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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군(대하19:4-11)-2018.4.15
오늘은 정말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우리 교회 아홉명의 권사가 세워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기도로 준비하면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교회일군은 교회의 제도에 의해 교회의 필요를 따라 교회가 세우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른바 사람들이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시고 세우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임직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임직 받는 개인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교회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만큼 임직은 중요한 일이고 큰일 입니다. 임직을 앞둔 교회와 성도는 긴장하게 되고 기도하게 됩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주의 몸 된 교회의 큰 일 앞에 사단이 가만있지 않고 훼방거리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임직을 받는 분들에게 제가 오래전부터 계속 강조한 것이 임직을 위한 일에 집중하고 악한 것이 장난치지 못하도록 우리들의 마음을 지키는 기도를 강조한 것입니다. 천국의 잔치가 배설되면 사단도 바빠지거든요. 한마디로 영적인 전쟁입니다.
교회일군은 결국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물론 우리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잘못된 일군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하고 완벽한 일군은 없는 법이므로 우리의 그런 절차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비록 우리 보기에는 조금 미숙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일군으로 세워지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성숙한 일군으로 거듭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군은 만들어진 일군이 아니라 만들어져가는 일군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다보면 직분이 일군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른바 일군 되기에 합당하여 직분자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직분이 주어지므로 인하여 거기에 합당한 일군으로 세워지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우들은 이번에 세워지는 임직자들을 육신의 눈으로 판단하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배나 존경하고 사랑하여 그분들이 주의 몸 된 교회에 기둥 같은 일군으로 세워지기를 진심으로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일곱 안수집사를 세우는 데 정말 은혜스럽게 세웠습니다. 그들이 임직자를 세우는 데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첫째, 자기가 스스로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둘째, 교회가 지명하여 세울 때 못하겠다고 거절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임직자로 피택 받지 못했다고 상처받는 성도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임직입니다. 무엇보다 교회일군은 하나님의 일군이요, 그리스도의 일군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유다왕 여호사밧이 일군을 세우는 모습을 보려고 합니다. 물론 본문은 사법제도를 개혁하는 내용이지만, 거기에 합당한 일군을 세우는 모습이 교회일군을 세우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여호사밧을 유다의 대표적인 선한 왕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종교개혁은 물론이요,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한 왕이었습니다. 물론 그도 완벽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북 이스라엘 아합 왕과의 군사동맹을 맺어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왕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여호사밧의 정권을 견고케 하셨습니다(대하17장). 그는 과감하게 종교개혁을 단행했고(17:1-7), 전국을 순회하며 모든 인민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교육개혁을 단행했습니다(17:7-9).
그런 후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법제도까지 손질을 단행합니다. 큰 틀에서 보면 유다 전역에 지방 재판소를 설치하고(5-7절), 예루살렘에 중앙재판소를 설치합니다(8-11절). 이는 효율적이고 공정하고 신속하게 백성들의 송사를 해결해주려는 왕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마치 모세 때에 그의 장인 이드로를 통해 부장제도가 만들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여호사밧 왕이 거기에 합당한 일군을 세우는 모습을 통해 교회일군을 세우는 기준과 원칙을 다시 한번 고찰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군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군은 선한 일군입니다(11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군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믿음의 선한 일군이라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일군은 만들어진 일군이 아니라 만들어져 가는 일군이요, 사람들의 인기투표로 선출되는 일군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시는 일군이며, 일시적으로 잠간 쓰임 받다가 버림받는 임시직이 아니라 평생토록 쓰임 받는 종신직입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9절)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군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군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보다 사람에 대한 경외심이 더 민감합니다. 그런 자는 결코 하나님의 일군이 될 수 없습니다. 되어서도 안됩니다. 경외는 공경과 두려움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의 두 가지 큰 성품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의 두 가지 큰 성품은 공의와 사랑입니다. 그런데 경외라는 단어 속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 성품으로 우리 인간을 다루십니다. 공의가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하나님의 대쪽 같은 성품을 의미한다면,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는 인자한 성품을 의미합니다. 이른바 공의가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이라면, 사랑은 어머니 같은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은 이 두 가지의 성품을 모든 인간에게 유효하게 사용하십니다. 항상 이 두 가지 성품을 조화롭게 사용하시되 한 가지의 성품만 고집하시지는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만 강조하다보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인간은 이 두 가지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풀이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그분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믿기 때문에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서워서 공경하는 것도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도 있습니다. 