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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권 공세(貢稅) 전량(錢糧)의 징수를 논의함
【문】: 지금 전포(錢布)를 서울에 납부하는 것을 살펴보면, 해당 고을의 수령이 마음을 다하여 최독(催督)하지 않는데다가 기한이 되어 상송(上送)할 때도 영래(領來)하는 담당 이서(吏胥)가 헐가주인(歇家主人)과 본조(本曹 호조(戶曹)) 이서들과 더불어 간폐(奸弊)를 많이 저지르면서 즉시 납부하지 않으니, 이를 장차 어떻게 처리하면 좋은가.
【답】: 무릇 각 도에서 상납해야 할 전포(錢布)들은 그 도와 군현(郡縣)에 본조(本曹)가 격안순환문부(格眼循環文簿)를 만들어 보내서 납부해야 할 수량과 받아들이는 기한에 모두 정한(程限)을 정하게 한다. 그런 다음, 문부 속에 12격(格)을 그리되 윤달이 있으면 1 격을 첨가해서 격마다 장차 징수할 전포의 이완(已完)ㆍ미완(未完), 의기(依期)ㆍ미의기(未依期)를 한결같이 써 넣도록 한다. 본조에서는 이 격을 참고하여 관량좌이관(管糧佐貳官)에게 징수를 독촉하고, 좌이관은 다시 이 격을 참고하여 주현에 수납을 독촉하되, 주현에서 발송한 다음에는 본조가 그 문장(文狀)의 날짜를 조사하여, 만약 서울에 도착한 지 5일이 넘어도 즉시 납부하지 아니하였으면, 먼저 헐가주인(歇家主人)을 두람용간(兜攬用奸)의 율(律)로 다스리게 하고, 즉시 험봉(驗捧)하지 아니한 관리 또한 수지유난(收支留難)의 율(律)로 다스리게 한다. 그리고 포필(布匹)의 길이 및 너비의 장척(丈尺)ㆍ근수(斤數)ㆍ등제(等第 등급)에 있어서도 모두 격식을 만들고, 양쪽 끝머리에 색실로 납부하는 주현의 이름을 짜넣게 하며, 중도에 짐을 꾸려서 보내고 검사한 관리의 성명을 써 넣게 한다. 그리고 필마다 도장을 찍고 표를 붙여 창고에 받아 넣으면, 이례(吏隷)들이 용간(用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도적들도 훔쳐다 팔 수가 없을 것이다. 마음을 기울여 최납(催納)하려 하지 않는 수령에 대해서는 죄를 짓고 체직되더라도 그 고을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단신(單身)으로 읍저(邑底 읍내(邑內))에 남아 그 수량을 모두 완납한 다음에야 그 고을을 떠나게 한다. 승직ㆍ강직ㆍ파직ㆍ삭직의 경우를 물론하고 모두 한가지로 시행하되, 찬적자(竄謫者 파직되어 귀양가는 사람)는 그 종[奴]을 대신 현옥(縣獄)에 가두고 5일에 한 번씩 매를 쳐 그 완납을 독촉하도록 한다. 이 밖에 또한 그 문부(文簿)를 살펴 주절봉름(住截俸廩)의 법을 시행하도록 한다. 예컨대 한 도의 전량(錢糧)의 총수가 십분(十分) 중에서 몇분이 모자란다고 하면, 그 조(曹)에서 관량관(管糧官)의 죄를 소핵(疏劾)하여 봉름(俸廩)을 빼앗고 강급(降級)하는 벌을 내리도록 한 뒤에, 3년ㆍ9년의 출척연분(黜陟年分) 때 수령과 함께 이를 참고하여 승강을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
【문】: 최과(催科 조세(租稅)의 상납을 독촉하는 것)의 정사가 이와 같이 번거롭고 가혹하다면, 중앙과 지방의 관리가 어찌 그 침요(侵撓)함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답】: 호조는 관량관을 최독하고 관량관은 주현을 최독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며, 징수하는 명색(名色)도 공세(貢稅)와 정전(丁錢)의 세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군역(軍役)의 명색이 무한하고, 보포(保布)의 명색이 무한하며, 모든 관서가 침독(侵督)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각 고을의 환자[還上]ㆍ공세(貢稅)의 징수에 번번이 두두인(頭頭人)의 무리가 돌려가며 파견되고 있으니 관(官)은 그 번거로움을 이길 수 없고 백성은 그 어지러움을 이길 수 없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떠들썩하여 천가지 백가지 일들이 두서를 잃고 있으니, 이에 비한다면, 어느 것이 번거롭고 어느 것이 간편하기에 번거롭고 가혹하다고 지목하는가.
[주D-001]헐가주인(歇家主人) : 타향 사람이 와서 쉬고 묵는 집의 주인을 말하는데, 이 글에서는 영래(領來)한 이서(吏胥)가 서울에 머무는 동안에 유숙(留宿)하는 집 주인을 가리키므로 구체적으로는 그 군현의 경주인(京主人)을 말한다.
[주D-002]격안순환문부(格眼循環文簿) : 가로ㆍ세로로 줄을 긋고 월별(月別)로 수납할 물품과 수량을 적은 문서를 가리키는 것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03]두람용간(兜攬用奸) : 두람(兜攬)은 한손[一手]에 점유(占有)하는 바로 독점(獨占)의 뜻, 혼자서 독점하기 위해 남을 속여서 간교한 꾀를 쓰는 일을 말한다.
[주D-004]수지유난(收支留難) : 수입(收入)과 지출(支出)을 유예(猶豫)하여 즉각 처리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유난(留難)은 곤란하다고 핑계대는 것을 말한다.
[주D-005]주절봉름(住截俸廩)의 법 : 관청의 공금(公金)이나 공물(公物)을 횡령하거나 파손하였을 때 이의 변상(辨償)을 위하여 그 봉록(俸祿)을 차압하거나 감하하고, 나아가 고과(考課) 때 승급ㆍ강등에 참고하는 법규를 말한다.
제7권 양서(兩西)의 재화를 논의함
【문】: 관동(關東 강원도 지방)과 관북(關北 함경도 지방)은 토지가 박하고 백성이 가난하며, 기내(畿內 경기도 지방)는 본래부터 매우 조잔(凋殘)해서 나라의 경비가 전적으로 삼남(三南 충청ㆍ전라ㆍ경상도 지방)에 의존하고 있다. 관서(關西 평안도 지방)에서는 재백(財帛)이 모여들고 물산이 풍요하나, 그곳이 변방이기 때문에 모든 전량ㆍ세과가 중앙 관청으로 발운(發運)된 적이 없고, 오직 지칙(支勅 중국의 사신 일행을 접대하는 것)의 경비와 사행 공억(使行供億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 사신 일행을 접대하는 것)의 비용에 책응(責應)하는 것만을 중하게 여겨 경용(經用)에 취보(取補)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지금 관서의 감영(監營)ㆍ병영(兵營)ㆍ의주(義州) 등의 땅은 강성하고 거대한 번진(藩鎭)으로 삼아 툭하면 변향(邊餉 국경수비에 필요한 군량(軍糧))ㆍ변저(邊儲 외침(外侵)에 대비하는 저축 물자)에 필요한 것이라 하면서 제번전포(除番錢布)와 상서(商胥 각종의 상인(商人))의 세화(稅貨)들을 모두 쌓아두게 하고 있으나, 만약 사변이 일어난다면 어찌 털끝만큼이나 믿을 만한 것이 되겠는가. 이것들이 모두 사용(私用)과 남비(濫費)에 들어가도 어디에 썼는지를 묻지도 않으니, 어찌 이같이 허망된 일이 있는가.
지칙(支勅)의 경우를 보아도 칙사(勅使)가 해마다 온 적이 있는가. 이른바 연호(宴犒 잔치를 베풀고 군졸(軍卒)을 대접하는 것)는 유명 무실하고 수령이 지칙을 빙자하여 도둑질하고 남용하는 실상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도 법전(法典)과 같이 여겨 덮어두고 묻지 않으니 무엇 때문인가. 예단(禮單)과 예급(例給) 이외에 참(站)마다 소용되는 칙수(勅需)를 작정하여 주고, 그밖의 세곡(稅穀)과 전화(錢貨)는 낱낱이 가려내고 깨끗하게 조사해서 액수를 정하여 서울로 실어다가 국용(國用)에 보충하는 것이 옳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해마다 중국에 가는 사행(使行)의 경우를 보아도 어찌 일차의 사행으로 인하여 한 도를 공억(供億)하는 곳으로 만들어서 그곳의 전량을 실어올 수 없게 할 이치가 있는가. 지대(支待)의 경우, 각 읍이 1~2일의 지공에 1백여 관(貫)의 돈을 소비하고 있으니, 부허하고 사치로움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겠는가. 그리고 재송(齎送 소용되는 물품을 보내는 것)을 보면 땔감 이외에는 찬물(饌物)과 염장(鹽醬) 등까지 싣고 가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음식점(飮食店)에서 바꾸어 먹으면 안되겠는가. 또 그들 고을 중 연로(沿路)에서는 하정(下程)의 증여물(贈與物)이 있는데, 게으르게도 살피지 못하여 모두 역졸(驛卒)ㆍ상서(象胥 역관(譯官))들이 훔쳐 먹으니, 나라의 재물을 써 없애는 것을 능사로 삼아야만 할 이유가 무엇인가.
【문】: 향사(餉司)의 전곡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은가.
【답】: 곡물(穀物)은 원회부(元會付)로 돌리고 은화(銀貨)는 액수를 정하여 창고에 보관하되 이를 꾸어주고 이자를 받는 습관은 아주 영구히 없애는 것이 옳겠으니, 민폐(民弊)가 날로 심해지고 관리의 탐학이 날로 더하여져서 이러한 습관은 통절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진(毛鎭)이 이미 철거되어서 오래 전에 없앴어야 할 것인데도 그대로 지키며 오늘에 이르도록 한없는 좀도둑을 길러 왔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또한 중국에 사신갈 때 지방에 복정(卜定 소요 경비나 물자의 부담을 책정하여 납부하게 하는 것)하여 구걸한 것은 곧 수로(水路)로 북경(北京) 및 심양(瀋陽)으로 갈 때의 사행이 난(亂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뜻함) 후의 피폐로 인하여 한때 부득이했던 잘못된 규례인데 지금까지 답습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조종(祖宗) 때에는 사행에 40말의 쌀을 더 싣고 갔다고 해서 잡아다가 국문하였기 때문에 사신이 자살하기까지 하였으니, 법도가 엄하고 낭비가 없었음이 오늘에 비하여 어떠했겠는가. 이제 만약 왕래하는 데 들어가는 노자(路資)를 작정하여 주고, 또 정승 김육(金堉)의 차사(箚辭)대로, 사신에게 수레를 타게 한다면, 수행하는 사람과 말들이 반드시 반감(半減)될 것이다. 대개 교자(轎子)를 타고 가면 두 마리의 말로는 서로 교체할 수 없어서 반드시 네 마리의 말을 쓰는데, 네 마리의 말로도 부족하여 반드시 여섯 마리의 말을 쓰고 있다. 그리고 치중(輜重 무거운 짐바리를 뜻함)과 장막(帳幕)을 싣고 가는 말이 또한 7~8필이나 되어 한 사람이 가는데 쓰이는 말이 10여 필이 넘고 이에 따르는 사람이 또한 수십 인이 되니, 그 양료(糧料)와 공억(供億)에 드는 비용이 또한 얼마이겠는가. 이상은 김육의 차자. 만약 수레를 타고 간다면 사행의 비용이 크게 줄어들 것이고 관서의 재화를 국가의 경용에 족히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주C-001]양서(兩西) : 관서(關西)와 해서(海西) 지방, 즉 평안도와 황해도를 말한다.
[주D-001]제번전포(除番錢布) : 대역납포(代役納布) 및 방군수포(放軍收布) 등과 비슷한 내용의 술어로서, 입번(入番 현역병으로 근무하는 것)할 군인이 입번하지 않는 대신에 내는 돈 또는 베를 말한다. 여기서는 양서(兩西) 지방의 경우를 말하므로 방군수포에 가까운 내용을 뜻하는 것이겠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자세하지 않다.
[주D-002]예단(禮單)과 예급(例給) : 예단은 예폐(禮幣)의 물목(物目)을 적은 명세서(明細書), 예급은 일정한 규례(規例)에 따라 지급(支給)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3]하정(下程)의 증여물(贈與物) : 사신(使臣)이 사관(使館)에 도착하면, 주식(酒食) 등 일상 수요되는 물품을 보내주는 것을 말한다.
[주D-004]향사(餉司) : 양향청(糧餉廳)의 약칭(略稱). 양향청은 조선 시대 훈련도감(訓鍊都監) 안에서 군수품(軍需品)을 맡아보던 관아(官衙)이다.
[주D-005]모진(毛鎭) : 만주에서 일어난 청(淸 후금(後金))이 명(明)의 요양(遼陽)을 공격, 함락시켰을 때 요동 도사(遼東都司) 모문룡(毛文龍)이 남은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 철산(鐵山) 앞바다에 있는 가도(椵島)에 들어와 세운 군진(軍鎭)을 말한다. 광해군 14년에 설치된 이 군진은 명(明)으로서는 청(淸)의 배후를 공략, 위협할 수 있는 전진기지로 중요시되었으나, 청으로서는 조선과 영합할 위험마저 있어서 정묘년의 침공을 단행하게 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고, 조선으로서는 외교적인 갈등과 함께 군진에서 필요로 하는 식량과 물자를 제공하는 데 혹심한 곤란을 겪게 되는 존재가 되었다.
제7권 노비의 공역(貢役)을 논의함
【문】: 그대가 논의한 대로만 된다면 백성의 모든 부담이 균등하여질 것이라 보지만, 우리나라의 법이 천역에 가장 무거워서 이를 감하여 정하지 않는다면 균역(均役)을 이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견감하고자 하면 경비가 크게 줄어들 것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답】: 노비의 신역(身役)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무거운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도 평민에 비하면 약간 무거움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천인이면 그 형편이 자연 양인(良人)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노비도 역시 사람인데 어찌 차마 오늘날의 잘못된 습속과 같이 혹독한 징수를 무한하게 하겠는가. 공천(公賤)의 경우를 볼지라도 예전에는 성균관(成均館)의 노비에게서 2관(貫)의 돈을 신공(身貢)으로 징수하였을 뿐이다. 이제 또한 공사천(公私賤)의 신역을 모두 균등하게 작정하면 안 될 것이 무엇인가.
