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남미 카페 라틴방 원문보기 글쓴이: 부에노
아르헨티나의 끝없는 콩밭
아르헨티나 국가 부도의 교훈, 마지막 편
지도층 부정부패와 병든 국민의식이 나라살림 거덜냈다
한때 세계 6위의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가 2001년 말 국가부도 상태에 빠졌다.
1,400억달러가 넘는 外債에 40%가 넘는 실제 실업률 등 해결해야 하는 과제도 첩첩산중이다.
무책임한 지도자들의 잘못된 환율정책과 긴축정책이 이번 위기의 직접적 원인이지만 보다 뿌리깊은 원인은 따로 있다.
바로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함께 병든 국민의식이 어울려 빚은 비극이라는 것이 아르헨티나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필자의 분석이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요 광장에서 2001년 12월 20일 거리로 뛰쳐나온 성난 군중들이 정부청사에 돌을 던지고, 불타는 자동차, 상점 문을 마구 부수고 뛰어드는 약탈 행렬과 방화, 시위대와 진압경찰간의 격렬한 몸싸움, 대통령의 사임, 그리고 임시 대통령의 사임으로 이어지면서 혼미를 거듭하는 아르헨티나 정국….
연말연시를 기해 전세계를 경악시킨 이런 장면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1980년대 독재국가의 모습이 아니다.
국민들의 교육수준이나 소득이 낮은 저개발국 얘기도 아니다.
한때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었던 아르헨티나, 남미에서 중산층이 가장 두터운 나라가 이렇게까지 망가지는 모습은 의외일 수 밖에 없다.
지난 1960, 70년대 수만 명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기 좋은 이 땅을 찾아 떠나기도 했던 '꿈의 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오늘의 아르헨티나는 1인당 GDP 7,700달러의 통계에도 불구하고 빈곤층이 인구의 44%에 달하고, 완전실업이 18.3%에 이르는 왜곡된 사회다.
대대적인 공기업 민영화후 민간기업들의 경영방침에 따라 실업이 양산되었기 때문이다.
페소화의 고평가와 수입 자유화로 인한 산업생산의 위축으로 노동자들은 갈 곳을 잃게 되었다.
불완전고용을 합치면 실업률은 무려 40%에 육박한다.
많은 외자(外資)가 유치되었지만 생산부문으로 투입된 것은 자동차 등 일부 산업에 국한되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외환, 증권 등 금융투기, 해외 자본 도피로 소진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신흥시장에서 가장 투자위험도가 높은 나라로 전락했다.
1,420억달러에 이르는 디폴트(채무불이행) 규모는 사상 최대이고, 국가위험도의 척도인 국채가산금리는 지난 1월10일 현재 5,070bp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아르헨티나 국채금리가 미국 재무부 채권 금리에 50%포인트 이상 얹어 주어야 거래됨을 의미한다.
누구도 이 나라의 채권을 사려 들지 않는 마당에 이런 수치는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국내 실세금리인 30일물 페소화 금리도 지난해초 10% 수준에서 지난해 11월 이미 55%를 돌파했고, 최근에는 아예 금융경색으로 자금이 돌지조차 않는다.
한때 초(超)인플레를 걱정해야 했던 아르헨티나에서 1999년부터는 불황으로 인한 내수감소로 오히려 디플레이션이 일어나 지난해 물가상승률은 -1.3%를 기록했다.
위기 원인 놓고 네 탓 내 탓 공방전
이번 아르헨티나 사태는 한마디로 페소화 고평가로 산업경쟁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장기간 지속된 재정긴축정책이 내수 위축과 투자 저하를 불러온 데 직접적 원인이 있다.
장기불황은 고실업과 사회 불만을 낳았고, 여기에 정치 지도력 부재와 국제통화기금(IMF)의 무책임하고 부적절한 대응이 겹치면서 마침내 전국적인 약탈, 방화 사태로 번지고 대통령 연쇄 사임이라는 정치공백으로 이어진 것이다.
