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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산문(聖住山門)은, 반도(半島) 백제(百濟)땅에 있었는가?
● 시공 불교(佛敎)사전에 의하면 :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신라(新羅)말(末)과 고려(高麗)초에 형성(形成)된 선종(禪宗)의 아홉 파(派)를 말하는데 이 중에서,
성주산문(聖住山門) : 《신라(新羅) 승(僧) 무염(無染, 800-888)이 821년에, 당(唐)에 가서, 마조(馬祖)의 제자인 마곡 보철(麻谷寶徹)의 선법을 전해 받고, 845년에 귀국하여, 보령(保寧) 성주산 성주사(聖住寺)에서 선풍(禪風)을 일으킴으로써 형성된 파(派). 현휘(玄暉, 879-941)는 무염의 제자 심광(深光, 생몰년 미상)에게 출가하고, 906년에 당(唐)에 가서 석두 희천(石頭希遷) 문하인 구봉 도건(九峰道虔)의 선법을 전해 받고 924년에 귀국하였다.》고 설명(說明)한다.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 성주사(聖住寺)는, 보령시(保寧市) 성주산(聖住山) 골짜기에, 그 유지(遺址)가 현존(現存)하고 있다고 하며, 그 터를 대충 정비(整備)해 놓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대랑혜화상(大朗慧和尙)의 탑비(塔碑)가 있다고 한다.
○ 전회(前回)에 경주(慶州)에 있다는 황룡사(皇龍寺) 및 구층탑(九層塔)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이번에는 충남(忠南) 보령(保寧)의 성주산(聖住山) 깊은 골짜기에 있었다는 성주사(聖住寺)에 대해, 그 진위(眞僞) 여부(與否)를 가려보기로 하자.
성주사(聖住寺)는 본래 오합사(烏合寺)이며, 《백제(百濟) 법왕(法王)이 왕자(王子)로 있을 때인 서력(西曆) 599년, 전쟁(戰爭)에서 죽은 병사(兵史)들의 원혼(冤魂)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절로, 그때 이름은 오합사(烏合寺)라고 했다. 오합사(烏合寺) 이야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도 언급(言及)되었고, 또 발굴조사(發掘調査) 때 나온 기와조각에「오합사(烏合寺)」글자가 있어 확실(確實)하다.》고 하는데,
그 증거(證據)가 발굴(發掘)하는 과정(過程)에서 나온 “기와조각”이며, 여기에 “오합사(烏合寺)”라는 글자가 있었으니, 이곳 터가 옛 백제(百濟)의 오합사(烏合寺)를 증거(證據)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정말 그럴까?
성주사(聖住寺)는 무려 일천(一千)년 가까이 존재(存在)해 있다가, 왜란(倭亂)시에, 왜병(倭兵)들에 의해 소실(燒失)된 옛 사찰(寺刹)이라고,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말하고 있다. 과연 보령(保寧) 땅에, 백제(百濟)때 건립(建立)한 성주사(聖住寺)가 있었을까? 이러한 얘기는 삼국(三國)이 반도(半島)에 있었다고 주장(主張)하는 무리들에 의해 조작(造作)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반도(半島) 보령(保寧) 땅의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역사서(歷史書)나 지리지(地理志)에 기록(記錄)된 보령(保寧)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땅이, 그 땅이 아닌데, 성주사(聖住寺)가, 그때의 성주사(聖住寺)일 수 없다는 이야기다. 즉(卽) 반도(半島) 백제(百濟)의 성주사(聖住寺)는,「서력(西曆) 599년에, 건립(建立)한 사찰(寺刹)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다.
○ 역사통설(歷史通說)의 설명(說明)이 맞다하고, 백제(百濟)왕조(王朝)가 정말 반도(半島) 땅 서남(西南) 모퉁이에 있었는가?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하자. 우선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에서, 정사(正史)라고 하는 원전(原典) 이외(以外)의 것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미 많은 분량(分量)의 백제(百濟)와 관계(關係)되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이, 우리 카페에 게재(揭載)되어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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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 《택리지(擇里志) : 1751년(영조 27)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이 현지답사(現地踏査)를 기초(基礎)로 하여 저술(著述)한 우리나라 지리서(地理書)》라고 한다.
