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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쌍어(雙魚)의 비밀
가야국의 상징은 쌍어(雙魚)다.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백사(白蛇)·곰·호랑이 등 무수한 짐승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산해경」은 요(堯)임금 때 쓰인 고대(古代) 사서(史書)이다.
그런데 동물 이름들은 모두 고대 부족국가(部族國家)의 대명사였다.
곰 부족의 상징은 황제(黃帝, B.C.2679년) 부족이며,
호랑이 부족의 상징은 신농씨(神農氏, B.C.3071년)이다. 또
백사 부족의 상징은 복희씨(伏羲氏, B.C.3512년)로 되어 있다.
가야국이 두 마리의 물고기로 국가의 징표를 했다면 무언가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김해에 있는 김수로왕의 비석에는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B.C.2578년)가 시조로 명기되어 있다.
소호금천씨는 황제(黃帝, B.C.2679년)의 아들이다.
황제의 아들인 소호금천씨가 가야국의 시조라면, 가야국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땅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소호금천씨는 쌍어(雙魚)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소호금천씨의 표상은 독수리이다.
그런데 김수로왕의 직계 시조는 분명히 물고기가 대명사이거나, 그와 연관된 사람이어야 한다.
연구를 거듭하다가 필자는 가야국의 시조가 다름 아닌 곤( )임을 알게 되었다.
곤( )이란 큰 물고기를 상징한다.
곤( )은 하(夏)나라 왕이었던 우(禹)임금의 아버지이다.
가야의 시조는 황제(黃帝)의 아들인 소호금천씨가 아니라, 황제의 증손자뻘되는 곤( )이었다.
곤의 아버지는 전욱고양씨( 頊高陽氏, B.C.2491년)이고, 고양씨의 아버지는 창의(昌意, B.C.2578년경)
이며, 창의의 아버지가 바로 황제(黃帝)이다.
황제(黃帝)에게는 곤( )이 증손자이고, 곤에게는 황제가 증조부이다.
그리고 곤( )의 아들이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된다.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 제이(第二)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지부왈곤(禹之父曰 ) 곤지부왈제전욱( 之父曰帝 頊)』
우왕(禹王)의 아버지는 곤( )이며, 곤의 아버지는 제왕이었던 전욱(顚頊)이라는 뜻이다.
요순(堯舜) 시대에 엄청난 홍수가 있었다는 기록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에
기록되어 있다.
홍수도천(鴻水滔天)이라고 했다.
큰기러기 같은 물줄기가 하늘로 넘쳤다는 뜻이다.
이때 요순(堯舜)이 산꼭대기로 피신을 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얼마나 홍수가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이때 치산치수를 하겠다고 장담을 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곤( )이다.
곤이란 큰 물고기를 의미한다.
천지가 물바다이므로 큰물에서는 큰 고기만이 치산치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
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륙 전체가 물바다였기에 큰 고기가 나타나는 것이 순리라 생각했지만 홍수를 막을 수 없었다.
요임금의 명에 따라 곤( )은 9년간에 걸쳐 치산치수(治山治水)를 했지만, 산과 물을 다스리는 데
실패했다.
순(舜)이 등용되어 순행 길에 올라 산야를 살폈는데, 곤의 치산치수가 완전히 실패한 것을 보고 공이
없음을 문책하는 뜻에서, 우산(羽山:江蘇省 東海縣 서북 90리)에서 극형에 처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339쪽 참조)
곤( )은 묘족(苗族)의 후손이라고 사기(史記)에는 기록하고 있다.
묘족(苗族)은 환인씨(桓仁氏, B.C.8937년) 이후 삼위산(三危山)을 중심으로 하여 돈황(燉煌)에 신시
(神市)를 건설한 이후부터 한민족의 뿌리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후 천황씨(天皇氏, B.C.8479년)·지황씨(地皇氏, B.C.8364년)·인황씨(人皇氏, B.C.8247년)·거방씨
(居方氏, B.C.8128년)·구황씨(九皇氏, B.C.8011년)·섭제씨(攝堤氏, B.C.7895년)를 거쳐 44명의
단군(壇君)으로 이어 내려왔다.
그리고 단군조선 제2기의 환웅씨(桓雄氏, B.C.3898년) 시대로 접어들게 되면서부터 점차 동으로 동
으로 강을 타고 이주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인구가 팽창하므로 부득이 평야가 있는 넓은 곳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복희씨(伏羲氏, B.C3512년)의 출현으로 국가 건국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복희씨는 감숙성(甘肅省) 천수현(天水縣) 사람으로 강을 타고 동으로 이주해 온 하백(河伯)의 부족이다.
그후 신농씨(神農氏, B.C.3071년)는 대륙의 넓은 들에서 농경사회를 이룩하게 되었다.
신농씨의 후예로 황제헌원(黃帝軒轅, B.C.2679년)이 출현하게 되고, 황제의 아들 25명 중 소호금천씨
(少昊金天氏, B.C.2578년)와 창의씨(昌意氏, B.C.2570년경)가 태어났다.
창의의 아들인 전욱고양씨( 頊高陽氏, B.C.2491년)가 태어나고, 전욱씨의 아들인, 하백(河伯)의 후손
으로 곤( )이 나타났으나, 요순(堯舜) 시대에 치산치수의 실패로 우산(羽山)에서 극형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곤의 아들인 하(夏)나라 우왕(禹王, B.C. 2224년)이 순(舜)의 대를 이어 등극하게 되고, 그의
후손들의 뿌리가 이어져내려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홍수를 막아 보겠다는 곤( )의 웅대한 뜻이, 가야의 상징인 쌍어(雙魚)로서, 가야국을 지켜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수로왕(金首露王)
김수로왕이 누구의 자손으로 어떤 경로에 따라 가락국의 왕으로 출현하게 되었는지는 사서의 기록이
미약하다.
다만「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A.D.25년) 18년
임인년(壬寅年) 3월 어느 날, 구지봉(龜旨峯)에 서기(瑞氣)가 돌면서 하늘로부터 금색 포대기에 싸인
둥근 알 6개가 내려왔다.
6개의 알에서 옥동자가 태어났는데 얼굴은 준수하고 용모도 뛰어났다.
날이 갈수록 크게 자라나 키는 9척(九尺:270㎝)이며 한고조(漢高祖, B.C.206∼195년) 유방(劉邦)의
용안과 같았다.
눈썹은 팔자(八字)형으로 수려했으며 흡사 당요(唐堯:요임금)를 닮았다.
그리고 눈동자는 순(舜, B.C.2284년)임금과 같았으며 마치 해와 달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죽은 후의 휘호는 수로(首露)이며 혹은 수릉(首陵)이라고 했다. 나라이름은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
(加耶國)이라 했다.
여섯 가야 중의 하나였다. 나머지 다섯은 다섯 가야의 주인이 되었다.
