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1. 나도 자유로운 하늘에서 살고파
장제스는 1967년 재 통일을 이룩한 이후로,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의 여파가 남은 북 중국의 재건과, 소련의 착취와 억압으로 굳어진 만주의 회복에 힘 써야 했습니다... 네. 경제적 부문에선 성공적이었습니다. 중공 내의 인사중 명망 있는 후야오방, 천윈등의 인사를 중용하며, 북 중국내 gdp만 10% 이상 상승하는 성과를 이뤘으니까요.
문제는... 시민들의 불만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전시 계엄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검열과 통제는 강화 되었습니다. 이를 비관한 언론인들의 자살 사건이 있었고, 계엄 사령부는 보도를 통제하며 유언장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장제스는 이런 사건들을 묻어버리고 앞으로 나갈것입니다. 해방이란 말은 거짓이었을까요?
G-T1. 누더기 왕국과 상처투성이 공화국
1967년 12월부터 시작된 “키프로스 위기”는 그 이듬해까지 팽팽하게 이어졌습니다. 미 6함대의 긴급출동에도 불구하고 키프로스 섬에서는 터키계 민병대와 그리스 왕국군 간의 전투가 끊이지 않았죠. 그리스 왕국의 수도는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오였으나 키프로스는 왕국이 실효지배하는 영토 중 가장 큰 섬이었고, 왕국 GDP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타협의 여지는 매우 적었습니다.
그리스 왕국은 실로 “누더기 왕국”이라 칭하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총리의 국토통합계획은 파파도풀로스 준장의 군사쿠데타로 엎어졌고, 크레타 섬의 중앙정부는 더 이상 키프로스를 비롯한 해상영토를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자칭 ‘북키프로스-튀르키예 공화국’을 격멸한답시고 민간인 대상 전쟁범죄를 자행하는 키프로스 방위군 역시 통제할 수 없었죠.
터키 역시 상황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쉴레이만 데미렐의 우익 정의당 정권은 좌익 케말주의 공화인민당 정권을 종식시켰지만, 집권을 위해 이슬람주의 세력 일부를 끌어들인 것이 문제였습니다. 은행강도, 가두 폭동, 총기난사 사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대학은 폐쇄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줄을 이었습니다.
데미렐 정권이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은 명약관화했고, 강력한 세속주의(케말주의)를 추구하던 군부는 그야말로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키프로스 사태에 이슬람주의 세력이 관여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도, 군부는 시급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G-T2. 병을 부리는데는 신속 해야만 하고...
그리고 터키의 군부는 소위 말하는 "각"을 잡는데 성공 했습니다. 데미렐은 조용히 퇴임 하지 않는다면, 키프로스에 대한 발언을 보도하겠다는 압박을 받았고, 결국 퇴임을 선언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부는 이스메트 이뇌뉘를 비대위원장으로 앉혔고, 그는 즉각적으로, 미국, 터키, 그리스 왕국간의 삼자 회담을 요구했습니다. 미국은 이 갈등을 중재할 필요를 느껴, 그리스 왕국에 대해 압박을 가했고, 결국 삼자 회담은 성사 되었습니다.
터키는 저번에 말했듯, 터키계 키프로스 주민에 대한 탄압행위 중단을 요구 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에게 있었습니다. 중앙 정부는 지방 정부를 통제 할 수도 없고, 군대를 통제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약속을 할 여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걸 해결할 수는 미국이 쥐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의 개입은 그리스가 독자로 설 길을 완전히 부정하게 될 위험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당면한 문제 해결을 더 중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올해 말에 대선이 치뤄지는것과는 별개로, 극동에서 "또" 사건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국은 그리스에 전폭적 지원을 약속, 그리스는 재발 방지를 약속하며, 이 사태는 "일단" 봉합 되었습니다. 다시금 일이 터질 시기를 엿보면서...
K1. 비겁한 변명입니다!
