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광스님의 가언록(嘉言錄) 요지를 연재하기 앞서 스님의 상서로운 열반에 대해 기술한 글을 먼저 올립니다. 도인들에게는 생시와 열반이 따로 없으시겠지만, 우리 중생들로서는 그분들의 열반상에서 신심을 크게 고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촌 합장
인광(印光)스님(1861~1940)은 지금으로부터 약 60여년 전 스님이시다. 어렸을 때 유생들이 불교 비방을 해놓은 글을 보고 자기도 그것을 본따서 불교를 비방하여 글을 써 보았다. 그랬더니 우연히 눈병이 나서 앞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외람되니 성인의 가르침을 비방하여 아마도 그 죄로 인하여 앞을 못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자신의 잘못함을 뉘우치고 마음 속으로 부처님께 참회를 드렸더니 이상하게도 눈병이 곧 낫게 되어 전과 같이 앞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법이 절대로 허무한 것이 아님을 절실히 느껴서 불법의 진리를 좀 알아봐야 겠다고 생각하여 여러가지 경전을 구하여 읽어보았다. 경을 보고는 크게 발심이 되어 21세에 출가하시어 종남산 연화동에 있는 도순 장로라는 수행이 장하신 스님 밑에서 출가하셨다.
그후 용서(龍舒)거사가 써 놓은 정토문을 보고서 생사를 해탈하여 속히 불도를 성취함에는 염불법 보다 나은 것이 없음을 아시고 그로부터 항상 염불을 하셨다. 그 후 홍라산 자복사에 가시어 정토수행을 하시면서 경전을 보시고는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되셨다. 이후에 다시 법우사라는 절에 가시어 6년 간을 문을 닫고 주야불철 염불을 하시어 마침내 염불삼매를 크게 증득하게 되셨다.
그후부터는 중생들을 교화하시길 원력을 세우시고 많은 이들에게 법문을 해 주시고는 염불을 권하시어 많은 사람들이 발심이 되어 염불수행을 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교화하시기를 수년간을 매일 같이 쉬지않고 계속하시어 스님에게서 발심되어 염불수행을 하는 자가 무려 20만명도 넘었다. 그리하여 인광대사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으며 인광대사를 통하여 염불하는 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자기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됨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 하셨으며 사람들을 대하실 때에도 항상 부그러워하며 겸손하셨다. 그리하여 자호를 참괴승(慙愧僧)이라 하셨다. 참괴승이란 부끄러운 스님이란 뜻으로 극히 겸손해 쓰는 말이다.
제자들이 많으시며 명성이 높아지셨음에도 항상 떨어진 헌옷만 입고 계셨으며 음식도 좋은 것은 드시지 않으며 빨래같은 것도 꼭 손수 빨아 입으시고 남을 시키지 않으셨다. 그리고 스님에게 상좌가 되려고 수없이 많이 찾아와도 자기 권속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권속을 두지 않으셨고 재난을 당한 자들에게는 재물을 구해다 주시고는 위안을 해주셨다.
그와같이 교화를 해나가시다가 말년에는 영암산에 가시어 절을 크게 지어서 정토종(淨土宗) 도량을 만드시어 정토종을 크게 펼치어 수많은 수행자들이 모여 염불수행을 행하였다. 스님께서는 항상 평등한 자비로서 부귀빈천 남녀노소의 차별함이 없이 다같이 친절하게 대해 주셨고 피곤할 때에도 찾아오는 분들을 싫어하지 않고 항상 혼연히 맞아주시어 손님들로 하여금 그 마음을 기쁘게 해주시어 스님에게 법을 배우러 찾아오는 내왕객이 끊길 사이가 없었다.
스님의 연세가 80세가 되신 어느날 온 대중을 모이게 하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이 절 주인이 곧 가게 되었으니 새로 주인될 스님을 대중들이 지금 선출하도록 하라"고 분부를 하셨다. 대중들이 "인광대사께서 추천하시라"고 하니 묘진스님을 추천하시어 대중들이 스님의 의견에 따라 묘진스님을 새 주인으로 모시기로 했다.
그래서 취임 날짜를 10일후로 대중들이 정하니 너무 늦어서 안되니 앞으로 당겨서 받으라고 하셨다. 그 때가 중화민국 29년, 1940년 10월 28일이였다. 그래서 5일 후로 다시 정하니 그래도 늦어서 안된다고 하시어 2일 후인 11월 초하루 날로 취임 날짜를 받아 그날로 새주인을 모셨다.