【문】: 그렇게 한다면 공비(公費)가 모자라게 될 것이다.
【답】: 공천이 매우 많으니, 만일 은루(隱漏)의 폐단이 없어진다면, 비록 감하여 징수하도록 한다 하더라도 경비가 줄어들지 않을 터인데 잘못된 규례에 얽매이고 영리(營利)에 급급하여 가혹한 징수와 혹독한 수탈이 끝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공천이 온갖 계책으로 숨고 피하여 줄어들기만 하고 늘지는 않으니, 이것이 과연 이재(理財)의 근본을 잘 알고 있는 것이라 하겠는가. 서한(西漢)에서는 관노비(官奴婢)를 면역(免役)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었으니, 옛사람들은 천인들에 대하여 그 불안한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특별히 역(役)을 없애는 혜택을 이같이 베풀었던 것이다. 비록 이렇게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어찌 지나치게 수탈(收奪)하여 그 박절하고 원통한 정상을 돌보지 아니하겠는가. 그리고 지금 공천의 신공의 많고 적음이 각자 틀리고 있으니, 이 또한 심히 균등하지 못한 것이다.
【문】: 공천은 그 신공을 감하여 징수할 수도 있지만, 사천의 경우에는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다.
【답】: 만약 공천에 대한 감공(減貢)에 인색하지 않고 지극히 공평한 제도를 만들어 전국에 통행시킨다면, 불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찌 감히 완강하게 위반하겠는가. 옛날 우리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천인들의 심한 어려움을 매우 불쌍하게 여겨 하교(下敎)하기를 ‘노비의 본주(本主)로서 생살(生殺)을 마음대로 하고 혹형(酷刑)을 함부로 가하며 신공의 징수에 절도가 없는 사람은 당방 노비(當房奴婢)를 속공(屬公)하고 법률에 따라 그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성왕(聖王)의 정사이다. 그런데 뒷날의 조정 신하들이 자기들에게 불편하다고 싫어하여 드디어 당방 노비의 속공을 시행하지 않는 법규를 만들어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건장한 노비의 속량(贖良)이 백금(白金 은(銀)) 6냥(兩)을 넘지 못하도록 한정되어 있는데도 나라에 기강이 없어 사람들이 준행하지 않고 있다. 이제 만약 세종의 성교대로 속공의 법규를 거듭 엄하게 한다면 무식한 무리들이 감히 이치에 맞지 않는 가혹한 수탈을 전처럼 행하지 못할 것이다. 또 속량한 뒤에 다시 속량하게 하는 것은 오늘날의 우심한 고폐(痼弊)이다. 무릇 속량에 관계되는 것은 모두 관문서로 기준하게 하고, 속량한 뒤에 재침(再侵)하는 사람은 압량위천(壓良爲賤)의 율(律)로 다스리게 하며, 양녀(良女)의 소생(所生)은 아비의 역(役)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
[주C-001]노비의 공역(貢役) : 노비의 신공(身貢)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공사(公私)의 노비를 막론하고 소속 상전(上典) 밑에서 사역(使役)되지 않는 노비, 즉 대체로 외거노비(外居奴婢)에게서는 해마다 일정한 몸값[身貢]을 징수하였다.
[주D-001]노비의 …… 한정되어 : 조선 시대에 노비가 그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良人)이 되는 속량(贖良)에는 납속(納粟)ㆍ군공(軍功)ㆍ구포(購捕)ㆍ진고(陳告)ㆍ납전(納錢)ㆍ대구속신(代口贖身) 등등이 있었는데, 이 글에서는 몸값을 내고 속량하는 납전면천(納錢免賤)과 대구속신면천(代口贖身免賤)을 말하고 있다. 납전면천은 소정의 몸값을 내고 속량되는 것이고, 대구속신은 자기 자리에 다른 노비를 대신 넣고서 속량되는 것을 말하는데, 속량된 후 20년 이내에 대신 넣은 노비가 죽으면 속량된 사람을 다시 노비로 하였다. 《續大典 刑典》
[주D-002]압량위천(壓良爲賤) : 양민(良民)을 강압하여 천인(賤人) 즉 종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주D-003]양녀(良女)의 …… 하는 것 : 노(奴)와 양녀(良女)가 교혼(交婚)하였을 때 그 소생의 자녀들이 부역(父役), 즉 노(奴)의 신분을 따르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에는 당초에 종부법(從父法 소생 자녀들의 신분을 아버지의 신분에 따르게 하는 법)을 시행하여 고려 시대의 수천법(隨賤法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노비이면 그 소생을 노비로 하는 법)에서 증가되어온 노비 인구를 줄이고자 하였고 또 줄이는 데 성공하였는데, 세조(世祖) 때 수천법으로 복구하여 노비 인구가 다시 증가되어 갔다. 그리하여 현종(顯宗) 때부터 노비 인구를 줄이고 양인(良人)을 늘리기 위한 수천법의 개정이 논의되기 시작하여 영조(英祖) 때에 이르러 종모법(從母法 양ㆍ천이 교혼했을 경우에 그 소생의 신분과 귀속을 어머니 쪽으로 따르게 하는 법)으로 확정되었는데, 여기서는 이 종모법과 일치된다. 수천법에서는 그 소생 자녀들을 교혼(交婚) 때는 노(奴)나 비(婢)에게, 상혼(相婚) 때는 비(婢)에게 각각 귀속시켜서 노(奴)와 양녀(良女)와의 교혼이 성행(盛行)하여 왔기 때문에 취하여진 조처이다. 《大典會通 刑典》
제7권 중앙 관청들이 지출하는 공비(公費)를 논의함
용관(冗官)이 많은 폐해가 우리나라의 경관(京官 중앙 정부의 관청 또는 관원)보다 더 심한 곳이 없으니, 중국 수도(首都)의 각 아문(衙門)의 수가 우리나라 아문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써도 용관이 심한 것을 알 수 있겠다. 한성부(漢城府)의 경우를 보면, 이것은 본래가 외관(外官 지방관청)인데도 지금 경각사(京各司)로 되어 있어서 관제(官制)의 체모를 잃고 있는 데다가 판윤(判尹)ㆍ좌우윤(左右尹)ㆍ서윤(庶尹)ㆍ판관(判官)ㆍ오부주부(五部主簿)ㆍ참군(參軍)ㆍ참봉(參奉) 등의 관원이 모두 16원(員)이 되도록 많고, 또 사산 감역관(四山監役官)도 있으니, 그처럼 필요 이상으로 설치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중국에는 부윤(府尹)과 부승(府丞)이 있는 곳은 완평(宛平)과 대흥(大興) 2현(縣)뿐이다. 그리고 작은 각 관청들이 관장하는 일들을 보아도 유둔(油芚)ㆍ지지(紙地)ㆍ소목(燒木)ㆍ주장(酒醬) 등의 일에 각각 장흥고(長興庫)ㆍ사재감(司宰監) 등의 감국(監局)을 설치하여 매일 각 아문에 진배(進排)하고 있으니,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만약 매월의 지출, 매계절의 지출을 각 아문에 매년 전문(錢文)으로 배정하여 각 아문에서 사서 쓰게 한다면 관원과 이례의 자리가 어찌 이처럼 많게 되겠는가.
그리고 상록(常祿) 이외에는 월봉(月俸)이 따로 없어서 각 아문이 각기 구가(丘價)를 주고 있는 것은 참으로 좀스럽고도 비루한 일이다. 게다가 그 아문의 빈부에 따라서 구가의 많고 적음이 다르기까지 하니, 이것이 어찌 매우 고르지 못하고도 구차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에 따라서 명목을 교묘하게 만들어 공물(公物)을 도둑질하고 분아(分兒)와 같은 규례를 만들어냈으니, 매우 나쁜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보다도 심한 것은 감수(監收)하고 출납(出納)할 때에 잉여분(剩餘分)을 좀스롭게 도둑질하여 나누어 쓰고 있는 것이니, 염치가 아주 없어지고 만 것이다. 이제 호조에서 상록(常祿)과 월봉을 넉넉하게 주면서 이러한 잘못된 규례를 모두 금혁하되, 이러한 일이 발각되면 장률(贓律)에 의하여 다스리도록 한다면 어찌 광명 정대하지 않겠는가.
긴요하지 않은 작은 각 관청들을 줄여서 육조(六曹)에 합한다면, 충훈부(忠勳府) 한 관청의 재물을 가지고도 어찌 여러 아문의 월봉을 보충하기에 부족하겠는가. 그리고 이례의 경우, 중국 육부(六部)의 이(吏)는 공부(工部)ㆍ예부(禮部) 같은 부에도 10~20명에 지나지 않고, 이밖의 속사(屬司)에는 2~3명이나 4~5명이 있는 정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원(吏員)이 극히 많아서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 매일 사환(使喚)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의의인가. 또 집기(什器)ㆍ병장(屛障) 등의 모든 관물(官物)을 만드는 대로 빌어다 쓰는 일이 한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소위 행하수결(行下手決)ㆍ약방분아(藥房分兒)ㆍ선생치부(先生致賻)ㆍ도감계병(都監稧屛) 등의 허다한 잘못된 관례가 공가(公家)의 재물을 좀먹는 것이 아닌 것이 없고, 또 긴요하지 않은 무거(無據)한 일들인데도 그 관례가 금석지전(金石之典)처럼 견고하여 감히 없애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한편, 구청(求請)ㆍ식리(殖利)와 같은 일은 비루하고도 무거하여 국가를 크게 욕되게 하고 고금에 실로 듣지 못하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그 사속(私屬)한 재물들을 모두 빼앗아 지부(地部)로 돌리고, 그 쓸데없는 잘못된 규례를 모두 없애서 그 경비를 주지 않으며, 각 관청의 소용을 헤아려 정액을 설정해서 배정, 지급해야 한다. 그리고 관청의 옥우(屋宇)에 대하여서도 또한 대수(大修)ㆍ중수(中修)ㆍ소수(小修)의 기한을 만들어서 한내(限內)에 폐파(弊破)되는 것은 개수하는 비용을 지출하지 못하게 하고, 집기ㆍ병장 등의 모든 물건들도 한내에 폐파되는 것은 해당 관리로 하여금 새로 마련하여 배상하게 하되, 감히 관전(官錢)을 사용하여 개조하다 발각된 사람에 대해서는 그 직역(職役)에서 쫓아내고 장률(贓律)에 의하여 사용한 관전을 물어내게 한다면, 관리로 근무하는 사람들이 원옥(垣屋)을 신중히 돌보고 집기(什器)를 아끼는 것이 자기집 물건과 다름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직(下直)하는 관원들의 경우에도 지방에 내려가서 백성을 다스리라고 한 사람들인데, 이들이 무슨 채무를 진 일이 있다고 반드시 승정원(承政院)에 필채(筆債)를 납부해야 하는가. 승정원의 소용에 어찌 비용을 배정, 지급하지 않고 이같이 비루한 짓을 하는 것인가. 또 액례(掖隷)ㆍ원리(院吏)들마저 문을 막고 서서 돈을 토색(討索)한 뒤에야 반드시 놓아주고 있다. 구중(九重 궁궐을 뜻함)의 지척에 이러한 풍습이 있는데 하리(下吏)가 뇌물을 토색하는 것을 어떻게 금하겠는가. 이조(吏曹)의 상참가(常參價), 양사(兩司)의 발행장(發行狀), 사인(舍人)의 발패(發牌)라는 고풍(古風), 무직(武職)의 면신납물(免新納物) 등은 나쁜 일이 아닌 것이 없는데도 모두 풍류(風流) 호사(好事)로만 여기고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문】: 봉름(俸廩)은 당연히 주어야 하지만, 현재 나라의 저축이 전혀 없어서 관례에 따라 주던 구치(丘値 구가(丘價))마저 줄이고 있는데, 어찌 녹봉을 더욱 늘려야 한다고 말하는가.
【답】: 녹이라는 것은 하늘의 녹이다. 하늘이 현인(賢人)을 길러낸 까닭에 나라에서 작위를 주어 대우하는 것인데, 어찌 상록을 내리지 않고 원봉(元俸)을 주지 않을 이치가 있는가. 지금 경관(京官)이 받는 구료(口料 녹봉(祿俸)을 뜻함)는 지극히 적어서 3품관(品官) 이하는 부유한 관청의 이례(吏隷)들이 받는 약간의 늠료(廩料)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감하고 또 감하며 깎고 또 깎아서 의관(衣冠)을 차린 사람(벼슬아치를 비롯한 선비들을 말함)으로 하여금 배를 주리고 추위에 떨게 하며 가난의 고초를 이기지 못하게 하고서도 나라일에 근로하고 청렴한 생활을 스스로 지니도록 바란다면, 그것이 과연 사리에 맞는 일인가. 녹을 제정하여 봉름을 주는 것은 곧 나라를 경영하는 데 우선 할 일인데 이를 인색하게 한다면 나라의 체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변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이재(理財)의 근원을 밝히고 쓸데없이 경비를 좀먹는 것들을 없앨 수 있다면 늠록을 복구하여 봉급을 제정하는 일은 매우 쉽고도 쉬울 것이다.
【문】: 그렇다면 모든 관리의 월봉은 호조에서 나누어 주는가.
【답】: 그렇다. 한결같이 품급(品級)의 차례에 따라 나누어 주는 것이 옳겠다.
【문】: 그렇다면 부유한 아문에서 예분(例分 관례에 따라 나누어 주는 것으로 구가(丘價) 등을 말함)하던 재물은 어떻게 처리하는가.
【답】: 사용(私用)의 재물은 모두 조사하고 가려내어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는 것이 옳다.