1968년 3월 30일 새벽 2시 40분 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장경찰대(무경) 대원으로 위장한 17명의 공작원들이 3대의 고무보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시 외곽에 잠입했습니다. 경계작전 중이던 호위사령부 제103대대 병력에 의해 발견된 이들은 산개해 약 3시간동안 치열한 교전을 벌이다 17명 중 16명이 전사, 1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자신을 ‘대한민국 국군 제1공수특전단 유세종 중사’라 소개한 공작원은 조선노동당 간부 및 기자단 앞에서 “최창익이 모가지를 따러 왔다”는 폭탄발언을 던졌습니다. 인민무력부 요원들이 추가심문을 위해 유세종을 인계받은 뒤, 최창익 국가주석, 남일 노동당 총비서, 김상덕 노동당 국방위 부위원장, 박창옥 국가계획위원장, 홍명희 내각총리, 정상진 선전상 등은 급히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이 사건의 대처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우선 회의석상의 모두는 ‘남조선 괴뢰정권’을 강력히 규탄하고 최고 국방대비태세를 갖추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쟁점이 되었던 주제는 소련과의 주둔군협정 체결의 건이었는데, 이는 남일, 정상진 등 구 코민테른파에 의해 적극 주장되었습니다.
한편 김상덕, 홍명희를 위시한 반대파들은 “조국해방을 위한답시고 외국 군대를 빌려오는 것은 자가당착의 논리”라며 격하게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각종 유격전 등 군 경력이 많은 김상덕 부위원장은 “공화국이 명분에서 앞서는 이 시점에서 소련군을 들여온다면 괴뢰들 역시 미제 군대를 들여올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열변을 토했죠.
밤을 꼬박 새워 진행되던 토론은 주조선 소련대사 잠불라토프 나가이(나백선)가 짤막한 전문을 보내오며 종결되었습니다. “당 중앙은 근시일 내에 극동 우방국에 병력을 주둔할 계획이 없다”는 내용이었죠. 미국과 소련, 중국 모두 직접 개입이 어려운 상황에서, 한반도의 정세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J1. 네? 그걸 믿으라굽쇼?
그리고... 일본에서도 사건이 터졌습니다. 정확히는 북 일본에서. 재일 교포 이 관휘가 라이플로 야쿠자를 사살하고,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한채 우체국을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인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재일교포의 인질극으로 끝날수도 있었겠지만, 증언 하나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남 일본의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고자, 북조선의 지령을 받고 파견 되었다" 라는 증언이었죠. 상식적으로 보았을때, 북 조선이 굳이 이런 사건을 벌일 이유는 없었겠지만, 이 증언이 어처구니 없게 외부로 유포 되면서, 파장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정부 차원에서는 정신병자의 증언 하나로 공산진영과의 마찰을 키울 이유는 없다고 덮으려 했으나, 방송사들은 아니었습니다. 극우 스피커는 목소리를 키워, 정부의 무능하고 안온한 대처를 비난했고, 연일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결국, 정부는 굴복하고 북조선에 해명을 요구했으나, 북 조선은 모르는 일로 일축하였고, 극우 진영의 세는 계속 커지고 있었습니다.
U1. Who shot Bobby? (누가 케네디를 쏘았나?)
민권투쟁의 격화와 지도부의 내분, 국가자유당의 공세로 핀치에 몰려있던 민주공화당은 1968년 대선 및 상하원 의원선거를 반전의 기회로 삼아야 했습니다. 경선 레이스의 선두주자는 단연 당내 리버럴의 거두인 로버트 프랜시스 케네디. 그 뒤로 휴버트 험프리, 클레이 스모더즈, 조지 맥거번, 넬슨 록펠러 등이 줄을 이었죠.
그러나… 텍사스 주 경선이 끝나고 난 뒤인 5월 15일, 비극적인 사고가 벌어집니다. 유력 대권후보 로버트 케네디가 한 스페인 국적 괴한에게 암살당한 것이었죠. 스페인 침공을 지지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고는 하는데… 아무튼 자세한 사항은 극비에 부쳐졌습니다. 그리고 민주공화당은 아비규환에 빠졌습니다.
결국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민주공화당 경선은 케네디의 정치적 노선과 가장 유사했던 자유주의 공화당 출신 넬슨 록펠러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런닝메이트는 휴버트 험프리로 결정되었고 말입니다.
