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0:1-12절) 목자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설교하시면서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를 양(羊)과 목자(牧者)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羊)을 키우는 문화가 아니 때문에 예수님의 이 중요한 비유(比喩)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죽으면서 유언(遺言)을 독일어(獨逸語)로 하는 바람에 미국인 간호사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목자와 양의 비유를 이해하려면, 다음 세 가지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보통 양(羊)이라고 하면, 좀 미련하고 순하고, 풀이나 뜯어 먹는 털 많은 짐승으로 생각하지만, 양은 놀랍게도 주인의 목소리를 너무 잘 알아듣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양(羊)은 우리나라 개(犬)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시골에서 키우는 개들은 주인의 발걸음 소리나, 주인이 부르는 소리를 다 알아듣는 것처럼, 팔레스타인의 양들은 주인의 소리를 잘 알아듣습니다.
양은 맹수(猛獸)처럼 발톱도 날카롭지 못하고, 이빨도 강하지 못하고, 행동도 느린 편이지만,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를 따라가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나라는 자주 비가 오는 편이지만, 팔레스타인은 일 년에 건기(乾期)와 우기(雨氣)가 정확해서, 양 주인이 우기에는 가까운 곳에서 양들에게 풀을 먹일 수 있지만, 건기에는 멀리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주인은 하루 만에 집에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들판에는 양 우리를 빌려서 거기에 양을 재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들판에는 이리나 늑대, 양 도둑들이 우글거렸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저녁이 되면, 양들을 모두 우리 안에 넣고, 자기는 가까운 텐트에서 잠을 자고, 문지기가 문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주인은 우리로 가서 문을 열어 놓고, 양문 앞에 앉아서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뛰어나와 주인의 지팡이를 뛰어넘어서 밖으로 나가는데, 주인은 양들이 모두 다 나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세 번째는 목자가 양을 몇 백 마리씩 치다보면, 혼자 힘으로 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아르바이트생을 쓰게 됩니다.
이들이 삯군 목자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삯군과 주인은 구별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리가 오거나, 강도떼가 오거나 하면, 아르바이트생은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살기 위해서 양을 버리고, 도망을 쳐버립니다.
그러면 이리나 늑대나 도둑들이 양을 실컷 잡아먹다가 도둑질해갑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리나 늑대나 강도떼가 오면, 자기 양이기 때문에 도망을 치지 않고, 지팡이를 가지고 싸워서 쫓아냅니다.
그래서 진짜 목자인지, 아르바이트생인지, 구별하려면, 웃통을 벗어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진짜 목자는 이리나 늑대나 강도와 싸우느라고 입은 상처가 온몸에 있지만, 아르바이트생은 도망을 치기 때문에 몸에 상처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참 목자이시기 때문에 두 손과 두 발에 대못 자국이 있었고,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불안정한 때에 목자의 음성만 따라가면, 우리에게 무조건 살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사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Ⅰ.마음의 열쇠 우리 인간에게는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별 희한한 물건들을 다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고층 아파트나 수많은 자동차, 비행기, 고속 열차, 컴퓨터, 스마트폰 같은 하나같이 다 놀라운 문명의 이기들을 만들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 인간은 좋은 여건에서 너무나 풍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같이 행복하고 풍족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행복한 인간의 치명적인 단점(短點)은 미래에 대하여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未來)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적(敵)은 같은 인간입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이 가장 무서운 적(敵)이 되어 있습니다.
즉 자기를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같은 인간인 남자가 여자를 폭행하고, 인간 스스로 분노 조절이 안 되면, 괴물(怪物)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목자(牧者)가 필요합니다.
이 목자는 현재 우리의 하루하루의 생활을 지켜줄 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미래(未來)를 지켜 줄 분입니다.
우리는 마치 양과 같아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의지해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목자(牧者)를 보내어주신 것입니다.