세계의 학자들과 국제기구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 상황을 두고 각기 엇갈린 견해를 내놓고 있다.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보면, 한 주장은 IMF의 잘못된 위기 처방과 계도 혹은 세계화(世界化․globalization)의 오류에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있고, 다른 주장은 아르헨티나 정부의 방만한 재정지출과 부패에 책임이 있다는 반론이다.
즉, 네 탓 논쟁이다.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필자는 외부보다 내부의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깝고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 고정환율정책 지속과 무리한 재정긴축 시도에서 비롯된 위기여서 이를 권장해온 IMF에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
특히 2001년 말 IMF는 갑작스럽게 강경한 태도로 돌변해 아르헨티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의 문제는 페르난도 델라루아 정부에 앞서 카를로스 메넴 정부 시대에 이미 싹텄다.
적시에 환율정책의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 정치적 무책임이 근본 원인이다.
재정수지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탈세를 근절시키고 세수기반을 확충하는 등 재정기강 확립을 택하기 보다 단순한 재정긴축으로 문제를 미봉하는 데 급급했다.
물론 이같은 정책 실기(失機)의 배경에는 뿌리깊은 정경유착과 부패, 해외 재산도피같은 환부가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페론이즘으로 대변되는 과거 비전 없는 지도자들이 부채질한, 복지국가 이념에 중독된 나약한 국민의식과 개혁 거부 태도가 경제정책 운영의 효율을 떨어뜨리고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킨 점도 간과해서는 안되는 아르헨티나 병의 특수성이다.
오늘의 사태가 처음이 아니라 지난 반세기 동안 계속된 아르헨티나 정치, 경제의 병리현상이어서 단면분석만으로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옥수수 밭 역시...
환율정책과 긴축정책이 실패의 직접 원인
달러화와 페소화의 1:1 교환으로 유명해진 아르헨티나의 이른바 '태환제'는 지난 1991년 처음 도입됐다.
2001년 12월19일 델라루아 대통령이 정부의 예금인출제한조치와 긴축정책에 항의하는 지방 소요를 계엄령으로 진압하려다 대통령직을 사임한 것처럼, 12년 전인 1989년 라울 알폰신 대통령은 연 4,923%의 초인플레 속에서 식량폭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계엄령을 선포했다가 조기퇴진했다.
당시 취임 일정을 5개월 앞당겨 1989년 말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은 인플레 억제에 정치 생명을 걸었고, 마침내 도밍고 카발로 경제장관을 입각시켜 '태환제'를 만들어냈다.
이 제도는 1991년 당시 기존 화폐인 '아우스트랄'과 미 달러화의 교환비율을 10,000 대 1로 고정시킨 후 '태환법'(兌換法․Law of Convertibility)을 제정해 고정환율제를 법적으로 보장한 것이다.
이는 홍콩이 택하고 있는 통화위원회제도(currency board system)와 유사한 것으로 민간 및 민간은행 보유 현금과 민간은행의 중앙은행 예치금의 합계인 본원통화(현금)가 외환보유액을 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와 함께 외환거래에 관한 모든 규제를 철폐하여 국내통화의 가치를 보장했고, 아우스트랄화(貨)는 1992년 1월1일을 기해 0자 4개를 떼어내고 10,000 아우스트랄=1페소 비율로 페소화로 대체되어 마침내 '1페소=1달러'의 등가교환 공존시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태환법 하에서는 외환보유고가 늘지 않는 이상 정부가 마음대로 현금을 찍어내지 못하고, 누구나 페소화를 달러화로 바꿀 수 있도록 보장하였기 때문에 국민의 인플레 심리를 하루 아침에 제거하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태환제를 도입한 직후 월평균 소비자물가는 1.2%에 머물러 태환제 실시 직전인 1991년 2월의 평균 27% 수준과 대조적이었다.
1992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7.5%로 1969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었으며, 태환제 실시 2년 반만인 1993년 8월의 인플레는 마침내 0%를 기록했다.
과거 정부가 인기관리를 위해 노동자나 지방정부가 재정지원을 요구하면 통화 남발로 대응하는 것이 상례였던 남미 국가 아르헨티나가 통화위원회제도를 도입하기는 사상 유례 없는 것이었다.
