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격(character)과 성품(personality) >
성격(性格)과 성품(性品), 이 두 단어를 딱 부러지게 구분하기 힘드나
대체로 구분해보건대 영어의 경우 성격은 character, 성품은 personality 쪽에 가깝다.
인성에 관한 것이기에 더러 혼용하는 수도 있고,
모호한 데도 있으나 대체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격이라 할 때는 personality을 쓴다.
그래서 이중인격을 dual personality라 한다.
혹은 인격장애는 personality disorder라 한다. 인격은 성품 쪽에 가깝다.
그리고 character의 경우 성격에 가까운데,
have a good character ― 성격이 좋다.
have a strong character ― 기질(성격)이 강하다.
A girl with character scares men ― 성깔(성격) 있는 여자는
남자를 겁먹게 한다.
그리고 연극에 있어서, 그 역은 그에게 맞지 않는다고 할 때,
‘역’을 character라고 하며, 이때 의미는 성격이다.
성격(性格)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기질적 행동특성이다.
성격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유한 성질로서 자신을 나타내려는 이미지이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며 소심한 사람,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사람,
빠르고 급한 사람, 까다롭고, 깔끔하고, 빈틈없는 사람,
화끈한 사람 등과 같이 성격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데 나타나는
삶의 방식, 일의 추진 방식 등에 나타나는 특성을 말한다.
비교적 성격은 ‘좋다 나쁘다’가 아닌 다름과 다양성으로 봐야한다.
급한 성격도 있고, 느긋한 성격도 있으나 이것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잘못됐다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성격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따지지 않는다.
성격은 타고난 것이고, 나만의 고유한 특성 또는 기질이므로
변화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
모세의 경우도 평생 그 성격을 지니고 살았다.
그는 애굽인이 자기의 동족을 때리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해
그 애굽인을 죽였고(출 2:11-12), 또 그는 시내산에서 내려오다가
사람들이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숭배하는 것을 보고 의분에
사로잡혀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십계명 돌판을 던져 박살냈다(출 32:15-19).
모세는 죽을 때까지 그 성격을 고치지 못한 채로 살다가
그토록 들어가기를 원하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에 비해 성품(性品)은 사람 됨됨이를 말하는 것으로서 인격이요,
인성이요, 인간성이다. 성품은 도덕적 행위와 더불어 덕을 갖춘 인격을 의미한다.
성품은 어떤 사람이 어떤 가치를 중시하고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는지를 나타낸다. 즉, 성품은 도덕적 차원에서 접근을 한다.
성품은 더 좋은 생각, 더 좋은 감정, 더 좋은 행동을 선택하도록 학습하고
훈련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하고 완성돼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품을 나타내는 말로서 언행일치, 용기, 비겁, 정의, 인내,
순수, 의리, 성실, 정직, 겸손, 온화, 개방적 태도, 절제, 정의 등의
용어가 적용된다.
그리고 착한 성품인지 나쁜 성품인지 올바른 성품인지 비열한 성품인지
도덕적 평가를 하고,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말한다.
성품은 그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와 품격이라 할 수 있다.
때로는 역경과 고난을 통해 더욱 고상하고 아름답게 변화된 상태를 말하고,
더 높은 가치와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타인을 무시하고 무조건 자기만 옳다거나, 말과 행동이 다르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약자를 괴롭히거나, 사기나 도박 절도를 하거나,
화가 나면 욕설과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좋지 않은 성품이다.
흔히 이중인격자라는 말은 성품에 해당한다.
성품이 좋은 사람들은 남을 이용하지 않는다.
좀 뒤쳐진 것 같아도 거짓 없이 성실하게 산다. 인정을 받지 않아도 겸손하게 산다.
무엇인가 되기 위해 애쓰거나 안 됐다고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항상 겸손하게 주어진 일에 감사하며 산다. 이 사회는 성품이 좋은 리더를 존중한다.
성품이 좋은 이웃과 함깨 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셩격 대로 살지 말고 올바른 성품을 지닌 자로 살아야 한다.
성격은 고치기 힘드나 성품은 노력에 따라 개선해 나갈 수 있다.
성격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성품은 태어난 후 길러지고 가꾸어진 품성이다.
성격은 내가 주인인 감정이지만 성품은 교양에 따라 움직인다.
성격은 인간의 1차적 특성인데 비해
성품은 인간의 2차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격은 타고난 성질의 측면이 강하고, 성품은 태어난 후의
환경과 성장과정 등의 영향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질의 측면이 강하다.
성격엔 유전적인 요인이 많다고 한다면,
성품은 환경적인 요인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성품은 가꾸기 나름이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 화를 이기지 못하고
타인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에서 ―
사소한 것에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것은 성격이고,
타인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는 것은 성품의 문제이다.
성격은 외적인 것인 것인데 비해 성품은 다분히 내적이다.