국가자유당이 대통령직 방어전을 준비하는 동안 민주공화당은 극심한 부침을 겪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진보주의자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케네디의 죽음은 그를 지지하는 모든 시민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팠습니다. 이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U1-1. 미국 진보당의 여명
한편, 수십개의 군소세력으로 나뉘어있던 미국 내 좌익세력들이 민권운동의 격화를 계기로 한 텐트 아래 모이게 되었습니다. 소련식 지도자원리를 고수하던 거스 홀의 미국공산당은 통합에서 배제되었지만, 수정 마르크스주의부터 사회민주주의, 일부 급진 리버럴까지 포괄하는 미국 진보당(APP)의 여명이 밝았습니다.
진보당은 통합 경선을 통해 레오 아이잭슨(Leo Isacson) 뉴욕주 하원의원을 정후보로, 흑인 정치가이자 역시 뉴욕주의 하원의원이었던 애덤 클레이튼 파월(Adam Clayton Powell)을 부후보로 선출했습니다. 이들은 민주공화당의 우유부단함, 국가자유당의 수구성에 질린 유권자들의 표를 상당히 잠식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S-S1. 개입인가. 묵인인가? 아니면, 다른 길은 있는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둡체크 서기장은 연초부터,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급진적인 민주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개혁이 "68세대"를 위시로 한 움직임을 불러 올수 있다는것과, 그것으로 인한 파동이, 유라시아 공산권을 위협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것 입니다.
이 파동이 위협할 국가는 최소한 세곳이었습니다. 너지 임레를 처형하고 야노시를 세운 헝가리, 팔미로 톨리아티를 몰아내고 바지사장을 세워놓은 북 이탈리아, 카를 레너를 쳐내고, 요한 코플레닉을 세웠던 오스트리아. 네. 죄다 업보로군요. 아무튼간에...
소련이 택할수 있는것은, 크게 나눠서 두가지 길이었습니다. 묵인을 택하여 공산권의 연대를 흔들되, 신뢰를 회복 하는가, 개입하여 공산권을 안정화 하되, 신뢰를 완전히 박살낼것인가. 소련은 무엇을 택했을까요.
Ma1. 말레이시아 공산화?
말레이시아는 1948년에서 1960년까지, 독립을 위해 영국군과 투쟁 했었습니다. 그리고, 60년에 영국이 방어를 성공 했으나, 몇년 지나지 않아 말레이시아는 독립의 씨앗을 거뒀습니다. 그러나... 독립의 지도자였던 칭 펭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것 같습니다. 1968년 현재. 다시금 칭펭이 군대를 이끌고 사회주의 정부를 이끄려 합니다.
주변에 도울 국가는 모두 패망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상선을 기습하고, 철도나 치안국을 공격하고, 적 요인을 암살해 나가기 시작 했습니다. 말레이 정부는 주변국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의 결말은 어떻게 끝날 것입니까?
K2. 사람도 자원이다. "인적" 자원.
제2차 국공내전을 전후해 성립된 한국의 유신 정권은 필리핀의 마르코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를 연상시키는 철권 독재정이었습니다. 반대파들은 쥐도새도 모르게 끌려가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북한과는 상시적 전쟁위기 국면에 접어들었죠.
박정희 대통령의 친위 무력인 중앙정보부 역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습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국내의 모든 정보를 쥐락펴락하며 위세를 과시했고, 가히 한국의 KGB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정도였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김형욱 부장이 박종규 경호실장,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과 밀접하게 교류하며 차기 대권의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이었죠. 중정의 월권을 견제하기 위해 박 대통령은 군 방첩대를 보안사령부로 격상, 사령관 자리에 윤필용 소장을 임명했습니다.
사건은 김형욱 중정부장이 주최한 군 간부 소연회에서 시작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도시 빈민촌 구제 및 남서울(강남) 지역 대규모 개발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그 자금지원을 위해 조성한 것이 소위 “국민복지회”라는 국부재단이었습니다.