11월 4일 날이 되었다. 그날은 스님께서 아침 일찍이 하시는 말씀이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면 결정코 왕생극락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는 높은 소리로 염불을 하셨다. 그러다가 새 주인인 묘진스님이 들어오니 당부하시길 "이 절을 잘 지키도록 하되 내가 떠난 뒤에도 계속 정토수행의 도량으로 해나가야지 다른 것을 행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그러시고는 물을 가져 오라 하여 세수를 하시고는 앉으시더니 문득 일어나시며 "부처님의 왕림하심이로다"라고 말씀 하시고는 대중들께 염불정진을 하라고 하시고는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으시어 합장하고 염불하시고는 열반에 드시더라는 것이다.
그 때가 4일 아침 5시경 쯤이라고 한다. 날이 밝아진 연후에 보니 스님께서는 웃는 모습으로 열반에 드시어 단정히 앉아 계시는데 허리가 조금도 굽혀지지 않았으며 머리도 숙여지지 않고 반듯하게 그대로 하고 계셨다. 그리하여 대중이 공론하여 백일장으로 그 이듬해 2월 15일 부처님 열반 재일날에 장레를 지내기로 했다.
2월 15일 조문객이 만여 명이 넘는 많은 분들이 모여 염불을 하는데 그 염불소리는 마치 우뢰소리와 같이 천지를 진동하는듯 하였으며 이윽고 다비소에 이르러 모든 의식을 마치고는 화장대에 불을 붙이니 백설같은 흰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올라 가는데 그 연기가 오색이 찬란하게 빛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연기가 흩어지지 않고 저 멀리 서쪽 하늘로 길게 뻗쳐가며 아름다운 향취가 온 산천에 가득히 풍기었다.
그날은 날이 저물어서 습골을 하지 못하고 그 이튿날도 비가 와서 오후 늦게야 주지스님과 다비소에 가서 요기를 헤쳐보니 오색이 찬란한 사리가 모두 천여과가 넘었다. 그런데 그 형태가 여러가지였다. 어떤 것은 구슬처럼 둥근 것이며 혹은 꽃송이같이 생긴것도 있으며 혹은 연꽃잎처럼 생긴 것이 있으며 유골은 백옥같이 희면서 단단하기가 돌덩이와 같으며 또한 무겁기가 쇠덩이처럼 무겁더라는 것이며 서로 부딪쳐서 쇠소리가 났다.
그리고 치아는 하나도 빠진 것이 없이 온전히 다 있는데 32개가 백옥같이 희면서 찬란한 광채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지 특이한 점은 보통사람의 두골은 두쪽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스님께서는 연꽃잎처럼 생긴 골편이 다섯편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보통 스님들 사리는 그저 단단할 뿐이며 혹은 다소 광채가 날 정도라고 하는데 이 스님의 사리는 부처님의 사리처럼 오색광명이 아주 분명하게 나며 밤이면 더욱 찬란하게 밝게 빛을 낸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희유하고 신기한 일이 아닌가. 이 어찌 염불공덕이 아닐 것이며 불법의 영험이라 하지 않을 것인가.
또 한가지 이 스님의 사리에 대하여 신기한 일이 있는데 요기에서 대중이 사리와 유골을 전부다 가리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습골하고 난 뒤에도 지성껏 공을 드리면 사리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조금도 거짓이 아닌 실지로 그와 같이 되는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당시에 인광법사를 받들어 온 신도 중 한분이 원덕상이라고 하는 분인데 영암사 절에서 떨어져 있는 무석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분이셨다. 2월15일 인광법사 다비식에 참여하고는 자기가 다니는 그 지방의 절에 행사가 있어 인광법사 화장후 사리 습골함을 참견 못하고 부득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2일 후인 17일 날 인편에 들으니 인광법사의 유해에서 오색사리가 무수하게 나왔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는 사리를 친견하고자 그 즉시로 가서 보니 과연 듣던 바와 틀림이 없었다. 또한 지금도 인광법사 다비처로 가서 정성을 드리면 오색사리를 얻게 된다고 하자 인광법사의 사리를 얻고자 다비처로 부랴부랴 가서 보니 십여 명의 신도들이 사리를 얻고자 공을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요기 안을 보니 사리와 유골을 전부다 가져가고 재와 유골 부스러기가 약간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자기도 예배를 지성컷 드리고는 기도를 행하였다. 그런데 자기보다 앞서 와서 공을 드리던 분들이 이상하게도 모두가 사리를 얻게 되더라는 것이다 오직 자기 하나만이 아직 사리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성을 지극히 드리고 나서 요기 안의 재를 헤치며 사리를 찾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없던 재 속에서 사리 일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