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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21강
깨어 있으라
말씀 / 마가복음 13:1-37
요절 / 마가복음 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오늘은 종말과 주님 재림의 때의 징조와 함께, 그때를 맞이하는 우리 신자들의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 하*이가 얼마 전, 방학이 끝나 개학을 했는데, 방학 숙제를 거의 끝나갈 무렵에 몰아쳐 하느라 힘들어했습니다. 왜냐면 선생님께 제출하고 확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선생님이 QT를 매일 하도록 권면하고 매주 체크를 하는데 주중에 안하다가 주말에 몰아쳐 조금 하고 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때도 힘들어 합니다. 교회 선생님의 확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의 확인과 평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까지의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이의 모습 속에서 답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 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합니까? 완전 죽이지 않습니까?”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크기는 예루살렘 땅 전체의 육분의 일을 차지했습니다. 성전을 구성하는 어떤 돌은 길이가 15미터이고, 무게는 300톤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큰 돌들이 쌓여 웅장한 성벽으로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야~! 저렇게 큰 돌들을 어떻게 저렇게 쌓았을까? 놀랍다 놀라워!”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고 떠돌이 같은 자신들에 비하면 저렇게 견고하고 웅장하게 세워진 그 성전에서 일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한없이 부러웠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웅장한 돌들이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로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선포하니 제자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언제입니까?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침공해 성전을 철저하게 파괴하였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성전은 하루아침에 다 무너져 돌무더기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제자들과 달리 성전의 멸망을 내다볼 수 있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처럼 화려한 성전의 겉모습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 내면의 부패함을 보셨습니다. 성전에서는 매일 제물로 바쳐지는 양과 염소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보석을 옷에 주렁주렁 단 제사장들이 성전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전 앞에서 율법을 가르쳤고 종종 난상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성전의 겉모습은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성전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하나도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신앙생활의 생명과도 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겉모습만 화려했을 뿐 믿음과 진실함에서 나오는 참된 경건이 없었습니다. 열매 없던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았듯 성전의 멸망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무리 크고 화려하고 웅장하더라도 그 안의 부패와 타락은 결국 멸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사뭇 진지한 자세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4)?”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인류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멸망 예언은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에게 종말의 시기와 징조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성전 멸망과 인류의 종말이 반드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겹겹이 쌓인 산들을 보면 바로 인접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은 산과 산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고, 그 거리는 수 킬로미터에 달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말씀은 가까이 있는 성전 멸망 사건과, 멀리 있는 종말, 또 재림 사건을 중첩되게 보여줍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전 멸망과 종말의 징조로 가르쳐주신 것들이 무엇입니까?
첫째, 거짓 그리스도의 등장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자신을 그리스도라 칭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등장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기 때문에 거짓 그리스도의 추종하는 세력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들이 불신자들만을 미혹하는 것은 아닙니다. 22절도 보겠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거짓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적극적인 공략의 대상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적과 기사를 행하기 때문에 더욱 미혹되기 쉽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후 성전 파괴 사건이 있기까지 자칭 메시야가 여러 명 등장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드다 사건(AD 40년 중반),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살해한 므나헴(66년), 시몬 바 기오라(68-70) 같은 사람들이 거짓 메시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보이스 피싱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처럼 주의해야 합니다. 정신 번쩍 차리고 주의하지 않으면 누구든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21절에서도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도록 주의를 주셨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재난입니다. 7,8절에는 갖가지 종류의 재난이 언급됩니다. 7절의 난리는 쿠데타, 폭동과 같이 한 나라 안에서의 소요 사태를 말합니다. 8절에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난다는 것은 국제적인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앞의 두 가지가 사람이 일으키는 재난이라면 지진이나 기근과 같은 자연 재난도 있습니다. AD62년에는 그 유명한 폼페이의 대지진과 화산폭발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8절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있었던 대기근이 언급되어 나옵니다. 