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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물훼 (敬而勿毁) 중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남재 후손, 국립고궁박문관 소장
망우령忘憂嶺)은 서울과 구리시의 경계이며 태조의 능인 건원릉이 있는 조선왕조 최대의 능침지인 구리시 동구릉과 가까운곳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가 망우고개에 앉아 죽어서 자신이 누울 자리(능지, 陵地)를 살피며 동구릉(東九陵)이 명당임을 확인하고 기뻐하며 ‘고단했던 그동안의 시름을 모두 잊었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후, 이곳을 ‘망우리(忘憂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는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역사화로 화폭의 오른쪽에는 구릉산에서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망우리공원이 그려져 있다.
태조는 승하 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에 같이 묻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신덕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태종 (太宗) 이방원은 유언에 따르지 않았다. 그는 지금의 구리시에 해당하는 양주의 검암(儉嚴)에 산릉(山陵)을 정하고 능을 조성하여 태조를 모셨다. 그런데 의령 남씨 집안에 전해오는 [태조망우령가행도]라는 그림은 태조가 직접 자신이 묻힐 곳을 찾아나선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는 1395년 무렵부터 자신이 묻힐 수릉지(壽陵地)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자신의 묻힐 곳이 이제 막 세워진 조선의 운명과 왕실의 종사를 좌우할지도 모른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감에 끊임없이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땅한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인 1396년에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姜氏,1356 ~1396)가 세상을 떠났다.
신덕왕후를 한양의 취현방 (聚賢坊)에 모시고 정릉(貞陵)이라고 한 태조는 스스로 마땅한 능지가 나타나지 않자 신덕왕후의 곁에 묻어 줄 것을 유언했다. 그러나 의령 남씨(宜寧 南氏) 가문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와 전혀 다르다. 가전화첨인 '경이물훼(敬而勿毁)'에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라는 그림 한 점이 실려 있는데, 바로 태조가 수릉지를 찾아서 망우령에 거둥한 내용이다.
국왕이 직접 자신의 능지를 찾아 행차한 모습을 묘사한 내용은 조선시대 회화로서는 이례적이며, 화첩에는 희로(羲老)라는 인물이 쓴 관련 기록이 함께 전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태조가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에까지 오른 남재(南在, 1351~1419)와 묏자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재가 성 바깥 30리에 묏자리를 점찍어뒀다는 말에 함께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는 남재가 묏자리로 정한 지역의 맞은편 먼 산에 가마를 멈추고 머무르면서, 산세를 살펴보더니 이곳은 신하의 묏지라가 아니라 왕의 수릉지로 적합하다면서 이곳을 자신의 수릉지로 정하고, 남재에게는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를 시켜 따로 묏자리를 마련해 줬다. 이어 "임금과 신하 모두 묻힐 자리가 있으니 근심을 잊을 만하다"고 하면서 가마가 머문 곳을 망우령(忘憂領)이라고 불렀다는것이다.
그림을 살펴보면, 대각선 구도로 화면의 절반 이상은 산으로 뒤덮여 있고 왼쪽 절반에 태조의 행차를 묘사했다. 국왕의 호위 부대에 속한 병사들은 대부분 말을 타고 화살과 화살통을 멘 채, 국왕의 어가 행렬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 있다. 그 너머의 너른 분지에 국왕의 일행이 묘사되어 있는데, 군복과 융복 차림을 한 신하들이 둥글게 왕을 둘러싸고 있다.
조선시대 회화에서 왕의 초상인 어진을 제외하고는, 국왕의 현존은 왕권을 상징하는 지물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이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로 왕은 그려지지 않고 붉은색 교의(交椅)와 부채, 일산(日傘) 등으로 태조의 현존을 나타냈다. 수릉지를 살펴보기 위해 행행(行幸)에 나선 것임을 강조하려는 듯이 , 화면의 7할 이상이 소나무와 활엽수가 빽빽이 들어선 깊은 사중을 묘사하고 있다. 옅은 묵으로 쌀알 같은 점을 툭툭 찍어서 산등성이의 나무를 묘사하고, 이 밖에 담황색, 녹색, 청색 등의 안료를 이용하여 다양한 수목과 산세를 표현하였다. 18세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였던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산수화풍에 영향을 받은 데다, 어가 행렬이 뒤로 갈수록 작아지는 원근법이 적용된 점, 양청등 서양 안료가 사용된 점 등으로 미루어 이 그림은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망우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망우묘지에는 유명을 달리한 경성 사람들의 대부분이 묻히게 되는데, 이들 중에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애국지사와 정치가, 예술가들이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한용운, 임시정부 의정원의원 박찬익, 사학자 문일평, 어린이운동의 창시자이며 아동문학가인 방정환. 그리고 시인 박인환, 화가 이중섭, 소설가 계용묵 등 한국의 근현대사를 꽃피우며 시대를 이끌었던 50인이 잠들어 있다.
