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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13) <틴턴 수도원(Tintern Abbey)> : 자연을 통한 인간 조건의 초월
허물어진 인간의 한계 너머…자연의 품에서 공감하고 성장한다
도널드 위니컷의 대상관계 이론에 따르면, 유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을 돌보는 대상과의 관계 경험을 바탕으로 관계방식을 내면화한다. 살아가면서 대상은 바뀌지만, 대상과의 관계를 통하여 삶의 의미를 형성한다. 즉,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내가 아닌 다른 어떤 대상(사람, 돈, 취미생활, 학문, 종교, 자연, 직업 등)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내적 충만함을 갈망하는 존재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불안한 존재로 인식한다.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마음이 안달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신이라는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결코 완벽한 내적 평화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18세기 말, 콜리지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 시대를 열었던 워즈워스 시인은 <틴턴 애비>(Tintern Abbey, 틴턴 수도원)라는 시에서 내적 갈망의 여정을 자연과의 관계를 통하여 매우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시인에게 자연은 단지 아름다운 대상일 뿐만 아니라, 내면의 온전한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다.
16세기에 영국국교회를 확립한 헨리 8세는 수많은 가톨릭 수도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폐쇄하는 ‘수도원 해체’를 단행하였다. 그 이후 오랜 시간 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수도원들은 18세기 들어서면서 여행지나 예술가들의 영감으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웨일스 남동쪽에 있는 틴턴 마을의 시토회 수도원도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여전히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워즈워스는 5년 만에 다시 찾은 틴턴에서 자연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자연의 모습을 ‘다시 바라본다.’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된 현재의 자신을 확인하고, 변화될 타인의 미래를 희망한다. 「틴턴 애비」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시인은 ‘청춘기’에 감각적 대상을 갈망하였다. 오 년 전 “처음으로, 이 작은 산들에 와서,” 그는 한 마리 “노루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그리고 커다란 바위, 산과 속이 깊이 팬 음침한 나무들의 색과 모양들은 젊은 시인에게 일종의 욕구였다.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탐하듯, 시인은 그렇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꼈다. 자연으로부터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자극을 추구하였다.
워즈워스는 자연이라는 대상과 관계를 맺은 이러한 과거의 모습을 “생각 없는 청춘기”였다고 고백한다. 자연 안에서 경험한 느낌은 성찰이 아니라, 감각적인 신체적 차원에 머물게 된다. 평정이나 균형 없이, 마음은 쉽게 동요된다. 시인의 갈망은 자연과의 직접적인 감각적 만남에 의존하기에, 자연과 떨어지게 되면 내적 충만함을 유지할 힘이 없다. 그래서 비록 자연을 통하여 기쁨을 맛보지만, 그 기쁨은 “서글픈 기쁨”이며, 환희도 “어질어질하던 환희”였다.
자연 안에서 무언가 강한 느낌을 체험하지만, 아직 그러한 감정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내면화에 이르지 못했다. 나이를 먹어간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섯 번의 여름과 그 길이만큼 다섯 번의 긴 겨울”을 보내면서, 시인은 젊은 시절의 서글픈 기쁨에 대한 상실을 겪는다. 과거의 “그 시절은 지나갔다.”
