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원국은 본래 여진 홍나라의 백전노장으로 나이 칠순에 이를때까지 여러차례 전장에 나가거나 변란을 진압하며 많은 군공(軍功)을 세웠다. 아들 이름은 대승참인데 젊은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 이름이 준일로 대원국의 손자다. 승참이 세상을 떠나자 원국이 직접 자기집에서 손자 준일을 키웠다. 이때 대원국의 나이 어느덧 70으로 현역장수에서 은퇴했는데 진아라는 어린 후처를 들이게 되었다. 준일이 장성하여 나이 스물이 되자 진아와 간통 아이를 낳았다. 대원국이 나이 80에 세상을 떠나자 둘은 함께 아이를 키웠다. 아들 이름을 ‘민형’이라 지었다.
이때 여진이 화려의 간악한 계교와 몽골의 협공을 당해 한바탕 변란이 일어나 멸망하고 복속치 않는 여진의 귀족과 백성들은 모두 채석장이나 염전밭 노예로 끌려갔다. 진아는 혼자 신분을 숨기고 살면서 민형을 키웠다. 아이가 성장함에 출생의 비밀을 밝혀주고 말하기를 ‘네가 비록 적절치 못한 관계에서 태어났으나 대(大) 여진의 법통과 정신을 이어가야할 자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며 손수 무술과 병법을 가르쳤다.
대민형이 나이 스물이 되자 정체가 발각나서 결국 염전밭 노예로 끌려갔다. 노예생활을 하면서 그것의 국우,부진이란 이를 사귀게 되어 함께 의형제를 맺었다. 또한 그곳에서 공험,이진원,유경,손태,남봉이란 이들을 사귀게 되었는데 모두 옛 여진의 공신,명신의 자손들이었다. 무리를 모아 계교를 써서 이윽고 반란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원래 화려와 몽골이 함께 여진을 협공하면서 빼앗은 영토를 반씩 나누기로 했는데 이후의 합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또한 화려는 말갈의 터전을 따로 마련해주겠다는 약조도 지키지 않았다. 게다가 해적들이 공략했던 동부해안 지역은 이후 사후처리가 말끔히 이루어지지 않아 무주공산이 되었다. 대민형은 이 허점을 이용 먼저 동부해안을 공략 자신들의 거점을 삼고 옛 황도를 공략 마침내 탈취 옛 여진의 수도를 먼저 되찾을수 있었다. 이어 계책을 써서 북방 3개주를 장악한 몽골군을 모두 몰아내고 화려가 차지했던 남부지역은 화려가 이후 관리를 소홀히하는 틈을 타서 모두 몰아내고 마침내 여진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옛 홍나라가 멸망한지 실로 25년만의 일이다. 대민형이 황제가 되어 스스로를 고제(高帝)라 부르니 여진 두 번째 왕조 참나라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고제 1년. 고제가 건국을 선포하고 나라 이름을 ‘참나라’로 하며 조서(詔書)를 반포하여 이와같이 말했다. ‘홍나라가 여진으로 처음 나라를 세워 산업을 융성하게 하고 훌륭한 기술을 발전시켜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였으나 말년에 권신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외적의 간계에 빠져 불행히도 300년만에 나라를 잃었도다. 참나라는 옛 홍나라의 뒤를 이어 여진의 대통을 잇고자 하니 홍나라의 일중 잘한 것은 계승하고 잘못된 것은 폐기,개선할 것이다’ 말하였다. 제신(諸臣)들의 우두머리를 영상(領相)이라 부르게 하고 영상을 보좌하는 제1,제2 재상을 두어 이를 ‘3제상제’라고 했다. 국정의 주요 현안은 황제가 3재상과 함께 논의하도록 했다. 외교,내치,재정,형무(刑務),국방,교역등의 10여개의 부서를 두고 수장의 명칭은 ‘장관(長官)’이라 부르도록 했다. 국정의 주요 현안의 토의와 의결은 3재상 장관들이 함께 모여 하도록 하니 이를 ‘각료회의’라 부르게 했다. 행정은 옛 홍나라의 것을 그대로 본따 12주로 하고 각 주별로 시와 군현을 두도록 했다. 이웃나라에 사신을 보내 특히 이전 왕조시절의 인연과 악연을 말하며 앞으로의 관계를 개선토록 했다.
고제 2년.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와 홍나라가 300년만에 쓰러진것에 대한 위로와 새 나라 건국을 축하하였다. 양국의 친교와 교역은 앞으로도 지속토록 하였다. 화려가 사신을 보내왔는데 지난날의 일을 사죄하는 의미로 금,은 천관과 약재와 각종 야채 1천관을 보내왔다. 황제가 흔쾌히 받아들이고 지난날의 악연이 다시는 없도록 다짐을 두었다.
고제 3년. 몽골에 사신을 보내 지난날의 침략을 사죄토록 하나 몽골이 듣지 않았다. 오히려 일시적으로 자신들이 빼앗았던 여진의 북부4주를 돌려줄 것을 요구해 가당치 않다 거절하고 ‘오천리 장성’ 이남을 범치 말 것을 거듭 요구하였다. 흉노가 사신을 보내와 말하기를 지난날처럼 중원,하북과의 교역,사신로를 허가하되 통과비용을 올려줄 것을 요구하였고 지정된 교역로 외에는 다니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황제가 고민 끝에 이를 결정하였다.
고제 5년. 말갈이 사자를 보내 자신들의 터전을 마련해줄 것을 거듭 요구했으나 중신들이 반대하였다. ‘말갈은 풍습이 미개하고 여러분 우리의 뒷통수를 친 바 들어주어선 아니된다’ 하여 사자를 돌려보냈다.
고제 10년. 영상 몽진이 상소를 올려 간하기를 ‘여진이 이전에 바다를 건너 남부 많은 나라와 교역하였고 멀리는 동쪽바다 험난한길을 5천리까지 나아갔습니다. 동쪽은 험난한 파도와 망망대해뿐이라 더는 실익이 없으나 남쪽은 수많은 따뜻한 나라가 있어 교역할 가치가 많나이다. 청컨대 남쪽 바닷길을 개발하소서’ 하여 고제가 허락하고 바다를 통한 남부 교역길을 더 개팔,소통하도록 했다.
고제 12년. 황제가 본래 노예시절 고생할 때 말갈녀 승미(承美)란 여인과 정분이 나 부인으로 맞은뒤 아들을 낳았다. 이후 천하대사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옛 홍나라 공신집안의 자손 안씨(安氏)를 다시 부인으로 맞았다. 이후 즉위한뒤 처음 황제가 승씨를 ‘제1비’로 안씨를 ‘제2비’로 봉하려 했으나 여러 신료들이 앞다투어 반대하였다. ‘그 옛날 홍나라에서 근본없는 흑녀(黑女)를 중전으로 맞아 후사를 본뒤 여러차례 변란이 끊이지 않는 근본원인이 되었사옵니다. 홍나라 시절에도 이랬는데 하물며 천한 말갈녀를 지금 본부인으로 맞으시면 항차의 일을 어찌하시렵니까. 폐하께서 이미 여진의 정통성을 승계코자 참나라를 세우셨으니 마땅히 후사도 여진의 혈통이 이어가야 합니다’ 하였다. 여러 논의와 격론이 있었으나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황제가 고민을 안비(安妃)와 상의하니 안비가 말하기를 ‘대원(大原 : 말갈녀 승씨의 소생으로 고제의 장자)’이 비록 소녀가 낳지 않았으나 이미 장성하였고 또 비록 그 모후가 말갈인이라 하나 그 핏줄의 반이 이미 대왕의 것이니 어찌 여진의 법통이 끊어진다 할수 있으리이까. 또한 소첩에게 비록 어린 아들이 있으나 장성한 전실소생을 핍박한대서야 어찌 후덕한 여인의 덕모요 일국의 왕후가 취할 도리라 하겠나이까. 마땅히 폐하의 뜻대로 하소서‘ 하니 고제가 비로소 말갈녀 소생 장자를 후계자로 삼았다. 안비가 소화불량이 걸려 석달동안 별궁에서 나오지 못하였다.
고제 15년. 한 상신이 표를 올려 말하기를 몽골은 여전히 우리에게 복종치 않고 호시탐탐 노리니 일이 심상치 않을것이옵니다. 마땅히 방비하소서 하였다. 이에 병무처을 확대,개편하여 새로운 병장기 개발에 힘쓰고 또한 오천리 장성의 낡고 무너진곳 수리를 독려하여 더 튼튼한 장성을 쌓도록 하였다. 병무에 힘써 날밤을 새는줄을 몰랐다.
고제 18년. 북쪽 등주(登州) 태진시(泰眞)시에서 60살 넘은 대장장이가 스무살 어린 부인을 맞아 딸 다섯을 보았다. 여인은 본래 전란과정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를 거둔것이었다. 황제가 보고를 받고 대장장이 부부와 자녀들을 불러 크게 선물을 내리고 치하하니 이는 옛 홍나라의 법도를 따른 것이다.
고제 22년. 고제가 재위에 오른지 22년만에 하늘로 돌아가니 홍나라가 외적 오랑캐에 의해 스러진지 25년만에 여진의 법통을 잇는 참나라를 세우고 실로 20여년만의 일이요, 이때 나이 62세였다. 논란 끝에 일단 말갈녀의 자손인 장자 대원을 황위에 올리고 존명(尊名)을 대제(大帝)라고 지었다. 안비는 선황(先皇)의 유지에 따라 옥새를 전하였으나 많은 신료들이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때 대제의 나이 33세다.
대제 2년. 신료들이 좀처럼 황명을 받들지 않으니 마침내 대제가 슬피 울다가 중화전(中華殿 : 여진 황궁에서 즉위식,혼인식 같은 대행사를 치르는 광장같은 장소. 굳이 비유하자면 경복궁 근정전 같은곳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에 5품 이상의 신료들을 모이게 한뒤 모후인 말갈녀 승비(承妃)를 끌어내어 발가벗긴뒤 채찍으로 몸소 300대를 때렸다. 그리고 울면서 말하기를 ‘내 이렇게 천한 말갈피를 받은 어미와의 연을 끊고자 하니 이제 경들이 나를 황제로 인정하겠는가 ?’ 하였다. 오히려 여진의 선비 700여인이 모여 ‘자식으로써 어미를 때린 것은 천하없는 패륜이니 만백성의 모범을 보여야할 황제가 이런 무도한 짓을 저지르니 있을수 없는 일이로다’ 하며 황제를 탄핵하고자 하는 연좌상소를 올렸다.
대제 4년. 원인을 알 수 없는 뇌성벽력이 치고 지진이 일어나며 해일이 있었다. 많은 백성들이 천한피를 황위에 올린 인과로 일어나는 변괴라 수군거렸다.
대제 6년. 황제가 오랜시간을 잠못이루며 슬피울다가 어느날 갑자기 황궁을 나가버렸다. 100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그 행방조차 찾을길이 없었다. 황제가 자리를 비우니 하는수없이 안비(安妃)가 중신들과 국사를 의논했는데 재상 부관이 아뢰었다. ‘일국을 다스리며 백성을 평안케해야할 황제가 이유도 없이 황궁을 나가버려 그 책무를 스스로 저버렸으며 신료들과 아무런 상의없이 황궁을 나가 그 소식조차 전하지 않으니 군신의 의조차 끊어졌사옵니다. 이제 황제로써 천도(天道)를 그르치고 군신의 의마저 저버린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여진의 법통을 세우소서’ 하였다. 안비가 고민하다 마침내 입열어 말하기를 ‘내 오로지 선황의 유지만을 받들뿐 다른뜻이 없었는데 시절이 하수상하니 어찌하면 좋은가. 대세를 따라 천지의 도리를 세울 수밖에 없도다’ 하고 마침내 자신의 아들 홍석(弘錫)을 황위에 앉혔다. 이때 나이 29세요 그가 3대 중제(中帝)다.
