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임창순 선생은 1963년 한문 강습을 시작했다. 5·16 쿠데타 이듬해 대학서 쫓겨나자, 강만길·성대경 교수 등의 채근으로 태동고전연구소를 설립하고 강습소를 열었다. 독지가가 내주는 공간을 전전하다 1976년 전문가 과정의 기숙학당(지곡서당)으로 전환했다 선생은 슬프다. 서당에선 작년 말부터 글 읽는 소리가 끊겼다. 선생이 연구소와 서당을 넘긴 대학이 지원을 포기하고 신입생도 뽑지 않았다. 올해 졸업생을 끝으로 지곡서당은 적막강산이다. 세상의 안목이 어찌 이리도 짧은가 청명 임창순 선생은 출타했다가 돌아오는 길이면, 달래강(수동천) 다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물소리, 나뭇잎 바스락대는 소리, 이맘때면 소쩍새 울음 따위가 들렸다. 가장 또렷한 건 개울 건너 지곡서당에서 들리는 글 읽는 소리였다. 선생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 아무리 어려운 고전도 백번만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나는 법. 그 의미는 울림 속에서 몸과 정신 속에 스며든다. 선생은 3년간 가르치고 먹이고 재우고, 장학금까지 주면서 다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사서삼경을 비롯한 고전의 암송이 유일한 과제였다. 서당에서 강(講)은 송(頌)이었다.연수생들의 소망은 개인방을 갖는 것이었다. 2인1실만 써도 원이 없었다. 앞선 시간에 배운 것은 반드시 다음 시간에 암송해야 했다. 1학년의 경우 사서(대학·논어·맹자·중용)를 암송하지 못하면 출교당했다. 여럿이 한방을 쓰다 보니 소리내어 글 읽는 게 쉽지 않았지만 연수생들은 필사적으로 외웠다. 심지어 신혼여행도 중얼거리며 다녔다.옛 서책이나 문서엔 경전 문구가 변형돼 출처도 없이 인용되어 있다. 경전을 외우지 않고는 그 문구를 찾아내 문장을 정확하게 해독할 수 없다. 박물관이나 도서관 지하 수장고엔 지금도 해독을 기다리는 서책과 고문서가 수도 없이 쌓여 있다. 천수백년 축적된 지식과 사유가 담긴 것들이니, 선생에게 이 작업은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 작업을 할 인재들에게 어찌 학비와 밥값을 요구할까.언젠가 중국 인민대학교 총장 일행이 지곡서당을 방문했다. 20분 정도 계획이었지만, 일행은 두시간 가까이 연수생들의 학습 장면을 지켜봤다. 총장은 경탄했다. “한국에서 이런 모습을 다시 보게 되다니! 어릴 때 우리도 저렇게 익혔지….” 그들이 귀국하고 얼마 되지 않아 중국 신문에 지곡서당 강의 장면이 소개됐고, 인민대학교에 100명 정원의 5년제 국학원이 세워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선생이 혼자 떠맡았던 지곡서당은 3년제 정원 30명이었다.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지둔리에 선생의 살림집 지곡정사가 들어선 것은 1972년이었다. ㄱ자의 정사에 청류헌을 잇대어 전문가 연수과정을 시작한 것은 1976년이었다. 이듬해 관어정을 지었고, 숙사 용도의 ‘지곡서당’을 들였다. 연못과 그 주변에 열경루와 문장각도 두었다. 경전과 씨름하느라 지친 심신을 쉬도록 한 게 열경루였지만, 연수생에게는 ‘열나게 경전을 외우는 곳’이었다.장차 국학을 정초할 인재의 요람이었으니 선생이 함부로 터를 잡았을 리 없다. 배산임수는 기본이었고 주변의 인심과 바람길까지 따졌다. 개울 건너 축령-서리산 능선이 갈기 흩날리는 말처럼 내달리는 것을 보며 연수생의 기상을 생각했다. 동출서류(東出西流)의 수동천은 지곡서당에 이르러 활시위처럼 휘어졌다. 물이 많다는 수동의 물흐름은 그치는 법이 없었다. 큰비가 와도 넘치지 않았으니 관용의 덕 또한 컸다. 서당 뒤로는 한북정맥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산기슭에서 천변까지 펼쳐진 넓은 논밭은 순후한 인심을 키웠다. 천변 작은 벼랑엔 오래된 적송이 숲을 이루고, 수령 500년이라는 뽕나무가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고전을 궁구하기에 더 좋을 수 없는 곳이었다.선생은 1963년부터 한문 강습을 시작했다. 5·16 쿠데타가 난 이듬해 대학(성균관대 사학과)에서 쫓겨나자, 선생의 학문을 흠모하던 강만길·성대경 교수 등의 채근으로 태동고전연구소를 설립하고 강습소를 열었다. 교실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었다. 수표동, 당주동 등 독지가가 내주는 공간을 따라 전전했다.이 시기 강습소를 거쳐 간 이들은 훗날 국학의 기초를 놓았다. 강만길(국사), 성대경(한문학) 교수 이외에 김정배 전 고려대 총장(국사), 조동일 서울대 교수(국문학), 정옥자 서울대 교수(조선사상사), 변영섭 고려대 교수(고고미술사학), 은정희 서울교대 교수(불교철학) 등….1976년 전문가 과정의 기숙학당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지원 덕분이었다. 