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노무현, 실패한 노무현
노무현을 돌아보는 이유
중앙일보는 한국 대통령의 리더십에 주목하는 특별기획을 계속해 왔다.
일찍이 ‘청와대 비서실’을 통해 박정희 시대를 재조명한 것을 비롯해 전두환 시대의 ‘제 5공 경제 비사’, 김대중 대통령의 외환위기 극복 과정을 면밀히 기록한 ‘금고가 비었습니다’ 등을 연재한 바 있다.
최근 들어 박근혜 회고록을 독점 게재한 데 이어 이번에는 20년 전의 노무현 시대로 시곗바늘을 되돌렸다.
‘성공한 노무현, 실패한 노무현’이 그 제목이다.
역사적 평가 이전에 1차적 관찰과 기록 정리는 당연히 저널리즘의 몫이다.
서점에 가면 노무현 관련 서적이 즐비하다.
유감스럽게도 한쪽으로 치우친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마도 그의 충격적 죽음에 대한 아쉬움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실 노무현은 업적으로나, 인물로나 매우 독특하고 유별난 리더요 대통령이었다.
과연 그는 성공한 대통령이었을까,
실패한 대통령이었을까?
논란거리가 많을 수밖에 없다.
노무현 시대의 재구성을 위해 여러 기록을 뒤지고 당시의 주요 인물들을 만나 밀착 인터뷰를 통해 다시 묻고 확인했다.
객관적이고 균형된 입장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정리·기록하기 위해서다.
안타깝지만 노무현 이야기는 그의 최후로부터 시작한다.
돌이켜보면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은 흑역사의 연속이다.
초대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 중에 생을 마감했는가 하면,
윤보선은 쿠데타로 쫓겨났으며,
박정희는 부하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전두환·노태우는 재판정과 감옥을 오가며 여생을 마쳤고,
이명박 또한 퇴임 후 감옥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자식들이 저지른 비리로 민주투사 명예에 먹칠했고,
재임 중에 탄핵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징역까지 살았던 박근혜 케이스는 더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래도 자살한 대통령은 없다.
조선시대로 거슬러 봐도 없었다.
16대 대통령 노무현이 유일하다.
그는 ‘운명이다’ 라며 2009년 5월 23일 이른 아침 자기 집 뒷산에 올라 몸을 날려 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최후는 정치적 타살론까지 불렀다.
검찰의 표적 수사가 전 정권에 대한 정치적 보복 차원에서 진행됐고, 결국 그를 자살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수사를 지휘했던 검찰 책임자는 노무현 수사 과정과 내용을 낱낱이 까보이는 책을 최근 펴냈다.
피의자 사망으로 수사가 자동 종결되고 수사 조서는 영구 봉인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마치 그대로 복사한 것처럼 구체적이다.
대부분이 실명으로 관련 인물들을 거론했다.
시비를 걸고 싶으면 얼마든지 걸어 오라는 투다.
대체 무엇이 진실인가.
노무현 퇴임 1년이 좀 지나던 2009년 4월께로 되짚어 올라간다.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고삐를 조여 오고 있었다.
뇌물 혐의로 형님 노건평과 후원자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구속에 이어 급기야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 소환이 코앞의 현실로 다가섰다.
비서관 정상문이 체포되자
노무현은 급기야 지지자들에게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라며 봉하 글마당마저 접는다.
사과문도 발표했다.
저와 제 주변의 돈 문제로 국민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리고 있습니다.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껏 저를 신뢰하고 지지를 표해 주신 분들께는 더욱 면목이 없습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중략) 더 상세한 이야기는 검찰 조사에 응하여 진술할 것입니다.
그리고 응분의 법적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거듭 사과드립니다.
조카사위 연철호가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에 대해서도 해명드립니다.
역시 송구스럽습니다. 저는 퇴임 후에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호의적인 동기가 개입한 것으로 보였습니다만 성격상 투자이고, 저의 임무가 끝난 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설명하고 투자를 받았고, 실제로 사업에 투자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사실대로 밝혀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2009년 4월 7일
노무현
사실 노무현은 낙향생활을 시작하면서 측근들과 함께 제2의 인생을 의욕적으로 도모하고 있었다.
대통령 경험을 토대로 진정한 정치개혁을 위한 ‘진보정치의 미래’를 그려내는 작업이었다. 그랬던 것인데, 주변 비리가 터져나오면서 이를 포기하고, 회고록을 쓰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것도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실패와 좌절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참회록을 쓰고자 했던 것이다.
비극의 날 사흘 전인 5월 20일 저녁까지도 목차와 줄거리에 대한 수정 작업이 계속됐다. 그해 9월 출판된 『성공과 좌절』이 바로 미완성 회고록이다.
메모의 시작은 당시 자신의 심경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회고록은 한참 후에 쓰려고 했다. …
그런데 장애가 생겼다.
마침내 피의자가 되었다.
이제는 일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성공과 영광의 기억이 아니고 실패와 좌절의 기억들이다. …
과오는 과오다.
나도 변명하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과오는 과오로 인정해야 한다. …
자책골을 넣은 사람에 대한 처분은 여러분이 할 것이다. …
부끄러운 시민으로 사죄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해 4월 30일 오후 1시 드디어 노무현은 검찰에 출두했다.
조사는 다음 날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형용할 수 없는 치욕의 13시간이었으리라.
겉으로는 법적 다툼의 의지를 천명했으나 이미 내려진 여론재판에 속절없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박연차 회장이 선물했다는 시계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는 치졸한 사람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는 대응하지 않았다.
