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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여러분!
잘 들어가셨습니까!
악양정 내부를 이번에야 들어간 탓에
찍어온 내부현판들을 틈틈이 들여다보느라 인사가 늦었습니다!
매화를 보러 갔건만 탄성을 자아낼 만큼의
매화는 피어있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또 내년의 매화가 기다려집니다.
먼저 오전에 들렀던 곡성의 태안사에서 적인혜철 선사의 부도를 만나기 위해 배알문을
오르다 보면 만나는 집이 선원禪院입니다.
그 집 주련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걸려 있었습니다.
一粒粟中藏世界(일립속중장세계) 한 알의 좁쌀 속엔 세계가 들어 있으니
半升鐺裏煮山川(반승당리자산천) 반 되들이 솥엔 산천을 끓일 수 있겠네.
香浮鼻觀烹茶熟(향부비관팽다숙) 떠오르는 향을 코로 맡아보니 차는 이미 익었기에
喜動眉間煉句成(희동미간련구성) 기쁨에 미간을 꿈틀이며 시구를 다듬어 이루네.
이 시를 몇몇 회원님들과 읽다가 제1구와 2구를 보면서 문득 화엄華嚴세계를 연상케하는
구절이라고 말하고 불교의 화엄사상과 현대물리학과의 상통하는 면을 잠시 얘기하려다가
3구와 4구에서 막혀 그냥 부도로 올라갔었습니다.
선방에 걸린 화엄의 명제라!
돌아와 이 시를 찾아보니 제1구와 2구는 당(唐)나라 경조(京兆) 사람인 여동빈(呂洞賓)이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암(嵒) 또는 암(巖)이며, 동빈(洞賓)은 그의 자입니다. 함통(咸通) 연간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을 지냈으나 황소(黃巢)의 난으로 행방이 묘연했는데, 별호(別號)를 순양자(純陽子) 혹은 회도인(回道人)이라고도 하였고 속칭(俗稱) 팔선(八仙)의 한 사람으로서 관서일인(關西逸人)이라 칭하였으며 100여 살이 되어도 동안(童顔)이었고 걸음을 걸으면 경각에 수백 리를 갔다고 하는 신비속의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그도 도가적인 인물인데 당대의 화엄학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이와같은 시를 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의상스님이 쓴 『화엄일승법계도』에도 이러한 화엄사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구절이 있습니다.
一中一切多中一(일중일체다중일) 하나 중에 일체가 있고, 여러 것 가운데 하나가 있으며
一卽一切多卽一(일즉일체다즉일) 하나는 곧 일체이고, 여럿도 곧 하나이다.
一微塵中含十方(일미진중함시방)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있고
一切塵中亦如是(일체진중역여시) 일체의 티끌들 역시 그러하다.
현대물리학에서도 우주와 물질과 인간은 어떤 원인이 주어진 결과 빚어진 현상이며, 별들의 생성과 소멸에 의해 만들어진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다시 유기물에서 생명체로 그리고 인간의 발생까지 그 어느 것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하듯이 화엄사상도 일체의 법계法界가 연기의 결과 발생한 현상이라는 것이니 하나와 일체법계가 연기하여 그 원인이 주어지므로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우리의 인간이라고 하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 다음의 3구와 4구는 宋나라 사람 육유陸遊가 쓴《북쪽 정자에 올라-登北榭》시詩에
香浮鼻觀煎茶熟,喜動眉間煉句成이라고 한 것을 여기 주련에는 전煎자를 팽烹자로 바꿔쓴 것입니다.
왜 이렇게 작자作者가 전혀 다른 조합한 절구를 써붙였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다음은 점심식사 후에 들른 악양정입니다.
정자 안에 몇개의 현판이 있었는데 그중 두개의 현판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岳陽唱酬악양창수 續頭流錄略附속두류록략부 라는 제목의 현판이었습니다.
제목의 의미는 '악양에 대하여 시를 주고 받다. 속두류록을 간략하게 해서 붙이다'는 뜻입니다.
첫 단락은 탁영 김일손 선생이 일두 정여창 선생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고 적은 속두류록續頭流錄 중에서 그 내용을 대폭 줄여서 새긴 것이고
그 뒤로는 일두 선생의 시와 그에 이어 탁영 선생이 화답한 시를 붙여 새겼으며
마지막엔 그 내력을 써서 새긴 현판이었습니다.
