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머 리 말
高句麗 百濟 新羅 三國은 무려 7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서로 경쟁하며 교류하였다. 정치 문화 경제적인 성격을 지닌 이러한 교류는 삼국이 일단 국경을 접하게 되는 대략 300년 동안 더욱 촉진되어졌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는 근원이 동일하였으므로 정치 체제라든지 문화면에서 동질성이 일찍부터 드러났다. 신라의 경우는 그 성격이 달랐다고 볼 수 있지만, 주지하듯이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으면서 국가 체제의 일대 정비를 기할 수 있었다. 더욱이 고구려의 영향력은 신라에 막대하게 미쳤다. 즉 4세기 후반부터 5세기대에 걸쳐 동북 아시아는 고구려 중심의 세력 재편이 이루어졌다. 이 때 고구려는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는 상황에서 신라 구원을 명분삼아 출병한 400년 이후에는 신라 내정에 깊숙히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사실은 경주의 壺塚과 瑞鳳塚에서 각각 출토된 광개토왕 관련 명문이 양각된 壺 와 고구려 장수왕대 연호로 추정되는 延壽 銘 銀盒의 존재를 통해 실감나게 확인되었다.
고구려가 정치 문화적으로 주변의 백제나 신라 가야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였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쳐 종족은 물론이고 문화적으로도 동일한 공동체 관계가 설정될 수 있었다고 본다. 삼국은 당고종 스스로가 '海東三國'이라고 했듯이 중국과 구분되는 정치적 연원과 문화적 전통을 지닌 또다른 세계로 인정되어졌다. 이렇듯 고구려를 정점으로 하여 형성된 민족의 정체성은 고려를 비롯한 후대까지도 확인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사가 지닌 역사적 의의는 결코 과소 평가될 수 없다.
그런데 최근의 동북공정과 관련해 고구려사가 중국사로 편제 된다면 한국사 체계의 계통이랄까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고구려를 축으로 하여 형성된 우리 민족 문화는 이제 중국 문화의 아류 내지는 그 영향으로 탈바꿈되어진다. 그리고 더 이상 한국 기층 문화의 창조성과 고유성을 운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삼국간의 상호 관계를 통해 고구려의 정체성을 구명하고자 했다. 나아가 고려시대 이후의 문화상까지 조명하면서 한국사에서 고구려사가 점하는 역사적 위상과 비중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2. 고구려의 정체성과 그 계승 의식
1) 삼국 국호의 동질성과 국가의 기원 인식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삼국의 국호는 한 글자로 국호를 제정한 중국 역대 왕조와는 차이가 난다. 이 점은 한국만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삼국 王姓의 유래에서 일정한 공통점이 포착된다. 고구려 왕실의 경우 "고구려로 인하여 氏를 삼았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고구려라는 국호에서 고구려 王姓인 高氏가 유래했는지의 사실성 여부 보다는 실제 역사 전개에 영향을 미친 인식이 중요할 것 같다. 그런데 이는 백제 왕성인 扶餘氏가 부여라는 국호에서 기원하였으며, 그것을 '餘'氏로 줄여서 표기한 경우와 동일하다. 더구나 국호와 동일한 부여씨의 존재가 부여 王姓으로 확인되기까지 했다. 신라의 경우는 왕성이 朴氏 昔氏 金氏로 교체된 바 있다. 그런데 박씨와 석씨 왕실이 집권했을 때 그러한 성씨의 존재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성씨의 존재가 분명한 것은 김씨였다. 김씨 왕실이 집권했을 때의 국호는 의미상으로나 공간적으로 볼 때 王城인 金城과 무관하지 않은 斯盧國 혹은 徐羅伐 新羅 등으로 불리었다. 여기서 '斯'나 '徐' '新'의 경우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쇠' 곧 '金'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주목된다. 이 견해를 취한다면 신라 왕성인 金氏는 고구려 王姓인 高氏와 마찬가지로 국호의 첫 글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삼국의 王姓은 국호에서 유래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면 삼국의 국가 기원에서의 공통점은 없었을까? 우선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해『三國史記』 『三國遺事』 「東明王篇」 『魏書』등에 전하는 그 건국 설화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즉 건국자인 朱蒙이 북부여에서 天帝의 아들을 자칭하는 解慕漱와 河伯의 딸인 柳花夫人을 부모로 하여 출생하였다. 그의 출생과 성장 과정이 부여의 시조설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신통함이 있었을 뿐 아니라, 더욱이 그가 사냥에 능한 것이 부여 왕자들의 시기를 받게 되었다. 그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망명하면서 물고기와 자라 떼의 도움을 얻어 강을 건넌 다음 忽本인 지금의 桓仁에 이르러 도읍하였다고 한다.