프랑스 파리의 페르 라세즈(Père-Lachaise) 묘지공원은 상실된 시간을 딛고 현재를 가꾸며 세계인의 관광지로 사랑받고 있다. 인간의 죽음에 대해 연구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Ross, 1926~2004.8.)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떠나간 이가 해왔던, 그것을 하라.’고 이야기한다. 죽음은 삶과 다른 무엇이 아니다. 과거에 망우공동묘지에서 느꼈던 슬픔을 부활시켜 치유하고 적응하며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빛을 주었던 그들을 기억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할 ‘망우역사문화공원’의 푸른 앞날을 응원하며 우리 후손들도 지혜롭게 이 공원을 가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 KBS1 <유홍준과 함께하는 예썰의 전당 4부> [45회] 기억을 걷는 시간 - ‘망우역사문화공원’ (2022년 05월 26일 방송) 다시보기
❁ <예썰의 전당> 마흔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우리나라 근현대 위인들이 잠든 망우역사문화공원
근현대사 50여 명이 잠들어 있는 망우역사문화공원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
경성부는 1933년 경기도 구리면 망우리에 공동묘지를 개설하고 부내의 공동묘지를 순차적으로 없앴다. 이태원공동묘지는 1935년부터 미아리와 망우리로 이장이 개시되어 1936년 4월 8일에 완료되었는데, 경성부 위생과는 무연고 묘로 판명된 28,000여기를 화장하여 망우리공동묘지에 합장 후 이 위령비를 세웠다.
한편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여 일제의 삼엄한 경비 하에 이태원공동묘지에 매장되어 묘비도 없이 지내다가 이태원묘지가 없어지면서 아무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하니, 이 장비는 유관순 열사를 가장 가깝게 추모할 수 있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정부는 유관순 열사에게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다시 201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승격 추서하였다.
✵ 예썰 하나. 비운의 두 천재 예술가 ‘이소 이인성(我笑 李仁星, 1912-1950)’과 ‘권진규(權鎭圭, 1922-1973)’, 이들이 우리에게 잊힌 이유는?
비극적인 생을 마치고 망우에 함께 잠듦으로써 죽어서 친구가 된 두 천재 예술가 ‘한국의 고갱’ 이인성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수상 등 온갖 상을 휩쓸며 한국과 일본 화단을 뒤흔들었다. ‘로댕의 제자’ 조각가 권진규 역시 <청년>, <지원의 얼굴> 등 골격을 바탕으로 한 생생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유명했다. 이렇게 천재적인 두 예술가는 현재 우리에게 낯선 이유는 무엇일까?
◦ 이소 이인성(我笑 李仁星, 1912-1950): 현실 넘어 별세계 창조한 예술가로 대구가 낳은 ‘조선 천재’ 한국의 서양화가다. 대표작은 〈경주의 산곡에서〉, 〈가을의 어느 날〉, 〈한정〉 등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11살에 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13살의 나이로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아동미술전람회에서 특선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서동진이 운영하던 대구미술사에서 일하며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대구의 미술가 단체인 영과회, 향토회 등에도 참가했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다. 이후 꾸준히 출품해 제10회부터는 연속 6회 특선을 받아 천재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제14회에는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조선미술전람회 제16회부터 서양화부의 추천작가 겸 심사위원, 일본의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며 일본의 최대 공모전인 제전 및 신문전에 입선, 김인승, 심형구와 함께 추천작가 3인전을 개최. 해방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미술과 강사로 출강,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 6·25전쟁 당시 39세의 나이로 경찰관과 시비 끝에 총기사고로 사망했다.