중제 2년.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와 말하기를 ‘남쪽의 화려는 자신들이 옛 구려(句麗)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며 특히 우리 거란과 귀측 여진의 땅이 옛 구려의 땅이라며 늘상 공공연히 회복의 뜻을 밝히고 있소. 또한 북쪽에도 몽골이 뒤늦게 나라를 세워 자신들의 땅이 척박하다는 이유로 호시탐탐 거란과 여진을 노리니 우리 두 나라는 남북 양쪽에서 도전을 받는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소이다. 일전에 귀측이 화려와 몽골의 간악한 계교에 빠져 일시적으로 패망한 것 역시 남북 양쪽의 협공을 당해내지 못한이유 아니겠소 ? 따라서 둘이 손을 잡고 이를 방비토록 합시다’ 하니 황제가 옳다 여겨 몽골과 화려의 침략을 대비하는 군사훈련을 함께 실시하도록 했다.
중제 6년. 화려에서 사신을 보내와 말하기를 ‘화려가 옛 구려를 계승하였는데 옛 구려의 명군(明君) 선광태왕(宣廣太王)으 릉과 비가 여전히 여진땅에 있어 우리가 찾을수도 없고 제사를 지낼수도 없소이다. 청컨대 유리가 선광태왕의 릉비를 지금이라도 찾아 선대의 제를 올릴수 있게 허해주소서’ 요구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지 아니하였다.
중제 8년. 멀리 남쪽 방원국(方院國),호치국(鎬治國),신명국(信明國)등에서 사신을 보내와 황제가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들의 예물을 받고 답례의 선물을 내려보냈다. 이들 나라들은 오,월,초 남쪽으로 300리 떨어진 ‘드림국’에서도 남쪽으로 500여리를 더 내려가야 위치해있다 하였다.
중제 11년. 무원(武院)이라는 학자가 있어 ‘법치와 국방’으로 나라를 온전히 다스리는 이치에 대한 책을 썼다. 그리고 황제에게 표를 올려 말하기를 ‘신이 오로지 평생을 어찌하면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 백성들의 삶을 평온케 할까를 연구하다보니 그 이치가 오직 법치로써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고 국방을 강화해서 외적의 침입에 늘상 대비하는걸밖에 없었나이다. 청컨대 이를 근본학문으로 후진을 양성코자 하니 허해주소서’ 하였다. 황제가 가하다 여기고 별도의 연구청을 두어 무원이 자신의 학문의 계보를 잇는 후학을 양성할수 있게 하였다.
중제 14년. 중제가 본래 나이 20세때 명문가 염씨를 처음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염황후가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석봉(錫鳳)이라 지었다. 허나 염황후가 태자를 낳고 오래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니 중제가 후궁으로 초희와 원미란 두 여인을 들여 두 여인으로 하여금 태자에게 젖을 먹여 키우도록 했다. 태자 나이 아직 어려 후계자로 세우진 못했다.
중제 17년. 상환식(商換式)이란 거상(巨商)이 있어 주변국가는 물론 멀리 중원과 서량 그리고 바다건나 머나먼 남쪽나라까지 교역을 하며 떼돈을 번 자였다. 하루는 손수 황제에게 표를 올려 말하기를 ‘여진이 비록 농사지을 땅은 풍족하오나 주변에 외적 오랑캐가 많고 동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어 국력을 뻗어나가게 하기엔 많은 제약이 있나이다. 이제 신이 생각건데 오직 나라와 백성들의 삶을 윤택케 하는데는 보다 많은 나라와 교역을 하여 선진물산을 받아들이고 과학과 기술을 융성케하는 방법밖에 없나이다. 허락해주소서’ 하니 황제가 가하다 여기고 합당한 인재를 키우는 시설을 세우는 것을 허하였다.
중제 22년. 중제가 본래 제1비 염씨와의 사이에 태자 석봉을 낳았으니 이후 염씨가 세상을 떠나니 후궁들에 의해 길러졌다. 이후 중제가 묘씨(妙氏)를 후비로 들였으나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중제가 나이 50에 이르매 희도(姬桃)라는 궁녀가 눈에 들어 그녀를 후비로 들였다. 이때 희도의 나이 21세다. 태자가 장성하여 어느덧 23세가 되니 교류하던 친우 백통운,황장무,법정식등이 부추기기를 ‘황제가 어린 후비를 들여 총애하고 있으니 만약 후사를 볼 경우 태자의 지위가 위태로울것입니다. 마땅히 먼저 도모하소서’ 하였다. 태자가 차마 부황을 범할 수는 없다며 결정을 못하자 이들은 마침내 희도가 측근들과 함께 태자를 제거하려 한다는 거짓 물증을 만들어 거듭 태자를 부추기자 태자가 격노하여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몰아내고 23세 나이로 즉위하니 그가 4대 상제(商帝)다. 측근들이 희도를 목벨 것을 간하였으나 희도가 울며 황제에게 억울함을 말하니 황제가 오히려 희도를 취한뒤 그녀를 정비로 삼았다. 희도가 이후 상제와 26년을 함께 살며 아들 열둘을 낳았다.
상제 2년. 문주시(文珠市)에 우희라는 여인이 살았는데 남편 재산이 탐나 애인과 짜고 남편을 독살한뒤 애인마저 계곡으로 유인하여 강물에 빠트려 죽었다. 황제가 보고를 듣고 대노하여 ‘세상 둘도없는 악녀로다’ 하고 저자거리에서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능지처참케 하였다.
상제 5년. 황제가 즉위후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동지인 법정식의 측근 백홍과 원진을 남부 화려와의 국경지대를 방비하는 일을 맡겼다. 허나 이들이 뇌물을 받고 방비를 소홀히하며 심지어 성내에 말갈인들을 거주케 하는 것이 드러나 황제가 격노 이들을 파면,귀양 보낸뒤 실무경험이 있는 민제와 이음을 보내 남방국경 방비를 맡겼다.
상제 7년. 황제의 측근 황장무는 황제를 도와 함께 쿠데다를 일으킨뒤 북방 4개주의 일을 모두 총괄하는 ‘4주 총관 절도사’를 맡아 늘 지방을 순시하였다. 순시하며 보니 오천리 장성 곳곳이 허술하고 무너진곳이 많아 황제께 표를 올려 무너진곳을 모두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좀 더 강화토록 했다.
상제 10년. 성문시(成門市)에 나이 20에 스무살 많은 남편과 결혼 이후 전처소생 7남매를 키운이가 있었다. 남편이 죽은뒤에도 20년동안 혼자 일곱아이를 모두 키웠으니 황제가 보고룰 듣고 ‘여중군자(女中君子)’라 부르게 하고 후한 상을 내려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상제 13년. 이상한 배 한척이 국경지대에 들어와 잡아서 조사해보니 실은 몽골에서 상선(商船)으로 가장하여 동남방 섬나라로 보내는것이었다. 둘이 손잡고 반도 혹은 거란인으로 가장하여 여진을 치자는 밀서가 적발되었다. 상선에서 붙잡힌 모든이들을 처벌하고 몽골에는 사신을 보내 항의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의심과 논란이 많이 들어 한 신하가 간하기를 ‘동남방에는 원래 크고작은 7천여개의 섬이 있고 사는이들이 그리 많지 않아 반도는 물론 우리 여진도 오랫동안 신경을 쓰지 않았나이다. 듣기로 예부터 반도인중에 죄를짓고 그곳으로 도망쳐 사는이들이 종종 있다고 했으나 여진에선 거리도 멀어 굳이 그곳까지 달아나는 이는 많지 않았나이다. 동남방의 야만인들은 종종 자신들끼리 해적단을 조직하여 반도는 물론 여진의 해안가를 습격하는일도 종종 있었나이다. 이제 그 세력이 갈수록 커지는듯하니 엄중히 조사하소서’ 하였다. 황제가 의아하여 묻기를 ‘이전 홍나라때 우리가 특별히 바다에 관심을 가지고 동쪽으로 5천리를 나아간적이 있었다. 섬나라 해적을 만나 그곳에서 5천리를 더가면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이 있다고 들었으나 우리가 믿지 않아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헌데 이번 동남쪽 야만인들의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 지리학자가 손수 지도를 펼쳐보며 말하기를 ‘이전에 우리가 동쪽바다로 나아간 일은 동쪽마다 수천리 건너 새로운 세상이 혹시 있지 않을까 하는 지적 호기심 차원이었고 동남방 섬나라는 반도에서 백여리정도 떨어진곳에 위치해있으니 본질적으로 다르나이다. 동남방의 야만인과 해적은 마땅히 경계해야할 무리이옵니다.’ 하였다. 황제가 좀더 정밀히 조사할 것을 명하였다.
상제 16년. 화려에서 사신을 보내 진귀한 동물을 바쳤다. 형상이 마치 사슴이나 노루와도 흡사하며 얼핏 보면 멧돼지와도 같은 참으로 이상하고 기이한 동물이었다. 황제가 손수 ‘성잔(星珍)’이라 이름하고 황궁내 동물원에서 키우게 했다.
상제 19년. 이 무렵 황제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던 친우,동지들이 사고나 질병으로 연달아 세상을 떠나니 황제가 큰 실의에 빠졌다. 술을 마시면 심지어 사흘간이나 정무에 나오지 않는일까지 있었다. 신료들이 의원과 함께 논하기를 ‘황제께서 아무래도 깊은 심병(우울증)에 걸리신 듯 하니 젊은 여인이라도 붙여 옛 기력을 회복케 하시는게 좋겠나이다’ 하였다. 궁녀중 특별히 미인 둘을 뽑았는데 이름을 초희와 영진이라 불렀다. 두 여인을 보니 황제가 그제서야 기뻐하며 기력을 회복하였다. 다만 황제가 이들을 총애하는 것을 보고 황후가 씁쓸해하며 말하기를 ‘내가 아무리 아들을 많이 낳아줘도 소용없구나. 젊은 여인에게 빠지는 것은 동서고금 모든 남자에게 통하지 않을수 없는 이치이련가. 혹시 저 멀리 다른우주에 다른 세상이 있다면 그곳 남정네들은 혹시 다를지 심히 궁금하도다’ 괴이(怪異)한 말을 남기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奇異)하게 여겼다.
상제 22년. 동남방 섬나라를 정밀조사하러 떠난 조사단이 3년만에 돌아와 보고하길 ‘동남방 섬나라는 이전부터 알려진대로 역시 반도에서 동남쪽 500여리 떨어진곳에 위치해 있으며 7천여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져있나이다. 땅이 척박하여 농사를 짓기 적절치 않고 적은 인원이 곳곳에 흩어져 소수 부족이나 도적떼를 이루고 살고 있나이다. 바닷가에 사는 이들은 어업에 종사하기도 하나 때론 해적떼가 되기도 합니다. 허나 해적은 주로 가까운 반도지역을 예부터 습격했을뿐 여진까지는 거리가 멀어 미치지 못하나이다. 다만 몽골이 이들을 부추겨 이전 홍나라의 변때처럼 여진의 바닷가를 언제든 습격케할 가능성은 있으니 대비하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하여 그 정도의 보고를 받고 일단 동남방의 섬나라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이전의 노선대로 남쪽바다를 이용 더 많은 대륙의 남쪽나라들과의 교류에만 힘쓰도록 했다.
상제 25년. 노금(盧錦)이라는 대장장이가 작업중 사고로 황제의 신임하는 측근 백운의 눈을 상하게 하여 백운이 두 눈이 멀게 되었다. 노한 황제가 쇠몽둥이로 노금을 300대 때려 죽게하였다. 대신들이 ‘노금은 나라의 실력있는 기술자니 함부로 죽게하여선 아니되나이다’ 거듭 간하였으나 소용없었다.
상제 26년. 상제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태자 운(雲)이 제위에 오르니 이때 나이 25세요 상제와 나황후(궁녀 희도)사이에 열두아들중 장남이다. 상제가 세상을 떠날 때 황후의 손을 잡고 ‘다 내죄로다’ 슬피우니 황후가 오직 화답하기를 ‘신의 자손으로 여진의 혈손이 이어가게 되ᄋᅠᆻ으니 여한이 없나이다’ 할뿐이었다. 태자가 즉위하니 5대 충제(忠帝)가 되었다.
충제 2년. 멀리 남쪽의 해룡국,도원국,토일국등에서 사신을 보내와 예물을 바치니 황제가 답례품을 내리며 노고를 치하하였다. 여진이 오,월,초 이남쪽의 교류하는 나라들은 이때에 이르러 20여개국에 달했다.