연회에서 한 영관급 장교의 발언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국민복지회 자금을 관리하는 게 중정이고 김 부장님인데, 은행도 수수료를 챙기는 마당에 부장님한테도 무언가 인센티브가 붙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말이었죠. 이는 김형욱이 대권 후계자로 지목받아야 한다는, 다분히 아부성 짙은 발언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안사에 의해 그 내용이 윤색되어, 박정희에게는 “김형욱이 국민복지회 자금 수천억원을 횡령한다”는 뉘앙스로 전달되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윤필용 사령관은 극비 명령을 받고 새벽 4시 경 중정 건물에 헌병대를 보내 초유의 압수수색을 실시하는 한편 김종필, 박종규, 이후락 등 여당 및 정부 내 동조자들을 긴급체포했습니다.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수십명 역시 고초를 면치 못했습니다.
중정의 우두머리인 김형욱과 수석참모격인 1차장 이후락이 제거됨과, 김종필이 일본으로 쫒겨나고, 박종규가 기소되어 구속수감되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박정희는 다시 한번 권력투쟁에서 달콤한 승리를 맛보는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권력유지 및 통제를 위한 자원이 점점 바닥나고 있으며, 자원의 핵심은 ‘충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S-S2. 공산권에도 봄이... 올까요?
68년 6월 28일. 코시긴과 둡체크는 서로 회담을 가졌습니다. 코시긴은, 개혁 노선의 존중과 함께, 서로간의 관계의 유지를 요청함과 동시에, 몇몇 보고서를 가져 왔습니다. 둡체크는 코시긴의 요청을 고려하면서, 근간의 사건을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56년의 너지 임레, 66년의 은하수 작전, 67년의 배상 거부들.
긴 고민 끝에, 둡체크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을 신뢰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위성국으로써 그들을 무시하는것은 불가능하다는 명확한 사실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변화를 존중 받을수 있다면, 그 말을 들어볼 필요는 있다는것.
6월 29일.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는 니트라 선언과 함께, 공산권 국가들간의 신뢰 회복 및 관계증진.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해석 자유화와 내정 불간섭을 천명하는 코시긴 독트린을 발효했습니다.
그리고, 6월 30일. 크렘린에는 전화가 끊기지 않았습니다. 통제하에 있던 위성국의 지도자들은 크렘린에 항의? 해명? 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코시긴은 그들에게 당 중앙의 전문과 함께 현 상황을 설명하여, 이해받는데 성공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개혁 사회 주의를 채택 할지는 의문스럽습니다. 권력을 내려 놓는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고, 그 권력으로 본인이 유탄을 맞지 않을지를 걱정 해야 하는게 일상이었으니까요.
W1. 핵 확산 방지 조약? 그거 논의나 가능합니까?
UN 총회는 핵 무기의 무분별한 사용을 막기 위해 핵 확산 방지 조약을 논의 하고자 했습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핵을 보유 하고 있다고 들먹거리는 남아공과 아르헨 둘 모두, UN의 국제 재재를 받고 있다는 것이고, 이 상태에서 가결 된다 한들, 실질적인 가치를 가질수 있냐가 계속 발언 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련, 미국, 프랑스 세 국가 모두 더 중요한 문제가 앞에 있었기에, 이 회의는 결국 내년으로 바통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S1. 신 신경제 정책.
코시긴 독트린의 발효와, 개혁 사회주의의 바람은 여러곳에서 불고 있었습니다. 너지 임레의 복권과 함께 카다르 주의를 채택한 헝가리, 체제 우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큰 결단을 내린 북한, 2년만에도 국가가 개판이 될 수 있다는걸 알뻔한 루마니아... 그리고, 소련.
소련의 경제 관료들은, 부하린의 신 경제 정책과, 헝가리의 카다리즘과, 여러 자료를 연구하며, 새로운 정책의 도입을 논의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두 선례를 들어, 시장 경제등 자본주의의 제도를 사회주의 체제에 도입하는것이, 장기적으로 옳다는 결론을 내었고, 이 결론에 의한 보고서는 장관회의에서 갈등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보수파와 혁신파는 서로 농업 개혁때의 성과와 예산등을 근거로 들며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보고서의 옳고 그름만으로 판단하자는 서기장의 해석으로 혁신파가 승리, 기업의 이윤추구 허용/소규모 자영업 허용 등의 경제 부문에서의 점진적인 자본주의 요소 도입을 실시했습니다.
