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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40) 기적
노숙인을 이웃으로… 꽃동네의 도전과 희망
- 1982년 음성 꽃동네 노인요양원 기공식.
“우리 교구 신부들도 궁핍한 가난뱅인데 누가 누굴 먹여 살리겠습니까?”
교구 신부들이 어렵사리 꺼낸 말이 화살이 되어 정진석 주교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정 주교는 내색하지 않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신부들이 이렇게 자신들의 위태위태한 처지를 드러낸 것은 한 신부가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며 계획서를 제출한 직후였다. 전국의 걸인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구상은 당시로는 허무맹랑한 발상인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최대 사회복지 시설인 꽃동네는 그렇게 힘겹게 시작했다. 정 주교는 이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꽃동네의 시작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고,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꽃동네는 청주교구 무극본당 주임이었던 오웅진 신부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밥 동냥을 하는 최귀동(1990년 선종)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나면서 비롯됐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금왕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제 강점기에 강제노역에 끌려갔다기 금왕으로 돌아왔을 때는 가족들도 죽고 자신이 살던 집도 전쟁통에 사라져 아무런 연고도 없게 됐다. 결국 무극천 다리 밑에서 천막을 치고 사는 걸인이 되고 말았다. 기구한 신세였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여느 걸인과 다른 점이 있었다. 자신도 빌어먹어야 사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집집이 돌아다니며 남는 밥을 얻어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사는 걸인들에게 나눠줬다. 오 신부는 그 모습에 큰 감동을 하여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모토로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용담산 기슭에 전 재산 1300원을 털어 ‘사랑의 집’을 짓고 꽃동네를 시작했다. 시멘트를 구매해 걸인들을 위한 ‘사랑의 집’을 지었다. 5칸짜리 ‘사랑의 집’에 최 할아버지를 비롯한 걸인 18명을 데려오니 하나둘씩 걸인이 늘어났다. 그런 오 신부가 전국의 걸인들을 위한 꽃동네를 건립하겠다는 계획안을 교구장인 정진석 주교에게 가져왔던 것이다.
- 1992년 가평 꽃동네 부랑인 시설 준공식 및 정신요양원 기공식. 앞줄 왼쪽 세 번째부터 김옥균 주교, 정진석 주교와 오웅진 신부, 당시 노태우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
사회복지 시설에 관심이 많던 정 주교는 사제단에게 의견을 물었다. 사제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충청북도가 남한에서 가난하기로 손꼽히는데, 전국 거지들을 다 모아 놓으면 그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겠습니까?” “음성군은 농업이 주 산업인데 전국 거지들이 모여들면 우리 군이 무슨 돈으로 그들을 먹이나요?”
부정적인 의견을 낸 사제들의 이야기도 일리가 있었다. 청주교구 사제들도 외국의 도움을 받고 있는 판에 걸인들을 돕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냐는 것이었다. 많은 신부에게는 뻔히 실패할 길로 들어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웅진 신부는 더욱 강하게 소리를 높였다.
“이것은 시대적 사명이기에 반드시 우리 교구가 해야 합니다. 교구 재정에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운영하겠습니다.”
정 주교는 양쪽의 의견을 들을 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이 역시 교구장 주교에게 주어진 몫이었기 때문이다. 정 주교는 잠시 눈을 감았다. 부평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먹여 살렸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사실 당시의 정 주교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가능하게 되는 체험을 많이 하게 되어 하느님의 사업은 인간의 사업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믿었다. 정 주교는 팽팽히 맞서는 사제회의에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주님의 뜻대로 흘러갈 것임을 정 주교는 굳게 믿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꽃동네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가족과 수도자, 봉사자, 직원이 함께 살아가는 종합 사회복지 시설로 성장했다. 도움받던 공동체가 어느덧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 가평, 강화도 꽃동네를 비롯해 미국 린우드, 테메큘라, 뉴저지, 조지아 등과 필리핀, 방글라데시, 인도, 우간다, 아이티 등에도 꽃동네를 세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맞았다.
더 나아가 1979년에 창립된 예수의 꽃동네 형제ㆍ자매회는 2015년에 청주교구 설립 수도회로 공식 인준되어 교회법적 지위와 함께 고유의 카리스마를 인정받았다. 수용자 시설에서 나아가 요양원, 병원, 대학과 연수원 설립 등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에 나눔의 정신을 전하기 위한 기관들을 설립했다.
한없이 몸집이 커지던 꽃동네에도 위기가 닥쳤다.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한 오웅진 신부는 2000년대 초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 조사까지 받는 고초를 겪었다. 2003년 태극 광산 금광 채굴과 관련해 오 신부를 비롯한 수도자 두 명이 재판을 받고 수도원이 압수수색을 당한 것이다.
