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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럽의 역사 : 16-18장 발제
- 앨버트 S. 린드먼 (삼천리, 2017)
16장 1920년대 자유주의의 딜레마들
- 19세기 말경 자유시장 경제와 유럽 자유민주주의의 힘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취약성과 딜레마 또한 명백해짐. 미국 지원을 받은 프랑
스와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 세력이 커지고 권위주의 체제들이 모두 붕괴했다는 사실은 자유로운 제도의 우월성을 확실하게 입증해 주는 듯했다. 그럼에도 전쟁 말기 시점에 자유민주주의의 승리가 무조건적이거나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 192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지는 경제 회복의 시기였지만, 전쟁으로 입은 손실과 국제적 경제 관계의 혼란은 쉽게 극복되지 못했다. 전쟁에서 미국이 입은 손해는 적었으나, 세계적 리더십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떠맡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 지속 가능한 평화를 확보하려는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은 1920년대에 목격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 실패. 유럽 경제를 건전한 토대 위에 올려놓지 못한 무능함 또한 결정적 실패. 대공황의 원인은 4년이 넘도록 지속된 전쟁의 피해와 종전 후 좀 더 계몽적이고 멀리 내다보는 방식으로 경제적 쟁점들을 처리하지 못한 무능함과 긴밀하게 연관.
- 독일 봉쇄와 전쟁 배상금 : 파리강화회의의 주된 관심은 독일 봉쇄. 독일에 전쟁 배상금을 부과하고 미래의 독일 약화시키려는 결정이 프랑스 지도자들에게 강하게 나타남. 독일 육군 수 10만 이하로 제한, 해군 함대 축소, 잠수함, 전차, 군용기 금지. 1320억 금마르크라는 전쟁 배상금(1914년 독일 국부의 2배)
- 미국 리더십의 딜레마: 미국은 배상금 심의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대개는 독일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 차지도 않았다. 1918년 중간선거에 윌슨은 상하 양원을 공화당에 빼앗겼다. 당시 공화당 지도자들은 분쟁에 휘말리게 하는 동맹에 적대적 입장을 고수. 윌슨은 상원 지도자들과 타협을 못함. 1918-1920년에 미국인들이 조금이라도 세계적 리더십을 맡을 준비가 되었는지 의문. 미국은 다른 여러 나라에서 나타난 심각하게 반민주주의적인 정치 전통들을 바꿀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도 못했거니와 그럴 마음도 없었다.
- 반동적 경향과 여성 문제: 1920년대 독일의 정치 발전은 역설적. 세속적 좌파(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 좌파)는 오랫동안 여성 투표권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나, 일단 여성 선거권이 1919년 헌법에 포함된 뒤, 여성들은 가톨릭중앙당과 정치적 온건파들, 그리고 전통적인 권위적 인물들에게 남성들보다 더 많은 표를 몰아줌. 에스파냐의 독재자 미레라가 여성들이 세속적인 좌파적 대의에 이끌리는 경향이 덜하다고 믿었기에 1920년대 말에 고려되고 있던 새로운 헌법에서 여성 투표권 선호. 네덜란드에서 여성들은 1917년에 투표권을 획득, 영국은 1918년에, 프랑스는 1944년, 이탈리아는 1946년, 스위스는 1971, 미국은 1920년.
- 베르사유조약의 충격: 많은 유럽인에게 특히 민주주의적 좌파 계열의 유럽인들에게, 1919년 이후 미국이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은 것은 일종의 배신이자 잇따른 20여 년 동안 유럽의 민주주의적 좌파의 실패를 불러온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 자유민주주의는 예전부터 기능하던 의회민주주의를 갖춘 지역들, 주로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 생존. 전쟁 이전에 의회 체제는 독일과 이탈리아 에스파냐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파시즘과 나치즘이 각각 1922년과 1933년에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권좌에 입성했고, 에스파냐에서는 192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군사독재가 지배하다가 1938년 에스파냐 내전에서 프랑코의 승리가 뒤따랐다. 전쟁 이전에 자유민주주의의 경험이 보잘 것 없는 지역에서는 곧 권위주의 체제가 전쟁 직후에 수립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을 대체했다.
- 주식시장 붕괴와 대공황 : 미국에서 공화당은 주식시장이 붕괴하는 시점에 집권 세력이었으므로 그 사태에 대해 비난받음.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정치적 우파나 좌파 모두 시장 붕괴와 그에 잇따른 공황에 효과적 대처 방안을 몰랐고 세계경제에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경제협정도 외교협정도 모두 관련된 나라들이 얼마만큼 상호 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했고, 다만 민족 주권에 완고하게 집착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기 파괴적인 결과만을 불러왔다.
