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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싱잉커플즈 (서울부부합창단) 원문보기 글쓴이: 주형동
여행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에게 참고가 되거나 즐거움이 되실 수 있도록 여행중 모은 글을 올려 놓았습니다.
1. 여행기간 : 2014. 8. 25 - 10. 10 (47일)
2. 경로: 프랑스 - 바욘-생장피드포르-산티아고-피니스테라-묵시아(약 900킬로)
3. 비용: 항공료, 알베르게숙식및 1인 기준 400만원 이내( 순전히 본인 기준임, 간혹 호텔과 고급식사등 훨씬 늘어남)
4.사진및 준비물등 여행에 필요한 자세한것은 따로 올림
이렇게 혼자서 걷고 또 걷고...
해발 800미터 지점, 변화무쌍한 날씨에 쾌청하여 오늘은 행운입니다.
오후 오수시간이면 바아에 나와 있는 사람들...
1부
이 길은 동행의 길이다. 홀로 산천을 벗 삼아 걷기도하고 때론 길이 동무가 되어 주고 부부와 친구가 그리고 순례자와 동행이 되어 걷는 길.
“산티아고 카미노를 왜 해요?” 하고 물어온다. 이를테면 산에 오르는 사람에게 왜 산을 오르냐고 묻는 것처럼. 십 인 십 색의 답이 되돌아 올 것이다. 카미노(산티아고 길)중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들려오는 대답은 모두가 달랐다. 종교적 신념에서부터 무작정 길을 나선 사람들까지 모두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이 길을 찾는 것을 보았다. 나도 그러했다. 책을 통해서 준비를 하여 걷게 되었지만 마치고 난 후에는 무언가 달라져 있을지 모를 내 자신을 기대해 보게 된다.
긴 여정 수많은 이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경험하고 그리고 몸과 마음을 부딪치면서 스며드는 소중한 자각이 있었기에 산티아고는 단순한 길이 아닌, 길을 통해 인간과 인생을 배우며 돌아보는 자리일지 모른다.
이 글은 산티아고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적 신체적인 체험에 앞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 가감 없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써 내려 간 것이기에 꾸밈없는 나의 거울이다.
산티아고 카미노의 시작
4년 전, 한 권의 책은 나를 여행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중견작가인 그녀는 동행과 함께 어느 날 갑자기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향해 길을 떠난다. 앞뒤 가리지 않고 절박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재정리하는 마음으로 이 길을 선택하였다. 그동안 쌓았던 사회적 지위와 하던 일을 모두 내려놓고서. 책을 읽는 동안 잠시도 눈 돌릴 틈이 없었다.
그녀는 초행길에다 기나긴 여정이기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비장한 각오로 유서를 남겨두고 산티아고로 향했다. 작고한 김동리 선생의 부인인 서영은 작가의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라는 책이다. 노란색 표지의 성지 순례기를 작가의 눈으로 써 놓은 이 책은 기행문이라기보다는 마치 한 권의 소설과 같았다.
비갠 오후 앞산의 연무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듯 내 가슴으로 밀려오는 게 있었다. 나도 한 번 떠나야겠다. 직장을 은퇴하면 곧 바로 떠나리라 아내와 함께 약속을 했다. 평소 여행을 해 온 우리는 희망과 꿈이라는 뭉게구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준비를 하였다.
대략 900km에 달하는 40여 일 간의 걷기 길을 위해서 직장인으로서는 어려운 일이기에 후 일을 기약하고 한 걸음씩 내 딛기에 들어갔다.
국내 걷기 여행을 하였다.
휴가 때면 제주도 올레 길을 비롯하여 지리산 둘레 길과 전국의 옛길을 찾아 다녔다. 틈나는 대로 배낭을 메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걷다가 해가지면 숙소에 찾아들고 다음 날 다시 길을 떠났다.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쉬어가도록 반겨주는 정자와 길가의 돌들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 좋아서 떠났다, 나를 생각하고 뒤돌아보며 아내와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얘기를 늘어놓는 것이 좋았다.
기억에 남는 길 중에 동해안의 700km의 해파랑 길과 대관령의 옛길이 있다. 그중 영덕지역의 블루로드는 걷는 내내 바닷가로 길을 안내하며 환상적인 자연의 아름다움,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시원스러움과 함께 지역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며 풍성함을 안겨주었다.
이 길을 승용차를 이용하여 빠른 시간에 쉽게 다녀 갈 수도 있겠지만 천천히 걸음을 내딛으며 우리 국토의 아름다운 매력을 느림의 미학으로써 푹 빠지게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대관령 옛길은 늦가을에 갔다가 길이 하도 마음에 들어 겨울이 되자 다시 찾아 눈길을 더듬어 흠뻑 눈 속에 빠져 걸었던 기억이 새롭다.
4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부부 합창 동호회가 있다. 싱잉커플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우리 합창단이다. 어느 날 회원 한 분이 나에게로 와서 산티아고를 갈 계획이라는 놀랄만한 발표를 하는 것이다. 평소에 여행을 즐기는 나를 잘 알기에 얘기해준 것이지만 여행에 관심 있는 몇몇 사람들도 놀랐었다. 조용한 성격에 말이 없던 그가 그런 계획을 세워 산티아고를 향해 길을 떠난다하니 대단한 용기에 감탄하며 부러움이 앞섰다. 친구와 둘이서 갈 계획이라 했다.
그런데 그는 사정이 생겨 후에 따로 일정을 단축해서 다녀왔지만 먼저 다녀온 만큼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물론 여러 책자를 통해 나름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 경험자의 조언 또한 필요한 터였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대략 8-9개의 루트로서 북쪽 해안길, 프랑스길, 은의 길, 등 그 중 이용해야 할 길을 결정하고 거기에 맞춰 일정을 짜서 교통편이나 숙박 등을 알아 보아야한다.
카미노에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은 프랑스 길이 대표적이며.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하여 국경마을 생장피드포르를 거쳐 피레네산맥을 넘어가는 길이다.
해발 1400미터의 피레네 산맥을 넘는 동안 내 옆 사람들은 “행복하다”를 연발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는 처음 본다며 좋아하는데 사실 그러하다. 이 프랑스 길 전 구간에서 일번지라해도 과언이 아닐 이 피레네 구간은 고생한 만큼 보상은 그 이상이다. 스페인 순례길의 소개 책자에도 추천 일번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종종 이구간의 경치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눈 비가오거나 안개가 끼면 놓칠 수밖에 없으니 행운이 그에게서 비켜간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가을은 비가 적고 수확기를 맞은 황금들판과 경치를 보기에는 좋은 계절이다.
꿈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온다면 생각만 하여도 벅찬 감정으로 기쁨을 주체하기 힘들 것이다. 지금 바로 그런 마음이다.
길을 걸으며 수없이 많이 나누었던 인사는 ‘부엔 카미노’와 ‘올라’ 였다.
그냥 지나치면서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그리고 자전거로 카미노를 하는 여행자도 ‘부엔 카미노’ 였다.
‘부엔 카미노’ 이 말은 ‘당신이 걷는 길에 행운을’, 또는 ‘좋은 여행이 되길’ 등의 뜻이다. 어느 산골마을의 촌노 한 분이 얼굴도 모르는 우리에게 하는 인사말 또한 한결같은 이 말들이었다.
그것도 밝은 미소와 진심이 담긴 표정과 좋은 여행이 되길 바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말의 뜻이 대충 그러려니 짐작만 하였지만 나중에 의미를 알고난 후 진심으로 축복해주는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들의 무표정한 모습이 그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순례자들 간에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일과가 되었다. 굳어있는 표정이 펴져서 환히 웃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었다.
삼 개월 전, 프랑스까지 왕복 항공권 구입을 해 놓으니 그제서야 비로소 여행의 현실에 직면하였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저 언젠가는 떠나겠지 때가 되면 가겠거니 막연히 뜬구름만 잡고 있다가 항공권 예약을 마치고 파리의 기차표를 구입하고 산티아고에서 다시 파리로 그리고 그곳 민박집까지 모든 예약을 마치고 나니 이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제일 중요한 것은 건강이었다. 건강에는 자신이 있지만 큰일을 목전에 두고 탈이 생겨서 포기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친구는 해외 여행준비를 끝내고서 앞산에 바람을 쐬러 갔다가 돌부리에 넘어져 발목을 다쳤다. 깁스를 하고 보니 여행을 부득이 포기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
우리도 출발을 앞두고 좋아하는 테니스와 걷기나들이도 무척 조심하여 관리에 들어갔다. 물론 별일 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언어 문제였다. 어려운 스페인어는 그들과 소통을 시도하다가 안통하면 얘기를 안 하면 되지 별거 있겠나 하고 대범하게 생각해 보지만 걱정이 된다. 하지만 영어 또한 다를 바 없어 이제와서 다른 변통이 없으니 부딪쳐보자는 마음으로 걱정을 덜기로 하였다.
홀몸으로 세계를 누빈 한비야는 이렇게 말했다. “언어가 문제라면 걱정 마세요. 세계적인 공통언어 있잖아요. 바디 랭귀지. 그거면 모두 통해요. 여행은 떠나고 보세요.”라는 평범한 말이 생각난다.
프랑스 민박집에 며칠 머물렀을 때이다. 예약을 해 놓았기에 지하철을 이용해 약도를 보며 찾아갔더니 풍채 좋은 주인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룸으로 안내를 받아서 짐을 풀었다.
