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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는 나그네임을 알고 위를 보며 살아야합니다.(출2:11-22)
2023, 9/3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출2:11-22절 말씀으로“우리는 나그네임을 알고 위를 보며 살아야합니다.”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함께하길 원합니다.
며칠 전에 코로나가 감염병 4등급으로 하향 조정되었는데, 앞으로는 검사비와 치료비가 유료화 되어 사실상 감기처럼 코로나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코로나 첫해인 2020년 1월에 1급이었다가 2022년 4월에 2급으로 낮아졌는데 지난 목요일에 4급 감기수준으로 떨어진 것이지요. 그래도 건강관리는 잘하셔야합니다.
이 코로나는 교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는데,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이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잃어버린 동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우리나라도 유럽형 교회로 진행될 것 같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래도 남은 자되시는 여러분은 끝까지 깨어서 신앙관리 잘하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22절)
둘째로, 나그네는 좌우가 아닌 위를 보며 살아야합니다.(12절)
셋째로, 위를 보고 살면 죄에 따른 두려움이 없어집니다.(14절)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인들은 크게 두 부류가 있는데, 교회는 다니지만 교회는 교회고, 내 삶은 삶이고, 신앙과 사회생활을 분리하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이 세상 삶을 나그네라 생각하고 그저 있는 것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잠시 볼일 보러왔다가 끝나면 떠나는 사람입니다. 이런 나그네는 이곳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몸도 마음도 이 땅에 주면서 정착할 수 없습니다. 그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항상 좌우보다는 먼저 위를 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때문에 죄에 대한 두려움보다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더 누립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을 따라가면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며, 어떨 때 두려움이 없어지는지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22절)
본문 2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아멘.
모세가 동족을 위해 애굽사람을 죽인 후 미디안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미디안의 제사장 딸을 만나 결혼을 함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우리인생 3모작이란 말이 있는데 모세의 인생도 3모작이었습니다. 1모작은 애굽에서 왕자로 살아간 40년의 세월이고, 2모작이 미디안광야에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간 40년의 세월이고, 3모작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애굽에서 고통당하던 이스라엘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는 40년의 삶 도합 120년의 삶을 살다갔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인생 2모작 때 미디안의 제사장 르우엘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게르솜(Gershorn)이라 지었는데, 이‘게르솜’은‘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 다시 말해 나그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자기아들 이름을 왜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 다시 말해 나그네라고 지었을까요? 모세는 멀리 미디안까지 도망쳐 온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나그네라고 지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러나 당시 모세가 도망자이긴 하지만 꼭 나그네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것이 그가 미디안에서 결혼을 하고 자녀까지 낳아 정착해 인생 2모작, 40년의 세월을 살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모세가 굳이 자신을 나그네로 표현한 것은 그에게는 돌아가서 정착할 영원한 본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돌아가서 정착해야할 영원한 본향이 어디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곳은 부모형제들이 있고, 하나님의 선민이자 동족들이 있는 곳, 바로 고센 땅입니다. 1차적으로는 고센이지만, 영원한 본향은 바로 가나안이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사랑하는 부인과 자녀들이 살고 있는 이 미디안을 본향으로 생각하지 않고 언젠가는 돌아갈 진짜 본향을 생각하니 이 땅에 정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나그네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던, 많은 재산을 모으고 평안하게 살던 이곳에 정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본향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인들은 초막절이 되면 들판에 나가 초막을 짓고 7일간을 생활하면서 이 땅은 잠시잠깐 머물다 떠날 곳으로 나그네임을 잊지 않기 위해 그런답니다.
요셉은 애굽의 2인자로 총리로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고, 애굽에서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아 가정도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정붙이고 본향으로 생각할 것 같은데 정작 죽을 때는 애굽에서 나갈 때 자기 유골을 가지고 나가달라고 유언을 합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이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선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저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여 돌아가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본향에 대한 열망이 진짜 강해야합니다. 저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도 조국 이스라엘이 있던 곳,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3번씩 절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히11:26절에서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렇게 말씀했는데, 이는 자신을 나그네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고 살았으니 당연히 애굽의 삶도, 미디안에서 삶도 나그네의 삶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대상29:15절에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또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잠시 있다 떠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도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물론 저들이 돌아간다는 곳은 저승으로 죽은 영혼이 살아가는 곳이라고 말하는데, 미안하지만 그곳이 지옥임을 저들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계신 천국으로 돌아갑니다. 물론 기독교가 굉장히 편협하다는 것 우리도 알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걸 우리가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언제 돌아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올 때는 순서대로 오지만 갈 때는 순서 없이 가는데도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도 자기밖에 모르는 부자가 많은 재산을 창고에 쌓아두고 떵떵거리며 살겠다고 자만하자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네가 준비한 이 많은 재산들이 누구 것이 되겠냐고 말씀합니다. 또 약4:13-14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두 말씀의 공통점은 사람이 갑자기 예고 없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왜 돌아갈까요? 이 땅이 우리의 본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은 하나님과 믿음의 선진들이 있는 곳, 바로 하늘천국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를 부르면 지체 없이 가야합니다. 돈을 수십억 수백억을 갖고 있어도, 주식이 수백만 주가 있든, 땅이 수 만평이 있든, 집에 금송아지가 몇 마리 있어도 오늘 수천억짜리 계약을 하든 바로 즉시 떠나야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언제 돌아갈지 날짜를 모르지만 주님이 부르면 즉시 가야하기 때문에 항상 나그네라는 생각으로 주변을 잘 정리하며 살아야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잠시 있다 떠날 이 세상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야합니다. 이것이 나그네의 삶이고 본향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그네는 좌우가 아닌 위를 보며 살아야합니다.(12절)
본문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아멘.
