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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11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사도 16,11-15
복 음 : 요한 15,26─16,4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16,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3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
권 순호 알베르토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닥칠 박해도 예언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2).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느님을 위하여 봉사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옳은 일을 한다고 믿으면서 예수님께 하였듯이 제자들에게도 할 것입니다.
미국 유학 시절, 저는 고생하며 얻은 공부 요령을
막 유학 온 후배 신학생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후배들은 저를 멀리하였습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후배들의 생각이나 처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강요하였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는 교회가 박해를 받은 일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교회도 하느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폭력을 휘두른 적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역사를 통하여 배우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종교와 다양한 생각을 존중하고 넉넉하게 품는 교회가 되려고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16,4).
우리 또한 자신이 옳다고 믿으며 다른 이를 박해하지 않도록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 생각에 갇혀 있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권투선수 바실 로마첸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뒤에서 널 욕하는 사람들 신경 쓰지 마라. 그것이 그들이 너보다 뒤에 있는 이유다.”
생각해 보면, 신학교에서 저에 대한 소문이나 뒷 담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부가 되고 나서는 그런 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책임이 많아질수록 뒷 담화는 더 심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학생 때 능력이나 성격이 더 좋아서일까요?
아닙니다. 비방하는 사람은 늘 내 뒤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뒷 담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만약 앞에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나보다 앞서 있는 사람의 충고이고 조언이 됩니다.
결국 뒷 담화를 듣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만큼 제가 그들 앞에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고 계속 뒤를 돌아보며 화를 내면 어떨까요?
앞으로 제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뒤돌아보지 않고 묵묵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매사에 공격만 하는 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공격한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 여유로운 사람은 남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 굳이 타인을 헐뜯을 이유도 없습니다.
여기에 자기 삶에 집중하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들춰보지 않습니다.
비난 대신 자신을 다듬습니다.
자기 삶에 불만이 많은 사람은 감정의 화살을 밖으로 돌리는 법입니다.
그러면 잠시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이들에 대해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불쌍한 사람이기에 오히려 기도해 줘야 할 대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들을 회당에서 내쫓아내며 박해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회당에서의 추방은 당시 유다교 사회에서
모든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관계망이 끊어지는 사회적 사형선고와 같았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제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면서
스스로 하느님을 위해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신앙이 단순히 ‘열광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참된 앎에 바탕을 두어야 함을 경고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려 할 때,
때로는 오해를 받고 부당한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미움으로 상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보호자이신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흔들림 없이 진리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박해가 오면
제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증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증언의 확실성인데,
그 확실성의 근거는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이들이 둘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직접 본이들입니다.
첫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직접 목격한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제자들입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7)
그렇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니 직접 목격한 그들의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당신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고 말씀에 대한 이유’를
‘우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요한 16,1)이요,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요한 16,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박해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예고’는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단지 박해를 예고만 할 뿐,
박해를 피할 방도나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4)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기껏 '기억하라'고만 할 뿐입니다.
이는 참으로 무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고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신을 따르는 길에서, ‘고통’과 ‘박해’는 없어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증거해야 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그러니 고통과 박해는 우리 신앙생활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할 공간이고 배경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서 보낼 ‘성령’이 바로 그 고통과 박해를 통해서,
바로 그 속에서 우리의 증언을 동행할 것입니다.
아멘.
진리의 성령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조 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26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호자, 즉 성령은
단순한 위로자가 아니라,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끄시는 증언자이시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나약할 때 용기를 주시고, 슬픔 중에도 기쁨을 주시며,
무엇보다도 우리를 예수님과 굳게 결합시키는 분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성령을 가리켜
“아버지와 아들의 성령, 곧 사랑의 끈”(De Trinitate XV 의역)이라고 불렀다.
즉,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영원한 사랑이며,
그 사랑 안에 우리를 불러들이시는 분이시다.
성 바실리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과 닮게 만드신다.”(De Spiritu Sancto IX 의역)라고 하였다.
우리가 성령 안에 살 때, 단순히 종교적 의무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점점 하느님의 자녀답게 변화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26절)라고 하신 다음,
“너희도 나를 증언할 것이다.”(27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깨닫는다.
성령께서 먼저 우리 마음 안에서 예수님을 증언하실 때,
우리도 세상 안에서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없다”(Epistula 55, 사도 1,8 의역)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단순히 ‘예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살아 증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가올 박해를 미리 말씀하시며,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16,4)라고 하신다.
이는 두려움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더욱 굳건해질 기회를 준비시키신 것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 의역)
세상의 박해와 유혹은 결국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하는 기회가 된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두 가지로 초대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 기쁨과 용기로 매일을 살아가라는 것과,
말뿐 아니라 삶으로, 용기와 사랑으로 복음을 증언하라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덮어주시고, 진리를 향한 증언을 가능하게 하신다.