“생각 없던” 젊은 날의 시인은 여러 해가 지나면서, 세상의 열병과 약간은 슬프고 당혹스러운 수많은 인지를 맛보게 된다. 육체적 감각에 묻혀 있던 내면의 마음은 고통, 죽음, 그리고 인간 삶의 복잡성과 대면하면서 깨어나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를 더욱 깊게 만들고 과거의 갈망과 서글픈 기쁨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
그래서 이제는 “억제하고 억누르는 / 넉넉한 힘을 간직한 채, 거칠거나 귀에 거슬리지 않는 / 인간의 고요하고도 슬픈 음악을 / 종종 들으면서, 자연을 관조하는 법을 / 배웠다”라고 노래한다. 이 음악은 물리적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과 한계, 삶의 복잡성에 대한 고요한 자각을 의미한다. 자연은 인간 조건의 메아리로서, 삶의 버거움으로부터 도피하여 즉각적인 감각적 위로를 얻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그 버거움을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공감 능력과 인간 조건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얻게 된 시인의 깨달음은 영적인 차원에까지 이른다. 그는 “고양된 사고의 기쁨으로” 자신의 마음을 깨우는 어떤 존재를 느낀다.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의인화된 대상이 아니라, 내재적 신성의 한 형태이다. 이 존재의 형태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어떤 존재는 인간과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는 햇살과, 둥근 대양과, 생생한 공기와, 푸른 하늘과, 인간의 마음속에서” 살고 있다. 더욱이 이 “어떤 존재”를 인식하였을 때 느끼는 기쁨은 “숭고한 감각, 훨씬 더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이 존재는 인간의 마음과 자연과 다양한 관계들 안에 머물고 있다.
워즈워스가 자연 안에서 경험하는 신적 체험은 자연 신비주의로 분류된다. 어떤 비평가들은 이것을 범신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결코 자연과 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신은 자연과 세상과 인간 삶에 현존하고 있다. 절대적 존재로서 세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상 안에 현존의 형태로 스며들어 있다.
여러 사상가는 자연을 제2의 성경으로 이해한다. 하느님은 두 권의 책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성경과 자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땅과 바다와 심연과 산들바람에게 “저의 하느님”이냐고 묻는다. 그들은 모두, “우리는 너의 하느님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를 내셨다!”, “우리 위에서 찾아라”라고 답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피조물에 깃들어 계신다.
5년 전에 바라보았던 자연과 현재 바라보고 있는 자연은 같은 자연이다. 변화된 것은 시인 자신이다. 과거엔 감각적 만족을 갈망하였다면, 현재는 “인간의 슬픈 음악”을 들으며 관조와 성찰의 태도로 자연을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의 자연은 단순한 감각적 풍경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절대자가 머무는 거룩한 곳이다. 그리고 시인은 마침내 자연이라는 대상을 통하여, 그리고 더욱더 성숙한 관계 형성을 통하여, 삶의 충만함을 살아간다.
동시에 시인에게 기억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과거의 경험을 보존하고 다시 활성화한다. 그는 “외로운 방안이나, 읍과 도시의 소음 속에서” 자연에 대한 기억에 의지했다. 지칠 때마다 자연에 대한 경험의 기억을 “핏속에서 느끼고, 가슴으로 느낌”으로써, 평화를 회복하였다. 바로 기억을 통하여 현재의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여 항상 자연과 일치를 이룬다.
흥미롭게도 워즈워스는 자신의 누이 도로시와의 관계를 통하여 현재의 깨달음을 미래로 확장한다. 그녀의 목소리와 열광적인 눈이 발하는 빛 속에서 자신이 지녔던 감각적 열정과 서글픈 기쁨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녀 또한 지금 자신이 도달한 깨달음에 이르기를 바란다.
“이 야생의 황홀한 경험들이 무르익어 / 차분한 기쁨이 될 때, 너의 마음이 / 사랑스런 모든 형상들을 위한 저택이 될 때…. 오! 그때가 되면, / 고독이나, 공포나, 고통이니, 슬픔이 / 너의 일부가 되더라도, 네가 다정한 기쁨의 / 온갖 치유하는 생각들과 더불어 / 나와, 나의 이 충고들을 떠올리게 되리라!”
시인은 자신의 경험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에 대한 공감과 성장으로 나아간다.
[영성의 샘] 딱 붙어 있는 마음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그 뜨거운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하는 ‘예수 성심 성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의 마음속에 주님의 성심이 가만히 내려앉아, 그분의 사랑이 온전히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저 또한 사제로서 이번 성월을 맞이하며 주님의 마음을 닮아보겠노라 굳게 결심해 봅니다. 하지만 결심은 늘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높은 산인지 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제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부끄러움과 고민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나도 주님을 닮은 사제라 불릴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어느 날,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환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래, 올해는 이렇게 해보자!’ 하는 다짐이었지요.
