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놀던 ‘안개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다음 날 아침 열 시, 둘째 날 산행을 시작했다. 밤새 불던 바람도 잔잔해져서 기분마저 편안했다. 뉴질랜드의 위대한 올레길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예를 들면 오전 10시에 햇빛이 쨍쨍해 선크림을 듬뿍 얼굴에 발랐는데 10분 뒤에 소낙비가 몰아쳐 비옷을 꺼내 입어야 하는 식이다.
리무 거인 나무가 천하대장군처럼 지키고
둘째 날 목적지인 와이오파오아 산장(Waiopaoa Hut)까지는 8km, 3~4시간이면 충분하다. 아침 열 시에 떠났으니 기어가도 오후 서너 시에는 도착할 수 있다. 이 구간은 테 우레웨라의 진수를 보여준다. 도깨비 숲길이 한없이 이어진다. 신비 야릇함이 가득 찬 길이다.
도깨비 숲길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끼가 가득한 나무들이 다들 저마다의 복장을 한 채 춤 잔치를 벌이고 있어서다. 뭔가 홀린 듯한 상태로 쭈욱 걸어야 한다. 거인 같은 리무 나무가 천하대장군처럼 지키고 있고 너도밤나무들이 지붕을 이뤄 숲속을 암흑의 세계로 만든다. 수명을 다한 고조, 증조할아버지 나무가 땅바닥에 누워 밭은 숨을 쉬는 사이에 새끼 나무들은 지상에서 한 번 멋있게 살아 보겠다고 키를 다퉈 하늘로 오르고 있다.
숲 양옆에는 내 키보다 두세 배는 더 큰 고사리 나무들이 덥다며 부채질을 하고 있고 그 위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새들이 지지배배 거리며 노래 경연대회를 한다. 그런 시간이 10분, 20분도 아니고 한 시간 두 시간 계속 이어진다면 그 기분이 어떨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투호에 부족 사람, ‘안개의 아이들’이라고 불려
테 우레웨라의 주인인 투호에 부족 사람들을 ‘안개의 아이들’(Children of the Mist)이라고 한다. 참으로 낭만적이지 않은가. 조상 대대로 안개 속에서 살다가 지금도 그 후손들은 안개처럼 산다. 숲속을 걷다 보면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서너 시간을 도깨비들과 싸우거나 얘기하며 걸었다. 기상천외한 모양을 한 나무를 만나면 오랫동안 쳐다보기도 했고, 구멍이 휑하게 뚫린 나무를 대하면 이 각도 저 각도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렇게 숲속 도깨비와 함께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지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옆에 두고 간식을 먹었고 내 엄지손가락만 한 이끼가 깊게 패인 나무를 보며 테 우레웨라의 참멋을 느끼기도 했다.
오후 세 시쯤, 와이오파오아 산장에 도착했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산장에 내 짐을 푼 기억은 별로 없다. 다른 등산객들은 이 산장을 통과해 다섯 시간이나 더 가야 만날 수 있는 마라우이티 산장(Marauiti Hut)에 머무는 경우도 있다. 내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숙소에 침낭을 펼쳐놓은 채 수건 하나를 들고 호숫가로 갔다. 숙소에서 1분 거리에 있다. 윗도리를 벗고 머리에 물을 적셨다. 간이 목욕도 했다. 오후 세 시의 햇빛, 호숫물 위에 빛나는 그 찬란한 빛이 나를 한없이 평안하게 만들어줬다. 참고로 와이카레모아나호수는 등산객 못지않게 낚시꾼들이나 사냥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소설 첫 문장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단 낮잠을 한 시간 즐겼다. 열심히 걸은 자, 8km나 걸은 자는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상이다. 다섯 시쯤 되자 등산객들이 산장에 들어섰다. 나는 책을 꺼내 들고 산장 마당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가 쓴 소설《세월 》이다. 에르노는 소설을 논픽션처럼 쓰는 작가다. 가공이나 은유 없이 자기가 겪은 것만 쓰는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단순한 열정 》,《한 여자 》등인데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세월 》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나는 한 시간 넘게 에르노와 함께했다. 안개의 아이들이 사는 숲속에서, 뉴질랜드에서 가장 깨끗한 호숫가에서 나는 인간의 가장 빛나는 행위인 읽기(생각하기)를 한 것이다.
사실 산장의 저녁은 단순하다. 일행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카드놀이를 한다. 또 그리고 대부분(여기서 ‘대부분’은 적어도 30%는 넘는다는 뜻이다)은 종이책이나 전자책 독서를 한다. 하루의 여독을 책으로 위안받는 그들이 부러웠고 나 역시 그랬기 때문에 대견했다.
저녁밥을 차려 먹고 호숫가로 다시 갔다. 밤의 쌀쌀한 기운이 낮의 따뜻한 기운을 포위하고 있었다. 잔잔한 호숫물을 10m 앞에 두고 남녀 커플이 다정하게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게 보였다. 예의상 그사이를 피해 호숫가 다른 쪽으로 몸을 옮겼다.
파란 오리, 휘이오(whio) 새 보는 특권도 누려
파란 오리, 휘이오(whio, 혹은 blue duck)가 몇 마리 보였다. ‘오리계의 귀족’으로 뉴질랜드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 오리다. 뉴질랜드 종이돈 10달러짜리 뒷면에 새겨져 있는 바로 그 오리다. 이름 그대로 이 오리는 파란 색깔을 하고 있다. 더러는 갈색을 띠기도 한다.
