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선지자란 누구인가? (최한나)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 열왕기상 17:17-24절 말씀 아멘!! }
본장은 열왕기하 2장까지 계속되는 대선지자 엘리야 이야기의 첫부분이다. 그런데 열왕의 역사를 소개하는 본서에서 엘리야에 관한 기록은 무려 8장에 이른다.이점은 열왕기에서 엘리야 가 차지하는 비중을 알려 주면서 동시에 단순한 역사의 나열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조명하는 기록으로서의 열왕기의 성격을 명증해 준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서에서 엘리야가 대단히 주목받는 것은 그의 시대에 열왕기의 주제와 갈등이 전형적, 극적으로 표출되었던 데서 기인 한다. 즉 엘리야와 당시의 왕 아합은 여호와 신앙과 우상 숭배 대결의 대표 선수 격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대는 두 입장의 첨예한 대립과 투쟁이 그 특정을 이루던 때였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엘리야의 이야기는 암혹 시대 속에서 한 신실한 인물을 통해 구속의 역사를 관찰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동성을 조명해 주는 것이다.
본문에는 엘리야가 죽은 과부의 아드을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숨이 끊어진 아이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는 광경(21절)은 마치 통속적 민담의 주술을 보는 듯 기괴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이 장면은 모름지기 타인의 치유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세를 다시금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교훈을 담고 있다.
과부의 집에서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엘리야가 한 당혹스러운 사건을 맞이하는 장면이다. 그것은 곧 과부의 아들이 병을 앓다 그만 죽어버리고 만 사건이다(17절). 그런데 이 일에 대한 과부의 곡해는 엘리야를 향한 그녀의 항의에서 잘 드러난다. 즉 그녀는 엘리야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를 상기케 되었고 그 죄 값에 걸맞게 아들이 죽고 만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18절). 그리하여 엘리야는 이제 복이 아닌 재앙을 불러오는 꺼림칙한 인물처럼 취급되고 만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홍미를 끄는 것은 과부의 신관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신이란 정벌과 재앙만을전해주는 존재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가급적 상관하지 않는 것이 좋은 존재가 곧 신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제 아들이 죽고마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엘리야란 인물은 자신의 죄를 일깨워 주고 신의 심판을 전달하기 위해 파견된 사자로 여겨진 것이다.
이 사건은 엘리야에게도 당혹스러운 일이었겠으나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과부에게는 생의 의미 자체가 뒤흔들리는 엄청난 시련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과부는 이 일을 통해 선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즉 이 일을 놓고서 엘리야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니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19-23절). 그리하여 그 녀는 이제까지 영향 받아 온 이교의 잔혹한 신 개념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인간의 호소에 귀기울이시며 인간의 기쁨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참된 신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심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24절).
마지막으로 엘리야는 아이를 죽음에서 회복하는 능력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21절). 이처럼 참된 치유자의 마지막, 그리고 근간이라 할 자세는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는 주체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깊이 깨닫고, 자신의 전활통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시 길 겸손히 청원하는 일이다. 한편 이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인의 활동은 주님의 사역처럼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자들'(마4:16) 에게 빛을 비추는 일이다. 그것은 죽은 아이를 살리는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없음으로 허무와 무의미에 시달리는 '살았으나 죽은자들'을 향한 치유의 사역이다. 그렇게 볼 때 엘리야가 보여준 경청과 공감 대상에의 전적 헌신 겸손히 하나님께 의뢰핸 자세는 그 모범이 될 만하다.
아마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는 앞서의 이적(8-16절)을 통해서도 천지만물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충분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서는 그에 덧붙여 생명의 근원이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까지 분명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역시 바로 이상과 같은 믿음과 부활의 진리를 신봉하는 자들이다. 사실 기독교의 근간 중 하나가 바로 이 부활 사상이다(고전 15:12-19). 그런즉 우리 앞에 어떠한 난관이 닥치더라도 낙심치 말고 천지 만물의 주관자, 생명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자(미 7:7).
