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녘의 초당글밭] 01월 17일(일) 박종철의 박종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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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글밭을 일구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쓰던 글을 접고 다시 글밭을 일굽니다.
그러니까 어제인 토요일에 홍길동봉사단 모임을 가져 그것을 소재로 하여 일구던 참이였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그그저께가 바로 박종철님이 물고문으로
삶을 마감했던 날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다시 글을 쓰는 중입니다.
박종철님은 물고문으로 1987년 1월 14일에 삶을 잃으셨읍니다.
당시로 돌아갑니다.
님은 서울대 언어학과 과대표였다고 합니다.
13일, 밤 늦은 시간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로 불법 연행됩니다.
함께 지냈던 박종운에 대해 이야기를 하라며 폭행은 물론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합니다.
동아리 선배였던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려는 것이 저들의 목적이었읍니다.
박종철을 압박하면 박종운의 소재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겠지요.
그렇지만 박종철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고, 끝내 목숨을 잃게 됩니다.
다행히 지금, ‘박종철’님을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은
당시 중앙일보 검찰 출입기자 신성호님의 역할을 빼 놓을 수가 없읍니다.
님은 ‘경찰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짧막한 기사를 단독 보도했지요.
다음날인 16일, 당시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기자회견을 통하여
“책상을 ‘탁’치니 갑자기 ‘억’하며 죽었다”는 궤변을 늘어 놓습니다.
쇼크사가 고문사로 확인된 것은 사망 검진의사였던 오연상님의 역할도 빼 놓을 수 없지요.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고, 청년은 이미 숨져 있었으며 복부 팽만이 심했고,
폐에서는 물이 찬 소리가 들렸다는 사실을 언론에 있는 그대로 알립니다.
부검의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장 황적준님도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뿌리칩니다.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라는 의견을 밝혔던 것이지요.
님의 주검은 16일 오전, 불에 태워져 임진강의 한 샛강에 뿌려 집니다.
흩날리는 뼛가루를 향하여 아버지 박정기님은 외마디를 지릅니다.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세상이 아버지와 함께 온통 울었던 그날이었지요.
그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치루어졌며 우여곡절 끝에 노태우가 선출되었읍니다.
그후, 박종운은 2000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3차례 걸쳐 총선에 출마했읍니다.
당시 수사검사인 박상옥은 2015년, 대법관에 올랐읍니다.
당시 기자 신성호는 지난 1월 2일 청와대 홍보특보가 되었읍니다.
당시 영정을 들었던 오현규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으로 구의원이 되었읍니다.
오연상님은 지난해 박원순 아들 병역비리 의혹 재판의 진료기록 감정인으로 참여했읍니다.
아버지 박정기님은 전국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 회원으로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몰두하십니다.
조용한 일요일 새벽은 어느덧 흘러흘러 아침을 거쳐 점심 때에 이르렀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