삼국유사 본문에서 보다시피 김수로왕은 어디서 왔는지조차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추정이 가능한 것은 후한 광무제(光武帝, A.D.25∼56년) 18년이므로 신라(新羅) 유리이
사금(儒理尼師今, A.D.23∼55년) 때이다.
이때는 한(漢)나라를 혁명으로 격파한 왕망(王莽, A.D.9∼13년)이 신(新)나라를 세울 때이므로 사회
현실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후한 광무제 초년부터 내란과 반란의 끊임없는 시련 속에서 서안(西安)의 고도(故都)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금주(金州:지금의 安康縣)로 이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때 수많은 군신들이 흩어져 제각기 살길을 찾아나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 보듯이 구지봉에 서기가 어리고 자색 기운이 감돌면서 금보자기에 싸인 알 6개가
하늘에서 내려와 옥동자가 되었다면, 뭔가 역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김수로왕이 등극하던 후한 때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제후국들이 난립해 있었다.
이때는 특히 서역을 중심 하여 북으로는 흉노(匈奴), 남으로는 다섯 천축국(天竺國)으로 분열되고 소국
들이 서로 세력을 다투던 시대이다.
국가간에는 끊임없이 전쟁의 불씨가 일고 있었고, 나라 안으로는 내란과 반란이 고조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천재지변과 군비강화로 인해 곡물조세가 거세어지자 농민의 봉기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이때 김수로왕은 왕족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더욱더 전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컸던 것이며, 이러한 조짐
속에서 군신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변방으로 피난했을 것으로 보인다.
쌍어(雙魚)의 비밀에서 밝혔듯이, 김수로왕은 소호 금천씨의 직계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하(夏)나라
우(禹)임금의 아버지 곤( )의 혈통을 타고 출현한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황제의 후손으로 황제(黃帝)·창의(昌意)·전욱(顚頊)·궁선(窮蟬)·경강(敬康)·구망
(句芒)·교우( 牛)·고수(鼓 )·순(舜) 임금의 피를 이어받아 한고조(漢高祖)의 뿌리로 내려왔다.
김수로왕과 가야국 후예들은 후한 때 전란으로 인해 멀리 김해부(金海府)가 있는 절강성(浙江省) 임해군
(臨海郡)으로 흘러온 유민인, 군신(君臣)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
수로왕의 뒤를 이어 거정(居正)·마품(痲品)·거질미(居叱彌)·이시품(伊尸品)·좌지(坐知)·취희(吹希)·질지
( 知)·겸지(鉗知)·구형(仇衡) 왕을 통해 10명이며, 491년간 존속했다.
가야국의 마지막 왕 구형의 아들이 무력(武力)이다.
무력의 아들은 서현(舒玄)이며, 서현의 아들이 김유신(金庾信)이다.
김해 김씨 집안의 역사서요 경전이라고 할만한 숭선전지(崇善殿誌) 87∼96쪽의, 가락국(駕洛國) 선원
세계(璿源世系)에는, 시조대왕의 휘호를 수로라 하고,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18년 임인년(壬寅年)
음력 3월 15일에 나라를 열었다고 되어 있다.
그때 나라의 이름을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加耶)라 했다.
수로왕은 158세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고 장지는 김해부(金海府) 서쪽 300보인 구지봉 남쪽이다.
묘지 방향은 자좌원(子坐原)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정북쪽이다.
필자는 몇 년 전 경상남도 김해에 가보았다.
그런데 김수로왕 묘는 자좌원(子坐原)이 아니라, 반대로 오좌원(午坐原)인 정남쪽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 의해 후세 사람들이 가짜로 능을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경상도 김해(金海)는 김해부(金海府)가 아니며, 김해부라고 한 사실조차 없다.
제후왕(諸侯王)의 도읍지를 부(府)라고 하기 때문이다.
가락국에서는 국왕의 이름을 다른 방법으로도 불렀다고 되어 있다.
①김수로왕 ②도왕(道王) ③성왕(成王) ④덕왕(德王) ⑤명왕(明王) ⑥신왕(神王) ⑦혜왕(惠王)
⑧장왕(莊王) ⑨숙왕(肅王) ⑩양왕(壤王)이라 했다는 기록이다.
김수로왕비 허황옥
김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은 아유타국(阿踰 國)의 공주로 기원후 32년 생(生)이다.
이때는 신라 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A.D.23∼55년) 9년이다.
즉 후한(後漢:東漢) 광무제(光武帝:劉秀. 建武, A.D.25∼56년) 8년이다.
허황옥은 16세 때 아유타국(阿踰 國)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발행한「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보면 아유타국(阿踰 國)은 대승
불교(大乘佛敎)의 전통적인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紀)」제5권에 아유타국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 아유타국은
서장성 아리(阿里)지방으로 보인다.
중천축국의 제후국으로서는 제일 남쪽에 위치한 곳이다.
대륙 내륙지방인 서장성(西藏省) 서북부이다.
곤륜산 남쪽과 희마랍아 산맥의 중간지점으로, 6천 미터 이상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에 자리
하고 있지만, 곳곳에 샛강이 있고 큰 호수와 분지가 있어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되어 있다.
소금과 철·광석·옥·금과 같은 광석을 생산했으며, 뽕나무를 심어 비단을 생산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신강성과 인도 등 서역과의 무역이 성했던 지역이다.
특히 중천축국은 전통적인 대승불교의 본산지로서 감숙성과 신강성 남부, 그리고 서장성 일대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불교의 집산지였다.
이 당시는 같은 천축국이면서도 바라문교와 불교간의 분쟁이 끊일 사이 없이 일어나는 시대였다.
아유타국은 인도 항하(恒河) 북부지역까지 강역이 미치고 있었지만, 아유타국의 본거지는 서장성(西藏省)
서북부였다.
이곳은 아라(阿羅) 또는 아리(阿里) 지역이다.
아유타국에서 태어난 허황옥 공주의 고향은 바로 아리(阿里)이다.
중천축(中天竺)이 동남인 서장성으로부터 인도 항하 유역까지 뻗어 있을 때, 감숙성(甘肅省) 서쪽으로는
소월씨국(小月氏國)이 강성해져 서역으로 바라문교를 휩쓸고 대월씨국(大月氏國)으로 강성해갔다.
그리고 후한 때에 이르러 흉노(匈奴)를 격파시키면서 인도의 항하 유역까지 침공하였다.
한편 서역 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阿富汗〕동서까지 점령하는 등 대 전란이 일어났던 시대이다.
이때 아유타국 역시 몰락되는 비운에 놓이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아유타국 공주였던 허황옥은 살길을 찾아 동으로 동으로 불운한 고행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어린 16세의 나이로 고향을 등지고 떠나올 때의 쓰라린 가슴이 오죽했으랴.
그때 생긴 슬픈 노래가 '아리낭'이다.
