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제자들 다섯 부부가 모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 중의 한 거사가 제안했습니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절에 다녔지만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불경읽기모임’을 만들어 우리가 직접 경전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다섯 부부 모두가 흔쾌히 동의를 했습니다. 이들은 우선 불교가 제시하는 인간상인 ‘거사’와 ‘부인’을 호칭으로 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청화 거사 - 정여 부인, 만산 거사 - 덕만 부인, 도오 거사 - 승만 부인, 환정 거사 - 공덕 부인, 시당 거사 - 민락 부인의 법명을 소개했습니다. 법명 사용은 불제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인식틀을 확보하는 지름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월 월간 「불광」에서 만나,불경 성립사를 중심으로 주요 경전을 한 종씩 읽어나가기로 했습니다. 먼저 1월에는 근본경전인 『아함경』군을 읽기로 했습니다.
청화 거사 _ 우리가 잘 아는 『숫타니파타』와 『법구경』은 가장 오랜 경전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경전은 ‘잠언’ 혹은 ‘시구’로 된 단편적인 경전이지요. 이와 달리 『아함경』군은 가장 오래된 ‘경전의 무리[群]’입니다. ‘아함(阿含)’은 ‘전(傳, 제불이 전한 교설)’, ‘교(敎, 진리)’, ‘법귀(法歸, 모든 선이 돌아가는 곳)’로 번역되었어요. 그리고 한문으로 번역된 『아함경』군에는 네 부류가 있어요.
정여 부인 _ 네 가지라면 어떤 것이 있나요?
청화 거사 _ 경전의 길이가 긴 『장아함경』, 중간 길이의 『중아함경』, 아주 길지도 중간 길이도 아닌 짧은 길이의 『잡아함경』, 진리의 숫자인 법수를 늘려가며 편집한 『증일아함경』입니다.
덕만 부인 _ 그렇다면 『아함경』군은 ‘편집’의 뜻을 지닌 남방의 『니카야(尼柯耶)』군과는 내용이 같은 것인가요?
청화 거사 _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도에서 네 차례의 경전편집회의인 ‘결집(結集)’을 거쳐 전 세계에 전해졌지요.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졌고, 세 번째 결집 때 비로소 문자화되었습니다. 『니카야』군들은 주로 산스크리트어보다 널리 알려진 현재의 팔리어로 간행되었지요. 때문에 『니카야』군은 남방의 기후와 토양 및 문화와 언어 등에 맞게 번역되었습니다. 북방으로 전해진 『아함경』군은 불타야사(長, 413년), 승가제바(中, 398년), 구나발타라(雜, 433년), 승가제바(增一, 384년) 등과 같이 인도와 서역 등의 승려들에 의해 번역되었지요. 위진 남북조 시대에 번역된 이들 경전들은 과도기의 번역인 격의불교(格義佛敎, 도교와 유교 등 불교 이외의 가르침에 그 의미와 내용을 적용시켜 불교를 이해하는 일)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본의(本義)불교로 자리매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격의불교의 과정에서 주관적인 편집과 착간 및 삭제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아함경』군과 『니카야』군은 ‘상응(수반)’하기는 하지만 ‘동일(일치)’하다고는 할 수 없지요.
승만 부인 _ 『아함경』군에는 어떤 내용이 설해져 있나요?
청화 거사 _ 불교의 핵심 교설로 알려진 ‘중도(中道)’와 ‘연기(緣起)’에 대한 내용이 중심입니다. 이를테면 그물은 벼리(綱)와 망(網)과 목(目)과 추(錘) 등으로 되어 있지요. 불교라는 그물 역시 중도와 연기라는 벼리로부터 중중(重重, 세로)으로 세워지고 무진(無盡, 가로)으로 뻗어갑니다. 그래서 중도와 연기의 벼리를 잡아당기면 불교 전체가 따라오게 됩니다.
공덕 부인 _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 주시지요.
청화 거사 _ 중도는 불설(佛說)의 핵심입니다. 이 중도는 이론과 실천으로 나눠 풀어볼 수 있지요. 이론(사상)적인 측면은 ‘연기설’로 표현되며 대표적인 것은 십이연기입니다. 실천(수행)적인 측면은 ‘불고불락(不苦不樂)’으로 언표되며 대표적인 것은 팔정도이지요. 그런데 이 중도는 사상적으로는 ‘만들어진 것은 변화한다[諸行無常]’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諸法無我]’의 십이연기로 인식됩니다. 수행적으로는 ‘열반은 고요하고 평정하다[涅槃寂靜]’의 팔정도로 실천되어 삼법인으로 귀결되고요.
민락 부인 _ 『아함경』군의 핵심내용을 더 세부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청화 거사 _ 『아함경』군은 불교의 근본교리인 삼법인(三法印)과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연기(十二緣起),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를 중심으로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실제에 적용해 보기로 하지요. 알다시피 연기된 오온은 주어(주부)입니다. 이 오온에 상응하는 무상(無常)-고(苦)-공(空)-비아(非我)는 술어(술부)입니다. 그러니까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지니고 있는 개체적 요소[견고성, 습윤성, 온난성, 유동성]와 그것의 총체적 요소[四大所造色法]로 이루어진 육신인 색(色), 감수 혹은 감각 작용인 수(受), 표상 혹은 지각 작용인 상(想), 의지 혹은 형성 작용인 행(行), 인식 혹은 분별 작용인 식(識)의 임시[假] 화합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이 오온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괴롭고, 실체가 아니어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도오 거사 _ 그렇다면 『아함경』군은 그와 같은 기본 교리를 전체의 경전에 깔고 설해진 경전인가요?