국제사회는 메넴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을 높이 평가했고, 그는 인플레 억제의 치적으로 1995년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고정환율제는 국제 환경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1994년 멕시코, 1997년 한국, 1999년 브라질의 통화위기가 모두 관리변동환율제라는 일종의 고정환율제를 고집하다 경제파탄을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나라는 모두 그 이후 자유변동환율제로 환율제도를 바꿔 채택했다.
아르헨티나의 태환제는 다른 나라들처럼 일정 변동폭 내에서 환율을 조금씩 조정하는 방식도 아니고 달러화와의 1:1 완전 고정환율제였기 때문에 더욱 경직된 제도였다.
1990년대 클린턴 행정부 하에서 미국경제가 유례없는 붐을 타고 달러화 가치가 높아지자 이에 연동된 페소화 가치 역시 높아졌다.
이는 아르헨티나가 생산하는 제품이 상대적으로 비싸져 가격경쟁력이 떨어짐을 의미한다.
그 결과 수출이 막히고 기업활동이 둔화됐다.
외국인투자기업들은 다투어 브라질 등 인근 국가로 생산기지를 이전했다.
실업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94년 말부터 1999년 초까지 멕시코에 이어 아시아 국가들과 러시아, 브라질 등 개발도상권이 속속 통화위기를 겪으며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태환제를 고수한 아르헨티나 페소화의 상대가치는 경쟁국에 비해 갈수록 높아졌다.
이에 따른 경상수지 적자를 아르헨티나는 외채를 끌어들여 해결하려 했다.
요약하자면 인플레를 잡으려다 경제침체와 실업, 외채 증가를 부추긴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경제난의 원인도 해법도 모두 경제정책에 있다'는 말이 있듯 만일 아르헨티나 정부가 태환제를 조기에 포기하고 자유변동환율제로 갔더라면 지금과 같은 파국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이를 진작 실행하지 못했을까.
메넴은 태환제로 경제안정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공기업 민영화와 외국인 투자유치, 금융시장 개방정책으로 해외자금을 끌어들여 1991~94년 연평균 7.7%의 고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1994년 12월 멕시코의 페소화가 평가절하되자 중남미 신흥시장으로부터 자본 이탈이 시작됐다.
그 당시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가 아르헨티나였다.
경제성장률은 -4.4%로 추락했고 그 반대로 실업률은 16.4%로 치솟았다.
당시 아르헨티나 업계는 페소화가 20% 가량 고평가되어 있다며 경쟁력 회복을 위해 태환제 포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해 대선과 총선을 치러야 했던 메넴은 태환제 포기와 페소화 평가절하가 가져올 수 있는 경제혼란을 우려해 정책 결정을 끝내 미루었다.
오로지 1996년 이후 비난의 표적이 되어온 카발로 경제장관을 해임하는 미봉책으로 경제위기를 무마하려 했다.
1997년 아시아 위기의 여파가 몰려왔을 무렵에도 메넴은 근본적인 치유책인 경제개혁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시 그의 관심은 오로지 3선 출마뿐이었다.
태환제 폐지와 국민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구조조정은 그로서는 너무 위험한 모험이었다.
경제개혁 대신 매년 IMF를 비롯한 국제금융기관들과의 협상을 통한 금융지원에 목을 매는 미봉책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했어도 그는 국민의 지지를 받는 데 실패하고 물러나야 했다.
1999년 12월 메넴으로부터 빚더미 경제를 떠맡은 델라루아 대통령 역시 평가절하의 필요성은 인식했지만, 평가절하후 자신에게 닥칠 정치적 부담을 두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평가절하에 따른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페소화 평가절하는 외채 상환 부담의 확대와 물가상승, 빚더미 대출기업 및 가계의 파산, 부실대출 금융기관의 도산, 실업 증가로 이어져 극심한 사회혼란을 초래할 것이었다.
