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 시집이라면 무턱대고 사서 읽던 시절이 내겐 있었다.
유고 시집이란, 말 그대로 죽은 다음에 나온 시집이란 것인데 나는 이 단어에 가슴이 철렁함과 동시에 시에 관한 설렘도 있었던 듯하다.
기형도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접했을 때의 감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지리산 등반 중에 실족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고정희의 유고 시집을 읽었을 때의 감정은 또 어떠했던가.
박정만과 박영근 시인도 그전에 알고는 있었으나 유고 시집이 나오고서야 이전 시들을 다시 찾아 읽게 된 시인이다.
신기섭의 유고 시집 <분홍색 흐느낌>, 시 잘 쓰는 김희준과 진이정 시인 또한 유고시집을 접하고서야 이런 시인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이 전부 요절한 시인들이었기에 읽는 내내 마음이 더 아렸다.
나는 여전히 유고 시집을 눈여겨 본다. 이 세상에 오직 한 권뿐인 시집일 테니까.
*박경리 시집/ 산다는 슬픔/ 다산책방/ 2026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이 새로 나왔다. 이전에 나온 선생의 시집인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도 유고 시집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시집이 있지만 이 시집처럼 제목만으로 울림을 주는 시집이 있을까 싶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란 제목 자체가 바로 작품이기도 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팔리고 있다.
시집으로는 기형도의 임 속의 검은 잎과 함께 대표적인 스테디셀러일 것이다.
문학은 외롭다? 스마트폰과 AI 시대가 되면서 문학이 외면을 받고 갈수록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든다고 한다.
그럼에도 교보문고를 갈 적마다 북적이는 매장을 보면 아직은 그래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에 안도한다.
며칠 전 광화문 책방에 들렀다가 박경리 선생의 이 시집을 발견하고 반가움에 덥석 사서 돌아왔다.
박경리 선생뿐만 아니라 소설가 중에 시를 쓰는 시인이 여럿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윤후명 선생도 시를 썼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도 소설 이전에 시집을 냈던 사람이다.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 선생도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자 소설가다.
먼저 이번 시집에 나온 시 하나를 옮긴다.
사람 - 박경리
홍수같이 눈물 쏟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슬픔이 우주만 한들
떠들고 웃고 춤을 추어도
마냥 그럴 수만은 없지
강변에서 불덩이 같은 해가 솟고
또 쓸쓸히 달이 떠오르는데
특별한 미사여구 없이도 담백한 싯구가 잔잔한 울림을 준다. 박경리 선생은 소설가로 등단하기 1년 전에 시를 먼저 발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시집 서문에는 선생의 손자인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의 긴 설명이 있다.
이번에 나온 박경리 유고 시집은 그의 미공개 시 47편을 엮은 것으로 올해 선생의 탄생 100주년에 맞춰 나온 것이라 했다.
박경리는 생전에 200편 가까운 시를 썼고 5권의 시집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읽은 것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와 함께 이 시집뿐이다.
박경리 선생이 대작가이긴 해도 나는 토지를 비롯해 몇 작품 외에는 읽어본 작품이 그리 많지가 않다.
한국 문학의 별이었던 선생의 시 하나를 또 옮긴다. 이 시집에 실린 시다.
찰나의 별 - 박경리
인생살이 험난한 속에서도
쉬어갈 때가 있다고들 한다
쉬어갈 뿐이랴
황홀하고 아름다운 순간인들
없었겠는가
때로는 순간이
편안하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한 것은
암흑 속에서 타는 촛불이거나
칠흑 같은 밤
빛나는 별 하나이기 때문이리라
한 송이 꽃이기 때문이리라
고독한 고통이기 때문이리라
내게 박경리 선생은 소설가로 각인된 작가지만 이런 시를 읽을 때면 그가 타고난 시인이라는 생각을 한다.
평생 오직 문학 하나로 당신의 삶을 지탱했는데 그 중에 이런 시가 선생을 살게 했던 디딤돌이기도 했으리라.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지만 문학이 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는 믿음 만큼은 확고하다.
이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작품 하나를 옮기면서 오늘 내 글을 마친다. 놀러 다니기에도 시를 읽기에도 참 좋은 봄날이다.
산다는 슬픔 - 박경리
이 쓰라림은 어디서 오는 걸까
꽃잎 시드는 그늘 밑
살아 있는 벌레 끌고 가는
개미 떼 때문일까?
죽은 어미 부르는 새끼 고양이 때문일까
아니, 아니
벌판 같은 거리에서
어울려 가면서도
서로 부딪치는 차가운 심장 때문일 거야
아아 산다는 슬픔 때문에
첫댓글 박 경리 작가님의 " 산다는 슬픔 " 시집 알으켜 주셔 고맙습니다 .
한권 구독해 봐야 겠습니다 .
건강 하십시요 .
아하~ 추소리님을 오랜만에 뵙네요.
저는 요즘 틈틈히 이 시집을 읽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밑줄 긋고 싶을 정도의 강렬한 구절은 없지만 담백한 문장에서 박경리 선생의 문학정신을 느낄 수가 있네요.
구독을 환영하면서 추소리님도 건강하시길 빕니다.
@유현덕
@추소리 때로가다 통영 박 경리 기념관 , 묘소에 들러 청하 한잔 올리고 마음 정화 하고 옵니다 .
@추소리
와우~ 멋진 추소리님이시네요.
추소리님의 문학 사랑에 박수 보냅니다.
이번 시집에 박경리 선생의 고향 통영에 관한 시가 있어 옮깁니다.