【문】: 이들 예분에는 정말 긴요하지 않은 것도 많지만, 한꺼번에 모두 없애버린다면, 관리들의 기백이 위축될 뿐 아니라, 조정의 대체에도 맞지 않을 것 같다.
【답】: 공물을 소모시켜 가면서 사문을 편리하게 한 뒤에야 비로소 관리들의 기백이 좋아진다고 할 수 있겠는가. 폐해가 큰 것은 중대하다고 하여 고치지 않고 폐해가 작은 것은 자질구레하다고 하여 고치지 않으면서, 덮어두고 숨기고 알고도 모르는 척하며 한갓 무리한 잘못된 규례들을 따르면서 유속에서 숭상하는 바에 영합한 뒤에야 비로소 조정의 대체가 유지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문】: 예를 들면 인가(人家)의 길흉(吉凶) 연집(宴集) 때 벼슬하고 있는 친지가 전혀 도와주지 않는 것이 옳겠는가. 공장(供帳 천막(天幕)이나 장막(帳幕)을 뜻함)ㆍ집기(什器)ㆍ거촉(炬燭 횃불과 촛불) 등의 물건 또한 차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예(禮)를 이루겠는가. 그리고 어찌 심히 매몰하지 않겠는가.
【답】: 단지 군문(軍門)의 경우를 보아도 세력 있는 집에 혼상(婚喪)이 있으면 물력(物力)을 내어 돕고 있는데, 군수(軍需)의 물자가 과연 혼상을 위하여 쌓아둔 것이겠는가. 각 관청의 집기도 또한 백성의 기름과 땀으로 마련한 것이 아닌 것이 없어서 본래 사물(私物)이 아니니, 관리가 감히 빌리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봉공(奉公)하고 수법(守法)하는 뜻이 된다. 친지간에 도와야 할 사람이 있으면 사력으로 분수껏 돕는 것이 옳은 것이다. 어찌 감히 공물을 부당하게 빌려주어야 하는가.
그리고 예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은 더욱이 가소로우니, 예를 이루고 이루지 못하는 것이 어찌 공가의 공사이겠는가. 공상(工商)이 성행되기만 한다면 이런 일들도 해결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혼상의 연석(讌席) 등에 쓰이는 온갖 물품들을 시사인(市肆人)들이 각기 국방(局坊)을 이루고 몇 가지씩 준비하여 놓고서 때에 맞추어 값을 받고 마련하여 주고 있다. 이러한 풍속이 하나같이 이루어진다면 어찌 공사(公私)에 모두 편하지 않겠는가.
【문】: 지금 서울에도 이러한 세계(稅契)들이 있다.
【답】: 지금의 세계들이야 말할 만한 것이 되는가. 중국에서는 방국인(坊局人)이 문(門)에 붙은 고시(告示)를 보자마자 곧 몇 가지 물건을 가지고 와서 일하여 주는 것이 관리가 공사를 위하여 달려가는 것보다 더 빨랐다.
【문】: 세계에서 어렵게 마련하는 것보다는 관청의 물건을 빌려 쓰는 것이 편리하지 않겠는가.
【답】: 세계에서 빌리는 값이 많지 않으니, 대개 이러한 방국(坊局)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설사 사소한 비용이 든다 하더라도 어찌 관청들을 찾아다니며 빌리는 고통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런 일들은 오로지 풍속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못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주D-001]사산 감역관(四山監役官) : 사산은 도성(都城)의 사면(四面)에 둘러 있는 산을 말하는데 이 사산 감역관은 사산참군(四山參軍)의 전 이름으로, 도성 주위의 산을 분담(分擔)하여 성첩(城堞)과 임목(林木)을 수호하는 책임을 맡았었다.
[주D-002]구가(丘價) : 관원(官員)이 봉록(俸祿) 이외에, 사사로이 부리는 구종(驅從)의 급료로 지급받는 전(錢)ㆍ곡(穀)ㆍ포(布) 등을 말한다.
[주D-003]분아(分兒) : 분하(分下) 또는 분하전(分下錢)이라고도 한다. 관부(官府)에서 소속 관원에게 해마다 약간의 물품이나 돈을 나누어 주던 관례를 말한다.
[주D-004]행하수결(行下手決) : 행하는 일정한 급료(給料) 이외에 위로조로 더 지급하는 금품을 말하고, 수결은 자기 성명 또는 직함 아래 도장 대신 쓰는 사인을 말한다.
[주D-005]약방분아(藥房分兒) : 약방은 내의원(內醫院)을 말하고, 분아는 연례(年例)에 따라 관아의 벼슬아치에게 물품을 나누어 주는 일을 말한다.
[주D-006]선생치부(先生致賻) : 선생은 각 관아(官衙)의 전임관(前任官)을 말하고, 치부는 임금이 신하가 죽은 때에 내리는 부의를 말한다.
[주D-007]도감계병(都監稧屛) : 계병은 조선 시대 병풍의 하나로,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그 일을 맡아본 도감(都監)의 관원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일을 치르고 나서 그때의 광경을 그려서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주D-008]필채(筆債) : 이속(吏屬)들에게 주는 필경료(筆耕料)를 뜻한다.
[주D-009]면신납물(免新納物) : 새로 출사(出仕)하는 관원(官員)이 선배 관원에게 신입(新入)의 예(禮)로 물품을 상납하는 것을 말한다. 면신례(免新禮).
[주D-010]국방(局坊) : 방국(坊局)을 말한다. 뒤의 ‘상판의 사리와 액세의 규제를 논의함’과 ‘한민을 논의함’ 참조.
[주D-011]세계(稅契) : 세(貰)를 받고 물품을 빌려주는 계(契)를 말하는 듯하다. 중국 계세(契稅)제도에 있어서는 인계전(印契錢)을 징수한 관청에서 발행, 교부하는 관인(官印)이 찍힌 증서(證書)를 뜻한다.
제7권 지방 관청들이 지출하는 공비를 논의함
오늘날 백성들이 살기 어렵고 고통스러워하며 안정을 찾지 못하고 즐겁게 일하지 못하는 것은 폐해의 근원이 매우 많기 때문이니, 그 근본을 이루는 실마리 몇 가지를 대략 논의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보민(保民)하는 정사를 의논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관제(官制)는 지방에 있어 더욱 의의가 없으니, 강토(疆土)는 협소한데 군현의 설치가 너무 많아 잔현(殘縣)의 백성들이 지당(支當)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군현을 줄이고 합병하지 않는다면 잔민(殘民)을 빈곤에서 소생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주읍(州邑)을 승격하고 강등하고 혁파하는 세 가지 일에도 원래 의의가 없으니, 이것도 함께 바로잡아서 그릇된 규례를 영구히 없애야만 관제가 문란하여지지 않고 직수(職守)가 한결같게 될 것이다.
현령과 현감의 구별도 역시 의의가 없는 일이다. 억지로 분별하여 놓았을 뿐 아무런 실사가 없으니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현령으로 통칭해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그리고 목사의 민호(民戶)가 현감에 미치지 못하기도 하고, 감사의 관황(官況 지방 관청의 봉급, 즉 지방 관원의 늠봉(廩俸)을 뜻함)이 수령에 미치지 못하기도 하니, 이것이 또한 무슨 의의인가.
또한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에서 예부터 내려온 관제의 세밀한 의의를 알지 못하고, 다만 현령ㆍ군수 등의 명목만을 억지로 모방해서, 현(縣)이라면 그 대소(大小)와 긴만(緊慢)을 물론하고 하나같이 현으로만 생각하고, 군(郡)ㆍ부(府)ㆍ주(州)ㆍ목(牧) 들도 모두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번 출륙(出六 종6품으로 승진하는 것, 즉 참하관(參下官)에서 참상관(參上官)으로 오르는 것)하면 그 재질이 어떠한지는 살피지 않고 세력 있는 사람은 풍요한 현을 얻고 세력 없는 사람은 조잔한 현을 얻는다. 그리고 뒷날에 승서(陞敍)의 하명이 있을 때에도 세력 있는 사람이 좋은 군에 임명되고, 세력 없는 사람은 가난한 군에 임명되거나 전혀 임용되지 못하기도 하니, 이것이 무슨 정격(政格 관리의 임면(任免)에 관한 법식(法式))인가.
중국의 부ㆍ주ㆍ군ㆍ현은 명목이 같기는 해도 그 구별이 매우 엄격하다. 주에는 상ㆍ중ㆍ하의 세 가지가 있고, 현에도 극현(劇縣)ㆍ차극현(次劇縣)ㆍ제현(諸縣)의 구별이 있어서 상ㆍ중ㆍ하의 3등급이 조리 있게 같지 않으니, 모두 민호(民戶)와 전부(田賦)의 대소와 다과를 가지고 차등하여 상하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하여 처음 현령에 임용되는 사람은 상등인 극현에 임명될 수 없고, 하등의 제현에 부임하여 가는 데 지나지 않는다. 후에 임기가 차서 고적(考績)할 때 6년 동안의 포제(褒題 관찰사가 관하 수령의 치적을 조사하여 포폄(褒貶)을 임금께 아뢰는 글)에 공사(公私)의 과오가 없고 뛰어난 치적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된 뒤에야 비로소 군수로 승진되며, 이보다 못한 사람은 상현령(上縣令)으로 임명되기도 하고, 또 이보다도 못한 사람은 중현령(中縣令)으로 옮겨지거나 보직(補職)을 기다리기 위하여 전함(前銜)을 지닌 채 집에 있게 될 뿐이다. 군수 이상의 경우에도 모두 이러하니, 고적의 엄격함과 승강의 신중함이 어떠한가.
【문】: 이같이 한다면 승천(陞遷)이 너무 지체되지 않는가.
【답】: 그렇지 않으니, 이는 곧 고과(考課)의 상등사(上等事)인 것이다. 고과에는 상ㆍ중ㆍ하의 3등이 있지만, 한 등급 중에도 각기 3칙(則)이 있어서 통틀어 3등 9칙이 된다. 제1등의 제1칙인 사람이 승서(陞敍)된 다음에 제2칙인 사람이 옮겨지고, 제3칙인 사람은 자리가 있으면 옮겨지고 자리가 없으면 임기가 찼기 때문에 해직되어 다음 차례의 전보(銓補)를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중등 이하의 사람들은 해직된 죄명(罪名)이 대단하지 않으면 관원의 결원이 생길 때 등용할 사람들 틈에 두도록 한다. 이러한데 승천이 지체될 걱정이 어디 있는가. 잔현(殘縣)을 합설(合設)하면 민력(民力)이 크게 필 것이고 승천에 등급이 있으면 권계(勸戒)가 분명할 것이니, 잔현을 피하고 요현(饒縣)을 택하면서 세력을 서로 다투는 폐해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방관이 탐관인가 아닌가는 지금 매우 구별하기 어려운데,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사사로이 받아들이는 재물이 이미 유례(流例 근거없는 관례)를 이루어 의리와 같이 되어서, 비록 청렴한 관리라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며, 그가 쓰지 않고 창고에 넣어 두고 돌아간다고 해도 후임관이 써버리고 마니, 공가에 이익되는 것이 무엇이며 백성에게 혜택되는 것이 무엇인가. 한꺼번에 모두 없애야 되겠지만, 그러하면 관(官)이 제모양을 이루지 못하니, 혁파할 수도 없다. 대저 수령의 봉름은 후하게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자신이 청렴을 기른 다음에야 비로소 남의 청렴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봉름을 박하게 주고서도 사봉(私捧)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한결같이 품급에 따라서 방면(方面 관찰사) 이하 수령에 이르기까지 차등을 두어 넉넉히 지급하는 것이 옳겠다.
옛사람들이 반드시 통상 혜공(通商惠工)을 급무로 삼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민(四民) 중에서 하나가 빠져도 그 폐해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주현에서 용도가 번다한 것은 그 고을 안에 공상(工商)이 없기 때문이며, 백성들이 공억(供億)을 지탱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고, 세민(細民)들이 요판(料販)으로 호구(糊口)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노(吏奴)가 빈곤하여 지탱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사민이 각기 그 업에 힘써서 상판(商販)이 크게 성하여지면, 모든 읍내에는 반드시 전사(廛肆)들이 들어서게 되어 꿩ㆍ닭ㆍ돼지고기ㆍ채소ㆍ젓갈ㆍ기름ㆍ식초ㆍ두부ㆍ미역ㆍ과일 등 일용 음선(飮膳)에 필요한 것들을 관아에서 사 쓸 수 있고, 갖가지 공장(工匠)의 제품과 기우(器盂)ㆍ포백(布帛) 같은 것들도 관아에서 사 쓸 수가 있게 된다. 그리고 한 고을의 백성들이 구하기 어려운 것들을 모두 읍내에 와서 사가게 될 것이고, 멀고 가까운 곳의 상고(商賈)들이 왕래하며 교역하게 될 것이며, 시골의 소민(小民)들이 채소와 시탄(柴炭) 등의 여러 가지 물건을 갖고 와서 팔게 될 것이니, 이것이 곧 이른바 촌판(村販)인 것이다.
대개 이같이 되면, 매매가 번성하게 되고 물종이 많아져서 물가가 저절로 싸질 것이니, 봉름을 넉넉히 지급하면 스스로 사서 쓸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주현의 용도가 번거로울 까닭이 없고, 백성들의 공억이 생겨날 까닭이 없으며, 세민이 호구할 길이 없을까 걱정할 것이 없고, 관리들이 무납(貿納)하다가 파산할 근심이 없을 것이다. 오직 읍내가 쓸쓸하고 매매가 활발하지 못하기 때문에 각 고을들이 물건을 사들이기 어려워서 관리와 백성에게 모두 폐해를 입히고 있는 것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은가.
대개 이렇게 된 다음에야 먼 곳에까지 가서 관아가 물건을 사오는 것을 엄금할 수 있고, 진봉하는 세찬(歲饌)과 절선(節扇)을 없앨 수 있으며, 걸태(乞駄 염치없이 제물을 요구하거나 마구 긁어들이는 것)를 근절할 수 있을 것이다. 슬프다, 관청이 신물(新物 해마다 절기(節期)에 따라 새로 생산된 물품들)을 거두어 쌓는 폐단은 매우 지당하기 어려운 실정에 있다. 만약 세찬의 진봉을 금지하고 늠봉을 가지고 조석의 끼니를 사먹게 한다면, 걸태가 저절로 없어지고 민폐가 덜어질 것이며, 수령의 관황(官況)도 전일보다 도리어 나아질 것이다.
