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이해하는 ‘프레임’에 대하여
새소망교회, 조해강 목사
개요
1. 프레임이란?
2. 성경 해석의 틀, 프레임
3. 사도 바울이 설명하는 십자가
4. 유대인이 바라는 하나님의 구원
5. 사도 바울이 진단한 세상
6. 사도 베드로의 프레임
7. 십자가를 이해하는 다양한 해석틀
8. 프레임 진단하기
9. 하나님의 능력인 그리스도
10.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
1. 프레임이란?
프레임(frame)은 틀이다. 틀은 미리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틀은 무엇을 집어넣어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하다. 틀에 무엇이 들어가면 그 이전과 매우 다른 것이 된다.
흙이나 모래로 벽돌을 만든다. 벽돌을 만들 때는 벽돌 모양의 틀이 필요하다. 그 틀 속에 잘 섞인 흙과 모래를 넣고 압착하여 벽돌을 찍어낸다. 이때 특별한 형체를 띠지 않던 모래가 네모 반듯한 벽돌이 된다. 수북하게 쌓여 있던 모래가 네모 반듯한 벽돌이 되어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습은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다. 이것이 틀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작품이다.
사진도 때로는 틀에 보관한다. 멋진 틀에 담아 거실 벽에 걸어 둔 가족사진은 훨씬 돋보인다. 작은 액자에 넣은 사진도 종이로만 인화된 사진보다 훨씬 좋아 보일 때가 많다. 그런데 사람의 얼굴이 담긴 사진액자에 검은 리본을 양 옆으로 비스듬하게 붙이면 그것은 즉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영정 사진이 된다. 액자라는 틀이 사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셈이다.
벽돌을 찍어내는 틀과 사진을 넣어 보관하는 액자를 우리는 프레임이라고 부른다. 프레임은 어떤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장치와 같은 것이다. 프레임은 정치계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정치인 중에는 상대방에게 나쁜 이미지를 덧씌움으로써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때 사용하는 것이 프레임이다.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프레임은 국민들에게 자신이나 다른 정치인을 특정한 모습으로 비쳐지게 하려고 사용된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교묘하게 사용하는 프레임에 따라서 국민들은 어떤 사람을 빨갱이라고 부르거나 종북좌파라는 낙인을 찍기도 한다. 이때 프레임은 국민들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모습으로 짜인다.
나는 성경 이야기도 이처럼 프레임을 통해서 전달되고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사람들은 성경 이야기를 자신만의 프레임에 넣어서 설명하고 이해한다. 아마 프레임이 없이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성경의 어떤 이야기가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그 독자는 그 이야기를 자신의 프레임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흙과 모래처럼 불분명한 이야기가 네모 반듯한 벽돌처럼 분명한 의미를 띠게 된다.
2. 성경 해석의 틀, 프레임
성경을 어떤 프레임으로 읽느냐에 따라 신학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십자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형틀이다. 그런데 번영신학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것은 ‘더하기 표시’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래서 번영신학의 설교자는 십자가를 보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더하시는’ 분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니 십자가를 보면서 복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자고 권면한다. 그것도 일리는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설득되고 용기를 얻는다.
어떤 사람에게 십자가는 인간을 사랑하여 아들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시는가! 이것이 십자가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틀이다. 그러므로 성경 이야기를 이해하는 틀은 ‘해석의 틀’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사도 바울은 자기 시대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해석하는 다른 틀이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23~24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어떤 유대인들은 율법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이 구절에 비추어 보면 나무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분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까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을 가까이하고 따른다는 것은 거리끼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자기 공동체 안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고꾸라지고 말 것이다. 거리낀다는 말이 나온 헬라어 스칸달론(skandalon)은 이처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덫이나 장애물 같은 것이다.