만일 델라루아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평가절하의 결단을 내리고 그 모든 후유증의 책임을 이전의 메넴 정부의 실정(失政)에 그 책임을 떠넘길 수 있었다면 2001년 말과 같은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어차피 소요사태 속에 사임할 운명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델라루아 대통령은 그같은 기회를 공중에 날려보내고 조국을 끝이 안보이는 혼란 속에 몰아넣고 말았으며 자신은 실패한 대통령으로서 임기도 채우지 못한 채 비참하게 권좌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사실 델라루아 정권은 그같은 과감한 개혁을 시도할 정치적 힘이 부족했다.
중도계 급진당(UCR)과 좌익계 국가통합전선(FREPASO)의 연정으로 집권한 데다 초기부터 당정(黨政)간, 각료간에 경제, 사회정책 노선을 두고 심한 이견을 보여 연합당 출신 부통령의 사임과 각료들의 연쇄 사임으로 정책 추진 능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청렴했지만 우유부단한 대통령의 성격마저 겹쳐 델라루아 정권의 집권 2년은 사실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결국 델라루아 정권은 메넴의 집권 후기처럼 IMF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헨티나 사회는 탈세 관행이 뿌리깊은 사회다.
국민들도 이같은 관행에 젖어 있어 세금 인상에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민의 40%가 크건 작건 탈세를 하는 탈세자로 추산된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다.
2001년 아르헨티나의 재정적자는 약 110억달러에 이르지만, 탈세 규모는 이보다 많은 200억 달러에 이른다는 것이 아르헨티나 사회에서는 상식으로 여겨지고 있음에 비춰보면 균형재정의 달성을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긴축이 아니라 탈세 방지, 세수기반 확충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경기회복을 위해서도 좋은 처방일 수 있다.
그러나 뿌리깊은 정경유착과 부패환경 하에서 탈세를 엄격히 규제할 행정력은 미비하게 마련이다.
또 문제는 재산의 해외도피다.
외자가 대거 유입되던 당시 페소화는 고평가 바람을 타고 달러로 바꿔져 국외로 빼돌려졌다.
한 보고서는 1979~82년 사이 224억 달러가 해외로 빠져나간 것으로 추산한 바 있는데 이는 당시 외채규모와 맞먹는 수치였다.
따라서 태환제에 따라 페소화가 고평가되는 동안에도 막대한 자금이 정경유착의 고리 속에서 유입되고 다시 해외로 빼돌려진 것이다.
일각에서는 해외도피자금 규모가 총외채 규모의 70% 가량인 1,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같은 부패고리 하에서는 철저한 세무행정과 조사, 탈세방지 대책 등의 정책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내부적인 부패 고리가 과감한 정책결정을 채택할 수 없게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론상 세수 확충 방안의 하나로 세금 인상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아르헨티나는 이마저 어렵다.
지나친 공기업 민영화의 부작용 때문이다.
공기업 민영화가 아르헨티나 정부의 자율적인 세제행정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니, 공기업 민영화와 세제행정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메넴 정부는 빈부격차 확대에 따른 사회적 불균형 해소를 위해 교육, 보건, 의료 지출을 늘리려고 세금 인상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이 방침은 다수의 목소리가 돼버린 외국기업들의 반발로 관철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유력지 라 나시온은 이를 가리켜 '땅 잃은 아르헨티나'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공공부문 축소로 인해 정부의 힘이 너무도 위축된 나머지 경제에 개입할 정책도구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메넴은 전화, 전력, 유통, 천연가스, 석유, 철도, 고속도로, 항만서비스, 석유화학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하였다.
민영화의 과정도 투명하지 못했다.
무려 400억달러에 달하는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얼마일지 모르는 리베이트(rebate)가 정치인, 관료, 기업인 사이에 오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부패구조 속에서는 기업들을 겨냥한 정부의 세금인상 시도가 먹혀들 리 없는 것이다.
결국 아르헨티나 정부에 남겨진 균형재정의 정책수단이란 한번도 달성하지 못한 긴축재정의 편성뿐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르헨티나 위기의 또 한가지 원인은 이 나라를 맴돌고 있는 페론이즘 망령이다.
