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사천시 곤양면 서봉사 사적지(栖鳳寺 事跡址) 한시(漢詩)편 6.> 총7편 中
본명(本面) 곤양면 용산리(龍山里) 봉명산(鳳鳴山)의 깊숙한 골에 서봉사(栖鳳寺)의 옛 절터가 있다. 사방(四方) 육척(六尺)의 석곽(石槨) 우물은 아직도 건재(健在)하고 거대(巨大)한 주초(柱礎)돌과 목 잘린 해태 상 그리고 6기의 부도(浮屠)가 현존(現存)하고 있음은 당시 전성(全盛)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절이 언제 창건(創建)되고 언제 폐허화(廢墟化) 했는지를 모르다가 서봉사(栖鳳寺)에 관한 문헌(文獻)이 나옴으로써 역사적(歷史的)으로 중요(重要)한 위치(位置)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봉사(栖鳳寺)에 관한 기록으로는 영봉산(靈鳳山) 용암사(龍岩寺) 중창기(重創記)가 1318(충숙왕5)년에 박전지(朴全之)의 동문선(東文選) 권 68에 수록(收錄)되어 있고 또 서봉사(栖鳳寺) 사적기(事蹟記)가 1762(영조2)년에 이루어진 목판본(木板本) 사지(寺誌)로 현재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니 이 사적(事蹟)을 더듬어 보면 1336년 즉 고려 충숙왕 복위 2년에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쓴 사적기(事蹟記)와 1657년(효종8)에 최응천(崔應天)이 쓴 서봉사기(栖鳳寺記)를 합하여 편찬 한 것이다. 『영봉산용암사』, 『서봉사 사적』 등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눌지왕(417∼457)때 세웠다고 전하며 그 당시에는 봉암사라 했으나 조선시대 때 서봉사로 바뀐 듯하다. 조선 광해군 6년(1614)에 의현 스님이 다시 지었으며, 절의 규모가 대단히 컸다고 한다. 서봉사에서 인쇄된 불경을 서울대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서봉사 터는 현재 차밭으로 개간되었다.
32) 곤양 서봉사에서 이재(李栽)와 이별하며[昆陽棲鳳寺 贈別幼材] / 권두경(權斗經 1654∼1725)
相逢信宿贊公房 서로 만나 이틀 밤을 머문 찬공(贊公)의 방이
未覺天涯是異鄕 하늘 끝 물가 타향임을 깨닫지 못하였네.
蘭臭傾心窮五夜 난초 냄새에 하룻밤 내내 마음이 쏠리고
菊香侵酒卽重陽 담근 술에 국화 향이 나는 바로 중양절일세.
仙舟波浪蟾江闊 뱃놀이에 크고 작은 물결 이는 섬강은 넓고
使葢塵沙馹路長 모래 먼지 덮은 역(馹) 길은 멀도다.
方丈淸遊留後約 방장산의 풍취 있는 놀이 가자던 훗날기약 남겨놓았는데
石門蘿月上層岡 돌문의 덩굴 사이에 뜬 달이 언덕으로 오르게 하네.
[주1] 찬공(贊公) : 당나라 때 시승(詩僧)으로 특히 두보(杜甫)와 교의(交誼)가 깊었고, 두로(杜老)는 곧 두보를 가리킨 것으로, 두보가 누차 그의 방을 왕래하며 시를 짓곤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2] 송풍라월(松風蘿月) : 소나무의 사이로 부는 바람과 담쟁이덩굴 사이로 비치는 달이라는 뜻으로, 운치 있는 자연 경치를 이르는 말.
[주3] 유재(幼材) : 이재(李栽 1657~1729)의 호, 조선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이재는 이현일·이휘일·이숭일 등에게서 수학한 퇴계 학봉계 학파의 주요 전수자로서 김태중(金台重)·김세흠(金世欽)·김창석(金昌錫)·김세호(金世鎬)·신익황(申益愰)·이만부(李萬敷)·권두경(權斗經) 등 당시 영남 일대의 여러 학자들과 학문적인 교유를 하면서 주리론(主理論)적 입장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영남학파를 이끌어갔다.
[주4] 권두경(權斗經 1654∼1725) :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천장(天章), 호는 창설재(蒼雪齋). 1679년(숙종 5) 사마시에 합격, 1689년 문학으로, 1694년에는 학행으로 천거되어 태릉참봉·사옹원봉사·형조좌랑·영산현감 등을 역임했다. 171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직강·전라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17년에는 영남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릴 때 상소문을 기초했다. 1723년(경종 3) 홍문관부수찬이 되었으며, 그뒤 수찬으로 시정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으며, 산천의 형세·도리의 원근 등에 정통했다.