아리낭(阿里娘)
아리낭(阿里娘) 아리낭(阿里娘) 아라리용(阿羅里瑢)
아리낭(阿里娘) 고개로(高皆路) 염어간다(念御看 )
'아리낭'이란 아리가 고향인 젊은 계집이란 뜻이다.
아리낭이라고 두 번 반복한 것은 고국인 아리 고향을 떠나는 아씨의 애틋함을 강조하는 뜻에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라리용(阿羅里瑢)' 하는 것은 아름답고 빛나는 아리의 고향을 떠나는 아씨를 보고 구슬프게 옥피리를
불어준다는 가락의 뜻으로 지어진 것이다.
그리고 반복하여 '아리낭'이라고 한 것은 애타게 다시 아리 낭자를 사모하는 뜻에서 강조된 내용이다.
'고개로(高皆路)' 하는 것은 높고 언덕진 고원의 여러 길로라는 뜻이다.
'염어간다(念御看 )'라는 말은 아비를 애틋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후일에 모실 것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다시 두 번째 구절을 싣고 풀이해 보기로 한다.
나아할(奈我割) 발리고(發離苦) 가시난임(可視難任)
십리도목가서(十里到鶩可徐) 발병난다(發病難多)
'나아할(奈我割)'이란 내가 어찌 이 지경이 되도록 이그러졌는가라는 뜻이다.
'발리고(發離苦)'라는 말은 고생길로 떠난다는 말이다.
'가시난임(可視難任)'이란 언제 임을 다시 보고 만날 수 있을까라는 뜻이다.
'십리도목가서(十里到鶩可徐)'라는 말은 십리길도 채 도달하지 못하고라는 뜻이다.
이 말은 아장아장 걷는 집오리가 멀리 갈 수 없는 것처럼 힘든 길을 갈 수 없는 것을 뜻한다.
'발병난다(發病難多)'라는 말은 어려움이 많아 병이 날 것이다라는 애절한 가사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부언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노래 가사로 부르는 아리랑의 음은 본래 아리낭에서 유래
되었다.
아리낭은 노래 가사로 부르면서 아리랑으로 음이 변형된 것이다.
물론 아리랑(阿里浪)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것은 단지 고향을 떠나면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리낭(阿里娘)이라고 하는 것은 젊디 젊은 어린 계집아이가 아리(阿里)의 고향을 떠난다는
슬프고 슬픈 사연이 담긴 한자 특유의 깊은 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리낭 아리낭' 하는 음이 그대로 내려오면서 음이 아리랑으로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허황옥의 고향은 보주(普州)로 되어 있다.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밑에 있는 안악현(安岳縣)이다.
허황옥은 아리(阿里)지역에서 일차적으로 1만 리(4,000㎞)나 되는 곳으로 피난 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리에서 보주(普州)까지 오는 길은 그야말로 험하고 험난한 산과 강, 그리고 언덕길이다.
아리(阿里) 땅인 혁길나포(革吉那布)지방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개칙(改則)을 거쳐야 한다.
개칙에서 동착(洞錯)으로 내려와 애색( 色)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애색에서 동으로 니마(尼瑪), 다시 동으로 반과(班戈)로 해서 나곡(那曲)을 지나야 한다.
나곡에서 다시 가려(嘉藜)를 거쳐 파밀(波密)을 지나 망강(芒康)을 향해 동으로 행한다.
이렇게 하여 서장성(西藏省)을 빠져나와 사천성(四川省) 서쪽인 파당(巴塘)에 도착한다.
다시 동으로 이당(理塘)으로 나와 강정(康定)에 도착한다.
강정에서 동으로 아안시(雅安市)를 거쳐 홍아(洪雅)에 이르게 되고 다시 미산(眉山)을 지나게 된다.
미산에서 인수(仁壽)를 거쳐 자양(資陽)에 이르고 자양에서 간양(簡陽)으로 나와 낙지(樂至)에 이른다.
낙지에서 동으로 접어들어 보주(普州)인 안악(安岳)에 도착한다.
허황옥이 일행들과 함께 서장성 고원지대를 낙타를 타고 갔는지 걸어갔는지는 모르나 몇 년이 걸려
사천성 보주인 안악현(安岳縣)까지 갔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서장성에서는 강을 타고 사천성까지 갈 수가 없다.
서장성에서 흘러내리는 모든 강줄기는 사천성을 지나지 않고, 태국·버마 국경지대를 거쳐 해남도(海南島)
가 있는 남해(南海)로 이르기 때문이다.
일단 보주 지방에 와서 얼마간 머물다 다시 배를 타고 강줄기를 따라 내려왔을 것으로 보인다.
허황옥은 보주(普州)에서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무한(武漢) 밑에 있는 구강(九江)까지 와서 상해 쪽으로
빠지지 않고 남창(南昌)으로 해서 임해(臨海)로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남창(南昌)에서 복건성(福建省)인 복주(福州)까지 와 바다를 거슬러 임해(臨海)가 있는 북쪽
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임해는 절강성(浙江省)의 요항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김해부(金海府)는 바로 절강성 임해군(臨海郡)으로 되어 있다.
보주태후가 임시고향인 사천성(四川省) 안악현(安岳縣)에서 장강을 타고 내려왔음을 잘 증명해 준다.
허황옥이 인도에서 한반도 김해까지, 신하인 신보(申輔)와 조광(趙匡) 두 사람과 그들의 처인 모정(慕貞)
과 모양(慕良) 두 사람 등 20여 명과 함께 돌배를 타고 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비단과 비단 의상, 금, 은, 옥, 장신구 등을 싣고 머나먼 인도양(印度洋)을 거쳐 남태평양(南太平洋)
을 지나 경상도 김해까지 왔다고 한다면 삼척동자도 믿지 않을 것이다.
허황후가 바다를 건너왔다고 하여 부해(浮海)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떠내려왔다는 뜻이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인도에서 배를 타고 인도양을 지나 말레이시아 해협을 통과하여 남해(南海)를
거쳐 상해(上海) 앞바다인 동해(東海)까지 오려면 고도의 항해술이 필요하다.
배를 타고 바다로 떠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아유타국인 서장성 아리 지방에서 인도로 내려온다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허황후의 비문에서 보다시피 아유타국의 공주가 보주(普州)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아서, 아유타
국은 분명히 서역이었으므로 서역에서 사천성 안악현까지 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도로 내려가 배를 탄 것이 아님은 분명해진다.
허황후의 고향이 보주(普州)라 했는데, 보주는 분명히 사천성 안악현 이다.
안악현이 고향이라고 한다면 보주는 아유타국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천성 보주는 아유타국이 아니다.
그렇다면 보주는 허황후의 제2의 고향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유타국은 서역이기 때문이다.
서역에서 보주인 안악현까지 왔음을 입증하고 있다.