이 정자에서 가장 중요한 글이었기에 건물 중앙의 대들보에 걸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을 아래에 옮겨 적어두니 일독을 권합니다. 원문은 생략합니다.
『 선비가 나서 박이나 오이처럼 한 지방에만 매여 있다면 운명일 것이다.
이미 천하를 두루 다 보고서도 그가 가진 것(뜻)을 기를 수가 없다면 경역 중의 산천을 모두 마땅히 더듬어 찾아 봐야 할 것이나 오직 사람의 일이란 어긋나기를 좋아한다.(그래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내가 처음에 진양(진주의 옛 이름)의 학관學官이 되기를 구했는데 그 뜻은 부모님의 부양을 편히 하기 위해서였으니 구루句漏의 현령이 된 갈치천葛稚川의 마음은 또 단사丹砂에 있지 않을 수 없다.(구루句漏의 현령 : 진(晉)나라 사람인 갈홍(葛洪)이 선도(仙道)를 좋아하여 단약(丹藥)을 만들려 하였는데, 구루(句漏)에 좋은 단사(丹砂) 가 난다는 말을 듣고 조정에 청하여 구루령(句漏令)으로 가기를 자원한 일이 있었다. 여기서 탁영은 갈홍의 마음이 단사에 있는 것처럼 자신도 부모봉양에 뜻이 있으므로 경역 중의 산천을 다 둘러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두류산頭流山은 진주의 경내에 있다.
진주에 도착하고 나서 날로 나막신 두 짝을 준비한 것은 두류산의 연하煙霞와 원학猿鶴(안개와 노을과 원숭이와 학이니 모두산수자연을 가리키는 말이다.)은 모두 나의 단사丹砂이기 때문이다. 두해동안 고비皐比(호랑이 가죽을 말하는데, 옛날에는 스승이 호피(虎皮)를 깔고 앉아 강학(講學)하였으므로 강석(講席)의 뜻으로 쓰인다.)에 있으면서 한갓 배만 불리는 편의를 위한다는 놀림을 받았으므로, 곧 병을 핑계대고 고향으로 물러가서 마침내 한가롭게 노니는 뜻을 이뤘지만 족적足跡이 일찍이 한 번도 두류산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감히 생각을 잊을 수는 없었다.
천령에 사는 진사進士 정백욱鄭伯勗(정여창의 자字)은 나의 신교神交(의기투합된 친구)인데 금년 봄에 도주道州(청도淸道의 옛 이름)에서 녹명鹿鳴을 노래하게 되어서(녹명장(鹿鳴章)은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옛날 과거에 급제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이 시를 노래하였다. 당(唐)나라의 공사(貢士) 제도를 보면, 11월에 각 군현(郡縣)에서 과거 시험을 보이고 나서, 여기에 급제한 사람에게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어 주며 《시경》 소아(小雅)의 녹명(鹿鳴)을 노래하게 하는 관례가 있었다. 여기서는 정여창이 청도에서 실시한 향시에서 합격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침 나의 집 문 앞을 지나면서 두류산을 구경할 것을 약속했다. 4월 11일 기해己亥에 천령天嶺(함양의 옛 이름) 사람에게 물으니, 백욱이 서울에서 이조부二鳥賦(당나라 사람 한유가 출세의 길을 찾지 못해 서울을 떠나는 길에, 새 두 마리를 철장에 넣어 천자에게 바치려는 사람을 만나 크게 깨닫고 감동하여 지었다는 부(賦)이다. 무지한 새는 오직 깃과 털이 이상하다 해서, 천자의 빛을 보게 되는데, 사람은 지모와 도덕을 지니고도 새만 못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정여창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비유하는 말로 썼다.)를 짓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 지 벌써 5일이 되었다고 하므로, 마침내 서로 만나보고 숙원宿願이 어긋나지 않음을 기뻐했다.
14일에 드디어 천령 남쪽 성곽 문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날 비가 쏟아 붓듯이 내렸다.
말 가는대로 맡겨두니 등귀사登龜寺에 당도했고 이날 밤에 다시 비가 개어 밝은 달이 수면에 빛을 발했다. 백욱이 말하기를
“사람 마음이나 밤기운이 이 정도 되면 모두가 찌꺼기가 없을 것이다.” 했다.
19일 묵계사默契寺에 도착했다.
나의 서형庶兄 김형종金亨從이 기뻐하며 알리기를, “명일 천왕봉天王峯은 상쾌하게 올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신해辛亥일 여명黎明에 해가 양곡暘谷(전설상의 해 뜨는 곳)에서 뜨는 것을 보니, 맑은 하늘이 구리거울을 닦아놓은 듯 했다.