주몽 건국 설화는 고구려를 세운 지배 세력이 부여족 계통임을 알려준다. 가령「廣開土王陵碑文」에서는 "옛적에 始祖 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다. 북부여에서 태어나셨는데, 天帝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河伯의 따님이셨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셨는데, 태어나시면서 성스러움이 있었다. 수레를 남쪽으로 돌려 순행하시는데, 부여의 奄利大水를 거쳐 가게 되었다. 왕이 나루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皇天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河伯의 따님이신 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들이 떠 오르게 하여라!" 그 소리에 호응하여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떠 올랐다. 그런 연후에 건너가서 沸流谷 忽本 서쪽의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라고 했다.「牟頭婁墓誌銘」에서는 "河泊의 손자이시며 日月의 아드님이신 鄒牟聖王께서 원래 북부여에서 나오셨으니"라고 하였다. 이처럼 문헌이나 금석문에서는 한결같이 고구려를 건국한 세력이 북부여계임을 알려 준다. 그런데 고구려 건국 설화는 다음에 인용하는 부여 건국 설화와 동일하다.
옛날 북방에 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의 여종이 임신하자 왕이 여종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여종이 "계란 만한 기운이 내 몸에 들어오더니 임신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 후 여종은 아이를 낳았다. 왕이 여종의 아이를 厠間에 버렸지만 돼지들이 아이에게 입김을 불어 주었다. 그러자 왕은 그 아이를 마굿간에 옮겨 두었는데 말들 또한 그 아이에게 입김을 불어 주었으므로 여종이 낳은 아이는 죽지 않았다. 그러므로 왕은 이상히 여겨 天帝의 아들로 생각하였다. 이에 그 어미에게 돌려주어 아이를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이 아이의 이름은 東明인데 항상 말을 치도록 명령받았다. 동명은 활을 잘 쏘았다. 왕은 동명이 자신의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 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그럼에 따라 동명은 남쪽으로 달아나 施掩水에 이르러 활로 수면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곧 풀어 흩어져 추격하는 병사들이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이 이로부터 부여땅에 도읍을 정하고 왕이 되었다.
위와 같은 부여 건국 설화는 後漢 때 王充이 지은『論衡』吉驗篇에 처음 보인다. 이 설화는『삼국지』부여 조에 인용된「魏略」에도 수록된 내용이다. 부여의 동명 설화와 고구려 주몽 설화는 각각 胎生과 卵生의 차이밖에는 없고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여기서 고구려를 건국한 세력이 부여에서 남하했음은 이견 없이 분명한 사실로 드러났다. 백제의 경우도 후술할 都慕大王 개국설화에 의하면 부여 지역을 배경으로 한 日光感情出誕 說話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검토를 통해 백제의 계통이 부여로 확인되어진다.
백제 건국 세력의 계통은 始祖觀과 관련을 맺고 있다.『삼국사기』에는 백제 시조를 溫祚 혹은 沸流로 각각 달리 기재하고 있다. 온조는 그 아버지를 고구려 시조인 주몽이라고 하였으므로 고구려계이다. 그 형인 비류는 아버지를 북부여왕 해부루의 庶孫인 優台라고 하였으므로 부여계가 된다. 로마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 역사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2명의 시조가 동일한 역사서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백제의 건국 주체는 일견 고구려계와 부여계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서울의 석촌동에 소재한 적석총이 고구려 墓制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백제 건국세력을 고구려계로만 파악하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묘제는 보수적이면서도 가변성을 띤다. 가령 무녕왕릉이 중국 南朝의 塼築墳이듯이, 석촌동의 적석총도 묘제 採用일 뿐 고구려계 주민의 건국을 뜻하는 직접적인 지표가 되기는 어렵다. 실제 백제 건국과 직접 관련 있는 시기의 적석총은 서울 지역에서 확인된 바 없다. 오히려 부여 묘제와 관련 있는 토광묘가 이 무렵 백제의 主墓制였다.
그 뿐 아니다. 만약 온조 건국설화가 타당하려면 백제 왕실의 성씨는 고구려와 동일한 高氏여야만 한다. 그러나 백제 王姓은 扶餘氏였다. 부여씨는 동아시아의 老大國인 夫餘에서 解氏에 이어 등장하는 왕성이다. 이처럼 백제 왕실의 族源이 부여임은,『삼국사기』에서 "시조 東明王廟에 배알하였다(다루왕 2년 조)"와 '시조 동명(제사지)'이라고 한 시조관을 통해서 뒷받침된다. 동명왕은 고구려 시조인 주몽이 아니라 엄연히 부여의 건국 시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제 시조로 또다른 기록에 보이는 仇台를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했다(『翰苑』)"라고 하여, 그 족원이 부여임을 다시금 확인해 준다. 그리고『續日本紀』에서는 "대저 백제 태조 都慕大王은 日神이 강령하여 부여 땅을 모두 차지하고 개국하였다"고 하여 백제 시조의 건국지를 부여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국 역사서에서 백제를 '扶餘의 別種' 곧 支派라고 한 기록과 더불어, 백제에서 국왕을 가리키는 호칭인 '於羅瑕'가 부여에서 '왕'을 일컫는 보통명사에서 기인한 점과도 부합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백제 당시의, 그것도 백제인의 '목소리'를 통해서 이 점은 명백해진다.