충제 4년. 가극단에 절창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황제가 직접 불러 황궁에서 공연을 하게 했다. 이름이 옥희라고 했는데 창의 내용은 대략 이와 같았다. ‘그 옛날 고조선이란 나라에 덕담이란 왕자가 살았다. 명문가 여식 온녀(溫女)를 사모하였으나 부왕의 눈에 들어 그의 후궁이 되었다. 덕담의 친구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추겼으나 덕담은 끝내 듣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덕담이 즉위한뒤 온녀를 나라의 태후로 삼고 황실 어른으로만 삼은채 대접하게 하고 다만 취하진 않았다. 덕담도 적절한 나이에 부왕이 맞이하게 한 정비(正妃)가 따로 있었으나 덕담의 본래 마음이 온녀에게 있어 정비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측근들이 후궁을 맞이하게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덕담은 온녀를 잊기위해 그녀에 대한 사모하는 감정이 솟아날때마다 전쟁을 일으켜 북방 오적(五敵)과 남방 3적(三敵)을 토벌하며 나라의 영토를 세배이상 넓혔다. 황제가 승하하니 그의 시호를 나라의 영토를 무척이나 넓혔다 하여 광태왕(廣太王)이라 시호를 올렸으나 그의 사모하는 마음은 천지에 누가 있어 알아줄꼬’ 하는 내용이었다. 듣는이중 눈물을 흘리지 않는이가 없었다. 황제가 치하하며 상금 100냥을 내리고 옥희를 국창(國唱)이라 부르게 했다.
충제 6년. 동남방 해적 만공과 만일이 200여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여 귀순을 받아주었다. 동남방 해적떼가 투항해온일은 여진이 생긴이래 이때가 처음이다. 예부터 동남방 섬나라 무리들은 반도로 투항하는 경우가 많았고 반대로 반도에서 죄를짓고 동남방 섬나라로 달아나는이도 많았다.
충제 10년. 황제에게 본래 요씨(搖氏)라는 정비(正妃)가 있었는데 이 무렵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1년넘게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신료들이 후비를 들일 것을 권하니 황제가 오랜시간 망설이다 가납한뒤 명문가 여인 두명과 궁녀 두명을 혼인청(婚姻廳)을 통해 추천받았다. 황제가 살펴본뒤 이중 가장 못생긴 두씨(杜氏) 여인을 후비로 삼았다.
충제 13년. 화려에서 사신을 보내와 말하기를 ‘여진과 화려의 접경에 영흥과 경흥 그리고 마흥이란 지역이 있는데 우리 화려에서 예부터 ‘3흥지대’라 불렀나이다. 그곳은 옛날 구려의 땅이었고 지금은 여진과 화려가 맞대고 있어 누구 땅인지가 애매하고 지금은 심지어 말갈인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 되어있나이다. 청컨대 ‘삼흥지대’를 화려와 여진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지역으로 한뒤 그곳에 말갈인들을 한곳에 모여살게 하면 더 이상 국경분쟁도 없고 수백년 방랑하던 말갈인들에게 새로운 터전도 마련되지 양국이 말갈인에게 선의를 베푸는일이 될것입니다. 여진의 뜻을 듣고 싶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충제 16년. 충제가 세상을 떠나니 이때 나이 41세다. 태자 무운(武云)이 황위에 오르니 이때 나이 14세다. 황제 나이 어리고 섭정을 할 황비도 마땅찮으니 원로대신들이 모여 ’원상회의‘에서 국정을 총괄토록 했다. 태자는 6대 질제(質帝)가 되었다.
질제 2년. 이레적인 지진이 일어나 원상회의를 열어 피해상황을 보고받고 복구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이재민들을 구호하고 위로토록 했다. 말갈인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몰라 방비를 강화하였다. 원상회의에서 몇몇 상신들이 말하기를 ‘말갈은 몸속의 세균과도 같고 가을 병충해와도 같아 진압하고 진압해도 끈질기게 되살아난다. 끊임없이 방비를 늦춰선 안된다’ 하였다.
질제 4년. 정체를 알 수 없는 말갈의 독녀(毒女)무리가 황제의 무릎을 쏘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방으로 공개수배하였으나 끝내 잡히지 못했다. 황제의 병이 쉬이 낫지 않았다.
질제 6년. 황제가 2년전 말갈의 독녀에게 맞은 무릎상처가 악화되어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때 겨우 나이 20세다. 간교하고 악독한 무리에 의해 총명하고 어린 황제가 일찍 죽으니 모두 슬퍼하였다. 질제에게 후사가 없으니 상제의 차자 명(鳴)의 아들 도영(圖影)을 황위에 올리니 이때 나이 17세요 그가 7대 환제(煥帝)다.
환제 2년. 황제가 직제를 일부 개편하고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영상에 도운, 제1재상에 염민, 제2재상에 오민우 행정장관에 유루나, 법무장관에 어승기, 국방장관에 도승일, 산업장관에 홍태을, 정보처장에 신우현등을 임명하였는데 대다수가 서계(西系)출신이었다. 원래 중제시절에 법치와 국방을 중시하는 무원의 후계자를 키우는 학당을 세워 여기서 자란 제자들을 서계(西系)라 부르기 시작했고 교역과 기술,과학 발전을 중시하는 상환식의 학파를 동계(東系)라 불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계출신이 대거 등용되자 동계출신의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환제 5년. 동계출신 엄민일,서탁보,정국진등이 뜻을 모아 서계출신 영상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렸다. 진상을 조사해서 무고임이 밝혀졌으나 원인이 동계출신 홀대로 인한 불만임이 밝혀져 동계출신 엄민일을 산업장관에 서탁보를 교역장관에 임명해서 일시적으로 불만을 가라앉힐수 있었다.
환제 7년. 정보처장에 나민국이란 이를 임명했는데 역시 동계출신이다. 서계츨신들이 나민국의 이전 전력과 부패가 심함을 들어 반대하니 한달만에 경질하고 서계의 유만준을 임명하였다. 그러자 이번엔 동계가 반발하였다.
환제 10년. 남부 작은 마을에서 반란이 일어나 장수 정보섭을 보내 진압할수 있었다. 헌데 서계출신 일부가 이 반란에 동조한 것이 드러났다. 황제가 진상을 조사하여 서계출신들을 처벌하였다.
환제 13년. 반도에서 화려가 개국 500년만에 막을 내리고 OO이라는 이에 의해서 새왕조가 세워졌는데 왕조 이름을 금선(金鮮)이라고 했다. 정전과 황한식이라는 이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이들은 모두 OO을 추대해서 금선왕조를 세우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1등 개국공신이라고 했다. 금선왕조 새 군주의 친서를 올리니 내용이 이와 같았다. ‘반도가 예전 화려때는 북국(北國)과 이런저런 악연이 많았으나 이제 옛 악연을 끊고 화친코자 한다. 원컨대 귀국의 공주를 본국의 왕자와 혼인시키는 혼인동맹으로 양국 백성들을 자자손손 평안케 하길 바란다’고 하였다. 황제가 거절하며 말하기를 ‘반도는 옛 화려시절부터 크고작은 악연이 많았고 심지어 말갈,몽골등과 간교히 교통하여 우리를 멸한적도 있었다. 이러한 과거악연이 명명백백하거늘 화친이나 교역도 마땅치 않을판에 혼인동맹은 더더욱 당치 않도다’ 하였다. 일부 신료들이 이견일 말하기를 ‘비록 여진과 화려가 예부터 악연이 많았으나 이제 새 왕조가 세워졌다 하고 신국의 군주가 화친을 청하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청컨대 폐하께서 다시 깊이 생각해보시오소서’ 하였다. 일단 사신들을 적당한 예물을 주어 돌려보냈다.
환제 16년. 금선이 다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데 이번에 보낸 사신은 한승희란 역시 개국공신이고 언변이 보통이 아니었다. 황제가 사신을 돌려보낸뒤 금선을 개국한 OO이 어떤 인물인지 은밀히 알아보라고 하였다. 몇몇 세작이 보고하기를 ‘어떤이는 용이 반도백성과 교통하여 낳은자라 하고 또 어떤이는 구미호를 천한 사냥꾼이 우연히 얻어 사통하여 낳은이라 하더이다’ 하였다. 모두 해괴한말이라 다시 정밀조사토록 했다. 어떤이들이 말하기를 ‘구미호나 용이 낳았다는 것은 모두 허무맹랑한 이야기일뿐이요, 실은 옛 말갈과 화려가 소통할 때 그때 말갈과 화려 백성들이 섞이는일이 많았는데 그때 생긴 자손이라 하더이다’ 하였다. 황제가 더욱 기가막혀하며 ‘천한 말갈피라면 우리가 더욱 화친할 이유가 없다’며 거듭 혼인동맹을 거절하였다.
환제 18년. 거란이 금선과 혼인동맹을 맺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해괴하여 직접 거란에 사신을 보내 진상을 알아보았다. 거란의 황제가 해명하며 말하기를 ‘금선의 OO가 말갈인의 자손이란 설이 있으나 근거없는 해괴한 소리고 다만 옛 반도의 장수가 천한 기녀와 사통하여 낳은 자손이라 하더이다’ 하였다. 그리고 ‘거란이나 여진이나 예부터 반도와 크고작은 전란으로 우환이 끊이지 않았으나 이대로 자자손손 전쟁의 시절만을 거듭하게 할수도 없는 일이라 이쯤에서 화친을 생각해본 것이다’ 하며 여진에도 반도와의 화친을 정중히 제안하였다. 일단 거란이 반도와 손잡은일은 문제삼지 않겠다 하고 사신이 돌아왔다.
환제 21년. 황도 동북쪽 100여리 떨어진 문성(文成)시란 곳에 6자매가 살았다. 첫째는 보희, 둘째는 경희, 셋째는 명희, 넷째는 정희, 다섯째는 옥희 막내를 규희라고 불렀는데 모두 하나같이 재주가 빼어나 먼 동네까지 소문이 났다. 황제가 이를 듣고 6자매를 모두 불러 재주를 시험해보고 세상없는 기재로다 하고 칭찬하고 후한 상금을 내렸다.
환제 24년. 석문교의 고승 우법(遇法),달성(達成),종산(宗山)등이 주도하여 황도 인근 제현(諸顯)이란 곳에서 대법회를 열었다. 인근지역에서 몸소 법회에 참석하는이가 1만이 넘었고 먼곳에서 축원을 올리거나 불사를 하는이가 20만이 넘으니 다들 놀라워했다. 이때는 여진의 권신중에도 석문교를 신앙하는 이가 많아 연좌형식으로 소(疏)를 올려 ‘이제 여진의 많은 백성이 석문교를 신앙하니 국교(國交)로 삼음에 아무런 손색이나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황제께서 다시 생각하소서’ 하였다. 그러나 국교를 정하면 자칫 또다른 분란의 여지가 될수 있다하여 황제는 끝내 국교는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환제 26년. 환제가 세상을 떠나니 장남 웅(雄)을 태자로 세운뒤 황위에 올렸다. 그가 8대 염제(廉帝)다. 이때 나이 21세였다. 염제가 본래 태자시절부터 동계의 젊은 자녀들과 자주 교류하니 서계의 신료들이 불만을 품었다. ‘이제 웅이 황제가 되면 필시 동계의 신료들만을 중시하고 등용할것이 뻔하니 서계의 신료들은 모두 소외될것이오. 지금이라도 다른 대안을 세우도록 합시다’ 하고 3남 윤(允)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때 윤은 15세였다. 황제가 서계의 신하들을 감시토록 하였다.
