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꿈이냐 생시냐? 언감생심 꿈이나 꿔 봤을까?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소식을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인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1963년 미국 흑인노예해방 100주년을 맞아 링컨 기념관 앞, 워싱턴 대행진에 앞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며 인종 차별 철폐와 각 인종간의 공존을 호소했던 킹 목사의 입장에서 보면, 그 꿈이 현실이 된 셈이다.
흑인이자, 이민자 출신을 아버지로 둔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자가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역사에 기록될 일이었는데, 내친 김에 달린다고, 킹 목사가 40년 전 극우파 백인에 의해 서거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에 흑인이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격세지감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할 듯하다.
사실 미국에서 건국 초기에 이민 간 사람들의 자손들을 가리키는 앵글로색슨계 백인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면(WASP) 미국 사회의 주류가 되지 못한다는 공공연한 현실 속에서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신선한 충격이긴 하지만, 그러한 전조는 이미 2003년도에 있었다.
테미네이터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아놀드 슈왈츠네거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당선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9살에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갔던 아놀드슈왈츠네거는 강한 독일식 발음에, 가진 거라곤 건장한 몸뚱아리 밖에 없는 이민자였다. 미국이 아무리 이민으로 이루어진 나라라 해도, 이민자 출신으로 다른 이들은 엄두도 못 냈던 자리에 지금까지 앉아 있고, 그 역시 대권에 꿈이 있음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그런 의미에서 아놀드는 이민자들의 우상이 될 법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있기까지는 숱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 잘 알다시피 미국 남북전쟁은 차치하더라도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대부라는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이는 목숨을 걸고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킹 목사가 흑인 인권운동에 뛰어들게 된 사연은 이렇다. 26살 신학박사학위를 따고, 목회를 시작하려던 지역인 앨라바마 주 몽고메리에서 로자 팍스라는 여인이 버스에서 체포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에선 흑인과 백인이 버스에서 같은 자리에 앉지 않도록 하는 법이 있었다. 로자 팍스라는 여인은 노동자였는데, 하루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버스에 앉자마자, 버스기사가 뒤로 가라고 이야기했다. 이유인즉, 그 자리에는 백인이 타야 할 자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자팍스는 워낙 피곤했고, 뒤에는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거부한다. 잠시 후 백인이 버스에 타면서 자리를 비켜 줄 것을 요구했지만, 역시 거부하자, 버스 기사가 그녀를 경찰에 고발한다. 이 일로 몽고메리 지역에서 시위가 시작되는데, 그 중심에 킹 목사가 서게 된다. 그해 미국에선 유색인종 복지증진을 위한 전국협의회가 만들어지며, 킹 목사에게 의장 자리를 맡기려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킹 목사는 목회 첫 부임지에서 열심히 목회에 전념하려 거절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로자 팍스 사건은 그로 하여금 의장 자리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킹 목사는 의장 자리를 수락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나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시작한 흑인민권운동의 중심에서 킹 목사는 흑인 민권운동을 이끌었고, 숱한 테러와 살해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킹 목사가 로자 팍스 사건으로 몽고메리 지역에서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시작한 건 1955년도 일이었다. 그는 그 운동을 382일 동안 이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동안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니며, 제도의 부당함을 이야기했고, 결국 1956년도에 헌법재판소는 위헌 판결을 내렸다. 그 일을 계기로 미국 전역에서는 흑백 차별을 일삼던 식당, 투표권 등의 정치, 흑백 차별을 당연시하던 학교 등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자는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할 때 이런 말을 했다. "(변화를 위해) 8년이면 충분합니다." 대통령 당선에 대한 불안이 가시지 않던 시기에 재선에 대한 확신까지 갖고 있던 그의 배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배짱과 꿈의 실현은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쏟았던 숱한 이들의 피와 땀과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어쩌면 선배들의 목숨을 건 투쟁의 결과로 그 열매를 따먹는 행운아가 된 셈이다.
나는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이민자 출신의 대통령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민자에게 던져지는 온갖 차별과 따가운 시선만이라도 사라지는 변화가 언제쯤 올 수 있을까 하는 꿈을 꿔 본다. 숱한 다문화가정, 결혼이민자, 이주노동자들이 오바마와 같은 꿈을 꾸고, 아놀드와 같은 비젼을 갖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말한 바와 같은 차별이 없고, 누구나 존귀히 여김을 받는 세상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그런 세상이 이 땅에서 구현될 것이라면 지나친 기대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 변화를 위해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하고 싶고, 그 일을 하는 이들이 많이 나오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