472년에 개로왕이 北魏에 보낸 국서에 의하면 "저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하여 자국 왕실의 계통을 부여로 밝히고 있다. 이는 위덕왕이 대적 중이던 고구려 장수와 통성명하는 가운데 "서로 姓이 같다(『일본서기』欽明 14년 조)"라고 한 데서도 뒷받침 된다. 이렇듯 백제와 고구려를 '같다'고 묶어 놓는 틀은, 말할나위 없이 고조선에 이어 등장하는 老大國인 '부여'가 된다. 백제는 538년에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있다. 이처럼 백제는 장구한 세월 동안 국가의 법통을 집요하게 부여에서 찾았다. 이같은 검토를 통해 백제사의 출발은 이제 고구려가 아니라 부여로 새롭게 인식되어야만 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에서 기원했음은 풍속을 비롯한 제반 여러 요소에서의 동질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와 더불어 고조선과 신라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일찍이 조선의 유민들이 이곳에 와서 산곡간에 흩어져 6村을 이루었다"라고 하여 고조선의 유민들이 경주 분지에 정착하여 신라 국가 형성의 기층 토대가 되었음을 언급했다. 경주 조양동 토광묘와 그 출토품이 대동강 유역의 그것과 연결되고 있는 점에서 실제 그러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리고 "魏將 毋丘儉이 고구려를 격파하자, 옥저로 달아 났다가 그 후 다시 고국으로 돌아 왔는데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가 되었다"라고 하여 신라 건국 세력과 고구려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 밖에 "그 나라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해서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 기사도 있다. 게다가 고구려 주몽왕과 접속되어진 온조의 백제 건국 기사를 통해 삼국의 건국은 서로 연결시켜 인식되었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기사가 사실일 가능성은 차후 검토할 문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삼국간에 어떤 형태로든간에 공통점이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이것은 동질성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진다. 요컨대 신라의 기원과 관련하여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백제의 존재가 언급되고 있다는 자체가 종족을 비롯한 삼국간의 동질성을 상징해 주는 문자라고 하겠다.
2) 고구려 국호와 그 제사 체계의 계승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 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인 東明廟를 건립하여 각각 제사를 지냈다. 양국은 서로 쇠락해 가는 부여의 정통을 승계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국왕은 즉위하는 해 정월에 동명묘에 拜謁하는 의식을 통해 왕위에 대한 보증과 정통성을 천명하고는 했다.
이 와는 달리 국호에서 고구려는 후대의 고려 왕조와 동질성을 지니고 있었다. '고구려'라는 이름은 기원전 107년에 현도군을 설치하는 기록에 현 이름으로서 등장하였다. '高句麗'는 기원전 37년 고구려의 건국 이후에 줄곧 국호로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5세기대 이후 고구려의 역사를 수록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서인『魏書』나『新 舊唐書』등에 의하면 고구려를 나타내는 국호로서 '高麗'가 나타나고 있다. 일본 史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8세기 전반기에 편찬된『古事記』나『日本書紀』등 어느 문헌에도 '고구려' 대신 '고려'만이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 문헌에도 이 점이 엿보여진다. 고려 충열왕 때 편찬된『삼국유사』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인용한 책 이름으로 보이는「高麗本紀」와「高麗古記」의 '고려'는 고구려를 가리키고 있다. 이 점은 당대에 작성된 금석문 자료를 통하여 보다 분명해진다. 539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延嘉7年銘 金銅佛像의 光背銘에 의하면 그 불상의 제작처를 "高麗國 樂良 東寺"라고 하였다. 5세기 중엽에 건립된 중원고구려비에 의하면 "五月中 高麗太王"으로 문장이 시작되고 있다.
이로써 고구려의 국호는 5세기대 이후에 '高麗' 2字로 줄여서 개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이후 멸망할 때까지 '高麗'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그 결과 고구려는 왕건이 세운 후대의 고려와 연결되는 동일왕조로 인식되어졌다. 즉 1123년(인종 원년)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徐兢이 그 이듬 해에 지은『선화봉사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의 기원을 '고려'라는 동일한 국호를 사용했던 고구려에서 찾았다.『宋史』에서도 "고려는 본래 고구려이다"라고 했다. 고려는 보장왕대에 당나라에 한 번 망했다가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왕건에 의해 회복된 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중국인들에게 고려 왕조는 高氏에서 王氏로 왕실이 바뀌었다는 인식을 가지게 하였다. 실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기에 왕건 이전에 궁예가 국호를 당초 高麗로 사용하여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바 있다. 왕건은 그것을 승계한 것이다. 고구려에 대한 궁예의 인식은 다음에서 엿볼 수 있다.
