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에서 몇 십년을 살면서도 충렬사 답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부산에 산재한 소소한 유적지는 답사를 하면서도
정작 임란의 순국선열들을 모신 충렬사는 소홀하였다는 자책감을 가지고 답사에 임한다
깨끗하게 조성된 성역으로 들어서는 길
충렬사(忠烈祠)는 임진왜란 때 부산지역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호국선열 93신위의 영령을 모신 사당으로
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산 교육장이자 호국충절의 요람지이다
충렬사는 1605년(선조 38) 동래부사 윤훤에 의해
동래읍성 남문 안에 충렬공 송상현(宋象賢)을 모신 사당 송공사(宋公祠)가 세워지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한다
1624년 선위사(宣慰使) 이민구의 청으로 ‘충렬사(忠烈祠)’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으며
부산진성 전투 때 순절한 충장공 정발장군도 모시게 되었다
그 후 1652년 동래부사 윤문거가
송공사가 좁고, 성문이 가까이 있어 시끄러워 위치가 적당하지 않다는 점과
송상현 공의 학행과 충절은 후학의 사표가 되므로 그 학행과 충절을 선비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들어
현재의 안락동 충렬사 자리로 이전하면서 사당을 창건한 후
강당과 동재 · 서재를 지어 ‘안락서원(安樂書院)’이라 하고 사우와 서원으로서의 기능을 갖추었다
충렬탑(忠烈塔)
높이 28.6m인 충렬탑은 민, 관, 군, 봉수지기, 나팔수, 여인 등 6인의 군상을 새겨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수호했던 우리 민족의 굳센 단결을 나타낸 탑이다
망월산(望月山)과 충렬사
정문 바깥 오른쪽에 있는 안락서원(安樂書院) 교육회관인 충렬관(忠烈館)
부산지역의 유일한 서원인 안락서원은 이 자리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박정희 대통령 때 충렬사를 재정비하면서
안락서원을 모두 철거한 뒤 지금의 모습으로 충렬사가 재정비되었다
충렬사 정문
정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에는 충렬사 사무소가 있고
오른쪽에는 송상현 명언비(名言碑)가 자리하고 있다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왜군이 동래읍성을 에워싸고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거든 길을 내어달라”라고 했을 때
동래부사 충렬공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어주기는 어렵다”라고 답하여 결전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송상현 명언비 오른쪽 뒤에는 만월매(滿月梅)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매화나무가 있다
충렬사 만월매(滿月梅)
오래된 매화나무의 수형이 둥근 모습을 하고 있어
매화꽃이 만발하였을 때 마치 둥근 보름달같다고 하여 만월매(滿月梅)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3월초에 피었다는 매화는 지금은 모두 낙화하고 없어 그 장관을 볼 수가 없어 아쉽다
본전을 향해 충렬문(忠烈門) 앞 계단을 오른다
충렬문을 지나면 정면 계단 위에 본전이 보이고
왼쪽에는 기념관이
오른쪽에는 소줄당(昭崒堂)이 있다
소줄당(昭崒堂)
소줄당은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국한 선열의 호국 · 애족정신을 후세의 사표로 삼기 위해
1652년에 교육도장으로 건립한 강당이다
‘소줄당(昭崒堂)’이라는 당호는 한유(韓愈)의 이제송(夷齊頌)에 나오는
‘소호일월 부족위명, 줄호태산 부족위고(昭乎日月 不足爲明, 崒乎泰山 不足爲高)’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임진왜란 때 희생된 선열의 충절은 일월보다도 밝고 태산보다도 높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안락서원(安樂書院) 현판이 제자리를 잃고 소줄당(昭崒堂) 전각 안에 걸려 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았던 안락서원은
1972년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지만
1976년 박정희 정부의 지시로 서원이 모두 철거된 뒤
그 자리에 본전, 의열각, 기념관, 소줄당 등 현재의 모습으로 재정비 되었다