아내가 주인여자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는 주인은 아주머니가 아니라 아가씨라며 일러주었다. 행여 나중에 호칭을 하면서 아주머니라 부르지 않도록 말이다. 그녀는 프랑스에 유학을 와서 대학원까지 마치고 어찌 하다보니 숙박업을 하게 되었노라 푸념을 늘어놓아 알게 되었다.
이곳에는 이미 한국 여행객들이 많이 숙박을 하고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모두가 낯선 외국인이라서 긴 얘기들을 나누기 힘들었지만 한국인들을 보니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대부분 혼자 또는 부부가 유럽을 두루 돌아다니는 이들이었다. 첫날부터 대면하자마자 궁금한 정보를 알아보기에 바빴다.
산티아고를 가기위해 숨을 고르며 잠시 이곳에 들린 아가씨 두 명을 만났다. 우리는 걷기를 마치고 오는 중이라 했더니 놀라움과 함께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들은 방송에서 스페인에 유행병 에볼라가 발생해 걱정이라며 망설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다시 물어보았다. 그런데 산티아고로 출발을 결정하였다고 다부지게 얘기를 한다.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참 두려움이 없는 용기를 가진 아가씨들이다.
길 위에 서다.
전날 배낭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점검을 해 보았지만 무게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알베르게에서 입을 반바지 하나를 몇 번씩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내려놓았다. 윗옷 한 벌도 뺐다. 가이드북은 너무 두꺼워 절반만 가지고 갔다. 반바지와 반팔을 긴 옷으로 다시 바꿔 넣고 우리나라와 비슷한 위도의 날씨이지만 만약을 위해 상의 땀복은 고심 끝에 넣기로 했다. 옷과 침낭 우의는 필수이고 세면도구 약품 또한 필요한 것이기에 챙겨서 저울에 올려보니 8kg이다.
잔잔한 날씨에 아침을 맞았다. 5시에 기상하여 다시 한 번 점검을 했다. 평소에도 잠을 놓치면 이루지 못하는 아내가 잠을 설친 모양이다. 저녁에 딸이 다녀간 뒤 먼 길 떠날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 같다.
46일간의 외출,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내는 현관문 점검을 못했다며 부랴부랴 다시 올라와서 확인을 한다. 공항버스를 간신히 탔다. 첫날부터 쫒김이 시작되었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 밤늦도록 일하고 퇴근하는 길에 아침 해장술과 안주로 기운을 채우는 이들, 우리처럼 여행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로 하루는 시작되고 있다.
가을장마의 신호인지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작은 빗줄기가 찾아와 제법 날씨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며 선선하다. 이미 프랑스와 스페인은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게 나서 두꺼운 옷으로 바꿔 넣었지만 가봐야 알 것 같다.
7시간의 시차와 12시간동안의 비행, 오후 2시30분경, 프랑스 드골 공항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모두가 가을 옷차림이다. 심지어 겨울 외투를 입고 있는 이들도 보인다. 한국과는 판이한 날씨에 이곳 계절의 변화를 실감케 해준다. 여긴 벌써 으스스한 가을인가? 혼란스럽다.
수속을 밟고 가져간 배낭을 찾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우리 짐은 보기에도 우습다. 스틱 2벌이 배낭 양쪽으로 뾰쪽 나와 비닐로 싸고 테잎으로 칭칭 감아놓아서 모양새가 우습게 보인다. 테잎과 비닐을 벗기고 풀어서 보기좋게 배낭을 메고 출구를 빠져나왔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길을 찾아 나설 차례이다.
야간열차를 예매했기에 프랑스에서는 오스테리츠 역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탄다. 복잡하고 거미줄처럼 얽힌 이곳 지하철은 주의를 소홀히 했다가는 헤매기 딱 안성맞춤이다. 묻고 물어 오스테리츠 역에 도착했다.
날씨는 더욱 을씨년스럽고 시내구경을 해보려는데 비가 그쳐주질 않는다. 바욘으로 떠나는 순례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열차 시각에 맞춰 속속 하나 둘씩 늘어난다. 저쪽 구석에는 배낭과 함께 노부부가 즐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의미있는 웃음을 보낸다. 따라서 함께 웃어주었다.
대합실이 비좁아 밖으로 나왔다. 나는 추위를 느껴 옷을 꺼내었다. 그런데 저쪽에 건장한 50대로 보이는 외국인이 반바지에 반팔티를 입고 당당하게 크나큰 배낭을 메고 나타난다. 그도 역시 카미노를 하기위해 의욕적인 모습이 결의에 차 있는 표정이다.
산티아고에 가는 패션도 여러 가지라서 나를 잠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역이 규모가 크고 이동 손님들이 많아 사람들로 붐빈다. 오래된 건물 역사의 천정에서 떨어진 빗물에 앉아있기가 어려워 다시 대합실로 비집고 들어왔다. 화장실을 이용하려하니 돈을 받고 있었다. 우리나라 역과는 뒤떨어진 대중 화장실 문화에 프랑스의 첫인상은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닌 것 같다.
이곳에서 앞으로 일주일 가까이 우리와 함께 할 한국인 부부를 처음으로 만났다. 비슷한 연배이기에 더욱 가까운 동행이 되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더니 싱긋 웃으며..
“서울 문래동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성남에서 왔어요”
“며칠 일정이신데요?”
그는 “39일간 걷고 남은 일정은 바르셀로나로 갈 계획입니다.”
이 또한 비슷한 일정이다. 이 부부는 함께 길을 걷고자 계획하면서 부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 부인은 호주에서 자녀와 15년째 거주하면서 영주권까지 획득하여 국적을 양쪽 모두 가지고 있었다. 남편은 한국에서 개인 사업을 하며 기러기 아빠로 떨어져 살았는데 그가 어느 날 전립선암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부인의 지극한 내조가 있어 다행히도 완치판정을 받고 이렇게 여행에 나섰다.
사업은 믿을만한 직원에게 맡기고 훌훌 털고 나섰다. 세상을 한 발짝 물러나서 여유로움을 가지려고 아내와 함께한 여행이다. 부인은 많이 걸으면 족적근막염으로 발바닥이 아파와 걷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약까지 준비하여 걷고 있었다. 산티아고 길이 뭔지 이런 어려운 악조건에도 즐거움을 가지고 온 부부도 있다.
한국에서 예약한 열차는 6인실 3층 침대 칸, 비좁고 오르내리기도 불편하였지만 위층에서 그런대로 잠을 잤다. 깨어보니 바욘 역이 가까워 온다. 꽤 깊숙이 국경가까이 온 것 같다. 열차는 파리에서 11시간을 밤새 달렸다.
이곳의 낮선 경치가 우리와는 확연히 달라서 느낌이 새로워 보인다. 낮은 야산과 임야가 펼쳐지면서 산속을 달린다. 옥수수 밭과 어쩌다 보이는 띄엄띄엄 몇 채 씩 농가 주택이 스쳐 지나간다. 한가로운 농촌 풍경은 낮은 담장너머로 둘러싸여진 마당과 소형 승용차도 눈에 들어온다. 잘 다듬어지고 정돈된 농가의 모습이 보기에도 좋다.
바욘에서 생장피드포르로 가는 1량짜리 전동차는 야간열차가 도착하는 아침시간에 맞추어 운행이 되었다. 딱 1량이지만 2층 구조로서 겉모습이 매우 날렵하고 귀엽게게 생겼다. 열차표를 다시 구입했다. 이제야 비로소 카미노의 출발지로 가나 했더니 또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단다.
산티아고 가려다 날 새는구나 싶다. 버스로 1시간가량을 더 들어갔다.
전동차에서 내린 우리는 버스를 타면서 이런 광경은 처음이다. 주민 한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카미노를 하기위한 이들이다. 등에 배낭을 메고서 대기하고 있다가 버스에 짐을 실었다. 사람보다 짐이 많아 보이고 버스의 좌석은 빈자리가 없이 찼다. 짐과 사람이 꽉 차서 버스가 터질 것 같았다.
버스는 산속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고 길은 끝이 안 보인다. 도로 옆으로 나란히 철로 하나가 보인다. 지금은 이용하지 않은 오래된 철로인데 방향이 생장으로 가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이곳 부근까지 운행이 된 듯싶다. 아마도 철도의 효용가치가 떨어져서 그냥 폐 철로로 놓아두고 도로가 이를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프랑스 중심에서 국경에 이르는 생장 피드포르는 이런 과정을 거쳐 비로소 카미노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쉽지 않은 여정을 겪고 있지만 기대감속에 만원 버스의 순례자들은 그저 차창을 바라보며 조용히 묵상하듯 앉아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생장피드포르에서 하룻밤
드디어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순례자 사무실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어디에 사무실이 있는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앞선 두 사람이 다부지게 걸어가기에 무작정 따라갔다. 나머지도 줄줄이 따라 나선다. 읍 정도 크기인 이곳에서 어디인들 못 찾을까 싶었는데 쉽지가 않다. 한참을 따라가니 어느 사무실로 들어간다. 여행자 안내소였다.
이들은 그곳에서 위치를 묻고 다시 나와 언덕길을 향해 숨차게 올랐다. 멀찌감치 골목길에 순례자 사무실이 보인다. 아직 문이 열려있지 않았지만 비로소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는 순서대로 배낭을 일렬로 세웠다. 문래동 부부와 우리는 그늘에 앉아 쉬면서 땀을 닦았다.