《청양(靑陽) 서남(西南)쪽으로는, 서해(西海)와 연(連)한 보령(保寧)이 자리 잡고 있는데, “보령(保寧)의 산천(山川)이 가장 훌륭하다”라고 하였으며, 당시(當時) 보령(保寧)의 서(西)쪽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군영(軍營)이 있었고, 영(營)안에 영보정(永保亭)이 있었는데, 이곳은 호수(湖水)와 산(山)의 경치가 아름답고, 전망(展望)이 좋아 명승지(名勝地)라 불렸다.》고 하였다.
① 보령(保寧) 땅은, 산(山)과 산맥(山脈)뿐이며, 평야(平野)지대(地帶)는 많지 않다. 특히 성주사(聖住寺)가 있는 곳은, 하늘을 쳐다보면 구름만 보일 뿐, 동서남북(東西南北) 어디를 보아도 산(山)뿐일 정도로, 산(山)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그렇다고 수천(數千)미터 또는 일천(一千)미터 높이 고봉(高峰)도 아니요, 기껏 수백(數百)미터의 산(山)과 산(山)으로 이어져 있어, 많은 사람이 살 수도 없는, 말 그대로 산골짜기 조그만 동네일뿐이다.
② 보령(保寧) 땅에는 호수(湖水)란 곳이 없다. 이것은 지형적(地形的)으로, 호수(湖水)가 자리 잡고 있을, 그런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아니다. 때문에 “영보정(永保亭)”이란 정자(亭子) 역시 호수(湖水)가에 있을 수가 없는 땅이다. 보령(保寧) 서(西)쪽은 서해(西海)바다가 있을 뿐이다.
③ 호수(湖水)가 아닌 다목적(多目的) 댐은 있다. 이것의 이름은 “보령(保寧)댐”으로 2000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산골짜기를 막아 댐을 만들었을 뿐이다. 택리지(擇里志) 저자(著者)가 250년 이후(以後)의 미래(未來)를 내다보고, 이곳을 호수(湖水)라고 했을까? 이런 코-메-디 시나리오는 ‘판타지세계(世界)’일 뿐이다. 이게 역사(歷史)라면, 세계인(世界人)들의 웃음거리, 조롱(嘲弄)거리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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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충청도(忠淸道) 보령현(保寧縣)
《고려(高麗) 최해(崔瀣)가, 일찍이 이 고을로 좌천(左遷)되었는데 그 시(詩)에 이르기를, 『외로운 도서(島嶼) 위를 오가면서, 타향(他鄕)에 기식(寄食)하고 아침저녁을 보낸다. 아낙네들은 키가 작아서, 다니는 것이 흡사 자라(鱉)와 같고, 백성(百姓)들이 곤궁하고 보니 그 모습이 원숭이 방불하구나. 풍속은 비록 그 습상(習尙)의 잘못은 있어도, 예절만은 간혹 존비(尊卑)를 분간한다. 해 떨어지니 비린내 풍기는 바다 연기 모아들고, 가을 기운 이미 서늘한데도 해상의 장기(瘴氣)는 훈훈하다. 바다 가운데 위태한 봉우리는 조심조심 서 있는 것 같고, 포구(浦口)의 맑은 물은 한층 더 꿈틀꿈틀 흐른다. 중략.』하였다.
또한 《늦 조수 오는 곳에 잠깐 베개에 기대고 있다가, 눈을 들고 홀연히 주저(洲渚)가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아침저녁으로 정녕 누가 호흡하도록 하는 것이겠지. 저 하늘과 땅도 마침내는 또한 찼다가는 기우는 일이 있으리라. 남녘 사람들 바다에 뜨면 육지에 말 걸어가듯 하고, 물 나라[澤國]에서도 봄을 만나더니 날이 조금은 개는구나. 날마다 누각에 의지하곤 내려갈 줄 모르니, 괴상한 음성 때로 백구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하였다.
또한《땅의 형세는 탁탁 치며, 곧 날려는 날개와 같고, 누정의 모양은 한들한들 매여 있지 않은 돛대와도 같다. 북녘으로 구름에 쌓인 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디로 향하려는 것이냐. 남방(南方)으로 오면 둘러싸인 산천, 예가 가장 웅장하구나. 중략.》하였다.
①《아낙네들은 키가 작아서, 다니는 것이 흡사 자라(鱉)와 같고, 백성(百姓)들이 곤궁하고 보니 그 모습이 원숭이 방불하구나.》하였다면, 보령(保寧) 땅은,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다른 지방(地方)과는 달리, 인종적(人種的)으로 달랐다는 뜻이다. 위 글대로라면 : 보령(保寧) 땅과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百姓)들은, 남방(南方) 땅이며, 남방계(南方系) 인종(人種)이었다는 뜻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사실(事實)이라면 노벨상을 탈 수 있는 획기적(劃期的)인 발견(發見)이랄 수 있다. 반도(半島) 보령(保寧) 땅이 아니라는 증거(證據)다.
