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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 양무리마을 카페에서 퍼온 어느 형제님의 구원간증입니다...^^
사람들마다 모두 다 독특한 개성이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들도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의 모습이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저도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새로운,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인생의 시작은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어지고, 베풀어진 놀라운 은혜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1. 유년 시절과 가정
저는 1974년 10월에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10살 때까지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그 곳에서 보냈습니다. 제게는 남동생이 한 명 있는데 2살 터울 형제입니다. 어머님께서는 어릴 적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있으셨지만, 아버님은 전혀 없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결혼 초에는 꽤 성실한 삶을 사셨지만, 어느 해부터인가 늘 도박과 외유로 물의를 일으키셨고 급기야는 사업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집의 형편은 점점 더 기울어졌습니다. 이제 아버님이 도박에서 돈이라도 잃고 오는 날이면 어머님께 돈 구해오라고 폭력을 휘두르던 나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님께는 새로 사귄 여자까지 버젓이 집으로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가정의 상황은 완전히 바닥을 쳐서 이제 쌀이 떨어지면 옆집에 꾸어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수년간 생활고에 계속 시달리게 되자 이 상태로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어머님께서는 급기야 제가 10살, 즉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님과 이혼하시고 저희 형제만 데리고 수도권으로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은 처음에 안양에서 파출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파출부로 벌어들인 한 달 수입이 10만원이었습니다. 그 수입으로 우리 세 가족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어머님께서는 서울 안암동에 위치한 보타사라는 절의 공양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공양주란 절에서 스님들과 불공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 가족은 일단 의식주에 있어서만큼은 한숨을 놓게 되었고, 우리 가족은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이 절, 저 절을 전전하면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2. 중고등학교 시절 - 불교와 절에서의 삶
제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또 다시 성남에 있는 한 절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스님들과 한 솥밥을 먹으면서 자라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불교문화와 생활에 젖어들었습니다. 당시 안암동에는 개운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곳에 중앙승가대학이라는 불교대학도 있었습니다. 그 절에는 교회학교처럼 불교 어린이학교도 있어서 저는 거기를 다니면서 찬불가도 부르고 불교교리를 공부하고 한 때 불교 어린이 학교에서 회장도 지냈습니다.
어머님께서 저희들에게 교육을 강조하셔서 공부에 대해서는 항상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절의 엄격한 문화와 규율 및에서 자라게 되었고, 공부에 있어서도 뒤처지지 않게 나름대로 신경을 썼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성경암송하면 선물을 주는 것처럼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진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등은 줄줄 외우고 다녔고, 스스로 불공을 드릴 수 있을 정도로 불교생활에는 익숙해졌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스님은 저를 상자(세속 사람을 제자로 삼는 것)로 입양하려는 분까지 계셨습니다.
당시 저는 불교에 대한 무슨 특별한 신앙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제 자신의 실존적인 자아에 대해 아직까지 눈이 뜨여진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어린 마음과 두려운 마음으로 불상에 108배를 곧잘 하곤 했습니다. 잘못해서 스님들한테 혼이라도 나면 참회의 절도 드렸지요.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공허했고, 저의 깊숙한 곳에는 세상에 대한 불평과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욕심만 가득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92년 쯤에 드디어 어머님께서는 절에서 나오실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당신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고, 지금까지는 생활고에 쫓겨 하나님을 떠나 절에서 잠시 지냈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들 교육 때문에라도 다시 나와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절에서 나와 조그만 전세방 자리를 잡고 다시 파출부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10살 때부터 아버지는 저희와 같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장남으로서 우리 집의 가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못하고서도 괜히 어머님께 짜증내고, 화내고, 윽박지르기가 일쑤였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님이 교회라도 가서 안계시면 어머님께 화를 버럭 내고, “아들이 학교 다녀왔으면 밥이라도 주셔야지, 무슨 교회냐”고 소리를 질러대기도 일쑤였습니다. 저는 교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어머님이 아들에게 신경쓰기 보다는 교회생활하기 바쁜 것처럼 보여서 싫었습니다. 사실 어머님은 저희 형제를 위해 기도하느라 교회에 가셨던 것을 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어머님께 대들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지조가 있어야지 살기 힘들다고 절 신세를 질 때는 언제고, 이제는 살만하니까 교회에 다니냐”고 어머님께 역정을 냈습니다. 때로는 어머님께서 제게 “제발 예수님을 믿으렴. 창욱아” 라고 말할 때면, 먹던 밥상을 냅다 뒤엎기도 했습니다. 아주 제대로 막 나가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자연인으로서 저는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 신념이란 오직 제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목적이라고 한다면 오직 나의 행복, 그리고 내가 세워놓은 기준에 의해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담배를 한 갑 이상 피워댔고, 독서실에서는 친구들과 대마초를 즐겼습니다. 술은 약해서 많이 마시지는 못했지만 술마시는 건 너무너무 좋아해서 술자리는 어디든지 즐겨 찾았습니다. 가끔씩 취할 정도로 마셨으면 친구집에서 자고 집에는 독서실에서 공부한다고 거짓말한 뒤 외박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가끔씩 쾌락 뒤에 으레 따라오는 고통과 불안이 있었지만 저는 개의치 않았고 어차피 한번 뿐인 내 인생, 즐기다가 사는거야 하고 지냈습니다.