크레덴시알(카미노 여행자 여권임)을 받기위한 수속을 무사히 마친 후 마지막으로 조가비를 받았다. 구석 한 쪽에 조가비를 쌓아놓고 하나씩 가져가란다. 배낭 뒤에 달고 걷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드디어 그걸 달고서 별의 길을 걷게 되다니. ‘이 길을 서두르지 말고 한 뜸 한 뜸 정성스럽게 걸어보자.’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피레네 산맥을 넘기 위해서는 몸의 피로와 시차적응 겸 하루를 쉬면 좋다. 바쁜 일정에 숨차게 도착하자마자 당일에 넘기에는 무리가 따르므로. 이곳에서 8km 쯤 가면 오리손 산장이 있어 거기서 묵는다면 최선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루를 묵고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오리손 산장의 예약이 안 되길 잘했다 싶었다. 오후에 도착하여 순례자 사무실에서 크레덴시알을 받고 오리손으로 향했다면 후회막급 이었을 것이다. 첫 마을 이곳 생장을 돌아볼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다. 오리손 예약을 해놓은 문래동 부부는 벌써 출발을 서두르고 있었다.
숙소를 정하고 시내구경을 나섰다. 국경마을이라선지 성터가 우리의 남한산성처럼 외곽으로 빙 둘러싸여 있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성곽을 따라 돌면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우선 성곽의 높은 곳에서 위치를 파악하기위해 걸음을 옮겼다.
깊은 산중에 이렇게 아름다운 산하가 펼쳐져있다. 계곡에서 모아진 맑디맑은 물이 하천을 이루어 시가지를 가로질러 흐른다. 책자를 들고서 그 하천과 눈에 익은 다리를 비교해 보았다. 이쯤에서 찍었을까 신기하게도 사진작가가 찍었음직한 자리에서 나도 키메라를 들이대 보았다. 틀림없다. 그리고 그 다리 곁에 오랜 성당이 서있다. 돌로 지어진 이 성당은 적어도 몇 백 년은 됨직한 곳으로 마침 저녁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우리의 고택처럼 고색창연한 성당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카미노를 하면서 이런 성당을 수도 없이 만날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카미노의 첫걸음을 옮길 곳을 찾기 위해 지나가는 여자 관광객을 붙잡고 물었다. “내일 피레네 산맥을 넘으려면 길이 어디 일까요?”
자기도 잘 모른다며 친절하게도 나를 데리고 옆 가게 주인에게 가더니 자세히 물어 알려준다. 놀랍게도 바로 서있는 이 자리에서 내일 아침 출발하면 된단다. 바로 성당 앞이었다. 산티아고를 출발하는 지점은 이 오랜 성당 앞에서 다리를 건너 이른 아침 출발하면 되는 것이다. 개선문처럼 아치형 돌문이 마치 이곳을 지나가라는 듯 버티고 서있다. 올려다보니 돌로 조각된 한 늙은 수도사가 지팡이와 함께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이렇게 시내 구경을 하며 첫날이 지나갔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길···
전날 숙소의 주인여자가 6시 30분까지 아침식사를 마치고 7시에 출발해야 한다고 얘기를 한다. 아침이 되자 10여명의 카미노들이 이미 식사를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출발을 할까? . 동이 트고 나면 길도 보이고 좋을 텐데 ”
알고 보니 27킬로에 달하는 첫 구간 중 피레네산맥을 넘기 위해서는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는 힘든 코스이기 때문이었다.
이른 새벽에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첫 날부터 비속을 걸어야할지 마음이 심란한데 한쪽에서는 판쵸를 입고 떠날 채비를 한다. 삼삼오오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밖이 어두워서 시진이 나올까! 나도 한 컷을 부탁하여 찍었다. 오늘 출발하는 수가 매우 많아서 짐작하기 어려웠다. 비슷한 시간대에 각 알베르게에서 쏟아져 나오는 순례자들은 마치 행진을 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비는 그치고 날씨가 풀려간다. 안개비만 약간씩 내려 안심이 되었다. 생장은 산 아래 마을에 해당한다. 완만한 경사가 시작 되면서 산속을 향해 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계획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기에 세운게 아닌가? 오리손 산장에서 하루를 묵을 계획이었으나 예약이 어려워 5km떨어진 온또에서 머물기로 했다. 하지만 오늘 여러 사람들이 피레네를 넘는다하니 그런 한가한 여유는 사라지고 말았다. 하루 코스인데다 뒤떨어지지 않고 함께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온또 산장을 취소하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동이 터오자 넓은 길과 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길을 걷으며 뒤를 내려다보면 낮은 산이 환히 보여 가슴이 트였다. 걷는 동안 길 양쪽으로 마을과 한적한 산촌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점점 깊숙이 산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쪽에서 웅성거리며 낯익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나라사람들이 뒤따라 온 것 같다. 두 번째로 만나는 한국인 단체 팀이다. 프랑스에서 만난 부부와 그리고 이 분들이다.
서로가 반가운 마음에 어디에서 왔는지 물으며 가까워졌다. 서울과 광주에서 온 분들인데 수도원의 수사님이 팀을 인솔하고 왔다. 남자2 여자5명이다. 성당 순례자들이다.
“단체로 오셨군요.”
“그렇습니다.”
“아마도 자기들처럼 종교적인 목적으로 오는 단체 팀은 드물 겁니다.” 이렇게 자부심을 가지고 얘기한다. 안 보아서 모르겠지만 단체 팀은 드문가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자5명이 3-40대가 아닌 60세 중 후반의 나이라는 점이다. 젊은이도 힘든 900km의 대장정을 이분들이 단체로 어떻게 해낼지 은근히 걱정 된다. 하지만 하나같이 이 길을 완주해야한다는 결의에 찬 표정만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비장했다.
“그런데 고향이 어디세요?” 아내의 물음이다.
“광준디라이.”
“광주요? 광주어디신데요?”
“광산구에서 왔지라우. 우리는 광산구 운남 성당 자매들이지라.”
아내의 낯빛이 바뀌며 반가운 마음에 말투까지 싹 바뀐다.
“내 친정이 광산인디 그 곳에서 왔다고라?
”광산에서 왔당께!“ 아주머니들도 반가운 모양이다.
“광산 어디간디?”
“송정리 명동이 내 친정인디요.”
객지에서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가운 법, 고향 사람을 만났으니 일행은 금새 가족같은 분위기로 화기애애해졌다. 모두가 언니뻘이니 이제 말도 대충 얼버무리며 같이 한다.
수사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걸었다.
“처음에는 네 명이서 준비를 시작 했지요.”
“그런데 왜 일곱 명이 되었나요?”
“나중에 서울 수도원에서 갑자기 신청이 들어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애로사항이 많아요. 준비 안 된 자매님들도 있고 해서.”
“자매님들의 나이도 많고요.” 걱정스런 말투다.
수사님은 이곳에 오기위해 해남 땅끝 마을에서 걷기 훈련에 들어갔다.
그런데 열흘 동안을 단련한다며 값싼 운동화를 신고 걸었다가 발톱이 모두 빠져서 무척 고생을 했다. 나중에야 등산화를 신고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자신의 무지를 탓했다고 한다. 이제 시작인데 아직도 발이 정상으로 회복이 안 되어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어찌되었던 이제는 나섰으니 중도포기는 할 수 없지요. 모든 성당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어요.” 하며 웃고 계신다.
온또 산장에 이르렀다. 벌써 5km를 올라온 셈이다.
해발 500미터에는 신기하게도 내리던 안개비가 그치고 운무로 덮인 바다에서 산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오는 것을 반기는 듯 높고 낮은 산들이 서로 얼굴을 내 보여주었다. 이곳에 이른 순례자들은 사진 촬영에 바빴다. 나도 연신 셔터를 눌렀다. 탄성을 터트리며 환호를 하며 계속해서 오리손 산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두 시간 여를 걷는 동안 마땅히 쉴 곳이 없던 차에 산장이 나타났다. 이곳에서는 아침도 먹고 따뜻한 차도 마시며 쉬어가면 제격이다. 크레덴시알을 꺼내 처음으로 여기를 지났다는 확인 도장을 받았다.
생장에서 약 8km떨어진 이 산장은 높은 피레네를 넘기 위한 전초지로 여기서 하루를 숙박하고 떠난다면 비교적 쉽게 산을 넘을 수 있기에 인기가 있고 매혹적인 경치와 자연 속에서 하룻밤을 묵는 것 또한 좋아서 예약이 쉽지가 않다. 나도 예약을 놓쳤다.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잠시 숨을 돌렸다. 앞서간 성당 팀은 출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안개가 모두 걷혔다. 전형적인 끝 여름 날씨이다. 볕은 땡볕이되 바람이 솔솔 불어와서 한결 걷기가 좋다. 목장지대가 나타났다. 800미터가 넘는 이곳에서부터 정상 부근까지 목장이 시작된다.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대관령의 야산처럼 이같이 높은 지형에 끝없이 목장은 펼쳐져 산이 수평선처럼 하늘과 맞닿는다. 마치 수채화의 물감을 뿌려놓은 듯 아름답다.