이인성, ‘경주의 산곡에서’, 1935, 개인소장. 푸른 하늘과 붉은 땅으로 대변되는 ‘향토’ 경주의 모습을 담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작품 - 이인성이 일본 유학 중이던 23세 때 그린 대작.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낸 손기정(1912~2002) 선수를 모두 기억할 것이다. 비록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베를린 거리를 달렸지만, 손기정의 쾌거는 식민지 설움에 찬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런데 손기정과 같은 해에 태어나, 손기정에 비견되는 유명인사로 대활약한 천재화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인성(1912~1950).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조선인을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세 사람의 조선인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라톤의 손기정, 무용의 최승희, 그림의 이인성!” 흠,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오늘날 손기정과 최승희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만, 어째서 이인성은 우리 사회에서 거의 잊힌 존재가 되었을까?
◇스승을 뛰어넘은 제자
이인성은 1912년 대구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변변한 직업이 없었고, 모친이 음식점을 운영해 생계를 유지했다. 수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더 이상 집안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저 타고났다고밖에 볼 수 없는 미술적 재능을 이인성은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미술 점수만큼은 만점을 받았고, 주위의 인정에 고무되어 혼자 열심히 그리고 또 그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나.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날도 이인성은 대구의 한 교회를 배경으로 야외 사생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화가 서동진의 눈에 띄었다. 서동진(1900~1970)은 대구에 서양화 재료를 처음 도입했던 미술가이자 독립운동가 이상정(1896~1947)의 계성학교 제자였다. 스승의 영향 아래 일찌감치 일본에 건너가 제대로 미술 공부를 했다. 귀국 후 1927년 대구에서 최초로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대륜고의 전신 교남학교에서 14년간 무보수로 일하며 수많은 인재를 길렀다. 서동진은 이인성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보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갈 곳이 없는 그를 자신이 운영하던 인쇄소 겸 예술가 아지트 ‘대구미술사’에 취직시켰다. 이인성은 이곳에서 일하고 숙식하고 공부도 할 수 있었다.
대구의 미술 단체 ‘영과회’ 창립 기념사진, 1927년. 앞줄 맨 왼쪽 이인성. 10대 소년 이인성이 서동진, 이상화(이상정의 동생, 시인), 김용준 등 대선배들과 함께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면 몽둥이를 들고 와서 혼내던 이인성의 친부를 대신해서, 서동진은 실질적인 부친의 역할까지 담당했던 진정한 스승이자 은인이었다. 이인성이 17세 나이인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서동진과 함께 처음 입선했을 때, 서동진은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보다 제자 이인성의 입선이 더 주목되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불과 2년 후인 1931년, 이인성은 스승을 앞질러 선전에서 특선을 차지해 버렸다. 그해 함께 특선을 차지한 화가가 나혜석 같은 대선배였으니, 실로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서동진은 자신을 앞서가는 제자에 시기심을 느끼는 수준의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뛰어넘은 제자가 이제 자신을 떠나 더 훌륭한 환경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대구 유지들의 힘을 모으게 했고, 대구 거류 일본인들의 협력까지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경북고녀(慶北高女) 시라가 주키치 교장의 주선으로 이인성은 일본 도쿄에 있는 킹크레용 회사(오오사마 상회)에서, 마치 ‘대구미술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1931년 선전 특선을 받자마자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인성, 일본 유학 시절 킹크레용 회사의 아틀리에에서, 1930년대 초, 개인소장
◇“조선의 천재 소년”
도쿄로 가서 이인성은 훨훨 날았다. 킹크레용 회사는 크레용과 물감을 만드는 회사였기 때문에 이인성은 회사가 제공한 화구를 맘껏 사용하면서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이인성은 틈틈이 회사 작업실에서 쉼 없이 그렸다. 그는 유학했다기보다 이때 이미 조선과 일본의 화단을 상대로 어엿한 화가로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미술계에 공인된 최고의 전람회인 선전에, 이인성은 일본에서 제작한 그림을 매년 보내 거듭 특선과 최고상을 차지했다. 한때 “선전이 이인성을 위해 있는 거냐”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 시기 이인성의 대표작 ‘가을 어느 날’ ‘경주의 산곡에서’ 등이 쏟아졌다. 낭만과 허무가 공존하는 조선의 ‘향토’를 갖가지 상징과 은유를 더해 연출한 걸작들이었다. 1930년대 조선에 이런 대담한 유화를 그릴 수 있는 화가가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인성, ‘가을 어느 날’, 1934, 개인소장.
