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강원 고성 금강산 건봉사(金剛山 乾鳳寺)를 찾아서 ①
-불이문(不二門)에서 봉서루(鳳棲樓)까지-
지난 10월 18일 화진포에서 해맞이를 한 다음 잠시 차 한 잔을 마시며 휴식을 취한 다음, 곧바로 건봉사로 가자는 비니초님의 말을 따라 건봉사를 검색하니 14km 곳에 있었습니 다. 건봉사를 꼭 20년 전에 한 번 가 본 일이 있었는데 가는 길이 전혀 생각나지 않더군 요. 농촌에는 거의 추수가 끝나 있었고 보이는 산야는 울긋불긋 단풍색을 띠고 있어 아 름다웠습니다. 건봉사는 민통선 안에 있기에 두 번의 검문을 통과해 드디어 건봉사 지 경에 들어섰습니다. 눈앞은 그야말로 화엄세계가 펼쳐져 마음은 요즘말로 심쿵이었습 니다.
향로봉(香盧峰) 북쪽 금강산 남지맥(南支脈)인 건봉령(乾鳳嶺) 기슭에 자리한 건봉사는 38선으로 분단 되기 전에는 우리나라 4대사찰의 하나이며 31본산의 하나로 유명했던 절입니다. 그러나 6.25 전란으로 절이 거의 폐허가 되었고 민통선 안에 있어 일반인이 통제되었었는데 , 1992년 여름부터 출입이 가능해져 누구나 순례를 할 수 있게 되었습 니다. 생각해 보면 1995년 여름에 이곳을 처음 다녀왔으니 민통선출입제한 해제 3년 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20년 만에 찾았으니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건봉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번지[건봉사로 723]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 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新興寺)의 말사입니다.
오전 7시 35분에 도착했는데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그 후로 속속 순례객들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금강산 건봉사 안내판
1920년대 건봉사 전경
금강산 건봉사에 대한 연혁을 밝힌 글
「건봉사(乾鳳寺)는 전국 4대사찰의 하나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스님의 《건봉사 급건봉사말사사적지(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誌)》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法興王) 7년 (서기 520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였고, 그 후 도선국사(道 詵國師)가 중수한 뒤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고려 말엽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중수 하고 건봉사(乾鳳寺)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17년(서기 578년) 발징화상(發徵和尙)이 중건하고 정신(貞信), 양순 (良順) 등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열었는데, 이것이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되었으며, 현존하는 "등공탑비(騰空塔碑)"는 서기 782년 염불만일회에 참가 했던 31인이 아미타불 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 하였다고 전하고 그 부도를 모신 것이다.
서기 1465년 세조임금이 건봉사를 원당(願堂)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고, 전 답과 친필 동참문을 하사 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서기 1878년 4월 3일 큰 불로 인해 3,183칸이 전소(全燒)되었으나, 여러 차례 복원작업을 통하여 서기 1911년에 9개 말사 (末寺)를 거느린 31본산(本山)의 하나가 되었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에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의승병을 기병한 호국도량이었으며,
아들인 관동지방 교육의 도장이 되었으나, 그후 일제에 의해 강제폐교 되었다.
현재 건봉사가 있는 지역은 한국전쟁 중 휴전 직전까지 2년여에 걸처 아군 5, 8, 9사단 및 미군 제 10군단과 공산군 5개 사단이 16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건봉산 전투 전적지이며, 이때 건봉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서기 1994년부터 대운전, 팔상전, 염불만일원, 종각, 사지 등이 각각 복원 되었고, 지금도 사찰 복원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전쟁전 건봉사는 총 642간과 보림암 등 124칸의 18개 부속암이 있었다.」
불이문(不二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
불이문 앞에 세워진 안내판의 글을 옮겨 봅니다.
「1920년대에 건립된 경내 출입문으로, 사찰의 건물 중 한국전쟁 때 불타지 않은 건물 이다.