산은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고 민둥산처럼 곱디고운 민머리이다. “저기 지평선위에 뭐가 고물고물 서있지” 하고 바라보았더니 하늘아래 양떼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데 풀을 뜯으며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덩치가 큼직한 놈들에게 방울을 달아놓아 절간에 풍경이 울리듯 목에 달아놓은 방울이 딸랑거리고 어떤 놈은 깡통에 돌을 달아 놓았는지 소리에 따라 수 백 마리의 양떼들이 물결처럼 몰려다니고 있었다. 하늘의 구름이 이따금씩 그늘을 만들어 풀밭이 구름 모양을 해놓기도 한다. 드넓은 목장이 도화지를 펼쳐놓듯 한 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저절로 탄성을 지른다. 곱고도 곱다, 아름답다, 여기에 오게 되어 행복하다. 우리는 이 말을 입에다 달고 들으며 걸었다.
까마득히 길 끄트머리에 고개가 보였다. 한없이 툭 트인 오르막길을 걷다 고개가 보여서 아마 정상에 왔나 보다 하고 가보면 새로운 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왼쪽으로 돌아 한 고개, 오른쪽으로 돌아서 또 한 고개, 피레네 정상에 이르는 고개 길은 굽이굽이 11고개라 했다. 올라오면서 한 순례자 아주머니가 꼼꼼히 헤아려보았다며 말한다..
이렇게 완만한 경사진 고갯길을 걸어 1400미터 높이를 오른다. 하지만 이곳이 힘들구나 생각 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새롭게 나타나는 경치를 구경하다 다리 아픈 줄을 모르고 정상 가까이 오르기 때문이다. 성모자상이 길 왼쪽에 서있는데 순례자들이 이를 알록달록하게 치장해놓아 이채롭게 보였다. 쾌청한 날씨에 서서히 더워지기 시작해 가지고 간 물도 바닥을 보였다. 한군데 있는 샘마저 말라서 도리가 없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나폴레옹 루트다. 나폴레옹이 1807년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할 당시 이곳이 개활지로서 적들이 기습을 하기 어렵고 다른 루트보다 신속하게 이바녜따에 도착할 수 있는 전략적 필요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안개나 눈 비로 인해 길이 걷기 어려울 때는 오른쪽으로 도로가 있어 이 길을 이용하는데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없다는데 어쩔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우리보다 하루 늦게 출발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며칠 뒤 길에서 만났다. 서울 에서 온 60후반의 남자인데 그는 피레네를 넘으며 고생을 많이 했다. 비가오고 일기가 안 좋아서 나폴레옹 루트를 걷지 못했다. 안개로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서 오른쪽 도로를 따라서 걷다가 몇 개의 산을 넘었는지 길을 잃었어요.”
“지나가는 사람도 없던가요?”
“아무리 걸어도 인가도 사람도 없더군요.”
“화살표가 안보이면 빨리 되돌아 오시지 그랬습니까?”
“비가 오는데다 마음이 급했습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었어요.”
“시간도 없고 마침 차가 지나가기에 무조건 손을 흔들었더니 세워주더군요.”
"운전자가 여자인데 깊은 산중인데도 세워주었어요. 너무 고마워 돈을 주려는데 사양하더라구요"
그 운전사는 다행히도 길을 알기에 표지판이 있는 곳에 내려주었다. 간신히 길을 찾아내려왔는데 뛰다시피 걸었다고 한다. 산길을 이리 걸었다면 꽤 힘들었을 것이다. 일번지의 경치를 보기는커녕 죽을 고생만 했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복불복이다. 피레네의 일기는 이렇게 변화무쌍하다.
1400미터 레푀데르 언덕이 눈에 들어온다. 마지막 깔딱 고개처럼 오르막길이다.
성당팀이 저만치서 걸어가는데 그중 한 여인이 뒤 쳐져 바위에 걸터 앉아있는데 힘들어서 쉬고 있다.
카미노의 첫날에 벌써 낙오자가 생기니 이 팀의 앞날이 불안해 보인다. 수사님은 걱정이 태산이고 그 여인의 배낭까지 대신 짊어지고 계셨다. 배낭 두 개를 짊어진 셈이다. 일원 중 한 사람이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영향이 전체에 미치고 결국은 일을 그르치게 된다. 앞으로 어찌 될 지 두고 볼 일이다.
론세스 바예스 수도원에서
이 구간의 종착지인 론세스바예스가 4킬로 남았다. 남은 길은 내리막으로 급경사가 많아 오히려 올라 올 때 못지않게 힘이 들었다. 하지만 지형 상 계속 오르고 내려가야 하는데 서행을 하며 걸었다. 50중반의 미국인 부부가 앞서서 사이좋게 걸어간다. 남편이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데 발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무거운 남편의 배낭까지 부인이 거뜬히 짊어지고 다시오르막 길을 잘 걷고 있었다.
부인은 여군 출신이거나 운동선수였는지 건장하고 힘이 대단해 보였다. 남편과 함께 카미노를 하기위해 머나먼 곳에서 이 길을 택해 왔을 것이다. 기쁨 가득한 표정으로 낑낑대며 오르막 산길을 잘도 걸었다.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하였다. 수도원 알베르게에서 침대를 배정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우리 옆 침대에 낮에 만난 그 미국인 부부와 나란히 하게 되었다. 이부부와는 며칠 동안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다 그 이후에는 만나 볼 수 없었다.
이 미국인 부부로 인해 아내는 눈이 휘둥그레 질정도로 웃고 놀랠 일이 생겼다. 침대 배정을 받고 샤워와 빨래를 간단히 마쳤다. 미국인 부인은 어느새 100여명이 함께 기숙할 이곳을 기념촬영하기위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옷차림이 문제였다. 옷은 훌러덩 벗고 삼각팬티 하나에 브레지어만 입은 체 돌아다니고 있었다. 남편도 팬티 차림으로 마찬가지다. 평소에 익숙한 행동 같다. 주위 눈길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은 개방적인 그들의 습관이 우리와는 딴판이다.
저녁 9시가 되어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 이층 침대에서 미국인 부부가 나란히 자는데 잠시 후 부인이 브레지어를 벗고 잠자리에 든 걸 본 아내는 깜짝 놀라 나에게 속삭인다. “상의를 벗고 자요. 공개된 장소에서 저럴 수 있을까?.” 나도 슬그머니 넘겨다 보았다. 상체를 드러내 보이고 있으니 웃으만 나왔다.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이런 일들이 눈에 띤다. 아내는 차마 눈길을 주지 못하고 곁눈질하며 그 모습을 보았다. 상체가 다 보여서 민망하였지만 그들은 그게 일상인 것 같다. 저쪽 침대에 젊은 연인들은 뒤엉켜 함께 있고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사람이 없어서 살펴보면 아래 침대에서 함께 자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렇듯 일상생활에서는 어떨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밤은 이런 저런 일들로 쉽게 잠이 들지 않을 아내다.
카미노의 첫날은 론세스 바예스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알베르게에서 보냈다. 많은 카미노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기 때문에 이들을 수용하기위해 옛 성당건물을 알베르게로 사용하고 마치 피난민 수용소를 방불케 할 정도로 집단 수용을 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신식 알베르게를 만들어 4인용 칸막이 침대를 두어 쾌적하게 해 놓았는데 인원이 넘치면 집단수용을 한다. 이렇게 각국의 사람들과 비비며 하룻밤을 함께 한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이곳 론세스바예스의 수도원은 좋은 인상을 주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땅으로 들어선 초입에 위치한 이 수도원은 순례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어 하룻밤을 보내도록 했다. 성당은 13세기에 건축 된 초기 고딕양식으로 건축물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 여기에 도착한 순례자를 위해 수도원에서는 종교와 상관없이 미사를 드린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적인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이들의 무사 안전과 평화를 기원해 준다. 미사가 끝나면 모든 순례자들의 손을 잡아주며 축복을 건넨다고 했다. 식사시간을 맞추려 내려가다 성당문을 열어보니 한참 미사중이어서 내부를 잠깐 살펴보고 조용히 나왔다.
새벽이 되자 길을 떠나기 위해 일찍부터 부산스럽다. 각자 배낭을 챙기느라 바삐 움직이고 침낭을 개어 넣고 어둠을 비춰줄 랜턴을 준비하고 스틱과 함께 출발 준비를 한다. 이제부터 매일 이런 준비가 반복 될 것이다. 잠든 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짐을 싸서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일상화 된다.
카미노 길은 수도원의 대로변 옆 숲길을 따라 걷도록 만들어 놓았다. 동틀 무렵 숙소의 사람들은 거의 빠져나가고 우리들 몇몇만 남아 채비를 하였다.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배낭을 챙겨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 구간은 순례자들이 걷기 좋도록 숲길이어서 조용히 사색을 하거나 동행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호젓한 길로서 간혹 조가비 표지를 확인해 가며 가벼운 마음으로 걸으면 좋다.
고도 빰쁠로나에 들어서다.
빰쁠로나는 순례 5일째 처음으로 만나는 인구 20만에 이르는 대도시이다. 수비리에서 흐르는 아르가 강을 따라 카미노가 연결되어있어 숲 사이로 강을 바라보면서 걷는다. 스페인은 이시기 각종 농작물 수확이 거의 끝나 들판이 황량하다. 밀농사를 주식으로 하여 수확하고 남은 밀짚은 사료로 쓰기위해 들판에 네모난 둥치를 만들어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숲길을 따라 인공폭포를 감상하며 걷다가 다리건너에 식당이 보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쉬면서 계란 후라이와 빵을 주문하였다. 노란 화살표는 식당을 지나 포장도로와 함께 걷도록 해 놓았다.