페론 전 대통령의 선심정책이 아르헨티나의 정치, 경제, 사회에 끼친 영향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정치문화에 유럽식 복지국가(welfare state) 이념을 이식시킨 형태인데 이 기간 동안 노동자를 위한 실질임금 인상과 연금 등 각종 사회보장 혜택이 늘어나 정부지출의 대폭적인 증가를 가져왔다.
사실 유럽식 복지국가를 구현하겠다는 페론이즘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정서를 현혹시키는 정치적 선전도구였다.
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 스페인, 유대인, 아랍인 등이 어우려져 살아가는 다민족 국가다.
특히 19세기 후반 이래 이탈리아, 스페인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도시노동자 계층을 형성했고, 항구에서 유럽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유럽의 정치사조는 항상 동경과 모방의 대상이 되곤 했다.
아르헨티나를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아르헨티나인들이 얼마나 유럽인들처럼 행동하려 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페론이즘은 아르헨티나인들에게 분수에 넘치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한때 아르헨티나는 곡창지대 팜파스 평원을 무대로 쇠고기, 밀, 옥수수 등 곡물의 수출대국으로 세계 6위의 부국으로 꼽혔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유럽 지원 정책인 마셜플랜으로 미국 및 영연방 국가들의 곡물이 유럽시장을 독차지한 데 이어 나중에는 유럽지역 통합과 함께 추진된 공동농업정책(CAP) 때문에 농축산물의 유럽 수출 길이 막히게 되었다.
게다가 개발도상국의 녹색혁명으로 농산물 경쟁이 가열되어 수출전략에 큰 차질을 빚었다.
주력산업의 재편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아르헨티나는 아시아 국가들이나 멕시코, 브라질처럼 수출제조업을 일으키는 공업화를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유럽식 복지국가 이념은 20세기 초반 아르헨티나에는 적합한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20세기 후반 쇠퇴일로에 들어선 아르헨티나에는 과분한 것이었다.
더욱이 산업구조조정이 요구되는 전환기에 무리한 임금인상에 따른 생산비용 증대는 제조업자들의 생산의욕을 떨어뜨려 산업공동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칠레는 오늘날 비교적 건실한 시장경제를 갖춘 국가로 자리매김한 반면 아르헨티나는 아직도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페론시대가 막을 내린 1976년 아르헨티나는 이웃 칠레와 같은 경제개혁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칠레의 군부처럼 자유시장경제주의자 호세 알프레도 마르티네스 데 오스를 경제장관으로 세우고 개방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가격통제 철폐, 다중환율의 일원화, 페소화 평가절하, 수출세 인하, 일부 수입규제 철폐, 수입금융 원활화 등을 통해 수출산업 부흥과 보호주의 장벽 철폐를 꾀했다.
당시 군부는 보호주의 산업정책이 강성노조를 낳는다고 믿어 국내산업을 국제경쟁에 노출시켜 페론이즘의 기반인 노조를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군부는 개방경제를 선호하는 농축산업계와 보호개발경제이론을 지지하는 신흥 제조업계의 중간에 끼여 일관된 경제정책을 펴지 못했다.
특히 철강, 군수산업처럼 안보와 직결된 산업은 군부내 로비력이 막강해 시장개방과 구조조정으로부터 제외되려고 애썼고, 군부가 정치적 부담 때문에 대량실업도 꺼려 경제팀은 칠레의 경우와 달리 각계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반면 칠레는 이해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채 자유시장 모델에 바탕을 둔 경제발전의 비전과 철학을 갖고 경제관료 중심의 선명하고 일관된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소가 풀 뜯고 노는 곳이 넓기도 해라...
아르헨티나가 주는 다섯가지 교훈
아르헨티나 사태는 몇가지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첫째, 페소화의 고평가가 수출경쟁력을 저하시킨 사례처럼 정책수단의 유용성이 떨어지거나 역기능이 초래되었을 때 비전 없고 무책임한 정치인은 정책변화가 가져올 정치적 대가를 먼저 생각해 경제정책운용의 유연성을 떨어뜨리고 더 큰 국가경제의 파국을 초래한다.
단기적인 정치적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과단성 있는 정책변화를 택해야 한다.
둘째, 고평가와 금융자유화조치의 결합은 외화 도입을 통해 사리사욕을 챙기려는 불순세력을 낳는다.