10:1-2절)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 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이것은 너무나도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목자(牧者)는 당연히 우리의 문 열쇠가 있으니까 문으로 들어가서 문을 열어 놓고, 양들을 부를 것입니다. 그런데 도둑이나 강도는 우리의 열쇠가 없으니까 담을 넘어서 들어가는 양들을 훔쳐 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담을 넘어서 들어간 자가 너무 목소리가 좋다든지, 혹은 달콤한 좋은 약속을 많이 해 준다든지,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양가죽을 쓴 이리라면, 양이 속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도둑이나 이리가 양가죽을 쓰고, 양 우리에 들어온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양처럼 보이기 때문에 양들이 안심하고 있다가 양들이 물려 죽든지, 팔려가든지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을 책임지고, 내 미래를 책임질 목자가 반드시 들어와야 하는데, 여기서 문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 “문(門)”의 핵심(核心)은 열쇠에 있습니다. 즉 열쇠를 가진 분만이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둑이 오는 것과 목자가 오는 것은 목적(目的)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0:10절)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둑이 우리에 들어와서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한다고 해도 그 목적(目的)은 양을 잡아서 팔아먹거나,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아무리 담을 넘어온 사람이 좋은 소리를 하면서 자기를 잡으려고 해도 절대로 그들에게 잡히면 안 되고, 그들로부터 도망을 쳐야 하고, 소리를 질러서 목자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목자가 오는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그것도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하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을 지켜주고,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며, 아름답게 살게 해주는 것이 목적(目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문 8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며, 강도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열쇠를 가지지 않아서 담을 넘어간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양 우리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양 우리”가 우리 마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마치 이중삼중으로 단단하게 잠긴 문과 같아서 열릴 수 없습니다. 즉 우리 인간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이중삼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구약성경의 증거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야(Messiah)는“맹인의 눈을 뜨게 하며, 말 못하는 자를 말하게 하며. 걷지 못하는 자의 다리를 사슴처럼 뛰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열쇠를 가진 분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하십니다.
성경말씀 그대로 말하는 것이 열쇠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열쇠인 성령(聖靈)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즉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마음 문이 열리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열쇠를 가진 분의 말씀은 내 마음을 너무 정확하게 잘 아신 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의 속을 너무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도 하지 않고, 성령도 임하지 않고, 내 마음도 모르고, 세상의 웃기는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내 돈이나 물건을 빼앗지는 않겠지만, 그 사람의 말을 따라가면, 인생을 도둑질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멸망(滅亡)입니다.
목자(牧者)는 욕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자(牧者)는 자기 양들이 행복한 것이 목적(目的)이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하늘 문을 열어서 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먹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 양식(糧食)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성공의 기준이 세상의 성공에 맞추어진 음란(淫亂)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유혹(誘惑)된 악(惡)한 시대에 깊이 발을 들여놓은 것이지 알게 됩니다.
성공의 기준은 하늘 문을 여는데 있고, 그 나라와 그 의(義)를 구하는데 있습니다.
Ⅱ.목자의 음성 들판에는 이 집 양이나, 저 집 양이 모두 섞여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양들이 다른 집의 양들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자는 자기 양이 아닌 양을 쫓아내게 되고, 이 양은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교적부가 필요)
양은 사자(獅子)같이 빠를 필요도 없고, 표범처럼 사나 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양이 사느냐, 죽느냐? 결정하는 것은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목소리는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로 안전하고, 다른 사나운 짐승들이 절대로 해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를 했습니다.
시23:1절)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목자는 처음부터 자기 양을 알고, 그 이름을 다 부릅니다. 그래서 양들은 우리에서 나올 때도 우르르 몰려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부르면, 뛰어나가서 목자(牧者)의 지팡이를 뛰어넘어서 나갑니다.
이것이 곧 양의 숫자를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10:3-5절)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목자는 양이 50 마리든, 100 마리든 이름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 우리의 문을 열고 난 후에 문 앞에 걸터앉아서 지팡이를 걸쳐놓고, 양의 이름을 하나씩 다 부릅니다.