휘이오는 강이나 개울 물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지표 역할을 한다. 휘이오가 산다는 얘기는 그 물이 최상급의 물이라는 뜻이다. 또한 휘이오는 거센 물결에도 잘 버티는 오리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에서 급류나 역류하는 물에도 살 수 있는 오리가 네 종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뉴질랜드 휘이오이다. 주로 아침 해 뜰 녁과 저녁 해 질 녁에 볼 수 있다. 2022년 현재 휘이오의 숫자는 3,000마리 아래로 추산한다. 그중 몇 마리를 내가 봤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셋째 날 와이오파오아 산장부터 마라우이티 산장까지 가는 12km, 5시간 구간은 건너뛰려고 한다. 이 구간 역시 ‘안개의 아이들’이 어떻게 놀았을지, 아니 헤맸을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앞길이 하도 황홀해 이 부분은 생략할 수밖에 없다. 대신 이 구간 중간에 있는 코로코로 폭포(Korokoro Falls, 22m)에는 시간을 내 꼭 다녀왔으면 좋겠다. 왕복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데 잔잔한 호숫물만 보다가 장엄한 폭포수를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다.
마지막 날인 넷째 날 코스로 가 보자. 산 좀 탄다는 사람이나 젊은 친구들은 와이카레모아나호수 트랙 길을 3박 4일에 끝낸다. 첫날 파네키리 산맥을 지나는 길을 뺀 나머지 구간은 도깨비들의 시달림을 받지 않는 한 쉽게(?) 걸을 수 있다. 나는 태생이 범생이과라 뉴질랜드 정부(DOC)가 배려해준 최대 일정을 따라 하는 것이다.
마지막 날 구간은 17km, 4시간~6시간
넷째 날은 마라우이티 산장에서 왕가누이(Whanganui) 산장까지 걷는 17km, 4시간~6시간 구간이다.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는 이유는 다음 날 아침 차가 세워진 곳까지 되돌아가려면 이곳에서 수상 택시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길은 한 차례 정도 고개를 뛰어넘는 구간 외에는 별 어려울 게 없는 코스로 되어 있다. 마라우이티 산장을 지나 한 시간 걸으면 와이하루루 산장(Waiharuru Hut)이 나온다. 내가 이 아까운 지면에서 굳이 이 산장을 언급하는 이유는 내 뒤를 이어 와이카레모아나호수 트레킹을 할 계획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마라우이티 산장보다 될 수 있으면 이 산장에서 머물기를 권한다. 지은 지 얼마 안 돼 삐까뻔쩍하고 또 위치도 좋은 데 있어 금상첨화다. 그렇다고 절대로 마라우이티 산장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앞서 걸어온 길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평탄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도깨비 숲으로 불릴 만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오후 다섯 시쯤 됐을까. 와이카레모아나호수 트랙 길의 내 마지막 발걸음을 찍었다. 왕가누이 산장에 도착한 것이다.
이 산장은 내가 그동안 하룻밤을 보낸 많은 올레길 산장 중 가장 열악한 산장이었다. 진짜로 도깨비가 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곳이었다. 그날 함께한 사람들(등산객이 아니라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도 사냥꾼 둘뿐이었다.
새벽 두 시, 사냥꾼들 허탕 친 채 숙소로 돌아와
60대 초반의 친구 사이인 둘은 멀리 웰링턴에서 SUV 차에다 배를 싣고 여기까지 왔다. 순전히 사슴 사냥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군복 같은 사냥용 옷을 입은 그들은 한눈에 봐도 베테랑 전사 같았다. 총을 든 모습에서 잠깐 살기를 느끼기도 했지만(기억하시라. 산장에는 그들 둘과 나밖에 없었다는 것을) 나도 군인 그것도 4성 장군에 못지않은 병장 출신이라는 점을 각인시키며 산장 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디어 헌터(Deer Hunter) 혹은 디어 헌터(Dear Hunter), 사슴 사냥꾼들은 나를 소중하게(dear) 대해 주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저녁 밤, 낡고 헤진 산장에서 맞은 섬뜩하고 어색한 시간은 사슴고기탕과 맥주 세 병에 수그러들었다.
밤 아홉 시가 넘자 그들은 총을 메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배웅을 했다. 그들 손과 어깨에 사슴 한두 마리가 실려 있길 기대하면서, 나는 잠인 듯 잠 아닌 듯한 세계로 빠졌다.
새벽 두 시쯤, 사냥꾼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밤새 내린 거센 비 때문에 그들은 허탕을 쳤다고 한다. 하지만 인생사가 그렇지 않냐는 듯 옷을 벗고 잠자리를 챙기더니 이내 코를 골았다. 깊은 숲속, 헤진 산장에서 그렇게 남자 셋은 빗소리를 들으며 안개 속의 어른 아이들이 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수상 택시를 타고 내 차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갔다. 5,000달러짜리 차는 며칠 사이에 먼지를 푹 뒤집어써 4,000달러짜리 차로 변해 있었다. 그 차를 몰고 오클랜드로 향했다. ‘테 우레웨라 숲속에서 내 영혼 찾기’는 그렇게 끝났다.
피곤을 이기지 못해 오클랜드로 올라오는 길에 토코로아(Tokoroa)에 있는 모텔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 정도로 되돌아간 길 역시 힘들었다는 말이다. 홀로 여행자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고 하겠다.
<와이카레모아나호수 편 끝.>
<다음 주에는 루트번 트랙(Routeburn Track) 편이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