청화 거사 _ 그렇습니다. 『아함경』군은 모든 경전의 기본이 됩니다. 그리고 “오온은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아니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기본 교리는 이후 발전된 모든 교리의 원천이 되지요. 이 때문에 『아함경』의 완성이 대승경전이고, 대승경전의 시작이 『아함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산 거사 _ 원효 대사가 삼승별교(三乘別敎)에 『아함경』군을 설정하여, ‘사성제’와 ‘연기’를 자신의 교리적 근거로 삼았습니다. 이는 『사제경』과 『연기경』이 『아함경』군의 대표적인 경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사제경』과 『연기경』은 어떠한 가르침을 설하고 있습니까?”
청화 거사 _ 사성제는 지금 우리가 괴롭다면 그 괴로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분석해주는 교리입니다. 즉 ‘고통의 모습[苦]’과 ‘고통의 원인[苦習]’을 일컫는 유전(流轉)연기와 ‘고통을 소멸한 모습[苦習滅]’과 ‘고통을 소멸하는 방법[苦習滅道]’을 일컫는 환멸(還滅)연기를 통해 고통에 빠지는 인과와 망상과 집착을 돌이켜 성불을 깨닫는 인과를 밝힌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사성제는 ‘성자가 본 진리[此聖者所見眞理]’입니다. 그래서 『사제경』은 “사성제를 일체의 법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된다고 하느니라.”라고 설하지요.
환정 거사 _ 그러면 『연기경』은 어떠한 내용을 설하고 있습니까?
청화 거사 _ 『연기경』은 고통 발생의 연기[流轉緣起]와 고통 소멸의 연기[還滅緣起]를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으로 설명해 주고 있지요. 『연기경』은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사라진다.”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연생법(緣生法)과 연멸법(緣滅法)의 의미에 대해 의식[識]이 명(名)과 색(色)을 말미암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갈대의 비유’를 원용하지요. “비유하면 마치 세 개의 갈대가 빈 땅에 서려면 끊임없이 서로 의지해야 설 수 있는 것과 같이, 의식[識]이 개념[名]과 존재[色]를 인연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끊임없이 서로 의지해야 자라날 수 있다.”
‘성자가 본 진리’이자 ‘범부가 갈 진리’인 사성제와 연기법에 대해 설하고 있는 『아함경』군은 불교의 기반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함경』군의 하층 기단부로부터 『반야심경』과 『금강경』, 『법화경』, 『해심밀경』 등의 상층 기단부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탑신부에 『유마경』과 『승만경』, 『능가경』, 『능엄경』 등이 있고, 그 위에 놓인 상륜부의 『화엄경』과 『육조단경』, 『천수경』 등이 이어집니다. 이처럼 『아함경』군은 불탑의 하층 기단부이자 사찰 공간의 일주문에 해당합니다. 때문에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 잘 사는 이와 못 사는 이, 이 종교와 저 종교, 이 지역과 저 지역을 넘어 대립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사실의 자각입니다. 『아함경』군은 문제에 대한 자각[苦]-진단[集]-치유[滅]-처방[道]의 공식을 제시하는 ‘사성제의 실천’과 문제의 비실체성에 대한 통찰인 ‘연기법의 이론’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고통의 원인인 ‘고정 관념’이나 ‘잘못된 정보’로부터 벗어날 것을 역설해 줍니다. 아무리 좋은 보석이 있더라도 우리 불자들의 의식에 꿰어내지 못하면 무용지물입니다. ‘불경(佛經)’에서 ‘불’은 ‘진리에 눈을 뜬 분’입니다. ‘경’은 ‘그 분의 말씀’입니다. 즉 꽃을 꿰어 화환을 만드는 것처럼 온갖 이치를 꿰어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경은 눈을 뜬 분의 말씀이자 이치입니다. 그 이치의 길은 깊고 그윽합니다. 그 길을 따라가지 않고는 삶의 깊이와 넓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해 동안 이 ‘경전의 길’과 ‘지혜의 길’을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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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섭 _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동 대학원 불교학과 석·박사 과정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계간지 「문학 사학 철학」의 편집주간을 맡고 있으며,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불학사』 ,『한국불교사』, 『원효, 한국사상의 새벽』, 『원효탐색』, 『불교경전의 수사학적 표현』, 『우리 불학의 길』,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생태학』, 『불교와 생명』 등 다수가 있다. 1998~99년 월간 「문학과 창작」 2회 추천 완료(신인상)하였으며 시집으로는 『몸이라는 화두』, 『흐르는 물의 선정』, 『황금똥에 대한 삼매』가 있다. |
첫댓글 나무 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