14. 사자 같이 담대한 선지자
4.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5.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6.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7.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8. 보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마주보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9.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10.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 에스겔3:4-11말씀 아멘!! }
본문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을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선지자로 부르신 사건을 기록되어 있는 2:1-3:15의 후반부이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패역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하기 위해 선지자로 세우신 사실과 선지자로서의 에스겔의 태도 및 두루마리 취식 명령등을 언급하고 있는 전반부에서 언급하신 살실을 재어급하며 강조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상술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4-7절은 에스겔을 패역한 백성에 대한 선지자로 소명하심을 재강조하신 사실을 언급하고 있으며, 특별히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언어가 다른 이방인들에게가 아니라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심과 그들이 에스겔의 말을 듣지 아니할것임을 말씀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함을 강조한다. 이는 에스겔의 선지자 사역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 임을 나타내 준다. 다음 8-11절은 패역한 선민을 향한 불굴의 말씀 선포 사역을 재당부하신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겔이 선포하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본단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각성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감당 하도록 위임하신 사명이 결코 순탄한 것, 쉬운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실로 세상은 죄악으로 점점 어두워가고 있으며 사람들은 마음의 귀를 닫고 점점 진리를 멀리 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처럼 패역함을 아심에도 그들 가운데 에스겔을 보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의 악함을 아시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러나 그분은 빈손으로 우리를 보내지 않으셨다. 정녕 에스겔을 강하게 하시고 그들을 당당히 대면할 수 있게 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를 대하여도 하나님께서는 당당히 세상을 맞서도록 성령으로 우리를 붙드실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은 이와 같이 고백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이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는 시간이였다” 라고 말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시며 패역한 백성을 향해 선지자 소명을 부여하신 사실을 재강조하고 그들을 향하여 불굴의 말씀 선포 사역을 당부하신 내용, 선지자 사역에 임할 에스겔을 위한 기이한 체험을 통하여 그에게 당신의 권능의 역사를 나타내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의 말씀을 통해 에스겔은 하나님의 사역자로 자신의 소명을 새롭게 하였을 것이며 그가 해야 할 일을 다시금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에스겔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명을 재확인하는 것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마음, 곧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확인하였고 그 마음 을 품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에스겔의 사역은 구체적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나서는 이들에게 실로 중대한 각성을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을 보면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꿈을 인하여 사역의 현장에 나서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꿀송이보다 단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좋아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 또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 자체 가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지,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를 알아서 사역의 현장에 서기도 한다. 이처럼 사역에 나서는 각각의 동기들은 다 중요하며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더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이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힘입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알며 하나님의 마음을 그 마음에 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는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역을 시작하고 일에 매여 그 마음을 잃지 않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알며 그 마음을 지키는 자만이 끝날까지 순수하며 변질되지 않으며 충성된 삶,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 것이다. 자기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손과 발이 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끝 까지 감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15. 사람의 말에 본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 눅9:33 말씀 아멘!! }
본문은 주님의 제3차 갈릴리 사역에 대해 기록된 9:1-50의 연속 부분이다. 33절을 보면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말씀을 마치고 떠날 즈음에 주니께서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한 초막 건립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그의 제안에는 십자가 없는 영광을 누리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한 것이다. 그는 불과 일주일 전에 주님의 십자가 수난 예고를 듣고 만류했다가 주님으로부터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질타를 들어야 했다(막 8:3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말을 한 것이다.
지금 변화 산상에서 주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나누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31절에 의하면 예루살렘 갈보리 언덕에 서 있을 십자가 대속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오직 변화산 위의 영광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들은 오직 십자가 없는 영광만을 구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실상이다.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고난 없는 영광만 기대한다. 갈보리 없는 변화산을 추구한다. 고난은 아예 생각하기 조차 싫어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것은 변화산의 영광은 주님께서 갈보리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 온전 히 얻으실 것이었다. 갈보리의 고난은 변화산의 영광을 온전히 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갈보리의 고난이 없다면 변화산의 영광도 성취되지 않을 것이 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갈보리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는다면 천국의 영광은 얻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롬8:17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산을 내려와 갈보리 십자가의 길을 가야한다.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우리도 기꺼이 이 땅에 서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갈보리로 가야만 하는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 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14:22절).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 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절). 아멘!!