그뿐이 아니었다. 이인성은 도쿄에 간 이듬해 일본 최고의 관전(官展)인 제전(제국미술전람회)에 바로 입선했다. 요미우리신문에 “조선의 천재 소년”으로 대서특필되었고, 그의 인터뷰가 실렸다. 일본 유명 화가들이 킹크레용 회사 사장에게 축하엽서를 보내왔다. 무엇보다 이인성의 수채화 실력은 대구에서부터 갈고 닦은 만큼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1935년 일본수채화회전이 열렸을 때, 이인성은 일본인 화가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최고상을 받았다. 이것이 일본인도 인정한 조선인 화가의 ‘클라스’였다.
◇별세계를 창조하는 화가
이때 최고상을 받은 작품 ‘아리랑고개’가 지금도 남아있다. 유학 중 잠시 조선에 왔을 때 구상한 작품으로, 서울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아리랑고개’를 담은 풍경화였다. 이곳은 원래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실제 촬영 무대가 되면서 ‘아리랑고개’로 불렸다. 미치광이 주인공 영진(나운규 분)이 악덕 지주의 머슴이자 왜경 앞잡이 기호(주인규 분)를 죽인 죄목으로,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리랑’ 노래가 울려 퍼질 때 등장하는 배경 장소였다. 이인성은 이 영화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 시절 조선인을 대변하는 ‘울분’의 정서가 이인성에게도 참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인성은 영화 ‘아리랑’을 오마주하듯 ‘아리랑고개’를 그려서는, 작품의 내막을 잘 알지도 못할 일본인들의 전시회에 당당히 내걸어서 최고상까지 받아낸 것이다.
이인성, ‘아리랑고개’, 1934, 개인소장.
이인성의 풍경화를 실제 장소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두 번 놀라게 된다. 처음에는 실제 모습과 너무 흡사해서 놀라고, 그다음에는 실제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만들어낸 뛰어난 ‘연출력’에 놀란다. 그는 그저 밋밋할 수 있는 일상의 풍경을 온갖 화사한 색채와 자유자재의 선을 동원하여, 너무나도 매력적인 ‘별세계’로 바꾸어 놓았다. 때로는 처연하게, 때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계가 작품 속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그런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화가야말로 진정 위대한 존재라는 자부심이 이인성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그의 캐릭터를 가늠할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첫 부인이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뜨면서, 이인성이 혼자 첫딸 애향(愛鄕)의 이화중학교 입학을 챙길 때였다. 엄마 없는 딸을 위해 이인성이 직접 교복을 맞추었는데, 나중에 딸이 찾으러 가보니, 원래 교복인 검은 주름치마 대신 분홍과 보라로 이중배색한 치마를 만들어 놓았더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따져 묻자, 이인성은 “예쁜 색도 많은데 여학생에게 검정 옷을 입히냐”며 학교가 문제라고 되레 큰소리를 쳤다.
이인성은 세상의 규율과 통제에 본능적인 저항감을 지닌 유형의 인물이었다. 그가 평소에는 말할 수 없이 얌전하다가도, 술을 마시면 주사(酒邪)가 심했다는 것도 일견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그의 대표적인 주사는 난데없이 일본 경찰에게 달려들어 시비를 거는 일이었다. 그는 불합리한 통제를 견디지 못했고, 현실을 넘어선 자신만의 별세계 속에서 자유를 꿈꾸었던 천생(天生) 예술가였다.