《포구(浦口)의 맑은 물은 한층 더 꿈틀꿈틀 흐른다.》고 하였다. 서해바다 물이 꿈틀 꿈틀 흐를 수 있는가? 이건 바다가 아니라 강(江)물이 흐르는 것을 표현(表現)한 말이다. 곧 보령(保寧) 땅에 커다란 호수(湖水)가 있고, 강물이 이곳으로 흘러들며, 강(江)가에 있는 포구(浦口)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②《물나라[澤國]에서도 봄을 만나더니 날이 조금은 개는구나.》하였는데, 바다(海)를 택(澤)이라고 하는 예(例)는 한자(漢子)가 생기고, 그런 예(例)는 없다. 택(澤)은, ‘작은 호수(湖水)와 늪’을 말하며, 호수(湖水)와 늪과 강(江)이 많아, 물이 많다는 것이고, 그 지방(地方)에 습도(濕度)가 높고, 기온이 높다는 뜻이다. 이는 곧 반도(半島) 보령(保寧) 땅이 아니라는 증거(證據)다.
③《남방(南方)으로 오면 둘러싸인 산천, 예가 가장 웅장하구나.》경성(京城)으로부터 겨우 사백(四百)리 떨어진 보령(保寧) 땅이 남방(南方)지대(地帶)라고!
그러면 전라도(全羅道)나 경상도(慶尙道)는 극남(極南)지방이란 말인가! 이곳이 산(山)과 하천(河川)에 둘러싸인 웅장(雄壯)한 곳이라는 이야기는 어이없는 말이다. 이는 반도(半島) 보령(保寧) 땅이 아니라는 증거(證據)다. 무엇을 가지고 반도(半島) 보령(保寧) 땅이라고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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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충청도(忠淸道) 남포현 藍浦縣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7리이다. 본래 백제의 사포현(沙浦縣)이었다. 성주산(聖住山) : 현 북쪽 25 리에 있다. 성주사(聖住寺)는 성주산(聖住山) 북(北)쪽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대랑혜화상(大朗慧和尙)의 탑비(塔碑)가 있다.》
《하증함담홍(霞蒸菡萏紅)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옛 고을 남해(南海) 가에 자리 잡으니, 안팎의 산과 물이 웅장도 하다. 섬에서 떠오르는 연기는 능히 비를 짓게 하고, 강(江)가에 선 나무에는 바람도 쉬 생긴다. 물은 포도로 물들어 푸르렀으며, 안개는 연꽃을 찌어 붉었나. 흰모래 위 누른 대나무 숲길에, 이 몸 완연히 한 폭 그림 가운데 있구나.》하였다.
① 경성(京城)으로부터 보령(保寧)의 남포(南浦)까지는 447 리라고 했는데, 사포현(沙浦縣)이란 이름으로 보면 : 모래가 많은 포구(浦口)였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그곳이 “남해(南海)물가” 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것이 반도(半島) 충청도(忠淸道) 보령(保寧)이나, 남포(南浦) 땅이 될 수 있는지, 동서남북(東西南北) 방위(方位)로 따져보자.
② 또 그곳에 어떤 강(江)이 있어, 강가의 나무에서 바람이 생긴다고 했을까? 남포(南浦)! 그 조그마한 포구(浦口)에 어떤 강이 있었을까? 한 번 물어보자! 위 기록(記錄)대로라면 바다(海)가 아닌, 모래가 많이 쌓여있는 강(江)변에 나무가 많이 있는, 포구(浦口)였다는 것으로 밖에 이해(理解)할 수밖에 없다.
