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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 32:7)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한 유언과 같은 설교 가운데 한 구절이다. 이것은 자기 민족의 역사를 기억하고 생각하고 어른들에게 배우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시고,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미래를 알지 못하게 하셨니다. 미래는 오직 약속으로만 주셨고, 믿음으로만 보게 하셨다. 그러나 과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기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 만약에 이 기억과 기록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사랑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도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니다.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억과 기록의 산물이다. 그만큼 역사는 우리 기독교인에게 매우 중요한 관심사이다.
신약성경에서도 사도행전 7장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설교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요약이다. 이것이 설교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올바로 역사를 회고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사실 기독교에서 경전으로 삼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선지자들과 신앙인들은 모두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모세는 어떤 애굽사람이 동족인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민족적 울분에서 그 애굽사람을 쳐 죽였다. 그리고 출애굽기 32장에서도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겨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을 때 모세는 31절로 32절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무슨 이야기인가? 하나님께서 자기 동족을 용서하지 않으시면 차라리 자기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달라는 것이다. 자기 동족을 놔두고 자기만 구원받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구약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 로마서 9장에 보면 사도 바울도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자기 골육 친척 즉 자기 민족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나 바울도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자기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 관심과 애착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그 민족의 지도자와 스승이 될 수 있다.
2014년 6월,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3년전에 자신의 교회에서 강연 중에 한 우리 역사에 대한 발언 몇 마디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게 되었고, 결국 이 문제로 국회 인사 청문회도 열지 못하고 마지못해 자진 사퇴 형식으로 두 주만에 물러났다. 문 후보자는 중앙일보 대기자를 지낸 언론인 출신이며, 대형교회인 온누리교회의 장로로 자신의 발언이 교회 내부 강연에서 한 것이며, 우리 민족성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은 서구 선교사의 보고서, 윤치호 일기 등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인용한 것일 뿐이라고 변명함으로써 오히려 그 비난의 화살이 한국교회로까지 향하였다.
더욱이 문 후보자가 사퇴 성명을 발표하기 하루 전인 6월 23일에는 교계의 유명한 목사, 신학교 교수들 국내 121명, 해외 11명이 국민일보와 조선일보에 “문창극 후보의 역사관은 식민사관이 아니라 신앙적 민족사관이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여 문 후보의 역사인식과 그의 입장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이는 한국교회 안에 문 후보자와 같은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문창극 후보자의 발언이 왜 문제가 되는가? 어떤 사람의 역사의식 내지 역사관을 강연에서 한 몇 마디 말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이고, 문 후보자 자신도 극구 부인했지만, 그 발언 내용이나 용어가 서구 우월주의적 편견이나 일제가 주입한 식민사관 내지 제국주의 사관과 맥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지지자들이 이를 “식민사관이 아니라 신앙적 민족사관”이라고 주장하지만, 학계에 이런 용어도 없거니와 있다손 치더라도 그런 역사의식 내지 역사관을 공직자가 가질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특히 문 후보자가 일제강점, 남북분단, 6.25 등 민족의 수난과 시련의 역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 섭리사관의 잘 못된 적용이지 이것을 ‘신앙적 민족사관’이라고 합리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제가 관변학자들을 동원하여 우리 고대사에서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를 왜곡하여 만들어내어 식민 교육을 통해 주입한 ‘식민사관’은 그들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침략 논리였다. 1873년 일본에서 우리나라를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 제기된 이래 일본은 군사력을 동원한 무력에 의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침략뿐만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 침략도 병행했는데, 일제가 관학자들을 동원하여 조작 보급한 식민사관과 역사 왜곡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런 침략의 대표적인 예이다.