天復 원년 신유(901)에 선종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퇴하였기에 平壤 舊都는 묵어서 잡초만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였다.
궁예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舊都'라고 하였다. 평양은 궁예가 터잡은 당시의 수도 송악과 관련해서 볼 때 '舊都'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궁예가 자신이 세운 국가와 고구려를 동일시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인식은 徐熙가 遼나라 장수 蕭遜寧에게 "우리 나라가 고구려의 옛땅이므로 국호를 高麗라고 하였고 平壤을 國都로 하였다"라고 한 말과, 後唐에서 고려 태조를 책봉한 조서에 "주몽이 건국한 祥瑞를 계승하여, 그 곳의 임금이 되었으며"라고 한 문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고려는 단순히 국호의 동질성만 표방한 것은 아니었다. 제사 체계에서도 동질성을 나타내고 있다. 즉 국가의 정체성을 천명하고 있는 제사 체계에서 고려는 다음의 기사에서 보듯이 고구려 때와 마찬 가지로 고구려 시조인 주몽왕과 그 어머니인 류화부인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설치했었다.
神廟가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이라고 하는데 나무를 조각하여 婦人像을 만들었다. 하나는 高登神이라하는데 그들의 시조이며 부여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모두 官司를 설치해 놓고, 사람을 보내어 수호하는데, 대체로 河伯의 딸과 주몽이라고 한다.
사신을 보내어 東明聖帝祠에 제사하고 衣幣를 올렸다.
東神祠는 宣仁門 안에 있다. 땅이 좀 평평하고 넓은데, 정전의 집이 낮고 누추하며 행랑과 월랑 30간은 황량하게 수리하지 않은 채로 있다. 정전에는 '東神聖母之堂'이라는 방이 붙어 있고 장막으로 가려 사람들이 神像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나무를 깎아 여인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夫餘(王)의 妻인 河神의 딸이라고 한다. 그녀가 주몽을 낳아 고려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는 것이다. 전부터 사자가 오면 관원을 보내어 奠祭를 마련하는데, 그 牲牢와 酌獻은 崧山神에 대한 법식과 같다.
이와 더불어 고구려에서는 東盟祭를 지내는 10월에 서울 동쪽의 큰 동굴[國東大穴]에 깃든 隧神을 제사지냈다. 고구려가 평양성으로 천도한 후에는 대동강변의 기린굴이 그러한 목적의 동굴이었다. 이러한 제사 의식은 고려시대에는 다음과 같이 계승되고 있다. 즉 "고려 동쪽에 동굴이 있는데 隧神이라고 불렀다. 항상 10월 보름이면 (그 隧神을) 맞이하여 제사지냈는데, 이를 八關齋라고 한다" "그 10월 東盟의 모임은 지금은 그 달 보름날 素饌을 차려놓고 그것을 八關齋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고려의 팔관재는 고구려 동맹제 때의 수혈 제의를 그대로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사 체계는 쉽게 바뀌지 않으므로 국가의 정체성을 나타내 준다. 일례로 부여가 농경 사회임에도 음력 12월인 殷正月에 迎鼓라는 제천 의식을 거행했다. 이는 북방에서 내려온 부여 건국 세력의 狩獵民的인 전통을 반영해 주는 동시에 제사 의례는 쉽게 바뀌지 않음을 웅변해준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사냥터에서 잡은 짐승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조선시대에도 사냥터에서 잡은 짐승을 종묘에 바쳤다. 다음의 기사가 그것을 말해 준다. 丙戌日에 上이 아차산에 幸行하여 사냥하는데 假注書 張洽으로 하여금 사냥한 노루 세 마리를 먼저 宗廟에 바치도록 하였다.
여기서 그 시조를 '日月之子' 혹은 '皇天之子'라고 인식했던 고구려에서의 天神 제사와 朝鮮의 宗廟 제사는 본질적으로 그 속성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고구려 문화의 지속성이 확인된다. 가령 쌍영총이나 무용총을 비롯하여 안악1호분 등과 같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남자임이 분명한 무덤의 주인공을 태운 수레를 소가 끄는 장면을 접하게 된다. 이것은 비록 왕의 수레가 아닐 수 있지만, 그러나 고려에서 "왕이 거동할 적에 멍에를 맨 소의 수레를 타고, 험한 산을 넘을 적에는 말을 탔다"라는 사실과 잘 연결되고 있다. 고구려와 고려의 왕은 행차시 모두 소가 끄는 수레를 탔던 것이다. 신라에서도 "소는 수레를 끌리고, 말은 탄다"고 하였으므로, 고구려와 동일하였다. 그러므로 "소가 끄는 수레는 여자가 타고, 말이 끄는 수레는 남자가 탔다"는 견해는 타당성이 없다. 안악 3호분 벽화만 보더라도 남자 주인공이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고려의 경우, 동질적인 행차의식이 존속했음을 알 게 된다.