산을 거쳐 들판을 지나고 다시 산을 오르고 저 멀리에 ‘아레’ 시가지가 보인다. 시가지로 들어가는 고풍스런 아치형 다리가 유서 깊은 도시임을 말해준다. 아늑하고 고요한 시가지의 모습이다.
‘아레’를 자나 4km쯤 걸어가면 오늘의 목적지 빰쁠로나가 있는데 구불구불 시내를 빠져나가서 한참을 걸어야 한다.
시가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우리를 보며 친절하게 인사를 주고 따뜻한 미소를 보내 주었다.
빰쁠로나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문을 통과해야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지형이 높은 산위에 성과 성당이 보이고 길을 따라 아르가 강의 막달레나 다리를 건넜다. 웅장한 성문을 지나면서 생각하였다. 산위에 성당만 보이기에 왜 이런 외진 곳에 성당을 세웠을까? 하지만 성문을 통과하자 생각지 않던 고풍스런 도시가 눈앞에 들어오면서 더욱 눈을 치켜뜨게 만들었다. 모르고 있던 이곳에 시가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도시의 풍경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다. 도로는 모두 대리석이나 작고 네모진 돌로 깔끔히 포장이 되고 도로가 좁아서 양쪽 건물이 붙어있는 것처럼 가깝다.
빰쁠로나는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궁전과 성당과 고전 양식의 건축물이 그대로 보존 되어 그 성터가 당시의 문화를 잘 알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11세기부터 프랑스인과 유태인이 이주해 오면서 문화와 예술이 발달한 역사적인 도시가 되었다. 여기에 현대식 건축물이 공존하여 신구가 잘 조화된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산따마리아 대성당은 1397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530년에 완성된 성당으로 화랑이 유명하며 유럽의 고딕양식 건축물 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잘 가꾸어 놓은 공원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어 빰쁠로나는 볼거리가 많은 도시이다.
매년 7월7일 이곳에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소 축제가 열린다. 그런데 축제가 바로 이 거리에서 시작된다. 사진으로 보던 거리를 직접 와서 보니 꿈만 같다. 빰쁠로나의 거리에서 소를 몰아가는 행사는 전통복장을 한 스페인 청년들이 몰려오는 소들과 함께 이곳의 좁은 시가지에서 달린다. 그리고 이를 구경하기 위해 양쪽 건물의 가정집에서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어울리는 그림속의 장면으로 연상되기도 한다. 위험이 따르는 행사이지만 즐기는 축제가 알려지기 시작해 세계 여러나라에서 관람을 온다고 했다. 축제가 많은 계절이 다가온다. 우리가 지나가는 마을에서도 축제가 많다고 들었는데 자못 기대가 된다.
여기서 처음으로 스페인에 오수시간(낮잠시간)이 있음을 경험하였다. 성문을 지나 시가지의 중심가로 들어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가지에서 오가는 것을 보았는데 오후 2시가 되자 상가는 하나 둘 철시하여 문을 닫고 있었다. 5시 이후에 다시 문을 연다. 오후 3시간동안 휴식시간으로 모든 사람들이 집에서 조용히 쉰다. 특유의 더운 날씨 때문에 이들은 매일 이 시간이 되면 거리가 썰렁한 공간으로 변하고 만다.
알베르게를 찾는 시간이 그 시간과 맞아 북새통의 거리가 어느새 텅 비었다. 알베르게를 찾을 수가 없다. 더구나 말이 잘 안 통해 애를 먹고 있는데 한 학생이 다가와 “혹 한국인 아니세요?” 하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반가운 마음에 알베르게를 찾는 중이라 했더니 직접 안내를 해주어 문제가 해결되었다. 도시에서는 주의를 기울여 길을 잘 찾아야 한다. 잘못하면 부득이 몇 리를 더 걸어서 그곳에서 숙소를 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산따마리아 대성당 앞에 넓은 공터가 있다. 이곳은 밤이면 노천카페로 탈바꿈한다. 의자와 탁자는 없다. 밤이 되자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삼삼오오 둘러앉아서 와인과 맥주를 마신다. 한쪽에서는 잔을 들고 불빛아래에서 맥주파티가 벌어지고 카페가 아닌 돌바닥에 그대로 털썩 앉아 밤늦도록 마시며 얘기를 나눈다. 길옆 카페에다 맥주를 시켜놓고 대로변에서 마시는 낭만적인 풍경에 우리도 그들처럼 취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더운 늦여름의 저녁은 이들의 세상이다.
성당 팀 수사님을 만났다.
“수사님 식사도 했으니 와인 한 잔 하실까요? 제가 사겠습니다.”
“좋지요. 한 잔 합시다.” 총무와 셋이서 카페에 들어갔다.
“힘들어하는 자매분이 계시던데 괜찮은지요?”
“나흘을 걷고 나서 자매 두 분 때문에 걱정입니다.”
“왜요?”
“배낭이 무거워 걷지 못하겠으니 하루만 버스를 타게 해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할 수 없지요. 모두 걸어야 합니다.”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이곳에서 와인을 마시며 지나온 일과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하며 제법 와인에 취했다.
카미노는 수 백 년 전, 유럽에서 온 수도사들이 스페인의 동쪽에서 서쪽 끝 도시인 산티아고 성당에 유해가 묻힌 성인 야고보를 기리기 위해 걸었던 길이다. 이들은 순례도중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걷다보면 길가에 돌무덤과 십자가를 종종 볼 수 있는데 바로 수도사의 무덤이다.
이런 연유로 순례자들은 걸어서 산티아고를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지금 성당 팀은 끝까지 걸어갈 계획이지만 버스를 탈 순 없고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수사님은 얘기한다. 다름이 아니라 배낭만큼은 힘겨운 사람은 부치고 걷을 계획이라고 했다. 그 이후 몇 분은 배낭을 부치면서 걷는 것을 보았다.
중세시대 종교와 전쟁과 신문명과 잘 어울려진 고도 빰쁠로나는 외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풍럭 발전기의 뻬르돈 고개에서
7시경, 문래동 부부팀과 동행이 되어 알베르게를 나섰다. 이틀 전 부인이 물을 잘 못 사 마신게 탈이 나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오늘은 결국 뒤쳐져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도중에서 묵는다는 연락이 왔다. 40여일의 여행이 뜻대로 편치만은 않다.
하루종일 구름이 해를 가려 걷기가 좋았다. 모자도 벗고, 산을 오르는데 길 양쪽에 복분자 나무가 보였다. 아직 남아있는 잘 익은 열매를 따먹으며 천천히 걸었다. 많은 순례자중 이를 알아보는 사람만 따먹는 복분자의 상큼함이 매우 기분을 좋게 해 주었다. 널려있는 복분자를 배부르도록 따서 먹었다.
정상에(750m)풍력 발전기가 일렬로 서서 힘차게 돌고 있다. 이지역이 바람지대임을 알 수 있었다. 100여기 이상의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는 뻬르돈 고개는 우리의 대관령을 연상케 한다. 규모면에서는 상상을 초월한다. 풍력발전은 같은 바람이라도 바람의 세기와 일정한 방향의 바람이 중요하다고 한다.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일정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한 풍력발전기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아주 이상적으로 천연 자원을 이용해 전기를 만드는 것을 보며 부러운 마음이 든다.
고개 정상에는 발전기와 함께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 진지를 점령했던 기념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철로만든 기사상을 일렬로 세워놓아 기념사진을 찍느라 모두가 열심이다.
순례자 중에는 개를 데리고 오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덩치가 큰 우락부락한 개를 데리고 고개를 올라온 한 여자를 보았다. 성질은 순하여 사진도 찍게 해 주었다. 어떤 사람은 개의 등에 짐까지 얹어서 진땀을 흘리며 개가 힘들어한다. 하지만 주인을 따라서 열심히 걷고 쉴 때는 엎드려 있는 모습이 어린 아이처럼 보였다. 혼자서 외롭게 걷지 않고 애견을 데리고 나올 정도로 개를 사랑하지만 짐을 짊어진 개가 안돼 보인다.
고개를 내려와 식당에 들어섰다.
나로 인해 웃음보를 하나 터뜨리는 일이 생겼다. 모두식사를 주문하면서 우리는 닭 가슴살 샌드위치를 시켰다. 간신히 주문을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데 식당주인이 다가와서 메뉴를 가리키며 스페인어로 뭐라고 얘기를 하는데 말 끝에 피니쉬 뭐뭐..하며 그 다음은 알 길이 없다. 눈치로 보아 닭 가슴살이 떨어졌다는 말 같았다. 이를테면 ‘당신이 시킨 치킨 샌드위치는 재료가 없어 끝났다. 다른 것을 시켜라’ 이렇게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기다렸다. 곧이어 돼지고기와 계란 후라이가 나오기에 그걸 받아들고 아내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내에게는 치킨이 떨어져서 이게 대신 나온거라고 하면서..
잠시 후 직원 세 명이서 우루루 몰려나오더니 우리가 먹고 있는 식사를 가리키며 남의 것을 가로채 먹느냐는 투로 따진다. 우리에게 가져왔기에 먹은 것 뿐 인데. 대화는 안통하고 설명을 알아듣질 못하니 원. 일본인이 시킨 메뉴를 그들은 우리가 시킨 줄 알았던 모양이다.
결국 자초지종도 모르고 먹고 있던 돼지고기와 먼저 주문한 치킨 샌드위치까지 두끼 음식을 점심으로 먹게 되었다. 함께 있던 성당팀들이 배꼽을 잡고 웃고 있다. 총무 사모님이 하는 말 “우리 신랑도 저렇게 웃겨보았으면 좋겠네. 도통 재밌는 일이 없어서 심심해요.” 소통의 부재로 한바탕 해프닝이 벌어진 점심시간이었다.