15세기경 일본인들이 지도를 제작하면서 다섯 천축국을 인도에 옮겨놓았다.
그리고 현재 한국의 바다인 동해(東海)를 일본해(日本海)라고 한 것도 모두 일본인들이 지도를 만들 때
고의로 옮긴 것이다.
고지도(古地圖)를 보면 현재의 일본해(日本海)는 이름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황해(黃海)는 분명히 동해(東海)로 표기되어 있다.
이상의 정황을 보아서 허황옥은 한반도 김해에 온 사실조차 없음을 알 수 있다.
허황옥의 고향이 인도가 아니고 중천축국인 아유타국 아리(阿里)였으므로 당연히 서장성에서 사천성
으로, 사천성 안악에서 강을 타고 내려왔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절강성(浙江省)인 임해군(臨海郡)이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김해부(金海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으로 보아 숱한 애환과 사연이 실린 아리랑은, 허황옥과 끊을 수 없는 인연으로 역사에 길이
길이 숨쉬며 흘러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허황후의 묘비문
가락국 보주(普州) 허태후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허황옥의 족보 기록에 의하면 아유타국(阿踰 國) 왕의 딸이다.
금관(金官)국 고사(古事)에 의하면 남천축국(南天竺國)의 임금의 여식이다.
혹 다른 기록으로는 서역(西域)에 있는 허씨 나라의 여식이다.
또는 허황(許黃)의 나라라 했다.
즉 남천축국의 변방에 있는 나라라 했다.
그 나라는 유일하게 제후국으로서도 하나의 나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 나라는 고대(古代) 중국에 있었던 은(殷:商)나라와 양(梁)·위(魏)·사(邪)나라들의 먼 후손이다.
전하는 말로는 뿌리가 같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선대들의 기록에 의한다면 아유타국은 임군의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허황후는 선조들의 명에 따라 동쪽 땅에 있는 가락국(駕洛國)의 임금이었던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것
이다.
그녀는 바다와 같은 강을 타고 떠내려가 이른 곳이 가락국이다. 그리하여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
호왈 보주태후(普州太后) 또는 황옥부인(皇玉夫人) 보조(普照)라고 한다.
동한(東漢:後漢) 광무제(光武帝, A.D.25∼56년) 24년이다. 김수로왕이 등극한 지 7년이었다.
동한(東漢) 영제(靈帝, A.D.168∼172년) 6년 3월에 태후는 죽었다. 이때 나이는 157세였다.
태후에게는 아들이 열 명 있었는데 태후의 성을 직접 받은 아들은 두 사람이었다.
후에 각각 봉작을 받은 땅에서 살았다. 공암(孔巖)과 하양(河陽)의 성씨는 다른 부족으로 느껴졌으나,
실은 같은 성씨인 허씨(許氏)였다.
태후의 묘지는 수로왕릉의 묘지에서 1리에 있었다.
보주태후의 묘비문에서 음미해야 할 대목은 아유타국의 본래 선조는 은상(殷商)으로부터 양(梁)나라와
위(魏)나라, 그리고 사(邪)나라를 통해, 남천축국의 남쪽에 아유타국이 생겼음을 나타내고 있다.
아유타국의 조상은 고대 은(殷)나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묘비에는 적고 있다.
그렇다면 남천축국의 제후국이었던 아유타국이 인도에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보주태후 묘비문에서 보면 천축국의 군신이 여자라 했다.
이것은 아유타국 나라가 천축국의 소속임을 뜻한다.
후한(後漢) 때라면 지금으로부터 1,972년에서 1,941년 전이다.
이때는 인도에 불교(佛敎)가 전파되지 않았는데, 당(唐)나라 때 불교가 인도로 건너갔다고《오백나한
(五百羅漢)》이란 책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가락국 보주태후의 묘비문에서 주의깊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천축국은 은상
(殷商, A.D.220∼265년)나라와 양(梁, A.D. 502∼557년)에 이르고 다시 사(邪:양나라의 제후국)나라
에서 천축국으로 발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인도에 불교가 전파되기 이전에 이미 서역에 다섯 천축국〔五天竺國〕이 있었음을 뜻한다.
(律坤著「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지 않았다」참고)
천축국은 불교 나라이다. 불교 나라의 제후국이었던 아유타국의 공주(公主)로 태어난 사람이 보주태후
허황옥이다.
금관가야(金官加耶)
금관가야는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하며, 김수로왕(金首露王)이 시조로 되어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금관가야가 있던 김해부(金海府)는 임해군(臨海郡)으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김해부(金海府)를 임해현(臨海縣)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 35대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쳐 의안군(義安郡)이라 했으며, 고려 왕조 6대 성종(成宗, A.D.981∼997년)
14년 을미(乙未) 때, 이름을 고쳐 금주(金州)라고 했으며, 8대 현종(顯宗, A.D.1010년) 무오년(戊午年)에
금주(金州)를 완포현(莞浦縣)이라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래 고려 완포현은 부곡(部曲)을 이대산천(二大山川)과 읍을 합쳐 분산부(盆山府)로 고치고, 부(府)에
살던 사람들은 진산(鎭山)이라 했다.
이곳에는 신어산(神魚山)이 있었고, 좌편 동쪽 큰 강가에는 뇌진(磊津)이라는 나루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뇌진나루는 해양강(海陽江) 가에 있다는 것이다.
해양강은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휴령현(休寧縣) 동쪽 13리 해양현(海陽縣)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강소성(江蘇省) 옛 양주(楊州)의 경계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야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명은 구지봉(龜旨峰)이다.
구지봉은 구산(龜山)이며 또는 구봉산(龜峰山)을 뜻한다.
이곳은 강소성(江蘇省) 무진현(武進縣)과 동산현(銅山縣)이라고 되어 있다.
한편 구산(龜山)은 절강성(浙江省) 순안현(淳安縣)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절강성 순안현은 한(漢)나라 때 흡현( 縣) 땅이다.
삼국(三國)의 오(吳)나라 때 신라(新羅)가 두었던 곳이라고 적고 있다.
수(隋)나라가 이름을 고쳐 신안(新安)이라 했으며 다시 고쳐 치산(雉山)이라 했다가 당(唐)나라 때 이름을
고쳐 다시 신안(新安)이라 했다.
오대(五代) 때 송(宋)나라가 이름을 고쳐 순화(淳化) 또는 순안(淳安)이라 했다가, 명(明) 청(淸)나라 때
절강성 엄주부(嚴州府)에 속하게 하였다. 이곳은 절강성 금화(金華)의 길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서(史書)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참고해보면, 구산(龜山)이나 구봉산(龜峰山)에 구지봉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절강성 김해부가 있던 임해시(臨海市)에 있으며 같은 절강성 땅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김해와 전라도 여수가 가까이 있듯이, 절강성에도 여수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믿음이 간다.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駕洛國)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국은 16나한(十六羅漢)이 살던 땅이라고 했다.
