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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6;11-23. 오벧에돔의 집과 모든 소유가 복을 받게 된 이유 2025. 2. 23.
9-15절,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다윗이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징계하시는 여호와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법궤에 대한 규칙을 쉽게 생각했습니다. 법으로 정해 놓은 방법대로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레스 웃사가 일어나고 그것이 무서웠기 때문에 이동하던 법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이동을 시켰습니다. 이동을 중단했지만 원 위치로 돌아가지 않고 잠시 머무를 곳을 지정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이동시키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잠시 석 달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복을 받은 이유는 법궤를 모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시 법궤를 이동시키는데 이동시키는 방법과 결정에 있어서 이전의 모습이 아닙니다. 직접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 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먼저는 이전과 다르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으로 하지 않겠다는 서원이고 다짐이었습니다. 베레스 웃사는 무엇이고 오벳에돔이 받은 복이 무엇 때문인가? 법을 따라야 하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그리고 자신이 에봇을 입었고 베옷을 입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궤를 어께에 메고 옮겼습니다. 왜요? 오벳에돔을 기억하면서 주실 복에 대하여 즐거움과 기대와 행복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두 똑 같이 동참하고 동행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6-19절,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 여기니라. 미갈이 업신여기며 천박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의 할 일을 합니다.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 가니라. 장막 가운데 법궤를 모셨습니다.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고, 용서를 구하고 감사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무리에게 떡과 고기와 건포도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과 기대를 같이 나누었고 다윗이 자기의 가족들을 축복하려고 왕궁으로 돌아 왔습니다. 20-23절,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다 하니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 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미갈은 다윗을 방탕한 사람으로 보았고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계집의 종 앞에서 몸을 드러냈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께 한 것이라고 합니다. 나를 택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권자로 삼았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앞에서 매일 이렇게 뛰어 놀 것이라고 합니다. 더 낮아지고 천하게 보일지라도 이 즐거움과 기쁨과 복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 신앙과 믿음의 성숙입니다. 여러분, 성숙이 무엇일까요? 어른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합니까? 높다고 해서 반드시 명산이 아니듯이 나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어른은 아니지요. 가려서 볼 줄 알고 새겨서 들을 줄 알아야지요. 세월이 일깨워 준 연륜의 지혜로 판단이 그르지 않은 사람을 어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숙은 높임이 아니라 낮춤이라는 것과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라는 것을 알고 행동하는 스스로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는 단계입니다. 어느 때는 고요하고 어느 때는 묵상하고 항상 무엇을 위하여 깨닫고 알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기대입니다. 즐거움과 기쁨을 표현하고 춤을 추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잘못 때문에 깨닫고 또 깨닫는 것이고 은혜와 복 주실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데 다윗은 이것을 실천했습니다. 이전의 실패했던 방법을 다시 적용하지 않았고 말씀대로 결정을 하고 행동을 했습니다. 잘못에 대한 번제를 먼저 드리고 감사와 기대의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를 즐거워하며 기뻐했고, 기대하며 소망했기 때문에 축복하며 나누었습니다. 오벳에돔을 반면교사 삼았습니다. 이것이 성숙입니다. 성숙은 어디서 오나요?
1-1. 소식과 소문을 듣고 어떻게 대응을 하느냐? 이것이 성숙과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누구나 소문을 듣고 소식을 듣습니다. 좋은 소식과 소문이 있는가 하면 나쁜 소문과 소식도 듣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를 접 합니다. 오늘날 정보화시대에 있어서 누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관리 하느냐? 에 따라 삶과 인생도 달라집니다. 또 얼마나 빨리 소식과 소문을 접하고 그 것을 얼마나 빨리 나의 것으로 만드냐에 따라 실패와 성공을 가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선점하려 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소식과 소문을 듣습니다. 들려진 소문과 들려진 소식하나가 나를 바꿉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듣는 것으로 끝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듣고 자기의 인생에 접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소문과 소식을 접목하고 받아들이고 수용한 인생들은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생각할 수 없는 은혜와 치료와 회복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먼저는 오늘 여러분들도 그렇게 되시기를 축복 합니다. 소문과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보배입니다.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기독교 문화의 배경이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한국이나 미국은 어디를 가도 십자가의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님의 좋은 소식만 여러분들의 귓가에 들려지시기를 축원 합니다. 오늘 다윗은 중요한 소문과 소식을 듣습니다. 그것도 3 개월 이전과 지금의 전혀 다른 소문과 소식을 듣습니다. 3 개월 이전의 다윗은 바알레 유다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으로서 최고의 정성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이동 시켰습니다. 그런데 나곤에서 웃사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마당에서의 일을 기억하는 다윗은 지금 새로운 소식과 소문을 듣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위하여 라는 명제와 다윗을 세우시고 높이시고 축복하신 것을 아는, 이 두 가지 때문에 백성들의 관심 밖에 있던 법궤를 다윗 성이며 시온 성으로 옮기다가 뜻 하지 않았던 큰일을 당한 때가 바로 엊그제의 일인데 지금 3 개월 만에 전혀 새로운 소식과 소문을 접 했습니다. 바로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임시 옮겨 놓았던 법궤 때문에 오벧에돔과 그 집안과 그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다윗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듣고 다윗이 어떻게 했나요? 듣고 끝내지 않았고 듣고 소문으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나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좋은 소문과 소식도 중요 하지만 아무리 좋고 좋은 소식과 소문이라도 그 것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아니하면 그 좋은 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은 지금 왕의 자리에 있고 왕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그 좋은 소식과 소문에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나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인가? 왜 이 때에 들려 지는가? 소식과 소문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라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그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성숙이고 중요한 장점입니다.