염제 2년. 여진의 남서부 명덕산 인근에서 우현,독우등의 무리가 200여 도적을 이끌고 산채에 들어가 세력을 형성한후 종종 부녀자를 납치하거나 아이들을 유괴하고 심지어 때론 말갈인과 내통 변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정의 근심거리가 되었는데 보성현에 사는 민홍,민섭 형제가 의군을 일으켜 도적을 토벌하였다. 처음 형 민홍이 표를올려 말하기를 처음부터 의군을 모집하고 도적떼를 토벌한 것이 모두 자신의 공이고 동생 민섭은 겁이 만나서 도적떼와 전란도중 의군의 군자금을 훔쳐 멀리 달아났다‘고 했다. 황제가 곧이 듣고 민홍에게 상을 내렸는데 이후 의문의 투서가 황궁에 들어왔는데 민섭의 옛 고향 친구라는 정우,상철등이 보낸것이었다. 내용인즉슨 처음부터 의군을 주도해서 도적떼를 해치운 것이 민섭인데 이를 시기해서 형 민홍이 죽이고 공을 가로챈것이라 했다. 황제가 조사를 해보게 하여 진상이 밝혀졌는데 동생 민섭을 죽이고 그 공을 가로채는데 인근 태수들까지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 관련자를 모두 처벌하였다. 그리고 죽은 민섭에게 ’호무지공(護武之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염제 5년. 서계의 거상 홍진이란 이가 측근들과 의논하기를 ’황제가 선황에 이어 계속 동계를 총애하니 서계에는 가망이 없도다. 어떤이들은 선황의 다른 황자를 중심으로 뭉쳐 후일을 도모하자고도 하나 이 역시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면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차라리 배를 타고 먼나라로 나가 새 세상을 볼까 하는데 그대들 생각은 어떠한가 ?‘ 하였다. 측근 원개가 말하기를 ’이전 홍나라때 이미 동쪽바다 5천리까지 나간 전례가 없지 않았으니 도모하지 못할일이 아니외다‘ 하였다. 이에 새로운 배를 만들고 기술을 개발하여 대항해를 시작하였다.
염제 7년. 금선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 혼인동맹을 청했다. 여러번 고민하다 황제가 결단을 내리니 ’혼인동맹 자체가 그리 나쁠 것은 없으니 명문가 여식과 금선 황자들의 혼인을 허하도로록 했다.
염제 10년 말갈녀 몇몇이 신분을 속인채 여진과 반도 접경지대에 사는 태수,현령의 아들과 혼인을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중신들이 노하여 간하기를 ‘말갈은 예부터 여진을 괴롭혀오고 많은 황제들 암살을 도모한 독수와 병충해와 다를 것 없는 무리입니다. 말갈과 여진인의 혼인은 천지가 바라보는 이래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황제의 직권으로 이들의 혼인을 무효화시키고 말갈녀와 혼인한 귀족집 자제들은 신분을 박탈하여 노예로 삼고 부하방탕한 말갈녀들을 모두 처형하여 분뇨통에 처넣었다. 말갈과 여진의 혼인은 천지에 불결한 일이라 이와같은 조치를 취한 것이다.
염제 13년. 황제가 여전히 동계의 인사들만을 등용하니 뜻있는 신료들이 소를 올렸다. ‘선황떄부터 이미 동계의 신료들만을 등용하여 이로인한 서계의 불만이 적지 않았나이다. 이제 금상의 시대에도 여전히 서계를 홀대하고 동계만을 등용하는일이 계속되오니 분란이 커지면 나라의 화근이 될까 우려되나이다. 지금이라도 탕평(蕩平)을 하시오소서’ 하였다. 황제가 가하다 하여 서계를 일부 장관에 등용하고 이들의 정책을 일부 받아들였다. 원래 동계가 법치와 국방을 중시하고 서계가 과학기술과 교역을 중시하는 파벌이었는데 모처럼만에 여진이 과학기술 융성의 빛을 보게 되었다.
염제 16년. 천문관에서 하늘의 이치를 살피니 기이한 현상이 여러번 나타났다. 어떤이들은 나라에 변고가 있을까 걱정하였고 어떤이들은 천문이치를 계속 살피다보면 우주의 새로운 섭리를 깨달을수도 있을것이라 간하였다. 황제가 어떤 결정을 내리진 못하였다.
염제 18년. 염제가 세상을 떠났다. 염제가 본래 명문가 여식 우씨와 혼인 우비(禹妃)와의 사이에 딸 여섯을 두었다. 허나 아들을 보지못해 후사가 없으니 서계의 신하들이 이때에 이르러 선황 환제의 3남 윤을 황위에 올리려 하였다. 이때 윤의 나이 33세로 서계의 추대를 받아 황위에 오르니 그가 9대 영제(英帝)다.
영제 2년. 본래 동계가 법치와 국방을 중시하는 파벌이고 서계가 교역과 과학기술 증진을 주장하는 파벌이었는데 영제가 즉위한뒤 서계가 본격적으로 대거 등용되면서 동해바다 멀리 다시금 나아가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일부 신료들이 이전의 사례들을 거론하며 이미 동해바다 멀리 5천리까지 나아간 일이 있었으나 해적들이 사는 작은섬만 있을뿐 더 이상의 실익이 없나이다 하였다. 허나 서계가 거듭 주장하니 황제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다시금 동해바다 멀리 나아가도록 했다.
영제 6년. 서계가 거듭 등용되니 마침내 동계가 불만을 품었다. 동계의 핵심인사인 진우,영문의,송태호,법정등이 모의하여 내란을 획책하였으나 발각되었고 격노한 황제가 동계 인사 300여명을 처벌하였다. 한동안 황궁에 피바람이 불며 공포정치를 느끼게 하였다.
영제 8년. 동해바다에 풍랑을 만나 표류한 배가 있었는데 그곳에 흑녀(黑女) 둘이 있었다. 이전의 사례를 본따 일단 해당지역의 태수로 하여금 보호처를 만들어 그들을 관리하게 하고 언어가 통하게 되자 자초지종을 물으니 멀리 동쪽바다 섬나라를 오가는 해적단의 딸이었다고 한다. 풍랑을 만나 이곳까지 표류하게 된 것이니 황제가 보고를 받고 음식과 의복을 내려 위로하고 이곳에서 살게 해주었다. 둘의 이름을 임시로 지어줬는데 예나와 소니라고 했다.
얼마후 예나와 소니가 각기 여진인과 정분이 났는데 예나는 여진의 태수 송태섭의 아들과 정분이 났고 소니는 서계의 선비 신홍이라는 이와 정분이 났다. 황제가 보고를 받고 혼인을 허락하니 예나는 송태섭의 아들과의 사이에 딸 넷을 낳았고 소니는 신홍과의 사이에 딸 여섯을 낳았다. 보고를 받고 황제가 이들 가족을 황궁으로 불러 치하하며 ‘이 또한 나라의 홍복(弘福)이로다’ 하였다. 이때부터 흑녀가 떠내려오는일을 나라에 큰 경사로 여기는 정서가 생겨났다.
영제 11년. 황궁 남서부 성문시에 사는 선지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아이딸린 사별남과 결혼 아들이 자라나니 어느덧 17세였다. 계모인 선지와는 다섯 살차이였는데 아비가 세상을 떠나니 유산분쟁이 일어났다. 먼저 선지가 말하기를 ‘이 재산은 오직 남편의 것이오 제가 집안에 마땅히 공을 세운 것이 없는데 어찌 집안 장손의 재산을 가로채리까. 재산은 마땅히 장손이 차지하게 해야합니다’ 하였고 아들이 말하기를 ‘새어머니가 들어오셔서 저를 어릴떄부터 거두어주셨으니 어찌 집안에 공이 없다 하리까. 또한 저는 어려서 집안 재산을 관리하는데 많이 미숙하오니 마땅히 어른인 새어머니가 관리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보고를 받고 둘이 함께 재산관리를 하며 함께 살도록 하라고 하니 그제서야 둘이 화해가 되어 함께 허리를 감싸안고 기쁘게 황궁을 나섰다.
황궁 북동부 지현시에 지연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23세 나이에 45세의 이혼남에게 시집을 갔다. 남자의 전처가 본래 욕심이 많고 도박과 술을 즐겨 칠거지악에 의거 이혼하였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때 나이 15세요 지연과는 나이차이가 여덟살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니 유산분쟁이 있었는데 먼저 지연이 말하기를 ‘본래 남편이 세상을 떠나며 제게 말하기를 내 아들이 아직 어려 재산관리를 할 능력이 못되니 그대가 한동안 관리하다가 아이가 성인이 되면 재산권을 넘기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제가 어찌 사욕이 있어 나이많은 남자를 택하였겠나이까. 남편의 유서를 조작하여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관리토록 하엿으니 죄는 유서를 조작한 제게 있나이다 하며 벌을 청했다. 이어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생전에 저를 은밀히 불러 말씀하시기를 너는 장성하였고 재주가 많아 세상을 살아가기에 큰 어려움이 없을것이나 네 새어머니는 신분도 천하고 돌아갈 친정도 없고 나이 또한 어리니 내가 죽으면 돌봐줄 이가 누가 있겠느냐. 네게 비밀리에 재산 일부를 넘길터이니 나중에 내가 죽거든 새어머니께 드려 여생을 보내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허나 제가 어찌 새어머니가 나이 어리다 하여 함부로 핍박하리까.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새어머니에게 넘기도록 유서를 조작한 것이 저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오소서‘ 하였다. 황제가 듣고서 아비의 유언장 자체를 효력이 없는 것으로 하고 선친의 재산을 새엄마와 (여덟살차이나는) 의붓아들이 함께 관리하며 의좋게 살도록 하라 명했다. 처음 황제의 명을 들은 둘이서 별다른 답없이 다소곳한 자세로 말없이 황궁을 나가자 혹시 화해가 되지 않은것인가 하고 신료들이 모두 근심하였다. 황궁밖을 나서자마자 둘이 서로 안싸안고 아들이 지연을 품에 안고 몸소 마차에 태워드리니 그제서야 화해가 된 것을 알고 모두 안도하였다.
영제 14년. 영제가 즉위하면서 서계를 거듭 등용하고 그들의 정책을 받아들이니 동계의 불만이 날로 커져갔다. 한편 황제는 즉위후 두 황비를 들였는데 각기 소씨와 요씨였다. 소씨는 동계 집안의 여식이었고 요씨는 서계 집안의 여식이었다. 소황후가 1남1녀를 낳았고 요황호가 2남2녀를 낳았으나 아직 태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는 황제가 밤중에 휴식을 취하려 하니 소황후가 은밀히 들어와 말하기를 ’멀리 남부 은성국에서 귀한술이 들어와 폐하께 한잔 권하고자 하외다‘ 하며 손수 권주가를 지으며 황제에게 술을 따랐다. 황제가 의심하며 말하기를 ’근래에 남방국가에서 사신이 온적이 없고 은성국은 이제껏 들어본적이 없는 나라다. 헌데 어찌 그런곳에서 이제 새삼 귀한 명주가 들어온단 말인가‘ 하며 거듭 의아해했다. 초조해진 소황후가 측근을 들게하여 황제에게 강제로 술을 먹이니 황제가 얼마 지나지 않아 피를 토했다. 국상을 발표하니 서계 관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의혹이 있다며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후사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때라 다들 불안해했다. 하는수없이 소황후나 요황후 소생으로 후사를 삼지 않고 환제의 차남 일권(壹權)의 장남 유(維)를 황위에 올리게 했다. 원래 일권은 정신이 성치 못하고 어릴때부터 몸이 약해 애초부터 후계에선 제외된 황제였다. 다만 앞날을 딱히 여긴 환제가 궁녀 지씨릴 일권의 부인으로 들였는데 둘 사이에 아들 넷을 낳았다. 그 장남이 유로 이때 나이 20세였다. 10대 명제(明帝)가 되었다.
명제 2년. 명제가 본래 동계와 서계의 타협속에 일시적으로 추대된 황제라 한동안 탕평책을 시행했다. 동계와 서계를 공평하게 등용했는데 오히려 분란이 끊이지를 않았다. 서계에서 거듭 선황 독살의혹의 진상을 조사할 것을 요구하니 하는수없이 형무(刑務)에 명하여 다시금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으나 끝내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명제 5년. 명진시는 황도에서 남쪽 50여리 떨어진곳에 있는데 이곳의 유빈이란 여인이 어려서 가세가 기울어 23세의 나이에 52세의 상인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이후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가 나이 세 살때 상인이 세상을 떠났다. 상인에게 장성한 아들이 있어 유빈과 동갑이었는데 상인의 유산분배문제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다. 황제가 보고를 받고 유빈과 상선의 아들을 불러 선친의 재산을 함께 관리하며 유빈의 아이를 함께 키우도록 하라 명했다. 유빈과 아들이 모두 수긍하고 물러났다.