3. 고구려 문화의 전파
1) 언어와 문자
『삼국지』동이전의 다음과 같은 기사는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동옥저와 동예가 동일 문화권으로 밝혀지고 있다.
東夷의 옛말에 夫餘 別種이라고 하는데, 언어나 諸事에는 부여와 같은 점이 많다.(고구려 조) 그 언어는 고구려와 비슷하지만 경우에 따라 약간 다르기도 하다. 음식 주거 의복 예절은 고구려와 닮았다.(동옥저 조) 언어와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지만 의복은 다르다.(예 조)
즉 고구려와 옥저 그리고 동예는 동일한 언어와 풍속을 지닌 문화 공동체였다. 이는 족원의 동일성과 결코 분리하기 어려울뿐 아니라 그 문화의 정점에는 부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한 부여의 세력 분파에 따라 그 언어와 풍속이 파급되어 나간 결과 고구려 옥저 동예뿐 아니라 '扶餘之別種'으로 기록된 백제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 사서에서 백제를 가리켜 "지금 언어와 복장은 대략 高驪와 같다"라고 하였다. 백제와 고구려는 언어와 의복이 동일하다고 했다. 그러한 고구려는 부여와 언어 법속이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백제와 고구려는 부여를 축으로 한 동일 문화권이었음을 알려준다.
백제를 '扶餘之別種'이라고 하였음은 그 건국 세력과 부여는 물론이고 고구려와의 종족적인 연관성을 암시해 준다. 실제 백제와 부여는 언어적으로도 연결되고 있다. 일례로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는 호칭인 '於羅瑕'가 부여에서 '왕'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제에서는 왕을 於羅瑕 외에 ' 吉支'라고도 불렀다.『일본서기』에서는 백제왕을 '고니키시' 혹은 '코키시'라고 불렀다. 고니키시와 코키시는 곧 건길지를 가리킨다. 고구려에서는 왕을 코키시 외에 '오리코게'라고도 일컬었다. 오리코게는 백제에서 왕을 일컫는 '어라하'와 음에 있어서 약간의 유사점이 나타나고 있다. 그 밖에『삼국사기』지리지 등을 토대로 한 지명 연구를 통해 고구려어와 백제어 그리고 신라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史書에 보면 이러한 삼국과 숙신 읍루 물길 말갈로 이어지는 족속과의 문화적 친연성은 언급된 바 없다. 오히려 물길의 경우 "언어가 홀로 다르다"고 했을 정도로 부여 고구려계와는 언어적 차이는 물론이고 문화적인 이질성이 현저했음을 알 수 있다.
문자의 경우는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은 漢字를 공유하고 있었다. 중국과는 다른, 문자 체계에서의 동질적인 면면을 보이고 있다. 가령 "漢城下後(평양성석각)"와 "後都(아차산 제4보루 토기)"에 보이는 部를 나타내는 省略 文字인 ' '가 백제 금석문에도 나타나고 있다. 가령 '上' ' 前 '銘 표석을 비롯하여 印刻瓦와 목간 등에서 흔히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생략 문자는 이미 알려져 있듯이 한자의 생략형인 고려와 조선시대의 吐로서 기능하였다. 그리고 吏讀가 삼국시대에 행해졌음을 알려준다.
한편 "丙戌十二月中 漢城下後 小兄文達節 自此西北行涉之(평양성석각)"에 보이는 '之'는 종결 어미로서 한문의 '也'와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이러한 용례는「단양신라적성비문」을 비롯한 신라 금석문에서 자주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평양성석각문」과「중원고구려비문」에 보이는 '節'은 신라「남산신성비문」을 비롯해서 삼국만의 독특한 漢字 체계를 말해준다. 특히「평양성석각문」에 보이는 '作節'은「남산신성비문」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 밖에 고구려에서는 중국 한자에도 없는 여러 가지 이두식 한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 (마을 창고)' ' (국경 초소가 있는 변방)' ' (사다리)' 등이 고구려에서 만든 한자인 것이다.「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문」에서 확인되듯이 신라에서는 '畓'처럼 중국 한자에 없는 독자적인 한자를 역시 만들었다. 요컨대 이미 지적된 바 있듯이 이두와 새로운 한자의 제작은 고구려에서 시작하여 백제와 신라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는 우리 나라 언어 발전에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된다.
2) 정치 제도
주지하듯이 부여는 물론이고 여기서 분파된 고구려와 백제는 공히 5部聯盟體였다. 도성을 고구려와 백제는 5部로, 지방 역시 5部(5方)로 각각 구획하였다. 신라의 경우도 5小京制를 통해 볼 때 지방 통치와 관련한 '五'라는 數字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점 부여를 정점으로 한 삼국만의 특색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신라 왕호인 麻立干 칭호는 고구려의 莫離支에서 借用했으리라는 견해는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 고구려가 신라에 끼친 영향력의 일단을 躍如하게 표출해 줄 수 있다.