상대적으로 낙관적이던 1920년대가 저물고 심각한 어려움의 1930년대가 시작되었다. 1930년대 초에 자유민주주의적 지배는 거의 도처에서 심각하게 불신 당함. 유럽의 주요 경제들은 직간접적으로 미국의 투자에 의존했고, 미국 투자자들이 유럽으로부터 투자 자금을 회수했을 때 많은 유럽 경제들은 곤두박질쳤다. 1932년 무렵 독일과 미국의 산업생산은 50%하락. 실업자도 독일에서 600만, 미국에서는 1200만 명에 달함. 또 급진적 우파와 좌파의 정당들이 새로운 호소력을 발휘했다.
17장 스탈린주의 러시아와 국제 공산주의
- 1921년부터 1928년까지 신경제정책(NEP) 시기는 소비에트러시아에서 상대적 평온한 시기로 경제 회복되어 전쟁 이전 생산성 도달. 온화한 기후 조건과 실용적 입장에서 시장 인센티브 허용한데 따른 것.
- 1924년 레닌이 사망하고, 볼셰비키 지배의 모순과 딜레마는 가중.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스탈린은 혁명적 변화를 개시하여 나라의 경제적 토대를 재편성하고 피의 숙청을 통해 그동안의 유력 간부층 대다수를 제거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함.
- 나치즘의 호소력은 히틀러의 자살 이후에는 소진된 반면, 공산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동유럽과 아시아, 쿠바로 확산. 러시아와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가운데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였다. 특히 1928년 초 러시아에서 집산화와 5개년계획이라는 제2의 혁명이 개시되고, 나아가 1929년 말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각기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화신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미래 목소리를 대표하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 권력투쟁과 스탈린의 승리: 레닌은 자신과 다른 당내 인사들에게 폭력, 위협이 아니라 지성과 개성의 힘으로 당을 지배했다. 그럼에도 당내의 비폭력적 지배는 당이 소비에트 주민에 대해 행사한 독재권과 날카로운 대조, 그런 독재 권력을 통해 폭력이 노동자계급에게도 거침없이 행사된 것. 그런 폭력은 당 지도자들이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 있다는 확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혁명’을 수호하는 것이 정당한 목적이라는 확신에 바탕.
스탈린은 당 서기로서 자기 지위와 소비에트의 다른 요직들 이용 자신에 충성하는 측근 세력을 형성. 그런 활동은 레닌에 견줄 만한 지적 기량이 아니라 직무에 대한 일상적 통제를 통해 수행. 일당독재 국가에서 그런 방식은 비할 데 없는 중요성을 갖는 것. 스탈린 등장 초기에, 그가 온건하고 화해적이며 충실한 레닌주의자의 태도를 취했다. 그런 태도는 당시 레닌의 계승자로서 가장 유력한 트로츠키의 이미지와 대조. 트로츠키는 지적 명민함을 인정받고 혁명과 내전 과정에서 수행한 결정적인 역할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다른 당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의 경멸감을 숨기지 못하고 오만함으로 악명. 다양한 당내 투표로 보건대 스탈린의 통제권은 1927년 무렵에 확장.
러시아 바깥 공산주의 정당들의 스탈린화 과정은 초창기 당을 지도한 사람들보다 하위 계급 출신에다 교육 수준이나 지적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다른 계급 출신의 지도자들을 고위직으로 등용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1920년대 러시아 안에서 예전에는 부르주아적이고 세계시민적인 지식인들이 지배했던 당 고위직에 작업대의 노동자들을 등용하려는 경향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유대인 출신이 줄어들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자신들은 종족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반유대임 감정이 일반 주민 사이에 광범위하게 유포된 상황에서 당이 대중성을 강화하려고 하는 찰나에 트로츠키 같은 유대인이 레닌의 계승자로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 부담이 큰일인지 알고 있었다. 부상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불안은 1880년대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정치적 형태를 띰.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지배가 지속될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유대-볼셰비즘’이 나머지 유럽에 확산될 것이 분명해 보였을 때 특히 더 그러했다. 윈스턴 처칠은 1919년 유대인들이 “모든 전복적 운동의 주모자이고... 자신들의 머리카락으로 러시아인들을 칭칭 감아서... 그 거대한 제국에서 이론의 여지없는 주인이 되었다”라고 썼다.
