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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tDwMKkNeYk?si=ry1z62qIMT_4hRiI
Mstislav Rostropovich - Bach Cello Suite No 5 in C minor BWV 1011
제5모음곡 다단조 BWV1011
이 모음곡에는 제1현을 A음에 조현한 것과 G에 조현한 것의 두 가지 원고가 있다. 거기에 따라서 일부의 음이나 운지법에 차이가 나타나지만 작품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아니다. 제 1곡의 전주곡은 느긋하고 무게 있는 기분의 4분의 4박자의 서주와 8분의 3박자의 활발한 부분으로 구성된 이른바 프랑스풍 서곡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어지는 춤곡 부분은 제5곡이 가보트(제1, 제2, 제1로 연주된다)인 것 외에는 다른 다섯 곡과 같은 배열이다.
c단조 조성이 주는 심각하고 준엄한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2번 곡과는 대조적으로 외형적인 일면도 보여 주고 있다. 일종의 투쟁적인 성격이랄까?... 아니면 고고한 인품을 갖춘이의 열열함 이랄까?... 우선 전주곡(프랑스풍의 서곡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의 위용이 가져다 주는 중후함이 탁월하다. 이런 중후함과 신중한 정서는 각곡의 대비감과 맞물려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전주곡의 특징은 첼로 모음곡중 유일하게 푸가를 원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비탄적인 뉘앙스를 풍기며, 중반부 부터는 약간 활기를 찾은 느낌을 준다. 알레망드도 전주곡의 연장선에서 애절한 뉘앙스을 지속시켜주는 느낌이다. 쿠랑트는 무곡적인 활발함을 간직한 곡으로 도전적인 느낌을 준다. 사라방드는 비애의 정서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다소 염세적인 느낌도 전한다. 가보트와 지그는 곡 전체의 분위기치고는 활발한 편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1717년 여름부터 1723년의 봄까지 바흐는 바이마르에서 100킬로쯤 북쪽에 위치한 도시 쾨텐의 궁정 악장으로 있었다. 쾨텐의 궁정에는 17명으로 편성된 궁정악단이 있어서 그는 이 악단의 지휘를 하거나 또는 영주 사실에서의 실내악에 가담하는 등 다망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이 시절의 작품에서는 교회음악을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세속적인 기악곡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비롯하여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등 바하의 기악곡으로서 중요한 작품의 태반이 이 쾨텐시절에 작곡되었다고 추정된다.
그 원인이 궁정 악단의 지휘와 실내악 활동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며, 특히 이 악단의 멤버에 감바 주자인 크리스티안 페르디난드 아베르나 수석 바이올린 주자인 요제프 시피스 등의 명수들이 재적해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첼로를 위한 작품에서 성서(보물)라고도 할 수 있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전6곡)은 그의 쾨텐 시절의 작품으로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의 하나다. 이 작품은 1720년 경의 작품이라고 추정된다. 당시 바흐는 쾨텐에서 레오폴트 공작의 궁정 악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이 시기(1717~1723)는 그의 생애를 크게 넷으로 나누어 볼때 아른슈타트 - 뮐하우젠, 바이마르 - 시대에 이른 제3기에 해당한다. 쾨텐시절의 가장 큰 특징은 바흐의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기악곡들이 집중적으로 작곡되었다는 것이다. 클라비어를 위한 평균율, 쳄발로를 위한 영국 모음곡, 프랑스 모음곡,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등 그의 대표적인 기악곡들이 모두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이른 루터파가 아니었던 그 곳 궁정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기악곡에 경도되어 있던 레오폴트 공작의 취향과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이마르 시절(1708 ~ 1717 ), 오르가니스트로서 연주와 작곡에 열중하면서 새롭게 접했던 이탈리아 기악곡(특히, 비발디 등의 협주곡)의 양식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괴텐시절의 음악적 환경에서 그 결실을 맺은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바하은 이시기에 기악곡들 가운데서도 특히 무반주 곡의 작곡에 강한 집념을 보였는데, <첼로 모음곡,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플루트 파르티타> 등, 비록 이곡들이 그의 독창적인 양식은 아니라 할지라도 바하에 의해 비로소 하나의 양식으로 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선율악기로 반주악기가 따르지 않으면 그 표현이 단조로울 수 밖에 없는데, 바하는 악기가 가지고 있는 온갖 기능을 샅샅이 끄집어 내어 이러한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그 표현 수단을 극대화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무반주 곡들은 곡 자체의 예술적 가치뿐 아니라, 음악사적으로 뚜렷한 하나의 이정표 구실을 하고 있다.