제가 당시 다니던 고등학교는 다른 학군에 비해 상당히 학력수준이 떨어졌습니다. 한 해에 수도권 4년제 대학에 입학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요. 대학진학을 눈 앞에 두고 있던 저로서는 어릴 때부터 가계를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 해 대입시험에서 고득점은 아니었지만, 당시 서울권에 진학할 수 있는 성적이 되어 한남동에 있는 단국대학 법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이미 학과를 정할 때부터 사법시험이라는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식과 대학 입학식을 하기 전부터 대학도서관에서 민법총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대학에 입학할 쯤에는 벌써 민법총칙을 한 번 뗀 상태였습니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사법시험에 대비한 스터디에 참여했고, 늦게까지 도서관에 거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대학이 일류대학이 아닌 만큼 더더욱 내게 남겨진 가능성은 사법시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오로지 시험에 저의 인생을 걸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게 목표중심적 이었고, 자기 중심적 이었던 삶의 패턴 속에서 하느님과 원수된 시절이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래토록 저에 대하여 참고 계셨습니다.
3. 청년 시절 - 교회생활의 시작
제게는 사춘기 시절에 마음 속 깊숙이 쑤셔박았던 고민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이런 고민들은 당시 고시생이었던 제게 사치스런 고민이었기 때문에 그런 고민이라도 떠오를라치면 그런 쓸데없는 걱정이나 할 때가 아니라고 늘 제 자신을 나무라곤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 인생이 잘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은 왠지 공허했습니다.
1학년 늦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도서관 휴게실에서 담배를 뻐끔뻐끔 피며 여러 잡생각 속에서 자신을 다짐하며 잠시 쉬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제 옆에 살며시 다가와 앉았습니다. 한 손에 성경책을 낀 허름한 차림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혹시 성경을 읽어본 적이 있냐고 묻고, 또 교회를 다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둘 다 아니라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 화라도 버럭 내었을 테지만, 왠지 그 날 따라 이 사람과 애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당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오지만 결국 죽는다. 만일 내가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더라도 오늘처럼 하루 세끼 밥 먹는 것은 똑같지 않은가? 그러다가 결국 죽는 것 아닌가? 왜 나보다 더 똑똑하고 뛰어난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기독교를 믿을까? 그 사람들이 나보다 어리석어서인가? 만일 아니라면 나도 무작정 거부하지 말고, 기독교를 한 번 믿어보자. 만일 교회에 한 달 정도 다니다 아니다 싶으면 관두면 될 거 아닌가”
저는 즉석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진실한 영접이라기 보다는, “한 번 믿어보자”식 영접이었습니다.
당시 제게 복음을 전한 그 선배는 CBA(캠퍼스 베뢰아 아카데미)에 속한 형제였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영접하자 그 선배는 제가 더 자라고 양육되어야 한다면서 제가 방언을 받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 형제님은 예수님을 영접한 누구나 방언 정도는 쉽게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계속 방언을 구하는 기도를 시켰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제게 말입니다.
회개기도를 많이 시키길래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따라 했습니다. 혀에 힘을 주지말고 자연스럽게 하라고 하더군요. 이틀동안 만날 때마다 2시간이 넘게 그런 기도를 시키더군요. 그 형제님이 제 옆에서 너무 땀을 뻘뻘 흘리며 방언받도록 기도하길래 이제는 오히려 그렇게 애쓰는 형제님께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님께 미안한 나머지 방언 비슷한 것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님의 흉내를 내면서 일단 혀가 꼬이는대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알랄라. 아싸랄라~~"
저의 방언(?)을 듣더니 그 형제님은 제가 방언을 받은거 같다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내일은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가진 자매가 있으니, 그 자매를 만나서 제가 받은 방언이 진짜인지 검증하자고 했습니다.
다음 날 그 자매와 만났습니다. 저는 매우 떨리고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 조심스럽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잠시 동안 그냥 기도하다가 혀가 꼬이는대로 기도했습니다. "알랄라~" 오히려 저는 저의 방언이 거짓방언으로 드러날까봐 조마조마했습니다. 사실 저도 방언이라는 것을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매가 제 방언을 잠시 듣더니 제가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구원받지 못한 동생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 이미 가족에 대해 조금이나마 육성으로 기도했고, 그 자매가 그 부분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때 저는 구원받지 못했을 때입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성령으로부터 오는 방언은사를 받는게 가능하겠습니까?