이런 재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 세상의 종말이 곧 닥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러나 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또 8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무서운 재난의 소식이 들린다고 해서 당장 내일 세상이 끝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산모가 아기를 낳을 때 처음에는 진통이 약하고 띄엄띄엄 옵니다. 그런데 출산이 임박할수록 통증이 강해지고 간격도 짧아진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지막 종말의 때가 임박하면 임박할수록 재난도 더 세게 더 자주 발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멸망 직전에 임할 환난이 얼마나 참혹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예수님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이 성전에 서서 길게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성전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을 주의하도록 경고하셨고, 그 후 감람산에 앉아 그 성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그곳에 서지 못할 것이 서 있는 것을 본다면 그때 유대에 있는 자들은 멀리 있는 다른 산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자들 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서 있는 자들이 부러웠습니다. 그곳에서 서서 장사하여 많은 돈을 버는 이들, 긴 옷을 입고, 늘 상석에 앉고, 기도하는 시간에는 거대한 돌들로 웅장하게 세워진 성전에 서서 기도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경건한 자들 같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서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망각하고 선지자들을 모욕하고 때려죽이고,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까지 쳐 죽이고 성전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 멀지 않은 시기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가증한 것들이 성전에 서게 되는 것을 예견했습니다. 지금 성전의 모습도 죄악되고 악할진데 앞으로 얼마나 더 심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때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런 참담한 광경을 보게 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산으로 도망가야 합니다. 도망칠 때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합니까?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물건을 챙기러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습니다. 밭에서 일하던 자는 겉옷이라도 챙기러 뒤로 돌이킬 여유도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아내가 도망치다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소금기둥이 된 것이 생각이 납니다. 일체 미련 없이 즉시 도망을 쳐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어머니에게 화가 있는 날입니다. 몸이 둔하고 아이를 챙기다보면 늦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젖먹이 아이를 챙기지 못할 정도로 긴박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어찌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18).” 팔레스타인 지역의 겨울은 비가 많이 오는 우기이기 때문에 강을 건너 도망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요즘 일부 사람들은 지구 마지막 때를 대비해 지하 깊은 곳에 온갖 편의시설을 갖추고 식량을 쌓아놓은 벙커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또 달이나 화성 같은 다른 행성에 인류의 거주지를 찾아 마련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긍휼히 여겨주시도록,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환난의 날들을 감하시는 주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도록 다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아무리 무서운 환난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 범위를 넘어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환난의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긴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주님은 어떤 환난이 닥치더라도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할 일은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는 일입니다. 재난과 환난의 때에도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면 종말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얼마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환난의 때에도 복음 전파가 중요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복음 전파를 앞세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박해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공회에서 재판 받고 회당에서 매질 당하며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는 박해가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또 산헤드린 공회에서 한 번, 벨릭스와 베스도 총독에게 각 한 번씩, 아그립바 왕에게 한 번, 심문과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런 박해를 당하게 되면 하나님이 왜 가만 있으시는 걸까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박해에도 이유가 다 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권력자들에게도,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게도 복음 전파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제자들은 권력자들 앞에 서게 되고 재판받게 될 때 염려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 순간 함께 하시고 할 말을 그들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재판은 너무나 참담한 현장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어주고,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관계가 깨어지는 곳이고, 배신이 있는 곳이고, 그래서 미움을 견디기 어렵고, 삶에 대한 환멸과 절망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때는 견딤으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주님은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2:25,26)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결코 지우지 않으시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계3:5).