부부와 타인과의 관계
스페인은 여름이면 서머타임을 적용하기 때문에 6시경 길을 출발한다면 실제로는 5시이므로 새벽시간에 나서는 것이 된다.
이렇게 일찍 나서는 이유 중 하나는 스페인 특유의 날씨도 한 몫을 한다. 습도가 낮은 무더운 여름 날씨는 자외선이 작렬한다. 햇빛의 따가움이 도를 넘고. 그리하여 11시가 지나면 더워지기 시작하여 계속 기온이 올라가서 걷기에 어려움이 있다.
일찍 출발하면 더위를 피할 수 있어 도착해 휴식을 취한다면 시간적 여유가 있어 좋기 때문이다. 장거리는 걷는 시간이 늘어나 때론 9시간 이상을 걸어 본 적이 있다. 또한 너무 늦으면 침대가 부족할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알베르게가 부족해서 곤혹을 치러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느 마을 앞을 지나다 아침 식사를 할 겸 배낭을 벤치에 내려놓고 쉬었다. 공터의 건물 안에서 젊은이들의 노랫가락이 들려온다. 어제 저녁의 축제의 뒤끝이 아침까지 이어진 것 같다. 멋들어지게 울려나오는 노래가 잘 다듬어진 스페인 합창곡 같다. 요즈음 축제 기간이어서 마을마다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리고 간밤 공연무대를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청소하는 모습들은 자주 보곤 했다.
우리의 축제는 보통은 구 단위로 이루어지곤 하는데 이곳은 마을단위로 축제를 하고 있다. 마을 간 거리가 많이 떨어져있어 함께 하기가 어렵고 농촌에서는 오락거리가 마땅히 없다. 연중 일정기간에 축제를 통하여 이웃 간에 친화와 결속을 다지고 공동체 생활에 중요한 기폭제가 되기 때문에 축제는 이들의 중요한 연중행사로 자리 잡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고개를 오르다 며칠 전에 만난 한국인 여자를 다시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함께 걸었다. 평소 둘이서 걷는 것을 보았는데 혼자서 가는 것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어제 저녁 서로 다투었는데 지금 따로 걸으며 숙려중이라 한다. 새벽길을 그녀는 먼저 나서고 자기는 뒤를 따라간다고 했다. 어둠속에서 혼자 저만큼 걸어가는 한 여자를 보았다. 혼자서 가는 대담함에 놀랐었다. 바로 다퉜다는 그녀였다.
“두 분은 어떤 사이인가요. 혹 친구사이예요?”
“아니예요.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알게 되어 함께 왔어요. 나이도 나보다 많고요.”
“뭣 땜에 다투었어요?”
“어제 저녁 숙소를 자기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잡았다고 삐져 말을 안 해요. 수영장도 있고 분위기가 괜찮아서 선뜻 정했습니다..”
“내성적이어서 남과 말도 잘 안한 답니다. 나이도 어리고 내가 잘못했으니 사과해야겠어요” 이 여자는 성격이 활달하고 붙임성이 있었다.
한동안 우리와 얘기를 나누고서 하는 말이 “속에 담아두었던걸 풀고보니 이제야 속이 후련해요.” 환한 얼굴이 되어 짝꿍을 찾으러 간다며 총총히 사라진다.
장기간의 여행에는 부부이거나 보통 혼자인 경우가 많다.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과 동행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행 중에는 발생하는 일들이 많아서 의견이 충돌되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결국은 혼자서 여행을 하게 된다. 부부간에도 의견이 달라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프랑스에서 일이다. 다정한 40대 부부가 민박집에 들어왔다. 다음날 저녁 집사람에게 들은 얘기인데 한바탕 웃었다. 그 부인이 하는 말이 “ 어제 우리 부부 하마터면 이혼할 뻔 했어요.” 유람선에서 잡아놓은 자리를 아내가 늦어서 다른 사람에게 놓쳤다는 것이다. 남편이 화를 내기에 맞받아 같이 대꾸를 했다. 또 이층으로 올라오라는 걸 추워서 마다했다가 큰소리로 싸울 뻔 했는데 하도 화가나서 우리 “이혼하자”고 했다한다. 부부도 이러하건데 남과 일행이 되어 함께 여행하기란 쉽지 않다.
함께 고락을 같이하는 부부는 살아오는 동안 이해와 양보 사랑이 함께 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부부간의 갈등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니다. 수 십 년을 함께 살아오면서 이를 봉합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수고를 겪었는가. 카미노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백발이 희끗한 노부부와 노인분들을 많이 본다. 다정하게 사랑스럽게 걷는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은지. 그러나 나머지는 주로 혼자서 오는 젊은이들과 간혹 친구와 둘이서 같이 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어느 날 모임자리에서 여행이야기를 하던 중 선배 분께서 산티아고를 같이 가자고 제안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 흔쾌히 승낙 하였다. 하루 이틀이 아닌 40일 이상의 기간을 함께 여행하려면 쉬운 일이 아님을 후에 알게 되었다. 장거리 걷기도중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거나 머나먼 길을 다녀오려면 신체적 정신적인 무장도 중요하다. 또한 갈등의 여지가 발생한다면 여행자체가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결국 이러저런 사정으로 동행을 하지 못하였다.
포도주의 샘 (애스테야 -로스 아르꼬스)
9월의 첫날이 시작 되었다. 에스테야 알베르게를 나서자 광활한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여기서부터는 포도밭과 밀농사 지대이다. 때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농장 지대를 보며 감탄사가 나오기도 한다. 그동안은 산간과 간혹 보이는 밀밭 정도였다. 2킬로가량 지나 아예기 마을에 들어서면 이라체 수도원과 함께 카미노 유일의 포도주의 샘을 볼 수 있다.
카미노를 대표하는 포도주 샘이 수도원 안에 있는데 산티아고를 다녀온 순례자라면 누구나 여기서 기념사진과 함께 한 잔의 포도주를 마셨을 것이다. 오늘은 포도주가 많지 않았던지 나오지 않아서 꼭지를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마시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내 옆의 사람도 포도주를 먹어보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책자를 통해 소개가 되어 알고 있었지만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길 안쪽 교회에서 순례자들이 걸어오는 것을 보면서 그곳을 구경하고 오나보다 하고 그냥 지나쳤다. 저녁 무렵 사람들에게 듣고서야 포도주의 샘을 보고 오는 길임을 알았다. 깜빡 잊고 지나친게 참 아쉬웠다.
이 포도주의 샘은 보데가스 이라체라는 포도주 제조업체가 만들었다. 네모난 돌 위에 새겨져 있는 문구처럼 “산티아고에 힘과 활기로 도달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포도주 한 모금이 행복을 가져다 주기 바랍니다” 하고 무료로 순례자를 위해 설치한 것이다. 두 개의 수도꼭지가 있는데 한 꼭지에서는 포도주가 다른 한 꼭지에서는 물이 나온다.
광활한 평원에 포도밭이 길 양쪽에 깔려 있다. 우리나라의 포도와 달리 와인 생산에 적합한 콩알처럼 작은 굵기의 포도인데 청포도와 흑포도를 재배한다. 이곳 가을 날씨는 맑고 깨끗한 공기와 풍부한 일조량으로 포도 재배에 적합한 기후이다. 하루종일 햇빛을 받은 포도는 익어가면서 당도가 높아진다.
넓은 농장에 사람 구경을 할 수가 없어 마음만 먹으면 포도를 마음껏 따 먹을 수 있지만 그럴 수는 없다. 간혹 순례자를 위해 포도를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놓은 곳도 있으나 하지만 함부로 따먹다가 적발되면 많은 벌과금이 부과된다고 들었다. 울타리 너머로 슬며시 나온 포도 한 송이를 따서 맛을 보니 역시 포도가 달고 맛이 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도는 질 좋은 와인으로 변모하여 스페인 전역에 제공되며 공장에서 품질이 다양하기 때문에 값싸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이 많다.
카미노 메뉴는 비교적 여행자에게 저녁을 저렴하게 제공하는데 여기에 반드시 와인이 등장한다. 코스메뉴 끝에 물 한 병 또는 맥주 한 잔, 와인을 선택하라고 한다.
우리는 물론 와인을 선택했다. 그런데 와인은 한 병이 나온다. 더 달라고 하면 더 주기도 한다. 아내에게 한잔 권하고 나면 나머지는 네 몫이니 근사한 저녁이 아닐 수 없다. 스페인에서 와인은 막걸리처럼 대중적인 술이라 보면 될 것 같다.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와인을 마셔 보았다. 가격은 그쪽보다 비싼데 맛은 떨어진다. 현지에서 직접 생산되는 가정용 와인도 맛이 좋기는 마찬가지이다.
아침부터 쉬지 않고 걸었다. 이 구간은 광활한 농장을 지나는 길이라서 해를 가릴만한 곳이 없어 5시간가량을 계속해서 걸어야 했다. 아내는 발목이 아프다고 한다. 어제와는 달리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해서 걱정이 되었다. 보통은 1-2시간 걸으면 아침 식사와 차도 마실 겸 쉬게 마련이지만 마을이 없어 쉴 곳이 없으니 별 수 없다.