【문】: 신물(新物)을 거두는 것은 제사와 빈객을 위하는 뜻에서도 나온 것이니, 어찌 거두어 쌓아두는 것을 모두 없애겠는가.
【답】: 군자는 천하를 위해서 그 어버이에게 검색(儉嗇)하지 않는 것이니, 제사에 임하여 물품을 사들여 풍부하게 준비해도 될 것이다. 어째서 평상시에 꼭 모아 두어야 되는가. 그리고 사객(使客)을 대접하는 경우도 아침ㆍ저녁 상을 정결하게 마련하여 주인의 도리를 다하면 될 것이다.
어째서 다담상(茶啖床 손님 대접으로 차려내는 교자상을 뜻함)을 풍성하게 내놓아야 하고 주전(廚傳 포주(庖廚)와 전사(傳舍), 즉 음식과 잠자리를 뜻함)을 신칙하여 사관(使官 사명을 띠고 가는 관원)에게 아첨해야만 하는가. 또 절선(節扇)의 경우를 보면, 한 영(營)에서 봉진하는 선자(扇子 부채)가 수천 개에 달하며, 석어(石魚 조기)는 몇만 마리가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세찬(歲饌)은 이보다 더욱 심하니, 이것들이 백성의 기름이 아니고 무엇인가. 영고(營庫)를 설립하고 관청이 온갖 방법으로 민재(民財)를 침탈하여 그 속에 쌓아두며 노비들이 간장ㆍ술ㆍ미역ㆍ고기들을 나누어 마련하여 진봉에 끊임없이 대고 있다. 그리고 걸태가 사방에서 모여서 함부로 써버리고도 귀장(歸裝 돌아갈 차비, 즉 임지(任地)를 떠나 돌아가면서 가지고 가는 물품을 뜻함)까지 마련하니, 불쌍한 저 소민(小民)들이 어찌 주구(誅求)하는 정사에 더욱 곤궁하여지지 않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토산물을 태수가 어찌 받아먹지 못하며, 친구에게 선사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라고 번번이 말하지만, 그가 분봉(分封)받은 사람이 아닐진대 사서 먹는 것이 옳다. 어찌 감히 무단히 받아 먹겠는가. 토산물이라 칭하면서 무수히 징수하여 들이기 때문에 생산지에서 그 물품이 도리어 귀하게 되었는데, 멋대로 이를 선사하면서 권귀(權貴)에게 아첨하기까지 하니, 어찌 방자함이 그렇게 심한가.
【문】: 세찬을 진봉하는 것이 어찌 조정에서 분부한 일인가. 남모르게 자진해서 보내오는 것을 무슨 까닭으로 금하겠는가.
【답】: 만일 봉름의 나머지를 가지고 가난한 친척과 친구를 보살피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불가하다고 말하겠는가만, 조정의 권귀에게 선사하면서 승천을 도모하는 데도 이를 금하지 않고 뇌물의 문을 오랫동안 열어놓았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아니한가. 어사(御史)를 보내서 어디다 쓰리요. 이런 것들을 적발하고 탄핵함이 곧 그 직분인 것이다. 그리고 금오(金吾 의금부(義禁府)의 별칭)와 포청(捕廳 좌우포도청(左右捕盜廳)) 등으로 하여금 나졸(邏卒)을 곳곳에 배치하여 몰래 다니면서 살피게 하되, 붙잡으면 상을 받게 하고, 사건을 주관(主管)한 관원은 높이 서용하는 격례(格例)를 만들어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국초(國初)에는 진봉(進奉)을 서경(署經)하는 법규(法規)가 있어서 뇌물을 금하는데 유의했지만, 그 법규가 너무 소홀하였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문】: 월름(月廩)으로 봉전(俸錢)만을 지급하고 일체 물종(物種)을 사봉(私捧)하지 못하게 하면, 수령의 관황(官況)이 소홀하고 답답할 걱정이 없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같이 행하고자 노력하면 난감할 이치가 없겠다. 그러나 공비의 소용은 어떻게 조달하는가.
【답】: 이른바 공비는 명목이 매우 많아서 낱낱이 열거할 수 없지만, 대략 한두 가지를 논하면 나머지를 미루어 알 수 있겠다. 대저 대동법(大同法)의 경우를 보면, 이미 삼남(三南)에 시행하였으면 그 밖의 제도(諸道)에도 마땅히 시행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까지 시행하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그리고 대동법이 실시되고 있는 곳에서도 긴요하지 않는 물종들을 각 고을이 봉진하고 있는 것이 많은데, 이것도 마땅히 정지되어야 하겠다. 이밖에 중앙의 여러 관청과 감영 등에서 구청(求請)하고 별복정(別卜定)하는 것들은 모두 없애고, 대단한 별역(別役)이라 하더라도 존류전량(存留錢糧)에서 뽑아 쓰는 것이 마땅하다. 존류전량이 부족할 경우에는 균요(均徭) 가운데서라도 1~2문(文)을 따로 지급하여 보용하되, 역사가 끝나면 즉시 정지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규례는 주현의 별역(別役)을 번번이 전결(田結)에다 배정, 징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수량의 다소를 마음대로 하고, 쓰고 난 뒤에 남는 것을 관원이 사용(私用)하는 경우도 많으니, 매우 무거(無據)한 것이다. 관량관(管糧官)이 각 주현의 균요책(均徭冊)을 가지고 그 징수액을 배정하여 주면, 징수한 수량을 1문(文)의 돈일지라도 결수(結數)를 가지고 파악할 수 있으니, 그 중 얼마는 헤아려 쓰게 하고 그 밖의 얼마는 존류고(存留庫)에 귀속시키게 하면, 책적(冊籍)에 환하게 적혀 있어서 조금도 사용(私用)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밖에 크고 작은 제사(祭祀)와 사객(使客)을 접대하는 데 드는 비용도 모두 몇 가지 항목으로 작정하여 한 책으로 만들어서 간각(刊刻)하여 주현에 반시(頒示)하고 준용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여미(餘米)의 경우, 수령들이 공용을 빙자하여 거짓으로 늘리고 넘치게 보고해도 감사는 사무가 번거로워 낱낱이 살피지 못하고 범범하게 문서 중에서 회감(會減)하여 주고 있다. 과연 공비라면, 각 항목마다 모두 정식이 있을 것이니, 의외로 별용한 것을 관량관이 정밀하게 조사하고 계산하여 문서를 박환(駁還)하고, 호조의 담당 낭관(郎官)이 거듭 따지고 조사하여 관량도(管糧道)에 박환하면, 어찌 중간에서 속임을 당하여 모실될 걱정이 있겠는가. 또 사객지공미(使客支供米)의 경우도 사객이 있고 없고를 물론하고 달마다 획급(劃給)하고 있어서 반년 동안 사객이 없었는데도 지공미를 먹어버린 경우가 있으니, 어찌 허망하지 않은가. 3개월에 한 번씩 사객을 보낸 다음에 관량관에게 신보(申報)하여 계감(計減)하는 것이 좋겠다.
[주D-001]현령과 …… 구별 : 조선 시대에는 같은 현(縣)일지라도 종5품 현령으로 수령을 삼는 현과 종6품 현감으로 수령을 삼는 현이 정해져 있었다. 《經國大典 吏典 外官職》 그러나 그 구별의 의미나 기준은 명확치 않다. 다만, 현의 호구(戶口) 및 전결(田結)의 다과(多寡)에 따른 구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주D-002]극현(劇縣) …… 제현(諸縣)의 구별 : 중국 군현제(郡縣制)에서 현(縣)을 그 현의 형세(形勢)에 따라 대ㆍ중ㆍ소로 구별한 것을 말한다.
[주D-003]세찬(歲饌)과 절선(節扇) : 세찬은 세배하러 온 사람에게 대접하는 음식을 말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런 음식을 마련하는 데 드는 물품이나 돈을 바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절선은 단오절(端午節)에 선사하는 부채로, 부채를 생산하는 지방관이 해마다 단오절에 왕실(王室)과 조정의 중신(重臣), 관찰사 및 병수사(兵水使) 등에게 부채를 선물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4]군자는 …… 않는 것이니 :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하(下)에 나오는 말.
[주D-005]진봉(進奉)을 …… 법규(法規) :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증유(贈遺)에 대해 서경한 것을 뜻하는 것 같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중앙 각 관서에서 지방의 공물을 수납할 때 소요되는 용지(用紙)를 사헌부 감찰이 친히 수납하여 각 관서에 나누어 주도록 한 규정만이 보이고 있다. 《經國大典 戶典 雜令》 진봉을 서경하는 법규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알 수 없다.
[주D-006]이미 삼남(三南)에 …… 매우 부당하다 : 대동법(大同法)은 광해군 즉위년(1608)에 경기도에 처음 실시된 이후 강원도(1624)ㆍ충청도(1651)ㆍ전라도(1658ㆍ1662)ㆍ함경도(1666)ㆍ경상도(1677)ㆍ황해도(1708)의 순으로 실시되어, 이 우서가 저술되던 영조(英祖) 때에는 별도의 수미법(收米法)이 시행되었던 평안도를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있었다. 저자가 부당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을 지적함인지 알 수 없다.
[주D-007]균요(均徭) : 저자가 제6권의 ‘균요사리를 논의함’에서 제안한 균요전(均徭錢)을 말한다.
제7권 영문(營門) 공비(公費)의 지출을 논의함
우리나라 관제 가운데 관찰사와 절도사는 대개 당(唐) 나라 제도를 답습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의의를 또한 잃고 있기 때문에 체통이 높지 못하고 폐단이 매우 많으니, 이제 한두 가지를 들어 논의하여 보면 교구(矯救)하는 방법이 그 중에 있게 될 것이다.
당 나라 초기에는 채방사(采訪使)가 곧 한 도(道)의 주인이었는데, 천보(天寶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이후에 처음으로 절도사와 관찰사를 창설하니, 관제가 문란하여지고 무신(武臣)이 너무 중하여져서 번진(蕃鎭)의 해를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관찰사는 민정과 재정을 주관하고 절도사는 병정을 주관했을 뿐인데, 그 뒤에 절도사가 더욱 중하여져서 드디어 관찰사를 겸하게 되자 관제의 경중이 뒤집혀 다시는 말할 것이 못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관찰사가 한 도를 주관하고 절도사는 병정을 주관할 뿐이어서 관제가 올바르지 못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관찰사가 명목상으로는 절도사를 겸해도 실제로는 제장(制將 임금이 임명한 장수라는 뜻)이 아니어서 병사(兵使)를 통어하기에 부족하니, 이것이 병사가 전란에 임하여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 평상시에도 동등한 지위에 있다고 자처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포정사(布政使)와 총병관(摠兵官) 위에 총독(總督)과 순무(巡撫)를 두어 지휘하게 하고 있어서 그 제도가 매우 좋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사력(事力 사세(事勢)와 물력(物力)을 뜻함)이 중국과 같지 않아서 이러한 관직을 더 설치하기 어려우므로 차라리 감사의 체통을 한층 중하게 하여 중국의 독무(督撫)가 행사를 전칙(專勅)하고 총병(摠兵)을 통어하는 제도를 따르면 방면관(方面官)의 체통이 중하여질 것이며,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에도 병사를 호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문】: 병사도 병정을 주관하는 대장인데, 어째서 꼭 문신(文臣)의 지휘를 받아야 되는가.
【답】: 송(宋)ㆍ명(明) 이래로 관제는 주(周) 나라의 제도를 오로지 채용하여 왔는데, 주 나라의 제도가 모든 일의 권한을 오로지 문신에게 귀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래가 강하고 위가 약해서 제어할 수 없게 되고, 무장(武將)이 날뛰어도 제압하기 어렵게 될 것이니 당 나라의 절진(節鎭 절도사의 진(鎭))이 귀감(龜鑑)이 되겠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뜻이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문신으로 도원수(都元帥)를 삼았고 감사로 병사를 겸하게 한 것이다.
【문】: 관찰사의 체통을 한층 중하게 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답】: 관함(官銜)에 몇 자(字)를 더하여 중국의 독무처럼 수륙(水陸)의 관병(官兵)을 모두 거느린다는 명칭을 지니게 하고, 또 영기(令旗)ㆍ영패(令牌)를 준다면, 병사를 호령할 수 있게 되어 독무의 체통과 같아질 것이다. 그러나 감사는 지휘, 호령하는 권한만을 갖게 하고 용병(用兵)에 대해서는 병사에게 전적으로 맡겨야 할 것이니, 대개 병사의 책임은 오로지 절충 어모(折衝禦侮 적(敵)의 예봉(銳鋒)을 꺾어 침입하지 못하게 함)에 있고, 감사의 책임은 승류 선화(承流宣化 교화를 펴는 것)에 있는 까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감사로 하여금 병사를 겸하게 하였으나 실제로는 장수에 버금가는 권한이 없어서 전란에 닥쳐도 호령할 수 없다. 그리고 병사를 겸했다고는 하지만 병사를 다스리는 일이 없는데도, 전란에 닥치기만 하면 으레 근왕(勤王)하도록 하기 때문에 명(名)과 실(實)이 같지 않은 채 폐해만 끼치고 있다. 감사가 실제로 병정(兵政)을 주장하지 못하는데도 무신의 책임을 지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병(牙兵) 등을 설립하고 군관(軍官)들을 모집하고 있는데, 이들은 행진(行陣)에 아무런 도움이 없을 뿐 아니라, 소모(召募)의 폐해만을 가져오고 있다. 감사는 실로 영문(營門)이 아닌데 지금 영문으로 칭하고 있으니 이 또한 가소로운 것이다.
【문】: 그렇다면 어떻게 칭하여야 하는가.
