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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최종적으로 그 글들 하나하나에 숨어 있는 의미들을 짚어 주고, 나탈리 골드버그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어 준다.
1. 당신의 손을 줄곧 움직이도록 하라.(글쓰는 중간에 방금 쓴 글을 다시 읽어 보기 위해 멈추지 말라. 그것은 당신이 말하려는 내용을 통제하고 가로막는 행위다.)
2. 지우지 말라.(그것은 글을 쓰면서 동시에 편집하려는 행위다. 설혹 당신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을 썼다 할지라도 그대로 내버려두도록 하라.)
3. 맞춤법, 구두점 찍기, 문법 규칙 등에 구애받지 말라.(줄이 맞지 않는다거나 글이 페이지 가장자리의 여백으로 튀어나오는 문제 등에도 신경쓰지 말도록 하라.)
4. 스스로를 통제하지 말라.
5. 생각하지 말라. 논리적인 글을 쓰려고 애쓰지 말라.
6. 핵심을 찔러라.(글쓰는 과정에서 끔찍한 내용이나 노골적인 내용이 튀어나온다 해도 그대로 써 나가도록 하자. 그것은 아마도 에너지로 충만된 내용일 것이다.)
누구나 소설에 관한 아무런 이론적 배경 없이 한 편의 소설을 써낼 수 있다. 위에 제시된 세 편의 글들은 희미하지만 모두 소설적 형식의 윤곽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수업을 마치고 공감한 것은 소설을 쓴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고 거창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과, 무언가를 쓴다는 일이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두 가지 사실이다. 수강자들 거의 모두가 주어졌던 그 십분간(실제로는 이십분간이다)의 글쓰기에의 몰입의 시간이 대단히 행복했었다고 고백한다.
글쓰기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대단히 ‘즐거운 놀이’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놀이로서의 글쓰기’의 경험은 대부분의 초심자들의 내면 속에 도사리고 있는 글쓰기에 대한 근거없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쓰기가 대단히 거창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두려움은 글쓰기에는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격식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도도 해보지 않은 채 주저앉고 마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무조건 쓰라’고 말한다. 글쓰기에는 아무런 격식이 없다. 그저 자신의 속에 꿈틀거리는 써내야만 되는 그 무엇을 토해내라. 글쓰기는 어렵다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미심쩍어 하면서 그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쓰기 시작한다. 최초로 그 무엇인가를 써내고 났을 때 사람들은 자신감과 함께 글쓰기가 안겨주는 내밀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글감을 주고 무엇인가를 쓰도록 하면 글쓰기의 훈련이 되어 있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쓸 것이 없다’고 말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일상의 필요와 욕망만을 허덕이며 따라가는 동안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온갖 것들에 대한 순진한 호기심과 천부적인 상상력,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법을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몇 자 적어놓고 그 다음을 이어나가지 못해 쩔쩔매는 사람들은 그 천부의 호기심, 상상력, 무의식의 속삭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아주는 일이 글쓰기 수업의 시작이다. 일단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온갖 심상들을 길어 올리는 길만 찾게 된다면 ‘쓸 것이 없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자기는 어떤 글도 머리를 아무리 쥐어 짜내도 원고지 5매 이상을 써낼 수가 없다고 고백한다. 그런 사람도 간단한 ‘상상력 훈련’을 거치고 난 뒤 원고지 수십 매의 글을 쓰고도 자신에게 아직도 써야 될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스스로 놀라워했다. 그렇게 되면 진부하고 상투적인 몇 문장을 써 놓고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쩔쩔매는 일은 없게 된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초심자들은 ‘죽어 있는 글쓰기’를 한다. 감상적인 문장들을 늘어놓거나, 공허한 수사들로 가득 찬 글들은 ‘죽은 글’들이다. 글쓰기에 대한 그릇된 고정관념과 미신들을 추방하지 않고서는 구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살아 있는 글쓰기’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한다.
몇 가지 실험적인 수업방식이 시도되었다. 그 한 가지의 예로, 먼저 요리와 관련된 동사들을 함께 찾아보는 것이다. 썰다, 데치다, 익히다, 버무리다, 씻다, 자르다, 섞다, 볶다, 다듬다, 굽다, 끓이다, 튀기다, 절이다, 푸다, 토막내다, 데우다……. 요리와 관련된 동사들을 왼편에 놓는다. 오른 쪽에는 무작위적으로 떠오르는 명사들을 적는다. 예를 들면, 기타, 라일락, 고양이, 창문, 문, 책, 가방, 시계, 비디오 테이프, 텔레비전…… 등과 같이. 아무 상관 없이 나열된 명사들과 동사들을 결합시켜 자유롭게 문장을 만들어 본다. 이때 동사들은 과거시제로 변형시켜도 상관하지 않는다.