이인성, ‘노란 옷을 입은 여인’, 1936년경, 대구미술관 소장. 패션디자이너였던 첫 부인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고 이건희 회장의 유족이 이인성의 고향 대구에 기증했다.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실제와 별세계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던 그에게 일이 터졌다. 1950년 11월의 일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라 제대로 된 경찰이나 군인도 아니고,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는 치안대원들이 도시를 휘저을 때였다. 서울 북아현동에 올라와 살던 이인성은 이날도 술을 마시다가 치안대원과 시비가 붙었다. 늦은 시간도 아닌데 그만 술 마시고 집에 돌아가라며 자꾸 간섭해대는 대원들에게 “내가 누군지 모르냐. 내가 이인성이다”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가 하도 당당하니까, 어쩌면 높은 사람인가보다 하고 대원들이 이인성을 놓아주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에게 이인성이란 자가 누구냐고 물어보니, 권력자이기는커녕 그림 그리는 화가라고 하지 않는가. 화가 치민 치안대원들이 ‘환쟁이 주제에’ 하는 생각으로 이인성의 집을 찾아가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공포탄을 쏜다는 것이 그만 이인성의 머리에 적중하고 말았다. “오발이다!” 외마디를 남기고 대원들은 사라졌다. 무방비 상태의 이인성은 어린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튿날 숨을 거두었다. 향년 38세였다.
후에 소설가 최인호는 이인성의 어이없는 죽음을 두고, 절규에 가까운 글을 쏟아냈다.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천재 예술가는 신에게서 태어날 뿐이다. 왜 신에게서 태어난 그를 죽여야만 하는가” “왜 그들은 (천재 예술가를) 우리 곁에 살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가” 하고.
이인성, ‘모자 쓴 자화상’, 1950, 개인소장. 이인성의 자화상은 늘 눈을 감고 있다.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세상을 쳐다보기 싫어서 일부러 눈을 감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인성이 총에 맞아 죽은 바로 그해 제작된 작품.
◇이인성은 억울하다
이인성을 죽인 것이 전쟁통의 그 치안대원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인성의 이름 석 자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화가에 대한 존중이 그 시대보다 지금 얼마나 더 나아졌는지도 모르겠다.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자는 세상 어디에도 있게 마련이지만, 뛰어난 예술가 한 명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일은 세상 더 어렵고 귀한 일인데….
이인성의 사후(死後) 그에 대한 미술계와 학계의 평가도 지나치게 야박했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이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관전인 ‘선전’이나 일본의 ‘제전’에서 주로 활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비판의 주된 이유인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이 가난한 화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사회 시스템이 그것뿐이었는데. 그것밖에 없는 식민지 시대를 탓해야지 왜 개인에게 그 구조를 뛰어넘어 생존할 것을 기대하는가. 그마저 생존해내지 못하고 덧없이 죽은 화가에게 말이다. 일장기를 달고 뛴 손기정이나 ‘사이 쇼키’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누빈 최승희는 어쩔 수 없었다면서, 왜 유독 이인성에게만 ‘관전 화가’라는 딱지를 붙여 평가절하하는지. 억울하다. 이인성의 울분이 전이된 듯 억울하다.
이인성, ‘해당화’, 1944, 개인소장. 한용운의 시 ‘해당화’의 내용과 상응하는 작품이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해당화가 피었다고 봄이 왔음을 기뻐하지만, 아직 진정한 봄은 오지 않았기에 망연히 봄을 기다린다는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된다. 서슬 퍼렇던 1944년 이런 작품을 그려 선전에 당당히 출품한 것이 놀랍다.