모세가 같은 히브리인을 괴롭히는 애굽사람을 보고 먼저 좌우를 살펴보고 아무도 없자 애굽사람을 때려죽입니다. 죽일 의도로 쳤다면 살인이고, 쳤는데 죽었다면 과실치사인데, 어쨌든 시신을 모래 속에 묻어 사건을 은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그때 보는 눈이 있었다면 모세가 애굽사람을 쳐 죽였을까요? 오늘 본문의 뉘앙스로 볼 때 아마 때리지도 죽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보는 사람이 없자 용기를 내서 살인이라는 중죄를 저지르고 말았는데,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여러분 주변에 보는 눈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시는 눈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대상이고, 하나님의 눈동자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시33:13절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으로,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 모든 곳에 충만하게 존재하시면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까지 괘 뚫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감출 수가 없는데, 이것이 바로 매순간 눈에 보이는 사람보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해야할 이유입니다.
물론 사람들과 관계도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을 의식하며 원만한 관계도 만들어가야 합니다. 때문에 좌우에 사람들을 잘 살필 필요가 있지만,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더 많이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도 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Coram Deo, 의식을 갖아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죄를 다스릴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모세가 위에서 보고 계신 하나님을 의식했다면 살인하지 않았을 겁니다. 모세는 좌우만을 확인하고 사람이 없자 죽일 용기를 얻었는데, 이걸 보면 오늘 날 세상에 왜 죄악이 만연한지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느9:9절에 "주께서 우리열조가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약 내 범죄를 누가 보고 있다면 죄짓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뭐 급하면 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면 수많은 양심불량과 범죄양산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에 사람이 있든 없든 하나님을 의식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주변에 보는 눈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생각하면 바르고 정직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신전의식, 바로 코람데오인데, 이 코람데오 의식으로 죄와 유혹, 어리석음을 이기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로, 위를 보고 살면 죄에 따른 두려움이 없어집니다.(14절)
본문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로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아멘.
모세는 애굽인을 살해한 자신의 죄가 탄로 나자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멀리 도망가는 방법을 택했는데, 이처럼 죄는 사람을 두려움에 빠지게 만듭니다.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말씀에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나서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하나님이 두려워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자 동산 나무 뒤로 숨어버립니다.
이처럼 죄는 죄를 범한 사람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당당함과 떳떳함을 잃어버리게 하여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스9:6절에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죄를 범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두려움의 직접적인 원인은 죄 자체가 아닙니다. 죄로 인해 처벌과 주변의 비난 등 사회적심판과, 종국에는 하나님의 진노로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영적심판에 대한 공포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에게 양심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데, 세상에서 한 주간 죄를 짓고 교회에 나오면 목사님과 눈 맞추기가 부담스러워 기둥 뒤로 숨는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나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는 양심이 마비되어 두려움을 못 느낍니다. 당연히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일반 사람과는 다른 정신세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인 우리들이 두려움 없이 온전한 삶을 살기위해서는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와 친화적이고 하나님과는 가까이 하기에는 먼 당신처럼 느끼는 존재라서 누구나 범죄의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사회적으로 신앙적으로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죄를 피하기 위한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나아가 죄를 범했을 때는 그걸 인정하고 해결해가야 하는데, 당사자가 있다면 먼저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께는 회개를 통해서 관계를 정상화시켜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죄에 대한 두려움과 심판의 공포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죄 짓는 것을 최소화시키려면 오늘도 우릴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보시고, 또 앞전에서 말씀드렸듯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전의식, 코람데오의 의식이 필요합니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면 죄짓는 것을 최소화하고, 따라서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날마다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갈 수 있는데, 이럴 때 문제가 해결되고, 날마다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