1단의 낮은 기단 위에 원통형으로 다듬은 높이 1.61m의 4개 돌기둥 위에 둥근 나무기둥 을 세워 지은 건물로, 다포 양식에 겹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돌기둥에는 길이 90cm 크기의 도안화된 금강저(金剛杵)가 음각되어 있는데 이는 천왕 문을 따로 건립하지 않고 불이문에 사찰 수호의 기능까지 보탠 것을 의미한다.
상단 중앙에 걸려 있는 불이문 현판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로, 매우 단정하 면서도 힘이 있다.」
건봉사에는 일주문과 천왕문 등이 없습니다. 보통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이 나오고 천왕문을 거쳐 불이문을 지나 누각을 밑을 통해 대웅전에 들게 됩니다. 그런데 건봉사 에서는 모든 문을 대신하는 불이문 하나로 모든 기능을 다하는 것 같습니다. ^^
불이문(不二門) 편액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선생 글씨.
불이(不二)란 모든 분별이 소멸한 마음자리를 말합니다. 모든 망상으로 인한 시시비비 가 사라진 자리입니다. 일(一)은 '진리'를 말하고 이(二)는 '거짓, 가짜'라는 말이니 불 이(不二)란 거짓이 '아니다. 가짜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망상으로 인한 분별이 끊어 진 자리이니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거짓망상을 걷어냈으니 그 자리는 해탈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불이문은 해탈문(解脫門)으로도 불립니다.
불이문(不二門) 기둥에 새겨진 금강저를 보는 모습입니다.
기둥의 금강저(金剛杵) 문양
<불이문> 안내글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불이문 기둥에 금강저를 새긴 것은 금강문이나 천왕문을 기능을 두루 겸한 뜻이 있습니다. 금강저는 고대의 인도의 무기입니다. 인도의 여러 신과 역사(力士)들이 적을 항복시킬 때 사용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 단단함 때문에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이는 곧 마음의 번뇌를 없애 주는 상징적인 뜻으로 변하여, 특히 밀교에서는 번뇌를 부수는 보리심(菩提心)의 상징으로 수행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밀적금강역사(密迹金剛力士)가 부처님의 신통력을 이어, 금강저로 악마를 악마를 쳐부수어 티끌같이 만든다."고 설한 바와 같이 금강저는 금강역 사가 들고 있는 무기 입니다. 그래서 이 돌기둥에 금강저를 새겨 놓은 것은 금강역사가 삿된 무리들이 청정한 불법세계에 범접하지 못하게 한다는 결연한 뜻을 상징적으로 표 현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문에 들어서는 불자들은 번뇌를 부수고 보리심을 발 하라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불이문 왼쪽 옆의 보호수인 팽나무
나무 앞에 설명문이 있어 옮겨 봅니다.
고성군 보호수
▶ 지정번호 : 강원 - 고성 - 10. ▶ 지정일시 : 2008년 12월 12일. ▶ 나무위치 :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잡35. ▶ 수종과 수령 : 수종은 팽나무. 수령은 약 500년. ▶ 수고와 나무둘레 : 수고 15m. 나무둘레 400cm.
▶ 나무유래
「이 팽나무는 강원도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된 건봉사지 내에서 약 500년 동안 자라온 나무로 한국전쟁 중 766칸의 건봉사 사찰이 소실되었으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불이문 (1920년에 건립,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 35)을 지켜 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성군에서는 건봉사를 지켜 주는 상징목으로 2008년12월 12일 보후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불이문 오른쪽 옆의 비석들
금강갑계발상지(金剛甲稧發祥地)
갑계(甲稧)란 한 절 안에 있는 스님끼리 친목을 도모하고 절을 보조하는 구실도 겸하기 위해 조직한 공동단체를 말합니다. 계원의 공동 노력으로 자본금을 늘여나가 그 금액이 늘어나면 절에 필요한 자금으로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경우에 따라 신사(信士)의 갑계도 있었다고 합니다.
금강갑계취지문을 담은 비석
「무릇 고금을 통하여 살펴보건데 인생의 오고감이 수레바퀴 도는 것처럼 시작과 끝이 없음은 인연때문이요, 그리고 마음속 깊이 아로새겨 잊지 못하는 것은 계라고 할 수 있 다.