황도 북서쪽 70여리 떨어진곳에 달래라는 여인이 살았다.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고 떠돌다 이후 50넘은 노신(老臣)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나 후사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노신이 세상을 떠났다. 노신에게 원래 달래와 비슷한 연배의 장성안 아들이 있었는데 유산은 얼마없고 달래는 자손을 낳지못해 쫏겨날 처지였다. 달래가 억울함을 황도에 호소하니 황제가 판결하기를 ’아들은 달래에게 아버지 재산 절반을 공평하게 나눠주고 이후 젊은 새어머니를 극진히 돌보도록 하라‘ 명을 내렸다. 둘이 조용히 황궁을 빠져나온뒤 아들이 달래를 품에 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명제 7년. 거란과 여진은 원래 예부터 수백년간 교류와 교통이 많아 특히 접경지대 백성들중 서로 혼인을 하여 자손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거린과 여진 백성이 소통하여 낳은 아이들을 예부터 성혼족(星混族)이라 불렀다. 성혼족에서 예부터 과학과 기술에 재주를 가진 영재가 많이 나왔는데 이때에 도명과 보명이란 아이가 있어 아직 스무살이 채 되지 않았는데 과학지식에 이미 능통하여 다들 혀를 내둘렀다. 황제가 보고를 듣고 말하기를 ’성혼족은 과시 천하의 기재로다‘ 하며 탄식하였다. 도명과 보명을 기술청의 고문을 맡겨 일을 보게 하였다.
명제 10년. 금선왕조가 여진의 국경지대를 침범 장군 상일환과 영우치를 보내 겨우 격퇴할수 있었다. 반도가 이전 화려왕조 시절과는 달리 새로 들어선 금선왕조는 침략을 바라지 않고 오히려 혼인동맹을 청하며 자자손손 화친할 것을 원했는데, 이제와서 그 맹약을 깨고 다시 국경을 침략하니 다들 놀라고 그 의도를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 했따.
명제 13년. 금선이 이번엔 거란국경을 침입, 형세가 불리하여 여진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장군 안무웅과 염석진을 보내 겨우 금선의 군대를 격퇴할수 있었다. 허나 금선이 이전의 혼인동맹을 깨고 거듭 거란과 여진의 국경을 다시 침략하는 의도를 알 수 없어 다들 놀라워했다. 뒤늦게 금선이 노신 원명창이란 이를 보내니 황제가 엄히 꾸짖어 묻기를 ’너희가 이전 화려와는 법도가 다르다하여 이젠 더 이상 옛 구려땅의 연고를 주장하지도 않고 침략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혼인동맹으로 자자손손 평화를 이루자고 하더니 이제와서 다시 우리와 거란의 국경을 침범하니 어찌된일이냐 ? 필부간의 신의도 함부로 저버려선 안되거늘 국가간 외교의 신의를 이렇게 헌신짝처럼 내다버려도 되는것이냐 ?‘ 하였다. 노신이 울면서 황제의 가랑이 밑에 엎드려 아뢰기를 ’저희 금선의 선황(先皇)들은 선대의 법도를 그르칠 의도가 하나도 없었나이다. 허나 저희 금선에 정변이 일어나 요망한 계집이 태후가 되어 나라의 전권을 잡고 마음껏 국정을 농단하지 이전 선황때의 법도는 어그러지고 ‘어찌 사내들의 근기가 계집보다 못할수 있느냐 ?’며 노신들을 다그쳐 매일같이 전쟁을 부추기고 있나이다. 저희도 그 광녀(狂女)를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부디 상국의 신묘한 지혜로 저희를 깨우쳐주소서’ 하였다. 황제가 더욱 이해하지 못하며 묻기를 ‘여진이나 거란에도 황제가 어리거나 어리석어 일시적으로 황후나 태후가 전권을 잡은일이 몇차례 있었으나 지금껏 그런 요녀나 광녀가 나타난 일은 없었다. 오히려 어질고 지혜로운 여인이 황실과 조정이 어지러워질수 있는 법도를 바로잡은적이 많았는데 너희 금선의 계집들은 어찌 무지몽매하기가 이와같을수 있느냐 ?’하였다. 금선의 노신은 거듭 울며 황송해하며 사죄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이전 화려때도 무도한 장수가 함부로 국경을 범해 우리가 요구한대로 무도한 장수를 처벌하여 죄를 사해준일이 있으니 이전 왕조의 사례를 본떠 너희가 요망한 태후를 처벌하면 우리도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 하였다. 노신이 울면서 ‘신등이 힘써보겠으나 쉽지 않은일임을 양해해주소서’ 하였다. 황제가 ‘금선의 어리석음은 예전 화려때와 달라진 것이 없구나’ 탄식하였다.
명제 16년. 금선의 요녀가 이번엔 직접 대군을 이끌고 거란과 여진 국경지대 곳곳을 급습하였다. 명분은 옛 구려의 땅을 회복 천하평안을 회복하겠다는것이었는데 실로 가당치않은 해괴한 말이었다. 거란과 여진의 명장들이 합심하여 겨우 금선의 적괴를 물리치니 금선은 다시 노신을 보내 눈물로 사죄하였다. 거란과 여진의 황제가 거듭 말하기를 ‘금선의 요녀를 처벌하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 했다. 금선의 노신은 그저 어려워하며 눈물로 퇴장할 뿐이었다.
명제 19년. 금선에서 비로소 정변이 일어나 요녀를 처벌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금선의 신왕(新王)이 금과은 수천관과 금선에서 나는 귀한 약재 수천관 그리고 귀한 가축 수천마리를 보내오니 그제서야 황제가 예물을 받고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에게 몸소 재물과 식량,약재를 나누어주며 피해를 복구할수 있었다. 금선에게 (1) 다시는 국경지대를 범하지 않는다 (2) 옛 구려(句麗)의 연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3) 말갈을 앞세와 거란과 여진의 백성을 해치거나 황실을 범하지 않는다는 세가지 조건을 약조조건으로 내걸었고 금선은 이에 ‘혼인동맹 재개’를 요청하였다. 혼인동맹은 허하치 않고 다만 교역과 이를 원하는 백성들의 왕래만 허용하였다.
명제 22년. 조정이 일부 개편되니 서계가 일부 밀려나고 동계 중심의 조정이 되었다. 이에 서계가 불만을 품고 다시 동계의 중신들을 모함하니 구설에 오른 동계에 신료들이 서계의 모함이라 억울해했다. 황제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라가 외부의 전란에 휩싸일때는 동계와 서계가 구분됨이 없이 하나가 되어 애국충정을 보이더나 전란이 끝나고 태평성대가 되니 다시 당파싸움이 시작되는구나. 당파싸움이 끝나려면 차라리 다시 외적의 침입을 보아야 하는가’ 씁쓸해 하였다.
명제 25년. 금선에서 발신인을 알 수 없는 괴편지가 황도에 도착하였는데 내용이 이와같았다. ‘여진과 거란이 여전히 옛 구려의 땅을 불법으로 점거하고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고 있으니 천하의 부도덕이로다. 지금이라도 마땅히 옛 구려의 땅을 내놓고 여진과 거란은 과거의 유목민으로 달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 이런말을 금선에서 할만한이는 이전에 전란을 일으킨 요망한 태후뿐인데 금선이 이미 요망한 태후를 처벌하였다 했는데 다시 이런 서찰이 도착한것에 의아해하였다. 진상을 조사해보니 요망한 태후는 폐위된뒤 건강이 날로 악화되어 지금은 이런 편지를 쓸수 없다는게 금선의 해명이었다. 다만 황제가 다시 금선의 노신들을 오게하여 꾸짖기를 ‘구려가 망한 것이 이미 천년전의 일이요 여진과 거란이 구려의 옛 땅을 새 터전을 잡은 것이 이미 그만한 세월이 흘렀는데 천년전 주인이었다 하여 천년동안 다스린 주인보고 돌려달라하면 이게 어찌 천지도리라 할수 있는가. 동서고금의 흥망성쇠가 거듭되면서 영토를 서로 주고받고 빼앗고 뺴앗긴 사례가 한둘이 아니거늘 너희는 어찌 무도하게도 오직 천년전 영토의 연고만을 거듭 주장하는가. 만약 집주인이 사업이 망해 다른곳으로 이주를 해가고 그곳에 새로 이사를 온 가족이 새 터전을 잡은지 천일이 지났는데 천일전에 살던 옛 주인이 무작정 새 주인을 찾아와서 옛 집을 돌려달라고 하면 이 어찌 온당한 일이라 하겠는가. 너희 금선은 두 번다시 천년전 구려를 거론하며 함부로 고토회복을 논하지 말라’ 하였다. 금선의 노신들이 모두 부끄러워하며 마침내 물러가고 말았다.
명제 28년. 동계에 온당이란 학자가 있었다. 하루는 황제에게 소를 올려 간하기를 ‘신이 동서고금 세상이치를 담은 서책을 오랫동안 살펴보았고 또한 나이 70이 되도록 살면서 수많은 생령의 살아가는 이치를 보았사온데 그 본질을 알 수 없어 무척이나 혼란스럽나이다. 살펴보건데 자신의 부와 권세와 재물과 힘을 늘려 자기 스스로 강해지기를 갈망하고 또 강하고 힘센 것을 소망하여 그것을 본받기를 바라는것도 생령의 소망이오나 또 한편으론 약하고 힘없는자를 돕고 불쌍히 여기는 것 또한 생령의 본질이더이다. 과연 강자를 바라는 것이 생령의 본질이온지 약자를 구제하는 것이 생령의 본질이온지 이제 신이 그 본질을 연구하고자 하나이다’ 하였다. 황제가 ‘일리있는 연구과제’로다 하고서 연구소를 설치하게 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것을 허해주었다.
명제 31년. 서계의 백일,동훈,오진우등이 역모를 꾸민다는 투서가 들어와 황제가 진상을 조사토록 했다. 일부 물증이 드러나자 황제가 격노하여 ‘내 지금껏 서계의 신료들을 총애하여 등용하였거늘 배은망덕하기가 어찌 이와같을수가 있는가’ 하고는 서계의 신료 700여인을 잡아들여 모두 처단하였다. 그리고 ‘내 두 번다시 서계의 신료들을 등용하는일이 없으리랴’ 명하였다. 허나 이 사건을 두고 어떤이들은 동계가 서계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역공작이라 말하기도 했다.
명제 35년. 정극단에서 새로 꾸민 연극 하나를 오랜만에 황궁에서 공연하였다. 내용인즉슨 이랬다. ‘동해바다 건너 만리 떨어진곳에 월링턴이라 불리는 신비의 나라가 있고 그곳에 넬로라는 해군제독이 있다. 넬로가 하루는 항해중 표류하여 바다멀리 이곳 여진까지 표류해와서 여진에서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기잡이일을 도우며 사는 열다섯살 어린 소녀 은희를 아내로 삼아 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희가 아이를 낳았으나 넬로는 제독의 행방을 찾는 월링턴 신하들에 의해 뒤늦게 발견되어 그들과 함께 자기나라로 돌아왔다. 2년여후 은희가 낳은 아이가 어느덧 세 살이 될 무렵에 넬로는 자신의 장성한 아들 알프레도와 함께 여진에 돌아왔다. 알프레도는 은희를 만나 ‘앞으로 새어머니로 깍듯이 모시고 아이도 저희가 키워드릴테니 함께 저희나라로 가서 삽시다’ 하며 설득하였다. 허나 은희는 어려서부터 나고 자란 고향 자신을 키워준 고향 여진을 버릴수 없다며 끝내 거부하였고 넬로 부자는 난감해했다. 결론이 나지 않다 어느날 은희가 아이를 데리고 알프레도앞에 나타나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하고는 어디론가 멀리 사라져버렸다. 넬로와 알프레도 부자는 하는수없이 은희가 맡긴 아이만을 데리고 윌링턴으로 돌아갔고 은희는 자신의 고향 ‘인어절벽’이라 부르는곳에서 떨어져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다. 비극의 노래를 들으며 슬피울지 않는이가 없었다. 어떤이들은 ’이 비극을 듣고도 울지 않으면 진심으로 감성이 없는자라 할만하다‘ 말하기도 했다.