여기에 정경유착과 정치부패가 어우러지면 필연적으로 경제정책의 왜곡과 경제운용능력 상실을 초래하며 외채 누적과 탈세, 해외 재산도피를 방조․방치하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셋째, 장기불황 속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긴축재정정책의 오류에서 보듯 IMF가 관리대상 경제에 일관되게 요구하고 있는 재정긴축은 대상국가의 경제여건과 시기에 맞게 적절히 탄력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
넷째, 아르헨티나의 산업공동화 현상에서 보듯 고평가의 장기화와 준비되지 않은 개방경제로의 이행은 국내 산업의 지나친 위축을 초래함으로써 생산의욕을 저하시키고 금융투기와 해외 재산도피를 가열시킬 위험이 있다.
다섯째, 페론이즘 망령에서 보듯 오도된 경제발전 환상이나 선심정책은 국민의 의식을 병들게 함으로써 근로의욕을 저하시키고 집단이기주의를 만연시킴으로써 정부의 과다한 재정지출과 재정적자 관행을 고착화시킬 우려가 있다.
경제구조면에서는 한국은 아르헨티나와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미 IMF 경제위기를 겪은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도 아르헨티나 위기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특히 정치적 리더십의 교체기마다 위기가 재발하는 아르헨티나의 사례는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김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drwhkim@yahoo.com)
Ginamaria Hidalgo - Amar Amando (사랑하는 사람이여)
남미 깐시온의 대모라 해도 과언이 아닌 아르헨티나 국민 가수.
애수에 찬 목소리와 특유의 기타연주, 몇 옥타브를 넘나드는지 모를 신이 내린 특별한 목소리...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우리나라의 현실인것같아 맘이 씁쓸합니다.
아르헨티나에 대해 잘 소개해 주셨네요. 그런데 오늘날 아르헨티나가 몰락한 주요인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2차대전후 유럽시장의 상실과정에서 새로운 산업(제조업이었으면 좋았을텐데)으로의 재편에 실패(시도나 제대로 했는지)한 것이라는 것이 제게는 가장 설득력이 있네요. 그런데 왜 재편에 실패했을까? 이미 전성기에도 사회구조적으로 계급분리, 빈부차가 심화되었고 페론주의는 이에 대한 반작용이지 페론주의가 앞장서서 나라를 망가뜨린것이 아닙니다. 대중영합주의라고 했는데 대중에 원하지 않는 정치는 그럼 무엇이 될것인가요?
남미국가중에서 아르헨티나에는 히스패닉과 인디오가 거의없는 백인국가라고 하는데, 맞는
지요? 듣기에는 98%가 백인이라고 하는데 이런 인적구성이 성립된데 대한 역사적 설명과 그들 나름대로의 사회적 성향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한때 이탈리아에서 살던 어머니가 돈을 벌려고 간데가 아르헨티나, 그 어머니를 찾아가는 마르코(?)의 이야기가 [엄마찾아 삼만리]로 알고있는데. 식민지에 대학을 세운나라는 싫든좋든 일본이 유일하다고(한국, 대만) 하는데 여기에 대한 사회경제적 분석이 보완되면 왜 아르헨티나가 산업개편에 실패했는지, 상류층이 애국심은 어디가고 외화를 다 빼돌리고. 이번 금융위기 조짐이 보이자 미국에서 500억달러가 넘는 아르헨계 자금이 빠져나갔다는 설도 있지요
세계3위의 농업대국에서 왜 굶어죽는 사람이 나왔다는 소문이 들리는지. 제가 길게 글을 썼는데 사실 아르헨티나에 대한 전문성이 없지만, 종속신학, 해방신학이 번성한 토양이 궁금한데 그런 설명은 잘 듣지못해서요. 그렇게 페론주의가 대중에 돈을 쏟아부어 나라를 망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인데.
좋은글 ,음악 감사 드립니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과 나가는 방향이 이리도 비슷한지 등골이 오싹,,,,
우리의 미래를 보는것 아닌가? 썩은 지도층들 쏙아내지 못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