◦ 권진규(權鎭圭, 1922-1973): 한국의 조각가로 함흥에서 태어나 중학교 졸업 후 일본에서 미술수업을 받았다. 테라코타(Terracotta:이탈리아어로 '구운 흙'이라는 뜻)와 건칠기법(乾漆技法)으로 독자적인 표현방법을 구축했고 "걸작이란 필연적으로 오직 본질만을 남기고 있는 아주 단순한 것"이라 정의했다. 그의 작품은 사실주의적으로 대상을 재현하면서도 작가의 독특한 시각으로 정제된 조형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만물에는 구조가 있으며 예술가는 그 구조를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서구의 실험적 경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풍토를 개탄하여 신라조각의 위대성을 계승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대표작인 〈자각상 自刻像〉·〈지원의 얼굴〉·〈비구니 比丘尼〉 등 많은 흉상들은 무거운 침묵을 통해 내면의 빛을 조용히 드러내는 경건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불교세계에 귀의, 비참한 생활과 뼈저린 고독 속에서 구도자의 삶을 살다가 자신의 제작실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권진규, '아틀리에'
미술 교과서 단골 작품인 조각가 권진규의 '지원의 얼굴', 1967년. 영원한 재료를 꿈꾸며 작가가 고집한 테라코타로 만든 작품이다. 권진규 사단법인기념사업회/ 권진규, 선자, '선자', 1966년, 테라코타, 37.9x21.2x47.5㎝, 개인소장. 전시 제목 노‘실의 천사’는 ‘이틀리에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권진규, '자소상', 1970년,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건칠로 만든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1970년'. 권진규기념사업회
권진규의 서울 동선동 아틀리에 내부. 왼쪽 위에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조각이 있다. 권진규기념사업회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권진규의 '코메디', 1967년'. 권진규기념사업회
권진규, ‘재회’, 70.5x71.5x36㎝. 1967년, 테라코타 첫사랑 도모에 대한 그리움을 유추할 수 있다. 권진규기념사업회
권진규의 현존 작품 중 가장 오래된 1951년작, 석고 조각 '도모'. 첫사랑 도모를 모델로 삼아 제작했다. 권진규기념사업회
권진규, '곤스케(자소상)', 테라코타, 1967, 안동림
권진규, '기사', 1953년기, 안산암, 62.0x65.0x29.0㎝. 권경숙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권진규기념사업회/ 권진규, '동물상'
권진규, '나부' 1955년, 석고, 1953, 센나히데오
권진규, '도모' 일본인 첫 부인
권진규, '마두', 1969년, 테라코타, 1969, 국립현대미술관/ 권진규, '마두', 1969년, 안산암, 1952, 센나히데오
권진규, '소', 1966년, 테라코타, 1966, 리움미술관
권진규, ‘불상', 1971년. 권진규기념사업회/ 권진규, '보살입상', 1955년, 배나무, 54.3x13.3x10.9㎝, 개인소장
권진규, '청년', 1953, 브론즈, 김진 소장
권진규(1922-1973), '손', 1963년, 테라코타, 국립현대미술관/ 권진규, '입산', 1964-65년경, 나무, 109×93×23cm,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권진규(1922-1973), 모자상, 1960년, 테라코타에 채색,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기증/ 권진규, '곡예'
권진규(權鎭圭, 1922~1973), '태', 1964, 테라코타, 51.4×29.8×37.6cm, 개인 소장
권진규, '해신海神', 1963년, 테라코타, 46(h)×20.5×61.5cm, 개인소장
✵ 예썰 둘. ‘어린이들의 영원한 친구’, 살아서도 죽어서도 단짝이었던 두 예술가는?
어린이날을 제정, 최초의 아동잡지를 발간 등 어린이의 인권 신장에 힘썼던 ‘조선의 에듀테이너’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 <코끼리 아저씨>, <스승의 은혜> 등 그의 시로 만든 동요만 100여 편에 이르는 아동문학의 대부, 용률 강소천(姜小泉 龍律, 1915-1963), 어린이의 영원한 친구, 방전환과 강소천은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을까?
소파 방정환 선생 동상/ 소파 방정환 선생
어린이 창간호, 어린이 7호, 혜성 창간호
방정환 선생님과 색동회 회원
방정환 선생님의 묘
◦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 어린이의 영원한 벗으로 어린이날을 만들고 어린이의 복지 향상을 위해 활동한 작가로 호는 소파. 어려서 계모 밑에서 자랐으며, 1917년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딸과 결혼하면서 손병희의 영향을 받아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으며, 이듬해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소년운동을 전개했다.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고,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과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어린이'라는 명칭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동화창작과 번역, 구연, 강연 등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과로와 고혈압으로 인해 33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 강소천(姜小泉, 1915-1963): 함남 고원에서 출생, 어린이의 밝고 건강한 정서를 바탕으로 시적 언어로 동화를 썼다. 본명은 용률(龍律). 고원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함흥 영생고보를 마쳤으며 고원중학교·청진여자고급중학교·청진제일고급중학교 등에서 교사로 있었다. 6·25전쟁 때 혼자 월남하여 1951년 문교부 편수관으로 있었고 1952년 〈새벗〉·〈어린이 다이제스트〉의 주간으로 있었으며 한국문학가협회 아동문학분과 위원장, 아동문학연구회장, 〈아동문학〉 편집위원을 지냈다.