요즘 한국 천주교회는 2027년 ‘세계청년대회(WYD)’ 준비로 활기가 넘칩니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WYD 십자가’가 전국 교구를 순례하고 있는데, 마침 제가 머무는 대구대교구가 이번 달 순례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루르드의 성모님이 계신 성모당을 시작으로 성당과 병원, 학교, 교도소, 그리고 낮은 곳에 있는 사회복지 기관들까지 십자가는 쉼 없이 사랑의 발길을 옮기고 있습니다.
순례하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번 대회의 주제 성구를 떠올려 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세상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방법, 즉 ‘십자가’라는 희생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그 사랑의 법이 바로 예수성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지만 그 큰 사랑을 닮으려니 막막함이 앞섰지요. 그때였습니다. 십자가 바로 곁에서 함께 걷고 계신 한 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사실 이 순례의 공식 명칭은 ‘WYD 십자가와 성모 성화 순례’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혼자 가지 않습니다. ‘로마 백성의 구원 성모’라 불리는 성화 속에서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십자가 바로 곁을 지키고 계십니다. 아들이 있는 곳에 어머니가 있고, 예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성모님의 마음도 함께 얽혀 있습니다. 두 분의 마음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깊은 일치 속에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주 단순하고도 명쾌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싶다면, 성모님처럼 예수님께 딱 붙어 있어야겠구나!’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기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무조건 그분 곁에 꼭 붙어 다니는 것. 그렇게 붙어 있으려는 마음만 있다면,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주님께서 어떻게든 채워주시리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 마음은 우리 레지오 단원들의 영성과도 참 닮아 있습니다. 성모님과 손잡고 주님을 모시며, 어머니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활동하는 그 길 끝에서 우리는 결국 주님의 마음과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예수 성심 성월, 우리 모두의 마음이 예수님과 성모님의 마음에 ‘딱 달라붙어’ 한마음으로 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함께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그분을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6) 겸손의 길 : 자신을 비우고 은총을 받아들이기
이탈리아 로마의 여름 더위는 밤에도 식지 않을 정도로 악명이 높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유학생들은 여름이 되면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떠납니다. 이탈리아의 기숙사에는 냉방 시설이 없는 경우가 많아 몇 달 전부터 여름을 보낼 장소를 준비합니다. 저 역시 비교적 시원한 이탈리아 북부 마조레 호수(Lago Maggiore) 근처의 한 수녀원에 머물며 미사를 봉헌하고 박사 논문을 집필한 적이 있습니다. 이 시간은 학문적 연구뿐 아니라 교회와 신앙이 깊어지는 은총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수녀원에서는 보통 밀라노 교구 소속의 연로하신 프랑코 신부님께서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름이면 방학을 맞아 외국인 신부들이 도와주러 오기 때문에 신부님은 짧은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으셨습니다. 신부님은 못내 미안하셨는지 2주에 한 번씩 따뜻한 식사를 함께하며 신앙과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신부님은 운전 중에도 시간이 되면 성무일도 시편을 읽어달라고 하셨고, 대화의 한 주제가 마무리될 때마다 차 안 곳곳에 묵주가 있다며 묵주기도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만남 속에서 연세가 드셔도 단순하면서도 충만하게 사시는 원로 사제의 모습을 배울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신부님께서 일부러라도 젊은 사제에게 일상의 모습을 보여주시려는 것 같아, 더 깊이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신부님은 조금 먼 곳으로 가보자고 하셨습니다. 차를 배에 싣고 마조레 호수를 건너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몬테 발도 산맥의 깊은 산골 마을에 자리한 성모 성지였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피 흘리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지’(Santuario della Beata Vergine Maria del Sangue)였습니다. 큰 성모 성지들만 알고 있던 저에게, 이렇게 외진 곳에도 성모님 기적의 역사를 간직한 성지가 있다는 사실은 큰 놀라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성모님의 피는 고통과 비참함의 징표였지만 동시에 희망의 표지