그 혁명은 인종주의적 증오로부터 인류를 해방하는 방향으로 내디딘 것이라고 선포되었지만, 혁명적 유대인들에 대한 심해지는 공포가 ‘소비에트 실험’에 대한 경이로움과 경합하거나 압도했다는 점에서 실제 혁명의 결과는 달랐다. 인종적 공포와 환상은 점점 더 계급 정체성과 우파적 정치 신념과 긴밀하게 뒤얽히게 되었다.
- 1928년 이후 스탈린은 그전에 자신이 옹호했던 경로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어 버렸다. 국민을 완전히 ‘좌익’ 방향으로 이끌어 갔는데, 이는 일찍이 트로츠키가 옹호한 것보다도 더 극단적으로 농민층을 쥐어짜는 것이었다.
콜호즈(집단 농장)는 추상적 경제적 의미에서 소규모 비효율적 단위들을 결합해 규모의 경제와 현대식 농업기술(대규모 기계류와 비료, 살충제)의 이용을 용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조치라고 볼 수도. 그러나 이런 경제 이론은 초기 단계에서는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극빈농을 포함 거의 모든 농민이 격렬하게 저항. 많은 농민들이 식량을 내다 버리고 설비와 헛간을 불태우며 꼴 보기 싫은 인민위원들에게 가축을 인계하느니 차라리 도살하는 편을 택했다. 전체 농업 생산은 크게 추락했고, 1927년의 가축 수는 1950년대에 가서야 회복.
농민층을 쥐어짜는 무자비한 조치들은 놀랍게도 도시 공업 부분의 급속한 성장을 떠받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효과적이기도 했다. 도시 부문과 공업과 인구 성장을 위한 대규모 투자에 필요한 자본을 농촌에서 뽑아낸다는 이 외관상 불가능한 위업은, 노예제나 다름없는 새로운 집단농장을 구축함으로써 성취. 탈굴라크화와 강제 집산화, 대량 처형, 고의적인 기아 등의 결과로 대략 8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
지배계급으로 알려진 프롤레타리아트는 새로운 공장에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다 주말과 휴일의 ‘자발적’ 노동에 시달렸다. 물질적인 견지에서 하층 신분들 중에서 그나마 형편이 나은 사람들에게도 당시는 내핍의 시대였다.
1920년대의 생산관계는 전반적으로 사회주의라고 볼 수 없었다(또는 네프의 ‘소부르주아 자본주의’로 미끌어졌다). 그렇다면 1928년부터 1934년까지의 ‘제2의 혁명’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주의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제2의 혁명이 궁극적으로 목표를 성취했다는 사실은 시대를 망라하여 가장 놀라운 발전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이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성공이라는 말의 의미를 남용하는 것이다. 계몽사상의 휴머니즘에 기초한 사회주의 목표의 공식적인 성공에는 잔혹함과 끔찍한 인간적 고통, 대량학살이 뒤따랐다. 보통 사람들은 성공이 그런 종류의 성공이라면 제발 성공을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 1930년대 나머지 기간 동안 다른 많은 부문에서 꾸준히 상당한 수익이 났다. 그럼에도 그런 수익은 몇 가지 의미에서 신뢰하기 힘든 것. 그래도 대략 20년 만에 소비에트러시아는 총체적인 군사적 패배와 국토를 초토화한 내전, 거의 총체적인 경제적 파국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수준의 산업생산력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생산력 수준에서 볼 때 미국과 독일의 바로 다음 순번을 차지하게 되었다.
- 스탈린은 과거에는 계획적으로 정적들에게 모욕을 주고 출당시킨 반면, 1934년 이후에는 범죄적 음모를 비난하고 사형이나 장기형을 선고.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다른 사람들을 지목하는 고발장들이 신문에 정기적으로 게재. 일련의 전시성 재판들이 개최되어, 수많은 옛 볼셰비키들을 포함하여 저명한 당 지도자들이 말도 안 되는 고발에 대해 자백해야 했다. ‘반혁명적 범죄’와 다양한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하는 비난들이 당과 하층에도 만연하여, 공개 비난과 공개 반박, 대량 체포의 파노라마를 보여주었다. 아마 2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수감되어 거대한 노예 노동 인구의 일부가 되었다. 이 대중적 히스테리, 혁명이 스스로를 집어삼키는 이 극단적 사건을 추동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 피의 숙청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은, 이 숙청이 소비에트 국가와 사회에 누적된 압력을 때마침 낮춰 주는 효과를 냈다는 점에서 모종의 합리성이 있다 주장. 지배 엘리트들 사이에 갈등을 해소하고 신분상승 기회도 제공. 현대 전체주의 국가들의 특수한 역동성을 파악한 사람들은 선거가 무의미하고 견고한 관료제가 지배력을 행사하게 될 때 정규적인 숙청이 필요해졌다고 주장해 왔다. 숙청이 없다면 그런 나라는 정체되고 말 것이라는 얘기.