기타를 굽는다. / 비디오 테이프를 썰어 흙과 함께 버무린다. / 밭에서 커다랗게 자라난 기타를 뽑아 일정한 크기로 썰어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볶는다. / 황혼과 라일락을 버무린다. / 고양이를 시계와 함께 절이고 비디오 테이프와 뒤섞어 익힌다. / 가방을 튀긴다. / 텔레비전을 끓인 다음, 저며 토막낸 책들을 그 속에 넣어 다시 데운다.
이렇게 문장을 만들어 가다 보면 기상천외한 문장이 튀어나오고 그것들은 무의식 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어떤 상상력들을 움직인다. 이 방법의 글쓰기는 이중의 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 먼저 글쓰기라는 것이 어렵고 딱딱하기만 한 일이 아니라 유희가 될 수 있다는 것, 즉 재미있는 놀이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경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초심자에게 이런 방식의 글쓰기 훈련은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막연한 공포감을 씻어 줄 수 있고, 글쓰기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갖게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열망은 갖고 있지만 글쓰기에 대한 공포감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글쓰기의 첫 단계에서부터 굳어져 버리고 만다. 그런 사람들은 글쓰기의 초입에서 망설이고 머뭇거리다가 끝내 주저앉고 만다.
(중략) 대부분의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에 너무 젖어 있어서 “죽어 있는” 평면적 글밖에는 쓰지를 못한다. 상식과 고정관념, 합리적 사고를 깨트리는 이런 문장을 함께 만들어 보는 시간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무의식 속에 소용돌이치는, 보다 깊고 내밀한 세계, 설명할 수 없는 저 불가해한 기억의 세계를 발견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다. 선천적으로 지나치게 수줍어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데 어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집단적 놀이에 참여시킴으로써 자기를 열고 새로운 글쓰기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글쓰기
내가 상상력 훈련이라고 명명한 이것은 한마디로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글 쓰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누구나 글을 쓰기 위해 ‘머리’를 쓴다. 하지만 훈련되지 않은 ‘머리’란 글쓰기의 장애물이 될 뿐이다. 그들의 머리는 속악한 일상 생활의 평면성에 중독된 상태다. 중독이란 정신적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뜻하며 이미 창조적 사고라는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그 창조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머리로는 내면의 잠재의식과 접속할 수가 없다. 글쓰기에 막 입문한 대부분의 초심자들이 이런 상태에 놓여 있다.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는 그 머리를 깨지 않으면 글쓰기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다. 단언컨대 많은 사람들이 지나쳐 버리지만 글쓰기는 명백히 육체 노동의 한 분야다. 우리 몸이 가진 여러 가능성들, 이를테면 시각, 후각, 촉각 등 감각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는 모든 형태의 지각능력을 쓰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의도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글을 쓰는 ‘손’에 집중해서 그것을 중간에 포기하거나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몸’에 우리의 의식을 집중하다 보면 점점 몰입을 향해 나아가게 되고 뜻밖에도 자신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어떤 것을 쓰게 된다.
몸으로 글을 오래 쓰다 보면 몸 전체에서 긴장이 사라지고 편안하게 이완하면서 기분좋은 피로감이 덮쳐 온다. 그 상태를 한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그 다음 단계의 글쓰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사실은 내가 제안하는 이 몸으로의 글쓰기는 자신의 무의식을 이용하는 ‘자동기술법’과 같은 것이다. 이 방법이 가장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매일 새벽잠에서 깨어나는 그 순간이다. 그때 무작정 책상 앞으로 다가가 노트를 펼치고 무언가를 써내려 가면 된다. 간밤에 꾸었던 꿈, 문득 떠오르는 어떤 말들, 토막 난 영상들…….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조합하지 말고 그냥 백지 위에 토해내는 것이다. 이 새벽 시간을 이용해 십분이나 이십분 정도 글쓰기를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책상이 없다고? 그래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글쓰기를 꼭 책상에서 하라는 법은 없다. 부엌 식탁이라든지, 거실의 한 구석이라든지, 자동차의 뒷좌석이든지, 숲 속이든지, 나무 밑이든지, 바위 위에서든지, 시끄러운 카페의 구석 자리든지 글은 어디서든 쓸 수 있는 것이다. 먼저 ‘몸’에 집중하고 몸 속에서 잠들어 있는 ‘정신’을 깨워라. 그 깨어난 정신이 글을 쓰게 하라.