33) 곤양 서봉사 권두경(權斗經)이 방문하여[昆陽棲鳳寺 訪權行人天章] 1698년(戊寅) / 이재(李栽 1657~1729)
古寺空山裏 빈 산 속 오래된 고찰에
秋風落葉紛 가을바람 불어 낙엽이 분분하다.
庭虛多霽月 빈 뜨락엔 맑게 갠 달이 아름다운데
樓迥濕長雲 오랜 흐린 날씨 탓인지 누각이 아직도 축축하네.
短髮羞吹帽 짧은 머리털 묶은 두건에 바람 불어와 겸연쩍어도
淸談喜襲薰 고상한 이야기에 향기 스미니 즐겁도다.
竆愁覺全減 극한 근심이 온전히 사라짐을 깨닫고
隨意更論文 마음이 가는대로 다시 글을 논한다네.
34) 눈 속에 안정연과 함께 서봉사에서 노닐다[雪中同安挺然 遊棲鳳寺] /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1537년 곤양군수 재직 시절에 경상도 유생 안정연이 찾아와 서봉사에서 함께 노닐었던 글이다.
鈴閣偸閒出 동헌에서 한가한 시간에 외출한
東溪訪戴安 동쪽 시내로 찾아 온 안정연을 만났다.
雪嬌橋渡孟 눈이 덮인 아리따운 다리를 처음 건너가
蹊險寺投韓 험한 좁은 길 따라 옛 사찰에 들어선다.
照佛傳燈古 오래된 등잔 불빛이 퍼져 부처를 비추는데
穿林落磬寒 빗방울은 수풀 속을 뚫고 차가운 경쇠에 떨어진다.
中宵推枕起 한밤중에 베개 밀쳐 일어나니
霽月滿欄干 맑게 갠 밝은 달이 난간에 가득하네.
35) 설재(雪齋) 권두경(權斗經)이 곤양 서봉사에서 밀암(密庵) 이재(李栽)에게 준 시(詩)를 또 차운하여[又次雪齋於昆陽棲鳳寺贈密翁韻] / 김성탁(金聖鐸 1684∼1747) 귀양살이 中에. 1737년에 제주도 정의(旌義)에 유배되었다가 곤양으로 이배되었는데 이 당시에 적은 시(詩)이다. 이후 배소에서 죽었다.
寥寥旅舘似禪房 고즈넉한 여관이 선방(禪房) 같은데
天外歸蹤又瘴鄕 하늘 끝으로 돌아 온 곳이 또 바닷가 땅이네.
潮水到門知近海 조수가 문 앞까지 이르니 바닷가임을 알리고
篁林繞宅易斜陽 대숲이 둘러싼 집에는 해가 빨리 기울구나.
殊方節序愁中變 이 지방의 절기는 시름 중에 바뀌는데
故國江山夢裏長 고향의 강산(江山)은 꿈속에서 길고나.
戀闕思親無限意 대궐 생각, 어버이 그리움, 한없는 생각나는
行吟獨上白雲岡 외로운 귀양살이, 백운산에 올라 시(詩)를 읊조리네.
마을 앞산 이름이 ‘백운’이다.(村前山名白雲)
36) 이 해 겨울 서봉사에서 서애 선생 운(韻)을 거듭 사용해 이어 썼다.[是年冬栖鳯寺復用西厓韻續題] / 매창선생문집 (梅窓先生文集) 정사신(鄭士信 1558∼1619)
醉夢爲生死 취중 꿈속에서 죽었다 살아나보니
吾生眞可哀 우리의 생(生)이 참으로 애처롭도다.
風埃頭白後 풍진에 머리털이 하얗게 센 후에야
林下始歸來 시골 수풀 아래로 비로소 돌아왔네.
37) 서봉사(棲鳳寺)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에 있던 절 이지걸(李志傑 1632∼1702)
欲看楓葉勝花開 단풍잎을 보니 피는 꽃보다 뛰어나니
棲鳳年年幾往來 서봉사 해마다 몇 번을 오갔던가?
不但居僧顔面慣 다만 모든 스님 얼굴이 익숙한 건 아니나
語林幽鳥亦無猜 숲속 산새 소리 또한 시기하지 않구나.
38) 서봉사(棲鳳寺)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이지걸(李志傑 1632∼1702)
行經芳草野 지나는 길은 향기로운 풀밭 들판이 이어지고
日晩到禪扉 해 저물어서야 선문(禪門)에 이르렀다.
