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레귤러팀, NPD팀
1995 - 1997
1994년 내가 담당했던 소주는 그린을 출시하여 선풍적인 돌풍을 일으킨 반면
맥주시장에서는 크라운 하이트맥주가 무섭게 치고올라와
시장점유율을 급상승시키고 있었다.
93년 하이트맥주 출시 후에도 조선맥주 시장점유율은 하락(동양맥주 69:31에서 71:29)
하지만 94년 들어 하이트의 폭발적이 신장세가 이어짐.
이러한 상황에서 94년 3월 3일 부랴부랴 내놓은 신제품이
OB 아이스 맥주였다.
당시 최고의 배우 강수연과 모델료 4억에 체결하고
엄청난 물량의 광고비를 쏟아 부었지만 시장에서의 반응은 좋지않았고
시장점유율은 계속 하락하고 있었다.
동양맥주는 아이스공법으로 만든 오비아이스맥주 발매와 함께
파상공세를 퍼부었음에도 급속도로 조선맥주의 하이트에 시장점유율이 잠식당하고,
소주시장의 절대강자 진로가 미국 쿠어스와 합작으로
진로 쿠어스맥주를 설립 카스맥주로 시장을 비집고 들어왔다.
특히 진로는 막강한 소주유통망을 바탕으로 단시간에 시장점유율 10%를 돌파한다.
다급해진 동양맥주가 1994.10.20일 두번째 선수로 등판시킨 맥주가 NEX다.
그러나 넥스맥주 또한 어정쩡한 포지션으로 시장점유율 방어에 실패,
이 시기에 동양맥주와 조선맥주의 시장점유율과 매출이 역전된다.
95년 2월 일본어학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레귤러맥주팀으로 다시 발령을 받았다.
아이스, 넥스 출시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것이다.
잠깐 넥스광고로 정우성을 모델로 쓰면서 반전을 노렸지만
이미 소비자의 마음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95년 하반기 그룹에서는
회사별로 마케팅 부문 부서장 또는 중역을 1명씩 뽑아 23명이
주말(금요일 오후~토요일)에 연수원에서 특별 교육을 받았다.
PMP 과정 1기생으로 뽑힌 것이다.
선발된 국내대학 유명한 마케팅 교수들이 신마케팅을 강의하고
교수1명 당 3개회사 즉 3명을 지도교수로 정하여
각 회사의 Case study(성공사례 등)를 논문지도 하게 하였고,
96년 3월 졸업과 동시에 그룹 오너들을 비롯
전 그룹회사 임원들을 모신 자리에서 발표하게 하였다.
다른 회사에서는 성공사례를 발표하였지만
나는 지도교수와 상의하여 Ice 맥주 실패사례를 발표했다.
아픈 사례지만 이를 통해 배울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논문심사와 발표에서 모두 상을 받았다.
졸업후 96년 4월 지도교수들과 졸업생이 일본과 미국에
기린맥주, 미국 코카콜라, 안호이저부시 맥주회사 등
산업시찰겸 졸업여행을 다녀왔다.
96년 초 경영진에서 획기적인 신제품을 개발할 것을 명받았다.
오비마케팅팀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특별임무를 받아
사무실도 따로 얻어서 팀(NPD)을 꾸렸다.
명동에 하나의 사무실을 얻어 새롭게 데코레이션을 하고
그곳으로 출퇴근하며 업무를 수행하고 브리핑할 때만
본사로 들어갔다.
당시 팀원들은 오비에서 부문별 전문가(판매, 제조, 광고)
그룹에서 지원(조사, 마케팅) 그리고 컨설팅회사 직원 3명 등이었다.
제품기획단계부터 광고대행사도 참여시켜 비밀리에 수행했다.
맛, 네이밍, 레이블 디자인, 광고 컨셉 등을 정하고 시판준비를 끝냈다.
최종적으로 지점장 회의에서 지점장들의 의견을 물은 결과
신제품을 2번이나 실패한 때문인지 신제품출시보다는
오비라거를 리뉴얼해서 출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
결국 신제품은 캐비넷에 들어가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후 오비라거를 리뉴얼해서 회오리공법의 맥주로
박중훈, 최종원을 모델로 광고는 히트를 쳤지만
판매량 증대와 시장점유율은 만회하지 못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IMF를 맞아 오비맥주는 벨기에의 인터브루회사와 합작하게되었고
많은 회사직원들이 퇴직하는 와중에 나는 영업교육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여기까지 마케팅에 근무하면서 있었던 일들입니다.
중간에 여러 신제품 출시도 있었지만 생략했습니다.
회사생활의 대부분을 신제품 출시에 매달렸던 시절~
당시는 걱정도 많았고 힘도 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맥주회사에 있으면서 해외 출장도 많이 나갔고
그렇게 좋아하던 맥주를 원없이 마셨기 때문입니다.
회사생활의 마지막은 영업교육팀에서 마쳤습니다.
첫댓글
오늘도...
세잎 클로버 님의
인생 역사 한 페이지를 잘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