한편 신라의 독특한 신분제로만 여겨졌던 게 골품제였다. 그런데「흑치상지묘지명」을 통해 백제에서도 그와 유사한 제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묘지명에 의하면 "그 선조는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인하여 氏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흑치상지는 본래부터 백제 왕족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집안은 曾祖父부터 흑치상지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역임한 최고 관등이 達率에 국한되고 있다. 바로 이 사실은 백제 또한 신라의 頭品制처럼 昇級의 한계가 규정된 신분 체계가 확립되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즉 흑치상지 가문이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4대에 걸쳐 제2관등인 達率에 그쳤음은, 마치 신라의 族降과 비교되는 사안이다. 「성주사낭혜화상비문」에 의하면 朗慧는 무열왕의 8世孫으로서 祖父 때까지는 진골 신분이었으나 父인 範淸 때에 "族降眞骨一等曰得難"이라고 하여 육두품으로 강등되었다. 그 신분 변동의 동기는 친족 집단의 증가로 인하여 낭혜의 父인 범청이 왕실 직계 집단에서 소외된 데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백제의 경우도, 부여씨 왕실 집단의 증가로 인해 그 분파가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흑치상지는 弱冠이 안되어 地籍으로서 달솔을 제수받았다고 한다. 여기서 地籍은 '소속된 家門'이나 '身分'을 가리킨다. 쉽게 말해 그는 門閥로서 달솔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흑치상지는 부여씨 왕족 신분이었던 관계로 달솔까지 승진했음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 고구려 연개소문의 子인 泉男生이나 泉男産의 경우, 특히 前者의 20세 전 前歷이 9세에 先人, 15세에 中裏小兄, 18세에 中裏大兄이었던 예가 상기된다. 그러나 4대에 걸쳐 흑치상지 가문이 16관등 가운데 제2관등인 달솔까지밖에 승급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간에 왕족 간의 신분적 구분이 확립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이 문제는 백제의 사회제도가 신라의 그것과 유사할 수 있다는 심증을 충분히 안겨주고 있다. 그런데 신라 이전에 이미 고구려에서도 그러한 요소가 일찍부터 지적되었다.
즉 "『翰苑』에 보면 고구려의 14관등을 언급하면서 제1관등~제5관등까지는 기밀을 장악하고 정치에 관한 일을 모의하고 군대를 징발하고 관직을 뽑아서 제수한다고 되어 있다. 이 5관등 이상은 신라의 5관등인 대아찬 이상과 공통성을 이루고 있고, 구성원이 명백히 진골들인 신라의 화백회의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만 일정한 특권을 가지고 정치에 관한 모든 중요한 일을 맡았다"고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구려가 미친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신분 제도가 백제와 신라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게 온당한 해석일 것이다. 동일한 이름으로 삼국 모두에서 확인되고 있는 지방 장관인 '道使'의 경우가 그 단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백제의 賦稅가 고구려와 동일한 게 많았다는 기록도 참고된다.
3) 冠帽와 衣服 그리고 頭髮
관모와 의복은 신분의 지표인 동시에 타 공동체와 구분 짓는 역할을 하였다.「중원고구려비문」에 보면 고구려가 신라왕과 그 신료들에게 의복을 하사하고 있다. 이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복속 의례와도 관련 있는 일종의 정치적 성격을 지닌 것이다. 신라 진덕여왕이 복속 의례로서 독자 연호를 폐기하고 당의 연호와 관복을 수용한 것처럼 의복 자체의 성격은 그 국가와 종족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의 관모와 의복의 현상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부여에서는 "金銀으로써 관모를 장식하였다"고 했다. 고구려에서도 "귀인은 冠에 紫色 비단을 사용하고 金銀으로써 장식한다"라고 하여 귀인의 관모에 金銀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唐의 저명한 시인 李白이 지은 고구려 춤을 소재로 한 詩句 가운데 '金花折風帽'라고하여 折風 관모에 장착한 金花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 백제왕은 "烏羅冠에 金銀으로 장식한다"고 했다. 백제 무녕왕릉과 충청남도 부여 논산과 남원 나주 등지의 백제 고분에서 각각 출토된 金銀製 冠飾이 그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렇듯 부여에서 비롯하여 고구려, 백제 모두 지배층 신분의 관모에 金銀으로 장식했다. 이와 관련해 고려 현종이 귀주대첩에서 승리하고 개선한 姜邯讚 장군의 머리에 金花 8가지를 꽂아 준 사실이 상기된다. 여기서 머리 곧 관모에 金花를 꽂아 준 것은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이었음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한편 고구려인들은 모자에 鳥羽를 꽂는다고 했다. 백제에서도 "그 冠의 양 곁에는 꼬리 긴 깃털을 꽂는다"라고하여 고구려처럼 관모 양 곁에 새깃을 꽂는 풍속이 존재했었다. 신라에서도 깃털을 관모의 양 곁에 꽂았다고 한다. 의성 탑리 고분 천마총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 등등에서 출토된 관모는 고구려의 영향과 그 연관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한 고구려 관모는 중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한다.