로마 사회의 지성인들은 어떤가? 그들이 보기에 나무십자가는 사형틀이다. 거기에 매달리는 사람은 반역자다. 반역자들은 재판을 통해서 확정되며 그 최후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다. 그렇게 십자가는 강자의 상징이며 통치의 완성을 위한 강력한 도구다. 그런데 그처럼 사형틀에 달려 죽은 이가 구세주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헬라화된 로마인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로 이해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다르게 해석되고 이해되어 왔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를 이해하고 그 깨달은 바를 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전달되고 전수된다. 십자가는 교회 건물의 가장 높은 곳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라고 온 세상에 보여준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인지에 대하여 여러가지 이해와 해석이 있으며, 사람마다 그 의미를 달리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존 스토트 같은 신학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책을 썼고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3. 사도 바울이 설명하는 십자가
그런데 위의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라고 주장했다. 사도 바울은 어떤 틀로 십자가를 이해했기에 이렇게 단언하는 것일까? 사도 바울은 ‘능력’이라는 말을 유대인을 향하여 기록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혜’라는 말을 로마의 지성인들을 향하여 사용했을 것이다. 바로 앞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고 했다. 로마의 지성인들은 헬라 문화를 숭상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유대인들이 구하는 표적보다 더 위대하고 헬라인들이 구하는 지혜의 정점이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기 때문이며, 헬라인들이 지혜를 구하는 까닭은 그 지혜을 알게 될 때에 비로소 참 생명에 이르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믿었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알아야 사람의 본분을 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바로 그들이 찾는 구원의 능력이며 지혜라고 소개한다. 무슨 뜻으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구원은 무엇이며, 헬라인들이 찾는 지혜는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이 두 그룹의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간단하게 그 두 진영의 문화를 촌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먼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구원은 어떤 것일까?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고 기념한다. 안식일과 유월절을 포함한 각종 절기가 그것을 담고 있다. 또한 그들의 조상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건짐을 받은 것처럼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 때에 유대인들은 포로생활에서 갑작스럽게 풀려나는 기적을 체험한다. 유대인들은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크신 손과 펴신 팔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실 때마다 그 능력의 손을 보여주는 표적이 나타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소개한 것일까? 그리스도는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분이 되셨는가? 아니 그리스도는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는가? 그리고 그때 구원은 어떤 의미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4. 유대인이 바라는 하나님의 구원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구원은 절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절망이라고 느끼는 까닭은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다시 로마의 압제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아직도 포로생활이 계속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포로생활은 애굽의 노예생활과 같은 의미였다. 당연히 성경대로 하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실 것이고, 다니엘의 예언처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는 분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나라를 맡기실 것이다(다니엘 7:13~14, 22). 그것이 성경을 믿고 사는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구원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들의 구원이 임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사실 성경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포로로 끌려간 까닭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다. 그래서 다니엘도 포로지에서 자기 백성의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는 다음과 같은 통곡이었다: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치는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이나 먼 곳에 있는 자들이
다 주께서 쫓아내신 각국에서 수치를 당하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다니엘서 9:7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지금 포로로 끌려와 수치를 당하는 이유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받는다면 그들의 포로생활은 끝이 날 것이다. 예언자들은 훗날 그들의 죄가 그 대가를 충분히 받았다고 백성들을 위로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40:2
이제 죄를 사함을 받았으니 노역은 끝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것이 옛적에 예언자 이사야가 자기 백성을 일깨우고 격려하던 메시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로마의 압제 아래 있으니 그들이 이 압제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려면 당연히 죄를 용서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일을 하셨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고 그들을 노역에서 풀어주기 위한 화목제물이었다고 사도 바울은 소개한다. 사도 바울과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이 마치 어린 양처럼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고난을 당하심으로 자기 백성은 이제 하나님과 원수된 것에서 벗어나 다시 화목할 수 있게 되었다고 굳게 믿었다. 이렇게 된 것을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만들어낸 결과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 노역과 포로생활에서 건져내셔서 다시 빛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한 능력이 되었다. 외견으로 볼 때는 그 죽음은 죄인의 형벌이지만 하나님은 그 순종을 받으시고 자기 백성을 치료하시고 회복하게 하셨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이제 포로생활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
5. 사도 바울이 진단한 세상
사도 바울이 말하는 포로생활이란 로마의 압제 아래 고통을 겪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사람다움을 잃어버리고 불의와 불법에 빠지고 그 결과로 갈등과 폭력, 압제가 일어나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태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매우 폭넓은 범위에서 인간이 겪는 어려움과 고통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며, 그 결과로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왕 같은 존재다. 그가 그 임무를 잘 감당할 때 그가 사는 곳은 점점 생명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동참한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이 되겠는가! 바로 그렇게 사는 것이 사람다움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어떤가?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전도 현장에서 헬라의 귀부인들과 남자들이 복음에 반응을 하는 것을 보았다(행 17:12). 사실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사도 바울도 헬라의 시인을 연설 중에 언급할 정도로 헬라 문화에 대하여는 조예가 깊다고 할 수 있다(행 17:28). 그런 그가 볼 때에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도 여전히 허무한 것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아테네에서 분명하게 보았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제단을 쌓고 정성을 바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보기에는 헬라인들도 유대인들 못지 않게 죄와 사망의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꼭 필요한 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고 사도 바울은 확신했다.