고향 항구 - 박경리
은빛 섬광으로 휘번득이며
고기가 노닐고
해초 나른하게 꿈꾸듯 춤추었다
환하게 드려다보이던 남쪽 바다
내가 태어난 항구
(중략)
멀리 가까이
연인같이 오누이같이
다가서고 물러나는 섬,
순박한 사공 아저씨
환하게 웃던 얼굴
지금은 모두 전설이다
@유현덕 우리 시대의 스승님이라 맑고, 선한 기운을 느껴 봅니다 .
산다는 슬픔
가슴속을 파고드는
깊은 고뇌의 詩로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
그산님이 박경리의 길지 않은 시에서 묘한 슬픔을 느끼셨다면 제대로 읽은 겁니다.
박경리 선생은 2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런 시가 있어 여전히 살아 있는 참 문학인입니다.
작년 말 광화문 교보에서 에세이집 두 권과 현덕 님이 읽으신 박경리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읽었답니다.
시는 제겐 어려운데,
박경리님의 시는 어렵지 않아서 좋았어요.
현덕 님과 같은 시집을 읽어서 괜스레 더 반갑네요.^^
와우~ 리진님의 책장을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제가 상대방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친근함이 생기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책에서 그 사람을 가늠하기도 하지요.
소통이란 게 별거던가요. 이렇게 같은 책을 읽었다는 반가움이 바로 소통이겠지요. 제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리진님은 천상 문학소녀임이 분명합니다.
박경리 선생의 시집뿐 아니라 한강 작가의 유일한 시집도 보이니 더 반갑네요.ㅎ
박경리 선생님의 시집 두권 소개 해주셔서 꼭한번 읽어 봐야 겠습니다
케빈님, 제 글로 인해 박경리 선생의 시집을 알게 되셨다면 아주 다행한 일입니다. 박경리 선생 시는 별로 어렵지 않아서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시 읽는 케빈님을 응원할게요.ㅎ
시는 어려워요.함축된. 언어 구사.비유등등
신미주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시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쉬운 시도 많으니 그런 시를 읽으면 됩니다. 신미주님의 봄날이 평화롭길 빕니다.
박경리 선생 안죽엇어요?
분명히 죽었다 해서 조의금까지 냈었는데요ㅜ
아님 내가 사기를 당했나?ㅠㅠㅠ
ㅎㅎ 박경리 선생님은 2008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번에 나온 시집은 미발표 시가 실린 탄생 100주년 시집이라네요.
지니님이 내신 조의금은 박경리 선생께서 좋은 곳으로 갈 때 교통비로 유용하게 쓰였을 겁니다.
지니님의 유쾌한 농담에 잠시 웃었습니다.
문학을 책으로 접하는 분들은 레벨이 다르군요.
저는 드라마로 접하는 아재~~ㅎㅎ
ㅎ 뱃등 아재의 솔직한 댓글입니다. 저는 이런 댓글에서 친근함을 느낀답니다.
저도 드라마 토지를 드문드문 보긴 했어도 소설로 읽을 때가 더 좋았습니다. 이제는 대하소설 읽기에 엄두가 나지 않아 예전에 읽기를 잘한 듯하네요.
뱃등님, 편안한 저녁 되세요.
저는 드라마 영화 오디오북
섭렵하며 접하는 할미~~ㅎㅎ
@정 아 저는 요즘 성경도 드라마 영화 유트브로 접근 중입니다 ~~ㅎㅎ(성경책으로는 와닿지 않아서)
버리고 비우고
요즘 저의 삶인데
버리고 갈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
시집 제목을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항상 문학이든 미술이든 서예까지 두루 섭렵하는 현덕님
진짜 정규 교육의 기회를 가졌다면 어느분야에 최고가 되었을까 싶습니다
ㅎ 정아님 오셨군요.
버리고 비우고,, 이것이 정아님 삶의 지향이라니 다시 보게 됩니다. 저도 이것을 늘 실천하려 하지만 입에서만 그치니 각성해야 할 일입니다.
제가 요란하기만 하지 알고 보면 실속이 없고 금방 바닥을 보이는 사람이랍니다. 늘 공부하겠다는 마음뿐, 그것도 자꾸 미루기만 해서 공부 또한 제자리 걸음이네요.
정아님, 평온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
@유현덕
저는 젤 잘하는게
버리기와 정리입니다
그래서 뇌도 비어있어요 ㅎㅎ
박경리 작가님 책은 좀 읽었다 했는데 시는 첨 접해봅니다 현덕님 덕분입니다 진정 문학을 사랑하시는 현덕님 이즈음엔 책 안읽는다고들 하지만 이렇게 현덕님 글에는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ㅎㅎ 안 읽을 수가 없걸랑요 ㅎㅎ 고맙습니다.
운선님 칭찬에 민망함과 함께 한편으론 제 어깨가 슬그머니 으쓱해짐을 느낍니다.^^
읽고 나서 그 감상을 전할 수 있는 삶방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거기다 운선님처럼 이렇게 공감을 나눌 분이 있으니 더 좋구요.
박경리 선생 소설이야 명품이 분명하지만 시 또한 은은하게 빨려들어가는 매력이 있습니다.
운선님 항상 건강하시길요.
네~~잘 감상해요
넵~
자연이다님, 좋은 날들 되시길요.
인사만 드립니다
사진은 고창 춘백입니다.
낙화후라 별로 볼 것이 없었습니다.
동백은 질 때 너무 처연해서 바닥을 보기가 미안한 꽃입니다.
제가 꽃 구별을 잘 못하는 편이라 춘백이 어떤 동백인지를 모르겠네요.
그럼에도 동백꽃은 무조건 좋아합니다. 엄니의 동백기름 바른 머릿결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곡즉전님의 평화로운 날들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