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그림은 플랑드르(네덜란드·벨기에) 화가 프란스 스뉘더스(Frans Snyders; Snijders, 1579~1657)의 작품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주사위놀이하는 원숭이 두 마리(Monkeys at Backgammon)〉이다.
☞ 사회적 불행을 개인적 불행으로 착각시키는 만고의 불행론을 겨눈 의혹; 인간자본론
☞ 한국 눈치 사회생활 심리
☞ 社會論 資料(1) 사회의 양면성과 사회에 소속한 개체들의 사회성
☞ 사회론 자료(2) 늑대 소년 모글리 원숭이 무리 사회 지도자 우두머리 최면 키플링 소설 정글북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사회(社會)”는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 “학생이나 군인, 죄수가 소속한 영역을 벗어난 영역을 이르는 말,”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 “가족, 마을, 조합, 교회, 계급, 국가, 정당, 회사 따위가 사회의 주요 형태이다”고 얼추 풀린다(설명된다).
“사회성(社會性)”은 “사회생활을 하려는 인간의 근본 성질,” “인격이나 성격 분류에 나타나는 특성의 하나로서, 사회에 적응하는 개인의 소질이나 능력, 대인관계의 원만성 따위,” “언어의 소리와 의미의 관계를 사회적으로 약속시키는 것이라서 개인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특성”이라고 휘리릭 풀린다(설명된다).
“사회주의(社會主義)”는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고 생산수단을 사회화하여 자본주의 제도의 사회적·경제적 모순을 극복한 사회제도를 실현하려는 사상이나 그런 운동,”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사회민주주의 따위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 단계,” “마르크스주의와 대립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사상이나 그런 운동”이라고 후다닥 풀린다(설명된다).
“사회적 부적응아(不適應兒)”는 “소속사회의 생활에 순응할 수 없는 아동”이라고 후딱 풀린다(설명된다).
뭐, 어쨌거나, 하여튼, 한국에서는 여태껏 이른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의견이나 명제나 명언이 전래되었고, 게으르고 꾀죄한 죡변은 근래에까지도 이 의견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Aristotle, 서기전384~322)에서 유래한다고 알았다.
그러나 죡변이 비록 게으르고 꾀죄하나마 걸핏하면 의혹하는 얄궂은 버릇을 차마 단속하지 못하여, 있으나마나하게 부실한 눈치라도 눈치랍시고, 졸속하게나 미적미적 쥐어짜서 을밋을밋 기웃거린, 적어도 영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저들에서는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이라는 낱말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죡변의 부실하고 졸속한 눈칫구덩이에서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의견의 정확한 유래나 출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저라고 직지(直指)되어 확정될 수는 없을 성싶다.
그렇다면 이 의견의 타당성은 여기서 일단 차치물론(且置勿論)되더라도, 과연, 도대체, 어디에서 아니면 누구한테서 이 의견이 유래했을까? 이 의문의 정답은 꾀죄하고 부실한 죡변의 몫이 당연히 단연코 아닐망정, 정답의 어렴풋한 실마리 서너 건은 아리까리하게 암시될 수 있을 성싶다. 여기서 “아리까리하게”는 《표준국대사전》에 어엿하게 등재된 형용사 “아리까리하다”의 부사형(副詞形; 어찌꼴)이다.
첫째 실마리는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일본으로 유학한 학생들의 친목회 같은 단체에서 발행된 학술잡지 《태극학보(太極學報)》 제4호(1906년 11월 24일자)에 수록된 논설문에서 발견된다. 서울에서 태어나 1897년에 일본 교토(京都) 부립 제2중학교를 거쳐 1900년에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1906년에는 대한제국 광주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양대경(粱大卿, 1884~1964)의 〈觀國家之現象ㅎ·고 余의 所感(寄書)〉이라는 그 논설문에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글쓰였다.
“昔者에 羅馬哲學者ㄴ·ㄴ 人을 社會的 動物이라 云ㅎ·ㄴ 것은 羅馬時代에 國家의 觀念이 今日갓치 國民腦裏에 充滿치 못ㅎ·야 如斯히 云ㅎ·얏거니와 當今日之現象ㅎ·야ㄴ·ㄴ 人을 社會的 動物이라 云ㅎ·기보담 國家的 動物이라 ㅎ·ㄴ·ㄴ 것이 適當ㅎ·도다.”