이는 법정에서 무죄 판결이 나면서 일단락됐다. 그러나 최고의 찬사를 받던 꽃동네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하루아침에 이미지가 추락했고, 자원봉사자마저 꽃동네를 떠났다. 꽃동네로서는 설립 이래 처음으로 큰 타격을 받은 셈이었다. 꽃동네 설립 계획안으로 씨름하던 때부터 보아온 정 주교는 멀리서 꽃동네의 시련을 지켜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
천주교회는 예전부터 많은 복지사업을 했는데 책임자는 대부분이 신부, 수녀들이었다. 국내 후원금은 극히 일부였고, 주로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다 보니 복지사업체의 시스템이 잘 정비가 될 수 없었다. 정부도 최소한의 간섭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사회복지 단체들도 좀 더 투명한 시스템과 법질서 안에서 운영돼야 한다는 요구를 받게 됐다. 법을 어겼을 시에는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부정하게 착복한 돈은 한 푼도 없었더라도 법적인 절차를 무시하면 범법이 되어 처벌을 받아야 했다. 과거처럼 양심적으로 떳떳하면 된다는 식으로 운영하던 시기는 지나가고 법적인 절차에 맞춰 따라야 했다. 꽃동네 사례는 안일하게 넘어갔던 부분을 이제 더 늦추지 말고 새로 고쳐 나가야 한다는 것을 한국 교회 전체가 절감하는 계기가 됐다.
정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자주 “꽃동네는 봉사와 기부 정신이 만들어낸 기적의 현장”이라고 치하했다. 정 주교의 청주교구 사목에서 특별한 체험이었던 꽃동네는 다시 일어나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회복지가 자리 잡지 못했던 시절 가난한 교구에서 먼저 노숙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인 기적이 일어난 만큼 이제는 우리 주변 곳곳에서 서로가 형제자매가 되는 기적이 퍼져나갈 것이라고 정 주교는 굳게 믿었다.
[추기경 정진석] (41)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
교회법전 번역과 해설서 집필에 20년 정성 쏟아
- 2000년 4월 서강대 학위 수여식에서 「교회법 해설」을 저술한 업적으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있는 정진석 대주교. 가톨릭평화신문 DB.
가톨릭교회가 준수해야 할 교회 법규들을 담은 「교회법전」. 교회에 매우 중요한 책자임에도 우리나라에 라틴어와 일본어 대역판으로 출판된 것이 1960년 전후였을 것이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정진석 주교는 교회법에 관심이 많아 라틴어-일본어 대역판 교회법전이 출판되자마자 구입해서 읽어 보았다. 하지만 매끄럽지 않은 문장이 내내 걸렸다.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더 공부해서 내가 한국어 대역판 교회법전을 번역하겠다.”
그 당시 왜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일본어 법전은 있는데 한국어 법전이 없으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는 로마 유학 시절 교회법을 전공하면서 라틴어-일본어 대역판 법전을 더욱 많이 찾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불편한 것이 많았다. 그때 지도교수 신부가 얼마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로 새 교회법전이 출판될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정 주교는 새로 반포될 교회법전을 자신이 꼭 한국어로 번역해야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그런데 예상보다 늦어진 1983년에야 새 교회법전이 반포됐다. 정 주교는 당시 청주교구장으로 사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다. 자신처럼 교회법을 공부하는 한국의 신부들과 평신도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정 주교는 새 교회법전이 반포되자마자 혼자 번역을 시작했다. 작업을 시작하니 성령의 도우심이 이어졌다. 정 주교와 같이 새로운 교회법 번역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교회법 전공 사제를 십여 명 만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신부들과 함께 교회법전을 번역하기로 하고, 주교회의에 참석해 각 교구 주교들에게 이러한 의견을 전달했다.
“꼭 필요한 일을 하시는군요! 건투를 빕니다.”
주교들의 적극적인 응원에 힘입어 정 주교를 필두로 한 교회법 번역위원회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공동 작업에 들어간 번역위윈회는 매달 한 번씩 모여 사흘간 자신들이 번역한 것을 놓고 토론했다. 매달 토론을 위해 신부들은 합숙하며 작업했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토론한 이후에는 각자 한 부분씩 번역을 진행했다.
번역이 진행되는 대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사목」에 번역본을 한 부분씩 실었다. 여러 독자들과 신부들의 평가와 비판 등 피드백을 받자는 뜻이 있었다. 번역하는 문장은 대부분 쉽고 짧은 문장으로 작성해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정 주교는 교회법전을 공부하던 신학생의 심정으로 돌아가 항상 읽는 이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 여러 해 동안 고달프고 외로운 작업을 진행한 끝에 1983년 시작한 번역 작업이 1989년에 끝이 났다. 곧바로 교황청 허가를 받아, 같은 해 라틴어-한국어 대역판 교회법전을 출판할 수 있었다.