늙으막에 혹은 멀리서 혹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모임체가 없어 안타까운 마음 금치 못하 던 차에 찾아 만나는 이런 마음은 오래토록 변치 않을 것인 즉, 그러함에 뜻 있는 동갑네 들이 한데 모여 계를 만들고 세칙을 정했으니 바라옵건대 여러분들이시여 한 번 생각하 여 봄이 어떠한가!
도원의 의리 중하니 바라보는 모든 이 두려워하고 관포의 정감 두터우니 보는 이 부러워 할 것인 즉 정분이 두터우면 주위가 다형제이고 우애가 일그러지면 동기간도 남과 다를 바 없으니 정과 의 두 글자는 그뜻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바라건대 우리 동갑네들은 명심하여 시작과 끝맺음을 잘 이어 간다면 우리의 후손들이 이 크고 아름다운 자취를 새겨 보고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구름같이 피어올라 서로 친목하기를 오늘 우리들과 같이 할 것이니 이와 같은 인연으로 계를 맺은 것이 어찌 아 름답지 않겠는가?
알고 지내는 벗들 중에 유고 시는 인륜지도와 의리의 마음으로 찾아가 안부를 묻게 되 든 차 금번 정겨운 우리들은 각자 흩어져 있지만 나이 같은 동갑이어서 서로 모여서 뜻 을 함께하는 계를 모았다.
계원의 자격으로는 모두가 응낙하고 모인 까닭에 친하건 친하지 않건, 소홀하건 소홀하 지 않건, 귀하건 귀하지 않건, 인격자이건 그렇지 않건 가리지 않고 네 색깔이 한데 어 울리어 평등의 위치에서 계원이 되었으니 이제 한뜻이 된 것이다.
우리 계원들은 계칙을 잘 지켜 서로 친목하고 뜻을 모아 맡은 바 의무와 권리를 다할 것 같으면 나라와 민족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되어 타의 모범이 될 것이며 이 뜻이 대대 손손 전해지고 계속 발전시켜 한 번 가면 한 번 이어지고, 두 번 가면 두 번 이어지면서 계속 이어져 간다면 어떤 문제도 해결될 것이고 다음 대에 이르러서는 사촌형제의 의리 로 영세 불멸될 것이다.
법과 같은 계칙은 절개에 있어 장작을 쪼개는 것 같이 곧고, 등불을 밝히는 것과 같이 분명하게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융합될 것이니 초목이 산에서 함께 자라 모든 이에게 덕을 베푸는것 처럼 우리 동갑네도 정분은 없지 않으니 인륜도 덕과 천리에 어김이 없게 무궁한 발전을 도모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서기 1934년 봄 강태훈 이금암」
이 글을 쓴 이금암(李錦岩1879~1943) 스님은 구한말 의병으로 활약하다 건봉사에 숨 어들어 수행승이 되었는데, 그후 이웃사랑과 구국개화 운동을 펼치기 위해 봉명학교와 청년회, 소년회를 만들고, 마을마다 이웃끼리 친목을 다지는 금강갑계를 조직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건봉사 제5회 만일염불회를 개설하여 만불염불회를 계승했다고 합니다. 건봉사는 이러한 정신과 전통을 계승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
이 비는 조금 후에 만나는 능파교를 처음 세웟음을 기념하는 비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능파교에 이어집니다.
건봉사 전각 안내도
① 불이문 ② 범종각 ③ 극락전 발굴지역 ④ 왕소나무 ⑤ 템플스테이대방 ⑥ 산신각 ⑦ 적멸보궁 / 독성각 ⑧ 봉서루 ⑨ 대웅전 ⑩ 명부전 ⑪ 염불원/ 종무소 ⑫ 육화당(요사채) ⑬ 공양간 ⑭ 화장실 ⑮ 연화교
이제 불이문 주변을 살펴보았으니 불이문 안으로 들어갑니다.
