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조선일보 문갑식기자가 필리핀에서 느낀 감상을 읽어 보니 몇 년 전 인도를 여행하며 느꼈던 나의 소감과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 한번 올려 봅니다.
2008년 1월에 인도의 뉴델리를 거쳐 불교의 성지 바라나시, 힌두사원으로 유명한 카즈라호, 아그라의 타지마할, 라자스탄의 암베르성 등을 구경하였습니다.
특히 카주라호에서 인도 고유의 릭샤(좌석을 붙여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자전거)를 타고 가까운 마을을 한바퀴 돌며 본 가난한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 때 쓴 감상을 일부 소개하고 문기자의 글을 올립니다.(사진도 몇 장 서비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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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25일(금) : 인도 카주라호 사원과 가난한 아이들
인도 카주라호는 수십 개의 힌두사원이 집중되어 있고 특히 사원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외설적인 조각으로 유명한 작은 도시이다.
인도의 마을들은 초라하고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데 우리나라 60년대를 재현한 것 같다. 아이들의 차림새나 야윈 모습까지......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때가 우리나라 보다 2년 뒤인 1947년이니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립했는데도 아직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걸 보면 참 안타깝다. 과다한 인구도 문제지만 힌두교의 교리상 '욕심 없는 삶'을 가치롭게 여기고 아열대지역이라 기온이 높아서 그런지 이 사람들은 대체로 게으르다. 이러한 무소유 성향의 국민성에 게으름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다고들 한다.
하지만 간디 이후 걸출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간다. 위대한 지도자는 국민을 일깨우고 솔선수범함으로써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저 현실에 안주하고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백성들 아니었던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 피폐한 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미국의 원조도 마다하지 않았고, 특히 군사정권이었지만 박정희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만난 덕에 이렇게 잘 살게 되었고 선진화를 이루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요즘 인도도 깨어나기 시작하여 경제 성장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으니 언젠가는 이 가난을 물리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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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 기자의 글
취재차 사흘간 필리핀에 머무는 동안 머릿속에서 '성장'과 '분배'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1960 ~70년대 아시아 강국(强國)이던 한 나라의 침체를 목격하며 국가에 성장은 멈출 수도, 멈춰서도 안 될 과제라고 생각했다. 놀라운 것은 쓰러져가는 추레한 건물 사이에 버티고 선, 어느 선진국에도 없는 화려하고 거대한 쇼핑몰이 이 나라 거대 가문(家門) 소유라는 사실이었다. 부의 쏠림이 낳을 수 있는 극단적인 사례가 멈춰버린 성장 곁에 있었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와 동양의 강자였던 국가의 운명이 엇갈린 것은 출신·경력·성격까지 비슷했던 박정희와 마르코스, 두 대통령 치하(治下)였다. 당시 외교가에서 두 사람의 닮은 점은 화제였다고 한다. 1917년에 태어난 두 사람은 까무잡잡한 얼굴, 날카로운 눈매, 작은 키, 카랑카랑한 목소리까지 비슷했다. 박정희가 그랬듯 마르코스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훈장을 27개나 받은 군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1966년 그런 두 사람이 만났다. 월남 참전 7개국 정상회담 자리였다. 당시 한국의 1인당 GNP는 130달러였고, 필리핀은 269달러로 동남아 선두그룹이었다. 마르코스는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을 무시하고 경원(敬遠)했다. 이유는 월남전에 보낸 병사 수 때문이었다. 한국은 4만2500명을 베트남에 보냈다. 가난했지만 미국에 이어 둘째로, 발언권이 셌다. 호주가 4500명으로 3위, 필리핀이 2000명, 뉴질랜드 170명, 태국은 17명에 불과했다.
당시 월남전 참전을 앞두고 반전(反戰) 움직임은 한국에도, 필리핀에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박정희가 월남전을 기회로 여겼고 마르코스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뚜렷한 대비(對比)가 두 정상의 연설에 나타난다. 마르코스는 회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맨 처음 환영사에서 느닷없이 평화론을 편 것이다. "평화와 자유는 모든 인류의 권리이며 소망입니다. 평화와 자유가 없는 곳에 인류의 번영과 행복은 없습니다…." 단상(壇上)에 앉은 수뇌들의 표정이 변했다. 그중에서 가장 대로(大怒)한 이는 존슨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마르코스의 말이 시작하기 무섭게 열렬히 손뼉을 쳐댔지만 사람들은 그게 분노의 표현임을 알고 있었다.
박정희의 연설은 달랐다. 월남전에서 휴전이 이뤄지기 전까지 외국 군대가 철수해선 안 된다며 월맹(越盟)의 베트콩 지원 중지를 촉구했다. 말은 베트남을 향했지만 실은 한반도의 안전을 고려한 심모원려(深謀遠慮)였다.
마르코스는 자신이 평화주의자임을 과시하는 데 그쳤지만 대한민국은 한 지도자의 선택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국군의 현대화가 이뤄졌고 외화 획득 통로가 열렸으며 기업인들의 해외 진출 물꼬가 터졌다. 두 사람은 마지막이 같았다. 장기 집권의 끝에 한 명은 암살당하고, 다른 한 명은 성난 국민에게 쫓겨난 것만 달랐을 뿐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다스렸던 국가의 지금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앞으로 여섯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새 지도자를 선출한다. 그렇게 환호받던 한 지도자의 형이 영락(零落)하는 모습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에 차있던 지도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우리는 지켜봤다. 그런가 하면 누구는 북한에 모든 것을 갖다 바쳤다는 의심을 사후(死後)까지 받고 있으며, 또 누구는 나라를 거덜낼 뻔했다는 무능(無能)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우리 국민이 그만큼 대한민국 호(號)의 명운을 가를 위대한 결단을 본 지 오래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벌써부터 터져 나오는 포퓰리즘 공약의 범람 속에서 필리핀에서 얻은 단상(斷想)을 굳이 적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