지난 1982년 일본 교과서의 우리 역사 왜곡이 언론기관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면서 국민적 분노를 일으켜 일제의 침략 실상을 폭로하고 이와 맞서 싸운 선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국민성금으로 독립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은 우리 역사에 대한 왜곡된 역사상을 수정하지 않고, 기회 있을 때마다 침략의 역사를 부인하고 오히려 그들의 식민지배가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까지 펴고 있고, 뉴라이트 계열의 일부 국내 학자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가 학문의 미명으로 정립한 식민주의 사관의 주요 내용은 타율성론(他律性論)과 정체성론(停滯性論)이다. 타율성론이란 한국사의 전개 과정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우리 역사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부정하는 이론이다. 그들은 한국의 고대사는 식민지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한반도의 북쪽은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 중국의 식민지에서 시작되었고, 한반도의 남쪽은 신공황후 신라 정복설, 남선경영설, 임나일본부설 등을 안출하여 일본이 지배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10년 한국 강제병합도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배하던 옛날로 다시 돌아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일제는 우리나라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도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싸운다고 거짓 선전하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침탈하고, 1910년 식민지로 삼으면서도 한국인은 민도가 낮고 자치능력이 없기 때문에 한국을 문명화시키기 위해서 일본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일제는 러일전쟁 후 만주에 대한 이권을 획득하고, 국책회사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 회사의 지원을 받아 도쿄제국대학교 동양사 학자들을 중심으로 만주지리역사조사실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그 목적은 한국과 만주 등의 경영에 필요한 학문적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만선사관(滿鮮史觀)이라는 것을 창출하였는데, 이것은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분리시켜 한국사와 함께 묶음으로써 중국이 만주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역사적인 논거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나바(稻葉岩吉) 같은 사람은 만선불가분론을 주장하면서 조선사의 자주성을 부정하고, 조선사를 대륙사의 일부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도 한국인의 만주 이민정책을 취하면서 「조종(祖宗)의 고지(古地)」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사관에 의하면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일체가 외래 세력의 압도적인 영향하에 이루어져 한국사의 독자적인 것, 자주적인 것, 발전적인 것이 없다는 논리로 타율성론의 대표적인 이론이다. 미지나(三品彰英)는 1940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 조선사개설의 서설에서 버젓이 “조선사의 타율성”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사의 성격을 부수성, 주변성, 다린성으로 규정하고 한국사의 역사발전 부정하였다.
또한 우리역사는 정치적으로는 사대주의, 사상적으로는 당파성이 강하고, 문화적으로는 모방성이 강하다고 하면서, 이런 나라를 중국은 전례주의적 주지주의적으로 지배했고, 만몽(滿蒙)은 정복주의적 주의주의적으로 지배했지만, 일본은 애호주의적 온정주의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하여 한국사의 독자성 부인하고 일본의 지배를 합리화하였다.
에도시대의 일본 국학의 전통을 잇는 일본사가들도 일본과 조선은 조상이 같다고 하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주장하고 그들의 한국병탄을 「일한동역(日韓同域)의 복고(復古)」라고 주장하여 그들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도 이를 무마시키기 위한 이론으로 기타(喜田眞吉)가 「일한양민족동원론(日韓兩民族同原論)」을 써서 일본 우위의 동조론을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조선지배의 정당성과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타율성론과 일선동조론이 일본 국사학자, 동양사학자들의 주장이었다면, 정체성론은 일본 사회경제사 학자들이 주창하였다. 정체성론이란 한국사는 왕조교체 등 사회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 구조에는 아무런 발전이 없이 전근대적 단계에서 머물러 정체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한국사에는 서구사나 일본사와는 달리 근대사회로의 이행에 필요한 봉건사회가 없었다는 것을 들었다.
이 이론의 주창자는 독일에 유학한 일본경제학자인 후쿠다(福田德三)였는데, 그는 러일전쟁 직전인 1902년 잠시 한국을 여행하고 나서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 단위」(1904)라는 논문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국의 사회경제적 단계는 봉건제가 결여되어, 일본에서 봉건제가 성립된 가마쿠라 시대보다 앞선 고대말 10세기 경의 후지와라(藤原) 시대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1904년 야마지(山路愛人)도 한국을 여행하고 당시의 한국이 8세기경 일본의 나라(奈良)시대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1920년 일선동조론자인 기타도 「경신선만여행일지」라는 글에서 당시 한국인의 생활 풍습이 8세기 일본의 헤이안조(平安朝:794-1185)와 비슷하다고 했다. 이러한 정체성론을 주장한 목적은 한국사의 사회경제적 낙후성을 부각시켜, 이렇게 정체된 한국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한 일본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로 비약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있었다. 현대의 ‘식민지근대화론’ 내지 ‘식민지 공헌론’도 그 아류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이렇게 왜곡된 역사상을 식민지 교육을 통해 주입하고, 학문이란 미명으로 부분적으로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는 문헌자료만을 선별적으로 이용하여 책으로 발간 보급했던 것이다. 일제는 정작 우리의 역사는 교육을 금지하고 역사책을 금서로 탄압하면서도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과장 강조하여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22년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다음과 같은 「조선에서 교육 시책의 요결」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의 청소년으로 하여금 그들의 역사 전통을 모르게 하라. 동시에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무능한 행적, 악행, 폐습 등의 사례, 예컨대 외침을 당해 항복한 수난사, 중국에 조공을 바친 사실 당파 싸움을 들추어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에게 자국의 역사와 조상, 전통, 문화에 경멸감을 일으키게 하여 자국의 모든 것에 혐오감을 느끼게 하라.”