성격은 웬만큼 객관화 할 수 있으나 성품은 너무 개인적인 거라
뭐라 딱 잘라 말하기 곤란하다. 성품이 좋으면 속이 꽉 찬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나 성격이 나쁜 사람은 그의 내면이 텅 비어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세익스피어는 타고난 성격은 누구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격은 제2의 운명이라 생각했다. 주어진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좋은 사과를 많이 맺게 할 수는 있으나 사과나무에 포도가
열리게 할 수는 없다. 성격은 깔린 철로와 같아서 인간은 그 궤도를
벗어날 수가 없다. 햄릿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성품도 나쁘고 성격도 거칠어서 욕도 잘하고 걸핏하면 화내는,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닮아 간다.
파장이 같아지는 것이다. 파장의 주파수가 같아지는 것이다.
자신은 그걸 배우고 싶지 않아도 욕을 그냥 맛깔나게 입에 딱 붙게 하는 사람 옆에 가서
며칠만 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런 똑같은 욕이 툭툭 튀어 나온다.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 파장에 공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파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나은 도반과 함께 가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성품은 타고난 성격이나 성질 위에 교육과 훈련을 통해 덕(德)을 쌓은 상태를 가리킨다.
예컨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교양 있는 어른들의 그늘 아래
좋은 가정교육을 받고 자랄 경우 대개 좋은 성품의 인간으로 성장한다.
좋은 가문에 태어나서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고,
또 스스로 수양을 쌓아서 가지게 된 품성이 그 사람의 인격이고 성품이다.
그리고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성품이 비교적 온화하고 소박하다.
반면에 도시 뒷골목에서, 그것도 파괴된 가정의 편모나 편부 아래에서
제대로 가정교육도 받지 못하고 내팽개치듯 하는 환경에서 자라
성질이 삐뚤어져서 나쁜 짓만 하다가 보니 좋은 성품의 인간으로
자라기 어렵고 성품이 거칠어질 개연성이 많다.
그렇다면 성품이 좋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성품은 후천적이고 가꾸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성품이 전적으로 후천적인 것만은 아니고
성품에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품성도 있어서 가꾼다는 것도
여간 정진하지 않고는 개선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꾸준히 정진해야 한다.
같은 종자 씨라고 하더라도 어떤 땅에 뿌려졌는가에 따라서
품질이나 수확량에 큰 차이가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음이라는 밭에
성품이라는 씨를 뿌리고 잘 가꾸어야만 좋은 성품이 자랄 수 있다.
그래야만 그 잘 자란 성품의 나무 밑에서 자식들이나 주변 이들이 편하게 기대고 쉴 수 있을 것이다.
요즘처럼 혼란하고 복잡한 때일수록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뿌려진 성품의 씨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얼마나 잘 가꾸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수행이 필요하다.
가을이 오면 여름의 더위가 꺾이듯 젊은 날의 생각이 나이 들면서 변화가 오게 된다.
이와 같이 세상만물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서 변해가는 것이 이치이다.
그런데 이 이치를 따르지 않는 유일한 것이 하나가 있다. 인간의 마음이다.
유일하게 인간의 마음은 멈출 수도 있고 역행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라는 말로 마음을 강조했고
기독교에서는 사랑과 자유의지로 표현했다.
그래서 바꾸기 어려운 성격은 놔두고 성품을 바꿔야 한다.
마음은 수양에 의해 배양하지 않으면 멈추어버리거나 후퇴한다.
종종 고지식하거나 옹고집의 나이든 노인이 되는가 하면,
반대로 스스로가 나이가 들면서 변해 원만해지기도 한다.
변하지 않고 멈추어있다면 고지식하고 옹고집장이가 될 가능성이 높고,
나이 들수록 외할머니 같은 넉넉하고 자애로운 성품을 가꿀 수도 있다.
따라서 지휘관은 성격도 좋아야 하지만 성품이 뒷받침돼야 성공할 수 있다.
좋은 성격은 단기적으로는 성공에 도움이 되지만
좋은 성품이 함께 해야 오래 갈 수 있다.
성품은 본인의 노력에 따라 고칠 수도 있지만 성격은 타고난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고치기는 쉽지 않고 하지만 수행을 하면 어느 정도 순화시킬 수 있다.
그런 성격조차도 어느 정도 수정시키는 것이 수행의 힘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성품은 위와 같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품성을 의미하는 성품과는 다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성품이란 성(性)을 말하는 것으로
개별존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본래면목(本來面目)ㆍ자성청정(自性淸淨),
나아가서 불성(佛性)을 뜻한다.
이는 누구나 가지고 있으나 중생의 경우, 번뇌가 덮여 있어
스스로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특히 나쁜 성격의 사람은 번뇌가 많아서
더욱 자기의 근본적인 좋은 부분, ― 불성이 깊숙이 감추어져서 여간
수행을 하지 않고는 드러내기 힘들다. 성불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부처님 당시 데바닷다(Devadatta)는 성격도 나쁘지만 성품도 좋지 않아서
부처님을 여러 가지고 괴롭혔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도
그런 인간의 성품을 여의고 불성을 밝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불자들의 정진을 기대한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