1-2. 어떤 사람이든지 사람의 이야기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버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높은 자리에 있고 놀라운 축복을 받은 다윗이지만 항상 아래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좋은 소식을 누구로부터 듣는가? 혹이라는 사람, 이름도 거론 되지 않을 만큼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사람에게도 귀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내가 지금 왕인데, 내가 지금 누구인데,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데. 이러지 않습니까? 여러분, 갈급하고 필요한 때에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자리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다윗은 누구에게든지 들을 수 있는 문을 항상 열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 합니다. 다윗이 혹이로 부터 들었습니다. 여러분,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아랫사람의 소리를 잘 듣지 않고, 들려 지지 않습니다. 하찮케 취급하고 작은 일로 생각합니다만 다윗은 항상 누구로 부터도 들을 수 있고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성숙이고 장점입니다.
1-3. 가치의 전망입니다. 듣고 들은 내용에 대하여 취합과 결정을 해야 합니다. 열어놓고 듣지만 결정은 다윗이 합니다. 모든 것을 듣고 그것이 나의 삶과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가치를 전망해야 합니다. 오늘 다윗은 혹이라는 사람으로 부터 듣고 어떻게 합니까? 다시 법궤를 옮깁니다. 그러면 왜 다윗이 이 법궤를 옮깁니까?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다윗은 항상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복과 은혜를 주시는 것, 이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복에 대하여 목말라 합니다. 은혜와 복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자다가도 일어납니다. 여러분, 지금 다윗이 성공 인생으로 살아간다니까요. 왕의 자리에 있으면 된 것 아닙니까? 더 이상 관심 가지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하나님의 복과 은혜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행동이 나옵니다. 오벧에돔과 오벧에돔의 가문과 그의 소유에 하나님께서 축복 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는 다윗입니다. 대단하지요. 관심과 흥미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가 이렇게 중요 합니다. 다윗의 관심과 흥미는 항상 하나님의 복 주심과 은혜주심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을 때나 도망 다닐 때에도 항상 다윗은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입니다. 항상 은혜와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꽂혀 있습니다.
1-4. 똑같은 일에 대한 생각과 행동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한번 실패한 일은 똑 같은 같은 상황과 같은 일에는 두 번 다시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부분 두 번 세 번 똑같은 상황과 똑 같은 일을 똑같이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실수는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법궤를 새 수도로 옮기려던 다윗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법궤를 모시고 있던 오벧에돔과 그 집안이 큰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두 번째로 그 일을 시도하는데, 이전의 실패를 똑같이 하지 않습니다. 지난번의 실패를 교훈삼아 하나님의 법에 따라 법궤를 베게하고,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법궤를 운반합니다. 가드에서 예루살렘은 아주 먼 거리는 아니지만, 여섯 걸음에 한 번씩 제사를 드리는 그 길은 힘들고 먼 여정입니다. 여섯 걸음에 한 번씩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지루하고 권태롭고 무모한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궤가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의 다윗의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춤추며 기뻐했습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과 음식을 나누며 축제의 한 마당을 벌였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기업이 있게 하시는 주님입니다. 여기에 제외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업이 있기 위하여 어떻게 했나요?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도 영혼에 대하여 우셨습니다. 마지막 생애의 기둥이었고 소망이었던 외아들을 잃어버리고 나인 성을 나서는 한 여인을 보고 주님은 우셨습니다. 늘 주님을 모셨던 마리아와 마르다의 눈물을 주님께서 친히 닦아 주셨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났던 나사로를 살리시고 다시 기업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베레스 웃사의 참혹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시는 같은 반복을 하지 않는 것이 성숙이고 장점입니다.
