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많이 변했더군요.
며칠 전(1월 12일) 이화여대를 찾았습니다. 1년 만이군요. 지난 7일 이대의 메일 시스템이 클라우드로 바뀌어져서 나도 메일을 바꾸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쓰는 PC는 이제 대학생이 된 손주놈의 도움으로 해결했으나 핸드폰의 메일은 도저히 바꿀 수 없더군요. 이건 무슨 앱을 깔아야 한다는데 공돌이 사위가 지금 장기 출장 중이라 학교 정보처에 찾아가는 것이 편할 것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이화포탈’은 이젠 사용하지 못하고 여기에 저장된 옛 메일을 핸드폰으로 옮기지도 못하는 등 애로가 많더군요. 지금까지도 보안을 강화한답시고 비밀번호를 12자로 늘이고 이걸 3개월마다 바꾸게 하는 등 힘들었지요. 귀찮은 정도가 아니라 보조를 맞추어 따라가기 어려워 이제 서서히 gmail로 옮겨 타려 합니다. gmail이 있지만 주로 외국과 연락할 때 사용해왔는데 이제는 때가 된 것 같은 느낌이 오군요. This is no country for old men!이라는 건 느낀 게 어제오늘이 아니지만 IT화라는 명목으로 점점 압박이 심해지네요. 기술의 발달에 인간이 보조를 맞추어 살아가야 할까요? 그냥 두어도 될 게 많은 데 굳이 바꾸려는 건 공무원들이 ‘나도 한 껀했다’는 걸 내세우려는 경쟁 때문이 아닐까요? 사람이 우선이라면서 하는 짓은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世與我而相違(세여아이상위)하니, 세상이 나와 서로 맞지 않음을 탓하고 푸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연명은 ‘귀거래사’에서 세상과 맞지 않는데 왜 벼슬을 구하려 수레를 다시 억지로 돌리겠느냐고 탄식한 것이지만, 이제 우리가 이런 걸 푸념하기에는 너무 지치지 않았나요? 학교 정문에 들어서니 학교 자랑하는 깃발과 글들이 많이 걸려있네요. 그중 눈에 띄는 것이 작년도 외교관 시험에 정외과 출신이 2명 합격했고 수석도 차지했다는 거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 많이 변했네’라는 말이 튀어나오더군요 (사진)
왜냐구요? 최근 이대 정외과가 제법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년 말 개각에 오영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포함해서 정외과 출신이 2명 입각했더군요. 우리 글방에 최병호 대사 등 외교관 출신이 있고 박근 전 유엔대사가 나의 외삼촌이고 방장님도 오랫동안 외무부를 취재했고.... 나 역시 외교사가 전공이라 외교문서에서 외교관들의 개인적 행태도 보며 즐겠지요. 다음은 주로 외삼촌에게서 듣고 또 내가 관찰한 것을 토대로 쓴 글이니 마음 상하시는 분 있으시면 양해 바랍니다.
옛날, 아주 옛날 1960년대 말 혹은 1970년대 초 삼촌의 말로는 정부 부처 중 외무부가 가장 개화되었고 지적이며 그 반대는 문교부라 하더군요. 무슨 기준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동시에 외무부가 가장 폐쇄적이라 했습니다. 모든 부처는 큰 소릴 칠 수 있는 산하 기관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외무부는 국내에 그런 게 없지요. 즉 퇴임 직원을 보낼 하부기관이나 수입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당시 외교관들은 귀국 때 냉장고나 TV, 본차이나(도자기 접시), 카펫 등 한국에 없던 물품들을 면세로 가져와 팔면 다음 해외 발령 때까지 3년 정도 버틸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것도 일본 상품들이 들어오고 한국 냉장고가 가볍고 전기료도 싸게 나와 인기가 시들어졌다고 합니다.