이 무반주 첼로 조곡보다 30여년 전에 작곡된-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최초의 무반주 첼로곡인 가브리엘리(D.Gabrielli)의 리체르카레(Ricercare,1689), 그리고 약 200년 후에 작곡된 레거, 블로흐, 코다이 등의 무반주 곡들이 음악사에 있어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쉽게 드러난다. 한편, 바하는 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작곡했던 1700년대 초반은 아직 첼로라는 악기가 선율악기로서의 확고한 대중성을 얻지 못했던 시기였다. 즉, 비올라 다 감바가 선율 악기 역할을 하고 있었고, 첼로는 주로 콘티누오 악기에서 차츰 선율악기로 부상하던 과도기적 시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이올린과는 달리 무반주 첼로곡에 대한 뚜렷한 모델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바하는 새로운 양식의 창조자라기 보다는 이를 적극 수용하고 종합하여 완성시키는 쪽이었다.
이 곡의 작곡 동기는 모호하다. 다만 쾨텐의 궁정의 감바,첼로 연주자였던 크리스티안 아벨(Christian Abel), 또는 크리스티안 베르나르트 링클리(Christian Bernhard Linglie)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닐 뿐이다. 바하는 프로베르거(Froberger)가 정립시켰던 바로크 모음곡을 이 첼로 모음곡의 형식상의 기본 모델로 삼았다. 즉, 알르망드(또는 알망드; Allemande), 쿠랑트(Courante), 사라반드(Sarabande)와 지그(Gigue)를 중심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갈란테리아(Galanteria; 정형화된 고전적인 춤곡들 사이에 비교적 새로운 춤곡을 끼워 넣어서 한 판의 춤에 흥을 돋구는 구실을 함)로 모음곡 1,2번에는 미뉴에트(Minuett)를, 3,4번에는 부레(Bourree)를, 5,6번에는 가보트(Gavotte)를 각각 선하였다. 이 춤곡들은 전,후반으로 나뉘어서 전부 반복된다. 그리고 템포가 느린 사라반드, 갈란테리아 중 미뉴에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린 박으로 시작하여 춤곡으로서의 여유를 준다. 이러한 일련의 춤곡들 앞에는 자유스럽고 즉흥성이 강한 프렐류드(Prelude)를 두어 각 모음곡의 성격을 분명하게 예시해 준다
https://youtu.be/ePPMrX4YtkM?si=s09i6ccyHzzhkkBL
Bach The six cello suites Pablo Casals, 1936 39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 1876~1973)
1876년 12월 29일 스페인 카탈로니아의 벤드렐에서 태어난 파블로 카잘스는 20세기 첼로의 거장으로 불리워지는 첼로 연주자.그는 교회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접했다. 11세에 바르셀로나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호세 가르시아에게 첼로를 배웠다. 후에 마드리드·파리 등지로 옮겨가며 어렵게 공부했다.
이후 바르셀로나에서 첼로 주자로 자리를 잡은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1899년 파리에서 라무뢰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대성공을 거두어 세계적인 명성을 날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약 15년간 그는 파리에 살면서 바이올린의 자크 티보, 피아노의 코르토와 트리오 활동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1920년부터는 바르셀로나에 사재를 털어 오케스트라를 창립해 지휘하며 노동자들을 위해 연주하기도 했다. 조국 스페인이 내란(1937)에 이어 프랑코 독재정권에 들어가자 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피레네 산맥의 작은 마을 프라도에 은거하며 공식적인 연주활동을 중지했다.
1950년, 프라도에서 바흐 탄생 200주기를 맞이해 음악제를 개최하면서 다시 연주를 시작한 그는1957년 푸에르토리코로 옮겼고, 60년부터는 말보로 음악제에서 지휘에 힘을 쏟았다. 그는 ‘현악기의 왕자’라고 일컬어지며, 현대의 첼로 연주법은 그에 의해 이루어지고 현대의 연주계에서 첼로가 차지하는 높은 지위 역시 그에 의해 이루어졌다.