③ 이러한 곳이 서해 바다 모퉁이, 충청도(忠淸道) 남포(南浦)땅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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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증손녀(曾孫女) 부여(扶餘) 태비(太妃) 묘비석(墓碑石)
《단풍 같은 미모, 아침 햇살 같은 행실·당(唐) 황족과 결혼…남국(南國) 사람의 얼굴처럼 아름다우니 봄날의 숲과 가을 단풍 같았다. 아주 좋은 집에 살았으나 아침 햇살처럼 조용히 움직여 드러나지 않으니 세상에 드물게 어진 사람이며 덕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같았다.”》하였다고 하는데,
➠ 도대체(都大體), 백제(百濟)가 어느 곳에 있어, 남국(南國)이라고 하는 걸까? 반도(半島) 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 땅을 남국(南國)이라고 했는가? 있다면 :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자(者)들 뿐이다. 자기들이 떠든다고, 거짓이 진실(眞實)이 될 수 있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세뇌(洗腦)된 사고(思考)할 수 없는 자(者)들만의 헛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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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흑치(黑齒) 준(俊) 묘비석(墓碑石)
《大唐故右金吾衛守翊府中郞將上柱國黑齒府君墓誌銘幷序. : 대당(大唐)고인(故人)우금오위(右金吾衛)수익부중랑장(守翊府中郞將)상주국(上柱國)흑치부군(黑齒府君)묘지명(墓誌銘) 및 서문(序文). : 公諱俊卽唐左領軍衛大將軍燕國公之子焉.分邦海濱見美玄虛之賦,稱酋澤國取重太沖之詞熾種落於遐荒積衣冠於中國. : : 공(公)의 이름은 준(俊)이니, 즉 당나라 좌령군위대장군(左領軍衛大將軍)연국공(燕國公)의 아들이다. 바닷가의 땅을 나누어 나라를 이루매 목화(木華)가 지은 해부(海賦)에서,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늪지가 많은 나라에서 우두머리를 칭하매, 좌사(左思)가 지은 삼도부(三都賦)에서 그 소중함을 얻을 수 있도다. 먼 오랑캐의 땅에서 부락을 크게 일으켰고, 중국에 들어와서 누차 벼슬을 하였구나. 立功立事懸名於晝月之旗爲孝爲忠紀德於繫年之史. : 공을 세우고 일을 이루니 해와 달을 그린 깃발에 그의 명성이 걸렸고, 효성스럽고 충성스러우니 연대순으로 적은 역사책에 그의 덕이 기록되었도다.》하였다.
① <택국(澤國) : 물 많은 나라!> 반도(半島) 땅의 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 땅, 어디에 택(澤)이 많아서, 별칭(別稱)으로 택국(澤國)이라고 까지 했을까? 바다가(海濱)에 있어 택국(澤國)인가? 이건 아니다.
② <남국(南國)·택국(澤國)·남해(南海)·호수(湖水)·왜소(矮小)한 백성(百姓)들·강변(江邊)>등을 놓고 보면 : 이곳은 결코 반도(半島) 땅이 될 수 없으며, 충청도(忠淸道) 보령(保寧) 땅이 될 수 없다. 땅(地)이란 그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자리 잡고 있고, 그에 따른 환경(環境)이 있으며, 환경(環境)에 따라 기후(氣候)와 토산물(土産物)과 풍속(風俗)등등이 있어, 다른 땅과 대비(對比)되는 것이다. 좀 정신(精神)을 차리자. 세뇌인간(洗腦人間)은 그저 입력(入力)되어 있는 만큼만 생각하고, 행동(行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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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백제(百濟) 부여(扶餘) 융(隆) 묘지명(扶餘隆墓誌銘)
《공(公)은 이름이 융(隆)이고 자(字)도 융(隆)으로, 백제(百濟) 진조인(辰朝人)이다. (시조는 하백(河伯)의?) 자손(子孫)이니, 그가 처음 나라를 열어 동방(東方)에서 우두머리로 일컬었고, 한 쪽 귀퉁이를 차지하여 천년(千年) 동안 이어내려 왔다. 중략.》고 하였다.
① 진조(辰朝)란 : 진조(震朝)와 같고, 동방(東方)과 동양(東陽)과 같은 말이다. 백제는 곧 동방(東方)왕조(王朝)였다는 말이며, 동방(東方)은 곧 서방(西方)과 대칭(對稱)되는 말이다. 곧 반도(半島)일 수 없다는 뜻이다.
② 하백(河伯)의 자손(子孫) : 하백(河伯)은 하신(河神)이며, 하(河)는 대륙(大陸)의 서(西)쪽 황하(黃河)를 말한다. 이 말은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③ 백제(百濟)가 동방(東方) 땅인 진역(震域)에서, 일천(一千)년을 이어왔다는 뜻이니, 반도(半島)에 백제(百濟)가 일천(一千)년을 이었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왜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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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계곡 집(谿谷集) 제15권/ 행장(行狀) : 《추충분의평난,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성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오성부원군, 이공 행장(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鰲城府院君李公行狀) :
《世子在洪州.欲移駐保寧之水營.使公往審之.公還詭對以爲不可駐.或疑之. : 세자가 홍주(洪州)에 있을 적에, 보령(保寧)의 수영(水營)으로 옮겨 머무르려고 하면서, 공으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공이 다녀와서는 머물 수 없는 곳이라고 속임수로 대답하였다. 이에 더러 의심을 하자, 公曰.永保亭勝槩冠湖中.恐少主居之.啓異日侈蕩心.識者服其遠識. : 공이 말하기를, “영보정(永保亭)은 그 경치가 호중(湖中)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곳이다. 따라서 소주(少主)께서 이곳에 머무르시면, 뒷날 방탕 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 식자들이 그 원대한 식견에 탄복하였다.》고 하였다.