또 5·16 이후 군부의 외교관 진출을 저지할 힘도 없었지요. 재외공관은 우리의 국력이 약해 외국 외무성을 상대로 큰소리칠 건수도 별로 없었구요. 물론 해외 진출 기업이나 재외 국민들을 상대로 군림할 수는 있었을 겁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외부 인사들의 외무부 진입을 막으려는 경향이 강했겠지요. 이것이 외부에서는 부처 이기주의로 비쳤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박근 외삼촌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경무대에 스카우트 되었으나 자리가 없다면서 외무부에 잠시 가 있으라고 해서 갔다고 합니다. 다행히 곧 터진 4.19로 ‘경무대 근무’라는 오점에서는 벗어났지요. 그러나 역시 외부 영입 케이스라 유엔대사 이상은 승진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오영주는 1986년에 정외과를 졸업하고 아마도 다음 해 외시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여자가 무슨 외교관을 한다는 거야, 남편과 애들은 어쩌려고!’라는 게 면접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이대뿐만이 아니라 한국 여성계가 발칵 뒤집어졌지요. ‘지금이 어느 때인데’ 하면서 총장은 물론이고 여성계 원로들까지 장관을 만나느니 총리를 만나느니 야단이 났습니다. 그런데 오영주는 다음 해 다시 응시하여 합격했습니다. 면접도 통과했지요. 가상하지요?
나는 수업 시간에 다음과 같은 말을 종종 했습니다. ‘지금 대기업 등 일반 직장에서 남자들과 경쟁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겠지만 고위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문은 남자보다 여자들에게 더 넓게 열려있다. 유럽은 물론이고 인도와 같은 나라도 국회의원의 30% 이상이 여성이다. 지방의회로 내려가면 여성이 과반수를 차지한다. 그러니 행시, 고시, 외시나 박사학위, 주요 언론사 기자 등 한국사회에서 고위직으로 인정되는 자격만 갖추면 앞으로 여러분들이 사회에 진출하고 고위직으로 승진할 기회는 남자들보다 훨씬 넓을 것이다.’
물론 모든 학생이 고시나 행시 등 시험에 매진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나는 입학하면서부터 법전을 옆에 끼고 다니는 애들을 보면서 법과나 행정학과 등을 비판해서 이들 학과 교수들로부터 욕도 먹었습니다. 법 조항 밖에 모르는 이들에게 무슨 국가경영을 맡기겠습니까? 보통 성적순으로 학과를 선택했지만 학생들의 성향은 학과 별로 차이를 보입니다. 정외과 학생들은 놀라울 정도로 인문학적, 특히 문학적 성향과는 거리가 멀지요. 우습게 들리겠지만 강북에 있는 여고에서는 반에서 1등, 강남에서는 5등을 해야 갈 수 있는 곳이 이대입니다. 그런데 1학년 1학기 중간시험 답안지를 읽어보면 학생들 성향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교과서나 강의록을 달달 외워서 쓰는 학생이 대부분인데 엉뚱한 답안지를 내는 학생이 간혹 있습니다. 이게 사회과학적 상상력이면 학자로서 성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말해 주는 것이고 문학적 상상력이라면 학과를 잘못 선택한 것이지요. 외교안보연구원에서 남북한 통일방안을 논하라는 문제에 대한 답안지는 천편일률적으로 똑같더군요. 정부 방안 그대로였지요. 그래야 외시에 합격할 수 있으니까요.
80년대 중반은 수능(?)을 먼저 치르고 그 성격을 가자고 대학에 응시하던 시기였습니다. 한 교수의 딸이 서울대 국문과에는 약간 모자라 서울대 사대 국어교육과에 가려고 했지요.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정외과 학과장과 학장이 아버지인 교수를 설득하고 또 학생을 꼬여 정외과로 끌고 왔습니다. 당연히 학과 수석으로 각종 장학금 혜택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완전히 문학이나 예술적 성향이었습니다. 첫 답안지를 보면서 나는 ‘이게 뭐꼬?’ 했지요. 사회과학적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이 학생에게 ‘정외과’ 4년은 지옥이었을 것이고 후일 다른 대학 국문과 대학원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유스러운 전공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던 시절의 비극이라 하겠지요. 문득 문리대 생각이 나더군요. 나는 전공인 영문과는 전공필수만 듣고, 사학과 부전공 36학점, 철학과 15학점, 그리고 독문과, 불문과, 국문과, 미학과 등 강의를 두루(?) 들어 성적은 형편없었지만 행복했지요. 시절을 잘 만나서 평균 B가 되지 않았지만 유학도 갈 수 있었고 명문이라는 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박사학위 받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고 이대에 교원으로 채용되는 데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good old days이구 That is the country for old men이 아닌가요?
세상 많이 변했지요? (2024.1.15.)
추신: 오영주와 1984년 수학여행 중 찍은 멋진 사진이 있는데 장관 재직 중에는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옛날 집사람과 손녀 와인 사진으로 망신당한 기억이 새로워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