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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조선】 "<산상수훈 연구> 읽기를 위한 노트(5) - 조선인의 산상수훈"
김교신의 <산상수훈 연구>는 ‘순진한 조선 사람’의, ‘순진한 조선 사람’을 위한 산상수훈 읽기였다. 단행본으로 간행하면서 쓴 <산상수훈 연구> 서문에서 김교신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거기에는 조직도 없고 가설도 없다. 다만 직절 간명한 진리의 빛과 생명의 맥이 샘물같이 콸콸 흘러 마지않는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읽음에 특수한 소질이나 비범한 체험이 필요 없다. 다만 천연天然한 인간이면 가可하고, 만일 나다나엘 같은 순진한 조선 사람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면 더욱 가하다. 마음이 정결한 자만이 진리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기독교도의 그릇된 우월감과 특수한 신비적 체험을 물리치고, 통상 인간의 입장에 서서 이 참사람의 말씀을 미해味解하려고 힘쓴 것뿐이다.
<산상수훈 연구>, 성서조선사, 1933, 序.
이런 관점은 <산상수훈 연구>의 마지막 대목에서도 다시 강조된다.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들은 마치 지혜 있는 사람이 집을 반석 위에 지은 것 같다'는 말씀을 주해하면서 김교신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감사할 것은 무릇 중대한 진리, 인간의 누구나 없이 알아야 할 진리는 사색과 변론과 추리로써 파지把持하게 안 되었고, 오직 비근하고 평범한 '교훈을 생활'하는 자들이 소유하게 되어 있는 사실이다. 가정에서 참다운 효도의 생활을 하는 자에게는 '보다 더' 위대한 충신의 도가 자연히 구비되어지는 것처럼 유불교 재래의 교훈에서 그 형해에 죽지 않고 그 정신에 산 자, 조선인 중에 조선인 된 자가 기독교에 접할 때는 "이 사람이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니,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한 1:47)하여 그리스도의 영접함을 받을 것이다.
<성서조선>
통상 인간의 입장에 서서, 순진한 조선 사람의 심장으로 산상수훈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유교 도덕률에 비추어 산상수훈을 읽고자 한 것이다. 조선에서 유교가 오랜 세월 동안 통치 원리이자 도덕 습속으로 자리 잡아 왔기에 통상적인 조선인이라면 유교 도덕률을 바탕에 두고 산상수훈을 읽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김교신은 유가 가문에서 태어나 근대 교육을 받기 전에 한문을 읽었으며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까지 유교 도덕률을 따라 인격 완성에 도달하겠다는 진지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을 만큼 유교 도덕률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또 산상수훈 읽기가 유교 도덕률과 무관할 수 없었다는 것은 언어의 사회성에 따른 조건이기도 했다. 조선어로 번역된 성서의 한자 개념어들은 거의 모두가 유교에 바탕을 둔 것들이었기 때문에 단어 자체가 환기하는 의미 역시 유교 도덕률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인이라는 정체성 위에서 산상수훈을 읽고자 한 것이다. 철들 무렵부터 식민지인으로 살았던 김교신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3.1운동에 가담하였고, 이후 불공대천의 철심을 품고 유학의 길에 나섰으며, 근대 지식을 통해 보편 세계와 마주했으나 아무리 해도 조선인일 뿐이라는 자기 확인으로 괴로워했다. 그의 산상수훈 읽기가 배제되고 억압된 자의 성서 읽기였다는 점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김교신의 유교 도덕률에 비춘 산상수훈 이해에 대해 논의해 보자. <산상수훈 연구>에서 드러나는 김교신의 ‘의’에 대한 이해가 유교적 ‘의’에 닿아있었고 이러한 그의 ‘의’에 대한 이해는 산상수훈 해석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산상수훈의 주제라 할 수 있는 '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의 번역어로 이 단어에는 그리스 전통의 인간 이해가 녹아들어 있지만 이를 읽는 조선인들은 이 번역어에서 유교적 관념을 떠올렸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마태복음의 '디카이오쉬네'의 의미를 헬라 전통과 유대교적 윤리에 기대어 설명한 문장을 옮겨와 보자. 디카이오쉬네를 완전성, 전체성을 의미하는 단어인 텔레이오스와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마태복음의 '의'는 하나님의 본성, 뜻, 그리고 오는 나라에 일치하는 전체성-인간의 행위이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의로운'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에 있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은 전체성/텔레이오스 인간이다(5:48). 그는 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마음으로부터 행하는 자이다. 이는 유대인 성경의 윤리와 철저히 연속되며 예수님을 적대했던 바리새인들과 철저히 충돌된다.