다만 무서워서 공경하는 것은 강제적으로 복종하는 공경이기 때문에 은혜가 안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공경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공경이기 때문에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것은 부모님께 드리는 효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학생이 선생님을 공경하는 원리도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이른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공경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감히 하나님이 사랑만 가지신 분이라는 착각을 버리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정말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하나님이시라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공의를 믿기 때문에 그분을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에 기초하는 것이지요. 그분은 아무 사람도 차별하지 아니하십니다. 모든 인간의 죄를 공정하고 공평하게 다루십니다. 그분의 공의로우신 성품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앞에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무너지면 버릇이 없어집니다. 죄를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때문에 우리 하나님이 두 가지 성품을 적절히 사용하사 우리 인간을 다루시듯이,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에 입각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이 마땅합니다. 이른바 하나님을 사랑으로 공경하고, 공의로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특별히 본문은 재판관들에게 자신들의 행하는 바를 삼가라고 권면합니다(6절). 자신들의 마음이나 생각으로 판단하거나 재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는 자신들의 행위를 옳다고 정당화시키려는 기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를 삼가고 오직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7절).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일군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마땅히 자기 생각이나 마음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믿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른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2) 영적인 권위와 책임을 가진 자입니다(10절)
하나님의 일군은 육신의 일군이 아니라 영적 일군입니다. 이른바 신령한 일군입니다. 때문에 재판관이라고 할지라도 단순히 송사의 판결만 내리고 끝나면 안됩니다. 그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영적으로 도와주고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 중에 어떤 사람이 율법이나 계명이나 율례나 규례를 인하여 송사하거든 저희를 경계하여 여호와께 죄를 얻지 않게 하여 너희와 너희 형제에게 진노하심이 임하지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재판관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재판관인 너희도 무죄함을 면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일군은 영적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물론 영적 권위를 스스로 취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권위는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의 일군이라면 당연히 영적인 권위가 주어집니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일군이라고 하면서도 영적 권위를 의식하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일군들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영적인 권위를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의 일군이라면 어떤 식으로나 영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영적 권위가 없으면 하나님의 일군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적인 권위를 희한한 능력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하나님의 일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에게 부여된 영적권위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권위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무슨 희한한 능력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만 영적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눈으로 드러나는 은사를 영적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진정한 영적권위는 은사보다는 은혜 쪽에 더 가깝습니다. 때문에 진짜 영적권위는 당신의 온유한 말에서도 나타납니다. 당신의 인격과 성품으로도 나타나고, 당신의 작은 행동으로도 나타납니다. 혹은 당신의 삶속에서도 충분히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이 영적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영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영적권위를 제한하면 안됩니다. 분문에서 재판관들에게 주어진 영적인 권위는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마음이나 생각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하는 일체의 모든 행위입니다. 그 가운데 그들에게 주어진 송사의 판결권을 단순히 판결하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경계하여 범죄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세상적인 재판관이라면 그냥 법대로 판결해주면 재판관의 소임을 다했다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재판하기 위하여 세워진 재판관들이라면 사람을 위한 재판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재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6절). 하나님은 그런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이라면 사람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봉사가 우선이요,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른바 일의 우선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영적 권위를 무시하지 말고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일군은 무언가 달라야 합니다.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며 인격이 달라야 합니다. 무엇보다 믿음과 행함이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을 영적으로 인도해 갈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자리가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런 자를 중직자라고 부릅니다. 중직은 맡은 바 사명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는 말입니다. 회사도 유한회사가 있고 무한회사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유한회사는 일정한도까지만 책임을 지는 회사제도요, 무한회사는 모든 책임을 온전히 다 감당하는 회사제도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하나님의 일군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믿음의 기업을 위하여 유한 일군이 아니라 무한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한 일군에 대한 각오나 마음가짐이 부족합니다. 그런 자세를 가진 일군들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번에 세움 받는 임직자들은 무한 책임의식을 갖는 일군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영적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는 자입니다(11절)
교회는 영적 질서가 있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는 않아도 영적 질서에 의해 움직입니다. 교회에 영적 질서가 무너지면 어지럽게 됩니다. 영적 질서가 없다면 세상의 모임이나 기관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머리되신 주님의 이끄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고전14:33). 화평은 질서를 지키므로 얻어지는 유익입니다. 질서만 잘 지키면 평안합니다. 그런데 질서를 깨뜨리면 어지럽고 평화가 사라집니다. 교회는 영적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화평합니다.