綠樹千重合 울창한 푸른 나무숲을 만났는데
靑山四面圍 청산이 사방을 에워쌓네.
踏花香滿屐 꽃 밟으니 향기가 나막신에 가득 차고
攀壁翠生衣 벽 붙잡으니 비췻빛이 옷에 물드네.
更倚東樓柱 다시 동녘 누각기둥에 기대보니
塵情向此微 세속의 마음이 이런 미묘함에 이끌린다.
39) 서봉사(棲鳳寺) 三首.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 이지걸(李志傑 1632∼1702)
縱絆人間跡 설령 인간의 자취가 얽혀 있어도
恒游象外心 늘 형상 바깥의 마음으로 노닐었다.
黃花佳節過 황국화 아름다운 절기 지나가니
紅葉晩山深 붉은 단풍이 늦은 산에 무성하다.
夜石疑獰虎 야밤엔 돌이 사나운 범 같고
踈松類怨琴 성긴 소나무 모여 거문고 슬피 타누나.
幽泉纔出洞 그윽한 샘물은 골짜기에서 샘솟아
還與野流尋 돌며 흐르다 들판을 찾아 간다.
坐佛黃金像 좌불(坐佛)은 황금상(黃金像),
遊仙碧玉簫 신선이 옥퉁소 불면서 노니는 곳
三天如欲上 삼천(三天)을 오르려는 듯,
高隔幾層橋 저 높이 나뉜 곳에 몇 층의 다리인고.
鳴鳳何年下 봉황이 어느 해에 울었던가?
一飛不復還 한번 날더니 다시 돌아오질 않구나.
悠悠千古事 아득한 옛날 옛적 수많은 일들을
今欲問靑山 이제야 청산(靑山)에서 묻고자 하노라.
[주] 삼천(三天) : 불교용어, 마리지천(摩利支天)ㆍ변재천(辯才天)ㆍ대흑천(大黑天)
40) 봉명산은 봉암산, 이맹산과 연봉을 이루고 있고 산정에 올라서면 곤양 앞 바다와 크고 작은 섬들이 한 눈에 펼쳐진다. 다솔사를 비롯하여 서봉사지(棲鳳寺址), 서봉암(棲鳳庵), 봉일암, 보안암 등의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이 서봉에서 노닐다.> 차운하여[次人遊棲鳳韻] / 이지걸(李志傑 1632∼1702)
獨上禪樓弄紫烟 홀로 절 다락에 오르니 자줏빛 안개가 희롱하는데
又探巖竇酌靈泉 다시 찾은 바위틈에서 나온 영험한 샘물 마신다.
仙山勝賞休誇道 신령스런 산의 아름다운 경치에 도(道)를 자랑하지 말라.
我亦曾遊洞裏天 나 역시 일찍이 조촐한 마을에서 노닐었다네.
<경남 사천시 곤양면 ‘다솔사(茶率寺)’ 한시(漢詩)편 7.> 총7편 中
이 절은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길(용산리) 봉명산(鳳鳴山) 자락에 터를 잡고 앉은 1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고찰이다. 511년(지증왕 12)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영악사(靈嶽寺)’라 하였고, 636년(선덕여왕 5) 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 대사가 다시 ‘영봉사(靈鳳寺)’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 도선(道詵) 국사가 중건하고 다솔사라고 하였다. 방장산의 형국이 대장군처럼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다"(多率)는 의미에서 다솔이라 했다는 이야기 전한다.
1326년(충숙왕 13) 나옹(懶翁)이 중수하였고, 조선 초기에 영일·효익 등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686년(숙종 12) 복원하였다. 1748년(영조 24)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758년 명부전·사왕문·대양루 등을 중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대양루를 제외하고 1914년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한 것이다. 경남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 4점 보유하고 있다. 18세기 양식의 누각인 대양루와 응진전, 극락전, 그리고 다솔사 산하의 보안암 석굴이다. 일주문이나 천왕문이 없고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찰 뒤편에는 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여기 다솔사 안심료(安心寮)에서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머물러 수도하다가,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한 곳이며,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등신불(等身佛)』을 쓴 곳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절 주위에서 재배되는 죽로차(竹露茶)는 반야로(般若露)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차이다.
41) <다솔사에서 스님을 만나 대나무에 대해 물었다[逢茶率寺僧問竹]> 이지걸(李志傑,1632~1702) 1691년~1694년 곤양 유배.