이 성지가 세워지게 된 사건은 약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494년 4월 어느 늦은 오후, 몇 명의 청년들이 돌을 던져 목표물에 맞히면 동전을 가져가는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충동적인 성격의 청년 주코네(Zuccone)가 게임에서 계속 지자 패배에 대한 분노와 자존심의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성당 외벽에 그려진 성모님의 벽화를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단순한 화풀이였지만, 그 돌은 성모님을 정확히 맞혔고, 성모님의 이마에는 X자 모양의 균열이 생겼습니다. 친구들의 꾸중을 듣자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쳤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노인이 상처 난 벽화를 만졌을 때 그의 손에 피가 묻어 나왔습니다. 성모님의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의 얼굴을 지나 그림 전체를 적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로 퍼졌고 사람들은 성당으로 몰려와 “자비를 베푸소서”(Misericordia)를 외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당 신부는 그림 아래에 제대 천과 성작을 놓고 이 현상을 지켜보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습니다. 인간의 분노에서 시작된 사건이 회개와 기도의 자리로 바뀌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이 기적 직후의 역사적 맥락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지 불과 다섯 달 뒤, 풍요와 번영에 도취해 있던 밀라노 공국은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침공을 시작으로 60년이 넘는 ‘이탈리아 전쟁’(16세기 이탈리아 전쟁)의 화마에 휩싸이게 됩니다. 당시 신자들은 성모님의 피 흘리심을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닌 ‘중대한 재앙의 전조’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성모님께서 당신 자녀들이 흘릴 비참한 피를 미리 당신의 몸으로 받아내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밀라노가 가진 부와 권력이라는 자만심이 무너져 내릴 때, 성모님이 피를 흘리시며 죄인들의 회개를 호소하신 것이라고 믿는 마음이 널리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성모님의 피는 고통과 비참함의 징표였지만, 동시에 희망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전쟁과 고통 속에서도 성모님은 백성과 함께하시며 위로와 보호의 표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어머니의 모습은 오늘날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골고타 언덕 십자가 아래에서 아드님의 수난에 동참하셨던 성모님께서 전쟁의 비극에 다시 나타나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깊은 산골에 자리한 이 성지를 방문하며 그 사건의 역사를 전해 들었을 때, 은총을 향한 신앙인의 여정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필요한 은총을 쉽게 얻기를 바라지만, 참된 은총은 깊은 여정을 통해 주어지는구나”하고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그처럼 깊은 산골에 계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그곳을 찾아가는 여정은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자신을 비우는 길이며,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을 배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태도와 관계 안에서 성모님의 향기가 드러나야
성모님은 은총의 원천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은총을 청해주시는 ‘전구자’(avvocata di grazia)* 이십니다. 깊은 산골 성지를 찾아가듯 은총의 여정을 떠날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은 바로 ‘겸손’입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 아집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은총이 머물 자리가 없습니다. 성모님께서 당신의 이마를 내어주며 인간의 매질을 견디셨듯, 우리 또한 자신의 교만함을 십자가 앞에 내어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는 존재를 비우고 겸손해질 때, 성모님께서는 그 빈자리에 가장 필요한 은총이 내리도록 당신 아드님께 간절히 청해주십니다.