다른 사람들은 숙청을 단순히 공산주의 절대 권력 체계의 고유의 악으로, 영국 역사가 존 액턴 경의 공리를 빌리면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설명.
- 1914년 이전에 사회혁명의 개념에 우호적이던 많은 사람들이 목적과 수단의 딜레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 폭력이 사회 부정의와 인간적 고통을 이어 온 수세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짧은 폭력의 시기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조차도 의도된 짧은 폭력의 시기가 통제를 벗어나 오래 지속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자문해야. 게다가 사회정의마저 실현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18장 파시즘과 나치즘의 발흥 : 1919~1939
-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그 기원이 민주주의적 좌파의 실패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공산주의는 극좌파의 산물이고 파시즘은 극우파의 산물. 다만 공산주의가 파시즘의 호소력을 높이는 데 중요한 요소.
볼셰비키에게서 영감을 받은 각국 토착 극좌파의 강령에 대한 기존의 불안감은 증폭되어, 무솔리니는 집권 10년 동안(1922-1932) 이탈리아 바깥의 보수주의자들, 특히 처칠 같은 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히틀러도 처음에는 독일 안팎의 여러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었다. 급진적 우파를 강화시킨 요인들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1929년 말에 시작된 대공황이었다.
최초에 파시즘에 매력을 느낀 다수의 사람들이 이상주의자였다는 점이 흔히 간과된다. 그들은 볼셰비즘이야말로 근본적인 도덕적 악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았기에 파시즘의 난폭한 방법들을 눈감아 주는 성향이 있었다. 그들의 눈에 볼셰비즘은 스스로 엘리트를 자임하는 자들이 테러리즘과 무신론, 전제적 지배를 공공연하게 받아들여 기독교적 도덕성과 계몽사상의 가치 모두와 단절한 운동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수백만 명의 일반 시민들도 그런 소요에서 자신들의 물질적 소유뿐 아니라 개인적 안전과 종교적 믿음에 대한 위협을 느꼈다.
그 무렵 이탈리아어에서 파쇼(fascio)는 집단(group)이나 단체(band)를 의미. 또한 이 용어는 고대 로마의 파스케스, 즉 로마의 최고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과 관련. 파시스트라는 말에는 반개인주의(집단주의)와 권위주의라는 이중의 메시지. 파시즘은 좌파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는 모호한 성격의 반기득권 운동으로부터 점점 더 우파적 대의들과 연관되고 부유한 후원자들의 지지를 받는 운동으로 진화해 나갔다. 이탈리아 파시즘 찬미자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에서 전쟁이전의 반실증주의와 포퓰리즘적인 경향들에 기반.
나치즘, 호소력의 원천: 나치 시대는 종종 범죄자들이 근대 민족에 대한 통제권을 얼마간 획득했던 정상이 아닌 시대로 묘사. 그러나 나치 시대를 비정상으로 묘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비정상적인 ‘그들’과 정상적인 ‘우리’ 사이의 편리한 구분을 설정하는 것은 진지하고 개방적인 분석을 방해.