법전 번역을 하다 보니 우리나라 환경과 다소 달라,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잘못 해석할 여지가 있어 보였다. 교회법을 전공하고 오랜 시간 교회법전에 열정을 쏟은 정 주교는 신자들을 위해 또 하나의 계획을 세웠다. 교회법전 해설서를 쓰기로 한 것이다. 해설서 작업은 정 주교 단독으로 진행했다. 그는 해설서 머리말에 책을 낸 이유를 세심하게 적었다.
- 교회법 해설서.
“교회법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것이 태어난 배경과 유래를 잘 알아야 한다. 대체로 로마법을 이어오는 교회법은 우리가 잘 모르는 이질적인 사회 환경과 문화 전통의 소산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겨우 200년 남짓하고 신자 수도 국민의 5%에 지나지 않으므로, 한국 교회는 신자들에 대한 사목 활동보다는 미신자들에 대한 전교 활동에 주력했고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그리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법은 전교 활동보다는 사목 활동을 위하여 제정되는 것이니만큼,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교회법의 유용성을 신자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별로 없었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로 이 근래에 한국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여 신자 수가 300만 명에 이르고 여러 수도회들과 각종 신자 단체들이 설립되며 이들을 올바르게 사목하기 위하여 교회법에 관한 지식이 아쉬워지고 있다.
때마침 1983년 새 교회법전이 공포되었기에 한국 교회에서는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한국어판 교회법전이 나와도, 그 내용이 한국인에게는 생소한 부분이 적지 않으므로 불가불 해설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교회법 해설서를 쓸 능력이 모자람을 알지만, 교회법전의 번역을 성실히 하기 위하여 공부한 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제공하여야 한다고 여겼다. 필자는 이 해설서가 주로 교회법 강의가 비교적 부족한 신학생들에게 참고서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해설을 서술하지 아니하고 요점만 간추리는 형식으로 썼다.(후략)”
그렇게 정성껏 작업한 해설서가 장장 15권에 이르렀다. 도중에는 우리 현실을 반영해 한국 교회 사목의 준거가 되는 규범을 정한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편찬의 책임을 지기도 했다. 쉼 없는 여정이었다. 그 와중에도 정 주교는 먼저 펴낸 교회법 해설서에서 아쉬운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증보판도 편찬했다.
사실 교회법 해설 제3권을 집필할 때까지는 집필에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초반에는 아주 간략하게 저술했다. 그러나 막상 작업을 시작하니 죽기 전까지 끝마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증보판을 시작했다. 교회법 해설 증보판 제1~3권은 초판보다 분량이 5~6배가량 더 많았다. 해설서는 2002년에야 열다섯 번째 최종본을 발간할 수 있었다. 번역하고 해설서까지 쓰는 데 20년의 긴 시간이 걸렸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해설서를 만들겠다는 자부심으로 정 주교가 집필에 열중한 세월이었다.
해설서 제4권부터는 증보판을 낼 여유가 없었다. 정 주교는 해설서 작업을 하던 중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교회법 해설에 매달릴 여유가 없어서 부득이 해설서 제4권의 증보판 작업은 중단했다. 그러던 2008년 서울대교구 한영만 신부가 정 주교의 해설서 15권을 요약해 「교회법전주해」라는 책을 출판했다. 정 주교가 뿌린 씨앗이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어렵고 힘든 교회법전 번역과 해설 작업을 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해오셨나요?”
어쩌면 정 주교는 교회법전에 한평생을 온전히 매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신학생 시절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의 평생 작업에 대해 물어오는 이들에게 그는 싱긋 웃어 보였다.
“누군가는 교회를 위해 꼭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니까요.”
[추기경 정진석] (42)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눈앞이 캄캄했는데… 돌아보니 하느님 은총이었네
- 1988년 청주 공설운동장서 열린 청주교구 설정 30주년 신앙대회 및 성모 성년 전국 대회에 참석한 신자들.
1980년대는 한국 교회에 특별한 시기였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차례로 열렸기 때문이다.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에게도 이때는 특별했다. 한국 교회의 큰 경사와 함께 청주교구가 설정 25주년을 맞았고, 정 주교 자신도 사제 수품 25주년 은경축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나라와 함께하고 있음을 기도 중에 자주 체험할 수 있었다.