사랑하는 레지오 단원 여러분, 우리의 사도직은 단순히 보고서의 숫자를 채우는 활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태도와 관계 안에서 성모님의 향기가 드러나야 합니다. 성모님과 함께 걷는 순례는 ‘나의 비움’을 통해 ‘은총의 채움’으로 완성하는 과정입니다. 성모님의 피가 전쟁의 비극 속에서 희망의 표지가 되었듯, 우리의 활동 또한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활동 전, 우리의 교만과 편견을 먼저 비웁시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우리 삶의 전구자가 되어주시길 간구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만나는 이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성모님의 겸손한 향기를 맡을 수 있을 때, 우리의 사도직은 비로소 은총 안에서 변모된 참된 구원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묵주기도 학교] 성모님의 마음을 헤아림
성모님의 마음
6월은 특별히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을 기리는 달입니다. 성모 성심 기념일은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에 거행되며, 이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사랑과 고통에 가장 밀접하게 동참하신 분임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성모님의 거룩한 마음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순명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성모님은 늘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그 뜻에 따라 사셨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믿음의 표상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함께 서 계셨던 그 사랑은,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의지할 수 있는 큰 위로이자 힘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마음을 본받아 말씀에 순명하며, 복음을 마음에 간직하고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과 이웃을 자비와 인내로 사랑하며, 기도 안에서 깊이 묵상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곧 우리의 사도직을 위한 영적 나침반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봉사와 활동이 사랑에서 비롯되고, 기도와 희생으로 뒷받침될 때 비로소 열매를 맺습니다. 이러한 영적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기도가 바로 성모송입니다. 성모송은 묵주기도의 마리아적 성격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며, 그 본질을 이루는 중심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묵주기도 안에서 성모송은 우리로 하여금 성모님의 마음을 닮도록 이끌어 줍니다.
묵주기도의 본기도
묵주기도를 이루는 여러 기도 가운데 성모송은 가장 자주 바쳐지며, 그 정신을 깊이 형성하는 중심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매 단을 주님의 기도로 시작하지만, 기도의 흐름을 실제로 채우고 이어가는 것은 열 번씩 반복되는 성모송입니다. 빛의 신비가 추가되기 이전에는, 시편 150편으로 이루어진 성무일도처럼 묵주기도의 세 가지 신비 안에서 성모송이 모두 150번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묵주기도는 흔히 ‘성모 시편’이라 불렸습니다. 그러므로 성모송은 단순히 묵주알에 맞추어 되풀이하는 기도가 아니라, 묵주기도 전체의 리듬과 정서를 이루는 본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성모님을 공경할 뿐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바라보며 그분의 삶에 더욱 깊이 동화되어 갑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묵주기도의 본질을 설명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묵주기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인 성모송은 또한 묵주기도를 탁월한 마리아의 기도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성모송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묵주기도의 마리아 성격이 그리스도 특성에 배치되지 않으며 실제로 이를 들어 높이고 고양시킨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33항).
이 말씀은 성모송의 위치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성모송은 묵주기도를 마리아의 기도가 되게 하지만, 결코 그리스도 중심성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모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따라서 묵주기도 안에서 성모송이 반복된다는 사실은, 마리아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을 뜻합니다.
성모송의 형성과 교회의 기도 전통
성모송은 하루아침에 완성된 기도가 아닙니다. 이 기도는 복음 안에서 시작되어 오랜 세월 교회의 기도로 다듬어졌습니다. 성모송의 전반부는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와 엘리사벳의 인사에서 나옵니다. 곧 “은총이 가득하신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참조)와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참조)라는 두 복음 말씀이 성모송의 중심을 이룹니다. 이는 하늘과 땅의 경탄을 드러내며, 이 경탄은 하느님께서 동정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서 이루어진 성자의 강생을 바라보시면서 느끼시는 경탄입니다.