부산지역의 유일한 서원이었던 안락서원을 복원하기 위하여
부산지역에서는 2014년부터 안락서원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부산시에서는 그동안 몇차례에 걸쳐 충렬사 재정비 및
안락서원 이전 복원, 안락서원 원형 복원을 위한 사업 등을 진행하여 왔지만
충렬사가 들어선지 40년이 넘는 현재로서는 복원 계획이 없다는 입장이다
기념관(紀念館)
기념관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전황을 살필 수 있는 기록화와
선열의 유품, 문서, 책자 등 102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왼쪽 : 부산진순절도는 1760년(영조 36)에 동래부사 홍명한이 변박을 시켜 옛 순절도를 모사(模寫)한 것으로
부산진성의 개전(開戰) 상황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으며
보물 제391호로 지정되어 원본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른쪽은 동래부순절도로
부산진순절도와 함께 전해 내려온 그림으로 동래부의 전투상황과 각 선열의 행적 등을 표현한 것으로
1709년(숙종 35)에 동래부사 권이진이 쓴 화기에 전해지고 있으며
보물 제392호로 지정되어 원본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충렬공 교지(忠烈公 敎旨) 들
부산분전순국도(釜山奮戰殉國圖)
부산첨사 정발장군은 검은 갑옷을 입고 노도와 같이 밀어닥친 수만의 적군을 맞아 분전을 거듭하였다
장군의 충의에 격발되어 군민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적의 시체가 세 곳이나 작은 언덕을 이루었다
소수 군민의 항전이었으나 매우 굳세어 성을 함락한 왜군은 그 분풀이로
군신(軍神)의 혈제(血祭)라 하여 개, 고양이까지도 모두 살해하였다
난후 왜인들은 "우리는 부산에서 크게 좌절되었다" "흑의 장군이 가장 두려웠다"고 말할 정도로
서전(緖戰)에서 가장 장렬한 전투였다
다대진성결전도(多大鎭城決戰圖)
부산진을 공략한 왜군이 군사를 나누어 수륙으로 다대진을 침공하였는데
다대첨사 휸흥신 공은 동생과 휘하 군민을 이끌고 오직 죽음만 있을 뿐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역전하여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첫 싸움에 이겼으나 화살이 다하고 칼이 부러져 마침내 관민 모두가 전사하였다
수영유격전투도(水營遊擊戰鬪圖)
왜적이 수영을 점령하여 약탈과 만행을 자행하자 25용사를 비롯한 민중들은 왜적에 맞서 향토를 지키고자
기습전을 전개하고 적의 양곡을 탈취하는 등 장시간에 걸쳐 피나는 항전을 거듭하였다
이는 내 고장을 내가 지키는 향토방위의 귀감이며
오늘날 우리의 가슴에도 맥맥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내성수사결의도(萊城殊死決意圖)
왜적이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거든 길을 빌려달라"고 하였을 때
송상현 공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는 글을 목판에 써서 적중에 던지고
성(城)과 운명을 같이 할 뜻을 굳게 다짐하였다
동래민중분전도(東萊民衆奮戰圖)
적병이 다투어 동래성으로 몰려들어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관군의 항전도 치열하였지만 민중의 저항도 매우 처절하였다
기왓장으로 적과 마주 싸웠으며 부녀자도 전투에 가담하였다
동래보국충정도(東萊報國衷情圖)
동래부사 송상현 공은 왜적이 성안으로 침범하여 피하라고 권유하여도 피하지 않은 채
태연히 북향요배를 마친 후 부친에게 하직의 시를 남기고 의연한 자세로 순국의 길로 나아가셨다
휘하의 군민들도 공의 충정에 감동되어 성을 베개삼아 장렬히 순절하였으며
뒤에 왜장도 공의 높은 충절에 감복하여 공을 해친자를 목베었으니
이는 세계 전사(戰史) 상 그 유래가 없는 일이다
동래부사의 갑옷 및 투구
18C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송공단 향사 때 동래부사가 착용한 것이다
다대첨사의 갑옷 및 투구
18C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윤공단 향사 때 다대첨사가 착용한 것이다
부산첨사의 갑옷 및 투구
18C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정공단 향사 때 부산첨사가 착용한 것이다
동래영 구군복(東萊營 具軍服)
조선시대 무관들이 입던 융복(戎服)의 일종으로 무관 최고의 복식 차림이다
전립(戰笠)과 전복(戰服), 동다리, 요대(腰帶), 목화(木靴)로 구성되었으며
병부 주머니를 차고 동개,환도,등채 등을 갖추었다