명제 37년. 한동안 잠잠하던 몽골이 오천리 장성을 넘어 침범해와 장군 승도를 보내 격파하였다. 승계는 동계쪽 집안의 장수였다.
명제 42년. 명제가 42년의 긴 집권기간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갔다. 원레 명제에게 국일(菊日)이란 태자가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나이 서른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태자비 역시 병약하여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하는수없이 국일이 남긴 태손 정(貞)을 후계로 삼을 수밖에 없었는데 테손의 나이 이때 겨우 7세였다. 명제가 나이 60에 정씨(鄭氏)를 후비로 들였는데 이때 나이 20세였다. 명제가 사망하자 정씨가 7살난 태손을 대신하여 섭정을 시작했다. 태손 정은 11대 원제(原帝)라 부르게 된다.
원제 2년. 금선왕조에서 새로이 발견한 약재와 의술을 바탕으로 집대성한 새로운 의서를 사신을 통해 보내왔다. 태후가 이를 받으며 화답하기를 ’금선은 예부터 땅이 비옥하여 진귀하고 신비한 약재가 많이 난다고 들었소. 반면 거란과 여진은 땅이 척박해 진귀한 약재를 재배할수 있는 토양이 그리 많지 않아 의술이 뒤떨어져 예부터 금선과 화려의 도움을 많이 받았소. 이제 금선이 선의(善意)로 새로운 의서를 지어 보내준다하니 고맙게 받겠소. 앞으로도 양국이 악연없이 계속 화친게 되길 바라오‘ 하였다.
원제 5년. 문성시에 조현이란 중신(重臣)이 살았는데 나이 60에 인아와 지연이란 두 어린 부인을 얻었다. 이때 인아의 나이 19세요 지연의 나이 22세였다. 인아가 본처로 조현과의 사이에 딸 셋을 낳았고 지연은 첩실로 아들 넷을 낳았다. 이후 조현이 세상을 떠나니 유산과 자녀 문제로 두 여인 사이에 분란이 생겼다. 태후가 두 여인을 불러 살피니 인아는 키는 작고 깜찍하고 귀여운 용모를 지녔고, 지연은 키는 크고 몸매가 늘씬하였으나 외모가 긴 사각형으로 그리 호감가지 않았다. 태후가 판결을 내리기를 ’인아는 본처로써 책임을 다하여 지연의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품어주고 지연에게는 남은 여생을 보내는데 어려움이 없을만큼의 재산을 분할해주도록 하라‘ 하였다. 두 여인이 모두 수긍하고 물러났다.
원재 7년. 태현시에 이성이란 학자가 살았는데 나이 60에 혜리와 민정이란 두 어린 부인을 얻었다. 민정의 나이 20세요 혜리는 25세였다. 민정이 본처가 되어 이성과의 사이에 딸 넷을 낳았고 혜리는 첩실로 아들만 둘을 낳았다. 이성이 세상을 떠나니 자녀와 재산분할 문제로 분란이 생기자 태후가 둘을 불러들였다. 용모를 보니 민정과 혜리가 둘 다 늘씬한 키의 여인이었는데 다만 외모는 민정이 좀 더 예뻐보였고 혜리는 나이들어보였다. 태후가 판결을 내려 민정은 혜리의 두 아들을 친아들처럼 품도록 하고 혜리에게 남은 여생을 보내는데 부족함이 없을 유산을 나눠주도록 하라’ 판결을 내리니 수긍하고 물러났다.
원제 10년. 흉노에서 종신이란 인물을 사신으로 보내 이와같이 말하였다. ‘흉노는 동으로는 여진,거란을 접하고 있고 서로는 중원,하북의 많은 나라와 직접 소통할수 있으며 남쪽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어 바다를 통해 머나먼 남쪽나라까지 항해하며 많은 나라와 소통할수 있었소. 반면 거란은 사방이 육지라 바다가 없고 여진은 극동(極東)에 위치하여 바다를 접하고 있긴 하나 여러 나라와 소통하기엔 지리적 여건이 불리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소. 이에 흉노가 선의로써 길을 열어주어 거란,여진의 사신이 중원과 소통할수 있는 길을 빌려주었소. 양국화친이 지금껏 이와같았으니 앞으로도 변함없길 바라오’ 하였다. 태후가 수긍하고 예물로서 화답하였다.
원제 13년. 원제가 20세 젊은 나이로 후사없이 세상을 떠났다. 비상회의가 열려 여러 차기 후보를 논하다가 옛 영제의 아들 진(眞)의 손자 태영(泰永)을 후계로 세웠다. 본래 진이 영제의 제1비 소황후 소생으로 소황후는 동계의 지원을 받았다. 허나 이때 태영의 나이 10세로 아직 어려 능히 국정을 담당할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섭정을 맡을 태후도 마땅찮아 정태후에게 계속 섭정을 맡을 것을 권했으나 태후가 ‘이전에 이웃 거란은 물론 여진 남부의 반도에서도 태후가 여러 어린 황제를 대신 섭정을 오랫동안 맡다 국정을 그르친일이 있었도다. 나 또한 전철을 밟을까 두려우니 내 섭정은 여기서 그침이 가하다’ 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하는수없이 원상들이 모여 조정일을 의논하도록 했다. 태영은 12대 규제(圭帝)가 되었다.
규제 1년. 황제가 순행도중 의문의 습격을 당해 부상을 입었다. 습격을 한 무리들은 진상을 조사해보았으나 쉽게 밝혀지지 않았다.
규제 2년. 황궁에 이례적인 대 화제가 발생 황제는 임시로 황궁 근처 복성궁(復成宮)에 피신하여 살도록 했다. 복성궁은 원래 폐위된 황후나 나이많은 태후 그 외 거처나 돌볼 가족이 없는 황실 원로들이 살며 여생을 보낼수 있도록 배려해서 만든곳이다. 화재는 한달만에 겨우 진압되었고 피해를 복구하는데만 반년 이상이 걸렸다.
규제 3년. 황제가 울면서 양위의 뜻을 밝히니 원상들이 논의 끝에 뜻을 받들도록 했다. 규제를 유선군(幼順君)으로 그 지위를 강등하고 남서쪽 국경지대 원릉현(員陵縣)으로 보내 살도록 했다. 농사를 가르쳐주고 집안 잡일을 도와줄 하인 두명과 시중을 받들 시녀 두명을 딸려 보냈다. 유선군을 그곳에서 농사라도 지으며 여생을 보낼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마땅한 후사가 없어 여러차례 논의 끝에 영제의 4남 홍(洪)의 손자 준일(俊一)을 황위에 올리니 그가 13대 신제(新帝)다. 이때 나이 40세였다.
신제 2년, 아리와 우리라는 자매가 문성현에 살았는데 쌍둥이 자매였다. 나이 20세에 부모를 잃고 60이 넘은 노신 운태에게 시집가서 아리는 딸 둘을 우리는 딸 셋을 낳았다. 운태가 세상을 떠나니 쌍둥이 자매가 운태의 재산을 서로에게 양보하려 해서 황제가 보고를 듣고 자매가 재산을 사이좋게 양분하고 앞으로도 우애좋게 오순도순 살라 명하고 돌려보냈다. 아리와 우리 자매가 황제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함께 손을 잡고 황궁을 떠났다.
신제 5년. 황도 남서부 100여리 떨어진 진남시에 마초라는 이가 살았는데 17세에 어미를 잃고 아비가 젊은 여성과 재혼하자 집을 나갔다. 이후 아비가 재혼한 여자와의 사이에 딸 셋을 낳았다. 세월이 흘러 재혼녀와의 사이에 낳은 딸이 어느덧 스무살 안팍의 처자로 성장했는데 이때 집나간 마초가 20년만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새어머니가 딸 셋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모습에 질투를 느껴 집에 불을 질러버리고 이복동생 셋을 모두 불에태워 죽였다. 사건보고를 받은 황제가 ‘도저히 있을수 없는 패륜’이라며 마초를 참형에 처했다.
신제 7년. 나라에 이례적인 지진이 일고 일진광풍과 함께 소나기가 한참동안 내렸다. 황제가 명하여 이재민을 구호,구휼케하고 석문교의 승려를 불러 천재지변이 가라앉도록 천신과 지신께 제를 올리는 일을 연구토록 했다. 석문교의 노승이 난감해하여 말하기를 ‘옛부터 천재지변은 하늘의 뜻이니 우리의 힘으로 어쩔수 없다’ 하였습니다. 제를 올리는 것은 황제의 명이라면 따르겠으나 달리 방도가 없나이다‘ 하였다.
신제 11년. 대륙 남쪽(오,월,초등의 이남 지역) 지역의 나라들에서 오랫동안 사신을 보내오지 않아 의아하게 여겨 황제가 직접 사절단을 보내 남쪽의 사정을 알아보도록 했다. 뜻밖에 사절단이 빨리 돌아왔는데 ’남쪽에 대란(大亂)이 일어나 사신을 보내고 교역을 할만한 사정이 되지 않더이다. 저희도 신변에 위협을 느껴 금방 돌아왔나이다‘ 하였다. 황제가 놀라고 의아하여 ’대체 어떤 변란이 일어났단 말인가‘ 물으니 ‘대륙 남쪽 나라들 대다수는 석문교를 오랫동안 신앙해왔는데 그보다도 수천리 이상 떨어진 더운 남쪽나라에선 오래전부터 ‘은하교’란 종교를 신앙해왔다 하더이다. 헌데 은하교를 믿는 나라들이 점점 북쪽으로 퍼지면서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 석문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들이 들고일어나 한바탕 대전(大戰)이 일어났다 하더이다‘ 하였다. 황제가 놀라면서도 여전히 파악이 안돼 다시 묻기를 ‘우리가 오,월,초 남쪽 천리이상 멀리 떨어진 20여개 나라와 지금까지 교역을 해왔는데 그보다 더 먼 남쪽에도 그렇게 많은 나라들이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단 말인가. 도대체 대륙의 크기는 얼마나 넓고 광활하단 말인가’ 하였다.
신제 14년. 신제가 재위 14년만에 세상을 떠나니 그 아들 융(隆)을 황위에 올렸다. 이때 나이 17세다. 신제가 나이 이때 이미 50을 넘겼는데 먼저 딸 넷을 두고 뒤늦게 막내로 아들을 보아 태자의 나이가 어렸다. 황위에 오르니 그가 14대 홍제(洪帝)다.
풍도(馮都)라는 이가 있었다. 젊은시절에 정문이란 귀족의 딸에게 시집가 사위가 되었는데 정문이 나이 60이 되자 연지라는 스무살난 어린 후처를 들였다. 풍도가 연지와 사통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들킬 것을 두려와하여 풍도가 아이를 데리고 백리밖으로 도망가 숨어살았다. 아이 이름을 풍규명이라 짓고 혼자 키웠는데 규명의 나이 스무살이 되자 풍도의 권고대로 조정에 출사했다.
여진에 본래 법치와 국방을 중시하는 동계와 교역과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서계가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동계가 득세하고 서계는 몰락하였다. 이때엔 이미 동계,서계의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이 권력있는 집안의 자손끼리 끼리끼리 뭉치는 사당화(私黨化)되어 있었다. 규명이 성격이 수더분하고 무리를 짓고 친교를 맺기 좋아하며 술과 돈으로 많은 귀족집 자손의 환심을 사니 곧 무리가 풍규명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홍제가 즉위하나 나이 17세로 새 황제가 어려 경륜이 없다는 이유로 조정의 국사를 풍규명이 중심이 되어 처결하였다. 풍규명이 중원처(重圓處)를 설치하여 그곳에서 따르는 중신들과 국사를 의논하기 시작하니 처음엔 외교,국방등 어린 황제가 손쉽게 결정할수 없는 문제를 중심으로 의논을 하다 자연스레 국사의 중심이 풍규명의 중원처로 몰려들어 규명은 곧 삼천석의 재물을 축재할수 있었다.
