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봄을 사색하다
엇그제 혼자 부모님 계시는 공원묘지를 다녀왔다. 집근처 정류소에서 버스를 탔고, 지하철에서 내려 다시 마지막 버스로 옮겨탔다. 나는 마음이 울적할때면 아직도 부모님 산소를 찾곤한다.
버스가 목적지에 가까워지니 멀발치 예전 내가 올랐던 정상의 산자락, 그곳의 햇살에 빛나는 하얀 눈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마만에 보는 눈의 모습이든가? 따뜻한 남쪽나라는 눈을 기대하기 어렵다. 몇년전 가지산 등반때 보았던 하얀 설원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지난주만 하여도 절기는 봄으로 접어 들었건만, 중국의 4대미인 왕소군을 떠올리게 하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날씨는 바로 그것이었다.
지구온난화의 조화?, 북녘에 눈이 왔다더니 눈보라의 영향이 예까지 도달되었었나 보다. 서둘러 꽃피려 준비하던 유적지 담장아래 매화는 어찌 되었을거나.
그래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고 하였으니, 지난해 거두어둔 작은 꽃씨라도 챙겨두고 때를 기다려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마지막 버스에서 내려 아까 보았던 산을 올려다 보았다. 멀리서 보던 풍경과는 달리 차갑지 않고, 산은 나를 깜싸주는듯 온화한 느낌이다. 이무렴 40년 가까이 산을 쫒아 다녔으니 짝사랑일망정 미워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 발자욱 남겨지지 않은 능선, 언젠가는 도시락 싸서 짊어지고, 아무런 생각없이 홀로 걸어보고 싶었다.
부모님께 또 다른 재회를 약속하고 돌아서 내려 오는길, 마음은 무리에서 뛰어나와 갸날픈 임팔라를 뒤쫒다 끝내는 놓쳐버린 늙은 숫사자처럼 공허함에 휩쌓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걸음은 보폭이 무디어졌다.
시골버스는 시간이란 약속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류소 전광판을 보니 기다리던 버스가 금새 사라져 버렸다. 이런 경우 참 당황스럽다. 시간당 한대도 못채우는 배차시간이 두배로 늘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다른때 같으면 운동삼아 서너시간을 걸어 탈것 하나를 줄였을 것이나 오늘은 왠지 발걸음이 내키지 않았다.
인적없는 버스정류소 의자에 앉아 준비해간 도시락을 펼쳤다. 굳이 반찬을 싸지말기를 바랐으니 당연히 김치가 저홀로 터줏대감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지! 나는 언젠가부터 스님들이 탁발해온 음식을 먹는 모습을 떠올리며 실천하려 노력하며 산다.
마냥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많다. 꽃피고 새우는 계절이면 자연의 향기에 취해 뚝방에라도 앉아 봄의 여흥이라도 즐기련만, 개짖는 소리도 그친 산골엔 철모르고 소리내어 흘러 내리는 계곡물의 음향만이 외로울 뿐이다.
하늘엔 갖난애 덜자란 새끼손톱 만큼이나 작은 그믐달이 저녁노을을 삼켜버린 검은 구름사이로 빼꼼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젠 바람도 잦아들어 나뭇잎 떨림의 가벼움이 기름기 마른 나의 콧등을 스쳐간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공연(空然)한듯 얼굴을 펴고, 현관이란 검색대를 거친 후, 방으로 올라와 한참동안 서성이다 무기력한 마음으로 자리에 벌렁 누웠다.
봄을 타는 것일까? 그러기엔 아직은 햇살의 강도가 멀었다. 그나마 아직은 남은 삶이 존재한다. 존재는 상상에 우선한다.
조금은 혼란스런 생각이 마술램프에 빨려드는 알라딘의 형체처럼 갇혀들때, 문득 방구석에 쌓아둔 긴 제목의 책들이 서둘러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바람이 불면 나는 울고 싶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生而不有(없는 듯이 살아라)
有若無(유약무) 실약허(實若虛) 犯而不校(범이불교)"
(있어도 없는 듯하고, 가득차도 텅빈 듯하며, 건드려도 전혀 맞서지 않는다.)
논어 태백편에 나오는 말이다.
옳다! 이것이 답이려니...
나더러 마음에 담으라고 하는 선각자의 말씀이었구나!
부질없는 내 삶의 조각들...
내가 종교를 초월하여 믿는 건 우주의 창조와 빅뱅이다.
그렇듯 우주는 없는 듯, 가장 크게 존재한다.
어느새 마음은 우주에 다가선다.
노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꼴찌가 되어라.
없는 듯이 살아라.
무명인으로 살아라.
경쟁하지도 말고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려고도 하지 말아라!
그럴 필요가 없다.
쓸모없는 사람으로 살며 이를 즐겨라.
진정한 삶은 즐기고 찬미하는 것이지 실용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삶은 시장의 상품 같은 것 이라기보다는 시와 같은 것이다.
삶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춤이 되어야 한다.
바람에 향기를 날리는 길가의 꽃이 되어야 한다.
아무런 대상 없이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즐기는 꽃이 되어야 한다."
노자의 길은 꼴찌의 길이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길이다.
그 길은 잊혀진 존재로, 무명인으로 사는 길이다.
그렇게 살 때 하늘이 축복하고, 드디어 영원의 기운으로 살아가게 된다. 내가 바라는 삶이다.
이제 밤이 무르익는다. 낮은 많은 것을 들추어 내지만, 밤은 소리없이 그것들을 덮는다.
달이 서산 능선을 넘는다. 달은 오늘 졌다가 내일 또 뜨련만, 우리네 인생은 얼마나 남았을까? 내일은 햇살 일찍드는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봄내음이라도 제대로 맡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