然而秀異 可爲十六羅漢住地
16나한은 후한 광무제 때의 도통자(道通者)들이다.
나한(羅漢)들이 살던 동리를 나한동(羅漢洞)이라 한다.
이곳은 절강성(浙江省) 낙청현(樂淸縣) 안탕산(雁蕩山) 영봉(靈峯) 아래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명 관음동(觀音洞)이며, 그곳은 승려들이 관세음(觀世音)을 받드는 곳이라 했다.
동리 가운데에는 8층 높이의 누각이 우뚝 서있으며 올라가는 계단이 377개라 했다.
동리 가운데에는 큰 대전(大殿)이 있는데 그 넓이는 1천 명을 수용할만한 넓은 곳이다.
동리 꼭대기에는 우물이 있어 맑은 물이 마치 날듯이 수려하게 아래로 떨어진다고 되어 있다.
왼쪽 전각 옆에도 구슬 같은 맑은 옥수가 있고 그 옆에는 세심천(洗心泉)이 있다.
그리하여 그 물이 연못을 이루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53쪽 참고).
가야가 개국한 2년 계묘(癸卯) 봄 정월, 김수로왕은 도읍지(京都)를 정한다.
그리하여 가야국의 임시 궁궐을 세우고 남쪽에 새로 개간한 논과 밭을 경작하기로 하였다.
이곳은 네 곳의 망산옥(望山獄)이 바라보이는 곳이라 했다.
좌우의 신하들이 고하기를 이곳은 너무 협소하기는 하지만 여뀌라는 일년초 풀잎이 있어 논밭 농사를
짓는 데는 아주 좋은 곳이라 하였다.
이곳은 낙청(樂淸)이라는 곳으로 절강성 임해군 남쪽 낙청만 포구에 있다.
이곳은 낙성(樂成)이라고 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북안탕산(北雁蕩山)이 있는 곳이다.
온주만이 있으며 온주시(溫州市)의 동북부에 위치한 낙청현(樂淸縣)이 있다.
바로 이곳이 16명의 나한들이 살던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양주(良州)를 김해소경(金海小京)이라 했다. 고금관국(古金官國)이며,
가락국(伽落國) 또는 가야(伽耶)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양주(良州)는 본시 양(良)나라이다.
양나라는 춘추(春秋)시대 땅이름이다.
《좌전》에 의하면 소공 16년, 진(晉, AD. 265∼420년)나라의 후국이었던 회오자(會吳子)인 우량(于良)
이 한(漢)나라 때 두었던 양성현(良成縣)에 도읍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한(漢)나라의 제후국인 양성후국(良成侯國)이다. 후한(後漢, AD. 25∼220년) 때 양성현(良成縣)은
북제(北齊, AD. 550∼577년)의 성(省)이었다.
옛 성(城)은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비현( 縣) 북쪽 60리이다.
강소성 비현은 산동성(山東省) 남쪽과 접경지대이다.
안휘성 북부와 강소성, 그리고 산동성이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신라(新羅) 23대 법흥왕(法興王, AD. 511∼536년) 19년인 기원후 530년에 가야국의 백성들이 항복해
왔다.
가야국 10대 구해왕(仇亥王)은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 AD. 537∼572년) 12년에 항복했으므로
가야가 망하기 19년 전에 가야국 백성들이 법흥왕에게 항복했다는 기록이다.
양주(良州) 지역이 김해소경(金海小京)이며 고금관국(古金官國)이었으며 가야국이었으므로 이 지역을
금관군(金官郡)이라 했다.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 AD. 658∼677년) 20년, 당(唐)나라 영융(永隆, AD. 680∼681년) 원년(元年)
에 소경(小京:작은 서울)이라 했다.
신라 35대 경덕왕은 소경을 고쳐 김해경(金海京)이라 했으며 그 당시(신라 경덕왕 당시, AD. 739∼761년
때를 말함) 금주(金州)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97년을 기준했을 때 1,347년 전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금주(金州)가 섬서성 안강현(安康縣)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34권 잡지 제3 지리지 1편에서는 양주(良州)가 금관국 가야인 김해경 금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가 만들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850년 전이다.
그러나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이 만들어진 것은 1931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불과 67년 전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명이 훨씬 정확하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삼국사기의 지리지편이 맞다고 한다면 가야국의 수로왕이 처음 도읍한 곳이 금관국인 김해소경
(金海小京)이었으므로, 강소성 양성현임은 두말할 나위없다고 보아진다.
그러므로 가야국은 도읍을 옮겼음이 분명하다. 삼국유사에서 김해부(金海府)가 절강성(浙江省) 임해군
(臨海郡)임을 확실히 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서 수로왕은 양주(良州)에 도읍을 정한 후, 다시 도읍지를
절강성 임해군인 김해부로 옮겼음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강소성 양성현(良成縣)인 비현( 縣)은 내륙으로 바다가 없다.
그런데 허황옥이 망산도 앞바다로 왔다 했으므로 김수로왕이 앞바다 가까이 마중을 나간 것으로 보아서
도읍지는 분명히 바닷가 근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본문 양주(良州)편에서 보면 신라 법흥왕(法興王, AD. 511∼536년) 19년에 가야 백성들이 신라에 항복
해 왔다는 것을 보아 그 당시 가야가 망하기 전에 옮긴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김수로왕의 등극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AD. 25∼56년) 18년이라 했으므로 기원후 43년에 가야
국이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신라 법흥왕 19년이면 기원후 530년이다.
그렇게 본다면 가락국이 세워진 뒤 487년 후에 양주(良州)에 있던 가야국 백성들이 항복했다는 얘기다.
가야국이 망한 해는 법흥왕 19년이므로 가야국이 망할 때 가야국인 금관국(金官國) 금주(金州)가 양주
(良州)였던 현재의 강소성 비현( 縣)에 있었다.
그후 여기서 망했다면 본시 절강성 임해군이 있는 김해부(金海府)에서 도읍한 후 망할 무렵에 강소성
양주인 비현으로 도읍지를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하간 도읍지를 절강성 임해군에서 강소성 양주였던 비현으로 옮긴 후 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니면 강소성 비현에서 도읍한 후 절강성으로 옮겼다가, 먼저 도읍한 강소성 양주인 비현으로 다시
도읍지를 옮긴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고령가야(古寧加耶)
고령가야가 있던 곳은 삼국유사에서 보는 것처럼 함녕(咸寧)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고령군(古寧郡)이 본래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이다.
신라가 빼앗아 가진 땅이다.
고령가야국을 한편 고동람군(古冬攬郡)이라 했으며 일명 고릉현(古陵縣)이라 했다.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A.D. 739∼761년) 때 지명을 바꾸어, 고릉현을 함녕군이라 했다.