홍제 2년. 이례없는 비바람이 불고 일진광풍이 이니 고승들을 불러 천도제를 지냈으나 효과가 없었다. 해일이 일어나니 이재민을 구휼,구제하였다
홍제 5년. 황도 인근 남성시에사는 봉태라는 이가 있었는데 열두살 때 어머니를 잃고 부친이 젊은 여인과 재혼하여 딸 넷을 낳았다. 이에 봉태가 집을 나갔다가 25년만에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젊은 계모가 딸 넷하고만 오순도순 사는 모습에 격분하여 낫과 도끼로 계모와 이복동생 넷을 모두 찢어죽였다. 보고를 듣고 노하여 이전의 사례를 본따 봉태를 참형에 처하였다. 백성들이 소식을 듣고 모두 ‘나라가 망할 징조로다’ 탄식하였다.
홍제 7년. 남동부 제안현,원성시,모두현등을 중심으로 3천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니 장군 두충을 보내 석달만에 진압하였다. 반란군이 말갈인과 내통한 사실이 들어나 풍규명이 노하여 손수 말갈인 1천인을 죽였다
홍제 10년. 석문교의 고승 길태(吉泰)가 찾아와 간하기를 ‘멀리 남방에서 이교도들이 석문교의 불자들을 핍박하고 있어 그 나변의 근심에 저희 또한 시름이 떠날날이 없나이다. 옛 경전의 예언에 의하면 ‘부처님 법은 만리사방에 퍼져나간다’ 하였으니 어찌 만리 떨어진 다른곳에 불도로서 중생을 계도할곳이 없겠나이까. 여진이 예부터 배를 타고 바다를 개척하는 것을 중시하여 한때 5천리 먼곳까지 나간일도 있나이다. 그때 섬나라인들이 말하기를 그곳에서 5천리를 더가면 새로운 세상이 있다‘ 하였으니 어찌 새로운 불도를 개척할 땅이 없겠나이까. 마땅히 신등이 새로운 세상에서 부처님의 법으로 중생을 제도할수 있게 허해주소서’ 하였다. 풍규명이 본래 불심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관심을 두며 또 한편으론 근심하며 말하기를 ‘이전에 그런일이 있었다는 말은 들었으나 확실치 않고, 지금 나라 사정이 좋지 않은데 어찌 쉽게 만리사방으로 배를 띄울수있단 말인가. 국정이 안정되면 다시 의논토록 하겠다’며 보류하였다. 길태가 다시 간하기를 ‘상인 엄충과 모현은 예부터 남쪽바다 멀리를 오가며 교역하여 많은 돈을 벌었사오니 이들과 함께 하면 나라 예산이 그리 크게 축낼일이 없을것이외다’ 하였다. 풍규명이 고민 끝에 이들의 바다행을 허락하였다.
홍제 12년. 연석태라는 이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는데 연석태는 본래 북동부 채석장의 노예였다. 반란을 진안합뒤 채석장 노예 수백인을 죽이고 혹시 몽골과의 내통혐의가 없나 정밀조사하였다. 다행히 혐의는 없었다.
홍제 14년. 풍규명이 황제가 병약하여 온전히 국사를 돌볼수 없다 판단하여 중신들과 의논후 홍제를 폐하였다. 홍제를 원치군(原致君)으로 강등하여 남서부 이태현으로 보내니 원치군은 귀양처에서 얼마못가 목숨을 끊었다. 풍규명이 중원처 신료들과 의논하여 옛 영제(英帝)의 후비 요황후 소생 3남 규(圭)의 증손 성옥(成玉)을 황위에 올리니 이때 나이 18세요 그가 15대 남제(南帝)다.
남제 2년. 황도 인근 운성시에 석도라는 이가 살았는데 그 부친 석명이 석도가 12살 때 젊은 여인과 재혼 이후 딸 셋을 낳았다. 석도가 나이 스무살 때 일정한 직장없이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려다니니 계모가 걱정하여 이를 꾸짖었다. 노한 석도가 불량배들과 함께 백주대낮에 들이닥쳐 계모를 겁탈해버린뒤 호랑이굴에 던져넣었다. 그리고 어린 세 동생도 전부 뜨거운 쇠몽둥이로 불에달궈 죽였다. 황제가 듣고 노하여 석도와 함께 어울려다니는 불량배들을 모두 참형에 처하였다. 백성들이 ‘아무래도 참나라의 운도 다한것같다’ 탄식하였다
남제 4년. 풍규명의 전횡이 계속되는것에 불만을 품운 성민,박온,이명,이기등의 무리가 풍규명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중원처 연회때 미리 군사를 숨겨놓은뒤 다들 술에취해 흥청망청할 때 칼을 뽑아 거사를 하기로 했는데 밀고자가 나와 실패했다. 노한 풍규명이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참형에 처했다.
남제 6년. 풍규명이 남제가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고 하여 폐위를 논했다. 13대 신제의 이복아우 지(智)의 손자 원철(原哲)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할 생각으로 미리 서한을 보냈는데 조정 원로신하 이기명,원세규,백삼두등이 반발하여 ‘금상이 나이 어리다는 핑계로 풍규명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이제와서 아무 이유도 없이 황제를 폐하다니 이런 망발이 어디있는가. 작금의 혼란상은 오직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국정을 혼란케한 풍가(馮家)의 죄가 크지 오히려 그대가 물러남이 마땅하도다’ 하였다. 풍규명이 노하여 반대하는 원로신하들을 모두 벼슬을 박탈하고 귀양보냈다.
풍규명의 나이 이때 어느덧 60이 가까워 병약하여 세상을 떠났다. 규명에게 아들이 넷 있었는데 장남이 풍습, 차남이 풍홍, 삼남이 풍세, 사남이 풍신이었다. 규명이 본래 장남 풍습에게 중원처의 일을 맡기려 하였는데 규명의 유언대로 풍습이 무리를 이끌고 중원처에 출사(出仕)하려는데 풍홍이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서는 풍습을 사로잡았다. 풍습을 국외로 추방한뒤 풍홍이 대통을 이어받았다. 선친의 유언이라 하여 신제의 아우 지의 손자 원철에게 대통을 잇게 하느 이때 그의 나이 39세요 그가 16대 의제(義帝)다.
의제 2년. 가가(賈架)라는 이가 있었다. 조부 섭(葉)은 본래 성품이 후덕하고 인자하여 가산(家産)이 넉넉지 않음에도 흉년이 들거나 재해가 발생 이재민이 발생하면 손수 무너지고 부서진곳을 수리해주거나 병자를 치유할만한 약초를 구해다주었다. 이에 주변에서 모두 그를 선불군자(仙佛君子)라 불렀다. 부친 후(珝)는 본래 조정에 하급 관리로 출사하였으나 풍규명의 미움을 받아 벼슬을 박탈당한후 중도(衆度)라는 도시에 숨어살았다. 허나 다시 모함을 당해 집안이 몰락할 위기에 놓였는데 여종 미원(美媛)이 본래 후를 사모하다가 그가 죽게되지 갓난아기 가를 데리고 몰래 집안을 탈출 만창산(萬昌山) 인근 작은 시골마을에 숨어살았다.
미원이 본래 어깨너머 배운 실력으로 가에게 글공부를 가르치려 하였으나 처음 가가는 사냥과 놀이를 즐기며 어미가 가르치는 글공부를 배우려하지 않았다. 미원이 보다못해 종아리를 치며 출생의 비밀을 알려준뒤 ‘네게는 작게는 네 아비를 몰락시킨 풍씨 가문에 복수하여 몰락한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여야할 소망(小望)이 있고 크게는 백성을 핍박하고 나라를 도탄에 빠트린 풍가를 몰아내고 국태민안의 시절을 되찾아야할 대망(大望)이 있거늘 어찌 한낱 무뢰배들하고나 어울리며 천하대사를 그르치려 하느냐. 이 어미가 비록 너를 낳지 않앗으나 돌아가신 네 아비를 대신하여 너를 데려워 키운데는 다 큰뜻이 있거늘 네가 거부한다면 내가 더 살아야할 이유가 없도다’ 하고 목숨을 끊으려하니 그제서야 가가가 미원앞에 무릎꿇고 없드려 사죄한뒤 글공부를 배웠다.
17세가 되어 조정에 출사하니 처음 가가의 정체를 아무도 몰랐다. 가가에게 무재(武才)가 있어 대장군 이복룡이 그를 부장으로 삼았다.
의제 4년. 풍규명의 3남 풍세가 하루는 중원처의 연회장에 술에취해 웃통을 벗고 돌아다니며 외치기를 ‘아비를 기만하고 형을 핍박한자가 천하대사를 논하고 있으니 하늘과 땅의 이치가 거꾸러짐이 어찌 이와같을수 있는가. 집안 식솔들에게조차 패륜을 행한자가 어찌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자라 할수 있겠나’ 하였다. 풍홍이 노하여 풍세를 죽였다. 풍세에가 2녀2남 총 4남매가 있었는데 아직 열 살안팎의 어린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풍홍이 주변 만류도 듣지않고 아이들도 모두 죽였다. 막내 풍신은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가솔들을 데리고 금선(金鮮)으로 투항하엿다.
의제 6년. 풍홍의 전횡과 백성을 핍박함이 그 아비 규명보다 더하니 이를 보다못한 두릅,듭습 형제와 이명,어청수,오세황,진달방등의 무리가 모여 풍홍을 제거할 것을 논했다. 이때 가가가 우연히 이 뜻을 알고 찾아와 ‘탁상공론만으로 어찌 천하간적을 해치울수 있겠는가. 무력이 있다면 내 언제든 돕겠으나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것같다. 부디 나와 함께 후일을 의논하자’ 하여 모두 옳다 여기고 때를 엿보기 시작했다.
의제 8년. 가가가 비로소 군사를 일으켜 중원처를 혁파하고 풍홍을 죽였다. 풍홍이 처형장에서 눈물흘리며 말하기를 ‘내 다만 부친의 뜻을 이어가려 했을뿐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는데 어찌 이와같을수 있겠는가’ 하고는 가가를 노려보며 말하기를 ‘고금에 승리하면 대왕이요 지면 역적이라고 했다. 오늘 내가 패하여 역적으로 남지만 그대라고 다를줄 아는가. 네가 역적인지 충신인지를 후대가 증명하리라’ 하였다.
이때 의제는 국정문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뜻을 밝히니 가가가 대권을 잡은되 그를 완성군(完成君)으로 강등한뒤 남동부 주남현으로 귀양보내 그곳에서 여생을 살게 했다. 이때 옛 홍제의 아들 치(治)가 어느덧 자라 18세가 되었음에 그를 황위에 올려 17대 소제(召帝)로 삼았다. 이때 어떤이들이 간하기를 ‘참나라의 혈손이 자꾸 끊어지고 권신들이 판을 친 것은 이미 나라의 운이 다하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차라리 새 나라를 세우고 황위에 오르소서.’ 하였다. 그러나 가가가 거절하며 ‘내 나라에 작은 공이 있다고는 하나 크다 할수 없고 또한 천명이 내게 있다는 확신도 없소이다. 함부로 결정할수 없는일이오’ 하고는 마침내 치로 하여금 황위에 오르도록 결심했다.
소제 2년. 몽골에서 동남방 섬나라로 상선으로 위장한 배를 보내려다 우리에게 적발되었다. 둘이 손을 잡고 여진을 치자는 편지가 있었다. 가가가 임시 회의를 소집하여 몽골에는 항의하는 서한을 보내며 소제에겐 이와같이 간했다. ‘이전 홍나라도 주변 간적들의 협공으로 인하여 망한 전례가 있는바 다시 주변국의 정세가 심상찮으니 두고볼수 없나이다. 마땅히 방비를 강화하게 하소서’ 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해군대장 만욱이 표를 올려 해군을 개편,확대할 것을 간하니 역시 뜻대로 하도록 했다.
소제 5년. 고원시에 정도(鄭圖)라는 사내가 살았다. 고을 소녀 미정을 연모하였는데 처자가 받아주지 않지 매일 밤낮을 처자의 집앞에 죽치고 앉아 미정을 잠조차 이룰수 없고 저자를 쏘다닐수 없을 정도로 괴롭혔다. 황제가 보고를 듣고는 ‘어찌 사내가 되어 어린 처자가 싫다고 하였음에도 괴롭히기를 이와같이 할수 있는가. 엄중 처벌하라’ 하여 정도를 성기를 자른뒤 변방 아주 험한곳으로 충군시켜 평생 그곳에서 노예로 살게 했다. 미정에게는 위로하는 뜻으로 천금을 하사했다.