조나단 페닝턴, <산상수훈 그리고 인간 번영 그 신학적 주석서>, 에스라, 2020, 133쪽.
그렇다면 유교에서 말하는 ‘의’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의리지별義利之別', 즉 옳음을 추구하는 것과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구별하는 데 있었다. 유교 도덕에서 군자를 이상적 인간상으로 여겼는데 군자는 이익을 따르는 대신 의로움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전통 유교 행위이론의 핵심은 행위의 결과보다 동기에 있다. 그 동기가 도덕적이라면 행위는 칭송을 받게 된다. 도덕성의 기준은 사적 욕망의 억제와 공적 대의에의 헌신에 있다. 이를 실천하는 모범적 인물을 일러 군자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인물을 소인이라고 일컬었다. 이를 그 행위 동기 측면에서 말하면 '의리지별義利之別'(의리와 이익 추구의 구별)이라 일렀다. 전통 시대의 선비들은 자신이 군자로 불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혹시라도 소인으로 불릴지 모르는 데에 불안했다.
이황직, <군자들의 행진>, 아카넷, 2017, 61쪽
유교 도덕 습속에 따라 인격이 형성된 김교신이 유교 도덕률에 비추어 산상수훈을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여기에도 유교 도덕을 바라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시각이 공존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유교 도덕률과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기독교를 이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차이를 부각시켜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 점은 <산상수훈 연구>를 연재하기 전에 발표한 두 글인 <예수와 성인>(<성서조선> 14호, 1930. 2), <제자된 자의 만족>(<성서조선> 15호, 1930. 3)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유사성에 근거한 이해의 예를 보자. 김교신은 <제자된 자의 만족>에서 <성서조선>이 성공하려면 이러저러하게 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이들에게 맞서 산상수훈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누가 염려함으로써 목숨 일각一刻’을 더할 수 없는 것처럼 ‘누가 능히 염려함으로써 성공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김교신은 제자의 길을 말하면서, ‘동양에 주의 도를 예비하려 그 첩경을 곧게 하려’고 왔던 현자의 교훈, 즉 맹자 양혜왕 편의 한 구절을 가지고 온다. 맹자가 양혜왕을 찾아갔을 때 양혜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선생께서 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오셨으니 장치 이 나라에 무슨 이익을 가져다주시겠습니까?’ 맹자는 답한다. ‘왕께서 어찌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인의仁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군자의 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성공을 추구하는 것은 제자의 길이 아니었다. 성공 대신 제자의 길을 가고자 한 것은 이익 대신 인의를 따르려는 것과 같은 것이었고, 이 점에서 김교신은 유교적 이상형인 군자의 길에 가까이 가 있었다. (이 블로그 <성서조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참고)
김교신은 <산상수훈 연구>에서 기독 신자의 사명을 군자에 비추어 설명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세운 성이 숨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주해하면서 김교신은 <논어> '자장편'의 구절을 인용한다. '군자의 허물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 잘못이 있을 때는 모든 사람이 알게 되나 허물을 바로잡으면 모두 우러러본다.'는 것. 군자는 잘못을 은폐하는 이가 아니다. 군자의 잘못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서 모든 이들에게 드러나게 되므로 은폐할 수도 없다. 군자는 오히려 잘못을 바로잡음으로써 다른 이들의 본이 된다. <논어>의 가르침처럼 기독 신자 역시 산 위의 성과 같아서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 있다. 김교신은 <맹자> 양혜왕편의 교훈을 산상수훈 중에서도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구절을 주해하는 대목에서 다시 인용한다. 돈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자 해결책이 되어 있는 현대인에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인가를 말하면서 '인의仁義의 도'를 다시 떠올리고 있다.