이러한 일제의 식민사관과 식민교육은 우리 민족의 의식과 세계인의 한국이해에 큰 악영향을 주고 아직까지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
우리 민족성의 단점으로 거론되는 의타심 사대성이 강하고 자주독립심이 적으며 당파성 분열성이 강하고 체념적이며, 더럽고 게으르다는 지적도 이런 식민사관 및 식민지 교육의 영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 식민지 잔재의 극복이 철저히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해서 너무 소홀히 해왔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우리 역사보다는 중국의 역사를 더 잘 알았고, 기독교인들도 우리 역사보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나 서양교회사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기독교인들의 역사적 관심이나 역사의식은 그다지 높은 수준이 못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역사에서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첫째로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역사에서 한 왕조가 1,000년, 500년의 역사를 가진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신라 1,000년, 고려 500년, 조선 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둘째로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한글은 조선시대에 만들어 졌지만, 세계 역사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민족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다른 나라의 문자를 빌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문화창조력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셋째로는 고난을 극복하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함석헌 선생은 “우리 민족은 마치 차돌과 같다. 다른 민족이 우리 민족을 삼킬 수는 있어도 결코 소화시킬 수는 없다. 결국은 토해내게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 역사를 공부해 보면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외부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당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삼국시대의 해적인 왜구들의 침략까지 포함해서 960회 이상의 외침과 시련을 당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남북이 분단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민족은 지금까지도 건재해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이러한 외압을 극복하고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반만년의 역사를 유지할만한 저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다타 다카시라는 양심적인 일본인 역사학자는 “한국은 옛부터 외압을 받고, 한국 사회가 외압 속에서 성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한국사의 커다란 특색이다.”라고 말하면서 “한국사의 커다란 발전의 시기는 언제나 외압에서 해방되는 시기와 직접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이런 우리 역사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자기 민족의 역사를 모르고 망각하는 민족은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와 같다. 그래서 성경에도 ‘기억하라’ ‘기념하라’ ‘잊지말라’ ‘마음에 새기라’는 말들이 수 없이 나온다. 그래서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요, 기독교인이 투철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역사에 대한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물론 역사에 대한 비판의식도 필요하지만, 우리 역사에 대한 정당한 자부심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우리 역사를 모두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기독교가 전래되고 나서 기독교나 선교사 때문에 개혁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인식이 아니다. 적지않은 한국기독교인들의 역사의식이 이런데 머물러 있지 않는가 우려된다.
한국교회사를 보아도 지나치게 호교론적인 서술이 많고, 기독교계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도 객관적이기 보다는 편파적이거나 미화 과장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침략전쟁에 협력한 것, 해방 후 한국교회가 독재정권에 협력한 것, 통일교, 천부교, 신천지, 구원파 등 이단에 기독교인들이 현혹되는 것 등도 모두가 한국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역사의식의 결핍에 그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강연 중에 문 후보가 자주 인용한 윤치호의 역사인식 내지 역사의식은 우리가 본받을만한 것이 못된다. 그는 물론 한말 개화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평생 신실한 신앙인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여 “힘이 정의”라고 생각하고,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고 생각하며,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주장하는 대로 우리 민족이 게으르며 의타심이 많고 독립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은 잘못이다.
그는 그런 의식 때문에 1912년 2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였다. 3•1운동 때에도 참여를 거부하고, 오히려 이 운동에 반대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역사상 투쟁하지 않고서 정치적 독립에 성공한 민족이나 국가는 하나도 없다. 싸울 수 없다면 독립을 외쳐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우리가 강해지는 법을 모르는 이상, 약자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1919. 1. 29), “우리 조선인들이 아직 정치적 독립을 위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몇 가지 확실한 증거가 있다.……(3) 기독교 목사들마저 사리 분별력이 떨어져서, 조선의 정신적, 정치적 발전의 현 단계에서는 정치에 간여치 말고 민족의 도덕적 향상에 전념해야 한다는 걸 모르고 있다.”(1919. 5. 10)
그는 안중근의 1909년 하얼빈 의거에 대해서도, 강우규 의사의 1919년 남대문역 의거에 대해서도, 김익상의 1921년 총독부 폭탄투척에 대해서도, 윤봉길 의사의 1932년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안중근의 이토 암살이 병합을 재촉했고, 강우규 의거를 “어떤 얼간이들이 사이토 제독에게 폭탄을 던졌는데”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김익상 의거에 대해서는 “만약 조선인의 소행이라면, 그야말로 백해무익한 행위일 뿐이다.”라고 쓰고 있다.