불이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갑니다. 독사가 많은가 봅니다. ^^
왼쪽의 전각은 범종각입니다. 범종각은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
솟대 같은 아미타불 석주
범종각 옆 바위 위에 나무아미타불이란 석주가 보란 듯이 보입니다. 여기가 만일염불 회의 본산이라는 위명을 알리는 듯합니다. ^^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네요.
능파교(凌波橋)와 봉서루(鳳棲樓)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 같습니다.
앞에 보이는 누각은 봉서루(鳳棲樓)입니다.
눈 앞의 다리는 능파교이고 이 다리를 건너면 봉서루지요. 봉서루 앞에는 눈여겨 볼 것이 많더군요.
능파교 옆의 산수유를 비롯한 나무의 풍광이 아름답습니다.
능파교(凌波橋) -보물 제1336호-
고성 건봉사 능파교 안내문
고성 건봉사 능파교(高城 乾鳳寺 凌波橋) -보물 제1336호-
소재지 :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
「건봉사 능파교는 대웅전지역과 극락전지역을 연결하는 홍교(虹橋 :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규모도 비교적 크고 잘 보존되어 있다.
능파교를 처음 축조한 시기는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로 이것은 숙 종 34년(1708)에 건립된 경내 불이문 옆에 있는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倉記碑)의 비 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능파교는 영조 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석계(石階 : 돌계단)와 산영루(山 映樓) 수축(修築)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의 높이가 5.4m이다. 다리의 중앙부분에 큰 아치(arch)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축조하여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조금 더 높다.
능파교는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 주는 비석이 함께 있어 홍예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우리나라 석교(石橋 : 돌다리)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보여 주는 중요한 다리이다.
2003년 능파교 홍예틀과 접하는 호안석 중 변형된 부분을 해체하여 원형을 찾아 보수 하던 중 능파교가 훼손되어 문화재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2005년 10월에 복원되었다.」
능파교 위의 비니초님
봉서루(鳳棲樓). 금강산건봉사(金剛山乾鳳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금강산건봉사(金剛山乾鳳寺) 편액 -초당(艸堂) 이무호(李武鎬) 선생 글씨-
봉서루 앞 계단 위에는 좌우로 이상한 문양을 새긴 돌기둥이 서 있는데 이를 '십바라밀 석주' 라 부릅니다.
봉서루 앞 계단 위에 서 있는 십바라밀석주(十波羅蜜石柱)
십바라밀석주 설명 안내판
「능파교(凌波橋)를 건너면 대석단(大錫壇)이 보이고, 대석단의 중앙통로 좌우로 높이 158cm의 사각형 석주 2기가 서 있다.
이 석주에는 십바라밀(十波羅蜜)의 도형이 음각되어 있어, 십바라밀석주(十波羅蜜石柱) 라고 부른다. 이는 다른 절 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비록 조성연대는 1920년이라 하 지만, 시각적인 교육효과를 지닌 중요한 문화재이다.
십바라밀은 대승불교의 기본 수행법인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 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의 6바라밀에다 이 여섯 가지를 보조하는 방편(方便)ㆍ원(願) ㆍ력(力)ㆍ지(智)의 4바라밀을 첨가하여 구성한 것이다.
십바라밀도는 이들 열 가지 수행의 방법을 상징화하여 나타낸 것으로, 그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가 새겨져 있다.」
십바라밀석주의 문양의 뜻
원월(圓月) 이는 보시바라밀을 나타낸다
곧 재물과 진리와 두려움을 없애 주는 3종의 보시를 배풀되, 그들을 만족시킴에 마치 청정한 허공에 보름달의 광명이 두루 비친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하여 둥근달을 묘사한 것이다.