글쓰기를 향한 발걸음을 한 걸음이라도 내딛었다면 쓸데없이 우회하지 말고 심장을 향해 곧장 걸어갈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내가 쓰고 싶은 핵심을 향해 곧바로 나아가라는 말이다.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비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따위는 접어 버려야 한다. 누가 내 ‘심장;’을, 내가 ‘피’로 찍어 쓴 것을 비웃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근원적인 글쓰기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며, 더 나아가 타자와 “대화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이 세상을 향해 내뱉는 나만의 고백이다. …(중략)… 글쓰기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에너지를 느끼고 그것을 밖으로 분출해 내는 행위다. 때로는 그것이 아주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자신도 예기치 못한 통제할 수 없는 무서운 리듬을 탈 때도 있다. 그래서 간혹 처음 글쓰기를 하는 사람 중에는 알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여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 순간은 곧 지나고 말 것이니까. 어떤 경우에도 글을 쓰는 손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금방 쓴 것을 읽기 위해 손을 멈춰서는 안 된다. 철자법과 같은 문법이나 글쓰기의 규범 따위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오로지 쓰고 있는 행위에만 몰입하라. 이 단계의 절정에 이르게 되면 “미치도록 사랑에 빠진 사람”과 같이 내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내가, 이제까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었던 숨어 있던 또 다른 내가 글을 쓰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글쓰기 훈련을 위한 몇 개의 목록들
1. 눈을 감고 기억을 집중해 내가 처음 태어나던 순간으로 돌아가 보자. 그 ‘장소’는 어디인가. 그곳의 창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빛과 들리는 소리들, 그리고 어떤 냄새가 맡아지는가를 써 보자.
2. 내가 동물이 되었다고 상상하자. 곰, 늑대, 여우, 독수리, 말, 낙타, 물고기, 개, 다람쥐, 두더지, 너구리와 같은 한 동물로 변신해 보자. 그리고 그 동물의 눈을 통해 본 풍경들을 글로 써 보자.
3. 아무 시집이나 꺼내 책을 펼친다. 그리고 마음을 잡아끄는 한 줄을 골라 적은 다음, 시집을 덮고 난 뒤 그 다음 구절들을 적어 내려간다.
4. 한 가지 색깔에 대해 정신을 집중해 보자. 이를테면 ‘분홍색’이나 ‘푸른색’에 대해 이십분 정도 몰입해 본다. 그리고 분홍색이나 푸른색과 연관되어 떠오르는 구체적인 사물과 상황에 대해 써 보자.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큰 것,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작고 하찮은 것, 아주 구체적인 것에 대해 세세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5. 성性에 대해 최소의 인식을 갖게 된 계기와 그때의 정황에 대해 써 보자,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따위의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때 나를 감싸고 있던 빛은 어떠했는가, 그 ‘장소’의 지배적인 색깔은 무엇이고, 나는 그 순간 어떤 소리들을 들었는가. 그리고 내 마음은 그것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 정신을 고도로 집중하면 그 당시에는 미처 새겨 보지 못했던 그 작고 하찮은 것들이 다시 선명하게 살아날 것이다.
6. 물에 처음 뛰어들어 헤엄을 칠 때를 떠올려 보자.
7. 어린 시절과 엄마나 아빠, 그리고 형제들과 예기치 않게 따로 떨어져 두려움에 떨며 헤매었던 적은 없었는가. 누구나 다 그런 경험이 있다. 아마도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에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기억에 대해 써 보자.
8. 어떤 ‘장소’의 낯설음 때문에 울어 본 적은 없는가. 왜 울었는가. 그걸 써 보자.
9. 감옥의 무기수라고 상상해 보자. 이십년의 세월을 독방에 갇혀 있다가 풀려 나와 번잡한 도심의 거리를 걷는다고 상상해 보자. 기름가마에서 나오는 닭을 튀기는 산패酸敗한 기름 냄새, 거리에 떠도는 자동차의 배기가스, 젊은 여자의 향수 냄새, 화원의 꽃냄새, 베이커리의 맛좋은 빵냄새……. 거리의 공기에는 무수한 냄새들이 뒤섞여 흐른다. 그 냄새들을 향해 ‘감각’을 충분히 열어놓고 그것에 대해 낱낱이 써 보자.
살아 있는 글쓰기를 향하여
자, 이제부터 소설을 쓰자, 고 마음먹고 시간을 내서 노트와 필기용구를 준비하고 책상에 앉았다. 당신이 편안해하고,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장소라면 서재가 아니더라도 구석진 방이나 부엌의 식탁, 혹은 도서관, 한적한 카페의 구석진 자리, 어느 곳이든지 괜찮다. 너무 춥거나 덥지 않고, 너무 어둡거나 밝지 않은 곳이 좋다. 어떤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어야만 글을 쓸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누군가 옆에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쓸 것인가. 머리 속은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공연히 앉아서 미적미적 시간만을 보내다가 일어서기 일쑤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먼저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에 아무것이라도 좋다. 맨 처음에 떠오른 영상을 써 나간다. 그것은 어떤 단어에서 비롯된 착상일 수도 있고, 어젯밤에 만났던 친구에게서 들은 어떤 이야기와 연관된 것일 수도 있다. 아무것이라도 좋다.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다. 그 순간은 그 누구도 당신의 쓰는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간섭할 수가 없다. 그것을 머리 속에 떠오르는 대로 써내려 간다. 그렇게 써내려 갈 때 어느 순간 무의식 속의 물길이 터져 나올 수가 있다. 밖으로 분출되는 그 무의식의 물길은 우리의 ‘에고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이야기다. 우리의 에고는 ‘최초로 폭발한 생기발랄한 생각’들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내부의 검열자다. 내부의 검열자란 소설쓰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백해무익한 훼방꾼일 뿐이다. 그 내부의 검열자의 눈과 귀를 막을 수 없다면 당신은 소설쓰기를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이 좋다.
