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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1802~1885)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상징주의와 표현주의의 대가 빅토르위고는 19세기가 시작되고 몇 년 뒤 늦겨울 브장송이라는 소도시에서 출생했습니다.
레미제라블,가난한 사람들,파리의 노트르담 등등 인류 문학사의 주옥같은 작품으로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그는 작가이면서 현실 정치에도 적극적이었던 정치인이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진행된 프랑스혁명은 정말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 중 파리에서 군주제의 폐지를 목표로 봉기한 6월 혁명은 실패한 혁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고 43년이 흘러 왕이 단두대에 처형되고, 또 공화정이 세워지고, 공포정치에 단순 범죄자도 목이 잘리는 시대를 지나고 나폴레옹의 전제군주시대를 지나 공화주의자의 투쟁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6월 혁명은 비록 단 이틀이었고 실패한 봉기었으나 프랑스 역사에 울린 외침은 작지 않았습니다.
그 실패한 6월 혁명을 빅토르 위고는 왜 주목하고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이란 의미의 레미제라블은 당시 긴 혁명과 피에 얼룩져 지친 서민들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노동자로, 기업가, 정치가로 바라보는 장발장의 눈에 보인 프랑스 사회의 저 밑에서 울려오는 절규는 빅토르 위고의 마음 속에는 결코 헛된 소음으로 치부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위고는 그의 다른 대표작인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개인의 욕망에 눈이 어두워 살인까지 저지르는 프롤로 주교를 그린 바 있습니다. 그의 작품 전반이 인간 본성의 솔직한 표현에 중점을 두었으니 당시 보수적 종교와의 충돌은 불가피해 보였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과 《레미제라블》등의 걸작들을 금서로 지정해 신도들이 읽지 못하게 하였다는 사실은 유명하지요. 뭐 당시에는 워낙 계몽주의 사상의 파도가 휩쓸던 시기라 금서나 있던 책도 불태우는 사건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만큼 문학이 인류와 종교 전반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걸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작품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단편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었을까 잠시 생각해보면, 흔히들 부자들은 착해지기 쉽다는 일반적 담론과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에 바빠 오히려 각박할 것이라는 믿음이 상식화 되어가도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가난이 선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읽은지 오래되어 다시 그 작품을 들추는 것 조차 손이 얼어버린 이 추운 공간에서의 작품의 되새김은 나름 힘겹지만 복기해 그 내용을 살펴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겨울, 가난한 어부와 그에 딸린 부인과 다섯 명의 아이들이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위태로운 겨울 밤을 보낸다.
폭풍으로 도저히 나가면 안되는 바다를 어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배를 타고 노를 젓는다.
비록 흙바닥이지만 먼지 하나 없는 오두막의 정돈 된 바닥. 마른 나무들이 제 몸을 불태워 제법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난로도 있다.
'비바람이 거세지는 걸 보니 날이 더 추워지겠지. 나무를 더 지피는 게 좋겠어.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니 .'
아내 자니의 심경은 복잡합니다. 행여 남편이 잘못되지나 않을까.
'저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부지런히 일을 해야지.'
이런 날 바다로 나가는 일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어부는 그물을 당기며 혼자말을 토해낸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날씨를 가려가며 일할 순 없지 않은가. 늘 허기진 아이들을 생각하면..끄윽..'
아내 자니는 폭풍에 날아갈 것 같은 집안에서 기도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세요. 제발. '
얼마나 더 부지런히 일을 해야 형편이 조금 나아질까 푸념도 그녀에겐 사치스런 생각이다.
'하지만 부지런히 일 한다는 것은 얼마나 값지고 보람된 일인가. '
어린 것들은 사계절 신발도 없이 맨발로 다닌다. 그들에게 검은 빵은 고급 식사다.
'빵은 커녕 귀리빵이라도 배불리 먹일 수만 있다면..하지만 아무 탈없이 이렇게 건강하게만 자라만 준다면 더할 나위 없지.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야...'
얼어붙은 바다 한가운데서 어부는 아내를 생각하며 사투를 벌인다.
비바람 소리는 기승을 부리고 파도는 배를 삼킬 듯 높이 솟는다.
마음이 불안한 자니는 램프를 들고 외투를 걸친 뒤 밖으로 나간다.
'남편이 돌아오고 있을까? 바다는 조금 잔잔해졌는지...등대불은 켜져있겠지...'
마을의 어느 창문도 불빛이 없었다.
그리고 쓰러질 듯 또다른 오두막이 눈에 보인다.
자니는 발을 멈췄다.
'아, 시몬아주머니가 아프다는 걸 깜빡 잊었네...병 간호도 해줄 분도 없다는 걸 깜박했어..어찌 지내고 계신지 인사해야겠어. '
'똑똑...'
문을 두드려 봤지만 안에는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자니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 인기척없이 힘없이 열린 문에 자니는 소리를 내어 시몬아주머니를 찾는다.
이런, 온기 하나 없는 방 안에는 젖먹이 어린 아기가 엄마인 시몬 아주머니의 젖을 물고 있었지만, 이미 그녀는 죽어있는 상태였다.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도 잠시, 일단 아이부터 살려야 했던 자니는 방안에 있는 덮을 것을 찾아 아이를 춥지않게 감싼다.
뒤도 보지 않고 폭풍우가 내리는 밤, 그녀는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다섯 아이들을 키우기도 벅찬데 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남편이 화내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아이를 내버려두는 건 어떻게 하나님이 용서하시겠어...'
자니의 마음은 복잡하다.
이윽고 사투를 버리던 어부는 다행히 집으로 돌아온다.
''여보, 나 왔어. 제법 고기들을 잡았다구...입에 조금이라도 풀칠은 할 수 있게 되었어. ''
자니는 너무나 반가와 남편을 꼬옥 안고 눈물을 닦는다.
''왜그래, 여보..울긴 왜 울어.
근데 가만...저 아이는 누구야?''
그녀는 사실대로 시몬 아주머니의 안타까운 죽음을 말하고, 아이가 왜 집에 온건지 이야기한다.
"이런, 우리에게 새 식구가 생긴거로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신 거야. "
남편은 오히려 천사같은 아이의 잠든 모습이 사랑스러워 감격해한다.
"여보, 비록 우리가 가난하더라고, 내가 덜 먹고 더 아껴서 이 천사같은 아이들을 잘 키울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요"
잠시 후 바다 멀리 폭풍우가 멈추고 아주 오랫만에 해가 뜨는 게 보인다.>>
가난하다고 인간 본성까지 가난한 건 아니라는 확신을 위고는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귀족 중심의 문화와 예술이 쾌락과 낭만주의를 거쳐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사실과 자연주의 흐름에 문학도 빅토르 위고를 위시한 상징과 표현으로 대변되는 삶의 그늘까지 내보인 작품들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이런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들은 계몽주의 물결과 함께 대중의 문맹률도 현저히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가톨릭과 화해하지 못한 위고는 교회의 기도마저 거부할 정도로 종교계와는 사이가 안좋았다고 합니다.
말년인 1881년 8월 31일 그가 쓴 유언장은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과 아쉬움을 주게 됩니다.
“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란다.(...)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도를 거부한다.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 사람의 기도이다.”
그는 1885년 5월22일 눈을 감았고 그의 죽음은 국장의 예를 받았고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장되었습니다.
파리가 위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끝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장례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하원에서는 418표 중 찬성 415표라는 압도적 투표 결과로 위고의 국민장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특히 팡테옹은 마리 퀴리, 루소, 빅토르 위고, 볼테르 등 프랑스의 저명한 혁명가, 철학자, 예술가들이 안치되어 있는 국립묘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