고 도망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엾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통곡을 하고 울부짖으며 아이들의 뒤를 쫓아갔다. 숨을 헐떡거리고 울며불며 달려가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모습은 처참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소냐와 폴레치카도 그 뒤를 따라 뛰어갔다.
”데려와라, 저 애들을 데려와, 소냐! 아아, 어미의 마음도 모르는 저 바보 자식들 같으니! 폴랴! 어서 두 놈을 붙잡아라....난 너희들을 위해서.......“그녀는 정신없이 달리다가 발이 걸려 길바닥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나, 몸을 다쳐서 저렇게 피가!.....아아, 이를 어쩌나! 소냐는 비명을 올리며 그녀 위로 몸을 굽혔다.
군중이 와 몰려들어 주위를 둘러쌌다. 라스콜니코프와 레베쟈트니코프는 맨 먼저 달려들었다. 동정하던 관리도 급히 달려왔다. 순경도 뒤따라왔으나 귀찮아질 것을 예견하고 손을 내저으면서 “이런 제기랄!”하고 중얼거렸다.
“비켜요, 비켜!” 그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군중을 쫓아냈다.
“다 죽게 됐군!” 누군가가 외쳤다.
“미친 여자야!”하고 다른 사람이 말했다.
“아아, 하느님 맙소사!” 한 여인이 성호를 그으면서 말했다. “그 계집애와 사내는 붙잡았나? 아아, 저기 끌려오는군. 누이가 잡았구면 ....정말 말썽꾸러기들이야!”
그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몸을 잘 살펴보니 그녀는 소냐가 생각한 것처럼 돌부리에 채어 다친 것이 아니었다. 길바닥을 빨갛게 물들인 선혈은 그녀의 가슴에서 토해진 각혈이었다.
“이건 나도 압니다. 본 일이 있어요.”하고 관리가 라스콜니코프와 레베쟈트니코프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폐병입니다, 이렇게 왈칵 피를 토하고 목이 콱 막혀버리는 건. 우리 친척 여자 하나가 최근에 이렇게 각혈하는 걸 보았어요. 컵으로 하나 반쯤....그것도 별안간에....하지만 어쩌면 좋을까, 이러다간 곧 죽어버릴 텐데.”
“저리 가요, 저리, 내 집으로!”하고 소냐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나는 바로 저기 살고 있어요!....바로 저 두 번째 집이에요....빨리 내 집으로 모셔주세요. 빨리!” 그녀는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애걸했다. “의사를 불러주세요...아아, 이를 어쩌나!”
관리의 노력으로 일은 잘 진행되었다. 순경까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옮기는 일을 거들었다. 그녀는 거의 죽은 상태로 소냐의 방으로 운반되어 침대에 눞혀졌다. 각혈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으나 그녀는 차츰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소냐 말고도 라스콜니코프와 레베쟈트니코프, 그리고 관리와 군중을 쫓는 순경이 일시에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구경꾼 가운데 몇 사람은 문 앞까지 따라왔다. 폴레치카는 벌벌 떨면서 울고 있는 콜랴와 레냐의 손을 끌고 왔다. 카페르나우모프네 집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집주인은 절름발이에다 애꾸눈이였는데 억센 머리칼과 구레나룻이 솔처럼 뻣뻣하게 일어선 괴상한 사나이였다. 어째선지 노상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아내와, 끊임없는 놀라움에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주인집 아들 네댓이 입을 쩍 벌리고 서 있었다. 이런 혼잡한 군중 속에 갑자기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모습을 나타냈다. 라스콜니코프는 군중 속에선 그를 거의 본 기억이 없었기에 어디서 왔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의사와 신부를 불러야겠다는 말이 나왔다. 관리는 라스콜니코프에게 의사는 이미 소용없게 되었다고 속삭이면서도 의사를 불러오도록 조처했다. 카페르나우모프 자신이 의사를 부르러 뛰어갔다.