세상은 여전히 신앙을 가로막고, 교묘한 유혹으로 우리를 흔들지만,
성령 안에 머무는 이는 흔들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호자, 성령을 우리 삶에 받아들이자.
그분 안에서 우리는 진리 안에 살고, 예수님을 증언하며,
어떤 박해 속에서도 주님의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
“성령은 진리의 증인이시며, 신자들의 위로자이시다.”(교회 전승)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때로는 마음속으로 단죄하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판결을 내려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저럴 수밖에 없어.” “저건 용서받기 어려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법정에 서 있는 판사가 아니지만,
마음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재판을 하며 살아갑니다.
제가 한국에서 사목할 때의 일입니다.
한 신자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셨던 분이었는데,
어느 순간 공동체 안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작은 오해가 쌓였고, 그 오해는 소문이 되었고,
결국 그분은 공동체 안에서 점점 위축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조용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부님, 저는 이미 여기서 끝난 사람 같아요.”
그 말이 제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한 사람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한 사건으로 그 사람을 규정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 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가능성을 보십니다.
최근에 저는 『Dead Man Walking』이라는 책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한 수녀님이 사형수와 함께 마지막 시간을 동행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형수는 끔찍한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쉽게 용서할 수 없는 죄였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그 사람은 점점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눈물로 고백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녀님은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 사람은 죄인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구나.”
바로 그 순간, 중요한 진리를 보게 됩니다.
인간은 죄로만 규정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시면 세상에 대하여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하여 드러내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심판’과 하느님의 ‘심판’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보고 판단합니다. 드러난 행동을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어떤 상처를 가졌는지,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지를 보십니다.
달라스에 와서 사목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어떤 분은 과거의 상처 때문에 마음을 열지 못하고,
어떤 분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용기를 내어 다시 공동체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저는 늘 느낍니다.
“아,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구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 옆에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끝까지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평생을 잘 살지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줍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초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복수가 아니라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을 단죄하기도 합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이미 늦었다.” “나는 용서받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끝까지 기다린다.”
부활의 신앙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죄가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
하느님의 사랑이 언제나 더 크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판단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단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다려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도 ‘마음속에서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미 포기된 사람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판단이 아니라, 함께 걸어주는 한 사람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하듯이
우리들 또한 예수님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증언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하느님은 끝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기다림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움직이시도록 우리가 좀 멈춥시다!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요즘 계속되는 복음 말씀은 주제어는 성령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스승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자리를
진리의 성령, 협조자이신 성령,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채워주시고,
늘 함께 하실 것임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그리고 우리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삶 안에서
성령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충만하고 활기찬 영적 생활의 원동력은
곧 성령의 현존이요 활동입니다.
돌아보니 제 수도 생활 안에서 가장 부족했던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내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항상 현존해계시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의 현존에 대한 깨어있는 의식!
그것의 결핍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 생활도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밋밋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적 생활에 대한 의미도, 재미도 사라져갔습니다.
영성 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보니
작은 것에 크게 좌절하고 실망하곤 했습니다.
따지고 보니 그랬습니다.
성령께서 부재하시면 우리 신앙 공동체는
그저 하나의 집단이요 여인숙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을 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목활동 역시 그저 지루한 일일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 정말 필요한 것은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우리 각자의 마음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협조자 성령께서 섭리하시고 활동하시도록 우리가 좀 멈추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삶 안에 분명히 살아 숨 쉬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큰 위안으로 다가오는 한 가지 실화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지난 세기 대 영성가 헨리 나우웬 신부님께서도
자주 영적 메마름, 성령 부재 체험으로 인해 힘겨워하셨습니다.
하루는 헨리 나우웬 신부님께서
살아있는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수녀님 앞에 일대일로 앉자마자 신부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속사포처럼 당신 내면의 숱한 문제점들을 줄줄이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고민 보따리를 오래도록 말없이 듣고 계시던 수녀님께서는
그가 말을 그치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짧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신부님, 고생이 많으시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딱 두 가지만 매일 실천해보십시오.
첫째, 매일 한 시간 동안 주님을 흠숭하십시오.
둘째, 죄라고 생각되는 일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짧은 충고가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해서 실망했지만, 나중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수녀님의 짧은 한 마디 말씀은 머지않아 제 존재의 중심을 관통했습니다.
그분의 솔직하고 단순한 한 말씀이 제 불만의 큰 풍선을 터트려버리셨습니다.
제게는 더 이상 또 다른 그 무엇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여전히 제 마음과 정신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평생토록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그때 완전히 깨달았습니다.