당시 한반도에는 한자(漢字)로 된 지명이 없었다.
고려 2대 혜종(惠宗, A.D.979년) 이후부터 한반도에 하나둘씩 행정에 필요한 한자 지명이 옮겨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6대 성종(成宗, A.D.1017년)과 8대 현종(顯宗, A.D.1046년) 때에 한반도에 한자로 된 지명이
본격화되었다.
이때는 거란(契丹, A.D.907∼947년)의 침공이 극심해져, 대륙에 있던 고려(高麗)는 한반도에 한문자의
지명이 행정상 필요함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지명을 옮기는 것을 볼 수 있다.
(《해동역사》지명 참고,《동국여지승람》참고)
그후 27대 충숙왕(忠肅王, A.D.1350년) 때에 한반도의 행정상 지명이 거의 모두 한자 식으로 바뀌었다.
함녕군(咸寧郡)을 중국고금지명대사전(603쪽)에서 찾아보았다.
㉠ 함녕군은 곧 함녕현이다. 북주(北周, A.D.557∼581년) 때는 만년현(萬年縣)이라 했다.
신라 35대 경덕왕보다 182년이나 앞서 정해진 곳이다.
함녕현은 장안(長安)과 경성(京城)을 함께 합쳐서 다스리던 곳이다.
수(隋, A.D.589∼618년)나라 때 이름을 고쳐 대흥(大興)이라 했다.
당(唐)나라 때 지명을 다시 부활시켜 만년(萬年)이라 했다.
그러다 다시 이름을 고쳐 당나라는 함녕이라 했다.
그리고 다시 고쳐 만년이라 했다가 오대시(五代時) 양(梁, A.D.907∼923년)나라는 대년(大年)이라 했다.
그후 후당(後唐, A.D.923∼936년) 때 다시 만년(萬年)이라 했다.
송(宋, A.D.960∼1279년)나라 때는 번천(樊川)이라 했다.
그러나 금(金, A.D.1115∼1234년)나라 때 와서 신라 경덕왕과 같이 함녕현(咸寧縣)이라고 본래의 이름
대로 고쳤다.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때 와서는 장안현(長安縣)과 섬서성(陝西省) 서안부(西安府)와 함께 합쳐서
다스렸다가, 중화민국 때 와서 폐지시키고 장안현(長安縣)이라고 했다.
㉡ 함녕현(咸寧縣)은 후위(後魏, A.D.386∼581년) 때 영녕현(永寧縣)이라 했으며 특히 서위(西魏, A.D.
535∼556년) 때 이름을 고쳐 태평(太平)이라 했다.
수(隋)나라 때 이름을 다시 고쳐 함녕(咸寧)이라 했고, 북송(北宋, A.D.420∼479년) 때는 섬서성(陝西省)
의천현(宜川縣) 동북 100리에 성(省)으로 두었다.
㉢ 한(漢, B.C.206∼A.D.220년)나라와 진(晉, A.D.265∼420년)나라 때 사이(沙 :漢나라 때 湖北省
武昌縣 서남쪽)와 악현(鄂縣:漢나라 때 楚나라 鄂王의 옛 도읍지. 이곳은 호북성 악성현이다)을 동시에
다스렸다.
당(唐)나라 때는 영안진(永安鎭)이라 했으며, 삼국시(三國時) 오(吳, A.D.222∼280년)나라가 이름을
고쳐 영안장(永安場)이라 했다.
남당(南唐, A.D.618∼907년) 때 승격시켜 현(縣)으로 했다고 적혀 있다.
북송(北宋, A.D.420∼479년) 때에 이르러 함녕(咸寧)이라 했으며, 청(淸)나라 때는 호북성(湖北省)
무창현(武昌縣)에 두었다.
위의 기록을 보면, 고령가야가 호북성이나 섬서성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가야
대가야(大加耶)
대가야는 고령(高靈)으로 되어 있다. 고령의 지명에 대해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본래 대가야국(大加耶國)이다.
시조는 이진아시왕(伊珍阿 王) 혹은 내진주지왕(內珍朱智王)이다.
도설지왕(道說智王) 때까지 무려 16대 왕에 걸쳐 520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신라(新羅) 24대 진흥왕
(眞興王,A.D.537∼572년) 때 침략을 당해 멸망했다는 기록이다.
그후 대가야가 있던 땅을 대가야군(大加耶郡)이라 했다.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A.D.739∼761년) 때 망한 대가야를 고령군으로 삼고 두 현(縣)을 두었다.
이곳은 야로현(冶爐縣)과 신복현(新復縣)이다.
야로현은 본래 적화현(赤火縣)이다.
신복현(新復縣)은 본래 가시혜현(加尸兮縣)이었다.
그러나 경덕왕이 지명을 고친 후부터 이 지역들이 현재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적고 있다.
경덕왕이 고친 이름이 야로현이라 했으므로, 한국 땅에는 없는 지명이다.
그럼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통해 알아보자.
야로현(冶爐縣)은 야로성(冶爐城)임이 분명하다.
이곳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367쪽에에 보면 하남성(河南省) 서평현(西平縣) 75리로 되어 있다.
소가야(小加耶)
소가야는 고성(固城)으로 되어 있다.
고성군은 본래 고자국(古自國)이다. 문화량현(蚊火良縣), 사수현(泗水縣), 사수현(泗水縣)이 속해있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위의 지명을 찾아보았다.
固城. 在江蘇高淳縣南三十里
泗水縣. 春秋時魯卞邑. 漢置卞縣. 後魏省. 隋改置泗水縣. 明淸皆屬山東 州府
泗州. 在江蘇省宿遷縣東南
고성은 강소성 고순현 남쪽 30리에 있다. 사수현은 춘추시대 때 노나라가 변읍이라 했다.
한나라 때 변현을 두었다.
후위 때는 성을 두었다. 수나라 때 이름을 고쳐 사수현이라 했다.
명·청나라 때는 산동성 연주부에 속했다.
사주는 강소성 숙천현 동남에 있다.
이를 통해 보건대, 대가야는 산동성, 강소성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성산가야(星山加耶)
지금의 경산(京山)이며, 한편 벽진(碧珍)이라고 되어 있다. 경산(京山)을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찾아
보았다.
경산은 본래 경산부(京山府)이다.
경산은 호북성(湖北省) 경산현(京山縣)이다.
아라가야(阿羅加耶)
일명 아야(阿耶)라고 한다.
지금의 함안(咸安)으로 되어 있다.
본래 아시량국(阿尸良國)으로 되어있으며, 한편 아나가야(阿那加耶)로 불린다고 했다.
현무군(玄武郡)과 의령현(宜寧縣)이 이에 속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현무군은 본래 소삼현(召 縣)이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의 소삼부곡(召 部曲)이다.
의령현(宜寧縣)은 본래 장함현(獐含縣)이라 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현무군을 찾아보았다.