① 홍주(洪州)는 충청도(忠淸道) “홍성(洪城)”이라고 하며, 보령(保寧)은 현재(現在)의 보령(保寧) 땅이라고 한다. 여기서 문제(問題)는 『보령(保寧)은 호중(湖中에 있으며, 호중(湖中)에서, 경치(景致)가 가장 뛰어난 곳』이라고 한 대목이다.
② 호중(湖中)이란 말을 사전(辭典)에서 찾아보면 : 호서(湖西)라고 하였으니, 호우(湖右)지방을 말하는 것이고, 풀어보면 : 기준(基準)이 되는 큰 호수(湖水)의 서(西)쪽 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반도(半島) 땅의 어디에, 땅을 나누어 별칭(別稱)으로까지 부를 정도(程度)의 큰 호수(湖水)가 있느냐? 하는 거다.
③ 보령(保寧) 땅이 설사(設使) “호중(湖中)”이라 하더라도, 그곳이 『호중(湖中)의 여러 땅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경치(景致)를 자랑한다.』는 말은, 땅의 지형지세(地形地勢)을 깡그리 무시(無視)한 무식(無識)의 표본(標本)적인 말이다.
그곳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치(風致)를 갖고 있었으면, 또한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다보니, 기녀(妓女)들 또한 많아, 혹시(或是)나 세자(世子)가 이런 유혹(誘惑)에 빠져, 군주(君主)가 되어,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고, 방탕(放蕩)해질까 우려(憂慮)한 것이다.
④ 충청도(忠淸道) 보령(保寧) 땅이, 아름다운 풍치(風致)가 호중(湖中)에서 최고(最高)라고 해서 안 될 일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형승(形勝)지세(地勢)가 없다는 게 문제(問題)다. 선대(先代)들이 기록(記錄)한 곳에서는 『보령(保寧) 땅의, 아름다운 풍치(風致)는 호중(湖中)에서 최고(最高)』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보령 땅에는 그러한 형승(形勝)이 없다. 이게 무엇을 말함인가? 결국(結局) 『기록(記錄)에서 말하는 땅은, 반도(半島) 보령(保寧) 땅이 아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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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군정4(軍政四) 해방(海防)>편의 “서해남부[西海之南]” 설명(說明)에 :《보령(保寧)의 수군절도영(水軍節度營) : 공충도(公忠道)의 명승지(名勝地)다.》라고 했으며,
(9) 향토사(鄕土史)에 의하면 : 《충청 수영청(水營廳)은 09년도에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 곳으로, 한때는 400여척의 군선(軍船)과 8천 여 명의 군졸(軍卒)이 주둔(駐屯)한 서해안(西海岸) 최대(最大)의 ‘조선(朝鮮) 수군(水軍) 군영(軍營)’이였지만, ‘영보정(永保亭)’이라는 명승지(名勝地)로도 유명(有名)하다. 영보정(永保亭)은 수영청(水營廳)내 북(北)쪽 면(面) ‘해안가 언덕’에 위치해 있었고, 1504년 연산군(燕山君) 때 이 량(李 良)장군이, 당시 쓰지 않는 객관(客館)으로 방치(放置)되어 있던 자리에, 정자(亭子)를 짓고 이를 영보정(永保亭)이라 칭했다.》고 이야기한다.