이 정책의 변화는 인민들에게 혼란을 줄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책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소련에게 큰 변화를 불러 올 수 있을것입니다...
NI1. 혁명은 추도식에서 시작된다.
68년 8월 21일. 니트라 결의가 이뤄진지 약 2개월이 지난 지금, 밀라노의 광장은 지식인과 학생들의 성토의 장이 되었습니다. 왜 이런지는 시계를 잠깐 돌려서 보도록 하죠.
6월 29일. 프라하에서의 회담이 "그나마" 볼만하게 마무리되고, 니트라에서 선언문이 낭독 되며, 특색 공산주의의 장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 흐름을 막아서는 국가가 있었습니다. 네. 예상하셨듯, 북 이탈리아입니다. 이유는 생각보다 복잡하면서, 간단했습니다. 만악의 근원. 스탈린이지요.
이탈리아 공산당은, 소련이 진주 하기 전에도 세력이 강성한 편에 속했습니다. 그 중심엔 팔미로 톨리아티 서기장이 있었지요. 문제는, 스탈린은 위성국의 그런 강맹한 지도자를 원치 않았다는것에서 시작됩니다. 스탈린은 팔미로 톨리아티를 밀어내고, 새 서기장을 임명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누가 봐도 억지로 밀어내고 세운 티가 났다는 점과, 팔미로 톨리아티 서기장의 미심쩍은 죽음이지요...
그리고, 근 20년이 지난 지금. 소련은 그때의 업보를 돌려 받을때가 되었습니다. 새 서기장은 톨리아티 동지보다 잘 하지 못했고, 그걸 폭압적 통치로 해결 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상황이 열렸음에도 부정했지요. 그리고 시민들은 불만에 차, 8월 21일. 톨리아티 동지의 추도식을 위해 모였고, 그 자리는 공산당에 대한 비판과 성토의 장이 되었습니다.
네. 과정은 헝가리 혁명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련에게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코시긴 독트린이지요. 내정 불간섭을 천명한 지금, 시민들이 "어떤 행동" 을 하더라도 외통에 몰려버린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서기장은 개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대 개혁을 요구하고 있지요. 아직 시간은 남아 있습니다. 소련은... 어떤것을 골랐을까요?
S-S3. 변화인가. 붕괴인가.
코시긴 독트린은, 동구권을 휩쓰는 바람이었습니다. 그리고 "68혁명" 이 시작 되었습니다. 강압적인 통제를 하는 공산당을 몰아내고 싶어도, 56년의 핏빛이 뇌리를 선하게 스치는 시민들에게, 내정 불개입 선언은, 그 핏빛을 피하는 방안중 하나가 되었을겁니다...
위에 말했듯, 헝가리, 체코, 북한, 루마니아는, 개혁 사회주의를 채택하여 시민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명확한 적대국을 가진, 북 일본과, 그리스의 경우는 통제를 유지해도 불만을 덜 가지게 할 수 있었지요. 핀란드는 애초에 별 관심이 없었고, 몽골은 국경이... 네. 이제 남은 문제는 명확했습니다. 본인의 업보인 오스트리아와 북 이탈리아. 그리고 제일 통제받으며, 모두가 경계하는 독일.
개혁 사회주의와, 내정 불 개입을 천명한 코시긴 독트린을 선언한지 몇개월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시위대를 깔아 뭉갤수도, 지도부를 끌어내고 강제로 개혁을 요구하는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제일 급한 산은, 북 이탈리아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경우는 이탈 하더라도 최악이 중립 선언으로 예상 되었고, 독일의 경우는 이탈이 "불가능" 했으니까요.