현무군은 삼국(三國) 촉(蜀)나라 때 오성현(五城縣)이다.
후위(後魏) 때 현무군(玄武郡)이라 했다.
수(隋)나라가 폐지한 후 다시 이름을 고쳐 현무(玄武)라 했다.
송(宋)나라가 이름을 고쳐 중강(中江)이라 했는데,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중강현(中江縣)이다.
숭선전지(崇善殿誌)에 기록된 가야건국
숭선전지(崇善殿誌)는 김해 김씨 집안의 역사서이자, 경전과도 같은 책이다.
숭선전(崇善殿)이란 한민족의 최초 조상인 환인씨(桓仁氏)로부터 삼황오제(三皇五帝) 이후 역대로,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전각을 말한다.
삼황(三皇)이란 천황(天皇, B.C.8479년)·지황(地皇, B.C.8364년)·인황(人皇, B.C.8247년)이다.
오제(五帝)는 유소씨(有巢氏:일명 桓雄氏, B.C.3898년)·수인씨(燧仁氏, B.C.3739년)·복희씨(伏羲氏,
B.C.3512년)·신농씨(神農氏, B.C.3071년)·황제씨(黃帝氏, B.C.2679년)이다. .
기자조선(箕子朝鮮) 때는 숭인전(崇仁殿)이라 했고, 고구려 동명왕(東明王) 때는 숭령전(崇靈殿)이라
했다.
신라 혁거세(赫居世) 때는 숭덕전(崇德殿), 신라 4대 탈해왕(脫解王, A.D.56∼78년) 때는 숭신전(崇信殿)
이라 했다.
그리고 알지왕(閼智王),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과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 때는 숭혜전(崇惠殿)
이라고 했다.
그리고 백제 온조왕 시절에는 숭렬전(崇烈殿)이라 했고, 고려 태조왕건 때는 숭의전(崇義殿)라 했다.
그러므로 가야국의 숭선전까지 8대전으로,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숭선전에는 머리말에서부터 후서(後敍:뒤에 기록한다는 뜻)가 있고, 숭선전지서(崇善殿誌序)의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숭선전지》의 목차가 시작된다. 목차에는 도판(圖版:도록으로 된 판)이 있고 사진으로 된 능의
도표와 왕묘, 그리고 제각 등이 수록되어 있다.
《숭선전지》의 제1권은 가락국기(駕洛國記)로 시작하여,
제2권은 여러 가지 통문(通文:신하들의 상소문 같은 것)이 있다.
제3권에는 각종 제문(祭文:제사 때 올리는 글)과 여러 가지 상량문(上樑文:집을 지을 때 들보를 올리는
글)을,
제4권에는 관문(關門:중요한 요처의 글)이 있고,
제5권에는 여러 곳의 전각이 배치된 곳을 싣고 있다.
그리고 끝장에는 속편에 부록으로 실은 제1권으로 광무(光武) 7년부터 기록하고 있다.
광무 7년이면 후한(後漢:東漢) 때이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A.D.25∼56년)는 이름이 유수(劉秀)이며
연호는 건무(建武)라고 되어 있다. 광무 7년은 후한 광무제 32년이란 뜻이다.
가락국의 기록은 후한 광무제 32년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숭선전지 머리말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을 보면 김해부(金海府)라고 되어 있다.
김해부(金海府)는 필자가 앞서 밝혔듯이, 대륙의 절강성(浙江省) 임해군(臨海郡)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김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은 남천축의 아유타국(阿踰 國) 왕의 딸이라고 되어 있다.
필자가 전술한 바와 같이 서장성과 인도와의 접경지대가 아리(阿里)이다. 아유타국이 있던 곳이다.
이곳이 남천축국이다.
본래 천축국은 신강성 동북부에서 시라일다(尸羅逸多)라는 왕이 세운 것으로 강대해지자 다섯 천축국
으로 나누어졌다.
서장성과 청해성(靑海省) 서쪽지역과 신강성(新疆省) 일대가 모두 옛 천축국이었다
사서에서 아(阿)자는 본래 언덕이라는 뜻이다.
사막이 많고 돌이 많으며 거친 땅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의 글자가
아(阿)자이다. 아자를 보면 금방 서역(西域)임을 알 수 있다.
아리(阿里) 아라(阿羅) 아슬라(阿瑟羅) 아미타불(阿彌陀佛) 아유타(阿踰 ) 등은 주로 사막이 옆에 있는
언덕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들이다.
한국에는 모래와 사막과 언덕이 없기 때문에 아(阿)자가 붙을 만한 곳이 없는데, 유독 아현동(阿峴洞)에
아자가 붙어있으나 모래와 사막이 있는 언덕이 아니므로 후에 갖다붙인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허황옥의 호(號)는 보주태후(普州太后) 또는 보조태후(普照太后)라고 했다.
보주(普州)는 사천성 안악현(安岳縣)이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또 수로왕의 묘지인 왕릉과 허황옥의 왕릉은 구지봉(龜旨峯)의 산 동쪽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숭선전지 서문 24페이지에서 보면 가야국의 계통은 삼한(三韓)이 오가야(五伽耶)의 종주국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무릇 491년 간 지속되어 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후한(後漢) 건무(建武:光武帝, A.D.25∼56년) 당시 신라와 더불어 삼한(三韓)의 왕통에서 시작되었
다고 적고 있다.
숭선전지 첫권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개벽 후 나라가 아직 서지 아니했고 나라이름이 없을 때 군신이 없는 신라의 칭호를 간(干)이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임군이 없었을 때 제후들의 칭호에 무조건 간(干)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도간(我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명의 추장(酋長) 등이 모여, 백성들 중에 뽑은 영수와 백성 100여 명과 함께 모여 가야 왕을 선출
하는 문제를 의논했다는 기록이다.
그때 백성 7만 5천 명은 도시 외곽의 산야에서 논밭을 경작했다고 한다.
숭선전지 1권 5쪽에 보면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 18년 임인년(壬寅年) 계욕( 浴:목욕하고
푸닥거리를 뜻함)일에 북쪽에 있는 구지봉(龜旨峯)에서 이상한 소리와 함께 상스러운 기운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형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지 사람의 소리는 분명했다.
구간(九干:아홉 명의 한국인. 즉 대표자격)들이 대응하기를 여기는 구지(龜旨)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 말하라고 하자 하늘에서는 너희들에게 명령을 내린다고 했다.
그때 구지봉에서는 다음과 같은 노랫소리가 터져나왔다.
구하구하(龜何龜何:거북아! 거북아!)
수기현야(首其現也:머리를 내밀어라)
약불현야(若不現也:만약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번작이끽야(幡灼而喫也:이글거리는 불에 구워먹겠다)
이와 같은 뜻으로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춤과 노래를 불렀다고 되어 있다.