영적인 질서를 가장 잘 지키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빌2:6-7). 한마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일을 삼위 하나님의 질서 아래서 행하셨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독단적으로 행하지 아니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사소한 것 하나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성부 하나님께 물었고, 성부 하나님의 결정에 승복하셨습니다. 영적인 질서를 지키신 것입니다.
비록 그분은 율법적인 질서까지도 최대한 존중하셨습니다. 태어나서 팔일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결례의 절차를 따라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눅2:22). 또한 세례요한을 통해 친히 요단강에서 세례도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 질서가 존중받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영적 질서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특별히 교회일군은 영적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가끔씩 영적으로 오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 질서를 깨뜨리면서 말입니다.
본문에 세워지는 일군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질서가 주어졌습니다. 그들에게 여호와께 속한 일이 있고, 왕에게 속한 일이 있었습니다(11절).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 속한 일이지만 굳이 분류해보면, 여호와께 속한 일은 종교적인 일이요, 왕께 속한 일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민사적인 모든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주도하는 책임자가 세워집니다. 여호와께 속한 모든 일은 대제사장 아마랴가 다스리고, 왕에 속한 모든 일은 유다지파 스바댜가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재판관들의 최고 책임자인 셈입니다.
아마도 재판관들은 이 사람들의 관리 하에 자기들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레위 사람과 제사장과 이스라엘 족장 중에서 사람을 세워 모든 송사를 재판하게 하되 여호와께 속한 모든 일은 대제사장 아마랴가 주도하고, 왕에게 속한 모든 일은 유다지파에 속한 스바댜가 주도해서 처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질서입니다. 최소한 이들은 이 질서를 무너뜨리거나 무시하면 안됩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영적질서를 무시하다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꽤나 많습니다. 구스 여인을 취한 모세의 부도덕성을 비방하던 그의 혈육들을 보십시오. 결국 하나님은 모세 편을 들어주시고 아론은 모세에게 중보를 부탁하며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리고 맙니다(민12장).
사무엘 선지자의 제사권을 무시하고 번제를 드리던 사울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합니다(삼상13:13). 제사장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던 웃시야 왕은 문둥병이 발병하여 성전출입이 금지되고 별궁에 거하다가 슬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대하26:16-23). 비록 자신이 더 현명하고 유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영적인 질서가 지켜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엇보다 주의 몸 된 교회가 영적인 질서로 세워지기를 소원하십니다.
특히 교회 일은 질서가 분명해야 합니다. 가끔씩 은혜라는 미명하에 영적인 질서를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울러 그렇게 일하는 일군 역시 하나님의 일군이 아닙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거룩한 영적질서를 무시하거나 무너뜨리는 자 없기를 바랍니다. 명실공히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함께 하시는 일군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선한 일군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군이며, 오늘도 지어져가는 성전의 기둥 같은 일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오늘 임직 받는 권사들은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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