로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헬라인들의 삶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 1:22~23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도 생명에 이르는 참다운 지혜를 얻지 못하고 결국 사람과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다고 사도 바울은 한탄했다. 그리고 그런 문화가 만들어 내는 세상도 인간다움을 잃고 착취와 거짓에 물든 것임을 사도 바울은 간파했다. 그래서 그가 보기에 모든 피조물을 지금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면서 거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것이 피조세계에 대한 사도 바울의 진단이다(롬 8:21).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렇게 하여 낮은 데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들에게 그들의 허영이 헛된 것임을 보이시고 권력을 가지고 호령하는 사람들의 영광도 헛것임을 드러내셨다. 이처럼 스스로 낮추심으로 하나님의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야말로 인간세상을 구원하고 생명으로 이끌 하나님의 지혜임을 사도 바울은 천명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도 헬라인에게도 꼭 필요한 분이었다. 그들을 모두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사도 바울은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과 확신으로 그는 유대인의 회당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헬라인들이 모이는 광장에 서서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전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떤 프레임에 넣고 이해했는지 생각해 보자. 사도 바울은 자기 백성인 유대인들이 갈망하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갈망 속에서 죄 사함이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죄 사함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이해했다. 이런 프레임으로 보면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분이다. 그리고 그 프레임에서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여 노역과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다시 회복하게 하시는 분이다. 이제 당당하게 일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다.
6. 사도 베드로의 프레임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았다. 사도 베드로가 십자가에 대하여 쓴 글을 읽어보자: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18상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죽으신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십자가를 소개하는 이유는 바로 앞 구절에서 말하는 덕목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베드로전서 3:17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소개한다. 그러니까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리스도께서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선한 일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며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것이었다(행 10:38).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신 선한 일은 하나님을 향하여 바르게 예배하고 정직하고 진실되게 살도록 불의에 맞서신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 일 때문에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셨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를 따라 선한 일을 하셨기에 고난을 당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으셨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예언자 미가는 하나님의 뜻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그것은 정의와 자비와 겸손이다(미가 6:8).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선을 행하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 결과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신 목적이며, 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들이신 이유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의 프레임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것은 인간의 원형 또는 인간의 본래적 목적을 회복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가리킨다.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를 보고 인간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살도록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고 이해했다. 하나님이 교회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이 아름다운 덕을 널리 선전하는 제사장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벧전 2:9).
7. 십자가를 이해하는 다양한 해석틀
이처럼 십자가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그것은 각각이 하나의 프레임이며 어떤 배경과 맥락 가운데서 사용된다. 어떤 사람에게 십자가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협곡을 건너게 하는 생명의 다리로 이해된다. 다리 그림을 그려서 전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 십자가는 저주를 막아주는 행운의 상징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십자가는 자신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분명한 증표다. 어떤 사람에게 십자가는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할 삶의 지표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십자가는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로 이해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십자가는 어두움과 불법에 물든 권력에 대한 승리의 보증으로 이해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인생과 세상을 이해하는 맥락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해석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배척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는 명확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십자가를 새롭게 이해하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깨달은 것을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그 결과가 신약성경이며 오늘의 교회다. 교회는 십자가 아래에 세워진다.
사람이 자신의 프레임을 인식할 수 있을까?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떤 틀에 넣어서 이해하는지 깨달을 수 있을까? 전도는 이처럼 다른 프레임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메시지의 전달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인식틀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사도 바울 같은 분도 이런 작업을 하면서 난관에 부딪혔는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라고 말했다. 이미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고 그 사람에게 자기를 부인하는 고통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천국을 경험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는 가족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고, 동네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 한다.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런 고난을 통해서 복음이 전달되고 복음전도자의 마음에 담긴 십자가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어떤 프레임과 해석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는지는 결국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방향타가 될 것이다.
8. 프레임 진단하기
나는 위에서 십자가를 해석하는 여러 프레임을 소개했다. 사도 바울이 설명하는 프레임이 있고 사도 베드로가 설명하는 방식이 있다. 그러면 오늘 사순절을 보내는 이 시기에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십자가를 설명할까? 나는 이런 질문을 검색해 보았다:
질문: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이 질문은 십자가를 이해하는 방식을 잘 드러낸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한다. 그 주요한 방식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