서성대며 사방을 바라보니, 만 리가 끝이 없고, 대지의 뭇 산들은 모두 개미둑과 같아서 묘사하자면 한창려韓昌黎의 남산시南山詩를 이해할 수 있고 심사心思로 보자면 바로 공부자孔夫子가 동산東山에 오를 때와 부합된다고 할 수 있겠다.
향적사香積寺 곁에 큰 나무 수백 주가 쌓여 있어서 중에게 무엇을 하는 거냐고 물으니, 중이 말하기를, “늙은이가 호남의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구걸하여 배로 섬진강까지 하나하나 실어 와서 이 절을 새로 지으려고 한 것이 이미 6년이 되었습니다.” 했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 유자儒者들이 학궁學宮에 대해서는 그만 못하다. 석가의 가르침이 서역西域에서부터 퍼졌는데, 어리석은 남녀들이 신봉하기를 문선왕文宣王(공자)을 앞지르니 백성들이 사교邪敎에 빠지는 것은 정도正道를 신봉하는 독실함과는 같지 않은가 보다.” 하였다.
18일 병진일에 쌍계의 동쪽을 따라서 가다가 한 암자를 찾으니 불일암佛日菴이었는데 여기야 말로 모두가 아름다운 경치였다.
등귀사登龜寺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전후 16일이 걸렸는데, 가는 곳마다 천암千巖이 빼어남을 다투고 만 골짜기의 물이 다투어 흐르니 기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사람의 마음에 드는 곳은 불일암 하나 뿐 이었다.
백욱이 말하기를 “솔과 대가 둘 다 아름답지만 차군(此君 대나무의 이칭)만 못하고, 바람과 달이 둘 다 맑지만 중천中天에 뜬 달 그림자를 대하는 기이함만 못하며, 산과 물이 모두 인자仁者와 지자智者가 즐기는 것이지만, (공자께서 찬탄한) ‘물이여 물이여’ 하는 것만 못하니,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장차 그대와 더불어 악양성岳陽城을 나가서 대호大湖의 물결을 구경하도록 하자.” 하기에 “좋다.” 고 하였다.
風蒲泛泛弄輕柔。수양버들 나풀나풀 하늘거리니
四月花開麥已秋。4월 화개 땅엔 보리가 벌써 익었네.
看盡頭流千萬疊。지리산 천만 봉우리를 다 보고 나니
孤舟又下大江流。외로운 배는 또다시 큰 강을 따라 흘러가네. (정여창)
滄波萬頃櫓聲柔。푸른물결 넘실넘실 노 젓는 소리 부드러워
滿袖淸風却似秋。옷소매 가득 찬 맑은 바람에 문득 가을이런가
回首更看眞面好。머리 돌려 다시 보니 진면목이 보기 좋아
閒雲無跡過頭流。한가한 구름 흔적 없이 두류산을 넘어가네 (김일손)
(前略)계축년(1493 성종24) 봄 3월 정해일에 탁영선생이
일두선생의 섬진유거蟾津幽居에 찾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의했다.
일두선생은 이때 세자시강원 설서를 그만두고 돌아와
매화와 대나무를 심고 강송講誦하고 음롱吟弄하면서
장차 여기에서 늙고자 했다.
선생이 그 집을 짓고 이곳에 살면서
대학의 수신修身,제가齊家, 치국治國, 平天下평천하의 요체를 강의 하셨다. 』
내용이 이렇게 되어 있는 현판이었습니다.
이 글을 쓴 탁영 김일손은 정여창과 함께 김종직 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평생의 지기였습니다. 그에 대해 좀더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일손(金馹孫)은 1464년(세조 10)∼1498년(연산군 4).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사헌부집의 김맹(金孟)의 아들이다.
1486년(성종 17) 7월에 진사가 되고, 같은해 11월에 식년문과 갑과에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게 되었다.
그 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의 연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환로(宦路)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를 거쳐 홍문관의 박사‧부수찬‧성균관전적‧사헌부장령‧사간원정언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부교리‧교리 및 사간원헌납‧이조정랑 등을 지냈는데, 관료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을 뿐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부패 및 ‘권귀화(權貴化)’를 공격하는 반면,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에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로 말미암아 능지처참의 형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었다.