기도에 대해 강론을 하고 글을 쓰는 것보다
실제로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동시에 공동체 생활에 대해 연구하고 강의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공동체 생활을 잘 하는 것이 몇 백배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께서는 그 뒤로 매일 한 시간 이상 꼬박 꼬박
주님의 성체 앞에 앉아 기도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잘 나가던 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고
토론토 데이 브레이크 공동체에 들어가 본격적인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헨리 나우웬 신부님께서는 전보다 훨씬 더 가깝게
성령의 능동적인 현존하심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인생의 동반자이자 인도자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순례자들에게
따뜻하고 감명 깊은 영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수녀님 역시 평생토록 강한 하느님 부재 체험,
혹독한 성령 부재 체험에 시달리셨습니다.
살아생전 얼마나 영적 어둠 속에서 힘겨우셨으면
수녀님께서는 이런 말씀까지 남기셨습니다.
“만일 제가 성녀(聖女)가 된다면 ‘어둠의 성녀’가 될 것입니다.”
그 오랜 영적 메마름과 지독한 영적 어둠과 시련 속에서도
수녀님께서는 매일 주님을 간절히 갈구했으며 매일 그분께 매달리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끝끝내 보여주시지 않자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찾았고 마침내 그분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송 영진 모세 신부
1)
하느님은 ‘선(善)’이신 분입니다.(마태 19,17)
따라서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 일이 선한 일이 아니라면, 그 일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문제로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들을 아주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 남은 가르치면서 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그대는 도둑질을 합니까?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그대는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왜 그대는 신전 물건을 훔칩니까?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
과연 성경에, ‘하느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모독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로마 2,17-24)
여기서 ‘도둑질’과 ‘간음’에 관한 말은,
‘말과 행실이 다른 위선’을 꾸짖는 말입니다.
“우상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왜 그대는 신전 물건을 훔칩니까?”는,
우상숭배를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다른 종교의 신전에 있는
물건을 훔치는 것을 꾸짖는 말입니다.
그런 짓이 바로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는 명분으로 ‘악한 일’을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 종교의 신전에 들어가서 신전의 물건을 훔치고,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자기가 차지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그냥 도둑질일 뿐이었습니다.>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일도 그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종교박해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과 살인은 ‘하느님의 선’의 반대쪽에 있는 일이고,
그래서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악한 일을 통해서는 결코 선이 실현되지 않습니다.
‘선의 실현’은 오직 선한 일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2)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입니다.(1요한 4,8)
따라서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사랑 없이 분노와 증오심과 적개심으로 하는 일이라면(사도 26,11),
그 일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순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위해서 순교한다고 해도
마음속에 사랑은 하나도 없고,
분노와 증오심과 원한과 적개심만 가득하다면,
그것은 순교가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3)
3)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은 하느님이 ‘선’이신 분이고
‘사랑’이신 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라는 뜻입니다.
4)
‘신앙’은 ‘신념’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옳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확신이 없다면, 즉 ‘신념’이 되지 않는다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은 못할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으면 금방 꺾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에 대한 신념은 ‘선’과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만일에 ‘선’도 ‘사랑’도 없이 자신의 신념만 내세운다면,
그것은 ‘광신’이고 ‘맹신’입니다.
‘광신’과 ‘맹신’이 흔히 폭력적인 모습이 되는 것은,
‘선’과 ‘사랑’ 없이 신념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를 증언할 때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와 함께 지내면서 듣고 보고 배운 것을 모두 증언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받게 될 박해를 내가 예고한 이유는”이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는,
“너희가 믿음을 잃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다.”입니다.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되는 것을 보게 되면,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메시아라는 것을 더욱더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요한 13,19)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도 그렇고,
사도들과 신자들이 받은 박해도 그렇고,
오늘날의 우리가 겪는 고난과 시련도 그렇습니다.
교회 선교활동의 두 본질적 요소
“성령과 환대”
<사랑은 아름다워라!>
이 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사랑은 아름다워라!”
오늘 이런저런 묵상중 저절로 떠오른 찬탄의 말마디입니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란 말마디와 일맥상통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5월 성모성월 신록과
온갖 꽃들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정말 사랑할수록 화장품도 성형수술도 불필요해집니다.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중세기 교회는 물론 수도생활 개혁에 기초를 놓았던
프랑스 클뤼니 수도원의 위대한 성인 아빠스들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성 오도(Odo 878-942), 성 마오로(Majolus 910-994), 성 오딜로(Odilo 961-1049), 성 후고(Hugh 1024-1109),
복자 베드로 베네라빌리스(1092-1156), 클뤼니 수도원의 아빠스들)
참 놀랍고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런 기라성綺羅星같은 아름다운 성인 아빠스들을,
10세기 중엽부터 12세기 중엽까지 거의 200년 동안 배출함으로
클뤼니 수도원의 전성기를 이루게 했습니다.
정말 어느 공동체든 리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당대 성인 아빠스 하나도 힘든데 무려 5명이 줄줄이 이어지니 참 경이롭습니다.