① 공충도(公忠道) : ‘공주(公州)·충주(忠州)’도(道)란 이야기인데, 보령(保寧) 땅이 공주(公州)나 충주(忠州)보다 더 명승지(名勝地)란 말은, 자다가도 웃을 일이다. 이게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의 한계(限界)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명승지(名勝地)라고 하며, 형승지지(形勝之地)라고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② <호중(湖中)에 있다.>고 하는 “영보정(永保亭)”이 갑자기 <서해(西海) 바닷가 벼랑위에 있다>는 말은 또 무엇이냐? 또한 군선(軍船) 400 여척과 8천여 명의 수군(水軍)이 주둔(駐屯)한 곳이라면, 거기에 합당(合當)한 군사시설(軍事施設)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서해(西海) 특히 이곳은, 간만(干滿)의 차가 심한 곳이라, 시설물(施設物)을 설치(設置)하자 않고는, 배가 정박(碇泊)할 수 없다. 말이 수백(數百)척이지, 이 규모(規模)의 전함(戰艦)이 정박(碇泊)하고 있으려면, 대규모(大規模) 시설물(施設物)이 축조(築造)되어 있어야 하며, 8천이 주둔(駐屯)하고 있었다면, 수리소(修理所), 숙소(宿所)와 더불어, 이들이 생활(生活)하는 생필품(生必品) 마련을 위한 상업(商業)시설(施設), 장사치, 유흥가(遊興街)등이 있었을 것임은 미리 짐작(斟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흔적(痕迹)들은, 어디에서 있는 것일까? 바다 밑에 가라 앉아 수백(數百)년 잠자고 있는 것일까? 보령(保寧)의 행정(行政)담당자(擔當者)들이, 이러한 것을 안다면, 어떠한 표정(表情)을 지을까 정말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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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임진왜란 때 모조리 불타버리고, 오늘날 폐사지만 남아있다.》고 하였는데 :
《성주사(聖住寺)는 신라(新羅) 말(末), 고려(高麗) 초(初),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의 하나로 크게 번창(繁昌)하였는데, 발굴(發掘) 결과(結果)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복구되지 못하고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발굴(發掘)과정(過程)에서 왜병(倭兵)이 불을 질렀다는 금석문(金石文)이라도 발견(發見)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불전80칸, 수각7칸, 고사50여 칸 등 천여 칸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이때 성주사(聖住寺)에서 정진(精進)하는 수도승(修道僧)만 2,000여명에 달했다.》고 설명(說明)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는 《이곳이 해안(海岸)이 가깝고, 산악(山岳)이 발달, 전략적(戰略的) 거점(據點)으로 이용(利用)되었고, 해안(海岸)으로 빠지는 교통로(交通路)였으며, 내륙(內陸)에서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으로 가는 창구였으며, 높은 산맥(山脈)으로 둘러싸여, 큰 사찰이 독립(獨立)된 구역(區域)을 이루기에 적합(適合)하다.》라고 설명(說明)하였다. 아마도 이 분은 보령(保寧) 땅의 지세(地勢)에 대해 무지(無知)한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떤 설명(說明)을 보더라도 한결같이 “임란(壬亂)” 때 소실(燒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① 왜(倭)가 조선(朝鮮)을 침략(侵略)한 목적(目的)이, 조선(朝鮮)에 있는 사찰(寺刹)을 없애기 위해서였는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보령(保寧) 땅 중에서도 가장 후미지고, 교통(交通)이 불편(不便)한 곳 중의 한 곳이다. 양(兩)쪽으로 산(山)이 이어져 있고, 조그마한 하천이 흐르는 바로 옆에 성주사(聖住寺) 터가 있는데, 왜병(倭兵)이 이곳에 무얼 하러 들어왔을까?
②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보령현(保寧縣)조에 : 땅이 협소(狹小)하고 서해(鰈海)가에 위치해 있다고 하였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호수가 3백 65호요, 인구가 1천 2백 13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2명이요, 진군(鎭軍)이 1백 명이다.
땅이 협소(狹小)하고 서해(鰈海)가에 위치해 있다 하였는데, 접해(鰈海)가 서해(西海)라는 증거(證據)는 무엇인가? 접역(鰈域)이란 단어(單語)를 찾아보면 : <가자미처럼 생겼다고 해서 우리나라 곧 반도(半島)를 일컫는 말>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미친 개(狂犬)같은 경우(境遇)가 혈압(血壓)을 올린다.
접역(鰈域) : 일본어사전 : 《カレイの形かたちに似にているという意いで)朝鮮半島ちょうせんはんとうの国土こくどを指さす語ご》이라고 하여, 조선반도(朝鮮半島)를 말한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가자미를 보자. 과연 가자미가 조선반도(朝鮮半島)를 닮았는지 말이다?