그리고 중종 때 홍문관직제학,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가 각각 추증되었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김극일(金克一)로부터 《소학》‧사서(四書)‧《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을 배웠으며,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등과 같이 ‘수기(修己)’를 지향하는 한 계열과,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을 지향하는 다른 한 계열의 인물들이 있었는데,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편, 현실대응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는데, 소릉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그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실세(失勢)를 가져다 준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會老堂記)〉‧〈속두류록(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소릉(昭陵)을 복위하자는 상소를 올린 것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문종의 비(妃)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을 복위할 것을 요구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소릉 복위 주장은 세조 즉위와 정난공신(靖難功臣)의 명분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던 것이었으므로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반발을 샀고,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은 그의 국문(鞫問)을 주장했습니다. 즉 살아있는 서슬퍼런 권력에 대놓고 저항한 그들의 선비정신과 용단에 요즘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하겠습니다.
이런 상소는 김종직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던 남효온(南孝溫)도 하였으니 그 문하의 인재들을 둔 김종직은 지하에서도 행복해하지 않았을까요!
다음 사진은 악양정 정면 사진입니다.
물론 이번 사진이 아니어서 매화가 한창입니다.
이 집의 주련株聯을 보면 위에서 본 일두와 탁영선생이 창수唱酬한 시를 걸었습니다.
먼저 이 집은 일두선생을 기리는 집이므로 그의 절구시를 정면에 걸었겠다고 생각됐는데
정면 주련을 보면 시구가 다섯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을 모르는 방문자 입장에서 보면 당황스러울 일입니다.
그래서 주련을 보았더니 맨 우측 기둥부터 네번째 기둥까지는 일두선생의 시이고
맨 좌측 기둥에는 탁영선생의 제4구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럼 탁영선생의 나머지 세구는 어떡했을까요!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우측 두번째 기둥 뒤편으로 탁영선생의 제1구가 건물 벽체기둥에
걸려있는 것이 보입니다.
네칸 집이다보니 정면기둥은 5개가 나오고 벽체기둥은 3개가 나오니까 이와같은 방식으로
해결한 것 같습니다. 절묘한 동거라 할까요!
그러나 알고보면 여간 불편한게 아닙니다.
일이 이렇게 된데는 1920년에 증축할 때 본래 세칸 집이던 것을 네칸으로 늘려지으면서
잉태된 것이었습니다.
세칸집이면 정면기둥이 4개가 나오니 4구로 된 절구시를 걸기에는 안성맞춤이고
탁영선생의 절구시는 현판으로 새겨서 처마에 걸면 깔끔할 일을
왠지 어색하고 불편하게 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또다른 현판 하나는 뇌계 유호인의 악양정 병서幷序(악양정 시와 서문을 함께 적다)를 새긴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정자亭子는 진양晉陽의 악양현岳陽縣에 있으며 정후鄭侯 백욱伯勖이 사는 곳이다.
백욱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매이지 않고 천석泉石과 연하煙霞를 (사랑하는) 벽癖이 있었다. 일찍이 여기에 별서別墅를 짓고 이에 정자를 지어서 이름을 악양정이라 했다.
매일 시를 읊으며 스스로 즐거워하며 만족해했는데 하루아침에 부름을 받아
소격서昭格署 참봉參奉이 되었으니 그의 행실을 가상히 여긴 것이었다.
정군이 와서 과거에 급제한 것이 코밑의 수염을 뽑듯이 했다.(매우 쉽게 과거 급제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한유(韓愈)의 기최립지시(寄崔立之詩)에 “달을 연해서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마치 턱 밑의 수염 뽑기와 같도다[連月取科第 若摘頷底髭].” 한 데서 온 말이다.)
한림원翰林院은 직필直筆을 칭찬했고 서연書筵(태자가 경서로 강의를 받는 자리)에 결원이 있자 또 설서說書에 선보選補되어서 매일 세자를 모시는데 보익輔益함이 대단히 많았다.
내가 우연히 과분하게도 문학文學(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5품 벼슬이다)이 되었고 외람되게도 동료가 되어서 하루 저녁에는 함께 시강원侍講院에 들어가 시강하던 여가에 담론이 자자하였는데 말이 악양岳陽에 대한 일에 미치자 그 산천의 승경과 풍경의 아름다움이 일목요연하게 앉아있는 궤석几席가에 있게 되니 내가 들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피곤을 잊었다.