지금의 교육방식과 전통이 정착된 것도 그때였다. 그러나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 지원은 끊겼다. 4·19 때 교수단 시위를 주동했고,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활동으로 구금을 당했고,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까지 됐던 선생이었으니, 지원이 부담스러웠던 걸까.지원이 끊긴 뒤에도 전통은 바뀌지 않았다. “동기회장인 저에게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줄 장학금을 주셨는데, 돈다발엔 갖가지 돈이 있었죠. 가계수표, 만원짜리, 심지어 천원짜리도 있었어요. 여기저기서 돈을 마련해다 주신 것이었죠.”(김만일 태동고전연구소 소장)1984년 경비 마련을 위해 대구에서 연 서예전을 인연으로 한림대학 재단과 연결됐다. 선생은 태동고전연구소와 지곡서당은 물론 터와 건축물을 돈 한푼 받지 않고 한림대에 넘겼다. 조건은 하나였다. 기존의 운영방식대로 운영하며, 글 읽는 소리가 끊겨서는 안 된다! 그 후 태동고전연구소와 지곡서당은 ‘한림대 부설’이 되었다.청류헌과 서당채 사이 잔디밭에는 김구한 도예가가 제작한 선생의 추모비가 있다. 앞면엔 선생이 지은 지곡정사 상량문이 여초 김응현 선생의 글씨로 상감돼 있다. “나는 앞으로 이 건물이 남북의 학도가 한자리에 모여 조국의 장래를 의논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상량문은 이렇게 맺는다. “다만 바라는 바는 이 집에서 영원하도록 글 읽는 소리 그침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발원문 위엔 박재동 화백이 그린 선생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담배를 든 채 쪼그리고 앉아 있다. 선생은 너른 기단석에 음각돼 있는 바둑판을 지켜보고 있다. 생전 선생이 즐기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유초하 교수(2기)가 지은 비 뒷면의 행장은 이렇게 쓰고 있다. “역사학자로서 금석학 서지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고, 서예를 학문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선생은 세속에서 해탈한 선비의 풍모로 유가적 참여와 도가적 달관을 아울러 구현했다.” 선생은 1914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13살 때부터 보은 관선정에서 홍치유 선생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945년 독학으로 중등교원 자격증을, 1946년 교수 자격증을 취득해 대구사범 전임강사로 강단에 섰다.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나를 기억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 글 조각 모아 문집도 내지 말라.” 그러나 제자들은 선생을 잊을 수 없었다. 돌아가시고 2년 뒤 이 추모비를 세웠다.제자들은 국학 개척의 간성이 되었다. 230여명 가운데 100여명이 대학에서 역사, 문학, 미술사, 사상사, 경제사 등 각 분야에서 후학들을 가르친다. 30여명은 연구소나 박물관에서 근무하며, 70여명은 석·박사 과정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지난해 12월 태동고전연구소의 한학 연수생(장학생) 모집 공고가 나왔다. 입학생 전원 무상교육, 학비 면제, 소정의 장학금 지급 등은 같았다. 달라진 게 있었다. 가장 중요한 강습소였다. 지곡서당이 아니라 서울 종로구 낙원동 종로오피스텔이었다.선생은 슬프다. 생전 그렇게 간절히 꿈꾸던 소망과 달리 지곡서당에선 작년 말부터 글 읽는 소리가 끊겼다. 제자들 밥 넘어가는 소리도, 웃음소리도 사라졌다. 선생의 3락이었다. 한림대학이 지원을 포기하고 신입생도 뽑지 않았다. 올해 졸업생을 끝으로 지곡서당은 적막강산이다.그나마 오피스텔 연수라도 하게 된 것은 선생의 뜻을 이어가야 한다는 졸업생들의 뜻 때문이다. 그러나 오피스텔의 강과 송이 지곡서당과 같을 수 없다. 집과 강의실을 오가야 하는 연수생들이 그 전통을 이어가기도 힘들다. 십시일반으로 모은 기금도 1년치 비용 정도다. 얼었던 수동천이 몸을 풀었다. 눈 녹은 물이 모여 수량도 제법이다. 돌틈, 여울, 얼음 밑을 흐르는 물소리는 제각각이다. 청류헌, 관어정, 열경루 어디에서나 맑은 소리가 청명하다. 다만 글 읽는 소리만 없다. 세상의 안목이 어찌 이리도 짧은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곽병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