【답】: 관찰사사(觀察使司)의 관찰사(觀察使)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사(使)는 있는데 사(司)가 없는 것은 우리나라 관제의 가소로운 것이다. 어찌 그 본래의 사(司)를 버리고 감영(監營)이나 병영(兵營)으로 차칭(借稱)하겠는가. 매우 근거없는 일이다.
【문】: 사(司)라는 글자가 있고 없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답】: 당(唐) 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찰사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당사(唐史)에서 관찰사라고 대략 말한 것만 보고, 당 나라 때의 관청의 문서가 반드시 사사(使司)라고 칭한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명목을 모방하되 세밀하게 모방하지 못한 것이 되니, 하물며 관찰사의 직수(職守)를 토론하여 임무를 맡겼으리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낮은 관직에서 높은 관원(官員)에게 감히 직첩(直牒)하지 못하는 것이 곧 법례(法例)인데, 우리나라 수령들은 관찰사에게 직첩하고 있으니, 이 역시 심히 체통을 잃게 하는 것이다.
【문】: 사(司)라는 글자 하나가 있으면 체통이 존엄하게 되는가.
【답】: 사(司)자를 붙이면, 이는 곧 사사(使司)에 바치는 것이 되니 어찌 체통을 존엄하게 한다고 말할 수 없겠는가.
이어 병사에 대해서 보면, 그 직분은 그 지방을 진수(鎭守)하는 것일 뿐, 평상시에는 원래 둔병(屯兵)하여 조련(操鍊)하는 일이 없는데도 번번이 군수(軍需)ㆍ향자(餉資) 등의 명색으로 군포(軍布)를 독봉(督捧)하여 거의 사용에 쓰고 있으며, 영고(營庫)를 설립하여 온갖 물품을 각박하게 거두어들이고 공장(工匠)들을 모아 기우(器盂)를 만들어 진봉의 밑천을 삼으니, 소위 군정(軍政)이라는 것이 무슨 정사이며, 소위 군수라는 것이 무슨 수요인가. 대저 장신(將臣)에게 재물을 맡겨서는 안되니, 치병(治兵)과 치재(治財)는 그 사무가 각기 달라서 백성의 재물을 마구 긁어모아 사용해도 조사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병(兵)과 재(財)가 모두 대권(大權)이어서 장신에게 그 권한을 겸임하게 하는 것은 제어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 관제가 소활하여 구별해서 나누어 맡기는 뜻이 전혀 없는 까닭에 그 폐해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문】: 옛사람의 말에 ‘군(軍)에 상(賞)이 없으면 사졸(士卒)이 가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어찌 번곤(藩閫 병영과 수영)으로 하여금 조금도 재화(財貨)가 없도록 하겠는가.
【답】: 그것은 적(敵)을 맞아 행병(行兵)할 때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병사(兵士)를 모아 적에 대비할 일이 없는데, 번곤에 재물을 쌓아 어디에 쓰겠는가. 감사가 이미 치병할 일이 없으니 외대(外臺)의 체통만으로 사무를 행하고, 병사 역시 군사를 훈련하고 영문에 주둔할 실질적인 일이 없으니, 수봉(收捧)하고 있는 군포 등의 전포(錢布)들은 모두 조사하여 없애버려야 마땅하다. 전량과 군병이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어서 각진(各鎭)에 속한 장교(將校)가 사무를 맡아도 넉넉한데, 어째서 꼭 서울에서 군관을 거느리고 가야 하며, 어째서 꼭 영고(營庫)를 설립하여 사사로이 재력을 축적하여야 하는가. 품급에 따라서 봉름만을 넉넉하게 지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 감사와 병사는 체면이 자별한데 봉름만 지급하여 달리 쓸 바가 없고 또 군관마저 거느리고 가지 못하게 하면, 영문이 쓸쓸하여 제모양을 이루지 못할 것이며, 위급한 사태가 일어나도 또한 믿을 데가 없을 것이다.
【답】: 소위 체면이라는 것이 군관을 많이 거느리는 데 있고 음식을 물처럼 낭비하는 데 있는가. 한잡(閑雜)하게 토식(討食)하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가서 무엇에 쓰겠는가. 좌우(左右)의 협상(夾床 곁상)까지 곁들인 푸짐한 다담상(茶啖床)이라야 번신(蕃臣)의 체모가 존엄해지는가. 이같은 속된 생각은 너무나도 무식한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평양(平壤)ㆍ안주(安州)ㆍ전주(全州)ㆍ통영(統營) 등에서 주식이 풍성하고 연락이 흥겨웠던 일들을 즐겨 이야기하면서 언제나 ‘물력(物力)이 웅부(雄富)하고 영문(營門)이 장려(壯麗)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웅장한 병영ㆍ수영과 진영(鎭營)들이 위급할 때에도 믿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실제는 군포(軍布)와 제번전(除番錢)을 징수하고 통영(統營)의 해리(海利) 같은 것을 거두어서 일부는 먹고 마시는 부비(浮費)에 쓰고, 일부는 개인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며, 일부는 권문 세가로 올라가고, 일부는 걸태(乞駄)의 수응(酬應)에 없애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백성의 기름과 피를 긁어모아 낭비하고 있으니 그 부박하고 사치한 것이 가증스러울 뿐인데, 어디에 소위 군정이라는 것이 있으며, 어디에 믿을 만한 것이 있다는 말인가.
【문】: 그대가 논의한 대로 한다면, 군중(軍中)의 상격(賞格)은 어떤 수입에서 지급하는가.
【답】: 군수(軍需)와 상격 같은 것들은 의당 세과(稅課)와 존류 전포(存留錢布)를 가지고 지급해야 할 것이니, 이 문제는 군제를 변통한 다음에야 그 출처를 논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세사(稅司)나 주현에서 지급할 뿐이다.
【문】: 그대는 내직(內職), 즉 중앙 정부 기구에 설정된 관직은 너무 많고 외직(外職)은 너무 적다고 하면서 감사 밑에 3품(品)의 정관(正官) 1~2원(員)을 새로 두고, 또 독세(督稅)ㆍ제학(提學) 등의 관직을 설치하며 본도 어사(本道御史)도 설치한 다음에 비로소 모든 사무를 독리(督理)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지금 한 도에 한 사람의 감사도 오히려 공억하기 어려워서 영남(嶺南)의 좌우도(左右道)를 합설(合設)하기까지 하였는데 더구나 그와 같이 첨설(添設)해서야 되겠는가.
【답】: 사람의 지려(智慮)와 정신(精神)에는 한량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군민ㆍ형옥ㆍ전곡ㆍ사송을 물론하고 모든 것을 한 사람의 감사에게 맡기고 있으니, 감사라고 해서 별난 사람이겠는가. 지혜가 분산되고 마음이 혼란하여 직책에 전념하지 못해서 전체를 보살피는 실효가 전혀 없게 될 것이니, 보좌하는 관원이 어찌 없을 수 있는가. 지금 관찰사가 순찰사를 겸하고 있는 것은 실로 의의가 없는 일이다. 관찰사는 민사(民事)를 주관하고, 순찰사는 풍헌(風憲)과 형명(刑名)을 주관하여 예부터 하나로 합하여진 때가 없으니, 지금은 다만 겸대(兼帶)한다는 쓸데없는 명호뿐인 것이다. 이제 3품의 경관을 육조의 참의(參議)처럼 2원(員)을 설치하여 한 사람은 전량을 주관하게 하고, 한 사람은 풍헌과 형명을 주관하게 하면, 도사(都事) 한 자리를 올려서 보좌관 두 자리를 만든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순찰(巡察)의 직사를 실행하게 하는 것이고 보면, 관찰사를 보좌하기 위하여 한 자리를 더 설치한들 안 될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상세(商稅)는 국가의 세과(稅課)에 관계되는 것이고, 학교 행정을 거느리고 감독하는 것은 나라에서 우선 힘써야 할 일이니, 어찌 이를 전관(專管)하는 사람이 없어서야 되겠으며, 어사(御史)가 때때로 출몰하는 것 또한 어찌 없을 수 있는가.
【문】: 지금 감사 한 사람만으로도 선치(善治)하는 사람이 많은데 분임(分任)해서 무엇하겠는가. 방백(方伯)을 잘 선택하여 임용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답】: 소위 선치라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한때의 헛된 칭찬에 불과하다고 생각되니, 만일 모든 일들에 그 실효가 드러났다면 어찌 감사가 미미하고 세밀한 데까지 종리(綜理)하는 실적이 있었겠는가. 우리나라 사람은 모든 일에 대강만을 논하고 세밀한 곳에 대해서는 전혀 고핵(考核)하지 않기 때문에 일이 모두 무실하고 있다. 택용(擇用)이라는 두 글자도 제목만이 좋을 뿐이고 실사가 없는 것이며, 현령에서부터 선치하여 군수로, 주윤(州尹)으로, 좌이(佐貳)로, 승진하여 감사에 이른다면 이것이 참으로 택인(擇人)하는 것이 된다. 실적이 현저하게 드러나서 절차대로 승천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어찌 억지로 사람의 얼굴만을 가리켜 뛰어난 인물이라 칭하고, 억지로 사람의 뱃속을 더듬어 재능 있는 인재라 칭하면서 실사를 따져보지도 않고 곧 방면관으로 제수하는 정격이 있겠는가.
중국의 총독(總督)ㆍ순무(巡撫)ㆍ총병(摠兵) 이하 여러 관원의 경우를 보면, 봉름 이외에는 일호도 사용하는 재물이 본래부터 없어도 별로 박략(薄略)하여 지탱하기 어렵다고 걱정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들에게는 자제(子弟)들과 따라 다니는 반당(伴倘 심부름꾼) 1~2명 이외에는 따로 거느리는 군관이 없고, 또 판관(判官)을 공궤(供饋)하는 법규가 없는 데 지나지 않는다. 약간의 주역(廚役)은 시장에서 사온 물선(物膳)을 가지고 아침ㆍ저녁으로 공궤할 뿐, 절실(節實)하고 간약(簡約)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비용이 저절로 절제되고 생략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안감사(平安監司)의 한 달 지공 비용이 1천 관(貫)을 넘고 있으니, 설사 이를 나누어 제상사(諸上司)의 월봉(月俸)으로 주더라도 어찌 부족할 이치가 있겠는가.
【문】: 지방의 영(營)ㆍ진(鎭)ㆍ주(州)ㆍ현(縣)의 일들이 중앙의 여러 관청과는 매우 달라서 사재(私財)를 조사하여 없애고 공비를 지급한다는 것은 거의 시행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저 영속(營屬)ㆍ관속(官屬)들의 수가 매우 많은데, 이들이 없으면 관가의 모양을 이루지 못할 것이고, 이들에게 일일이 국가에서 요름(料廩)을 지급하려면 힘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각 관청에서 사사로이 재물을 저축하는 것은 대개 이러한 용비(冗費) 때문이니, 여러 방법으로 힘써 모아서 근근이 지급하고 있는데, 이 같은 것을 어찌 일체 없애버리겠는가.
【답】: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모집한 무리를 조치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 무리 중에는 부실(富實)한 민호(民戶)가 반이나 들어 있으니, 이들을 모두 조사한 뒤에 이례(吏隷)를 가려내고 정액(定額)을 설정하면, 어찌 요름의 지급이 계속되기 어려울 염려가 있겠는가.
【문】: 지방에서는 매년 정례대로 응하(應下)하는 공비 이외에도 무시의 별용(別用)이 매우 많은데, 이것을 어찌 미리 작정하여 둘 수 있는가.
【답】: 우리나라 풍속이 소홀하고 무실하여 모든 일에 세밀히 연구하고 이해하지 못하여 왔기 때문에 이런 일에는 꼭 이같이 모호한 유사(遊辭 진실성이 없는 말)를 가지고 반대하고 꾸며 덮으려 하니 심히 통탄스럽다. 만약 지방 관청들로 하여금 1년에 응하할 수효와 항목을 모두 갖추어서 보고하게 하고, 이를 하나하나 손질하고 따져서 제사에 관계되는 어느어느 항목, 빈객에 관계되는 어느어느 항목, 상공(上供)에 관계되는 어느어느 항목, 관용(官用)에 관계되는 어느어느 항목, 이례(吏隷)에 관계되는 어느어느 항목 등으로 하나하나 정액을 작성하되, 거짓으로 꾸며 늘려 놓은 것이 있으면 하나하나 뽑아내어 박환(駁還)하고, 자질구레한 고구(考究)와 되풀이되는 논난(論難)을 피하지 말고서 하나의 중제(中制 가장 적절한 규제(規制))를 마련하여 지방에 반포하면, 1년 동안의 경용(經用)의 총액이 참으로 요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이밖에 무시의 별용이 있게 되면, 마땅히 전항의 격례에 비추어서 재성(裁成)하고, 응하한 등칙(等則)을 하나하나 신보(申報)하여 계감(計減)하는 것이 옳겠다. 여기에 알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 무엇이 있어서 함부로 예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
아, 재화는 나라의 중요한 업무가 되는데도 공공연하게 각 지방의 영진(營鎭)에 던져주어 그 출납을 계산하고 감사(監査)하는 것이 담당관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제멋대로 지급하여 쓰고 문부(文簿)에 대하여서도 조사하지 않고 있으니, 양서(兩西 관서(關西)와 해서(海西), 즉 평안도와 황해도)의 향사(餉司)에서 관장하는 미곡과 전화의 경우를 보아도, 이 나라에 변향(邊餉)의 소비가 없은 지 이미 백 년에 가까워서 저축한 것이 반드시 차고 넘쳐야 할 것인데, 공공연하게 사용하거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소모되어 감소되기만 하고 증가되는 일이 없다. 병영(兵營)의 군포(軍布)와 군관(軍官)의 번전(番錢)들이 모두 사용으로 소비되고, 약간의 미포(米布)만을 남겨서 영하(營下)의 백도(白徒)를 모립(募立)하여 군사로 부리는 비용으로 삼고 있으니, 모르기는 하되 북로(北虜)가 변경을 침범한다면, 번포(番布)로써 외적을 방어하고 백도(白徒)로서 변방을 지키겠는가. 각영의 영곡(營穀)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놓고 그 모곡(耗穀)을 가지고 모든 물품을 마련하여 쓰니, 백성이 그 해독을 혹심하게 받고 있다. 다른 일은 물론하고 삼남(三南)의 지무역(紙貿易)만을 보아도 1영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이 거의 10만 속(束 묶음의 뜻으로 20장이 1속임)이 넘는데, 1속에 주는 값은 황곡(荒穀) 몇 되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이 공짜로 취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종이의 용도는 문서를 작성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만약 모든 문서를 정운(正韻)의 가는 글자로 해정하게 쓴다고 하면, 우리나라의 보통 백지(白紙) 1장의 길이가 중국의 누지(蔞紙) 3장에 해당되어, 누지 1장이면 평범한 공사(公事) 1건(件)을 작성하는 중국의 예로 보면, 3건을 작성할 수 있는 종이가 된다. 따라서 백지 1만 속, 곧 20만 장이면 누지 60만 장의 용도를 당해 낼 수 있는 것이 된다. 비록 사무가 매우 번잡한 양남(兩南)의 감사라 하더라도, 용지가 1~2만 속이면 1년의 공사를 완전히 당하고도 여유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오늘날의 실정은 그렇지 않다. 아문(衙門)의 매우 큰 공사는 문서의 자획이 매우 거칠고도 크다. 계본지(啓本紙 임금께 상주(上奏)하는 글을 쓰는 종이)의 경우를 보면 글자의 두껍기가 쇠가죽 같고, 금부(禁府)의 원정계초(元情啓草)를 보면 글자의 크기가 서까래 같으며, 비국(備局)의 회초(回草 회답하는 공문)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것을 가지고 사체라고 하니, 어찌 심히 긴요하지 않고 객쩍으며 가소로운 것이 아니겠는가. 지방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무한한 친지에게 이러한 종이들을 보내주고 있으니, 1장 1속이 백성의 기름 중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는데도 남용이 이와 같고, 부비가 이와 같다. 한 모퉁이를 들면 다른 세 모퉁이도 들려지듯이, 다른 물건들도 모두 이와 같은 실정이다. 그런데 이를 공사에 쓰는 것이라 혼칭하는 것이 옳겠는가.