로스 아르꼬스에서 산솔에 이르는 7킬로는 넓은 포도농장이 분포하고 있다. 간혹 올리브 농장도 지나지만 규모가 작다. 우리가 걷고 있는 구간 중 에스테야에서 비아나 지역에서 재배되는 포도 농장이 가장 큰 규모인 것 같다.
이구간은 비교적 쉬운 코스이다. 해발 100미터 높이의 산등성이를 넘으면 평탄한 길로 이루어져서 지금까지의 코스에 비해서 수월하고 포도 농장과 나지막한 밀밭이 나오고 어느새 비아나에 이른다. 도로와 밀밭 사이에 놓여진 길은 걷기 쉽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비아나 시가지가 몸이 지칠무렵에 다다르게 된다. 구릉에서 내려다보면 시가지가 가깝게 보이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은 평소 다른 구간보다 걷기 쉬워서인지 도중에 쉬는 시간을 포함해서 6시간 가량 걸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빰쁠로나까지 함께 동행한 성당팀 일행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일행 7명 모두 별 탈없이 잘 걷고 있다한다. 사흘 동안 같이 동행하며 한 숙소에서 묵고 자고 얘기하며 걸었던 팀. 그들은 주일에 이곳 성당에서 예배를 보고 건강도 추스릴 겸 하루를 쉬어간다 해서 헤어지게 되었다.
로그로뇨에서 시내구경을 나서다.(로그로뇨 - 나바레테)
시내 초입에 들어서면 에브로 강이 흐른다. 인구 13만 명의 도시를 오랜만에 만났다. 강폭이 넓어 12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돌로 축조된 아주 오랜 다리가 퍽 인상적이다. 보수 공사를 해놓았지만 고풍을 자랑한다. 다리를 건너 1시 방향의 골목에 시설이 좋은 알베르게가 있었다.
여장을 풀고 시내 구경에 나섰다. 시내에는 의외로 휴대폰 가게가 곳곳에 있었다. 어느 휴대폰이 잘 팔리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열장에는 온통 우리의 휴대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삼성과 엘지에서 최근에 출시한 갤럭시 S5와 G3가 벌써 판매에 들어갔는데 머나먼 이곳에 우리 상품이 중심이 되어 자리잡고 있는걸 보니 대견스러웠다. 특히 TV는 식당 상점 할 것 없이 어디를 가나 99% LG전자 우리 제품이었다. 아마도 홍보에 힘을 기울이고 우리 전자제품의 우수성을 인정해준 결과인 것이 틀림없다.
성당 부근에는 광장과 레스토랑 바아가 있어 오후가 되면 문전성시를 이룬다. 넷이서 저녁 식사를 하기위해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프랑스 가이드를 앞세워 온 일본 단체팀을 다시 만났다. 며칠 전에 사진도 찍어주고 안면이 있던 터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산티아고 카미노에 가이드를 대동하고 와서 길을 걷는 것도 일본인을 통해 처음으로 보는 것 같다.
에브로 강변이 한강 고수부지처럼 자전거길 체육시설 등 산책길을 잘 꾸며놓았다. 소도시에 강이 흐르고 강변에 운동시설을 갖추어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멀리에 돔 구장 같은 체육관이 보여 야구 경기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발걸음을 옮겼다.
스페인 사람들의 인기 종목인 투우 경기장이었다. 뜻밖에도 여기서 처음으로 투우경기를 관람하였다. 소 한 마리를 가운데 두고서 3명의 투우사가 경기를 하고 있는데 창 하나를 꼿을 때마다 함성이 울리고 투우사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후에 한 명의 투우사가 남아서 소와 함께 묘기를 선보이며 등에 창을 꼿는다. 소가 쓰러지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았다. 요즈음은 동물 애호가들의 반발이 거세어 동물 보호 차원에서 투우경기의 횟수가 줄어드는 추세이고 인기 직업인 투우사의 지원이 줄어들어 투우학교에 지망하는 학생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래도 직업 중에서 최고의 인기 직업중 하나는 투우사라 한다.
오늘은 소를 쓰러뜨리지는 않고 창을 몇 개 꼿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동물을 희롱하여 죽이고 투우경기를 보며 열광하는 그들을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도 수많은 관중이 보는 앞에서 칼이 심장에 들어가 소가 죽는다. 2-3시간가량의 경기 중 5마리의 소가 이렇게 죽어 나간다. 오늘 관중은 2만 명은 넘을 것 같다.
잔인한 면을 즐기는 인간성과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스페인은 옛날부터 대중적 스포츠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개고기를 식용으로 하고 프랑스인들이 원숭이의 뇌를 먹듯 이 또한 스페인에서는 소를 죽이는 투우를 보며 문화의 다양성을 생각해 보게하는 대목이다.
스페인의 상징으로 투우경기를 떠올리지만 사실 남미 페루에서 가장 많이 열리고 있는데 해마다 열리는 페루 국제 투우경기를 앞두고 동물 보호단체의 격렬한 시위가 일어난다고 한다. 일부 시위대는 눈요깃거리를 위해 황소를 죽이는 일은 잔인하다하여 경기장으로 난입하기도 해 경찰과 충돌이 발생한다고 한다.
벤토사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간 거리가 제법 있어서 외따로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알베르게가 딱 하나인데 도통 소통이 어렵고 아예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통제가 심하여 지금까지 머문 곳 중에서 가장 불친절한 알베르게였다. 뒤 늦게 도착한 한국인 부부는 침대가 모자라 부득이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저녁때 준비한 식사를 같이 하기위해 이 부부를 초대했는데 숙소 안으로 들여보내주지를 않아 결국 돌아섰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고 아무리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여서 No 라고 하는데 별수 없었다.
포도농장이 점점 늘어나면서 이제는 전체가 포도밭이다. 전날은 청포도가 일색이었지만 이 지역은 흑포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기후와 토양과 관련이 있는지 확연히 다른 품종을 재배하고 있었다. 요즘 건조한 날씨로 인해 비를 못 본지 꽤 오래다. 모르긴 해도 금년에는 포도 재배에 중요한 기후와 비와 바람이 알맞아 좋은 포도주가 생산될 것 같다. 식탁에 오르는 와인이 직접 여기서 제조하여 오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싱싱한 느낌이 든다.
비가 부족하고 무더운 날씨로 인해 풀과 나무들이 시들어가서 스프링 쿨러를 이용해 물을 주는 곳이 눈에 띤다. 농산물 또한 풍성해 값싸고 질 좋은 과일과 채소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농산물의 가격이 싼 반면에 공산품 가격은 비싸 가격에 큰 차이가 있다. 특히 북부지역은 산업이 농업중심으로 옥수수 밀 과일이 저렴하여 우리처럼 여행자에게는 더 없이 좋은 환경이다.
시루에냐의 마을 축제
수퍼에서 감자와 양파 쌀을 구입하였다. 가지고간 미역으로 국과 볶음을 만들어 놓으니 제법 우리 음식으로 구색을 갖춰 저녁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누룽지까지 곁들여 후식을 하였으니 더할 나위 없다. 식당에서 사먹는 가격의 1/3 이면 푸짐하게 해결할 수 있어 취사가 갖춰진 알베르게에서는 젊은이들이 시장을 보아 해 먹는 경우가 많다. 종일 걷고 피곤하여 우리는 가능하면 식당에서 해결을 하였다. 앞으로 남은 30여일의 일정을 조정하면서 하루 평균 25Km로 설정해야 콤포스텔라에서 서쪽 바닷가인 피니시테라와 묵시아를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
아내가 아침부터 서두른다. 다른 순례자들이 일찍부터 서둘러 떠나면 안절부절 못한다. 5시에 기상하여 6시경 알베르게를 나서기는 처음이다. 전날 조금만 걸었기에 오늘은 26Km를 계획하였다. 어두운 길을 랜턴을 켜고 나섰다.
알베르게를 나오자 잠시 후 바로 산속으로 길이 이어진다. 앞서간 세 명은 금새 보이지 않고 우리만 따로 산길로 접어들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걸으니 아내는 무서워 조바심을 낸다. 부스럭 소리에 놀라고 저만큼 시커먼 물체가 보이면 등에 땀이 난다고 했다. 가서보면 큰 나무이다.
불을 비추고 노란 화살표를 더듬으며 걸어 나갔다. 간혹 길이 두 세 갈래로 나뉘면 표지판을 찾는게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길을 따라 가야할지 모를 정도로 애매하여 어둠속에서는 애를 태울 때가 있다. 산길에서 땅을 살피며 표지판을 보랴 산중에서 혹여 무슨 일이 생기지 않나 마음을 조이다 어느덧 여명이 밝아왔다. 괜히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서 이 고생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안도의 한 숨을 쉬어본다.
그런데 내 뒤에서 혼자서 씩씩하게 걸어오는 청년이 있다. 인사도 나누는 둥 마는 둥 바람같이 사라진다. 그는 혼자서 이 길을 걸어 넘어왔을 텐데 강심장을 가진 녀석이다. 캄캄한 산길을 혼자서 넘다니! 간혹 여자 순례자 혼자서도 이런 길을 걷는다.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카미노에는 홀로, 부부가 친구들이 짝을 이뤄 다니고 있다.
또다시 일본인 일행을 만났다. 장년층 4명에 젊은 여자1 프랑스인 여성1 모두 6명이서 길을 걷는다. 이들은 프랑스 인을 안내인으로 삼고 길을 걷는 중인데 관광지 여행이 아니건만 같이 다니고 있어 참 일본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미노에서 한국인은 여기저기 눈에 띠지만 일본인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다시말하면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일째 들어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일본인을 만난게 처음이다.