의복에 있어서 "그(백제) 의복은 남자는 대략 고려와 동일하다" "그(백제) 의복은 고려와 더불어 대략 동일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服制上 고구려와 백제간의 동질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신라의 경우도 "의복은 대략 고려 백제와 더불어 같다"라고 했으므로 삼국은 의복 체계가 거의 동일했던 것 같다. 그러한 신라에서 "色服은 흰색을 숭상했다"고 하였다. 신라 박혁거세와 김알지의 출생과 관련한 동물이 각각 '白馬'와 '白鷄'인 데서도 그러한 정서가 엿보여진다. 이는 부여와의 관련성을 생각하게 한다. 부여에서는 "나라 안에 있을 때는 옷은 흰색을 숭상했는데, 白布大袂 袍 袴가 있다"고 했듯이 백색을 숭상했기 때문이다. 한국 민족을 '백의민족'으로 일컬은 것은 적어도 부여 이래의 전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白袍와 袴를 입은 이들이 눈에 많이 띈다고 한다.
한편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騎馬人의 上衣는 다양한 여밈새를 하고 있다. 바지는 上衣의 통수에 어울리는 그리 좁지 않은 통으로 했고, 바지 부리를 좁혀 깔끔하게 처리했다. 이러한 복식은 기마인 외에 고구려 일반인들도 모두 입고 있는 것으로, 전국시대에 북방 민족이 입은 통이 좁은 고습이나 三國 兩晋 南北朝時代의 袴褶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이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북방 민족처럼 모든 계층이 동일한 성격의 의복을 일률적으로 입은 것이 아니다. 성별과 신분 및 직업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각저총 벽화에서는 주인공과 시녀들의 袍 는 모두 左 直領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쌍영총 벽화에서 여자 주인공과 시중군이 함께 右 直領의 옷을 입은 것과 마찬 가지로 形이 사회적 지위와는 관련이 없음을 알려준다. 약수리 고분벽화에서는 기마인과 수렵인들을 대상으로 살펴 볼 때 동일한 의복에서 좌임과 우임이 자연스럽게 혼용되었다. 이들 복장에서는 북방 호복 계통의 窄袖와 細袴는 보이지 않으며 삼국 양진 남북조시대 袴褶의 모양도 역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고구려 기마인과 수렵인의 복식 역시 북방계 호복 형태에 속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리고 장천 1호 고분벽화를 볼 때 고구려인들이 帶를 묶는 방향과 매듭의 모양이 신분에 관계없이 자유스러웠지만, 帶의 넓이는 신분에 따라 달랐다.
또 고구려 복식에서는 袍에 帶를 매기도 하고, 매지 않기도 했다. 이는 북방 계통의 호복에서 거의 일률적으로 帶를 착용한 것과는 차이가 난다. 形에서는 좌임과 우임을 자유롭게 혼용하고 있어, 임형은 신분과는 관계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밖에 삼실총 벽화에서는 주인공 부부의 袍의 소매 모양과 바지통이 모두 廣袖와 寬袴였다. 시중군들의 경우도 소매는 약간 좁으나 바지의 폭은 역시 寬袴로 북방 계통의 細袴나 窄袖가 아님이 확인되었다. 또 삼국에서 모두 大口袴가 확인되고 있으며, 금동 신발 바닥에 釘을 달았는데, 이러한 신발은 중국이나 북방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頭髮과 관련하여 고구려에서 부녀자들은 머리를 올렸고, 처녀들은 머리를 내렸다고 한다. 백제에서도 처녀는 머리를 땋아 뒤로 드리웠다가 시집을 가면 두 갈래로 나누어 머리 위로 틀어 올렸다. 신라에서도 마찬 가지로 婦人은 "땋아 내려진 머리카락을 머리 위로 올린다"고 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던 우리 나라 여성들의 두발 풍습이 아닐 수 없다.
4) 武器와 武具 체계
고구려의 무기와 武具의 성격을 잘 집약해 주는 게 화살촉이다. 고구려 화살촉은 용도에 따른 그 효용성의 극대화를 꾀하기 위해 종류와 형태가 다양하다. 이는 고구려 독자의 무기 체계가 확립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한 고구려의 무기 체계는 4세기 중엽까지는 중국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났다고 한다. 고구려의 무기체계는 북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고조선의 무기체계를 발전시켰던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한 고구려의 무기 체계는 신라와 백제 그리고 가야로 전해졌다고 한다. 즉 백제 지역에서 短弓의 사용과 長槍 인가 출현하고 있다. 일례로 천안 용원리 유적에서 고구려계 錫盤附鐵 를 통해 고구려 무기의 백제 지역 전파가 확인된다. 삼한 영역인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長弓을 사용하였으나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短弓을 제작 사용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에 따른 문화적 영향으로 간주되어진다. 甲胄를 비롯해서 목이 긴 화살촉, 3엽문 환두대도, 마구와 말갑옷 등이 그 예다.