하여간 그 때 이후로 동네에 있는 장로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교회는 이미 어머님께서 다니시던 교회였습니다. 제가 그 교회 청년부에 나가기 시작하자 어머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더군요. 저는 일단 어머님도 좋아하고, 저도 교회 생활이 과히 부담되는 것은 아니라서 그 때부터 교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4. 좌절과 실패
그러던 어느 날, 그 해 가을쯤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저를 불렀는데, 교육부에서 온 통지때문이었습니다. 내용인즉슨 저의 제적처분에 관한 건이었습니다. 너무 놀랐습니다. 이유를 알고는 더 놀라게 되었습니다. 대입시험 당시 제가 이중지원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당시 저의 단짝이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 저는 고등학교에서 시험이 있을 때마다 함께 부정을 저지르곤 했습니다. 주로 제가 정답을 알려주고 그 친구가 받아 적었지요. 저는 이미 전기대학인 단국대에 합격했을 때였고, 그 친구는 성적이 안되어서 전기 시험에는 실패하고 후기로 대입시험을 또 치러야 할 판이었습니다. 자신이 없었던 그 친구는 급기야 저희 집에 와서 저 몰래 제 동생으로부터 긴박한 사정으로 인해 형 대신 도장과 주민등록증을 받으러 왔다고 거짓말하고선 저의 도장과 주민등록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학교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 몰래 학교직인과 담임선생님 도장과 제 도장, 신분증를 이용해 저의 후기 대학 지원서를 만들어 자기의 지원서와 함께 후기 대학에 지원했습니다. 당시 이 친구는 응시한 순서대로 시험장 자리의 순서가 정해진다는 걸 알고 저와 함께 같은 시험장소에서 시험을 쳐서 저로부터 시험답안을 받고자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각설하고, 하여간 후기시험에 응시했습니다. 응시하더라도 어차피 등록만 안하면 문제가 될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험에 응시한 그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저는 그로부터 약 열 달이 지난 1학년 2학기 가을 시점에서 교육부 컴퓨터 조회에서 이중지원으로 적발되어 제적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에서 제적당한 후 저는 심한 좌절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군대에 갈 것인가, 취직할 것인가, 재수할 것인가 등등.. 결국 저는 아직 시간과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고 재수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하나님도 원망스러웠습니다. 교회다녀서 복받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되는 일은 없고, 인생은 바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느냐고 원통함도 토했습니다. 하지만, 교회 다니는 걸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교회 탓은 아니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저의 교만함을 낮추기 위해 꼭 필요했던 과정을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94년에 재수를 하면서 전에 다니던 모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재수생활이 창피했고 또 아침에 예배드리고 곧장 재수학원으로 발을 옮겼기 때문에 다른 사람 눈에 보일 일도 없었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도 저를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묵묵히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당시 어머님이 밤마다 흘리신 눈물을 저는 잊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5. 대학에 합격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옴
지루했던 재수시절을 보내고, 94년 말에 대입 시험을 치루었습니다. 성적이 기대 이상으로 나와 연세대학 법학과에 특차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자존감도 다시 회복되었고, 학교생활과 교회생활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유치하지만, 나름대로 제 안에는 일류대학에 다닌다는 치기어린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그 수준에서 만족감을 누리는 전형적인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6.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
95년 여름, 함께 교회에 다니던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한국교원대학에서 CCC(한국대학생선교회) 동아리에 속했던 자매였습니다. 그 자매가 이번 여름에 서해안 몽산포에서 CCC 여름 수련회가 있으니 꼭 같이 가자고 하더군요. 저는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당시 저는 교회에서 인정받던 청년이었습니다. 교회생활도 성실히 하고, 교회에서 하자는 일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게다가 대학교도 번듯하게 잘 다니고 있으니 교회에서 다들 저 청년정도면 멋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러워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러움을 받으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던 아주 교만충만한 종교인이었던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복음을 전해들을 때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죽음인 줄 알고 있었지만, 그 지식에 동의만 할 뿐이었습니다. 인간은 간사해서 자기 자신조차도 속일 수 있습니다.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과, 빛 대신 어두움을, 어두움 대신에 빛을 두는 자들에게 화로다!』- 사 5:20
저는 정말로 믿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실제로는 그 기독교의 교리에 지식적으로 동의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은게 아니라, “저의 믿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담배피우고 술마시는데 죄책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저의 행동이나 습관들이 죄된 습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고쳐야 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설혹 든다 하더라도 그 때 뿐이었고, 자주 결단을 하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실패했습니다. 또한 결단이 실패하고, 좌절을 경험할 때 마다 늘 자신을 자학하고 다시 결단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죄를 짓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죄를 늘상 짓고도 “죄인이 죄짓는건데 뭘”하며, 내가 죄짓는 것을 합리화 했습니다.