로고로뇨를 벗어나면서 낮은 임야가 펼쳐졌다. 벤또사와 시루에냐에 이르면 광활한 포도농원이 나오고 우리는 포도밭 사이를 가로질러 포도 향에 싸여 여행하는 기분으로 걸었다. 주간에 길을 걷는 동안 이 지역의 농부들을 만나 볼 수가 없는데 어쩌다 농약을 뿌리기 위해 농약 살포차를 본게 전부였다. 단일농장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모든 것이 기계화 되어 일손이 많이 필요 없는 구조로서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다.
시루에냐는 산위에 위치한 마을이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서 산위로 계속하여 올랐다. 해발 500미터에서 700미터의 고도를 오른다. 고원에는 멋진 골프 연습장이 있고 현대식 양식 가옥이 즐비한 신시가지로 조성된 마을이 나왔다. 신기하게도 산위에 이런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을을 지나 가장자리에 구와다루페 알베르게가 있다. 사람이 많이 찾지 않아 가족같은 분위기에서 9명이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50대로 보이는 알베르게 주인은 일 년 중 성수기에만 이곳에서 혼자 일을 하고 비수기에는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마치 전원생활을 하듯 30여개의 침대를 갖추고 손님을 맞이하면서 직접 자기가 요리를 만들어 주었다. 명랑한 성격에 친화력이 있어서 저녁식사는 파티를 하듯 즐겁게 하였다. 요리를 준비할 때도 팝송이나 클래식음악을 틀어놓고 큰소리로 따라 부르며 시골스런 분위기속에 정감이 깃들어 인상적이었다.
오늘은 시루에냐의 마을 축제 날이다. 직접 축제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시루에냐는 독특하게도 연중 축제가 열리는 특이한 마을로서 9월 축제로 시작하는 첫 날이 오늘인데 레메디오 성모를 기리는 축제이다.
앞으로 일주일동안 주말에 축제를 한다. 마을 중심부 성당 앞 광장에서는 행사가 진행 중에 있었다. 식탁을 양쪽으로 늘어놓고 탁자에 음식과 와인을 준비하여 모두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무대에는 마을 청소년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즐기고 있었다. 초등생에서부터 중고등학생까지 함께 춤을 선 보였다. 바자회와 챠와 술을 따로 팔기에 한 잔 사셔 마셨다. 신통하게도 작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싸이의 ‘강남 스타일’ 음악이 흘러나와 함께 흥얼거리며 리듬에 맞춰 따라 불렀다.
우리 음악이 여기까지 알려졌으니 지구촌이란 말이 실감난다. 밤새 축제는 계속 되었다. 무대 위에서는 사회자가 분위기를 이끌기 위해 빠른 비트 음악과 함께 조명이 어지럽게 돌아가며 흥을 돋고 있다. 이날 밤 잠을 설쳤다. 확성기의 음악과 함께 밤을 세워가며 아침까지 노는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새벽까지 축제가 이어진 꽤 큰 마을을 지나갔다. 날이 밝아오자 젊은이들이 해산을 하지 않고 골목길에 떼거리로 몰려 있어 순례자들이 그곳을 지나면서 마음을 조이게 만들었다. 행사가 끝난 거리는 쓰레기로 덮이고 무질서하여 그동안 깨끗한 거리만 보다가 이런 장면을 처음이라 머리가 산만해진다. 지나가면서 그들이 행여 시비를 걸거나 행패를 부리면 어쩌나 약간 긴장했지만 젊은이들이 순박하고 노는데에 열중하여 별일은 없었다. 평화로운 농촌과 도회지에서 축제는 떠들썩하고 질서가 어지러운 면이 있지만 모두가 흥에 겨워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용감한 자들의 십자가와 닭 두 마리의 기적(산또 도밍고 데라 깔싸다)
6킬로미터쯤 걸어서 깔사다에 이르렀다. 어제까지도 초원처럼 넓은 포도농원은 점점 사라지더니 이곳을 지나면서 해바라기 농장으로 바뀌어 간다. 고도가 달라졌을 뿐인데 이렇게 바뀌니 기후환경의 변화를 직접 실감할 수 있다. 어느 곳에도 포도농장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해바라기만 볼 수 있다. 스페인 북부지역은 산악지형인데 평균지형이 유럽에서 스위스 다음으로 높다하니 지역에 따른 농작물들이 적절하게 분포하고 있는 상황을 카미노를 통하여 볼 수있어서 소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곧이어 비옥한 땅으로 알려진 그라뇽 마을로 들어섰다.
깔사다에서 그라뇽으로 들어가는 들판의 길가에 웬 크나큰 십자가를 비석처럼 세워놓았다. ‘왜 이리도 큰 십자가를 세워놓았을까?’ 기념삼아 아내를 찍어주었다. 스페인어로 글을 써놓아 뜻을 알 수 없었지만 후에 이 십자가가 ‘용감한 자들의 십자가’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용감한 자들의 십자가”
‘역사적으로 비옥한 그라뇽의 땅은 늘 다툼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세기 초반에 싼또도밍고 데 깔사다와 그라뇽이 두 마을 사이에 위치한 밭을 두고 싸운 것이었다. 마을에서 대표로 한 명씩을 뽑아서 목숨을 걸고 결투를 해서 이긴쪽 마을이 땅을 차지하기로 정했다.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은 그라뇽의 마르띤 가르시아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결투를 ’용감한 자들의 십자가‘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마을사람을 대신하여 싸운 이사건을 기리기 위해 결투가 일어난 자리에 십자가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라뇽에는 마르띤 가르시아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며 마을의 주일미사에서는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풍습이 남아 있다.“ ( 안내자료에서)
땅이 비옥하여 그라뇽에는 순례자들로 인해 마을은 생동감이 넘치고 먹을거리가 넘쳐나는데 그 중에서 전통음식인 그라뇽식 감자요리와 마늘스프 그라뇽식 순대가 유명하다. 잠시 쉬어가면서 바아에 들려 음식을 시켜먹었다. 아침 식사 겸 배를 채우고 나왔지만 그런 유래를 그때는 몰랐다.
깔싸다 대성당의 천정에 여러 조각으로 된 작품 중 암탉과 수탉이 살고 있는 닭장도 눈에 띤다. 프랑인들은 순례중 닭의 깃털을 모으면 보호를 해준다고 믿는데 여기에는 두 마리 닭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닭 두 마리의 기적
15세기 독일의 우고넬이라는 청년이 부모님과 함께 순례를 하고있었다. 깔싸다에 도착했을 때 머물던 여인숙의 딸이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하여 사랑을 고백했으나 신앙심이 남달랐던 우고넬은 그녀의 고백을 거절했다. 상심한 처녀는 그에게 복수를 하려고 은잔을 우고넬의 짐 가방에 몰래 넣고 도둑으로 고발을 했다. 재판소로 끌려간 우고넬과 그의 부모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천년은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의 부모는 산띠아고 성인에게 기도를 올리며 순례를 계속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서 ‘산띠아고의 자비로 아들이 살아있다’는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있다는 음성을 들은 부모가 재판관에게 이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갔다. 마침 닭고기를 요리로 저녁식사 중이던 재판관은 그 말을 듣고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아들이 살아 있다면 내가 먹으려 하고 있던 이 암탉과 수탉도 살아 있겠구려.” 그러자 닭이 그룻에서 살아나 즐겁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 재미있는 전설 덕택에 1992년부터 산또 모임고 데 깔사다는 이 기적이 알려져 우고넬의 고향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산또 도망고 재판관들은 우고넬의 결백을 믿지 않았던 것에 대한 사죄로 몇 백년 동안 목에 굵은 밧줄을 매고 재판을 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부르고스 대성당의 북쪽 지붕에도 웬 닭 두 마리가 입을 벌리고 서있는 조각을 보았다. 여기에서는 닭은 길조로서 좋은 상징이다. 이렇게 전설에 따른 실제 조각들을 보면서 수 백 년에 걸쳐 내려온 얘기들의 의미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 1부 end -
나와 함께한 이는 스페인 순례자인데 성격이 호탕하고 좌중을 노래로 즐겁게 해주었음
동틀무렵 긴 그림자... 매일 그림자를 앞세우고 감
개성있는 차림에 나이를 물으니 수줍어하며 20대총각이라나...
한가한 석양 알베르게 뜰녘..
니꼴라스수도원에서 무료 식사를 제공함
수도원 수사님이 손수 미사후 발을 씻겨주어 감동을 받음
수도원 저녁후 합창하는 즐거운 시간들
마을에 오래된 성당임
알베르게 뒷마당에 널어놓은 빨레들이 보이고...
부르고스 대성당 세상에 이렇게 큰 성당은 처음봅니다. 동서남북 면이 다르게 설계되어 있슴
대성당 앞 광장 앞의 사람들 더위에 쉬고있슴
동틀녘 순례자의 모습. 서양인들은 반바지에 땡볕에도 모자를 쓰지 않습니다.
한적한 시골 마을 길과 건너편에 성당이 보입니다.
중세 성당터를 보존하여 순례자에게 공개하고 여기서 챠를 대접 받았지요...
평화로워 보이는 대평원에 길이 있기에 ....
멀리보이는 풍력 발전기가 끝이 없을 정도로 줄을 서고...
산티아고 초입에서 동행들과 도착 기념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