윤공단(尹公壇)
1765년(영조 41) 다대첨사 이해분이 임진왜란 때 다대첨사 윤흥신과 군.민을 봉사(奉祀)하기 위하여
다대성 내 객사(客舍)의 동쪽에 설치한 단으로
1970년 12월 15일에 지금의 사하구 다대동 산 24번지로 이설하였다
<참고사진>
사하구 다대동 1234번지에 있는 윤공단 (尹公壇)
정운공순의비(鄭運公殉義碑)
이 순의비는 1789년(정조 13) 다대첨사 정혁이
1592년(선조 25) 몰운대 아래 충무공 이순신의 우부장으로 용전하다가 순절한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장군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 사하구 다대동 몰운대에 있다
<참고사진>
몰운대의 정운(鄭運)공 순의비(殉義碑)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이제 본전(本殿)의 계단 아래에 이르렀다
그 왼쪽에는 의열각(義烈閣)이 있는데 의열각은 왜군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의녀들을 모신 사당이다
동래읍성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기왓장을 던지면서 싸운 이름 없는 두 의녀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 공과 부산첨사 정발 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金蟾) · 애향(愛香) 두 열녀 등
모두 4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금섬(金蟾)[?~1592]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기녀(妓女)로 13세에 송상현의 첩이 되었으며
송상현이 동래 부사로 부임하자 그를 따라 동래읍성으로 왔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에서 송상현이 죽기를 각오하고 조복(朝服)을 가져가자
금섬도 즉시 여종 금춘(今春)을 데리고 관아의 담장을 넘어 송상현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나 송상현은 이미 순절한 후였고
금섬도 곧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사흘 동안 적을 꾸짖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적장도 금섬의 절개를 기특히 여겨 관을 마련하여 송상현과 함께 묻어 주었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정발을 붙들고 간호하던 첩 애향(愛香)은
칼을 거꾸로 들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진하였다
동구 좌천동의 정공단(鄭公壇)에는 열녀애향비가 한쪽에 모셔져 있다
<참고사진>
동구 좌천동의 정공단(鄭公壇)에 있는 열녀애향비(烈女愛香碑)
정화기념비(淨化紀念碑)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충렬사 정화공사를 실시하여 현재의 규모로 보수, 정화한 후
임진왜란 때 부산지방에서 순절하거나 공을 세운 모든 선열의 위패를 충렬사로 옮겨
직책 또는 직위가 부여된 순서에 따라 신위를 모셨다
현재 충렬사에는 93신위(본전 89신위, 의열각 4위)를 모시고 있다
박정희 정부에의해 이루어진 충렬사 정화사업이 끝난 뒤
1978년 7월 21일 故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나무
나무를 심은 주인공의 신세를 닮았는지 5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나무는 가운데 둥걸이 잘려 더 이상 키가 크지도 못하고 볼썽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제 충렬사의 가장 중요한 본당인 본전(本殿)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충렬사 본전(本殿)
부산지역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국한 선열을 모신 사당이다
이 지역에서 전사한 선열 23인
동래읍성 · 부산진성 · 다대진성 및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한 무명용사 위패 4위, 의병 62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충렬사 제향은 1605년 당시의 동래부사 윤훤이
동래읍성 남문 밖의 농주산에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송공사(宋公祠)를 지어 제사를 지낸 것에서 비롯되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지내는데