당(唐) 나라의 번진이 병(兵)과 재(財)를 함께 관장한 것은 곧 천보(天寶) 이래의 적폐(積弊)였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과 같아서 드디어 오대(五代)의 난세(亂世)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송 태조(宋太祖)가 지방 번진의 재물을 모두 빼앗아 유사(有司)에 귀속시킨 뒤에야 비로소 수백 년 동안의 태평을 얻게 되었으니, 남송(南宋) 시절에도 군사를 일으킬 때에는 경제(經濟)ㆍ총제(總制)를 설립하여 전화(錢貨)를 맡은 여러 관청을 계신(計臣 재정을 주관하는 신하)에게 속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야 여러 장수들이 날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각 지방의 장신(將臣)은 다행히도 둔병(屯兵)하는 일이 없어서 꼬리가 커지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재물만은 마음대로 하여왔기 때문에 영문의 용도가 날로 사치하여지고 백성의 생리가 날로 군박하여지고 있다. 대개 주읍은 영문을 모방하고 답습하게 마련이니, 영문의 용도가 먼저 사치해지면 주읍도 따라서 역시 사치하게 된다. 모름지기 팔도(八道)의 영ㆍ진ㆍ주ㆍ현에서 사용(私用)하는 재물을 모두 빼앗아서 아주 미세한 것이라도 다시는 사용할 여지가 없게 한 다름에야 비로소 백성이 소생할 수 있고, 병졸이 정예하게 되며, 양향이 여유 있게 되어, 국체(國體)가 존엄하고 정대하여져서 다시는 구차하다는 탄식이 없어질 것이다.
[주D-001]채방사(采訪使) : 채방사(採訪使)의 오기(誤記)인 듯한다. 중국 당(唐) 나라 개원(開元) 22년(734)부터 건원(乾元) 1년(758)에 걸쳐 설치했던 한 도(道)의 목민관(牧民官)인 채방처치사(採訪處置使)를 말하는 듯하다.
[주D-002]중국의 독무(督撫) : 중국 각성(各省)의 장관을 뜻한다. 특정 지역의 장관인 총독(總督)과 지방을 순찰하고 감독하는 순무(巡撫)를 합친 말로서 명(明) 나라 때부터 생겼다.
[주D-003]아병(牙兵) : 임진왜란 이후에 생긴 병종(兵種)의 하나로 각도 관찰사의 친병(親兵)격이었다.
[주D-004]외대(外臺) : 조선 시대에 관찰사(觀察使) 휘하에 둔 도사(都事 종5품의 관원)를 일컫는 말인데, 이 글에서는 지방의 대각(臺閣), 즉 지방 최고의 행정 관서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05]도사(都事) : 여기서는 관찰사를 보좌하는 감영(監營) 소속의 도사를 말한다. 이 밖에 조선 시대에는 충훈부(忠勳府)ㆍ의빈부(儀賓府)ㆍ충익부(忠翊府)ㆍ의금부(義禁府)ㆍ중추부(中樞府)ㆍ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ㆍ개성부(開城府)ㆍ한성오부(漢城五部) 등에 각기 도사의 관직이 있었다.
[주D-006]군관(軍官)의 번전(番錢) : 입번(立番) 할 군인이 입번하지 않는 대신에 내는 돈 또는 베를 말한다.
[주D-007]백도(白徒) : 훈련되지 못한 병정(兵丁)을 말한다. 과거(科擧)를 거치지 않고 벼슬아치가 된 사람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주D-008]원정계초(元情啓草) : 원정(元情)은 원정(原情)으로도 표기한다. 억울한 사정을 임금에게 호소하는 글을 말한다.
[주D-009]남송(南宋) …… 총제(總制) : 경제와 총제는 남송 시대에 만든 부세(賦稅) 명칭인 경제전(經濟錢)과 총제전(總制錢)을 말한다. 남송 선화(宣和 남송 휘종(南宋徽宗)의 연호) 연간에 대도(大盜) 방랍(方臘)이 절중(浙中)에서 소란을 피우자 왕사(王師)가 그를 토벌할 때, 진구(陳遘)가 재부(財賦)를 관할할 당시에 주청(奏請)하여 이 세법(稅法)을 정하였다.
제7권 이원(吏員)의 역만(役滿)과 승발(陞撥)의 제도를 논의함
무릇 이 세상의 백성으로 가긍(可矜)한 것이 우리나라 외방(外方)의 이(吏 아전(衙前))와 같은 존재가 드문데도, 습속이 잘못되어 이들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간리(奸吏)ㆍ완리(頑吏)라 하여 원수같이 미워한다. 그리고 백성을 침학하여 마지않는 사람이 곧 능력 있는 이(吏)의 명목을 얻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문】: 어째서 그런가.
【답】: 이인(吏人)이 관청으로부터 의식(衣食)을 받는 일이 없는데도 밤낮으로 공가에서 힘써 근로하여 마지않는데 미워할 것이 어디 있는가.
【문】: 이들이 관원을 속이고 백성을 해치면서 간악하게 구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답】: 사대부(士大夫)는 대대로 국은(國恩)을 받아 높은 관작에 오르고 후한 녹을 먹어서 그 은혜와 영광이 더할 것이 없는데도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침학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인에게 그 무슨 잊어서는 아니될 은휼이 있고, 잃어버려서는 아니될 염치가 있다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봉공하고 범죄하는 바가 전혀 없겠는가. 대저 주현에 이례를 두는 것은 실로 국사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톨의 요식(料食)도 주지 않고서 그들이 도적질하고 뇌물받는 것만을 책망하니, 그것이 옳은가. 수령이 공사에 이례(吏隷)를 사역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어찌 사사에 혹독하게 부리면서 침탈하기를 자기 집 종보다도 백 배나 더해서야 되겠는가. 오늘날 주읍의 인리는 도무지 정원의 한정이 없어서 놀고 있는 장정을 널리 뽑아 모입(募入)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실제는 허다한 인리가 대개 관원의 사사로운 일에 쓰이고 노로(奴虜)같이 천대해서 사람의 윤리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니, 설사 양순한 인리라 하더라도 무엇이 애석한 바 있어서 간람(奸濫)한 무리로 되지 않겠는가. 오늘날 사람들이 이례에게 요식(料食)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오활한 말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으니, 상하(上下)와 귀천(貴賤)을 물론하고 국사를 위하여 뛰어 다니는 사람은 곧 백성을 위하여 애쓰며 노력하는 것이다. 어찌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여 뛰어다니고 힘을 쓰는데 끝내 한톨의 녹식(祿食)이 없을 이치가 있는가.
이례는 마땅히 주ㆍ부ㆍ군ㆍ현에서 품(品)에 따라 각기 액수를 정하고 육방(六房)의 지인(知印 통인(通引), 즉 관아의 관장(官長)에 딸린 심부름꾼)인 경우에는 근근이 교체하게 하지만, 대대로 향리(鄕吏)인 사람으로 선보(選補)하고 함부로 방임(房任)을 바꾸지 못하게 하며, 약간 넉넉한 늠봉을 정하여 지급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사령(使令)의 역은 중국의 조례(皂隷)에 해당하는 역이니, 더욱 넉넉하게 늠봉을 주어서 대대로 그 역[本役]에 충당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이(吏)가 비록 천역이기는 하지만, 관계되는 바가 지중하니, 육방을 바꾸는 것이 사죄(死罪)에 이르러도 참으로 이를 구임(久任)하지 않으면 고전(故典)을 익숙하게 알 수 없고 사무를 정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경외(京外)의 이전(吏典 아전(衙前)을 뜻함)을 물론하고, 발보(撥補)하고 승출(陞黜)하는 데 정제가 없으며, 법률과 문안(文案)에도 모두 정격이 없어서, 모든 일들이 거칠고 엉성하니 공무가 어떻게 산만하고 계통이 없지 않을 수 있는가.
오늘날 이전(吏典)에 약간의 각방 문안(各房文案)이 있기는 하나, 상사(上司)의 관문(關文 상급관청 또는 관원이 하급관청 또는 관원에게 보내는 공문서) 등을 등서(謄書)한 것들에 불과하고, 그 고을에서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하여서는 도무지 기록한 문부가 없다. 그리하여 새로 부임한 관원은 참고할 바가 없어서 전례를 묻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전혀 이(吏)의 입에 달려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육방의 사무에 대해서 보더라도, 의당 조정에서는 일정한 격식을 만들어 경외에 반포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새 관원이 부임할 경우, 육방의 이들은 각기 합행사의책적(合行事宜冊籍)을 만들어 부임하는 관원에게 올리는 것이 옳겠다. 이방(吏房)의 존안(存案)의 경우, 이조(吏曹)의 문서를 받은 것이나 그 고을에서 어떤 등급의 직관(職官)을 기취(起取 기용(起用))하였다는 것과 같은 문서, 어느 아문의 어떤 관원이 임기가 차서 고가(告暇), 환향(還鄕)하였다가 가만(暇滿)하여 돌아온 것이라던가 어느 관원이 어떤 등급의 직사에 제수되었다고 하는 문서, 그리고 외읍(外邑)의 수재(守宰)와 학직(學職) 등이 며칠 걸려 이조에 와서 문권(文券)을 받아 부임하였고 어느날까지 신보(申報)하였다는 것과 같은 문서들을 칙례(則例)로 모아 편성해서, 이조가 방면관에게 내려보내고 방면관이 해당 고을에 내려보내면, 그 고을의 해당 방리(房吏)가 원[倅]에게 올려서 결재를 받아 신보하고 존안(存案 뒷날의 참고를 위하여 보존하는 문서철)에 기록하여 참고자료로 하는 것이 옳겠다.
호(戶)ㆍ예(禮)ㆍ병(兵)ㆍ형(刑)ㆍ공(工)의 여러 방(房)들도 모두 존안을 만든다. 이를테면 전량(錢糧)ㆍ사송(詞訟)ㆍ형옥(刑獄)의 체례(體例), 문이초안(文移招案), 심문격식(審問格式), 공사예제(公事禮制), 군오(軍伍)의 청사(淸査), 공역(工役)의 과정과 일한(日限), 장(杖) 이상의 죄벌의 입안문서(立案文書) 등등과 결송(決訟)한 뒤에 창고에 보관한 물건으로 관(官)에 몰수된 것과 같은 것을 모두 열거하여 책적(冊籍)을 만들어서 뒷날에 일이 있을 때 참조하여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전량을 발운(發運)하는 기한 등과 같은 공사들도 모두 규정의 기한을 만들어서 기한 내에 장운(裝運)하게 하되, 그 밑에 규정의 한을 위반하였을 때의 죄명(罪名)과 율례(律例)를 주(註)로 달도록 한다. 또 병정(兵政)ㆍ전정(田政)의 여러 정사와 각종의 요부(徭賦)ㆍ제사(祭祀)ㆍ빈려(賓旅) 등의 경우에도 각각 기한 내에 급하게 독촉하는 문이격식(文移格式)을 만들어 사용하면, 주현의 공무가 비로소 정연하게 열거되고 조항이 명백하여져 관원이 현미(眩迷)할 염려가 없고 이(吏)가 작간하고 기만할 길이 없을 것이다.