도대체 어디가 조선반도(朝鮮半島)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이 형태(形態)를 보면 : 대륙(大陸) 땅의 조선(朝鮮)영토(領土)와 똑같이 생기지 않았는가! 조선반도(朝鮮半島)는 길쭉한 고구마처럼 생겼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정말로 웃기는 이야기다.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의 세뇌(洗腦)인간(人間)들의 이야기를, 진실(眞實)이라고 믿는 우리들이 한심(閑心)하지 않은가?
또 접해(鰈海)가 하필이면 서해(西海)인가? 대륙(大陸)의 동해(東海)여야 맞는 말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시(當時)의 백제(百濟)는 고구려(高句驪)에 밀려, 남방(南方)으로 천도(遷都)하였고, 강좌(江左)지방(地方)에 있었으며, 땅이 습하고 더워, 백성(百姓)들은 산(山)에서 살았다는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반도(半島)백제(百濟)는 천지개벽(天地開闢)을 맞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무지(無知)가 무식(無識)을 낳는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식(無識)이 무지(無知)를…거짓말도 적당히 해야 하거늘…!
<남방(南方)=남국(南國)=남방(南方)=남해(南海)=택국(澤國)>이란 단어(單語)를 조합(調合)해 보면 : 백제(百濟), 그리고 성주사(聖住寺)가 있어야 할 곳은 : 호남(湖南) 또는 강좌(江左)지방이어야 올바른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③ <몽고(蒙古)침략(侵略)+왜(倭)의 난동(亂動)+호(胡)의 난동(亂動)>시, 그 진군로(進軍路) 또는 대도회지(大都會地), 전술(戰術)전략(戰略)상의 요충지(要衝地)등지에 있었던 사찰(寺刹)이라면, 전쟁(戰爭)통에 소실(燒失)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고찰(古刹)이나 유명(有名)한 사찰(寺刹)등이 모두 이러한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산(山)속에 있었다. 침략군(侵略軍)은 조선(朝鮮)의 군대(軍隊)와 싸우기도 바쁜 판에, 깊은 산(山)속에 있는 사찰(寺刹)을 찾아 나서, 불태웠다는 식(式)의 이야기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조선사(朝鮮史)의 비극적(悲劇的)인 이야기다.
전회(前回)에도 강조(强調)하였지만 《반도(半島)내의 옛 큰 사찰(寺刹)들은 대부분(大部分)이 “몽고(蒙古)침략(侵略)+왜(倭)의 난동(亂動)+호(胡)의 난동(亂動) 때 소실(燒失)되었다”는 설명(說明)은,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자(者)들의 한계(限界)를 여실(如實)히 보여주는 것이다.> 설명(說明)할 수는 없고, 결국(結局) 불태워졌다고 하면 끝이니 말이다.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중화(中華)였다는 사실이다.
➊ 황룡사(皇龍寺)구층탑(九層塔)의 기록(記錄)에서도 보다시피, <동방(東方)의 구한(九韓)속에도 중화(中華)가 구한(九韓)의 하나>로 포함(包含)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 『안홍(安弘)의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 : 2층에는 중화(中華)가 있다.』고 하였다.】
➋ 이후(以後), 일천(一千)여년 후(後)의 <조선왕조(朝鮮王朝) 정조(正祖) 3년 기해(1779) (건륭44) / 8월 3일(갑인)>의 기록(記錄)을 보면 : <아국(我國)은 세상(世上)에서 중화(中華)라고 불렀다.> 라고 하였다.
【我東以蕞爾鰈域,粗知禮義之方,世有中華之稱.而今則,人心漸至狃安,大義轉益湮晦,北走之皮幣,看作常事,不以爲恥.思之及此,寧不心寒? : 우리는 동쪽의 작은 접역(鰈域)으로서, 예의를 대강 아는 지방이므로, 세상에서 중화(中華)라는 부름이 있었다. 이제는 인심은 점점 안일에 길들여지게 되고, 대의(大義)는 점점 더욱 자취를 감추어, 북으로 가는 예물(禮物)을, 예사로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 위 왕조실록(王朝實錄)의 기록(記錄)에 “접역(鰈域)”이라는 단어(單語)가 나온다. 이는 (10)-②에서 설명(說明)한 것을 참조(參照)하면 된다. 문제(問題)는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이다. 일본(日本)아이들이 조선반도(朝鮮半島)라고 하니, 거기에 함께 동조(同調)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반도(半島) 땅이 어디가 가자미(鰈)와 닮았는가? 이해(理解)불가(不可)한 이야기다.