드디어 수련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날짜가 언제인지도 기억나지도 않고, 강사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 때 메시지가 무엇인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제게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전까지 계속 되어왔던 결단과 실패의 악순환 속에서 회개했던 것들이 알고 보면 제대로 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나의 죄인 됨에 대한 뼈아픈 고통과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 들던 죄책감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저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죄로 가득찬 죄인이라는 사실에 통곡하게 되었고, 제가 저의 죄 앞에 얼마나 무기력한지, 이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구제불능의 죄인이라는 고통이 뼈 속 깊이 사무쳐 왔습니다.
이전에 많이 들어왔던 성경말씀들이 제게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까지는 기독교 교리로서 제 지식으로만 머물렀던 예수님의 말씀들이 살아서 제게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제 머릿속에서만 존재했던 요한복음과 로마서 등 성경에 있는 수많은 말씀들이 살아있는 말씀(Living Word)으로 저의 영혼을 때렸습니다. 이전에는 말씀을 볼 때마다 요한복음 3:16의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에서 “세상”은 늘상 3인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요한복음 3:16의 “세상”이 1인칭인 “나”로 바뀌어서, 바로 지금 나를 향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 쓸모없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오로지 내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 나를 위해 죽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미치게 되자 저는 오열을 토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한 말씀 한 말씀이 주님께서 제게 직접 하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왔고 저는 저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그 분의 화해의 말씀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주님의 사랑이 폭포수처럼 제 영혼을 통과하였고, 저의 죄인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제가 알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는 제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관념(Idea)이었고, 실제(Reality)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Living God)이며, 실재하는 그 분의 사랑 앞에 기꺼이 제 자신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비로소 예수님을 저의 주님과 영원한 구원자로서 영접하였고, 그 분이 제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7. 성령으로 거듭난 후
그때 이후로 저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제 영은 거듭났고, 제 혼은 구원받았으며, 제 몸은 복된 소망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가치관과 세계관이 바뀌었고, 삶의 가치기준이 바뀌었고, 주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고등학교, 대학생시절 피우던 담배와 술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끊게 되었습니다. 담배 맛이 나빠진 게 결코 아닙니다. 여전히 담배맛은 좋았지만, 제 안에 담배 피우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시며, 제 안에 계신다는 존재감이 매순간순간마다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는 사법시험을 그만두고, 선교사로 헌신하여 침례신학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한 동기 자체가 저의 죄된 야망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설사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전문인 그리스도인 변호사로서 산다 할지라도 저의 소명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십자가 앞에서 제 자신을 직면할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판사는 사형수를 무기징역으로 선고하여 잠시 그 생명을 연장할 수 있지만, 결국 그 사람도 죽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죽을 사람을 영원히 살릴 수 있습니다. 저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제게 CCC수련회를 가자고 권한 그 자매가 지금은 저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우리 둘 사이에는 희연(기쁨이 넘침-JoyFul)이라는 이름의 딸이 한 명 있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가득한 작은 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대해서도 빛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참된 신약교회의 표징이 무엇이며, 이 땅에서 그런 교회가 구체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청사진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런 교회들을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이후로 저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지금의 저는 하나님 아버지의 어엿한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삶의 변화가 제 믿음이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를 지금까지 시종일관 변화시키신 분은 믿는 순간 제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 곧 성령님이시며 그분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런 목적없이 제 맘대로 살아온 저에게 왜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셨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 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가 어디로부터 왔으며, 제가 죽게 되면 어디로 저를 인도하실 것인지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그분을 죽도록 미워했을 때에도 오히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저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람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영원토록 저를 버리시지 않고 사랑하실 것입니다. 저는 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기만 하면 자다가도 찬송이 나오고 길을 가다가도 웃음이 튀어나오고 밥을 먹다가도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저는 저에게서 나온 생명이 아닌 주님이 주신 새 생명을 살고 있습니다. 저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찬양으로 삼으신 주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A. W. Tozer 형제님의 글을 인용하며 간증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찾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우주의 근원이 되는 분을 찾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의 확신이 편협함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단지 그는 자기 경험을 확신할 뿐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믿는 것이 아니다. 그의 확신은 모사품이 아니며 성령에게서 직접 받은 원본과 같다.”
첫댓글 성령을 체험하고 거듭나면 다 신학을 해야한다/??? 가장 낮은곳 에서 내가 할일을 찾을수도 있을텐데 .. 차라리 신학을 하지말고 자기할일을 하는것이 주님의 뜻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