2. 삶을 결정하는 조건 중에 하나는 흥미와 관심입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관심 있는 쪽에 마음이 있고 흥미로운 일과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관심의 대상에서 옳고 그릇된 관심은 끝에서 나중에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 흥미와 관심이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바울의 관심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제자들 가운데 수석이 되는 것에 관심과 흥미가 있었습니다. 오늘 다윗은 어떻습니까?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던 다윗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법궤를 모시고 있던 오벧에돔과 그 집안이 큰 은혜와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또 다시 실패했던 일을 합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이전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았습니다. 실패를 교훈삼아 법에 따라 법궤를 어깨에 메도록 하고,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법궤를 운반합니다. 가드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먼 거리는 아니지만 여섯 걸음에 한 번씩 제사를 드리는 그 길은 힘들고 먼 여정 이었습니다. 여섯 걸음에 한 번씩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관심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요? 무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흥미가 없습니다. 무엇에 대한 관심입니까? 법궤를 통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궤가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되니까? 다윗은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또 다시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과 음식을 나누며 축제의 한 마당을 펼쳤습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흥미와 관심 때문입니다. 관심과 흥미가 다윗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석 달간 잘 모셨던 법궤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는 이 말에 다윗은 즉시 법궤를 시온성과 다윗 성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관심이 다윗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백성 중에 유독 한 사람, 미갈만 이 축제에서 배제되었습니다. 미갈은 사울의 딸로서 다윗의 첫째 부인이었습니다. 그녀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자기는 왕후이고 남편은 왕으로서 거기에 걸 맞는 품위와 체면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관심이 지위이며 체면입니다. 그래서 체통을 지키라고 합니다. 규모 없이 행동하는 다윗이 싫었습니다. 심중에나 두면 되었을 일을 남편에게 말하고 핀잔을 주었는데 미갈에게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그 일 후로 다윗은 평생 그녀에게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관심의 차이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사라졌습니다. 아직까지 다윗이 무엇을 중요시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복을 받게 되는 것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이 되어야 하지만 다른 것에 peel이 꽂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웃이 보이지 않고, 할 수 없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모르고, 경우나 예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아무리 커도 지나치지 않고 복 주심에 대한 기대는 하면 할수록 그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삶은 풍요롭고 순조롭고 즐거움의 연속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관심은 몇 마리 안 되는 양을 목양할 때나 사울 왕에게 쫒길 때나, 왕의 지위에 있을 때나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입니다. 겉모습이 어떤 상태이든지, 속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으로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물론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지만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은 다를 때가 있습니다. 렘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이라고요? 평안이며 미래와 소망에 대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과 여러분의 집안과 소유를 생각하십니다. 사46: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아직 이루지 아니한 것 까지 이미 보이셨습니다. 뜻이 바로 서있으면 기뻐하는 그 뜻을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시33;11.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하나님은 뜻은 일정하시고 생각은 대대에 이르도록 변치 않으시고, 하시고자 하는 것을 꼭 이루십니다. 헛되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언제까지요? 사46;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노년에 이르고 백발이 될 때까지 생각하시고 뜻을 세우시고 그 생각과 뜻을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왜요? 지으셨기 때문이고, 지으셨기 때문에 업으시고 지으셨기 때문에 품에 안으십니다. 그래서 잠23;18.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장래가 있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왜요? 렘 33:2-3.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어떻게 보여 주십니까? 욜 2:8-9.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하나님의 영과 이상과 미리 보여 주시는 꿈으로 확증하십니다. 여러분, 내가 소유하고 관리하고 사용하는 것이 모두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한 평가와 말하는 것이 다 나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허상에 속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이 허상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영과 이상과 미리 보여 주시는 꿈입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귀중하고 존귀한 존재의 모습이며 무한 가능한 능력이 계속 주어지고 하나님의 소유를 내가 사용하는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도 행복하고 무엇을 하든지 즐거운 삶이 됩니다. 이것이 다윗의 삶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생각하시고 나를 위하여 뜻을 세우시고 그 뜻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뜻을 세우신 그 뜻의 이루심의 은혜와 복이 여러분 자신과 집안과 소유가운데 항상 부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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