신날(鞋經) 이는 인욕 바라밀을 나타낸다
해탈의 바라밀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모든 욕됨을 참고 나아가야만 가능하다. 마치 신날이 돌뿌리 등 바깥의 모든 장애물로부터 발을 완전하게 보호하여 앞으로 나아감을 도우 듯이 인욕의 자세로 나아가면 어떠한 어려움이 부딪쳐 와도 해탈의 저 언덕으로 나아가는 발을 보호하여 쉽게 도달할 수 있음을 묘사한 것이다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삼매(三昧)를 이루게 되면 마음속의 모든 열기와 번뇌가 소멸되어 청량을 얻게 된다. 이 선열락(禪悅樂)이 마치 열기로 가득찬 대지를 구름이 덮어서 시원함을 안겨 주는 것과 같다고 하여 선정을 구름 모양으로 묘사한 것이다 좌우 쌍정(左右雙井) 이는 방편바라밀을 나타낸다 갖가지 방편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 물이다. 따라서 하나의 원천에서 좌우로 두 우물을 나누어 모든 중생들의 목마름을 해갈해 주듯이 보살은 갖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피안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고리두테(卓環二周) 이는 역바라밀을 나타낸다 수행을 할 때 힘을 투입하면 집중력이 생겨서 옳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집 주위에 담장을 쌓고 주야로 잘 돌보면 재산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하여 고리 테두리의 형을 취한 것이다.
십바라밀석주의 문양의 뜻
반월(半月) 이는 지계바라밀을 나타낸다 계율을 지켜 그릇됨과 악한 것을 방지하고 선행을 쌓아감이 마치 초생반월(初生半月) 어둠을 감하고 밝음을 더욱 자라게 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하여 반달 모양을 묘사한 것이다.
가위(剪刀) 이는 정진바라밀을 나타낸다
반야(般若)의 지혜에 의거하여 수행하되 결코 물러나지 않음을 가위로써 물건을 자름과 같이 나아감만 있을 뿐 물러남이 없음(有進無退)을 보여 주고 있다.
금강저(金剛杵) 이는 지혜바라밀을 나타낸다
지혜는 능히 두터운 번뇌의 산을 파괴하여 불성(佛性)이라는 보배광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 지혜로써 피안에 도달하는 것은 마치 견고함(堅), 예리함(利)과 밝음(明)의 세 가지 특성을 갖춘 금강저가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 같다고 하여 이러한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전후쌍정(前後雙井) 이는 원바라밀을 나타낸다 위 아래로 하나씩의 우물을 둔 것은 귀하고 천함,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신분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불교에 귀의하여 해탈하겠다는 원(願)을 세우면 반드시 피안에 이룰 수 있게 된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 아래 위로 우물을 배열한 것이다.
성중원월(星中圓月) 이는 지바라밀을 나타낸다 불교의 정지(正智)를 바깥의 큰 원으로 표현하였다. 곧 정지를 갖추어서 반야의 지혜를 올바로 성취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감로수에 목을 축이고
돌거북
봉서루 앞의 감로수가 졸졸졸 능파교 옆으로 떨어지네요.
봉서루 누각 밑에서 대웅전을 봅니다.
대웅전 쪽에서 바라본 봉서루(鳳棲樓)
누하진입(樓下進入)으로 대웅전으로 나아갈 차례입니다. 대웅전에 대해서는 다음에 소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
첫댓글 건봉사 봉서루 앞 계단 위에 서 있는 십바라밀석주가 특이해 보입니다.
즐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런 문양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기회에 십바라밀문양을 잘 알아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다시 보니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_()_
건봉사를 다녀오셨군요. 눈에 익으셨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_()_
강원도 인제에 살 때 여러 번 갔었습니다. 남편 전역 후에도 한 번 갔었지요.
건봉사 순례기 1편 잘 봤습니다. _()_
최북단의 금강산 초입에 있는 건봉사... 6.25 참화에서 옛 영화를 되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_()_
여러 가지로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건봉사를 20년 전에 갔었는데 사리친견한 외에는 생각나지 않네요. 기억이 흐려서 그런 것이겠죠 _()_
많이 변해서 그런가요
불이문도 봉서루도 생각이 안나요. 그러니 십바라밀석주도... 잘 보았습니다.
생각나지 않기로는 이 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년 세월에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으니... _()_
그대는 왜 십바라밀 석주가 안 보였을까요
20년 전에 건봉사에서 예불과 정진하는 모습, 건봉사 풍광을 담은 동영상이 있는데 그 테이프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볼 길이 현재론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