실패한 자유민주주의와 실패한 자본주의의 강력한 상징으로서 대공황은, 나치당이 독일에서 가장 큰 정당으로 변모하는데 결정적인 계기. 그런 경제적 붕괴가 없었다면, 히틀러와 그의 운동은 현대사에서 각주로만 남았을 게 거의 틀림없다. 1929년 가을부터 1932년 초까지 점점 혼동스러워진 시기에 나치당은 선거 과정에서 처음으로 투표하는 젊은 유권자들을 대거 끌어들이며 지지율이 2%에서 37%까지 치솟았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비합리적이고 유사종교적인 믿음으로 기능, 통상 적대적 집단들을 결집시키고 이 집단들이 이해관계만을 맹목적으로 만듦. 연구자들은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얼마만큼 독일 주민을 한데 뭉치게 하는 정서적 결집의 요인으로 기능했는지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던져왔다. 많은 증거들이 반유대주의가 독일 주민들을 통합한 만큼 분열시키기도 했음을 가르키고 있다. 전쟁 이전의 정치적 반유대주의는 독일에서 주목할 만한 실패를 경험했다. 나치당원들 대부분에게 당원 가입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반유대주의 보다는 경제 문제나 민족주의적인 다른 쟁점들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권좌의 히틀러: 1932년 선거에서 나치는 지지율이 떨어지는 추세. 그의 성공은 용두사미가 될 것으로 보임. 1933년 1월에 총리직 제의받자 히틀러는 수락. 히틀러는 총리로 선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총리는 대중이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회에서 정당 연합으로 구성된 다수파를 배경으로 하여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었다. 당시에는 이 엉뚱한 오스트리아 출신 하사관과 준범법자나 다름없는 측근들이 통치에 부적합하다는 점이 폭로될 것이라는 자신만만한 예측도 많았다. 그러나 현실은 상당히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히틀러는 총리로 지명 직후 몇 달 만에 무솔리니가 몇 년 동안 걸쳐 했던 일을 해치웠다. 혁명적 좌파 척결과 다른 정당들의 제거, 독재적인 유일 정당 국가수립 등이 히틀러가 단기간에 해치운 일들이었다. 나치의 획일화 목표는 때때로 나치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점진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진행된 과정이었다.
나치의 준군사 조직인 이른바 ‘갈색셔츠단’ 또는 ‘돌격대’(SA, Sturmabteilungen)에게 불만이 비등, 획일화는 그들에 눈에 너무 느리고 타협적 태도로 보였다. 지도자 에른스트 룀은 직업적인 ‘제국군’을 갈색셔츠단의 ‘국민군’에 편입하고 종속시켜야 한다고 선동하기 시작. 제국군은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10만 이내로 유지한 반면, 1934년 무렵 SA는 100만 명이 넘었다. 구식 군대와 신식 군대 사이에 공공연한 전쟁이 발발할 조짐이 보였다. 히틀러는 구식 군대의 장성들이 에른스트 룀의 요구를 용납할 리가 없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공공연히 언명했듯이 대통령직을 인수하기 위해 군부의 지지를 받으려면 갈색셔츠단을 확실히 통제해야 했다. 그는 룀과 SA가 폭력적인 권력 장악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경호대로 출범했으나 제3제국에서 급속히 주요 권력이 될 엘리트 부대 즉 검은 셔츠를 착용한 친위대(SS)에 의존했다. 1934년 6월 30일 밤을 기점으로 하여 SS부대들이 룀을 비롯해 100여 명을 학살했다. 히틀러는 한때 역전의 용사들로 알려진 동지들을 무참하게 숙청함으로써 엄청난 일을 해치웠다. 그는 수많은 인사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는데, 그들 중에는 제국군 지도자와,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비롯해 사업계와 금융계, 종교계의 저명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히틀러의 가차 없는 행동이 정당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찬사였는데, 그 행동은 독일에 드리워져 있던 내전의 싹을 잘라 버렸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히틀러는 자신의 강철 같은 의지로 위기의 시대를 돌파해 나가는 정치가로 치장했고, 그래서 독일을 구원하고 소유권을 보호하며 거리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좌파와 우파 모두의 급진파를 척결하는, 불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인물로 자처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1935년 9월에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되는 모습도 이과 같은 정신 상태에서 바라보는 경향. 이 법은 유대인들의 시민적 평등권을 박탈하고 유대인과 아리아 인종인 독일인 사이의 성관계를 불법화함으로써 나치 독일에서 반유대주의 강령을 고조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럼에도 많은 독일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일부 유대인들조차도 이 법이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를 심화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가라앉히기 위해 고안된 히틀러 특유의 정치가다운 행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
1934년 6월부터 1938년 3월까지의 시기는 히틀러와 나치 체제의 정점, 즉 위세가 점차 높아지고 경제회복이 뚜렷해지던 황금기. 1936년 여름 나치 독일은 성대한 팡파르와 함께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했다. 여행객들은 올림픽 경기를 관람하고 돌아와 그 새로운 체제를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산업화된 세계의 나머지가 대공황의 수렁에 빠지고 정치적으로 균열되며 파업과 가두 폭력으로 몸살을 앓는 동안, 나치 독일은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그 민중들은 사랑하는 퓌러를 앞세워 하나로 단합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