예를 들어서“점박이”“개똥이”“루비”“라떼”“룻시”이런 식으로 부르면, 양들이 자기 이름인 줄 알고 나와서 주인의 지팡이를 뛰어넘어 밖으로 나갑니다. 주인이 이름을 불러도 양이 나오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양을 찾으러 나갑니다. 그리고 그 양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 양이 사나운 짐승들에게 물려 죽었으면, 그 시체(屍體)라도 찾아서 이것이 과연 내 양의 시체(屍體)인지, 아닌지, 확인을 합니다. 귀 조각이나 남은 다리라든지, 발톱 같은 것을 보고 확인한 후에 그 남은 것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목자는 양을 자식(子息)같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자가 양을 키우는 이유는 절대로 잡아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털을 깎기 위해서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기가 막히게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목소리가 들리면, 양들은“음매⁓”하면서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양들은 어디에 풀이 있는지, 어디에 깨끗한 물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또 양들은 어디에 이리나 늑대가 있고, 독사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길을 알기 때문에 양들은 목자의 음성만 알아듣고, 따라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풍성한 삶을 약속(約束)하는 목자의 음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성경말씀이 올바로 해석(解釋)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가장 기쁠 때도 성경말씀이 올바로 해석될 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은 후에 세상 이야기만 잔뜩 하면, 교인들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부분은 맞고, 어떤 부분은 안 맞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도둑이고, 강도라 하더라도 백% 틀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면, 목자의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고, 안 되는 부분도 있고, 맞는 것도 있고, 맞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목자의 음성이 아닌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인도할 때, 앞장서서 걸어갑니다. 그러나 염소장수는 염소를 모두 목에 줄을 매어서 억지로 끌고 가야 염소들이 따라 가는 것입니다. 결국 양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살기 때문에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안 들으려고 하고, 피하려고 하는 것은 그 목자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자기 목자가 아니면, 소리가 헷갈리기 때문에 따라가지 않고, 도망을 간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정(情)에 얽매어서 교회 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영혼(靈魂)을 정(情)에 얽매이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속을 시원하게 하고, 모호하던 것을 분명하게 하고, 모든 염려 걱정을 내려놓게 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자를 찾을 때까지는 고민을 많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그가 목자(牧者)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Ⅲ.위험을 해결하셨다. 예수님은 목자의 관심은 자기 멋을 부리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고, 오직 양들이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나 풍성한 삶의 비결(祕訣)은 이 세상 것을 많이 가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은혜(恩惠)를 받지 못하면, 세상의 돈이나 명예를 아무리 많이 가진다 하더라도 굶주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은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이것이 굶주린 증거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돈이 있고, 집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그 영혼(靈魂)이 굶주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미래(未來)에 대하여 불안해합니다.
사람들은 살아갈 의욕(意欲)을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돈 때문이 아닙니다.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幸福)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자(牧者)는 하늘 문을 열어서 우리로 하여금 마음껏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먹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신다고 하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천국의 열쇠인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목자도 두 종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입니다.
10:11-12절)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여기서“선한 목자”는 양의 주인(主人)을 말합니다. 양 주인은 양을 사랑합니다. 양 하나하나를 자기 자식(子息)과 같이 사랑합니다.
그런데 양 주인은 양 앞에 있는 위험(危險)을 잘 압니다. 만일 양들이 있는 앞에 사자(獅子)나, 이리 같은 맹수(猛獸)가 있으면, 목자는 팔을 걷어붙이고 맹수와 싸울 것입니다.
어떤 때는 목자가 양을 대신해서 맹수나 강도와 싸우다가 죽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삯꾼”은 아르바이트생이기 때문에 그 앞에 있는 양이 자기 양이 아닙니다. 그는 양들을 위하여 다치거나, 죽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삯군은 오직 시간만 때우고, 돈만 받으면 자기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삯꾼은 이리가 오거나 강도떼를 만나면, 양떼를 버리고, 도망을 쳐버립니다. 그래서 양들은 수도 없이 죽고, 강도질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위험(危險)을 아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震怒)의 심판(審判)이 있는 것이고, 또 우리 인생에도 수많은 함정(陷穽)과 올무와 낭떠러지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선(善)한 목자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죄(罪)와 싸우고, 마귀(魔鬼)와 싸우고, 죽음의 세력(勢力)과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양손과 양발에 큰 상처를 입으셨고, 옆구리에 창으로 찔리셨으며, 무려 여섯 시간 십자가에 달려서 죽음의 고통을 받으셨고, 음부(陰府)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길을 완전한 길로 인도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길도 없는 돌 짝밭이나, 가시덤불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옆을 지나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가다 보면, 거기가 곧 지름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생명의 양식 보물(寶物)창고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마귀(魔鬼)가 우는 사자(獅子)처럼 돌아다니는 이 살벌하고, 악(惡)한 때에 한 성도도 길을 잃지 않고, 모두 선(善)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아-멘 찬송가 569장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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