1980년대의 한국 교회는 대규모 신앙 대회를 통해 쇄신의 노력을 계속하게 된다. 한국 교회는 1981년 개최된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행사’를 통해 교회 현황을 점검하고 쇄신하기 위한 의지를 다졌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행사’는 교회에 큰 자신감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에 천주교를 알리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줬다. 이어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행사와 사업들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이러한 한국 천주교 전체 분위기와 흐름을 같이해 청주교구도 마침 교구 설정 30주년을 앞두고 있었다. 또 서울 제44차 세계성체대회 등이 시기적으로 연결됐다. 정 주교는 이 모든 것에 하느님의 깊은 뜻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한국 교회의 발전과 성숙, 그리고 쇄신의 흐름 속에서 청주교구도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1983년 2월 16일(한국 시각 2월 17일) 초대 교구장 파디(James V. Pardy,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 주교가 숙환으로 선종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당시 정 주교는 공무로 유럽 순방 중이었다. 정 주교는 선종 소식을 듣자마자 파디 주교를 위해 기도했다. “파디 주교님! 주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고, 하늘나라에서 우리 청주교구도 계속 돌보아주세요.” 청주교구의 첫 머릿돌을 놓고 외국에서 모진 고생을 했던 파디 주교는 훌륭한 선교사였다. 그런 분들의 희생이 바로 오늘의 한국 교회 버팀목이 됐다고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
- 1986년 사제 수품 25주년 기념 미사.
한국에서는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와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교구 사제단과 메리놀회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2월 24일 내덕동주교좌성당에서 많은 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청주교구 신자들은 자신의 첫 교구장을 기억하며 큰 슬픔에 잠겼지만 고마움과 감사를 잊지 않았다.
파디 주교의 전구 안에서 청주교구는 1983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준비하게 됐다. 정 주교는 이러한 시기를 보내는 데 무엇보다 순교자들의 도움이 가장 필요하다고 보고,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유해 순회 기도회’를 실시했다. 내덕동주교좌성당을 시작으로 25개 성당과 1개 수녀원을 순회하는 행사였다. 영적 교육을 위해 특별 강론과 성소 계발, 순교 신심 함양, 선교 강화, 가정 성화 등에 사목적 역량을 집중시켰다. 또 교구 설정 25주년 및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성당으로 사창동성당을 건립하고, 수곡동본당을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해 4월 11일부터 3주 동안 안동교구와 합동으로 교구 25주년 및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전체 사제 생활 쇄신 연수회’(아조르나멘토)를 실시했다. 당시에는 교구별로 아조르나멘토가 유행했다. 연수회에서는 교구 설정 25주년 기념 사업과 교구의 사목 방향이 다각도로 논의됐다.
- 1984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마중하는 정진석 주교.
1984년 5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행사는 ‘이 땅에 빛을’이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교황은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의 200주년 기념 신앙 대회와 순교 복자 103위 시성식을 집전했다. 교황의 방한은 한국사회뿐 아니라 한국 교회에 큰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청주교구는 1984년 10월 3일 정진석 주교의 집전 아래 200주년 기념 성당으로 신축된 사창동본당 봉헌식을 했다. 사창동본당은 교구 설정 25주년을 기념하며 추진한 기념 성당 1호였다. 교구민의 힘만으로 이룩한 최초의 성전이었다. 본당 신자들은 비누나 세제 등 각종 생필품을 팔고, 결혼반지를 헌납하는 등 정성을 모아 성전 건립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성전을 짓는 동안 교구민이 일치하고 화합하는 은총이 쏟아져 내렸다. 성전을 봉헌하던 날, 감격한 정 주교는 본당 신자들에게 당부했다.
“행복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때 옵니다. 죄를 용서받고 기도하는 성전이 끝까지 거룩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노력해주세요.”
1986년 3월 18일에는 교구장 정진석 주교도 사제 수품 25주년 은경축을 맞았다. 은경축 행사는 내덕동주교좌성당에서 열렸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한국 교회 고위 성직자들과 교구 사제단, 신자 등 1500여 명이 청주교구의 첫 한국인 교구장을 위해 모였다. 정 주교는 자신의 은경축 미사를 집전하면서 지난 세월이 마치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있음에 놀랐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우러났다. 미사 중간 자꾸 옛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행사의 연속이었다.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한국의 서울에서 치른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 아래 성체대회 준비에 들어갔고, 1988년부터는 준비의 일환으로 ‘한마음한몸운동’을 추진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에 이어 두 번째로 1987년 6월 7일부터 1988년 8월 15일까지를 성모 성년 기간으로 선포했다. 한국 교회는 이를 기회로 신자들이 지정 성당을 순례한 뒤 전대사를 받음으로써 성체대회를 맞이하는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했다. 청주교구는 마침 1988년 맞는 교구 설정 30주년 행사를 한마음한몸운동과 성모 성년 행사에 맞춰 추진하기로 하고, 이를 바탕으로 1989년 세계성체대회에 함께한다고 발표했다.
정 주교는 이렇듯 청주교구의 30주년 행사와 다음 해 성체대회가 연결되는 것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느꼈다. 행사는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준비하는 단계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체험했다. 정 주교는 30주년을 맞아 청년기에 들어선 청주교구의 모든 교구민이 주님을 머리로 한 지체가 되어가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20여 년 전 청주에 처음 왔을 때 눈앞이 캄캄했는데, 오늘의 이런 결과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기도를 드리는 정 주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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