스님이 말씀하길, “수죽은 산굽이를 끼고 있고, 자욱한 구름과 안개는 때마다 푸른 비단에 걸친 듯하구나. 무엇이 늦가을 서리 내린 달 밤 같으리오. 오직 나뭇가지와 마디만 남아 달그림자 어른거릴 뿐.“(僧言脩竹擁山阿 烟靄籠時挂碧羅 何似九秋霜月夜 只餘枝節影婆娑)
42) 다솔사(茶率寺) 二首 / 이지걸(李志傑,1632~1702)
祗園草木無非賞 동산에는 초목이 아름답지 않는 것이 없는데
何事籠山種此君 산을 빙 둘러 대나무를 무슨 일로 심었는고.
要見琅玕高百尺 요컨대 푸른 옥돌이 백 척 높이로 나타나서
半空長拂往來雲 반공중에서 늘 오고가는 구름을 스치네.
客來蕭寺上危樓 쓸쓸한 절에 손님이 찾아와서 높은 누각에 올라
千里難堪北望愁 북쪽을 바라보니 수심이 천리 난감하여라.
還覺聖恩隨處足 도리어 성은이 가는 곳마다 넉넉히 드러나
飽看紅葉滿山秋 온 산에 붉은 가을 단풍잎을 싫도록 보누나.
[주] 낭간(琅玕) : 중국에서 나는 경옥(硬玉)의 한 가지. 어두운 녹색 또는 청백색이 나는 반투명(半透明)의 아름다운 돌로, 예로부터 장식에 많이 쓰임. 벽옥(碧玉).
43) 다솔사에서 밤을 새다.[多率寺守歲] 1850년(庚戌) / 하달홍(河達弘 1809~1877)
壯忘蹉跎白髮先 젊은 시절 소홀히 하다 뜻을 얻지 못하니 백발이 먼저 찾아왔는데
壑蛇爭赴度流年 구렁에 들어가는 뱀에게 다투듯 따라가며 세월만 흘러 보냈었다.
經來一夕仍添筭 하룻밤을 겪은 후에야 더욱 지혜로워지니
坐到三更强不眠 삼경(三更)에 이르도록 앉아 잠 못 이루네.
鍾報晨聲生竹外 사찰의 종소리가 새벽을 알리니 대숲너머까지 생기가 돌아
酒兼春意倒梅邊 주흥(酒興)과 춘정(春情)이 매화가지에 이르네.
艱難苦恨何須說 가난에 괴롭고 한이 맺힌 세상살이 무슨 말을 하리오만,
窮亦由吾達亦天 곤궁(困窮)함 또한 나 때문이고 현달한다 해도 하늘의 뜻이리라.
[주] 학사(壑蛇) : 소동파(蘇東坡)의 제야시(除夜詩)에 있는 구절인데, 구렁에 들어가는 뱀은 꼬리를 당겨도 나오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44) 다솔사 태양루에서 여러 제군들과 함께[多率寺太陽樓同諸君] 하겸재와 여러 제현의 쌍계 팔영루 운(韻)을 사용하여(用河謙齋諸賢雙磎八詠樓韻) / 곽종석(郭鍾錫 1846∼1919)
居世少寬怡 세상을 살면 즐겁고 사랑스런 날이 적은데
離物更愁絶 외물에서 벗어나야 근심이 사라진다.
珍重契心人 마음 맞는 사람을 아주 소중히 여기니
共此山間月 공히 이 산에서 격월(隔月)마다 만난다네.
45) 다솔사[多率寺] / 강수환(姜璲桓,1876~1929) 유학자.
錦峀歸人更上樓 금성산 바위굴로 돌아가다가 다시 누각에 올라보니
白雲紅樹已深秋 하얀 구름 속의 붉은 단풍나무, 이미 가을이 깊었구나.
道心漸長鍾聲裏 불도의 마음(道心)이 종소리 속에서 점점 자라나,
晝夜惺惺活水流 밤낮으로 또렷이 깨어있으니 물이 솟아 흐르네.
46) 다솔사에서 이별에 임하여, 신묵치와 권성재에게 주다.[多率寺臨別 贈申墨癡權省齋] / 남고(南皐 1807∼1879)
南州九月客笻聯 남녘 고을 9월에는 나그네 지팡이가 줄이었는데
詩到歸來問幾篇 돌아가는 길에 시를 몇 편이나 지었는지 묻는구나.
蕭寺一燈山水夢 쓸쓸한 절에 등불 하나가 꿈속의 산수(山水)같아
曉鍾鳴後轉依然 새벽 종소리 울린 후에도 여전히 뒤척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