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에게
내 고향 인천에는
전통적으로 재인들이
활발하게 예술 활동을 했던 권번지역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인천시 중구 용동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인천 용동지역을 답사하다가
경동 신신예식장 자리에서
용동으로 내려가는 골목 계단 길에
‘龍洞券番’이라고 가로로 음각된 계단석을 발견하였습니다.
용동 권번 지역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보존해야 할 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계단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시 차원에서 시급히 보존 대책을 세워야합니다.
용동 지역에는 권번이 자리 잡기도 했지만
1895년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국내 첫 사설공연장이자 극장인
애관극장이 자리 잡고 있어
당대 명인들이 그 무대 위에 섰고
인근 율목동에는
재인 즉 국악인들을 양성하는 국악원이 있어
하나의 문화벨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권번이란 것은 일제 때
기생 조합을 이르던 것으로
노래와 연주와 춤을 가르치고,
기생이 요정에 나가는 것을 관리하면서
화대(花代)를 받아 주는 등
매니저 구실을 하는 기구를 말합니다.
권번은
서울의 한성, 평양의 대동, 부산에 동래,
인천에 용동, 개성에 개성, 남도의 한남권번 등이 있었습니다.
관기제도가 1908년에 폐지되면서
인천에도 관기가 사라지고
1912년에 인천 용동기생조합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던 것으로 미루어
1910년 전후 용동권번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용동권번은 초기에는
인천의 옛 이름인 소성(邵城)을 따서 소성권번이라고도 불렀고
용동권번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고
이후 인화권번으로
다시 인천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기생은
그 옛날의 관기보다는 신세대에 속했고,
카페나 빠 종사자보다는 틀이 잡힌 예술가였다고 합니다.
인천 기생은 수준이 서울보다 낮고,
개성보다는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개성은 갑, 을 2종이었으나,
인천에는 을종이 없었다고 합니다.
용동권번 출신으로는
관기에게 기예와 학문을 가르치던 취은 김병훈,
유행가 가수 이화자(李花子), 김일타홍(金一朶紅)
여류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
춘원 이광수가 사랑했던 학생기생 변혜숙이 있었습니다.
인천의 용동권번은
해방 후에는
서울의 유명 인사들이
인천 용동으로 풍류 나들이가 잦을 정도로
요정촌(料亭村)으로 성수기를 누렸으나
지금은 쇠퇴하여
소규모 식당들과 주점들이 남아
옛날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용동 권번은 한 때
명인들이 기예를 펼치던 명소로서
인천시는 시 차원에서
보다 심도 있는 연구 조사를 할 필요가 있으며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은 보존하고
정리할 것은 잘 정리를 해야 합니다.
또한 용동을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관광명소로
개발할 필요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