방면아문(方面衙門)은 문이(文移)ㆍ초초(招草) 등의 글을 가지고 주현의 아전들을 고시(考試)하여 격식에 합격한 사람은 영리(營吏)로 올려 임명하고, 영리로 몇 해가 되어 역만(役滿)하면, 서울에 오게 하여 이조ㆍ예조의 당상(堂上)이 출제(出題)해서 고선(考選)하는데, 서울과 지방의 아전의 시액(試額) 10분 중 서울에서 2~3분을 뽑고 지방에서 7~8분을 뽑기 위하여 경권(京券)ㆍ향권(鄕券)을 명기해서 고취(考取)에 참고하도록 한다. 이렇게 사리(詞理 사송(詞訟)의 처리(處理))에 능통하고 도필(刀筆 문필(文筆) 또는 문자(文字))에 정량(精良)한 사람을 뽑아서 각 아문의 아전으로 분차(分差)하면 그 아문의 품급과 절차대로 승진하다가 뒤에 고적(考績)하는 연분(年分)에 이르면 각 아문에서 그 근근(謹勤)ㆍ양순(良順)한 것을 각기 고적하여 공사(公私)의 과명(過名)이 없는 사람을 2등급으로 나눈다. 상등으로 몇 해를 지내 사만(仕滿)된 사람은 현읍의 전사(典史) 자리에 임명하고, 뒤에 고만에 이르면 또한 군으로 승진시키고 녹식(祿食)을 참작하여 점차 증가시켜 가다가 주(州)ㆍ부(府)의 승(丞)에 이르러 그치게 하는 것이 옳겠다. 그밖에 자원하여 퇴임을 청하거나 나이와 자급(資級)이 미치지 못하였는데도 병으로 퇴임을 청하는 사람에게는 관대(冠帶)를 주어 그 몸을 영화롭게 하고 도승차첩(渡丞差帖) 등의 규례를 가지고 향리에서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문】: 전사(典史)는 어떤 자리인가.
【답】: 현령의 좌이관(佐貳官)인데 그 지위는 주학(州學)ㆍ현학(縣學)의 교유(敎諭) 다음이 된다.
【문】: 피폐한 주현에 좌이관을 따로 설치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 정(正)과 좌(佐)의 자리가 어찌 없을 수 있는가. 예부터 지금까지 향임(鄕任) 3원(員)이 없는 곳이 없는데, 향족(鄕族)을 칭하면서 그 족당(族黨)만을 비호하고 호횡(豪橫)하는 것이 매우 나쁘니, 전사로서 좌수(座首)ㆍ별감(別監)을 대신하되, 1원(員)만을 설치하면 무엇이 안되겠는가.
【문】: 향임을 반드시 그 고장의 사족(士族)으로 차출하는 것은 곧 한(漢) 나라 때의 공조(功曹)의 임무를 맡기는 것이다. 토속(土俗)과 읍규(邑規)에 익숙하여 정치에 도움이 없지 않은 것인데, 이를 노리(老吏)로 대신하게 한다면 어찌 간사하게 속이고 스스로 방자할 폐해가 없겠는가.
【답】: 공조(功曹)는 곧 이천석(二千石 태수(太守)의 별칭으로 지방 장관을 뜻함. 한(漢) 나라 때 태수의 녹봉이 2천석이었던 데서 생긴 별명임)이 스스로 추천하여 의랑(議郞)으로 삼은 것이다. 어찌 오늘날의 좌수(座首)와 비교하겠는가. 인리는 3년ㆍ9년의 고만(考滿)에서 잘못을 범하지 않은 다음에야 차임(差任)되고, 또한 앞으로 승차될 앞길이 있는데다가 고만을 당할 때마다 수령이 그 성적을 평가하는데 어찌 간사하게 속이고 스스로 방자할 염려가 있는가. 읍규(邑規)의 문제도 전제(典制 이전(吏典), 즉 아전(衙前)들에 대한 제도를 뜻함)를 바르게 고치고 폐습을 일소한다면, 고을마다 모두 같아질 것이 분명한 것이다.
【문】: 이들이 모두 관원의 체모를 차리고자 한다면, 어떻게 이들을 공궤하겠는가.
【답】: 단지 약간의 봉료(俸料)를 주도록 한다.
【문】: 그렇게 박하게 하면 그 누가 부임하기를 좋아하겠는가. 서남쪽 사람이 두승(斗升)의 요름(料廩)을 받고자 서북쪽의 전사(典史)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답】: 관직이 지극히 귀한데 어찌 부임하지 않을 이치가 있는가. 오늘날의 심약(審藥)ㆍ검률(檢律)ㆍ권관(權管)들이 일찍이 부임하지 않은 적이 없고, 중국(中國)에서도 정직(正職)ㆍ정관(正官)으로 대우한 적이 없으니, 왕수인(王守仁)의 예려문(瘞旅文)에 ‘너의 월름(月廩)이 단지 3두(斗)뿐이라, 논밭을 경작하더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만리 밖의 먼 곳까지 갔는가.’라고 한 바는 곧 전리(典吏)에 대한 제문(祭文)인 것이다. 그리고 분차(分差)할 때는 동(東)ㆍ서(西)ㆍ남(南)ㆍ북(北)ㆍ중(中)의 오첨법(五籤法)을 써서 남리(南吏)는 남첨(南籤)을 뽑고, 북리는 북첨을 뽑으며, 동ㆍ서ㆍ중리도 또한 그렇게 한다면, 먼 지방에 부임하는 폐해가 없을 것이다.
【문】: 예전에 없었던 자리를 창출(創出)하면 끝내 폐해가 있을 것이다.
【답】: 지금 3원(員)의 자리를 단 한 사람에게 주고서, 관대(冠帶)를 입고 공무(公務)를 보게 하며, 관원의 체모로 좀 대우하게 하는 것뿐이니, 별로 부비(浮費)를 논할 것은 못된다. 그리고 심약(審藥)ㆍ검률(檢律)의 경우와 같이 왕래(往來)를 모두 자기 물력(物力)으로 하면, 마중하고 전송하는 번거로움도 없을 것이다. 임무가 오늘날 향소(鄕所 향청(鄕廳))와 같기는 하지만 고적(考績)의 권한이 수령에게 있고, 또 대단한 죄과가 있는 사람은 상사(上司)에 실상대로 신보(申報)하여 그 직에서 쫓아내게 하면, 스스로가 감히 간람(奸濫)하지 못할 것이니, 염려할 폐단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 자신에 있어서는 비록 입류(入流)하지 못한 벼슬이기는 해도 오히려 직사가 있는 벼슬의 이름을 지니는 것이니, 살아서는 향리(鄕里)에서 영광스러울 수 있고, 죽어서는 명정(銘旌)에 관직을 쓸 수 있는데, 어찌 영행(榮幸)으로 여기지 않겠는가.
향소(鄕所)를 없애지 않으면 향권(鄕權)을 끝내 혁파할 수 없다. 토호(土豪)가 무단(武斷)하는 폐해는 물론, 향임(鄕任) 족속(族屬)들의 경우에도 그들끼리 스스로 향임을 전습(傳襲)하며 세전(世傳)의 관직과 같이 하여 그 폐단이 청금록(靑衿錄)과 다름없으니 변통할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논의한 바는 요약하면, 안으로는 군교(軍校 지방관아의 무청(武廳)에 속한 군관(軍官)과 포교(捕校))의 무리와, 밖으로는 둔감(屯監)과 산성(山城)ㆍ진도(津渡) 등에 소모(召募)한 별장(別將)에서부터 막비(幕裨 비장(裨將))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긴요하지 않은 것은 마땅히 정리ㆍ혁파하기도 하고 혹은 인원을 줄여서 직사를 정식으로 제수하기도 하되, 모두 무선(武選 무술(武術)을 시험하여 선발한다는 뜻)으로 행간(行間 군오(軍伍) 사이, 즉 군중(軍中)을 뜻함)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을 전형, 제수하며, 향임과 같은 것은 또한 전사(典史)로 고쳐서 문선(文選 문학(文學)을 시험하여 선발한다는 뜻)으로 전형, 제수한 뒤에야 사의(私意)가 작용할 수 없고 국사(國事)가 제대로 되어갈 것이라는 말이다. 듣는 사람들이 ‘이런 것은 모두 지극히 미미한 자리인데 꼭 이같이 하여야 하겠는가.’라고 곧장 말하는데, 속견(俗見)이란 참으로 한심스러운 것이다.
관직에는 청탁(淸濁)이 없고 임무에는 고하(高下)가 없다. 모두 국가에서 공로와 근면을 계과(計課)하여 응당 얻을 만한 사람에게 제수한 다음에야 관방(官方)이 비로소 맑아지고 물정(物情)이 평온해질 수 있는 것이니, 어찌 미관 말직의 자리라고 해서 아랫사람들이 제멋대로 임용해서야 되겠는가. 응패두(鷹牌頭)나 이문학관(吏文學官), 군문제조(軍門提調)의 군관(軍官)같은 사람들의 경우를 보아도 유력한 사람들은 동전(東銓 이조(吏曹)의 별칭. 이곳에서는 문반(文班)으로 임용되는 것을 뜻함)으로부터 출륙(出六 종6품으로 오르는 것, 즉 참하관(參下官)에서 참상관(參上官)으로 승진하는 것)하여 안으로는 주부(主簿)ㆍ별제(別提)가 되고, 밖으로는 찰방ㆍ현감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으며, 교련관(敎鍊官)의 무리는 모두 만호(萬戶)ㆍ첨사(僉使)를 얻은 다음에 나아가 수령이 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사사로이 아첨하는 무리들로서 청촉(請囑)의 힘으로 앉은 채로 음사(蔭仕)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찌 비미(卑微)한 자리라고 해서 이 같은 사의(私意)가 마음대로 행하도록 몽롱(朦朧)하게 버려둘 수 있는 것이랴.
둔감(屯監)ㆍ별장(別將)ㆍ군관(軍官) 등 명색(名色)의 경우에도 미말(微末)의 자리라서 관계없을 듯하지만, 이를 얻는 자가 모두 백도(白徒)로 벼슬에 관계하지 못할 사람들인데도 오직 세력에 힘입어서 벼슬하고 있는 것이다. 정과(正科 정규 과거(正規科擧))의 출신으로서 모든 관직에 합당한 사람들이 힘입을 세력이 없어 종신토록 1홉의 늠료도 얻어먹지 못하고 있는데, 저 무리들이 세력을 끼고 영진(營鎭) 등에 수행하였다가 둔감(屯監)이라도 되어 가는 것을 본다면, 어찌 용인(用人)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탄식하고 통한하지 않겠는가. 향임에 대해서는 더더욱 개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번에 논의하는 바가 대개 문벌의 폐해를 없애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폐해를 없애고자 하면서도 향임을 그대로 두면 토호의 무리가 이에 의지하여 몸을 숨기는 소굴을 만들어서 그 폐해가 반드시 문벌과 다름없게 될 것이다. 대저 옛 성왕(聖王)들이 나라를 경영한 방법은 먼저 법을 지니고 백성을 통솔하는 것을 요체(要諦)로 삼았으니, 이제 권병(權柄)을 향족(鄕族)에게 맡긴다면, 백성을 통솔할 수 없고 정사를 행할 수 없을 것이다. 한(漢) 나라에서는 향거(鄕擧)가 변하여 중정구품(中正九品)이 되고, 중정구품이 변하여 문벌이 되었다. 이 때문에 송(宋) 나라 이후로는 다시는 권병을 향리에 위임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그 형세가 자연 그같이 되기 때문이었다.
[주D-001]고가(告暇) : 관리가 휴가를 신청하는 것.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유고자(有故者)에게는 소속 관서가 임금에게 아뢰어 휴가를 주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유고 이외에도 3년에 한 번씩 7일 간의 근친(覲親)과 5년에 한 번씩 7일 간의 소분(掃墳) 휴가를 주었고, 또 영친(榮親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고향에 계신 부모를 찾아 뵙는 것), 영분(榮墳 부모가 사망한 뒤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부모의 묘를 찾아 인사드리는 것), 분황(焚黃 자손의 영달로 부ㆍ조에게 관직이 추증되었을 경우에 부ㆍ조의 묘를 찾아 인사드리는 것), 혼가(婚嫁), 처 및 처부모의 장례, 시향(時享 음력 11월에 행하는 선조의 묘제(墓祭)) 등등에도 7~15일의 휴가를 주도록 규정되어 있다. 《經國大典 吏典 給暇》 그리고 번상(番上)한 군사(軍士)에게도 소정의 휴가가 있었다.
[주D-002]문이초안(文移招案) : 공문(公文)을 정리 또는 발송하고, 재판(裁判)의 내용을 작성하는 것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03]군오(軍伍)의 청사(淸査) : 군인으로 복무하거나 이들을 돕는 보(保)에 대한 실태를 조사하는 것, 즉 군액(軍額)의 조사 배정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주D-004]도승차첩(渡丞差帖) : 나루를 관리하는 관원인 도승(渡丞 종9품)에 임명하는 사령장(辭令狀) 말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그 규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주D-005]향임(鄕任) 3원(員) : 향청(鄕廳)의 임원 3인, 즉 좌수(座首)ㆍ좌별감(左別監)ㆍ우별감(右別監)을 말한다. 향청은 조선 시대에 수령(守令)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으로 그 군현내의 유향 품관(留鄕品官)이나 선비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이 임원(任員)을 선출하여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속을 단속하며 향리(鄕吏)를 규찰하게 하였다.
[주D-006]한(漢) 나라 때의 공조(功曹) : 중국 한(漢) 나라 때 관직의 하나로 문서를 관장하는 관원과 군현의 속리(屬吏)가 있었다. 이 글에서는 군현의 속리를 뜻한다.
[주D-007]심약(審藥) …… 권관(權管) : 조선 시대에 봉록(俸祿)을 받지 못하고 근무했던 관원, 즉 이른바 무록관(無祿官)의 일종이다. 심약과 검률은 각 관찰사영(觀察使營)에 근무하는 종9품관으로서, 심약은 진상(進上)할 약재(藥材)를 고르고 영(營) 내의 의료(醫療)를 담당하였으며, 검률은 재판의 진행과 형률(刑律)의 검토와 시행을 담당하였지만, 정식의 봉록이 없었다. 그리고 권관은 각 병수진(兵水鎭)에 속한 종9품 무관(武官)이었으나, 이 역시 정식의 봉록은 없었다.
[주D-008]입류(入流)하지 못한 벼슬 : 유내(流內), 즉 문ㆍ무 양반(兩班)의 정규 품계(品階)에 들지 못한 벼슬이다. 다시 말하면 문ㆍ무의 정관(正官)이 아닌 벼슬을 뜻하는데. 의원(醫員)ㆍ역관(譯官)ㆍ산원(算員)ㆍ화원(畫員) 등의 잡직(雜職) 계통의 관원이 근무하는 관청, 즉 내의원(內醫院)ㆍ전의감(典醫監)ㆍ혜민서(惠民署)ㆍ활인서(活人署)ㆍ사역원(司譯院)ㆍ호조(戶曹)ㆍ도화서(圖畫署) 등에 속한 잡직 관원 자체를 말한다.