1930년 〈아이생활〉·〈신소년〉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민들레와 울아기〉가 뽑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닭〉·〈보슬비의 속삭임〉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 글들을 묶어 동시집 〈호박꽃초롱〉(1941)을 펴냈는데 1939년 무렵부터 동시보다 동화를 더 열심히 써서, 해방 전까지 〈돌멩이〉·〈토끼 삼형제〉 등을 발표했다. 마해송 등과 함께 '어린이 헌장'을 기초하여 널리 알렸으며 어린이 독서와 글짓기를 가르쳐 문학교육에도 이바지했다. 1963년 〈어머니의 초상화〉로 제2회 5월문예상을 받았다.
그의 동시는 현실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밝고 건강한 생활을 담아 표현했으며, 동화는 시적인 문장과 감각적인 표현과 운율로 사회악과는 무관한 동심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동화는 사회현실의 좋은 면만 돋보이게 하여 도덕교과서 같은 느낌을 주고, 소년소설은 어른들이 옛 일을 회고하는 것에 그쳐 아동문학 발전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동화집은 〈꿈을 찍는 사진관〉(1954)·〈무지개〉(1957)·〈어머니의 초상화〉(1960) 등, 장편에는 〈달 돋는 나라〉(1955)·〈꽃들의 합창〉(1957) 등이 있다. 죽은 뒤 〈강소천문학전집〉 전6권을 배영사에서 펴냈으며 '소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강소천 선생의 망우리 유택
* 울 엄마 젖/ 강소천
울 엄마 젖 속에는
젖도 많어요
울 언니가 실-컨
먹고 자랐고
울 오빠가 실-컨
먹고 자랐고
내가 내가 실-컨
먹고 자랐고
그리고 울 애기가
먹고 자라니
참 정말 엄마 젖엔
젖도 많어요.
* 호박꽃 초롱/ 강소천
호박꽃을 따서는
무얼 만드나.
무얼 만드나.
울 애기 쬐꼬만
초롱 만들지.
초롱 만들지.
반딧불을 잡아선
무엇에 쓰나.
무엇에 쓰나.
울 애기 초롱에
촛불 켜 주지.
촛불 켜 주지.
* 닭/ 강소천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 번
쳐다보고.
* 옛날 얘기/ 강소천
버선 깁는 할머니의
바늘귀 한 번 끼워 드리면
닦은 콩보다 더 고소-한
옛날 얘기가 하나.
· 닦은 콩: 볶은 콩
* 눈 내리는 밤/ 강소천
말 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누나도 잠이 들고
엄마도 잠이 들고
말 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나는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 어린이 노래/ 강소천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같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들 같이
너도 나도 씩씩하게 어서 자라서
새 나라의 기둥되자. 우리 어린이
해님 보고 방긋 웃는 꽃송이같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송이같이
너도 나도 곱게곱게 어서 피어서
새 나라의 꽃이 되자. 우리 어린이
바다 찾아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조잘조잘 노래하는 시냇물처럼
너도 나도 서로서로 힘을 모아서
새 나라의 힘이 되자. 우리 어린이
✵ 예썰 셋. “한국의 흙이 되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잠든 일본인의 정체는?
유홍준 교수가 꼭 소개하고 싶은 특별한 분의 묘.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그 옆엔 팔각백자항아리 조각이 있는 특이한 묘. 우리나라 위인들과 함께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잠든 이 일본인은 누구일까?
◦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에는 조선시대 팔각 항아리를 닮은 아담한 팔각탑이 오롯이 서 있다.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조선도자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스스로 도자기를 연구했고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는 형의 영향으로 조선의 민예에 심취하여 조선의 소반과 도자기 등을 연구했다. 두 형제는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891년 1월 15일 야마나시현 호쿠토시에서 2남 1녀 중 유복자로 태어났다. 다쿠미는 1907년 고후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 한 교회에만 출석하기보다는 여러 교회, 즉 욱정교회(감리교, 현 반포동 남산감리교회), 정동예배당(장로교, 현 성북동 덕수교회) 등에 출석했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영향으로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이를 일본에 소개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예운동을 시작한 배경에는 조선 백자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고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웠고, 이 소장품은 조선에 기증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계승됐다.