그렇다면 군자의 길은 곧 제자의 길이었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제자의 길은 군자의 길이되 그 이상이었다. 이익 대신 인의를 말할 때 군자의 길은 제자의 길이었지만, 더 중요한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교훈은 유교 도덕률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유교와의 차이에 주목하여 산상수훈을 이해한 예를 살펴보자. 김교신은 <예수와 성인>에서 유교의 ‘중용의 도’와 대비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극단의 도’라고 규정한다.
과불여미급過不如未及(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으로 중용의 도만이 대성의 극치라고 사유하여 오던 우리 조선인이 기독으로써 사성四聖의 일인一人 운운하게 된 것은 기독의 인물과 그 교훈의 진상을 오해한 소치인 것이 분명하다. (중략)
오배吾輩는 확신으로써 말한다. 예수의 교훈을 자아의 주판으로써 적의適宜히 할인하여 믿으려 함은 차라리 불신함만 불여不如하다는 것. 군자는 위험한 데 불근不近할 것이며 자자수업仔仔修業하여 입신양명어후세立身揚名於後世가 소원일진대 하특何特 무엇을 즐거워 예수의 비상소집에 응할 것인가.
<성서조선> 14호, 1930. 2. 3-4쪽.
중용의 도와 대비하여 그리스도의 교훈을 ‘극단의 도’라 규정한 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이 종말론적인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김교신의 산상수훈 이해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이미 살폈으니 줄이기로 하고(이 블로그 <산상수훈 연구의 윤리학 – 중용의 도와 극단의 도> 참고), 이 글에서는 김교신의 산상수훈 이해가 유교 도덕률을 경유한 것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정리해 놓고 다른 쪽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 보자.
<산상수훈 연구>에 드러나는 김교신의 ‘의’ 관념이 유교 도덕률을 경유한 것은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 자신의 교훈을 대비하면서 청중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한 것과도 통한다. 김교신의 이해에 따르면 율법은 모세의 율법뿐 아니라 마호메트나 석가, 공자의 가르침을 다 포함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한 것은 이들 도덕률의 본질을 충족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율법에서 시작해서 더 나은 의를 말씀하신 것처럼 김교신은 산상수훈 팔복의 네 번째 복,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을 말하면서 제갈공명의 의, 정몽주의 의에서 논의를 시작해서 그 이상의 의로 나아간다. 제갈공명과 정몽주는 유교적 '충의'를 대표하는 사례로서 통상적인 조선인의 ‘의’ 관념을 이루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산상수훈에서 예수가 요구하는 의는 이늘의 의로 충분하지 않다. 김교신은 통상적인 '의' 관념을 뛰어넘는 의에 대해 거듭 말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다음 글로 미루고, 팔복의 여덟 번째 복을 다루는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자. 김교신은 기독교의 '의'를 ‘절대의 의’로 규정하면서 통상적인 '의'인 ‘중용의 도’와 대비하고 있다.
고아를 동정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함은 세상의 호감을 사는 소이가 아니다. 압제당한 자와 같이 울고 억울한 일을 당한 자와 함께 분개함은 강자의 노기怒氣에 촉觸하는 이유가 된다. 특히 의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과 함께 서서 절대의 의를 행하려 할 때에 현대 이십세기에도 바로의 군세는 의연히 추격한다. (중략) 해안의 송림이 풍향에 순順하여 자태를 정하고 사구沙丘의 잡초가 수분을 얻으려고 장근長根을 발發하는 것처럼 시時에 종從하고 처處에 화化하여 소위 중용지도 군자의 덕을 세우려는 정도의 선행이면 모르거니와, 암흑과 광명이 다른 것처럼,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은 것처럼, 확연하고 선명하게 정의로써 서고자 하는 자는 핍박은 각오하여야 할 것이며 지상의 행복은 단념하여야 할 것이다.
<성서조선> 26호, 1931. 3. 5-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