16. (선지자란) 귀하게 쓰이는 사람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 딤후2:20-21 말씀 아멘!! }
본문은 주로 복음 사역자의 자세와 관련한 교훈과 격려를 다루는 본 서신 본론 전반부1:6-2:26의 종결 부분이다. 여기서는 올 바른 말씀 사역자로서의 헌신 당부와 이단 사설에 대한 경계를 보도하고 있는 2:14-19 에 이어 복음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자세와 관련한 교훈이 기록하고 있다. 바울이 본문에서 복음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자세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성결과 온유이다. 즉 복음 사역자는 스스로를 깨끗하게 지켜 성결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하며 (20-22절), 또한 어리석은 논쟁과 다툼 을 피하고 대신 온유한 자세로 성도들을 가르치고 심지어 자기를 반대하는 자에 대해서 조차 온유함으로 징계해야 한다(23-26절)는 것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영적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일에 있어 다양한 도구와 쓰임으로 사용된다. 20절을 보면 바울은 그릇에 대한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 비유는 당시의 사람 뿐 아니라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 의미가 잘 전달되어 바울이 의도한 바를 파악하기에 무리가 없다. 저희들의 집에는 어떤 그릇이 있습니까? 각 집의 찬장을 열면 각양 각색의 그릇들이 진열되어 있을 것이다. 재료와 모양이 다양할 것이다. 또한 그 용도 면에서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사용하는 것과 아이들의 친구가 왔을 때 사는 것이 다를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가정에서 쓰이는 그릇도 각기 모양과 재료에 따라 쓰임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부름받은 자녀들도 쓰임이 다양하다. 이것이 본절에서 강조되는 영적인 진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성도들의 이런 다양한 쓰임에 대해서 인정하십니까? 이는 바울이 교회에 대하여 말할 때 사용되었던 몸의 비유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다. 몸은 한 지체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눈이 중요하다고 해서 눈만으로 몸의 기능을 다할수 없다. 몸에는 그 쓰임과 기능을 달리하는 다양한 지체가 있어야 온전한 몸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러한 영적인 진리를 머리로는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전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어떤 그릇이 되고 싶어한다. 대개 존경받고 명예로운 그릇이 되고 싶어 한다. 쉽게 말해서 금그릇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으로 말하면 어떤 부서의 장쯤이 될 것이다. 그에 반해 교회에서 봉사하는 직분, 곧 질그릇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는 금그릇이 질그릇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흔히 생각할 때 금그릇이면 다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음식이나 어떤 물건을 담을 때 반드시 질그릇에 담아야 제 맛이 나는 음식이 있고 어울리는 물건이 있다. 아무리 금 그릇이 좋다고하여 그 그릇에 맞지 않는 음식이나 물건을 담으면 오히려 음식의 맛을 상실하게 하거나 볼품없게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큰 집에는 각각에 알맞은 다양한 그릇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당신의 뜻에 따라 각각의 일에 어울리는 그릇을 당신 집에 두신다. 그리하여 그에 합당한 직분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쓰임에 있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한 쓰임만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나 달란트를 무시하는 처사이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이렇듯 내가 잘 할수 있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그리스도의 몸의 온전함을 깨는 것이다. 이는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일 뿐 그 어떤 아름다운 것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집에는 쓰임을 달리하는 각양의 그릇이 있음을 인하해야 한다. 그리고 과녕 나는 어떤 그릇으로 세움받았는지 살펴서 그 그릇으로 충성된 종으로 준비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자는 금 그릇이나, 은 그릇으로 세움받는 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세우심에 충성하였느냐 하는 것이다.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라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니라”(마25:22-23).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롬12:6)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또한 20절을 보면 성도가 귀히 쓰임 받는 조건은 능력이 아니라 정결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양한 용도의 그릇이 있음과 더불어 이것들의 쓰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아주 선명하게 그릇들의 쓰임에 대해 단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곧 “귀히 쓰는 것”과 “천히 쓰는 것” 이다. 그러면 귀히 쓰이는 것과 천히 쓰이는 그릇을 구분하는 결정적 기준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귀히 쓰겠다, 또는 천히 쓰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21절을 보면 그 해답이 있다. “누구 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라고 하였다. 그렇다. ‘자기를 깨끗 하게하는 것’ 이 바로 귀한 쓰임을 받는 조건이다.
그러면 여기서 자기를 깨끗 하게 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말씀 앞에 나온 ‘이런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이런 것’이란 앞에서 계속적으로 논의되었 “망령되고 헛된 말”을 가리킨다. 즉 이단과 거짓 교훈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결한 삶을 사는 것이 귀히 쓰임 받는 조건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들은 이 영적인 원리를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결하게 사는 자가 귀한 쓰임을 받는 것이다. 이는 세상에서 사람이 쓰임을 받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세상에서 쓰임을 받는 사람은 재능과 능력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의 속이야 어떻든간에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능력만을 볼 뿐이다. 물론 근래에 들어서는 능력보다 사람들과의 관계와 인성에 조금씩 눈을 돌리는 성향을 보이는 것도 같지만, 뭐니뭐니해도 어떤 일에 대한 합당한 사람을 선택할 때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능력이다. 이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합니까? 대학도서관에 가보면 여러 책을 쌓아놓고 지식과 능력을 쌓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 의 몸부림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집에서는 이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곧 그 사람의 정결함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거짓 교훈에 물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귀한 쓰임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귀한 쓰임을 받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은 능력만이 아니다. 그 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를 정결케 하는 것에 전력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자 을 깨끗하게 하는 내면적인 노력이야말로 가장 힘겨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능력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 정결 함은 눈으로 확인되는 것보다 확인되지 않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더욱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정결함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고후7:1).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끝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 아멘!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