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육선교
조선선교를 개척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교육선교”였습니다. 교육선교 정책은 영어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교육하고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하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초기에 초등학교(primary school)를 설립하여 기초적인 학문을 교육하고 그 다음 중등학교(secondary school)와 대학교육(higher education work) 기관을 차례로 설립하여 기독교 교육과 복음사역에 추진동력을 갖게 하였습니다. 1886년, 언더우드 선교사는 서울에 “언더우드학당”(경신학교)을 설립하고, 아펜젤러 선교사는 “배재학당”을 설립하였습니다. 1887년, 스크랜톤의 “이화학당”과 A. J. 엘러스의 “정신여학당”이 설립되는 등 선교사들의 교육선교는 초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북장로교와 감리교는 교육선교 정책을 조기에 정착하기 위해 “장로교감리교연합공회”를 조직하고 장로교선교사 베어드(백아덕)와 감리교 선교사 베커가 “평양 숭실대학”(평양 유니온 칼리지,Union Christian College)과 숭실중학을 설립하였습니다. 1914년, 베어드 선교사는 서울에 “조선예수교대학”을 설립하고 그후 연희동으로 이전을 하면서 “연희전문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기초로 하는 서양교육학교는 의료선교와 함께 조선인의 마음을 열어가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학교는 복음적 목적과 함께 민주와 평등의 사회구현, 도덕과 문화적인 새로운 경향, 서양과학을 통한 발전과 성장 등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가장 큰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1883년 10월, 조선 조정은 통역관 양성을 목적으로 뭴렌도르프가 설립한 “육영공원”을 영국인 핼리팍스가 책임지도록 하였습니다. 1885년 3월, 미국에 교육법무관 3명을 파견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귀족자녀 35명의 소년을 육영공원 학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조지 길모어(Gilmore,G.W.), 벙커, 호머 헐버트(H. B. Helbert) 등 미국 뉴욕 유니온신학교 출신의 3명이 파견된 육영공원은 1886년 9월이후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1886년 5월31일, 서울 정동 스크랜톤(Scranton,M.F.) 여사의 사랑방에서 1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초,중,고등과정의 여성학교는 1887년 10월22일, 명성황후가 황실을 상징하는 순결한 배꽃과 여성의 순결성과 명랑을 상징하는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이름을 하사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교육은 남성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여성은 독자적인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남성의 보조기능 정도로 이해되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남성독점의 시대를 바라본 스크랜톤 여사는 남녀평등이라는 상식적인 가치와 기독교적인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김모씨라는 정부고위 관리의 첩 1명을 교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887년, 학생이 7명으로 증가하였고, 1888년에는 18명, 1893년에는 30명으로 늘어나는 등 이화학당은 상류계층으로부터 서민자녀에 이르기 까지 공평한 교육이 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1885년 8월3일, 아펜젤러(Appenzeller, H.G.) 선교사는 서울 정동 자신의 사랑방에서 이겸라, 고영필 등 두 명의 학생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였습니다. 배재학당은 1886년 6월8일,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공인을 받아 한국 기독교 학교의 효시가 되었으며 배재학당이라는 이름도 고종 황제가 인재를 배양하는 학당이라는 의미로 하사하였습니다. 배재학당은 기독교지도자 양성과 근대국가의 인재배양을 목적으로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을 교육하였습니다. “욕위대자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이라는 배재학당훈은 마태복음 20장26~28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크게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봉사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1886년 5월11일, 언더우드 선교사는 서울 정동 자신의 사랑방에서 빈곤계층의 고아를 대상으로 하는 “언더우드학당”을 설립하였습니다. 그후 예수교학당(1891년)과 민로아학당(1893년)을 거쳐 1905년에는 경신학교로 개명하고 성경과 교회사와 미국사 등의 교과목을 교육하였습니다. 초기 25명의 고아들로 시작한 언더우드학당은 한문, 성경, 아침경건회를 통하여 기독교 세대로 성장하게 하였으며, 김규식과 안창호 등이 이 학교의 출신이었습니다. 1915년 4월, 경신학교 대학부를 설립한 언더우드는 2년후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연세대학교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그후 호주 장로교회 “멕켄지” 선교사가 부산에 일신여학교(1892년)를 설립하고, 북감리교회 “존스 벤젤”(Margaret J. Bengel)여사가 인천에 영화여학교(1892년)와 1894년, 북장로교회 “베어드”(Baird,W.M.) 선교사가 평양에 숭실학교와 박기양 등이 광성학교를 각각 설립하였습니다. 1898년, 재령에 명신학교(북장로교)가 설립되었고, 1899년, 평양에 정의여학교(북감리교), 1900년, 전주에 신흥학교(남장로교), 1901년, 남장로교회가 군산에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를 설립하고, 1902년, 목포에 정명여학교와 전주에 기전여학교를 각각 설립하였습니다. 그 외에 1903년, 북장로교회가 평양에 숭의여학교와 대구에 신명여학교를 설립하였고, 캐나다 장로교가 함흥에 영생학교를 설립하는 등 전국에 37개의 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첫댓글 한국교회사...
많은것을 배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