그 당시 하늘에서는 이상한 자색 빛이 나타나더니 그 빛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곳에 불그스레한
황금알 여섯 개가 둥근 해처럼 놓여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놀라면서도 기뻐하며 여러 번 절하여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아도간(我刀干)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알을 안고 집에 가져왔다.
그후 여섯 알이 화하여 동자가 되었고, 그들이 각각 여섯 가야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인데, 알〔卵〕
이라는 것은 가장 핵심을 뜻한다.
게다가 황금알이라고 했으므로 군신의 자손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알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대륙의 북쪽 방향에서 남쪽 대륙으로 내려온 것을 뜻한다.
그리고 9간으로 대표되는 인근의 제후들이 모여 가야국의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행사를 구지봉 주위
에서 행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김수로왕의 나라이름은 대가락(大駕洛)이라고도 하며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 했는데 여섯 가야 중에
하나이다라고 했다.
나머지 다섯은 각각 다섯 가야의 주인이며, 동쪽으로 황산강(黃山江)이 있고 서남으로는 창해(滄海:
차디찬 바다.
즉 東海를 뜻함)가 있고 서북으로는 지리산(智異山)이 있으며, 동북으로는 가야산(伽耶山)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지리산(智異山)은 지금 중국 대륙의 지주(智州)가 있는 곳이다.
지주에 있는 지이산은 광서성(廣西省) 울림현(鬱林縣)과 하지현(河池縣) 동쪽이다.
황산강(黃山江)이라는 강 역시 한국에는 없는 강이다.
여기서 황산강(黃山江)은 안휘성 남부에 있고 황산에서 상해 동쪽으로 흐르는 샛강인 듯하다.
지금 한국의 김해를 가야국으로 보았을 때 동쪽인 부산쪽에는 황산이나 황산강이 있을 리 없다.
현재 중국 지도에는 상해시(上海市) 주변에 황강(黃江) 황포(黃浦)라는 강과 포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황산강은 안휘성에 있는 황산(黃山)에서 동으로 멀리 뻗어 흘러간 강으로 보인다.
고려 태조(太祖, A.D.918∼942년) 5년 경자(庚子) 때 다섯 가야의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금관(金官)은 김해부(金海府). ㉡고령(古寧)은 가리현(加利縣).
㉢비화(非火)는 창녕(昌寧) 또는 고령(高靈).
㉣아라(阿羅)를 성산(星山)으로 했다는 기록이다.
성산을 혹 벽진가야(碧珍加耶)라고도 했다.
숭선전지에 기록된 가야지명
숭선전지는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기록을 참고하여 산천(山川)·궁실(宮室)·불우(佛宇)·능묘(陵墓)·
고적(古蹟)·인물(人物) 등으로 되어 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지명이다.
감로사(甘露寺)
숭선전지에 나타나는 감로사(甘露寺)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의하면 대륙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 북쪽 산인 북고산(北固山)에 있다고 적고 있다.
감로사는 오(吳)나라 때 손권(孫權:大帝, 연호는 黃武, A.D.222∼229년)이 설치했다.
그리고 당(唐)나라 때 이덕유(李德裕)가 절터를 다시 증개축하면서 창건된 절이 감로사이다.
택지를 조성할 때 땅에서 달콤한 단물이 나온다고 하여 감로사(甘露寺)라고 이름지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후 청(淸)나라 성조(聖祖)였던 강희(康熙:이름은 玄燁, A.D.1662∼1722년) 때 이름을 고쳐
초안사(超岸寺)라고 했다고 한다.
또다른 곳은 섬서성(陝西省) 화현(華縣) 동남으로 8리에 있는 소화봉(少華峯) 서쪽에 당(唐)나라 장교
(張喬)와 정곡(鄭谷)이 함께 놀러왔다가 감로사(甘露寺)에 대한 시(詩)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고 적고
있다.
이 시의 감로장조에 보면 사천성(四川省) 자중현(資中縣) 서북 50리에 통라천정로(通羅泉井路)라는
곳에 감로사(甘露寺)가 있으며, 당나라 승려였던 진덕(眞德) 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절 옆에 있는 샘물은 병을 고치는 물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감로사(甘露寺)가 있는 곳에 신어산(神魚山)이 있으며,
이곳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옥지연(玉池淵)이란 연못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감로사가 있는 곳에는 신어산(神魚山)이 있고, 신어산 가까운 곳에는 옥지연이란 연못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송(宋)나라 이종(理宗:趙 , A.D.1225∼1264년) 가희(嘉熙, A.D.1237∼1240년) 원년에
승려인 해안(海安) 스님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후 몽암(蒙庵) 스님이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구암사(龜巖寺)
구암사(龜巖寺)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구암사 십선사(十善寺) 청량사(淸凉寺)는
신어산(神魚山)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신어산은 감로사(甘露寺)에 있다는 기록을 보았다. 감로사는 신어산에 있다 했으며 감로사는 지금
대륙의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 북고산(北固山)이라 했다. 북쪽에 있는 고산(固山)인지 북고산
(北固山)인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북고산을 찾아보기로 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83쪽에 북고산이 있었다.
이곳은 강소성(江蘇省) 단도현(丹徒縣) 북쪽 1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지형으로는 산이 우뚝 솟은 입구에서부터 강으로 이어져 삼면(三面)이 물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이곳에는 황금색과 붉은 색의 두 산이 나란히 있고 경치가 수려해 사람들이 말하기를 삼산(三山), 즉
세 개의 산의 서울이란 뜻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산 아래에 다다르면 큰 강이 있고 산세와 강물이 험난하고 견고하여 양(梁)나라 무제(武帝, A.D.502∼
519년, 이름은 숙연, 연호는 천감)가 산에 올라 오래도록 서 있다가 말하기를, 산 준령으로서 자태를
지키는 것은 부족함이 없구나. 과연 서울인 도읍지다운 입구는 실로 장관이로다라고 했다고 한다.
산봉우리에는 용왕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송(宋)나라 때 한세충(韓世忠)이 군사를 파견해 사당에
매복해 있다가 중원에서 온 왕출(王出)을 굴복시켰다고 적고 있다. 진강현(鎭江縣)은 진강시로 되어
있고, 강소성 남쪽으로 지금의 남경시(南京市)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중국 지도에 남경시 동쪽에 있는 진강시(鎭江市)에는 감로사가 있고 신어산(神魚山)도 있으며,
구암사·십선사·청량사, 그리고 운점산(雲岾山)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진국사(鎭國寺)와 명월사(明月寺)도 진강현 주변인 명월산(明月山)에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첫댓글 오호!!
저의 비합리적 비이성적 의심에서...
한국의 고대사가 수메르의 점토판에 대한 시친의 지구연대기가 상상됩니다...
히야!
무지의 꼴통
오래 잠겨 있는 자물통 열쇠를 찾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