● 조선사(朝鮮史)는 이렇게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어, 지금 우리들 앞에 있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수많은 군주(君主)와 왕족(王族)들과 신하(臣下)들과 백성(百姓)들이,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감에 있어, 환경적(環境的) 요인(要因)을 떠나서는, 누구도 설명(說明)할 수 없다.
두발을 딛고 있을 땅이 있어야 하고, 그 땅에는 산(山)과 하천(河川)등의 지세(地勢)가 있으며, 이에 따라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방위(方位)가 있고, 그에 따른 기후(氣候)가 있으며, 기후(氣候)에 따라, 토산물(土産物)이 있고, 그에 따른 풍속(風俗)이 생긴다. 이러한 자연환경(自然環境)이 없는 곳에서는, 인간(人間)이 생존(生存)할 수 없다.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은, 이 점부터 다시 시작(始作)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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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러방지법>이 <국정원=걱정원>에서 밀고 있는, 거의 같은 수준(水準)으로 여당(與黨) 단독(憺)으로 처리(處理)되어, 통과(通過)되었다고 합니다. 테러대책기구가 이미 존재(存在)해 있고, 대책기구(對策機構)의 의장(議長)은 국무총리(國務總理)인데…훌륭하신 국무총리(國務總理)께서는 불쌍한 민생(民生)들을 돌보시느라, 자신(自身)이 “테러대책기구(對策機構)의 의장(議長)”인 것도 모르시고, 일년(一年)내내 대책기구(對策機構) 회의(會議)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는데, 작금(昨今)의 시대(時代)가 『국가(國家)비상사태(非常事態)』라고 하고…!
북한(北韓)과는 그동안 휴전(休戰)을 했을 뿐, 준전시(戰時)상태(常態)가 아니었던가? 휴전(休戰)이 무언가? 하던 싸움을 잠시 쉬는 것이 아닌가! 이게 국가(國家)비상사태(非常事態)라고 한다면 옳은 말이다. 대통령(大統領)도, 전쟁(戰爭) 당사자(當事者)인 북한(北韓)의 우두머리를 만나고 오지 않았는가? 로켓을 발사(發射)하고, 핵실험(核實驗)을 했다는 것이 비상사태(非常事態)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것들을 정치적(政治的)으로 이용(利用)하려 한다면, 결국(結局) 정치적(政治的)으로 망(亡)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까?
아까운 개성(開城)공단(工團)만 날려버렸지 않은가! 이 손해(損害)는 누가 변상(辨償)할까? 결국(結局) 민초(民草)들의 혈세(血稅)로 메꾸는 짓을 할 것이 눈에 보인다. 언제까지 대국(大國)에 사대(事大)하며 살아갈 것인지, 애간장이 타누나!
2016년 03월 0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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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근혜 정부의 사대가 너무 심해졌습니다 약점이 잡혀서 그럴 겁니다 보령 성주사는 그전에 가보았스나 역사를 모를 때 입니다 법주사는 호서 제일가람이라고 일주문에 써 있지요 신라때 부터 호서제일가람이랍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김천 직지사는 동국제일가람이라고 일주문에 쓰여 있읍니다..
70년대 주지 녹원스님이 박정희와 친하게 놀더니 동국제일가람이라네요...
@송파 법주사 일주문의 호서는 동정호의 서쪽이라는 말입니다 한반도에는 대청호가 있지만 대청호는 최근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법주사 의 호서는 고문헌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호수를 동정호로 보고 스찬성을 충청도로 생각합니다 직지사의 동국제일가람도 고문현에 그런게 있겠지요 고문헌 [동국여지승람]의 동국은 히말라야 동쪽 전체를 포함합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에 월나라 미녀 서시가 태어 난 마을이 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박정희가 후원해서 둥국제일가람이라고 하는게 아니고 고문헌에 그런 기록이 있는데 장소만 한반도로 옮겨 왔다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오늘 YTN뉴스에 조선의 문신 정곤수? 초상화가 엑스레이투사결과 청나라관복위에 조선의관복을 덧입힌것으로 나타났다는 뉴스를 접하고보니 일제나 양이들에 의한 왜곡이 광범위하게 자행되었지 안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직지사와 법주사등도 같은 운명의 것이라고 봅니다. 조선왕조 관리의 초상화가 청나라 관복을 있고 입었는데, 그 위에 조선관복을 덧입힌 것이라........참 조선사는 왜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뿐일까요? 그러면서도 대한민국의 강단사학계는 반성하는 기색도 없으니 참 답답한 마음뿐입니다. 그래도 한 구석 마음 놓이는 것은 여러 회원님들의 성원과 관심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항상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