제향을 10여 일 앞두고 역대 안락서원 원장으로 구성된 원회(院會)를 개최하여 제관을 선출한다
제향 당시의 안락서원 원장이 초헌관이 되며
제향의 절차는 ‘주례(周禮)’와 ‘예기(禮記)’ 등의 예법에 따라 만든 홀기(笏記)에 의해 진행된다
재단법인 충렬사 안락서원에서 매년 5월 25일 제향을 주관하고 있으며
충렬사 제향은 1979년 2월 2일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본전 내부
가운데는 수위(首位) 3신위로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첨사 정발, 다대진첨사 윤흥신을 모셨고
그 좌.우에는 배위(配位) 16신위를 모셨는데
조영규(양산군수). 노개방(동래교수), 문덕겸(호조좌랑), 양조한(호조정랑), 송봉수(군자감판관)
김희수(군자감판관), 신여로(중부참봉), 송백(예빈시주부), 김상(중부참봉) 등이다
1709년(숙종 35)에는 충렬공 송상현과 충장공 정발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 · 양조한, 비장 송봉수와 군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부민 김상 등의 위패를 모신 별사(別祠)를 옛 송공사 터(지금의 송공단)에 건립하였고
1736년 별사에 모셨던 분들을 지금의 충렬사에 모셨으며
1772년에는 다대진첨사 윤흥신을 추가로 모셨고
송상현의 첩 금섬, 정발의 첩 애향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당(의열각)을 세웠다
종위(從位) 70신위에는
별전공신 24인, 동래부 충복 철수, 동래부 충복 매동, 부산진 충복 용월, 수영25의용인, 합사 선열 18위를 모셨다
<참고사진1>
수영사적공원 25의용인의 신위를 모신 의용사(義勇祠)
<참고사진2> 수영사적공원 25의용인 의용비(義勇碑)
본전에서 내려다 보이는 조망
본전 옆 뜰에 있는 수령 350의 모과나무 노거수(老巨樹)
울퉁불퉁 특이한 모습으로 연륜을 나타내고 있는 나무 둥걸이 눈길을 끈다
이제 걷기 쉬운 산책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마지막 남은 군관청(軍官廳)과 망월산 정수리에 있는 동래읍성 동장대(東將臺)를 답사하러 가려는데
입산통제기간이라 입구를 가로막고 있다
군관청과 동장대는 입산통제가 풀리는 5월 15일 이후에 다시 올 수 밖에.....
임란 동래 24공신 공적비
임진왜란 당시 동래지역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선무원종공신 녹권에 등재된 공신 가운데 일본군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이 있는 24별전공신의 공적비이며
1988년 5월 14일 제막되었다
음료를 마시며 쉴 수 있는 휴게소와 안락서원 사무국 건물
봄을 맞아 나무초리마다 새순을 돋아 올리는 나무들 뒤로 장산이 모습을 보이고
아래에는 조그만 연못인 의중지가 보인다
의중지(義重池)
조그만 연못을 정화사업 때 개조하여 1990년 10월 20일 의중지로 명명하였다
보도블록 나무 담장에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명자나무(산당화, 아가씨나무) 꽃
이제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인 전등사로 간다
처음 충렬사 지도를 보았을 때는 전등사가 충렬사 경내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충렬사 담장 밖 망월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일반 사찰이었다
이름있는 전통사찰은 아닌 것 같지만 내친김에 전등사도 가 보기로 한다
/////////////////////////////////////////////////////////////////////////////////////////////////////////////////////////////////////////////////////////////////////////////////////////////////////////
전등사(傳燈寺)
부산 동래구 동래로215번가길 22-13 (동래구 안락동 978-1)
강화도에 있는 천년고찰 전등사와 이름이 같은 이 절은
동래고등학교 뒷편 망월산 중턱에 터를 잡고 있다
동네 주차장을 지나 입구에서부터 좁은 골목길을 한동안 올라가면...
이윽고 저기 절집이 모습을 보인다
전등사(傳燈寺)
범종루
전등사 대웅전
삼성각까지 골고루 갖춘 아담한 절집이다
청룡백호 산왕신(靑龍白虎 山王神)
석가여래 족적 첨례도
전등사에서 내려다 보이는 조망
안락동 일대 아파트단지의 시멘트 건물들만 줄줄이 보인다... 답답........
함부로 보지도 말고
함부로 듣지도 말라는데....
하나 빠진게 있다.... 함부로 말하지도 말라는 거 !