북 이탈리아의 시위대가 요구하는것은, 소련이 파악하기로는 개혁과 자유를 요구하는것으로 보이지만, 통일을 요구하는 세력도 만만찮게 보였습니다... 소련은, 최소한 통일파가 정권을 잡는건 막아야 한다는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반소와 유럽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정권의 중심에 서는것 또한 막아야 하는 큰 과제를 해결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소련은 이간계를 펼쳐, 통일파와 개혁파, 온건파를 분리해 냈습니다. 그리고 통일파가 힘을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 통일 비용과 경제 규모를 언론에 풀었고, 이는 큰 성과를 거뒀습니다. 통일파는 제대로 된 성과를 낼수 없었고, 개혁파와 온건파가 시위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공작을 펼치는 동안, 북 이탈리아의 지도부에 접근해 안전 보장을 약속했고, 결국 북 이탈리아의 시위는, 통일도, 반소도 아닌 북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와, 톨리아티의 복권으로 마무리 지어졌습니다. 오스트리아도 카를 레너를 복권하며 어느정도 불이 잡혔습니다.
이제 남은 독일이라는 큰 산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알렉세이 메스너라는 신예 외교관이 그 시간을 줄여주길 바라야겠지요.
U2. 1968년 미국 대선.
케네디 암살 사건과, 햄프턴의 사망과 민권 운동의 격화의 내홍과, 스페인 전쟁, 남한의 핵개발, 키프로스 사태등의 외홍을 지나온, 11월 5일. 결전의 날이 밝았습니다.
국가 자유당은, 재선을 위해 존슨과 골드워터를, 민주 공화당은 케네디를 계승할 록펠러와 험프리를, 진보당은, 아이잭슨과, 파월을 후보로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변이 발생 했습니다. 아니, 이변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총 538개 선거 인단중, 135개의 선거 인단을 진보당이, 현직 대통령인 존슨이 163개 선거 인단을, 그리고 민주 공화당이 240개 선거 인단을 가져가면서, 아무도 과반의 선거 인단을 확보하지 못했고, 공은 상,하원으로 넘어갔습니다.
상원 선거도 마찬가지로, 아무당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면서, 부통령도 확정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원 선거에선 국가 자유당이 과반을 차지하여, 결국, 존슨이 재선 되는 결과와 함께, 이 결과로 민주공화당과 진보당이 상원에서 연대하여, 험프리를 부통령으로 선출 하였습니다.
존슨이라는 자유당 온건파와, 험프리라는 민주공화당 보수파의 조합이라는 무난한 조합의 대통령이 선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결국 의회에서 선출 된 셈이며, 국가 자유당이 과반을 점유한 의회는, 국가를 얼마나 변화 시킬수 있을까요. 1969년의 세계는, 어떻게 변화 할까요...
-------------------------------------------------------------------------
1969년 주요 사건.
- 독일의 사회주의.
- EC-121 격추 사건 (역)
- 아폴로 계획.
- 우수리강 국경 분쟁.
- 코시긴 암살 미수.
- SDS 시위.
- 코르도바 시위
- 리비아 쿠데타
- 분노의 날 (시카고)
- 영국 광부 파업
+ 위 사건들 또한 모종의 이유로 생략 될 수 있습니다.
+ 당연히 여기 없어도 써주시면 쓰겠습니다. 항상 감사 드립니다.
-------------------------------------------------------------
+ 별개로 밤에 편집 하게 되네요 ㅎㅎ... 그래서 사진 퀄리티가 좀 그런거 같고... 글에 만족하면 되는거니까요!
@돈이 곧 진리 이미 2004년부터 금지 때린걸로 알고 있어서.
나무위키 찾아보니 2017년 호4도 금지 때렸다는데?
아니 애초에 중공에서 유튜브 사용이 가능하던가?다른곳에 올라간걸 누가 유튜브에 올린거겠죠?
@931117 빌리빌리에 올라간걸 한국인이 자막 달아서 유튜브에 올린겁니다. 중공은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그런데 구리나자나 주우동 등 중공 배우들 중에서 인스타 계정 가지고 있는 이들이 꽤 되서 잘 모르겠음), 다음, 네이버, 야후, 유튜브 전부 금순공정으로 막고 있어요.