성모송은 6세기경부터 나타나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오늘날 바치는 기도문의 형태가 완성됩니다. 또한 성모송은 중세에 이르러 일반 신자들의 생활 기도로 널리 자리 잡게 되었고, 차츰 암송해야 할 기본 기도문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는 성모송이 단지 개인적 신심의 표현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함께 바치는 공적이고 보편적인 기도였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성모송은 복음에서 태어나 교회의 전통 안에서 자라고 성숙해진 기도이며, 묵주기도 안에서 가장 풍성하게 꽃피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총의 원천
묵주기도는 주님의 기도로 시작하고 성모송의 반복으로 이어집니다. 묵주기도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기도는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맑은 물과 같은 은총의 원천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중심을 잡고 기도의 방향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이어 바치는 성모송은 그 길을 계속 걷게 해줍니다. 그래서 성모송은 묵주기도 전체를 실제로 움직이는 중심 호흡과도 같습니다. 매 단마다 열 번씩 반복되는 성모송은 묵상과 관상의 리듬을 만들어 냅니다.
이 반복은 공허한 되풀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언어가 반복될수록 더 깊어지는 것처럼, 성모송도 반복될수록 더욱 깊은 기도가 됩니다. 성모송의 반복은 베드로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대화와 연결하여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주님께서 세 번 물으시고 베드로가 세 번 사랑을 고백한 것처럼, 반복은 사랑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하게 합니다(교서, 26항 참조). 이 반복 속에 인간 사랑의 깊은 심리적 역동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의 성모송 반복은 단지 입술의 기도가 아니라, 사랑이 점점 더 깊어지도록 이끄는 영적 훈련입니다. 그리스도와 완전히 동화되려는 의지를 이러한 반복에서 키우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모송은 묵주기도의 “본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묵주기도의 문을 연다면, 성모송은 그 문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오래 머물게 해줍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성모송 안에서 우리는 점차 성모님의 마음을 배우고, 성모님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보이는 것, 감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앎’의 영역이다. 예를 들어 ‘1+1=2이다’라는 수학적 진리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라는 역사적 사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대상이다.
이와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 감각할 수 없는 것,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신앙의 진리나, ‘인간이 사후 심판을 통해 천국, 연옥, 지옥에 간다’라는 교리는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이렇듯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엄연히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을 명확히 이해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지식의 한계를 넘어 더 깊은 믿음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 나아가 아는 것이 사물, 식물, 동물, 인간, 자연, 우주와 같은 가시적 대상을 향한다면, 믿는 것은 이를 초월하는 하느님, 영혼, 내세, 천사와 같은 비가시적 실재를 향한다. 지식의 종착지에 다다르면 이 모든 가시적 세계가 보이지 않는 분, 즉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세계는 지식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나침반과도 같다. 결국 믿음의 세계는 지식보다 고차원적이며 깊은 실재를 다룬다.
우리는 하느님을 왜 믿는가? 보이지 않고, 지성에 의해 파악될 수 없고, 우리의 시야와 지성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란 본질적으로 인간 시야 밖에 있는 분이다. 우리의 시야가 아무리 확대되어도, 현미경이든 천체 망원경이든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 되어도 볼 수 없는, 과학 기술 너머에 계신 그런 분이다.
그렇다면 ‘나는 믿나이다’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인간이 보고 듣고 만지는 것만을 현실의 전부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 인간 시야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 비현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큰 세계이며 오히려 현실이라는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모든 것을 유지하고 가능하게 하는 현실이라고 여기는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믿나이다’라는 고백은 보고 듣고 만지는 것만이 현실의 전부라고 단정하는 생각을 거부하는 선택이다. 이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근원적인 실재이며, 보이지 않는 분이 가시적인 모든 존재를 지탱하고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결단이다.
인간의 정신 안에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인식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은 신앙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초자연적 계시 진리를 인식하고, 이성으로 보이는 사물의 이치를 파악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언급했듯이,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향해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다.
마지막으로 신앙과 지식의 차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앙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데서 기인하지만, 지식은 경험에서 기인한다. 신앙은 교회의 공동체적 믿음에 뿌리를 두지만, 지식은 인류가 쌓아온 학문적 토대에 자리 잡는다. 무엇보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이며, 지식은 대상과의 ‘사물적 관계’라는 점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