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덜 나다
벽제하다(辟除~)라는 말이 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 구종(驅從) 별배(別陪)가 잡인의 통행을 금하다’라는 뜻이다. 『번역 성종실록』에, “대간이 길을 갈 때에는 좌우에서 벽제하고 조관 3품 이하가 모두 피하는데, 이는 대간을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구종(驅從)은 벼슬아치를 모시고 따라다니던 하인을 가리키고, 별배(別陪)는 관서의 특정 관원에게 배속되어 관원의 집에서 부리던 사령인데, 이들은 다 관원의 사노비처럼 취급되기도 한 사람들이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사복시(司僕寺)라는 관청이 있었다. 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다. 이 사복시에서 일하는 구종과 별배들을 ‘거덜’이라 불렀다. 한자로 취음하여 거달(巨達)이라 쓰기도 하였다. 이들은 평소에는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 보지만, 상관의 행차가 있으면 행렬의 맨 앞에서 잡인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길을 틔우는 역할을 했다. ‘사또 납신다. 물러 서거라.’라고 외치면 모두가 엎드려 조아렸다. 곧 벽제를 하였던 것이다. 이에 거덜은 자신이 무슨 높은 사람인 양하면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였다. 거덜이 타던 말을 거덜마라 하였는데, 걸을 때에 몸을 몹시 흔드는 말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거덜이 허세를 부리며 몸을 흔들어대는 데서 연유한 말이다.
이 거덜에서 ‘거덜 나다 / 거덜 내다’라는 말이 생겼고, ‘거들거리다 / 거들대다’, ‘거드륵거리다 / 거드륵대다’란 말도 생겨났다. 거드럭거리다/거드럭대다는 거만스럽게 잘난 체하며 자꾸 버릇없이 굴다라는 뜻이다. 거덜은 상관이 행차할 때 거드럭거리며 벽제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거덜거덜이란 부사나 거덜거덜하다란 형용사도 여기서 생긴 말이다. 거덜거덜은 살림이나 사업 따위가 금방 거덜 날 듯 위태위태한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빚더미에 눌리어 살림이 거덜거덜하다와 같이 쓰인다. 하인의 신분인데도 자신의 처지를 잊고 상관의 뒷심을 믿고 거들거리니 어찌 뒤탈이 없겠는가?
‘거덜 나다 / 거덜 내다’도 재산이나 살림 같은 것이 여지없이 허물어지거나 업어지다, 옷, 신 같은 것이 다 닳아 떨어지다, 하려던 일이 여지없이 결딴이 나다의 뜻이다. 자기 푼수에 맞지 않거나 격에 어울리지 않게 무리하게 되면, 의도하는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거덜나게 마련이다.
춘추시대 제(齊)나라에는 안영(晏嬰)이라는 유명한 정승이 있었다. 그는 키가 아주 작았지만 덕과 지혜를 겸비하고 임금에게 직언을 하여 모든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안영의 수레를 모는 마부는 키가 크고 미남이었지만 교양이 없고 거만해서 정승의 수레를 모는 것을 큰 출세나 한 것처럼 으스대었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남편이 정승을 마차에 태우고 거들먹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보고 몹시 민망하고 창피하였다. 그날 밤 퇴근하여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는 조용하면서도 정색을 하여 충고했다.
“당신이 모시는 정승께서는 정승이면서도 누구에게나 겸손하여 모든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데, 당신은 겨우 정승의 말을 모는 마부의 신분이면서도 겸손할 줄 모르고 거드름만 한껏 피우니 이보다 더한 어리석음이 어디 있습니까?”
이 같은 아내의 매서운 질책에 남편은 할 말이 없었다. 그 후로 그의 태도는 완전히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이런 사연으로 마부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진 것을 안 안영은 그를 쓸 만한 인물이라 여기고 후에 그를 대부로 기용했다.
안영의 마부도 거드럭거린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태도를 지켜본 부인이 내조한 덕분에, 마부의 신분에 맞는 행동으로 바꾸어 거드름을 씻어내었다. 그 덕분에 그는 마침내 대부로 승진하였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해야 나라가 번성하고 평화로워진다는 것은 고금의 이치다.
첫댓글 귀한글 감사합니다. 이처럼 귀한 글 올리시는 선생님 존경합니다.
주 선생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매양 이렇게 졸고에 대해서 힘을 실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추위에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