또한 윤봉길 의거에 대해서는 “한 조선인 공산주의자가 단상에 자리하고 있던 일본인 고위층 인사들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고 한다. 만약 안(창호)씨가 이 비열한 행위에 관련이 있다면, 이로 말미암아 혹독한 고초를 겪게 될 것이다. 그가 그런 일을 저지를 만큼 몰지각한 사람이 아니면 좋을 텐데.”(1932. 4. 30)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의식을 가진 그였기 때문에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 1945년 8월 해방에 이르기까지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임전보국회, 국민총력연맹 등 부일협력 단체의 임원으로, 시국강연과 지원병 징병 유세의 연사로 뛰어 다녔으며,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과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위원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기독교계 지도자들 가운데 윤치호와 같은 부일협력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정춘수 목사, 정인과 목사, 양주삼 목사, 신흥우 박사, 백락준 박사, 김활란 박사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가진 시대인식과 역사인식을 그들이 기독교 지도자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본받을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독교계에서 이들을 비판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기독교인들의 역사의식이 아직도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선교사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우리 민족에게 공헌한 훌륭한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헐버트, 스코필드 같은 소수의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교분리를 내세워 교인들이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지도’하였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문화우월주의에 빠져 우리 민족을 하대하거나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해 몰이해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들의 보고서나 여행기를 무비판 적으로 이용하게 되면 우리도 같은 그릇된 역사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역사의식’은 개개인의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데도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상의 주요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역사의식을 반영하며, 그가 어떤 역사의식을 가졌느냐 하는 것은 그가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갖습니다.
그 한 예로 1938년 9월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신사참배를 결의한 제27회 장로회 총회 부회장으로서 이 결의 직후 최초로 각 노회 총대들을 인솔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하고 그후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하였던 김길창 목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해방 후에 일제강점기 친일행적 때문에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는데, 그 신문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에 대한 반민특위 기소 의견서에 의하면 “① 교인의 황민화운동 추진 단체의 수뇌 인물 ② 황민화운동, 신사참배운동, 민족정신말살운동이 현저 ③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목사 교인을 일경과 결탁하여 탄압케 함.”이라는 범죄 사실에 부연하여, “뿐만 아니라 기미년 3․1운동에 언급하여 3․1운동을 쓸데없는 딴 장난하다가 실패했다고 하며, 33인 중의 기독교 대표자에 대하여 교회를 사욕에 이용할려다가 실패하고 말았다고 했으니 이는 위대한 선열에 대한 큰 모독일 것이다. 조국 광복에 종교계의 공헌이 크다고 하면 할수록 그에 따라 본 피고자의 죄적(罪跡)은 현저할 것이다.”라고 기소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김길창은 피의자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문(조사관 심륜): 기미년 독립운동에 대하여 33인을 모욕한 사실이 있는가?
답(피의자 김길창): 기독교를 이용하여 33인중 신앙을 떠나서 조선독립운동을 한 것은 종교적 입장으로 보아서 오로지 기독교 자체를 모독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지 33인을 모독한 것은 아니올시다.
문: 종교적 입장이든 무슨 입장이든 조국이 있어야 민족이 있고 민족이 있어야 종교가 있는데 종교적 입장만 주창하는 것이 민족의 본의로 생각하는가 ?
답: 물론 종교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조국이 광복함으로써 모든 종교가 윤택해 짐은 사실이오나 독립운동을 방해나 또는 비방한 언사가 아니라 종교적 진리를 말한 것이요, 33인 중 신앙을 떠난 사람 몇몇 공산주의자들이 종교의 본의를 망각하고 기독교를 이용하여 기독교 자체를 모독하였단 말이올시다.
문: 우리 독립 운동 열사들은 교회가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교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 또는 행동을 시작하였고 기타 열사들은 공산주의든 민족주의든 살인방화든 모든 역량을 다해서 오직 우리 조국 광복만 위하여 투쟁한 것이지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모독이 아닌가 ?
답: 대단히 죄송합니다. 본인도 똑 같이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3․1운동을 비방한 사실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하려다가 조사관의 질책을 듣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후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서 실시된 신문에서는 아예 그러한 사실조차 다음과 같이 부인하고, 오히려 증인들을 거짓 증인으로 몰고 있다.