성 오도 2대, 성 마욜로 4대, 성 오딜로 5대, 성 후고 6대,
그리고 복자 베네라빌리스 9대로 이어집니다.
복자라지만 다음 설명이 완전히 성인 급입니다.
‘온화한 성품과 탁월한 학식으로 수도회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공경 받을 만 한 분(Venerabilis)‘이라는 칭호로 널리 알려진 아빠스이다.’
새벽에 읽은 <다산> 현자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이의 눈에는 부모의 품격이 깃든다. 자식은 곧 부모의 거울이다.”
다음처럼 말마디를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성인의 눈에는 하느님의 품격이 깃든다. 성인은 곧 하느님의 거울이다.”
인생 유일한 목적인 성인으로 불림 받았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념하고 기억 할뿐 아니라, 성인을 보고 배워 참 나의 성인이 되라 있는 성인 축일입니다.
제가 수도원 집무실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아름다운 만세 칠창 기도 바치기 시작한지 4년째입니다.
<하느님 만세-예수님 만세-성령님 만세-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성모님 만세-요셉수도원 만세>,
이 또한 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요즘은 만세 칠창에 세편의 아름다운 자작 고백시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산 앞에 서면
당신 앞에 서듯
행복하다
꽃 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여기에 한 절
“시 같은 하루
시같이 살자” 추가하고 싶습니다.
“평생
꽃 같은 아내 없어도
언제나 나를 반가이 맞이하는
주님의 집
집무실 안
불암산 배경의 배꽃 만발한 그림에
꽃 같은 주님 늘 함께 계시니
이 행복에 삽니다.”
“하늘님 그리울 때
보고 싶을 때
하늘길
하늘 향해 쭉쭉 뻗은
하늘의 사신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사열 받으며
하늘보고 하늘기운 숨 쉬며
하늘품위 되찾고 하늘의 왕자 되어
가슴 펴고 힘차게
하늘님 예수님 따라
나는 듯 걷는다
이 기쁨에 이 행복에 산다.”
만세 칠창 기도대로, 사랑의 고백시대로 이뤄지는 듯, 참 기쁘고 감사합니다.
22년 동안 수도원의 기반을 닦아온 제 후임으로
최파코미오 신부가 12년 동안 원장직을 훌륭히 수행했고,
이어 고이사악 신부가 훌륭히 원장직을 수행하리라는 예감이 듭니다.
답은 기도뿐입니다. <요셉수도원 만세> 기도가 그대로 이뤄진다 싶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운 수도공동체의 형성으로 표현됨을 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은
교회 선교활동의 두 본질적 요소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바로 파라클레토 성령과 환대입니다.
교회활동의 숨겨진 두 본질적 요소인
성령과 환대의 성격을 뜻하는 영어 말마디가 참 좋습니다.
“self-effacement;(겸손하여)표면에 나서지 않음”
얼마나 매력적인 말마디인지요!
그대로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을 닮은 성령이, 환대가 참 아름답습니다.
가톨릭 교리서의 설명이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하느님을 계시해 주시는 성령께서는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진리의 성령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신다.”
참으로 하느님다운 이런 숨김은,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분을 아는 것은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교리서687항>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은 교회 선교활동의 두 본질적 요소,
파라클레토 성령으로, 환대로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숨겨져 보이지 않기에 더욱 깊은 아름다움입니다.
어린왕자에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란’ 일화도 연상됩니다.
오늘 요한복음이 강조하는바 역시 보호자, 진리의 영, 성령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께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제가 이렇게 강론을 쓸 수 있는 것도
겸손한 사랑의 아름다운 파라클레토 성령의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저를 통해 성령께서 쓰시는 강론입니다.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겸손한 사랑의 아름다운 환대의 모범이
바로 사도행전의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던 리디아입니다.
이어지는 리디아의 아름다운 환대 장면입니다.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리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령님의 인도 따라,
각자 삶의 자리에서 겸손한 사랑의 표현인 아름다운 환대의 영성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149,4). 아멘.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이 승화 시몬 신부
교회 안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누구나 가능성은 있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호감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삶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더 큰 결심과 회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불교 박람회나 예수님 생일 파티를 통해 문화를 전한다고 해도
불교에서 수계를 받거나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은 적다고 합니다.
문화 요소로 소비하는 것과
그 안에서 삶으로 살아가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독서에서 리디아는 이미 하느님을 알고 섬기고 있었지만
바오로를 통해 세례를 받으며
그 살아가게 됩니다.
이 말씀은 가능성이 확실성으로 변하는데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리도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그분의 가르침을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진리 안에 삶을 투신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음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안에서 옳고 그름을 식별하는 가운데
내 안에 하느님이 더욱 가득해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