*세기의 연주가 중10명을 골라야 한다면 아마 족히 하루는 생각해야 할 것이며 결과에 객관성도 없을 것이다.하지만 한 명만 고르라면 의외로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역사적인 중요성과 연주력 오랜 연주 경력과 다른 연주가들에게 미친 영향을 객관적으로 고려한다면, 파블로 카잘스 외의 다른 사람을 말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작곡가 드보르작이 했던 불평인 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중음역은 훌륭하지만 저음역은 웅웅거리기만 하며 고음역은 코먹은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란" 말을 세기적인 의미에서 처음 극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중요한 일은 단연 첼로 주법의 개혁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자신의 말을 "앨버트 E.칸에 이야기한 나의 삶(Ma vie racontee Albert E. Kahn)"에서 인용하면....(아쉽게도 요즘 한국어 번역판이나 영어판 모두 절판이라고 한다)*
"- 바르셀로나의 학교에 있을 무렵, 나는 그때까지 교습 받아온 첼로 주법에 어떤 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겨우 12세에 불과했지만 어떤 사물에 관해서는 어린아이에게도 분명한 통찰력이 있는 것이다. 나는 첼리스트들이 뻣뻣해진 팔과 팔꿈치를 옆구리에 꼭 붙이고 연주하는 방법이 왠지 불편하고 부자연스럽게 여겨졌다. 사실 우리는 첼로 연습을 할 때 활을 쥔 팔 겨드랑이에는 책을 끼고 했던 것이며, 그것이 나에게는 어리석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연습할 때는 팔을 자유롭게 하고, 억지로 만든 꽉 조이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 방법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또한 핑거링과 왼손의 동작에도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느꼈다. 그 당시에는 음을 짚을 때 손을 모으고는 그것을 끊임없이 아래 위로, 손가락으로만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나는 손을 쫙 펴고 멀리까지 늘려 보았다. 그랬더니 그때까지 모든 연주자들이 3도까지밖에 짚지 못하던 것이, 손을 움직이지 않고도 4도를 짚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내가 학교에서 그러한 나의 새로운 연주법들을 적용하기 시작하자 학생들 간에 소요가 일었고 선생님도 처음에는 매우 놀랐다. 그러나 그는 매우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설명하자 이상하게 보이는 나의 연주법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쨌든 오늘날에는 아무도 첼로를 배울 때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배우지는 않는다.-"
이런 공적 때문에, 그를 '현대 첼로 주법의 완성자'나 '현대 독주 악기로서 첼로가 갖는 높은 위치를 비로소 확립한 인물'로 평가한다. 이 공적을 당대의 사람들도 금방 깨달았다. 위인용의 첫 문단에서 암시만 되어 있지만, 그는 실제로 첼로의 활 쓰는 방법(운궁법)을 완전히 바꿔 놓았을 뿐 아니라 그 합리적이고 예술적인 사용으로 '활의 왕자'로 불렸다. 첼리스트들 뿐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들까지 그의 운궁법을 참고했다고 한다. 이런 연주력 때문에 그는 곧 후고 베커(Hugo Becker)등 당시의 쟁쟁한 다른 첼리스트들을 가려 버리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역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재발견을 들 수 있다. 사실 이 곡이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았으며 당대의 명 첼리스트들이 가끔씩 연주해 왔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처럼 첼로의 스탠다드 레파토리에 넣고 훌륭한 예술성을 대중에게 인식시킨 공로는 오로지 그에게 돌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부두 근방의 오래된 악보 상점에 들어갔다. 나는 많은 스코어들을 여기저기 훑어보기 시작했다. 불현듯 낡고 색이 바랜 한 묶음의 스코어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첼로를 위한 무반주 모음곡'이었다!. 나는 놀라움으로 스코어를 읽었다. 첼로를 위한 여섯 개의 모음곡. 그 제목 속에는 어떤 마술과 신비가 숨겨져 있을까 생각했다. 나는 결코 모음곡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고 아무도, 나의 선생님들조차, 그 곡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모음곡들을 마치 왕관에 달린 보석들처럼 가슴에 꼭 안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서는 내 방에 들어가 그 음악에 빠져 들었다. 나는 그 음악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때 나는 13세였지만, 그후 80년 동안 그것을 처음 대했을 때의 놀라움은 언제나 생생하게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그 곡은 전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나는 그 곡을 억누를 수 없이 흥분하여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곡은 이제 나의 가장 귀중한 음악이 되었다.
나는 그 후 12년 간 매일매일 그 곡을 연구하고 공부했다. 정말로 12년이 지나고 내가 25살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 중의 한 곡을 청중 앞에서 연주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카잘스는 1902년(25세)까지 활발한 작곡 활동을 보였고 그의 선생님들도 카잘스의 작곡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가 첼리스트이기 보다는 작곡가의 길을 가길 바라고 종용했다고 한다.하지만 1902년 이 후부터는 연주가로서 크게 성공을 거두며 작곡보다는 첼리스트로서의 경력이 주요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시대가 첼리스트로서의 그를 요구했던 것이다.
1962년에 카잘스는 그가 전쟁중에 작곡한 평화의 오라토리오 'El Pessebre'와 함께 평화운동을 시작한다고 공표하고 타계하기 직전까지 오케스트라와 함께 전세계를 다니며 음악으로써 평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아티스트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다. 인간으로서 내 첫번째 사명은 동시대인들의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신이 나에게 준, 언어와 정치와 국가들의 경계를 초월하는, 음악이라는 수단으로 그 사명을 다하도록 나는 노력할 것이다. 어쩌면 내가 세계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것이다." - Pablo Casals
카잘스는 죽기 직전까지 페스티벌을 쫓아다니며 연주하고, 가르치고, 인류애를 설파했다. 그리고 세상에 머문지 100년을 못 채우고 97년만에 홀연 떠나갔다. 지금도 그가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산 살바도르의 바닷가에는 ‘바흐의 정원’이 있다.
글출처: 하늘바람꽃
https://youtu.be/lW645E32ISw?si=Fwt1-d0NC2cXtAPy
J.S. Bach-Suite no. 5 for Solo Cello in c minor BWV 1011, Pablo Casals:: cello-Live-Prades-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