“석자에 라마철학자는 인을 사회적 동물이라 운한 것은 라마시대에 국가의 관념이 금일갓치 국민뇌리에 충만치 못하야 여사히 운하얏거니와 당금일지현상하야난 인을 사회적 동물이라 운하기보담 국가적 동물이라 하난 것이 적당하도다.”
“옛날에 로마 철학자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는데, 로마 시대에 국가의 관념이 오늘날처럼 국민의 의식(기억; 생각)에 충만하지 못해서 그렇게 말했거니와 오늘날의 현상이 감안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국가적 동물이라고 말하는 편이 적당하다.”
둘째 실마리는 고대 로마 스토아철학자(Stoa哲學者) 루키우스(루큐스) 안나이우스(안내우스; 안나유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the Younger, 서기전4~서기65)의 《은혜론(친절론; 자선론; 慈善論)(De Beneficiis; On Benefits)》 제7권 제1장 제7절에 기록된 견유철학자(犬儒哲學者; Cynic; 퀴니코스철학자; Kynikos哲學者) 데메트리오스(Demetrios; 데메트리우스; Demetrius the Cynic, ?~?)의 다음과 같은 “조건문”으로 표현된 의견에서 발견된다. 서기37~71년에 로마에서 활동한 데메트리오스는 세네카의 막역한 친구였다.
“만약 (합리적 정신을 가진) 이 사람이 공익에 이바지하도록 태어난 사회적 동물(Sociale animal)이라서 여태껏 세상을 만인의 공생공유지(共生共有地)로 인식하며, 자신의 내밀한 생각들을 신들에게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밝히고, 언제나 마치 공공장소에 거주하듯이 생활하면서 타인들보다 스스로를 더 두려워하듯이 생활했다면, 폭풍우를 벗어나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단단한 땅을 밟고 섰을 것이며, 모든 유익하고 필요한 지식의 최고봉에 올랐을 것이다.”
셋째 실마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저 《정치학(폴리티카; Politika; Politics)》 제1권 제1253a절 제2행에서 말되거나 글쓰인 “인간은 본래(선천적으로 타고난) 정치적 동물(political animal)이다”는 꽤나 유명한 의견이다. 물론 이 의견은 ‘인간의 선천적 사회성’을 정확히 직지(直指)하지 않고 슬며시 에둘러 암시할 따름이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고 단언(短言)해버릇하거나 단언하고파 안달하는 짧게주의(☞ 참조)에 찌든 개체의 언어습성(말버릇+글버릇)을 미적미적하게나마 달래줄 성싶게 보인다.
넷째 실마리는 아래에 인용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저 《정치학》 제1권 제1253a절 제25~33행에서 발견되는데, 특히 “자연은 모든 인간에게 사회적 본능을 심었다(모든 인간은 사회적 본능을 타고난다)”는 의견에서 직지된 인간의 사회본능(社會本能)이, 그러니까 사회(코이노니아; koinonia)를 형성하려는 본능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의견을 파생시켰거나 유래시켰을 확률은 아주 낮지는 않을 것이다. 아래 인용문은, 흥미롭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적 대세순응성(大勢順應性) 비슷한 것을 얼비추는 국가관(國家觀)마저 노출한다.
“개인은 홀로 고립되면 자급자족할 수 없다. 개인의 이런 불능이 바로 ‘국가(폴리스; Polis)는 자연의 소산이므로 개인보다 앞서(먼저) 생겨났다’는 견해를 뒤받치는 증거이다. 그래서 개인은 전체의 부분과 같다. 그러나 사회(코이노니아)에서 살아갈 수 없는 개인이나, 자급자족하여 사회에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는 개인은, 짐승이 아니면 신(神)일 수밖에 없다. 그런 개인은 결코 국가(폴리스)의 부분이 아니다. 자연은 모든 인간에게 사회적 본능(social instinct; 코이노니아를 형성하려는 본능)을 심었지만, 비록 그랬어도 국가(폴리스)를 최초로 건립한 인간은 가장 위대한 시혜자(施惠者; 은인; 恩人)이었다. 왜냐면 완벽한 인간은 최선동물(最善動物)이지만, 법과 정의를 무시하는 인간은 최악동물(最惡動物)이기 때문이다.”
이 네 실마리 중 과연 어느 것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의견의 가장 확실한 유래나 출처이냐는 문제의 정답은 게으르고 꾀죄한 죡변의 몫이 결단코 아니라고 죡변은 거듭 글쓸 따름이다.
(2022. 11.19.09:13.)
아랫그림은 스뉘더스의 1650년작 〈야생멧돼지를 공격하는 사냥개들(Wild Boar Hun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