@931117 금지 때렸다고 안 하던가요 ㅋㅋ 다 우회해서 할거 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dear0904 유해사이트로 막는다고 폰허브나 히토미 안 들어가는 사람 있덥니까.
@dear0904 저런 영상 보다보면 중국 보컬로이드 돌리는것 같은데.그럴라면 중국인이 아니고서야 쓸리가 없으니까요.일본이야 보컬로이드가 널려있는데 굳이 쓸리가 없으니까.
금지 사유가 티베트가 독립국인거랑 대만이 일본 영토로 나와있어서로 알고 있습니다
@돈이 곧 진리 근데 그럼 비리비리를 검열도 안한답니까?금지 게임 한거 걸림 잡혀갈텐데?
+ 검열 패싱 얘기 나오는걸로 아는건 도라에몽 정도인데
@931117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빌리빌리 들어가보면 뜨노나 카라 스트리밍도 하고 그러던데...
+ 5공 드라마도 거기서 합성물 재료로 쓰는데요 뭐.
@돈이 곧 진리 얘들 검열 기준은 도대체 뭐야??
일본 애니도 아예 프리패싱 얘기 나오는거랑 이게 왜 방영 금지야?하는 이유로 금지 때리더니만?
@dear0904 당연히 휴이 롱이죠 ㅋㅋ
폭력과 무법과 극우로 기업 독재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
@렌지파일 역시 미국은 올슨 각하밖에 답이 없군요. 페어딜 만세!
@dear0904 참고로 저 빌 엡튼이라는 양반은 원역사에서 마오주의자였습니다(…)
여기선 마오가 개같이 멸망해서 아마 독일식 반수정주의를 따르지 않을까 싶네요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뭐야 방금... 맨 아래쪽에 있는 슈나이더님 댓글 아래에 내가 맨 처음으로 단 댓글이 있었다?
그 오류 더럽게 자주 나니까 의식 안하는게 좋습니다... 모바일만 나는 오류기도 하고.
[사망전대]
여기 장년의 한 공산당원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보리스 옐친으로. 스베르들롭스크주 지역당의 지역당원이자 술을 매우 좋아하는 술고래입니다. 그에게 있어 맥주나 크바스는 곡물로 만든 탄산음료요, 와인은 과일 주스에 불과합니다. 보드카 정도는 되어야 술이라 처준다죠. 그는 최근 기분이 좋습니다. 왜냐고요? 바로 이전에는 보드카 2병을 마실 수 있던 돈으로 지금은 3병을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는 단골 술집에서 보드카를 잔뜩 주문하고선 살로(돼지비계를 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지의 전통식품)과 절인 오이를 안주로 보드카를 ‘흡수’하다시피 마시고 있군요. 그런데 오늘은 달랐습니다. 갑자기 그가 가슴을 부여잡고 카운터에 쓰러졌습니다. 허나 주변이 워낙 시끄러운데다 술먹고 졸도하는 일이 잦아 별일 아니라는 듯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술집 영업이 끝날 때까지 쓰러져 있는 것을 의아해한 한 손님이 옐친을 살펴본 결과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보리스 옐친은 1969년 10월 15일. 오렌지병인 과음으로 쓰러졌습니다. 삼가 고인의 띵복을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빈뒤 X키를 눌러 액션 빔 프로젝터.
인물사는 되도록 안 쓰기로 했던것과 별개로, 이 옐친이 그 옐친이 맞나요? 31년생이면 39세인데, 장년이라 묘사한거 보니 동명 이인인가 해서.
@dear0904 우리가 아는 그 옐친 맞아요.
또죽는군요...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망전대/군축 사안에 부가되는 사안. 이 이외로, 하나 더 있음/스포지만, 다른걸 위해 공개)
소련은, 신-신 경제 정책을 도입 한 이후, 기업의 이윤 추구를 허가 했습니다. 제도 도입 초반에 혼란이 있었으나, 교육과 라디오 방송은, 적응에 도움을 주었고, 이 제도는 곧 사회 내부로 뻗어나가, 인민의 상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방의 인민들은 당연하게도, 주류 사업에 뛰어 들었습니다. 연방의 주류 소비량은 세계 1위였고, 생산량은 그에 못 미쳤으니까요.