다만 후侯는 병으로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돌아가려 하면서도 돌아가지 못하는 뜻을 갖고 있어서 두보杜甫의 복거편卜居篇을 써서 화답시를 요구함이 대단히 가혹했는데 사양했지만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삼가 차운次韻한 것을 적어서 한가함을 흉내 내어 보았으니 널리 한번 웃기를 바란다.
一掬歸心天盡頭。하늘 끝닿은 곳으로 돌아가고픈 한 줌의 마음은
岳陽無處不淸幽。악양에는 가는 곳마다 맑고 그윽하지 않은 곳 없다 하네
雲泉歷歷偏供興。그 산수가 눈앞에 역력하여 그것만으로도 흥을 부르는데
軒冕悠悠惹起愁。벼슬살이에 유유하다보니 시름만 일어나네
杜曲林塘春日暖。두곡의 숲속 연못엔 봄볕이 따스하고
輞川煙雨暮山浮。망천의 안개비 속에 저문 산이 떠 있네
書筵每被催三接。서연에서 매번 하루 세 번 만나길 재촉하시니
辜負亭前月滿舟。뜻을 저버린 정자 앞에는 달빛만 외로운 배에 가득차네 』
* 두곡(杜曲) : 당나라의 대성(大姓)인 두씨가 모여 살던 곳인데, 여기서는 두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망천(輞川) : 당나라 때 시인 왕유(王維)[699~759]가 은거하던 산수가 빼어난 곳으로, 산수가 아름다운 곳의 대명사로 쓰인다. 산수화(山水畫)에도 뛰어났던 왕유(王維)의 별장이 있는 곳이다.
* 서연(書筵) : 세자시강원의 강연을 말하는 것으로, 하루에 세자가 세 번씩 만나기를 재촉하기 때문에 정여창은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저버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여창이 돌아가고 싶어 하는 악양정에는 빈 배에 달빛만 가득할 것이라고 읊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규정이 그렇다는 시적인 표현이고 실제 당시의 세자였던 연산군은 군주로서의 성학聖學을 요구하는 정여창을 껄끄럽게 여겼다.
* 참고로 두보(杜甫)의 복거(卜居)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浣花流水水西頭(완화류수수서두) 완화계 흐르는 물 서쪽 끝에
主人爲卜林塘幽(주인위복림당유) 주인장은 숲속 연못 그윽한 곳에 집터를 잡았네
已知出郭少塵事(이지출곽소진사) 성을 벗어나면 속된 세상일 적은 줄 알고
更有澄江銷客愁(갱유징강소객수) 더욱이 맑은 물 있어 나그네 시름을 삭여준다네
無數蜻蜓齊上下(무수청정제상하) 무수한 잠자리들 상하로 줄지어 날고
一雙鸂鶒對沈浮(일쌍계칙대침부) 한 쌍의 물닭은 마주보며 물에 잠겼다 떳다 하네
東行萬里堪乘興(동행만리감승흥) 동으로 만리교로 가는 흥을 돋울 만하니
須向山陰上小舟(수향산음상소주) 모름지기 산음을 향해 작은 배에 올라 볼만 하네
정여창은 유호인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벗입니다.
정여창은 벼슬에서 물러나 악양정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심경을 유호인에게 한탄하며 두보杜甫의 복거卜居에 차운하여 짓고, 유호인에게 화답시를 재촉하니 이에 유호인이「악양정」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유호인은 악양정에 가 보지 못한 상태에서 악양정의 산수를 전해 듣고서 정여창이 섬진강의 악양정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인데 어떻습니까!
정여창이 두보의 칠언율시 복거卜居에 차운한 시이므로 두보의 원운에 따라, 유호인도 두頭, 유幽, 수愁, 부浮, 주舟를 운자로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다음은 함께 참여한 분들의 단체사진 한장과 오가며 회원들을
스케치한 사진 몇장을 올려봅니다.
모처럼 만에 보는 열심히 하는 모습입니다.^^
아이의 엄마는 누구일까요!
머리에 매화송이를 올려놓고 봄처녀 놀이를 하는 회원들
모두 반가운 얼굴들입니다.
국내 최고의 부도 학습장인 연곡사 소요대사 부도를 떠나는 회원들
느릿한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북부도를 향해서...
민지가 이렇게 열심히 찍었는데 사진을 못봐서 살짝 아쉬웠죠!
동부도를 탑삼아 탑돌이를 하시는 중!
모두들 답사지를 떠나기 싫으신 듯...
참여회원여러분!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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