문(특별검찰관 곽상훈): 피의자는 기미 3․1운동은 쓸데없는 딴 장난하다가 실패했다고 설교한 사실이 있다는데 그런가 ?
답(진술자 김길창):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문: 피의자는 3․1운동 당시의 33인중 기독교 대표자는 교회를 사욕에 이용하려다가 실패한 것이라고 설교한 사실이 있는가 ?
답: 그러한 사실도 없습니다.
문: 피의자는 학교를 가지고 있으면서 학생만이라도 적극 황민화운동을 추진하였다는데 그런가 ?
답: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증인 김금순, 동(同) 한익동, 동 김만일, 동 윤인구, 동 박인순, 동 김상순, 동 권세권 등은 피의자가 신사참배는 국민된 도리요, 국가의식인 고로 적극 찬양한 사실과 신사참배 반대 교인을 경찰에 밀고한 사실 및 조선 민족성을 망각하고 황국화하기 위하여 일본 기독교와 합류공작한 사실, 친일적 언사 황민화운동 강연, 기미년 3․1운동은 쓸데없는 딴 장난이었다는 말의 행위를 입증하고 있는데 여하 ?
답: 그런 증언은 모두가 거짓이올시다.”
그렇지만, 같은 시기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저항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거부한 것은 물론이지만, 이러한 시기에 순교함으로써 증인이 되어 불의한 세속 권력과 변질된 공교회를 경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분 가운데 최상림 목사가 있다. 이 분은 신사참배 거부로 1940년에 일경에게 체포되어 해방 직전인 1945년 5월에 평양감옥에서 순교하신 분이다. 제가 이 문제를 연구하다가 1992년 3월 명동 로이얄 호텔에서 이 분의 큰 따님이신 최복음 권사님의 증언을 들었는데, 이 따님이 어렷을 때 목사님을 따라서 산기도를 많이 갔는데 그 때 목사님이 이런 노래를 부르셨다고 하시면서 한 노래를 들려주셨다.
1. 인생아 너 자유 있느냐 있거든 살지며
인생아 너 자유 없느냐 없거든 죽으라
차라리 이 몸이 청산에 무덤이 될지라도
자유 없이 살기는 원치 않노라.
2. 인생아 너 권세 있느냐 있거든 살지며
인생아 너 권세 없느냐 없거든 죽으라
차라리 이 몸이 청산에 무덤이 될지라도
권세 없이 살기는 원치 않노라
저는 여기서 목사님이 의미하신 자유는 신앙의 자유와 민족의 해방을 의미하고, 권세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향유해야 하는 천부인권을 의미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만, 3.1운동에 대한 역사인식과 관련하여 한분만 더 예를 들고 싶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하셨던 문익환 목사이다. 문익환 목사는 유신독재 체제하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완전히 제약 박탈하는 긴급조치 제9호가 발효 중이던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 신구교 합동기도회」에서 함석헌, 김대중, 윤보선 등의 신구 기독교 인사들과 더불어 「민주구국선언서」를 발표하여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이 구국선언서는 문익환 목사가 기초한 것으로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로 3.1절 쉰 일곱 돌을 맞으면서 우리는 1919년 3월 1일 전세계에 울려 퍼지던 이 민족의 함성, 자주 독립을 부르짖던 그 아우성이 쟁쟁이 울려와서 이대로 앉아 있는 것은 구국 선열들의 피를 땅에 묻어버리는 죄가 되는 것 같아 우리의 뜻을 모아 「민주구국 선언」을 국내외에 선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서 “1.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한다.” “2.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3.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다.”라고 선언하고 박정권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고 요구하였다(NCCK 인권위원회 편,1970년대 민주화운동,1987,684-688쪽). 그후 문익환 목사는 수차례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하다가 1994년 1월 18일 소천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유념할 것은 이 「민주구국선언」이 바로 3.1정신과 그 운동에 대한 회상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선열들의 3.1운동 참여를 생각할 때 국민의 기본권마저 억압하는 폭압적 정권에 저항할 용기와 민주화와 통일이라는 민족적 역사적 과제가 뚜렷해졌던 것이다.
즉 똑같은 목사 신분이었지만 한 사람은 3.1운동을 부정적으로 이해하여 친일파가 되었고, 한 사람은 3.1운동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여 민주통일 인사가 되었다. 물론 문익환 목사에 대한 평가는 교계에서조차도 한결같지 않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이 민주구국선언이 유신독재 타파와 민주 통일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여기에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