[주D-009]청금록(靑衿錄) : 청금은 곧 유생(儒生)을 뜻한다. 조선 시대에 성균관(成均館)과 향교(鄕校) 및 서원(書院)에 두었던 각종의 사적(士籍), 즉 유생의 명부(名簿)를 말한다. 이 명부에 등록되어야만 선비로 행세하고 대접받을 수 있었다.
[주D-010]둔감(屯監) : 조선 시대에 각 관부(官府)나 궁방(宮房)에 속한 둔전(屯田)을 검분(檢分)하고 감독했던 사람을 말한다.
[주D-011]이문학관(吏文學官) : 조선 시대에 승문원(承文院)에 속한 벼슬 중의 하나. 중국과 주고받는 문서에 쓰던 특수한 문체(文體)인 이문(吏文)을 담당하고 교육했던 유외(流外)의 관원이다.
[주D-012]향거(鄕擧) : 주(周) 나라 시대에 인재(人材)를 등용하던 법. 향리(鄕里)에서 재덕(才德) 있는 사람을 들어 조정에 추천하면 조정에서는 그의 그릇에 따라 벼슬을 시키곤 하였다.
[주D-013]중정구품(中正九品) :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 또는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이라고 한다. 한(漢) 나라 때가 아니고 위(魏)ㆍ진(晉) 이후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관리임용제도인데, 임금이 각 지방의 문벌과 인망이 있는 사람으로 중정(中正)을 선발하여 군ㆍ현에 대ㆍ소의 중정을 임명하고, 중정이 그 군ㆍ현 내의 인재를 조사하여 9품(品)으로 등급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면, 그 내용을 살펴 관리로 임용했던 제조이다. 중정 자신이 문벌 출신이어서 대체로 재능 여하보다는 문벌에 따라 상품(上品)에 오르는 폐단이 있어서 수(隋) 나라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제8권 전폐(錢弊)를 논의함
【문】: 우리나라에서는 전화(錢貨)가 고려 때부터 여러 차례 시행되고 정파(停罷)되어 왔는데도 그것이 이롭다는 주장과 해롭다는 주장이 아직껏 귀일(歸一)되지 못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답】: 이는 그 사세가 참으로 그러했으니, 괴이할 것이 없다. 여러 차례 시행하였다가 정파하여 온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근본을 탐구하여 교혁(矯革)하지 못한다면, 이후 천년 백년이 지나더라도 역시 시행하다가 정파하는 일이 오늘날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서울의 재력 있는 아문(衙門)과 지방의 영진(營鎭) 등은 전화(錢貨)를 많이 저축하고 있다. 돈이 국가 창고에 쌓인 채 아래로 유통되지 못하여 귀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용전(用錢)을 논의하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공고(公庫)의 돈을 모두 꺼내어 전황(錢荒)의 폐해를 교구(矯救)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다. 각 아문과 영진이 그 돈꾸러미를 모두 꺼내서 어떻게 처치하란 말인가. 만약 쌀을 사들여 쌓아둔다면, 저장하고 떼어쓰기가 어려워서 쉬 부패하여 먹지 못하게 될 것이고, 만약 포백(布帛)과 잡화(雜貨)를 사들여 저축한다면, 습기에 썩고 좀먹으며 벌레나 쥐들이 갉아서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쌓아두고 많은 것을 저장하기에는 전문(錢文)보다 편리한 것이 없으니, 이 때문에 논의하는 사람들의 말은 시행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교구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문과 같은 곳에 재력을 사사로이 저축하는 규례를 모두 없애는 것이 가장 좋겠다. 어째서 그런가. 예부터 국계(國計)를 논의하는 사람은 3년ㆍ9년의 저축을 주장하는 데 불과하였다. 그런데 그 저축이라는 것은 굳게 저장하고 단단히 지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묵은 곡식을 내보내고 새 곡식을 받아들이면서 이리저리 변통하여 군국(軍國)에 필요한 것을 순환시켜 사용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군병의 향비(餉費), 관리의 봉자(俸資), 국가의 시역(市易)들을 돈으로 배정하여 지급하면, 돈이 공가(公家)에 들어왔다가 다시 민간에 흩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곧 추이(推移)하고 출입(出入)하는 방법으로서 유사(有司 어떤 업무를 전담하는 관청, 또는 사람)가 아니면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군문(軍門)과 영진(營鎭)은 그렇지 못하다. 이같이 추이하고 출입할 길이 없어서 다만 ‘봉부동(封不動)’이라는 석 자(字)의 사법(死法)을 갖고 있을 뿐이니, 그 폐해가 어찌 전황(錢荒)에 이르지 않겠는가. 이제 만약 각 아문과 영진의 사사로운 저축을 모두 없애고 이를 유사의 담당 관원에게 귀속시킨다면, 출납에 방도가 있어서 전법(錢法)이 저절로 통행될 것이니, 이것이 그 첫째 이유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상판(商販)이 번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화가 부자집에 많이 들어가 있는데, 모름지기 이 폐해를 트이게 해서 저절로 유포되도록 하여야만 비로소 전법이 행하여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논의하는 사람들이 ‘금령을 만들어 부상 대고(富商大賈)로 하여금 전화를 많이 저장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고 말하고들 있지만, 이는 실로 가소로운 주장이다. 부상이 돈을 저장하고 저장하지 않는 것은 오직 그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인데, 진시황(秦始皇)이라 한들 어찌 위독(威督)으로 금령을 만들어 깊이 저장하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 근본을 알아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예만 좋아하고 실사(實事)가 없어서, 사인(士人)만이 귀한 줄 알고 공(工)ㆍ상(商)을 천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리(牟利)하는 무리들까지도 겉으로는 상고(商賈)의 일을 부끄럽게 여겨 전화를 저축해 놓고서 남모르게 이익을 도모하거나 혹은 월리(月利)를 놓고 방납(防納)을 하며 감히 뭇사람이 보는 데서 떳떳하게 돈을 내어 흥판(興販)하지 못한다. 그리고 교묘하게도 값싼 물건을 만나지 않는 한, 끝내 판매해도 번전(翻轉)하려 하지 않고, 돈을 깊이 저장하여 두었다가 편리한 것을 엿보아 전토(田土)를 구하고 노복(奴僕)을 사들일 계획을 하고 있다. 이것은 겉으로는 상고의 이름을 싫어하고 기피하는 듯해도, 남몰래 영리(營利)하여 그 마음가짐만 나쁘게 만드는 것이니, 행상(行商)ㆍ좌고(坐賈)가 떳떳하고 통쾌하게 영리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나라의 풍속이 이 같은 까닭에 자전(子錢 이자(利子)ㆍ이식(利息)의 뜻)하려고 많은 돈을 내놓는 사람이 매우 적으니, 오직 저 수업(手業)으로 소판(小販 작은 규모의 매매(賣買))하는 무리들이 어디서 돈을 얻어 상판(商販)을 널리 행하겠는가. 소판이 많지 않으면 물종(物種)이 도회지에 많이 모일 수 없고, 부상도 또한 마음대로 전화를 돌려 이식을 엿볼 수 없으니 상판이 이와 같고도 천화(泉貨 화폐(貨幣))가 옹체(壅滯)되지 않을 수 있는가. 이제 이런 풍속을 일변시켜 공상(工商)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다면 누천백금(累千百金)을 내어 동과(同夥)를 모집하고 전사(廛肆)를 설치하여 상판을 행할 사람이 지금보다 백배는 될 것이며, 궁향 벽읍(窮鄕僻邑)에서도 돈의 쓰임이 물과 같지 않은 곳이 없으리니, 어찌 돈을 오래 저장하기만 할 염려가 있겠는가. 이것이 그 둘째 이유인 것이다.
돈을 꼭 통용시키려고 하면, 야(冶 주전소(鑄錢所)를 뜻함)를 일정한 곳으로 한정하고 노(爐 금속(金屬)을 녹이는 가마)를 일정한 수로 작정하며, 이를 관장하는 관아에 담당 관직을 설치하고 주전(鑄錢)에 정액(定額)을 설정하며, 동석(銅錫)을 관에 납부하고 값을 받는 정제(定制)를 마련하고 악전(惡錢)은 금단하고 유통하지 못하게 하는 법률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전법(錢法)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국(局)을 설치하여 의논하되, 항상 국가의 정사(政事)로 삼아서 해마다 일정한 액수의 돈을 주조하여 낸다면, 돈의 귀천이 자연 물가와 같아지고 돈이 오래도록 통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못하니, 주전(鑄錢)할 줄만 알 뿐, 전법은 모르고 있다. 모두가 용야물료(鎔冶物料 주전에 쓰이는 물질, 즉 돈의 성분(成分)을 뜻함)를 알지 못하고, 경중수량(輕重銖量 돈의 무게를 뜻함)에 밝지 못하며, 육호주곽(肉好周郭 돈의 두께와 크기를 뜻함)에도 자상하지 못하여, 서울과 지방의 돈 모양이 모두 같지 않고 두께와 무게가 고르지 않다. 그리고 한번 주전하고서 파한 뒤에는 아무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처음에는 매우 흔하다가 오래되면 매우 희귀하여지며, 옹체되어도 소통하지 못하고 무게가 달라져도 고르게 하지 못한다. 그러니 잠시 만들었다가 곧 파하게 되고, 지나치게 귀했다가 너무나도 흔하게 되어 공사(公私)와 농말(農末 농업과 상공업)에 모두 해를 끼치는 것이니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이것이 그 셋째 이유인 것이다.
아, 아무리 심상하고 미세한 일일지라도 법이 없으면 행하여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큰 폐정(弊政)에 대하여 씻은 듯이 도모하지 않아서 그 무법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것이 폐해를 일으키지 않고 구원하게 유행되기를 바란다면, 어찌 그러할 이치가 있겠는가. 오늘날 이를 구제하는 데는 전관(錢官)을 설치하여 전법을 독리(督理)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해마다 일정한 액수의 돈을 주조하여 전황을 구하고 나아가 법을 만들어 악전(惡錢 구리의 함량(含量)이 부족한 사주(私鑄)의 돈을 말함)의 유통을 금하되, 관에 납부하게 하고 새 돈으로 대신 지급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요컨대 온 나라의 이(利)를 한 곳에서 나오게 한 다음에 공상(工商)의 문(門)을 크게 열어 상판을 흥행시킨다면, 사주(私鑄)하는 농간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사민(四民)이 각기 그 직업을 지니게 되어 부강의 효과를 즉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전하기만 하고 사주하는 것을 금지할 줄을 모르면 끝내 돈을 통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옛날에 돈을 통용시키던 사람들은 먼저 전법을 의논하였다. 구리와 숯[炭]을 아끼지 않고 공비(工備)를 아끼지 않으면서 좋은 돈을 만들어내기에만 노력하였고, 또 시사(市肆)의 악전(惡錢)을 금지시키면서 관전(官錢)으로 바꾸고 개주(改鑄)하여 사주의 문을 막았던 것이다. 그러한 다음에야 비로소 돈을 통용시킬 수가 있었던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도무지 이러한 일들을 하지 않고서 사주하는 것을 금지하기만 하니, 어찌 금단될 이치가 있는가. 전을 통용시킨 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악전이 크게 유행하고 있고, 이들이 모두 사주한 것들인데도 국가에서는 그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이제 다시 경비의 고갈을 염려해서 새로운 돈을 많이 주조해 내기만 하니, 이 뒤로는 사주가 더욱 위기(蝟起 고슴도치의 털이 곤두서듯이 사태가 엉클어져 일어나는 것)하여 금절될 이치가 전혀 없을 것이다.
아, 돈이라는 것은 본래 천하의 공폐(公幣)이고 공물(公物)이어서 그 법을 마련할 당초에 천하를 위해 지극히 공정하게 마음을 가져야만 비로소 폐단없이 시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국저(國儲 국가의 저축, 즉 재정을 뜻함)의 탕갈(蕩竭)을 민망하게 생각하여 주전한다면, 어찌 나라에 이로운 것이 되겠는가. 국계(國計)를 담당하고 국론(國論)을 맡은 사람들이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한갓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니, 장차 어떻게 뒷날의 일들이 좋아지겠는가.
[주C-001]전폐(錢弊) : 화폐의 폐해를 말한다. 여기서는 1690~1730년대의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유통에 따른 폐해 중, 용전(用錢) 자체의 부정적 현상, 즉 전황(錢荒)을 비롯한 사주(私鑄) 및 부실화폐(不實貨幣)의 유행 등을 뜻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상평통보의 주조와 유통이 촉진시킨 고리대(高利貸)의 성행, 상업의 발달, 농민의 몰락과 농촌의 분화(分化) 등등의 사회ㆍ경제 현상과 함께 전통적 가치 관념의 변화와 같은 정신적 현상을 아울러 뜻하기도 하였다.
[주D-001]전황(錢荒) : 화폐 유통량의 부족 현상을 말하는데, 1700년대 초를 전후하여 약 30년간 존속했었다. 상평통보가 실질 가치를 지녔던 데서 저장(貯藏) 수단으로 많이 퇴장(退藏)되고 유통되지 못한 것이 그 주요 원인이었다. 이 현상은 1730년대에 화폐정책의 현실화가 도모되면서 해소되었다.
[주D-002]동과(同夥) : 같은 패거리라는 말로, 이 글에서는 대상(大商 자본주(資本主) 또는 본점 주인(本店主人)과 함께 장사하는 동업 상인)을 뜻한다. 뒤의 ‘상판사리와 액세의 규제를 논의함’ 참조.
[주D-003]사주(私鑄) : 개인이 임의로 화폐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하는데, 1678년에 상평통보가 처음 주조된 이후 곧 전황(錢荒)이 일자 상평통보가 실질 가치를 지니는 화폐인 것을 기화로 품질이 모자라는 상평통보를 몰래 주조하여 이익을 취하는 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