털어도 먼지 안 나게 살아야 했는데, 그렇게 살지 못한 잘못이 있었다.
그 책임을 스스로 짊어져야 했다.”
노무현을 가장 오래 측근에서 보좌하고 기록해 왔던 윤태영은 그의 막장 심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윤태영,『기록』 255쪽).
변호인으로서 검찰 조사 과정을 시종 함께했던 문재인이 장례 직후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2009년 6월 2일 자)에서 말한 내용은 좀 더 구체적이다.
“(노무현이) 박연차 회장의 돈을 알게 된 것은 올 2~3월께다.
권 여사가 처음에(자식들) 유학비용 정도로 이야기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집을 사기 위한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
(검찰 수사에 대해서) 정치 보복에 의한 타살론까지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
(그러나) 수사와 관련된 여러 상황들이 그분을 스스로 목숨을 버리도록 몰아 간 측면은 분명히 있으니 타살적 요소는 있다.”
문재인의 이 ‘타살적 요소’ 주장이 지금의 정치적 타살론에 불을 댕긴 시작이었던 셈이다. 과연 검찰의 무리한 수사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일까.
정권과 검찰의 관계에 명확한 선 긋기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어렵다.
다만 언론에 보도된 비리 혐의는 대부분 사실이었다.
따라서 검찰이 사건 자체를 없던 일로 하지 않는 한 노무현으로 향하는 수사의 칼끝은 이미 필연이었다.
문제는 정권 개입 여부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물러나는 전임자에게 “전직 대통령 예우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직접 약속한 바 있고,
노무현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 말에 상당히 기대했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다르게 흘러갔다.
이미 청와대나 국정원의 개입이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막연한 소문이 아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소문의 확인은 훗날 노무현 측이 아니라 검찰 스스로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 중수부장인 이인규는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라는 책을 통해 그 전모를 낱낱이 밝힌 것이다.
“수사는 불구속으로 하되, 시계 선물을 언론에 흘려서 도덕적 타격을 주라는 압력이 있었다.”
일방적 주장이라 하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다.
두 군데에서 이 같은 외압이 있었다고 했다.
원세훈 국정원장 지시로 검찰을 담당하는 국정원 국장이 직접 찾아와서 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교 선배이기도 한 청와대 민정수석 정동기가 두 차례 전화를 걸어 청와대 뜻이라며 똑같은 말을 해 왔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청와대와 국정원의 지시를 거부하자,
국정원이 직접 나서서 KBS와 SBS에 흘렸다는 주장이다.
관련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해 가며.
불구속 수사로 전직 대통령 예우의 모양새는 갖추되, 회갑선물로 받았다는 고급시계 스캔들을 퍼뜨려서 망신을 주는 시나리오였다.
주임검사였던 그는 유사시를 대비해서 치밀하게 기록·보관해 왔던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노무현은 이미 만신창이었다.
비록 본인은 몰랐다 해도 문제의 640만 달러 등 드러난 혐의만 해도 그를 무너뜨리는 데는 차고도 넘쳤다.
언론은 연일 중계하듯이 노무현으로 도배했다.
결국 사법절차의 결정을 운명으로 접수할 준비에 들어갔다.
판사 출신 노무현은 서둘러 스스로를 피고인석에 세웠다.
그러고는 판결문을 직접 썼고, 가장 가혹하게 단죄했다.
노무현의 최후를 결코 숭고하다거나 의로운 죽음이라 할 순 없다.
그의 독백처럼 변명할 수 없는 과오가 엄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충격을 넘어서 당시의 정치 상황을 단숨에 바꿔놓았다.
“노무현은 자신을 버려서 모두를 구했습니다.
나락으로 추락하는 자신의 명예를 지켰고, 가족뿐 아니라 폐족(廢族)임을 자칭했던 친구, 동지들까지도 몽땅 구출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버려서 부활한 것입니다. 노무현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첫 정무수석을 지냈던 유인태의 말이다.
망신과 수치를 견딜 수 없어 던진 목숨이 폐족을 부활시키고 자신은 영웅이 된 것이다.
폐족(廢族)
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됨.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제 너희들은 폐족이니 책을 읽는 것에 매진하라”고 했다.
2007년 대선에서 패하자 친노의 핵심 안희정이 “이제 우리는 폐족”이라고 말해 다시 회자됐다.
최근 여론조사(한국갤럽)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일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1위(31%)가 노무현이다.
그것도 2위 박정희(24%)를 큰 차로 앞섰다.
정권 말기에 이르러서는 지지자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던 그가 지금은 압도적 1등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재임 중이었던 2004년 5월 갤럽 조사에서는 박정희가 48%로 1등이었고,
노무현은 7%에 불과했는데….
과연 노무현은 어떤 대통령이었던가.
정근영 디자이너
노무현은 평소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을 가장 존경하며 닮고 싶어 했다.
링컨에 대한 책도 썼다.
그는 평소 여기저기서 “링컨은 암살당했기에 더욱 훌륭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것”이라고 했었다.
설마하니 자신의 운명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 리 만무다.
아무리 링컨을 존경했기로서니 죽음까지 링컨 따라하기를 했겠는가.
다만 결과론이라 해도 죽음으로써 모든 허물을 덮고 ‘영웅’이 되었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한없이 자책하면서 자신을 버렸으나
불과 15년이 지나면서 어느새 많은 이의 가슴속에 우뚝 서 있다.
바로 그런 노무현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쓰고자 하는 것이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96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