경옥이란 처자사 서태현에 살았는데 마음에 둔 홀아비가 있어 매일 밤낮없이 그의 집에 들러 청소를 하고 밥과 빨래를 하며 아이들을 돌봐주었다. 심지어 남자의 일하는곳까지 매일같이 찾아가 기다렸는데도 남자가 끝내 만나주지 않자 슬피울며 고을에 하소연하였다. 황제가 보고를 듣고는 ‘여인의 마음을 몰라주는 사내는 그 도량이 말갈의 천한 짐승만도 못하다’ 하여 홀아비를 처벌하였다. 백성들이 ‘이제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 말하였다.
소제 7년. 금선으로 투항했던 풍홍의 4남 풍신이 무리를 이끌고 찾아왔다. 금선 황제의 칙서를 전하며 화친을 청하니 가가가 황제를 대신하여 말하기를 ‘금선과의 화친은 우리도 유익하다 생각하나 나라를 저버리고 달아난 역적이 오랭캐를 대변하여 찾아옴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금선황제에게 전하여 다음엔 제대로 된 사신을 정식으로 보내라 하라’ 하였다. 풍신이 노하여 항의하자 가가가 그 앞을 막으며 ‘더 진상을 부릴 경우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 경고하였다. 풍신이 가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우리 집안과 가씨중 누가 역적인지 후세가 판단해줄 것’이라 하고는 돌아갔다.
소제 10년. 석문교의 고승이 찾아와 간하기를 ‘이전 선제시절에 저희가 만리 바다건너 있는곳까지 불법(佛法)을 전하기를 소망했더니 역적 풍규명은 반신반의하여 허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이제 나라가 안정되느 이루가 다시금 바다건너 멀리 새로운 세상에 부처님 말씀을 전하려 하니 부디 허해주소서. 장사하는 상선과 동행케하면 나라에 아무련 해를 끼치지 않을곳이오이다’ 하였다. 가가가 중신들과 논의 끝에 결국 허락하여 노승이 상인과 함께 300여 무리를 이끌고 바다건너 나아갔다.
소재 12년. 동남방 해적이 쳐들어와 장군 완태와 성진을 보내 격퇴하였다. 몽골과 내통혐의가 없나 조사하였는데 일단 혐의를 찾지는 못하였다. 어떤이들이 ‘황제가 덕이 없어 나라에 변란이 잦으니 아무래도 국운이 쇠한것같다’ 하였다.
소제 15년. 흑수강(黑水江)이 핏빛으로 물들고 이전에 볼수없던 기이한 새와 짐승이 수천마리도 넘게 몰려와 죽우니 다들 기이한 변괴라 놀라고 두려워하였다.특히 흑수강에서 죽은 짐승의 무리중 어떤 짐승들을 살펴본이가 보고하기를 ‘이 짐승들은 몽골보다 더 추운 북쪽에 사는 짐승으로 아는데 저희 흑수강까지 무리를 지어 와서 죽었으니 실로 그 뜻을 알 수 없다’ 하여 다들 더욱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며 두려워하였다.
소제 17년. 소제가 본래 봉씨녀에게 장가들었는데 봉씨는 옛 풍홍의 측근 봉기(奉起)의 여식이다. 이때 어떤이들이 말하기를 봉황후가 내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내시,환관 말고 여기선 그냥 하인,시종 정도의 의미임) 엄대우와 사통하였다 말했다. 가가가 진상을 조사하려 하자 황후가 울며 말하기를 ‘이는 간안한이들이 소첩을 참소하여 저희 가문마저 몰살시키려하는 음모입니다. 역적은 가가(賈家)지 결코 풍가(馮家)가 아니니 다시한번 헤아려 주시오소서’ 하였으나 소용없었다. 봉황후를 폐위하고 가가의 측근 두릅의 누이를 후비로 들이게 하니 그녀가 두태후다.
소제 19년. 황제가 가가의 그간 내우외환을 바로잡은 전공을 치하하며 ‘국상특무 일등공신(國相特務 一等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이때 가가를 따르는 무리는 500인도 넘었다. 제안현에 원석이란 이가 살았는데 황도 인근 군현과 시를 돌아다니며 50인도 넘게 살해하였다. 가가가 보고를 듣고 원석을 잡아들이게 하여 능지 처사하였다.
소제 22년. 서북쪽에서 알 수 없는 거대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하늘이 흙빛으로 변했다. 전에없는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쳐서 많은 가옥이 무너지고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황도 인근 한 고을에선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는 변괴가 있었고 한밤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수한 귀신떼가 황도 인근 이곳저곳을 울면서 ’우리는 귀신이나. 나라의 흥망을 천성(天聲)을 통해 알리고자 한다‘ 하였다. 날이 밝으면 귀신떼가 지나간곳에 어지러운 핏빛 발자욱이 수도없이 흩어져잇어 다들 무서워하며 대낮에도 혼자 돌아다니거나 어둡고 으슥한곳은 함부로 가지 못하게 되었다.
황제가 비로소 울며 말하기를 ’우리 대씨(大氏)가 간악한 외적 오랑캐에게 무너진 전신(前身) 홍나라의 뒤를 이어 여진혈족의 정통성을 잇겠다며 참나라를 세웠으나 이제 300년만에 천운이 다한 것 같으니 어찌하겠소. 대씨의 운은 300년만에 막을 내리나 가씨(賈氏)는 부디 여진의 종족을 만년동안 보존할수 있는 태평천국의 흥극(興國)을 이뤄주기 바라오. 하고는 울면서 양위의 뜻을 전했다. 가가가 신료들과 회의를 열어 황제를 신성군(申成君)으로 강등하고 서부의 여욱현으로 가서 살게했다. 여욱현은 거란과 접경지역이라 군(君)이 차라리 거란으로 망명하여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살기를 바랬으나 가가가 이는 허락하지 않고 ‘여욱현에서의 행보는 자유로이 할 수 있고 농사도 짓게 할수 있으나 3인 이상의 무리를 모아선 안되고 현의 경계 밖으로 나가는 일은 켤고 있어선 아니될것이오. 만약 이를 어길시엔 현령도 같은죄로 처벌받게 될터이니 그리아시오’ 엄히 명하였다. 군이 울면서 ‘미천한 필부(匹夫)가 대인(大人)의 엄명을 천명으로 알고 따르겠나이다’ 하였다. 신성군이 본래 봉녀(奉女)와의 사이에 딸 여섯을 낳았고 두씨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갓 태어난 막내아들이 있었는데 일단 군의 아들을 임시황제로 세우니 18대 종제(終帝)다. 500여 신료들이 모두 가가앞에 엎드려 만만세를 부르며 ‘천명을 받든 대인의 심모원려(深謀遠慮)를 어찌 연작(燕雀)이 촌탁(忖度)하리까.’ 하였다. 종제를 황위에 세우고 가가가 국사를 대행하게 아니 신성군이 황도를 떠날 때 그저 피눈물을 흘리며 ‘미천한 필부의 어리고 불쌍한 자식의 생령을 오직 대인께 부탁하리다’ 하며 열 번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3개월차. 황제가 아직 어려 국사를 돌볼수 없으매 가가가 몸소 국상원(國相院)을 설치 그곳에서 중신들과 국사를 논해 처결코록 했다. 허나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려 몇몇 측근과 중신들이 논하여 말하기를 ‘황제가 어리며 나라의 주변사정이 결코 간단치 않음에 불편한 절차를 언제까지 마냥 놓아둘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대씨(大氏)의 대통이 끊기고 국운이 쇠하였으니 마땅히 새나라가 세워져야한다는 천지의 이치옵니다. 이제 마땅히대인께서 천하대권에 오르소서’ 하였다. 가가가 노하며 ‘내 어찌 찬역에 뜻이 있었겠는가. 어린 황제를 보필하여 온전히 국사를 돌보실 연치가 되실때까지 보필할 뜻이 변함없으니 더 말하지 말라’ 하였다. 다들 난감해하니 처음부터 거사를 함께했던 측근 두릅,듭습 형제가 지혜를 발휘해 말하기를 ‘대인께서 몸소 나라를 생각하여 역적 풍가를 물리치고 황실을 보존하려 한 뜻을 어찌 모르리이까. 허나 지금의 대세는 오직 참나라의 운이 다했음을 말해주고 있으니 더 망설이지 마시오소서. 옛 중원땅에도 천명이 다하면 마땅히 새로운 운이 일어서는 법이라 하였으니 대인께서 대권을 잡지 못할 이유가 없나이다’ 하였다. 가가가 거듭 화를내며 ‘경들이 어찌 한낱 중원 오랑캐의 법도를 들먹이며 나를 현혹시키려 하는가. 또한 여진에는 여진의 정통성과 법도가 있거늘 어찌 한낱 오랑캐의 일을 참고하겠는가. 이후 오랑캐의 법도를 들먹이는자는 중원 오랑캐와 내통할 뜻이 있는 것으로 간주할테니 그리알라’ 하고는 옥새를 손수 품에 안고 국상원을 나섰다.
6개월차. 대씨집안 종친,왕족 500인이 가가의 거처를 직접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저희 대씨가 이미 왕통이 끊기고 천명을 잃었거늘 가문은 일시적이어도 종족은 영원하여야 하니 어쩌 일가(一家)의 사욕으로 대국(大國)의 만년 대계를 그르치이까. 이제 여진의 만년 종족보전의 길이 오직 가씨(賈氏)에게 있거늘 대인께서는 부디 천하창생을 생각하시어 여전종족 보존의 길을 택하시오소서. 마땅히 보위에 오르심이 마땅하나이다. 대씨 종친,왕족들이 거듭 가가의 집 대문앞에서 세 번,네번 큰절을 올리며 머리를 조아려 간하였다. 가가가 거듭 손을 내저으며 옛 상제(商帝)께 이미 아들이 열둘이라 그 혈손이 자자손손 창성하였고 환제(煥帝)께서도 아들 넷을 낳으시어 이후 자손이 번창하였거늘 어찌 대씨에게 더 이상 이어갈 혈손이 없다 하시오. 마땅히 적임자를 논하시어 대통을 잇도록 하시오’ 하고 거절하였다. 대씨 종친들이 거듭 가가앞을 막고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부디 천하창생의 뜻을 저버리지 마옵소서’ 하였다. 가가가 여전히 두려워하며 ‘아직 천명이 정녕 내게 있는지 확신이 없도다’ 하고 방안으로 들어가 곡기를 끊었다.
9개월차. 석문교의 노장(老長僧)과 원로승(元老僧) 300인이 찾아와서 간하기를 ‘저희가 천문을 보고 관상을 보아 천지묘계를 살피니 이미 대씨의 황실운은 끝났고 천하대운이 새로운 싹을 티우길 갈망하고 있나이다. 또한 가씨집 풍수를 살피니 이미 만곡(萬穀)이 성하고 묘리(妙理)의 길이 트였사오니 마땅히 대운이 있을 징조이옵니다. 대인께서 더 마다하지 마시고 천하창생을 돌볼길을 택하시오소서’ 하였다. 고민하며 집밖을 나서니 이미 두릅,듭습 형제가 신료 500인과 원로대신 300인을 데리고나와 울면서 말하기를 ‘가씨대인(賈氏大人)이 아니면 이제 더 이상 천하창생을 돌볼이가 없나이다. 더는 거절치 마시오소서’ 하였다. 가가가 탄식하기를 ‘내가 본래 대권에 욕심이 없었고 찬역의 뜻을 단 한번도 품은적이 없거늘 이제 천명이 나를 옥좌로 인도하고 있으니 미욱한 중생이 어찌 천지자순(天地自順)을 거스를수 있겠는가’ 하였다. 엄중히 만조백관과 노장승,원로승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여진의 혈손은 그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이어가야 할것이니라’ 하였다. 만조백관과 노승들이 모두 감읍하여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만만세를 불렀다. 가가가 비로소 신료들의 경호를 받으며 황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