적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의 武具 가운데는 갑옷과 투구인 甲胄가 포함된다. 고구려의 갑주는 중국과 북방 지역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다. 그러나 頸甲의 경우는 이들 지역과는 무관한 고구려만의 특징으로 파악되고 있다. 札甲의 경우 삼국 중 고구려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어 신라 가야 백제 등지로 전파되었다. 고구려 지역에서 札甲은 4세기 전반 경에 조영된 분묘에서 확인된 바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縱長板胄는 가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요녕성 撫順의 高爾山城에서 출토된 고구려 투구와 동일한 양식이 김해 예안리 150호분에서 출토된 바 있다. 요컨대 고구려의 武器와 武具는 백제 신라 가야에 영향을 미쳤음이 밝혀졌다.
5) 婚姻과 喪禮
혼인 풍습과 관련하여 고구려에서는 남편이 일단 데릴사위 생활을 하지만 아들을 낳아서 성장하게 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 온다. 신랑이 신부 집에 결혼 후 상당 기간 머무는 풍습은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행해졌다. 이러한 혼인 풍습이 폐지된 후에도 첫아이를 처가에서 낳는 풍습은 근자까지도 유지되었다.
고구려 고유의 묘제인 적석총은 백제에서도 조영되었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진파리 고분 등과 같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四神圖와 蓮花文은 능산리 1호분과 같은 백제 벽화묘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喪을 당하게 되면 남녀 모두 순백색 옷을 입거나 여름에 장례를 치를 때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얼음을 사용한 부여 이래의 전통은 후대까지도 이어져 왔다. 즉 "비로소 所司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게 했다"라고 하였듯이 신라의 藏氷庫를 이와 같은 맥락에서 거론할 수 있다. 실제로 신라에서는 "여름에 음식물을 얼음 위에 둔다"고 하였다. 부여의 喪禮에서 사용이 확인된 얼음 저장 시설과 그러한 전통은 현재 일부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석빙고로 이어져 왔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부모 및 지아비의 喪에는 모두 3년간 服을 입는다"라고 하였다. 백제에서는 "喪制는 高麗와 같다"고 하였으므로 고구려와 동일하게 3년喪을 치렀다. 신라에서는 "왕 및 부모와 지아비의 喪에는 1년 동안 服을 입는다"라고 하였듯이 1年喪이었다. 비록 신라에 병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3년상 전통은 결국 조선시대까지 내려 왔다. 이 점 의미심장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4. 맺 음 말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의 국호는 單字가 아니라 2~3자의 複字였다. 그리고 삼국 王姓은 국호나 국호의 첫 글자에서 취했다는 공통점이 확인되었다. 이 것은 單字 국호를 사용한 중국의 역대 왕조는 물론이고 여진족이 세운 金이나 淸과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여의 건국설화는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졌다. 신라 건국 세력의 계통은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백제와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그 같은 인식이 존재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는 근본적으로 삼국 계통의 동질성과 문화의 유사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국가의 정체성과 관련 있는 제사 체계의 경우, 고구려의 시조 제사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국호를 사용했던 고려에까지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동맹제가 고려의 팔관재로 이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밖에 혼인을 비롯한 많은 제반 풍속과 정치체제가 고구려에 연원을 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 그러한 전통이 조선 후기까지 그 殘影을 남겼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한편 언어와 문자 그리고 관모와 의복 게다가 甲胄를 비롯한 제반 문화 현상이 멀리는 부여에 淵源을 두었다. 또 이것은 가까이로는 고구려를 축으로 해서 형성된 문화적 동질성의 산물이기도 했다. 일례로 고구려 古都였던 집안이나 평양 지역 절터에서 발견되고 있는 指頭의 押捺文을 竝列시키는 단순한 형식의 軒平瓦가 충청남도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을 제시할 수 있다.
그 밖에 정치체제와 제도에서 부여와 고구려를 축으로 하여 역시 백제와 신라, 가야에 영향을 미친 사실이 확인되었다. 신라에 복속된 옛 고구려 지역 주민들이 고구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한 것이나 신라인들이 고구려를 '大國'이라고 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해동삼국'이라고 당고종 스스로 말했듯이 중국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문화 전통을 지닌 또다른 세계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인식되어졌다. 부여를 정점으로 해서 삼국으로 이어져온 문화의 많은 부분이 단절되지 않은채 후대까지 계승되었다. 한국 민족 문화의 정체성은 부여와 고구려를 축으로 해서 확립된 것이었다. (이도학/한국전통문화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