최초의 착상은 엄청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당신의 정신 속에서 최초로 폭발한 생기발랄한 생각이다. 헌데 내부의 검열자는 흔히 그러한 생각들을 억누르곤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두 번 세 번 심사숙고한 끝에 오히려 처음 섬광처럼 번득이는 신선한 착상으로부터 한참 멀어지게 된다. (중략) 최초의 생각들은 또 에고에 의해서도 방해를 받는다. 이때의 에고란 우리를 통제하려 들고, 또 이 세계는 영구불변하고 조화로우며 논리적으로 운행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드는 우리 내부의 메커니즘을 뜻한다. 그러나 세상은 영구불변하지 않다. 이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에고의 지배를 벗어나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면 그 글은 에너지로 충만한 것이 되리라. 왜냐하면 그 글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표현한 것일 테니까. 글을 쓸 대 공연히 에고의 부담을 짊어질 필요가 없다. 그 대신 매순간 밀어닥쳐 오는 인간 의식의 파도들을 그때그때 표현하고, 또 그러한 표현을 할 때 당신의 개성적인 표현 방식을 마음껏 구사하도록 하라.
_나탈리 골드버그, 「당신도 작가가 될 수 있다」
우리 내면의 저 깊은 의식 속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기억들이 숨어 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기존의 표현방식이나 공식적인 글쓰기의 규범 따위도 잠시 마음속에 접어둘 필요가 있다. 그것들에 잔신경을 쓰다 보면 생각의 흐름은 자꾸 방해를 받게 되고, 결국은 글쓰는 손을 놓아야 되는 순간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의 맥락을 끊지 않기 위해 결코 이미 썼던 것을 되돌아가 읽거나, 그것들을 고치는 행동들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글쓰는 손을 멈추고 노트에 씌어진 것들을 읽기 시작하면 우리 속에 숨어 있던 내부의 검열자가 시시콜콜한 트집을 잡아 우리의 글쓰기를 중단하도록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사로잡았던 열정은 식기 시작하고 우리의 내면에서 섬광처럼 터져 나오던 신선한 생각의 흐름은 중단된다. 무조건 자신의 생각이 뻗어 나가는 대로 멈추지 않고 그 끝간데까지 글쓰기를 밀고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맥이 빠진 죽어 있는 글을 쓰기를 원치 않는다. 살아 생동하며, 에너지로 충만된 글을 쓰기를 바란다. 만약 당신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첫 번째의 시도에서 당신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기억들을 섬광처럼 글로 써냈다면 이제 그것을 지속해야 한다.
훌륭한 피아노 연주자나 신기록을 내는 수영선수들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매일 수 시간씩 반복적으로 피나는 연습한다. 그것은 한 달이나 두 달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년, 혹은 일이십년동안 그 연습에 매달린다. 그때 비로소 한 사람의 훌륭한 피아니스트, 혹은 수영선수가 탄생하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어쩌다가 한 번 쓴 소설로 훌륭한 작가가 되는 법은 없다.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수년, 수십년 지속적으로 글쓰기를 연마해야 한다. 그런 피나는 습작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한 명의 작가가 탄생하는 법이다.
[장석주의 소설창작 특강 中]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창작에 앞서 퇴고의 중요성부터 배우거나 인식하는데, 정작 실제적인 글쓰기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규범이나 양식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대학 강의 중 품평 시간에도 꼭 맞춤법이나 비문만 날카롭게 지적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런 친구들 치고 실질적으로 작품의 주제나 표현방법에 대해 비평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제가 휴학하기 전에 대학 교재로 샀다가 반 정도 정독한 책인데(1부 원리-소설창작의 실제, 2부 표출-한국 소설의 새로운 양상들...2부는 대충 봤습니당;;), 도움이 되는 글이 많아서 올려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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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설뿐만 아니라 시작 노트를 위해서도 좋은 연습법. 매일 축적해놓은 본능적인 감상들은 좋은 시의 기반이 됩니다.
글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평소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이 글을 읽으니 기쁘다.
도움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