그러는 사이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숨을 좀 돌리고 각혈도 잠시 멈췄다. 그녀는 병적이면서도 마음속까지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눈으로 가련한 소냐의 얼굴을 응시했다. 소냐는 계모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윽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몸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은 양쪽에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침대 위에 앉혔다.
“애들은 어디 있니?”하고 그녀는 가냘픈 음성으로 물었다. “네가 그 애들을 데려왔니, 폴랴? 바보 자식들 같으니라고! ....글쎄, 왜 도망을 치는 거야...아아!”
그녀의 마른 입술에는 아직도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사방을 살펴보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여기가 바로 네가 사는 곳이구나, 소냐! 난 한 번도 와보지 못했는데.....결국 이렇게 오게 되다니......”
그녀는 괴로운 표정으로 소냐를 바라보았다.
“우린 너를 너무 괴롭혔어, 소냐....폴랴, 레냐, 콜랴. 이리 오너라....자, 다 모였구나. 소냐, 제발 이 애들을 맡아다오....내 손에서 네 손으로 넘겨준다. 나는 다됐어.....이걸로 끝장이야! 나를 놓아다오, 제발 죽을 때만이라도 좀 조용히 죽게......”
사람들은 그녀를 눕혔다.
“뭐, 신부님? ....필요 없다...우리에게 어디 그럴 돈이 있겠니?....나한테 죄라곤 없어....그런 것 없이도 하느님은 용서해주실거다....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잘 알고 계실 테니까....그러나 용서하지 않으신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지!”
불안한 실신 상태가 점점 강하게 그녀를 사로잡았다. 이따금 그녀는 몸을 떨며 주위를 둘러보고 한순간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보기도 했으나, 곧 다시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목쉰 소리를 내며 괴롭게 숨을 헐떡였다. 뭔가가 목에 걸려 꾸르륵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분한테 말햇어....각하!” 한 마디 한 마디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외쳤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나 그 년이 ....아아, 레냐, 콜랴, 손을 허리에 얹고, 빨리, 빨리, 글리세, 글리세, 파- 드-바스크!(‘매끄럽게 매끄럽게 바스크 스텝으로’라는 뜻) 발로 장단을 맞추면서......점잖고 훌륭한 애가 되야 한다.
Du hast Diamanten und Perlen(다이아몬드와 진주는 그대의 것.....)
그다음은 뭐더라? 옳지, 이렇게 불렀지.....
Du hast die Schonsten Augen(더없이 아름다운 눈을 갖고서),
Madchen, was willst du mehr(아가씨야, 그밖에 무엇을 더 바라느냐?”)
그래, 이게 틀림없어! was willst du mehr라니....정말이지 무슨 바보 같은 소릴까! 아참, 이런 것도 있었지....
한낮의 더위에, 다게스탄의 골짜기에서.....
아아, 나는 이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을까....나는 이 노래가 미칠 듯이 좋았단다. 폴레치카....이건 네 아버지가....약혼 시절에 곧잘 부르시던 노래야....아아, 그 시절이 그립구나! 그래, 이게 좋다, 이 노래를 부르자! 그런데 어떻게 부르더라? ....아아,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한번 생각해봐, 어떻게 부르는지!“ 그녀는 몹시 흥분하여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마침내 한 마디 한 마디 외치는 것처럼 숨을 헐떡이면서 시시각각으로 더해가는 경악의 표정을 띠고 찢는 듯한 무서운 목쉰 소리로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한낮의 더위에!.....다게스탄의!
골짜기에서!....가슴에 총알을 품고!.....