조선총독부 산림과 임업시험장 고원과 기사로 홍릉 및 광릉수목원의 기틀을 다졌다. 대한민국 인공림 37%를 차지하는 잣나무 씨앗 발아법인 ‘노천매장법’을 한국인 노동자들의 말에 힌트를 얻어 온실에서 2년 만에 발아하는 것을 노천에서 1년 만(1924년 3월)에 발아시켜 한반도 산림녹화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급성 폐렴으로 1931년 4월 2일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 후 이문동 사람들이 엄청난 봄비 속에서도 상여를 서로 메겠다고 하여 몇 개 조로 나눠 운반, 이문동공동묘지에 묻혔다. 1942년 망우리로 이장했다. 2015년 ‘한국을 빛낸 세계인 70인’으로 선정되었다. 망우리공원 유택 중 개인과 단체의 추모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주된 추모객은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인 야마나시현 사람들이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 : 서울편(4) 유홍준
✵ 유홍준 : 평론가, 대학교수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학과, 홍익대 미술사학과(석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와 제1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1985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과 대구에서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개설하고, ‘한국문화유산답사회’를 이끌었다.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정년퇴임 후 석좌교수로 있다. 저서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국내편 1~10, 일본편 1~4), 평론집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미술사 저술 『조선시대 화론 연구』 『화인열전』(1·2) 『완당평전』(1~3) 『국보순례』 『명작순례』 『안목』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3) 『추사 김정희』 등이 있다. 제18회 만해문학상(2003) 등을 수상했다.
* 망우리 별곡 1: 공동묘지에서 역사문화공원으로
망우리 공동묘지 / 망우리 공동묘지 조성 과정 / 반 고흐 무덤과 위창 오세창 무덤 / 공동묘지에서 망우리공원으로 / 중랑망우공간 / 이태원 공동묘지 무연분묘와 유관순 / 시인 박인환의 묘 / 이중섭의 무덤 / 국민강령탑과 중랑전망대 / 설산 장덕수와 난석 박은혜의 무덤 / 죽산 조봉암의 무덤 / 아차산 보루
* 망우리 별곡 2: 역사문화 인물들의 넋을 찾아가는 길
장례 풍습 / 만해 한용운의 무덤 / 호암 문일평의 무덤 / 위창 오세창의 무덤 / 소파 방정환의 무덤 / 방정환과 어린이날 / 국회부의장 이영준 묘 / 아사카와 다쿠미의 무덤 / 민예의 선구자, 아사카와 형제 / 도산 안창호와 유상규의 무덤 / 화가 이인성과 조각가 권진규의 무덤 / 송촌 지석영의 무덤 / 지석영 선생의 집념 / 시인 김상용의 묘 / 삼학병의 묘 / 노고산 천골 취장비 / 다시 중랑망우공간에서
‘이중섭 화가 묘비’, 그리워하던 두 아이들이 새겨져있다. 이남덕 여사를 망우역사문화공원 이중섭 묘역에 모시어 두 분의 사랑을 이어지길 빌어본다.
이중섭의 ‘게와 가족’, 1950년대
이중섭, '부부', 1953년, 종이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두 어림이와 물고기와 게', 1950년대, 종이에 펜, 유채, 32.8×20.3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켈렉션
이중섭, '황소',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65x367cm
이중섭, '황소', 1953년, 35.5x52㎝
1954년 통영에서 열렸던 작가 4인전 당시 '이중섭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장정순, 신영옥 기증/ 이중섭,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 1953-54년,, 종이에 유채, 41×31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중섭, '새(투계鬪鷄)', 28.5 x 40.5 cm, 종이에 유채, 1955 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얀 목련과 벚꽃망울, 마가목, 미선나무, 살구나무(살구꽃), 진달래꽃이 터질즈음 '망우역사문화공원'을찾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4회] 기억을 걷는 시간 - ‘망우역사문화공원’, Daum·Naver 지식백과/ 조선일보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서정화(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박물관교육학 박사)/ 글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