지금 당장 우리에게 이 같은 박해에 대한 징조는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보면, 공산권이나 무슬림 지역에서 기독교는 상당한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이 정도는 아닐지라도 믿지 않는 부모나 직장 동료들에게 예수님 믿고 교회 다닌다고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화된 가치관과 힘겹게 싸워야 하는 고통과 아픔들이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는 인내하며 믿음으로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감당해야겠습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 멸망에서 예수님의 재림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멸망의 때나 이 세상 종말의 때나 나타나는 징조들은 오늘 성경 말씀과 같이 유사합니다. 이런 징조들이 나타나면 우리는 두려워하기보다 이 세상 마지막 때, 종말이 가까이 왔나보다 생각하며 더욱 깨어 있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두려워 떨며 혼자 잘먹고 잘 살고자 달로, 화성으로 날아갈 생각을 하기보다는 재림하실 주님을 어떻게 맞을지 생각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재림의 때에 어떤 현상들이 나타납니까?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24,25).” 지금껏 유지 되어오던 자연 질서가 무너지고 대격변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새로 건축하기 위해서는 앞서 해체 작업이 불가피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과 새 하늘, 새 땅이 주어지기 직전에 일시적인 혼돈의 상태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곧 예수님이 오십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실 때에는 초라한 나귀 구유에 오셨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실 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십니다. 구름 타고 큰 권능과 영광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모으실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과 재난과 환난과 박해의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그 와중에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주님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며, 끝까지 견디고 인내로 신앙의 결실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느라 많은 고생을 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해주시고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거짓도 환난도 박해도 고통도 없는 곳에서 영원토록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이는 절대 없어지지 아니하는 예수님의 확실한 약속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1).”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절대적인 소망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멸망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30), 유대인들에게 있어 한 세대를 보통 40년으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로부터 대략 40년 후인 AD 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징조들이 나타나고 결국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전 멸망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이루어질까요? 지금도 주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때의 징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재림은 언제일까요? 무화과나무는 늦봄에 잎사귀를 내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잎사귀가 나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았습니다(28). 이처럼 앞에서 언급된 징조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재림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짐작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할 수 있습니다. 기왕이면 정확하게 몇 년, 몇 월, 며칠에 오시는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신나게 세상을 즐기고 있다가도 서둘러 준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시늉이라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예수님도 모르고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다시 보내시는 때는 꽁꽁 감추어진 비밀,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만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알려주지 않으십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늘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집주인이 해외 출장을 가면서 종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하고 갔습니다. 집주인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저녁일지, 밤중일지, 새벽일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들은 항상 깨어 있어 주인이 맡겨놓은 일들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안일하고 나태하여 세상 쾌락에 빠져 맡겨둔 일들을 감당하지 못한 종의 모습을 본다면 집주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난 이천여 년 동안 안 오셨는데 뭘!’ 하면서 세상 쾌락을 즐기며 안일하고 나태하여 영적으로 잠들어 있다가 주님이 도둑처럼 갑자기 오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나 부끄럽고 당황스러울까요?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시든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한글 번역에서는 깨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죄짓고 안일하고 나태하여 영적 잠을 자고 있었더라도 이제부터라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는 것처럼, 개인의 마지막의 때도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병에 걸려서든, 늙어서든, 사고 때문이든 어쨌든 언제 주님으로부터 오라는 호출을 받게 될지 모릅니다. 지난 8월 초에 광주에서 알고 지내던 동갑내기 목사님이 갑자기 소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교회 부목사로 열정적으로 섬겼던 친구입니다. 청년부 여름수련회를 섬기고 쉼이 필요해 며칠간 휴가를 얻어 쉬면서 운동을 좀 했는데 갑자기 심정지가 와서 소천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 그 순간 저는 나도 하나님 앞에 언제 서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구나. 그 친구의 헌신과 진심을 주님이 만나주실 때 기뻐하셨겠구나. 나도 주님 앞에 깨어 있어야겠다고 다시금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34)” 우리는 주님 다시 만나게 될 그때에 주님이 맡기신 이 세상에서의 사무(사명)를 잘 감당했는지 여부를 결산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일하는 삶의 터전입니다. 우리 모든 삶의 영역이 바로 주님이 맡기신 사명지입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 학교, 직장, 사회 등 우리가 생활하는 그곳이 바로 사명지입니다. 우리는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주님의 말씀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며 성실하게 일하므로 세상의 덕이 되고 주님께 영광 돌려드려야 합니다. 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우선해서 전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들을 잘 감당하며 깨어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인정받는 종들이 될 것입니다. 37절을 읽겠습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우리가 늘 주님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깨어 있어 주의 사명을 힘써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