사업은 매우 성공적 이었습니다. 네... 초반엔 말이죠. 질과 양 모두를 잡은 연방의 술이 사회에 팔리기 시작하자, 사업가들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료를 조금 싼거를 쓰더라도, 고급 재료의 함량을 줄이더라도, 싼 술이나 주정을 사서 섞더라도. 인민들은 좋다고 사지 않을까? 라고...
그리고 사업가들은 이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초반엔 좋았죠. 질이 떨어져도 좋다고 샀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한 두번 반복 되자... 인민들은, 상점의 술을 믿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마곤" 열풍이 시작 되었습니다. 쓰레기같은 술을 먹느니, 차라리 직접 만들어 먹겠다 하는 생각이었죠. 결국 비극이 시작 되었습니다. 제대로 증류를 못한 술에 함류된 메탄올을 먹고 실명된 환자와, 상한 술을 먹고 식중독에 걸린 환자가 속출했으며, 주류 회사를 차렸던 사업가들은 파산을 면치 못했습니다.
소비에트 지도부는 이 사태를 보고, 금주법의 제정과 함께, 품질 관리법으로 주류와 생산품의 품질 단속에 들어갔습니다. 이 여파의 개선은, 얼마나 걸릴지 예상되지 않고 있습니다...
+ 사실 글로 써서 보여드리는게 도리인데, 망할 놈의 시간이... 그래도 주말엔 쓸 수 있겠죠?
이것만 해도 큰일인데 하나가 더 붙는다니 원...
+ 금주법보단 금주 캠페인이 더 알맞지 않은가 싶은데...
@돈이 곧 진리 아. 용어의 문제인데... 밀주 단속법 (한국의 막걸리 보안법? 단속법?) 입니다. 갑자기 생각이 안나서 단순한 용어로 썼네요.
@dear0904 엌ㅋㅋㅋㅋㅋㅋ…
2010년, 롯x마트 “통큰치킨”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자 공정거래위원회는 기존 치킨 프랜차이즈의 가격담합 의혹에 대한 전격 조사에 나섰습니다. 주요 업체들의 마진 담합이 문제되어 구속력 있는 시정요구안이 전달되었고, 업체들은 더 이상 높은 가격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치킨 프랜차이즈들의 선택은 따라서 원가를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기름을 재사용한다던지, 단가가 낮은 수입산 닭을 사용한다던지, 품질관리비용을 낮춘다던지… 때문에 치킨의 질과 양은 급전직하하기 시작했죠.
치킨을 사랑하는 한국인들은 분노했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주축으로 “내산내튀(내가 산 닭 내가 튀기기)”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실제로 몇몇 이들이 놀라운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며 치킨 시장이 긍정적인 자극을 받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내산내튀” 치킨들 중 일부는 폐사해 부패가 진행중인 닭고기, 위생상태가 의심되는 기름을 사용하는 등 상태가 아주 불량했습니다. 심지어 어디서 구해왔는지 비둘기를 튀겨먹다가 중금속 중독으로 미나마타병 집단발병사태가 일어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죠.
@dear0904 식약처는 경악을 금치 못해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에 헬프를 쳤고, 보건복지부는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온갖 뉴스채널에서 이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하자 철밥통 공무원들 역시 국회의 국정감사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야 의원들은 이 치킨 소동과 연관있는 부처들을 탈탈 털면서 공무원들을 괴롭혀댔죠.
그러나 극심한 레임덕에 빠진 이x박 정부는 무언가 강력한 조치를 취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치킨 문제는 실제 ‘닭’이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To be Continued…?
@E.E.샤츠슈나이더 엌ㅋㅋㅋㅋㅋㅋ 이건 웃기네요 ㅋㅋㅋ 마지막이 킬포 ㅋㅋ
@E.E.샤츠슈나이더 ㅋㅋㅋㅋㅋㅋ
다음화 드디어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