”각하!“ 갑자기 그녀는 눈물을 쏟으면서 비통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이 고아들을 돌봐 주십시오! 죽은 세묜 자하르이치의 충성심을 생각하셔서! 귀족이라고도 할 수 있는!....아아!“ 그녀는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와 깜짝 놀란 듯이 주위를 둘러보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 소냐를 알아보았다. ”소냐! 소냐!“ 소냐가 앞에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는 정답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냐, 귀여운 소냐! 너도 여기 있었니?“ 사람들은 또 한 번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
”이젠 그만이야! 가야 할 때가 왔어!....잘 있어라, 소냐, 불행한 자식 같으니, 여윈 말을 죽도록 부려먹은 거야. 아아, 이젠 나도 기운이....없구나!“ 그녀는 증오에 넘친 절망적인 어조로 이렇게 외치고 털썩 베개 위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다시금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이 최후의 혼수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수척하고 싯누런 얼굴은 뒤로 축 늘어지고, 입은 떡 벌어지고, 다리는 경련을 일으키면서 쭉 뻗었다. 그녀는 깊이깊이 숨을 몰아쉬더니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소냐는 시체 위로 몸을 던져 두 손으로 껴안더니 바싹 여윈 가슴패기에 얼굴을 묻은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 폴레치카는 죽은 어머니 발 밑에 몸을 던지고 흐느껴 울면서 그 발에 키스를 했다. 콜랴와 레냐는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나 무언가 굉장히 무서운 것을 예감하고 두 손으로 어깨를 맞잡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한꺼번에 입을 벌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두 아이는 아직도 광대 의상을 걸치고 있어서 하나는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하나는 타조의 깃으로 장식한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그 ‘상장’이 침대 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시체 곁에 놓여 있었다. 바로 머리맡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창가로 물러갔다. 레베쟈트니코프가 그 옆으로 달려왔다.
”죽고 말았군요!“ 레베쟈트니코프는 말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에게 한두 마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하고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다가왔다. 레베쟈트니코프는 눈치 빠르게 얼른 자리를 피해주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어리둥절해하는 라스콜니코프를 더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이번의 모든 뒤처리는, 곧 장례식이라든가 그 밖의 모든 일은 내가 도맡겠습니다. 돈만 있으면 되는 일이고, 전번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한텐 지금 여분의 돈이 있으니까요. 나는 이 꼬마 둘과 폴레치카를 되도록 시설이 좋은 고아원에다 넣어주겠습니다. 소피야 세묘노브나가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게끔 세 남매가 성인이 될 때까지 한 아이 앞에 1500루블씩 맡겨놓겠어요. 그리고 소피야 세묘노브나도 구렁텅이에서 구해주겠습니다. 참으로 착한 아가씨니까요. 그렇잖습니까? 그러니가 당신은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에게, 그 사람의 1만 루블은 이런 식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주십시오.“
”도대체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그런 큰 자선을 베푸시는 겁니까?“ 라고 라스콜니코프는 물었다.
”허, 참! 의심도 많으시군!“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그 돈은 내게 필요없는 돈이라고. 그래, 당신은 단지 인도적인 견지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네? 저 여자는(하고 시체가 놓여 있는 구석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돈놀이 하는 어느 노파처럼 ‘이’는 아니었거든요. 자, 어때요. ‘루쥔이 살아서 비열한 짓을 해야 하느냐, 아니면 저 여자가 죽어야 하느냐?’ 그러니 만일 내가 돕지 않으면 ‘폴레치카 역시 같은 길을 밟게 될’게 아니냐 말이에요.......“
그는 눈을 끔벅이며 눈짓이라도 하는 듯이 명랑한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라스콜니코프를 찬찬히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가 소냐에게 한 말을 그가 되뇌는 것을 듣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뚫어질 듯이 스비드리가일로프를 응시했다.
”아니, 어떻게....당신은 그걸 알고 있죠?“
그는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여기, 이 방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레슬리흐 부인 댁에 머물고 있거든요. 이쪽은 카페르나우모프, 저쪽은 레슬리흐 부인, 예부터 가까운 친구 사이죠. 그러니까 바로 이웃인 셈이죠.“
”당신이?“
”그래요“하고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배를 끌어안고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저 친애하는 로지온 로마느이치, 나는 당신에게 놀랄만큼 흥미를 느꼈다고 단언할 수 있다는 걸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요, 우린 반드시 잘 어울릴 수 있을 거라고 분명히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잘 어울리게 됐군요. 내가 얼마나 사람이 좋은지는 곧 알게 될 겁니다. 나하고라면 역시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아시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